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8:43-48 (혈루증 여인의 믿음)

조회 수 25649 추천 수 31 2008.08.18 20:42:21
 

1995.2.19. 

혈루증 여인의 믿음

눅8:43-48


어느 날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에게 와서 자기 형편의 딱한 사정을 말했습니다. 12살 먹은 딸아이가 죽을 병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집으로 가서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야이로가 왔을 때는 그의 딸이 아직 죽지는 않았는데 중간에서 지체 하다 보니 아예 죽어 버렸고, 나중에 가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이 중간에서 시간을 지체케 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로 어떤 여인에 관계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는 중간에 어떤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 여인은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던 여인인데 그 병은 거의 불치에 가까웠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는 틈을 비집고 들어가 예수님의 뒤에서 그의 옷자락에 손을 댔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혈루증이 즉시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돌아보시면서 여러 사람들을 향해 “내 몸에 손을 댄 자가 누군가?”라고 물었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한 사람이 없다고 대답하자, 항상 성질 급하게 행동하던 베드로가 앞에 나와 보충적으로 설명하기를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렸기 때문에 떼밀려서 그렇게 된 것이지 누가 일부러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고 하였습니다. 그럴듯한 대답이었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의도적으로 손을 댄 사람이 있다면서 당신에게서 능력이 나간 걸로 보아 확실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순간 혈루증이 치료된 여인이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한편으로 무서워하면서 사람들 틈에서 빠져 나와 예수님께 그간의 자초지정을 상세하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이 여인의 믿음이 무엇이길래 자기를 구원할 수 있었을까요? 이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이 여인이 처한 상황을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이 여인은 혈루증으로 오랫동안 고통을 받아왔습니다. 오늘 본문은 막5:25-34과 마9:20-22에도 병행구로 나오고 있습니다만, 마가복음에 보면 이 여인이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병원에 드나들다가 자기 전 재산을 없애 버렸다고 합니다. 혈루증은 레위기서 15:19-33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대로 부정한 병이었습니다. 25절 이하의 말씀을 잠간 읽어보도록 합시다. <여인의 피의 유출이 그 불결기 외에 있어서 여러 날이 간다든지 그 유출이 불결기를 지나든지 하면 그 부정을 유출하는 날 동안은 무릇 그 불결한 때와 같이 부정한즉 무릇 그 유출이 있는 날 동안에 그의 눕는 침상은 그에게 불결한 때의 침상과 같고 무릇 그의 앉는 자리도 부정함이 불결의 부정과 같으니 이런 것을 만지는 자는 무릇 부정한즉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가지 부정할 것이요.> 여인의 하혈이 이렇게 엄격하게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던 시대에 12년 동안이나 피가 멈추지 않았으니 그 여인의 고통이 얼마나 심각했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재산을 다 날렸다는 마가의 증언도 사실에 가까운 것이며, 아마 그녀의 남편도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12년 동안이나 가까이 갈 수 없는 여자와 함께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을 찾아올 때 이 여인은 절망의 끝에 도달해 있을 때였습니다. 가정생활도 정상적으로 할 수 없었고 있는 재산도 다 없어진 상태에서 여인의 몸으로는 아무 해결책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여인의 믿음은 이런 절망의 시간에 만들어졌습니다.

이 여인이 경험한 그런 절망의 시간들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 생각이 나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절망적인 순간의 경험은 우리에게 참된 신앙을 선물로 주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 기회를 잘 사용하기만 하면 그렇습니다. 에이미 카미카엘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축복하시고자 할 때면 언제나 사탄의 강력한 종인 <절망의 악마>가 먼저 그 사람을 찾아와 그에게 온갖 종류의 비참하고 절망적인 생각들을 불어넣으려고 애쓴다. 정말은 언제나 아래로 부터 온다는 것을 명심하라. 이에 반해 위로는 언제나 위로부터 온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여러 시련과 아픔들, 혹은 절망의 사선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참된 신앙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앙을 얻기 위해서는 일부러라도 절망적인 사건 속에 빠져 들어야 하는 걸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내면적인 세계의 눈을 바르게 떠서 하나님의 진정한 구원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모든 인간의 현실이 절망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행위가 사실은 아무런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우리의 인생설계가 착착 진행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요?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이런 현실을 깊이 통찰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삶을 다음과 같이 비유하고 있습니다. 어떤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우물에 빠졌는데 다행히 중간에 뻗어 나온 나뭇가지에 매어 달릴 수 있었습니다. 우물 밑에는 독사들이 득실거리고 위에서는 호랑이가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이 나그네는 나뭇가지에 핀 꽃 속에서 꿀을 빨아 먹고 한숨을 돌리고 있는데 생쥐들이 나뭇가지를 갉아먹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그렇게 비관적으로 볼 필요가 있는가, 라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겠습니다만 일단 그것이 사실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우리 곁에는 항상 절망의 그림자가 따라 다니고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별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살아가다 만나는 어려운 일은 물론이고 어느 누구 가릴 것 없이 죽음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아시안 게임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송성일 선수의 죽음을 보면서 우리가 무얼 생각합니까?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약속하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다면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의 삶은 절망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이란 게 별게 있나 다 그런 거지!”라고 말한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무관심하다면 이 설교를 들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2. 혈루증으로 고통 가운데 빠져있던 이 여인은 오직 하나의 희망을 안고 예수님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녀는 아마 소문으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고, 어쩌면 예수님의 설교를 직접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야이로의 집으로 몰려가고 있는 예수님 일행을 발견하고 그 무리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누가 볼까 염려하면서 예수님의 뒤로 가서 옷깃을 손에 댔습니다. 그 즉시로 12년 동안 앓던 혈루증이 깨끗이 치료되었다고 누가는 증언합니다. 이 여인의 믿음은 겸손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자세입니다. 웬만했으면 12년 동안 병을 앓았기 때문에 체면이고 뭐고 가릴 것 없이 그냥 예수님 앞에 넙죽 절하면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쳤을 텐데 이 여자는 대단히 조심스럽게 예수님에게 왔습니다. 누가 나의 몸에 손을 댔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을 받고도 선듯 나서지 못했습니다. 나중에야 할 수 없이 두려워하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뻔뻔스러움을 믿음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사람 눈치 안보고 무조건 예수님의 이름으로 돌진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불의한 재판장을 설득한 어떤 과부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런 비유를 앞세워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기독교 신앙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적극적으로 생각한다는 거야 좋은 말입니다만 그게 심해서 자기를 앞세우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큰 도시의 지하철이나 역전에서 큰 소리로 예수 믿고 천당 가라고 외치는 걸 용기로 생각한다면 문제입니다. 주위 사람들이 불편해 하는데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야밤중에 큰 소리로 기도한다거나, 남이 곤히 자고 있는 시간에 찬송가를 크게 틀어놓는다는 행위가 결코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믿음은 그렇게 자기를 드러내는 게 아니가 감추는 것입니다. 소리를 작게 해야 하며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누룩처럼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순간에 주위를 변화시키는 힘이 바로 복음이며 신앙입니다.

혈루증 여인의 이 모습을 보고 오늘 우리는 믿음이 무엇인지 배워야 합니다. 믿음을 가진 자는 자기 자신의 부족하다는 사실을 점점 더 깨닫게 됩니다. 도저히 자기를 드러낼 자신이 없습니다. 점점 더 겸손해 집니다. 우리는 조금만 마음이 뜨거운 경험을 하게 되면 혼자서 세상을 다 구원해 낼 것처럼 행동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믿음이 모두 작아 보입니다. 교만과 용기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믿음은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혈루증 치료가 마술이 아님을 복음서 기자들이 변호하고자 합니다. 모든 세대, 모든 종족에 이런 병의 치유는 항상 있어왔습니다. 지금도 무당들이 병을 고쳐 주겠다고 유혹합니다. <일련정종>은 노골적으로 어려운 병에 걸린 사람들만 찾아가서 치료해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마술이나 사이비 종교에서 말하는 치유는 단순히 치유에만 몰두합니다. 그가 얼마나 윤리적으로 사는가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치유는 일종의 마술행위입니다. 복음서에서 증거되고 있는 많은 치유는 그런 것과 근본적으로 차원을 달리 합니다. 조금씩 경우는 다를지라도 환자와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본문의 혈루증 여인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그녀의 믿음은 예수님의 인격과 관계된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그곳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예수님과 이 여인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이루어졌습니다. 오직 그녀만이 예수님의 능력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특별한 인격적 관계, 이것이 곧 믿음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경험이 정말 필요합니다. 이런 것이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저 교회 형식에 충실하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믿음이 될 수는 없습니다. 혈루증 여인이 그곳에 왔을 때 아무도 주의하지 않았으며, 그 여인도 어떤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오직 예수님만을 생각하였고 기껏 가까이 간다는 것이 옷깃에 손을 대는 것이었습니다. 옷깃만 만졌든지 아니면 직접 손을 잡았던지, 혹은 예수님이 그녀에게 안수하였든지 그것은 이 자리에서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향한 유일한 관심을 가졌고 그를 통해서 새로운 능력을 체험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 있으면서 대개 주변적인 일에 너무 관심이 많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누가 회장이 됐는가, 누가 무슨 말을 했는가, 누가 믿음이 있다거나 없다는 그런 식의 일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에 그런 일상적인 일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끄고 살아갈 수는 없겠지만 가능한대로 그런 면을 줄이고 예수님에 대해 집중하는 시간을 늘려가야 합니다. 많은 무리가 이동하고 있었지만 오직 예수님을 향해서만 마음을 쏟았던 혈루증 여인처럼 우리는 그분이 나와 무슨 상관인지 진지하게 질문하고 대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생활을 하면 당연히 예수님을 생각하는 게 아닌가 하고 말할 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런 의지를 가질 때만 우리에게 참된 믿음이 자라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4. 예수님은 혈루증 여인을 향해 “평안히 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받은 여인은 이제 평안의 선물을 받게 되었습니다. 구원이란 곧 평안입니다. 하나님의 평안입니다. 이 여인에게 구원은 혈루증이 치료된 데서 머문 것이 아니라 평안의 세계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그점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대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육체적 질병을 치료받거나 집안이 잘되는 것을 기대합니다. 그것이 잘못은 아닙니다만 더 중요한 구원의 세계는 영적이고 내면적인 평안입니다. 우리가 외적으로 안정되고 풍요롭게 살려는 것도 역시 내적인 평안을 위해서 그렇습니다. 이 여인의 믿음은 결국 혈루증을 고침받고 나아가 평안의 선물도 받게 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평안의 세계에 들어갑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세상 지식으로 살 수 없는 영적인 평안을 선물로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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