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 23:20-33, 고난 극복의 지름길

조회 수 5661 추천 수 0 2009.07.11 22:36:07

 

1995.4.2. 설교 

고난극복의 지름김(출23:20-33)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빠져 나온 후 얼마나 심한 고생을 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말이야 그럴듯하게 <영광의 탈출>이라고 붙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실상은 매우 비참했습니다. 출애굽기가 알려주는대로 보면 바로 왕이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에 나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도록 허락했습니다. 동이 트자마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많은 식구들고 함께 부리나케 밤새 준비하여 먼 길을 떠났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서 뒤따라 오는 바로의 마병들 때문에 거의 죽을 뻔 하다가 홍해가 갈라지는 사건으로 바로의 군사들을 따돌리고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광야에 내팽겨져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당혹했을까요? 어린 아이로 부터 노인들에 이르기 까지 먼길을 여행하기에 힘든 이들 까지 포함해 그 많는 사람들이 확실한 생존의 근거도 없이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끔찍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의 생존을 도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만 광야에서 만나는 어려움이 어디 그런 것 뿐이었겠습니까? 그들은 광야에서 먹을 물 때문에, 혹은 전염성 질병 때문에, 주변 부족들의 군사적 위협 때문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난을 받았습니다.

이제 광야생활을 끝내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나안 땅에는 이미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보다 더 많은 갈등을 겪게 될지도 모릅니다. 광야에서의 생활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수 있었지만 가나안에서는 터잡고 살아야하기 때문에 확실한 문제해결이 없다간 이스라엘 민족 자체의 생존이 위태롭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만약 이런 저런 고난이 전혀 없는 삶을 원하다면 그는 이 세상에서 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고난을 당한다는 것이 곧 인간실존입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말할 것도 없고, 건강을 잃는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심한 경우에는 자식이 자기 보다 먼저 죽기도 합니다. 아마 우리 인생을 총결산 해 보면 기쁜 일 보다는 고통스런 일들이 더 많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기쁘고 좋은 일은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지만 고통은 오래 남기 때문에 그렇기도 합니다.

우리 인간의 고난은 우리의 생활조건이나 주변환경이 좋아진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고,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매우 과격한 힘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 40년 생활에서 모든 고난이 끝난게 아닙니다. 어쩌면 그들은 그걸 내심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이 정도 고생했으면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편안하게 살 수 있겠거니 생각했겠죠. 광야에서는 겨우 유목생활을 하면서 양을 쳐서 먹고 살았겠지만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곳에 정착하기만 하면 그야말로 아무 걱정과 근심을 하지 않고 살 수 있겠다고 말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조금 살아가기가 편해 진다해도 역시 인간은 고난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광야나 가나안이나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아주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만 헛된 꿈을 꾸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세계화>라는 구호에 어울린 나라가 되려고 무진 애를쓰고 있습니다.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발돋움 할 것도 같습니다. 보리 고개를 넘은 지 한참이나 되었고, 아시아에서는 손꼽힐 정도로 잘 살게 되었다고 말들하고, 우리도 실제로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목표는 미국이나 노르웨이나 독일, 스위스 같은 나라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정말 멋질 것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선진국 대열에 끼게 된다면 고난과 시련이 없을까요? 그건 잘못된 환상입니다. 지금 보다 다섯 배나 잘살게 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고난은 남습니다. 약간 씩 모양을 달리할 뿐 고난은 우리의 그림자 처럼 따라 다닙니다.

다시 떠올리기도 민망스럽습니다만, 얼마 전에 있었던 김성복 교수의 부친 살해 사건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게 되었습니까? 밖에서 보면 남부러울 게 하나도 없는 집안이었습니다. 학교 이상장 집에다가 서울시내에 고층 빌딩을 두개나 갖고 있는, 수백억 원 대의 자산을 갖고 있는 집안입니다. 더구나 자식들을 잘 키운 것으로 소문이 나기도 했습니다. 아무 것도 부러울 것이 없는 것 같은 집안에도 여전히 고난과 불행의 싹은 자라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부러워 하는 모든 조건들이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하게 만들고 평화롭게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잘난 사람이나 못나 사람이나, 잘 사는 나라나, 못사는 나라나 그 어떤 사람, 그 어떤 나라에도 고난과 아픔이 숙명 처럼 따라다닙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그들이 광야 생활을 끝내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가서 어떻게 살아야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과 실천 사항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모든 문제는 결국 하나로 모아집니다. 그것은 곧 이방신을 섬기지 말고 하나님 여호와만 섬기라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오직 이 길이 유일한 길이며, 바른 길이며, 지름길입니다.

24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너는 그들의 신을 숭배하지 말며 섬기지 말며 그들의 소위를 본받지 말고, 그것들을 다 훼파하며 그 주상을 타파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게 될 가나안 땅에는 23절에 기록된대로 여섯 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모리, 헷, 브리스, 가나안, 히위, 여부스 족속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들의 신을 숭배하지 말고, 그들의 행위을 본받지 말고, 그것들을 다 훼파하라고 세 가지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명심해야 할 가장 중한 계명입니다.

우리가 오늘 살아가는 세상은 가나안과 같습니다. 특히 우리 나라가 이제 어느 정도 잘살게 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삶의 뿌리가 없이 고생하던 광야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토지를 갖게 되었다는 건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것과 비슷합니다. 아마 개인적으로도 아주 힘든 광야생활에서 어느 정도 풍족한 가나안 생활로 바뀐 분들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야 할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살고 있던 이들은 풍족한 생활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그저 즐겁게 사는 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오늘 우리 한국에 살고 있는 대개의 사람들도 역시 경쟁적으로 물질적 풍요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그랬던 것 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역시 인간의 물질적 만족감을 채워주는 그런 신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가나안이나 우리 대한민국이나 똑같이 <경제 이데올로기>에 빠져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을 극복하려면 그런 걸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주 역설적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걸 취해야 안전하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그걸 조심해야 안전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들 처럼 <돈이면 다된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키신다는 믿음이 우리를 살립니다. 도대체 인간이 그렇게 의지하기 좋아하는 모든 재물은 누구의 것입니까? 인간이 먹어야 할 양식과 마셔야 할 물은 누가 만드셨습니까? 하나님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백성들의 신과 그들의 행동을 거절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하지만 실상은 세상의 신을 섬기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기준은 세상적으로 굳어져 있으면서 형식적으로만 하나님을 찾고 있는 건 아닐까요? 하나님은 가나안의 그것들을 모두 훼파하라고 명령하시는데, 과연 우리가 그렇게 할 용기를 갖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살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가나안의 풍속을 따르지 않아야만 한다는 그 길입니다. 그 길은 오늘 우리에게도 역시 만드시 필요한 길입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신 하나님이 오늘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구원을 길을 열여가고 있을 것입니다.

가나안을 따르지 않는다는 말은 소극적인 말이며, 더욱 적극적인 말은 25절에 있는대로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 일입니다. 가나안을 피하는 일은 억지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가나안은 인간의 욕심대로, 자연적인 인간이 추구하는 그런 삶을 보장하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는 가나안의 삶을 따라가게 됩니다. 억지로 그 길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가나안을 따라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우선 여호와를 섬기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굳건히 설 때만 우리는 세상의 욕심에 치우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약한 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저 사람은 참 양심적인 사람이야.”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엔가 비인격적인 행동을 할 때가 많습니다.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그럴듯하게 보이드라도 실제로 인간은 자기 자신도 주체하지 못합니다. 가나안의 신은 그런 인간의 약점을 파고드는 세력입니다. 잘 살게 해준다는 약속을 하면서 자기에게 매이도록 만듭니다. 오늘 32,33절의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너는 그들과 그들의 신과 언약하지 말라. 그들이 네 땅에 머무르지 못할 것은 그들이 너로 내게 범죄케 할까 두려움이라. 네가 그 신을 섬기면 그덧이 너의 올무가 되리라.” 이 말씀은 3천년 전에 되어지 말씀입니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합당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그런 약속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습니다. 전자제품, 여성미용용품, 각종 은행상품, 건강 및 레저 프로그람 등 우리를 즐겁게 만들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이런 약속들이 우리의 생활수준이 높아질 수록 더욱 늘어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른지 도저히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가나안의 많은 약속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것에 치우치게 된다면 그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올무가 될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할른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그런 교양을 높이는 일에 빠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새로운 약속입니다. 그 약속은 우리를 진정으로 살리는 약속입니다. 잠시 우리를 정신 나가게 만들거나, 그 무엇엔가에 취하도록 하는게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우리는 살리는 그런 약속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약속이며, 동시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은 이스라엘 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역시 유효합니다. 그 하나님의 명령, 그 약속에 바로 거하게 될 때 우리는 전혀 새로운 삶의 세계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만 우리는 가나안과 같은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을 참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고난 극복의 지름길입니다. 약간 돈을 적게 갖고 살아가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믿고 살아갈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장되는 일들이 다음과 같습니다. 25절 이하에 보면 그 당시 사람들이 생존하기 위해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이 무엇인지 나열되어 있습니다. 양식, 물, 질병, 낙태, 임신, 그리고 살만큼 사는 것들입니다. 이런 문제들은 인간의 복지 이전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요소들입니다. 먹고, 마시고, 건강하고, 자녀를 낳고, 천수를 누리는 일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려주신 약속과 축복은 아주 크게 잘살거나 두드러지는 그런 일이 아니라 이 땅 위에서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그런 것들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장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것이 보장되지 않을 때 우리는 정말 이 세상살이에 지쳐버립니다. 그런 것이 바로 고난입니다. 다른 사람 보다 크게 부자가 되지 못해서 근심하고 염려하는 것을 고난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최소한의 조건을 보장해 주십니다. 가나안의 신을 섬기지 않고, 그들의 행동을 따르지 않으며, 하나님을 섬길 때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땅 위에서 어떻게 살다가 죽는게 가장 옳겠습니까? 가장 행복하겠습니까? 어떻게 살아가는게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첩경이 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 여호와만을 섬기십시요. 그 분의 말씀 안에 거하십시요. 가나안 신과 같은 이 세상과의 약속으로 인해 올무에 빠지지 말고 삽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어떤 고난이라고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만 신뢰하고 사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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