막1:29-34, 베드로의 장모

조회 수 13993 추천 수 24 2008.08.07 16:30:41
 

1995.2.5. 

베드로의 장모 (막1:29-34)


복음서는 예수님의 구원 사건에만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가족관계나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족이 조금 씩 등장합니다만, 그것도 주변적인 것이지 그 가족관계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가족이 그럴진대, 사도들의 가족들이야 두말 할 나위도 없습니다. 제가 아는 바로는 복음서에 사도의 가족 이야기가 두번 나옵니다. 하나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등장하여 하나님 나라에서 자기 아들이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습니다(마가복음10:35-45). 나머지 하나가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대로 베드로의 장모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서 매우 초기에 속합니다. 제자들도 네 명 밖에 부르지 않은 때이며, 아직 회당 출입이 자유로울 때입니다. 예수님의 초기 전도는 갈릴리 호수에 붙어 있는 어촌 가버나움에서 시작했습니다. 이제 차츰 넓은 지역으로 활동무대를 넓혀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 앞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가서 말씀을 전하셨고 귀신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회당에서 나와 예수님은 네 명의 제자들, 즉 야고보와 요한과 시몬과 안드레와 함께 일행 중의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회당에서의 활동으로 피곤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좀 쉬기 위해 들어가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그 집에는 시몬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런 사정을 예수님께 말씀드리자, 예수님은 그 여자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놀랍게도 열병을 앓던 베드로의 장모는 즉시 치료되었고, 예수님 일행을 시중들었습니다. 32절 부터 34절까지의 내용은 앞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그랬던 것처럼 많은 병자와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치신 이야기입니다. 21-28, 29-31, 32-34에 속한 세 가지 이야기는 한 가지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야적 권위를 갖고 계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귀신들리는 거나 병에 걸리는 걸 별로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마가는 그 어떤 질병이나 악한 영이라 하더라도 예수님의 권위 앞에 모두 굴복할 수밖에 없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런 신학적 고백을 진술하면서 구체적으로 베드로의 장모를 가운데 등장시켜 놓고 있습니다. 원래 베드로의 제자였든 마가는 베드로로 부터 생생하게 전해들은 이 이야기를 귀신축출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의 상황은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걸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열병 든 여자가 자기 집에서 몸조리 하지 않고 사위 베드로의 집에 와 있다는 점입니다. 더구나 마태나 누가와는 달리 마가는 이 집이 시몬과 안드레의 집이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이들 형제의 집이라면 베드로와 그의 처만 사는 게 아니라 그의 부모님과 여러 형제들이 사는 고향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열병 든 여자가 사돈댁에 누워 있다는 말인데 그게 자연스럽다고 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 경우를 가정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이 베드로의 장모는 남편을 일찍 잃고 외동딸만 데리고 살다가 시집을 보낸 후 아무에게도 의지할 데가 없어서 결국 사위집에 와서 살고 있는 중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열병으로 오랜 투병생활 중에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가버나움으로 잠시 다니러 왔을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베드로가 동생 안드레와 함께 예수님을 따라 나선 이후 부모들의 반대에 부딪쳤고, 아내도 말렸으며, 그런 가운데 장모도 정신 차리고 집안이나 잘 돌보라고 꾸짖기 위해 사위집에 머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고기잡이로 그럭저럭 살아가던 신몬 베드로가 어느 날 갑자기 나사렛 예수를 따라 모든 일거리를 걷어치우고 집을 떠났다는 사건 앞에서 그 집 식구들이 얼마나 황당했겠는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도 사실은 여기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고이 키운 딸을 출가시켰는데 아들, 딸 낳고 오순도순 살면 얼마나 좋을까만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으로 사람을 낚는다고 나사렛 예수를 따라 집을 나왔으니 장모의 복장이 터질 만도 합니다. 혹시 그녀가 딸 걱정 때문에 열병에 걸리지는 않았을까요?

여하튼 우리는 베드로의 장모에 관한 정보를 충분히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녀의 신상에 대해 이 이상 추정해 나가는 일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확실한 점은 그녀가 심한 열병에 걸렸다는 사실입니다. 이 여자가 걸린 병은 구체적으로 무엇이겠습니까? 성서는 단순히 열병이라고 일컫고 있지 그 이상은 말하지 않습니다. 팔레스틴에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열병으로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파상열로서 사람이 허약하거나 빈혈로 인해서 발병하게 되는데, 여러 달을 계속해서 열이 나고 심하면 죽게 됩니다. 두 번째는 간헐열로서 이는 장티푸스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세 번째는 말라리아가 있습니다. 요단강과 갈릴리 호수 주변에 숲지대가 많은데 여기에 학질모기가 자라고 번식했습니다. 이 병은 황달과 오한을 동반하기 때문에 환자는 대단히 고생을 겪게 됩니다. 영국의 성서학자 바클레이에 의하면 베드로의 장모는 아마 말라리아에 걸렸을 것이라고 합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보통 열병이 아니라 매우 심각한 열병입니다. 그 사실을 우리는 마가가 사용한 헤라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녀가 <누워있다>는 표현을 마가는 <카타케마인>이라는 헬라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질병에는 잘 사용되지 않는 것으로서 매우 위독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심한 열병에 걸린 베드로의 장모는 아마 온 몸이 불덩이 같았을 것이며, 땀을 비 오듯 흘렸고, 때에 따라 헛소리를 내지르기도 하다가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열병의 증상이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는 베드로의 장모처럼 열병에 걸린 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이 신경질적으로 변해간다는 건 우리가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작년에 우리 사회를 강타한 반인륜적이고 패륜적인, 그리고 파렴치한 사건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정신 차린 사회 속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읍니까? 그저께는 종교가 다른 어머니와 형수가 심하게 다투었다고 시동생이 형수와 어린 조카를 살해하고 자살한 사건이 터졌습니다. 다른 건 그만두고 가장 중요한 교육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매년 마다 우리는 온 나라 전체가 입시로 열병을 앓고 있습니다. 수능시험 때부터 전문대학 입시가 끝날 때 까지 수십만 명의 입시생들과 수백만 명의 가족들이 모두 불덩어리가 됩니다. 고3을 집에 둔 가정은 일 년 동안 숨 한번 크게 못 쉬고 애오라지 대학입시만을 향해 줄달음칩니다. 그건 분명히 열병입니다. 우린 모두 이런 식으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업을 할 때도, 운전을 할 때도, 자식을 키울 때도 눈에 불을 켜고 흥분한 상태에서 앞뒤 가리지 않고 서두르고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사는 게 잘못이라는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 이 사회, 공동의 선을 전혀 고려치 않고 자기를 중심으로만 생각하고 성취하려는 게 문제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열병을 치료해야 할 교회도 역시 그런 열병을 앓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워 질 때가 정말 많습니다. 70, 80년대에 우리 한국 교회는 세계가 놀랄 정도로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쾌속질주를 사회가 허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전체적인 기독교인의 숫자가 정체되었다는 통계가 있는데, 사실에 있어서는 감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정신을 바르게 차려서 무엇이 선교이며, 무엇이 교회이며, 무엇이 구원인지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전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교회는 정신을 차릴 준비를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한 가지 예만 들어보겠습니다. 케이블 TV 기독교 채널 선정과 관련된 그간의 일을 알고 계실 줄 압니다. 불교와 가톨릭은 아무 문제없이 이미 있었던 자기네들 방송국으로 결정했는데, 우리 개신교만은 일 년 동안 서로 자기가 해야 한다고 우기고 싸우다가 제 3의 방법으로 겨우 해결되었습니다만, 그 문제가 앞으로 법정으로 까지 비화될 조짐도 있다고 하니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거룩한 방송선교가 이런 싸움판으로 변한 데서야 어디 정신을 차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열병에 드러누운 베드로의 장모에 대해 예수님에게 전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그랬더니 병이 떠나갔다고 마가는 증언합니다. 아주 심한 열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아마 예수님이 방에 들어오시는 것도 채 알아채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그저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어떤 분이 손을 내미는 것을 느꼈을 뿐입니다. 뻗쳐오는 손을 희미하게 바라보던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맞잡았습니다. 그 순간 그녀에게 신유의 힘이 전달되었고, 온몸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면서 그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정말 이상한 일이 베드로의 장모에게서 발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한 이 사건을 다른 것과 비교할 때 매우 단순합니다. 예수님의 다른 치유행위는 경우에 따라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시기도 하셨고, 진흙은 침으로 이겨서 눈에 바르기도 하셨고, 침상을 들고 가라고 명령하시기도 하였으며, 아니면 돼지 떼를 사용하시기도 했습니다. 최소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번에는 기도도 없었고, 그녀의 믿음을 본 것도 아니며, 아주 간단히 손을 잡아 일으키만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사실은 병을 고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대개 상당히 요란스런 마술적 행동을 많이 했습니다. 주문을 외우거나 이상한 그림을 사용하거나 했습니다. 소위 말하는 <오버 액션>이 그 특징입니다. 요즘도 기독교 계통에서 그런 과잉행위를 밑받침으로 치유하는 곳이 있는 실정입니다. 예수님은 일절 그런 군더더기를 제하시고 그 능력으로 인간을 병으로 부터 구원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메시야적 권위입니다.

씻은 듯이 열병이 없어진 그 순간 베드로의 장모는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그 기쁨이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서도 고열과 두통에서 깨끗해진 경험을 하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어느 두통약 선전에 보니까 잔뜩 찌푸린 얼굴이 환하게 펴지는 모습을 담았더군요. 베드로의 장모도 아마 하늘로 날아갈듯 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을 것입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돈이나 권위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곧 구원입니다. 새로운 기쁨의 세계에 돌입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의 열병을 치료받았을 때 우리는 근본적으로 새롭게 변화된 세계에 살게 됩니다. 우리의 영혼이 참된 자유에 참여케 됩니다. 그럴 때만 우리는 살맛이 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오만상을 찌부리고 산다면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물론 살다보면 힘들고 짜증나는 일이 없을 수 없겠습니다만 우리 손을 잡고 계신 예수님을 진실로 의지하고 산다면, 그리고 그분의 손을 통해 이 세상을 이길 능력을 받기만 한다면 우리는 마음이 환한 세계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구원은 바로 그런 세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전하겠죠. 모두가 열병이 당연한 것으로 알고 사는데 예수님을 통해서 참된 기쁨을 안다는 것은 정말 그분의 은총입니다.

우리가 베드로 장모 이야기에서 주목해야 할 마지막 관점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31절의 끝 부분에 마가는 베드로의 장모가 치료받은 다음에 무얼 했는지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이 말씀은 전체 치유 이야기에 비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 합니다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놓치면 이 이야기의 반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열병에서 치료받은 베드로의 장모가 예수님 일행을 시중들었다는 사실이 바로 교회의 본질이라 해도 잘못이 없습니다. 섬김과 봉사는 바로 예수님의 능력이 임했다는 증거입니다. 그것이 바로 열병에서 치유되었다는 증거입니다. 한국 교회가 열병에서 치료되었다는 증거는 세상을 섬기는데 있지 권위를 내세우는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언가에 열병 들린 사람들처럼 살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정신 차리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우리 교회가, 우리 믿음의 식구들이 서로 섬기며 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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