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



태초가 언제쯤일까? 우주물리학자들은 우주의 나이가 줄잡아 1백10억년쯤 된다고 하는데, 창세기 1장1절이 가리키고 있는 태초가 이 시기를 말하는 것일까? 어떤 점에서 이런 질문은 별로 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우주물리학자들의 이런 계산법이 얼마나 정확한지 우리가 잘 모를 뿐만 아니라 설령 그게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성서는 이런 물리학적 사실을 분석하고 증명하려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리학은 객관적 사실만을 중하게 여기지만 성서와 신학은 물리적 사실 그 너머에 관심을 둔다. 성서가 늘 중심 주제로 붙들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가시적 형태가 아니라 그것 너머에 있는 분으로 서술된다는 말이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인간의 몸만 지배하는 세상의 권력을 두려워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영에 이르기까지 모든 삶을 지배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비록 구약성서에 하나님이 불이나 바람같이 어떤 게슈탈트(형태)나 물리(피직)적 사물로 형상화 될 때가 있긴 하지만 그런 것들은 대개가 하나님을 직접 묘사한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어쩔 수 없는 현상학적 서술일 뿐이다. 즉 폭풍 자체가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막강한 힘으로 서술하기 위해서 끌어온 상징일 뿐이다. 결국 성서는 물리 세계를 뛰어넘는 세계에 영원히 참된 것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신학은 메타-피직(Meta-Physik)이다.

그렇지만 신학과 신앙이 물리적 세계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사실상 이런 물리적 사실과 상관없는 메타피직(형이상학)은 가능하지 않다. 일단 우리의 감각세계 안에 들어온 세계는 이런 피직밖에 없으니까 아무리 그것 너머의 사실이 참되다고 하더라도 역시 이 피직을 근거로 해서 언급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만약 피직을 근거로 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 너머의 세계를 말한다면 그것은 단지 추상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서의 언어를 매우 구체적으로 명백한 물리적 현상 가운데서 해명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런 토대 없이 막연한 말로만 성서 언어를 치장하기 시작하면 기독교는 점점 보편적 타당성을 상실하는, 그래서 매우 개인적, 심리적 차원의 종교에 머무르고 말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신학은 끊임없이 철학과의 대화를 시도해나가야 할 것이다. 다만 신학은 철학과 비슷한 인식과정을 통해서 그들과는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즉 플라톤의 이데아와 하이덱거의 존재, 그리고 장자의 도가 바로 성서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논증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신학은 늘 전체 세계를 자기 사유의 화두로 삼고 있어야한다. 이미 구약성서가 "태초"라는 말로 이런 사유의 단초를 제공했다.

마틴 루터의 번역본에는 창세기 1장1절이 이렇게 시작된다. "Am Anfang". 안팡이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시작, 시초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요한복음 1장1절에도 똑같이 등장한다. 단지 요한복음에는 전치사가 "in"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여기서 태초, 또는 시초, 처음이라는 단어는 당연히 가시적 우주가 만들어지는 순간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창세기의 창조기사가 전승되던 그 시기의 사람들은 지중해 연안의 세계를 모든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늘의 해와 달, 별들도 역시 자기들이 거처하고 있는 그 대지에 속해있는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생각한 태초는 분명히 그들이 확인할 수 있는 세계의 시작만을 의미한다. 그들의 감각 세계에 들어온 우주 이외에도 더 큰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던 그들은 그런 범주 안에서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 세계가 시작되기 이전에는 아무 것도 있을 수 없었다. 이 태초에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태초는 그 이전에 아무 것도 없었다가 무언가 존재하기 시작하기 시작한 그 순간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아무 것도 없는 상태가 무엇이지 알지 못한다는 데에 있는 것 같다. 아무 것도 없었다니! 우리가 현재 경험하는 것들은 어떤 원인에 의한 결과의 사슬고리인데, 이런 것들이 완전히 배제된 상태를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애당초 가능하지 않다. 여기 내 앞에 볼펜이 있다. 이게 그냥 여기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게 여기 있게 된 여러 원인들이 앞서 있었다. 내가 볼펜을 누구에게 얻었든지, 가게에서 사 왔을 것이다. 이 볼펜은 공장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볼펜 공장은 그 원료를 어디선가 구입해왔다. 이렇게 계속 따지고 들어가보면 볼펜은 결국 지구의 안에 있는 물질일 뿐이다. 물론 더 소급해본다면 태양이 만들어질 때의 그 가스들이 이 볼펜의 원인일 수 있다. 이처럼 지구 안에 있는 모든 사물은 이런 원인과 결과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출현한 것들이다. 지구 밖에서 들어온 혜성 조각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그런 물리적 원인에 의한 것이다. 우주의 별들이 생성되었다가 사라지는 현상도 역시 우리가 아직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그 어떤 물리적 작용에 의한 결과이다. 정확한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소위 "나비이론"이 그것 아닐까? 미국의 한 들판에 있었던 나비의 날개짓이 원인이 되어 결국 우리 나라에 태풍을 몰고 올 수 있다는 이론 말이다. 단지 우리가 그 과정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할 뿐이지 결국 모든 사태와 사물은 어떤 원인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성서는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이 세상이 창조되었다고 증언한다. 즉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이다.

어떻게 무로부터 유를 창조할 수 있단 말인가? 그거야 하나님이니까 할 수 있지, 하고 대답하면 아주 간단하게 처리될 수 있긴 하지만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는 별로 설득력이 없다. 일단 우리는 무엇이 있는 상태와 없는 상태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는다는 데에서 이런 혼란이 제기되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는 우리의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만을 존재하는 것으로 여길 뿐이지 그 이외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지구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강, 산, 곤충, 짐승, 별 같은 사물을 존재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또는 인간의 여러 정신과 심리 활동도 역시 이런 존재하는 것들의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정말 존재하는 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훨씬 깊은 차원이 아닐까? 또는 아직 존재하지는 않지만 앞으로 존재하게 될 그 어떤 것이 훨씬 확실한 존재가 아닐까? 성서의 하나님을 가리켜 이미 존재하는 분이며 동시에 앞으로 존재하게 될분이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이런 존재 방식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신다. 우리가 "있다", 또는 "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런 존재 양식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성서는 그런 상태를 언어로 그려낼 수 없기 때문에 거룩, 영광, 존귀 같은 용어로 표현하고 있을 따름이다. 궁극적 진리를 완전히 담아낼 수 있는 인간 언어는 가능하지 않다. 어쨌든지, 이런 점에서 태초는 오늘의 존재양식과 전혀 다른 존재양식을 구분할 수 있는 한 기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그 다른 존재양식을 확인할 수 없으니까 무라고 부를 뿐이다.

우리의 생각을 약간 돌려서 보면, 창조론은 사실 종말론과 연장선상에 있는 개념이다. 이 세계의 창조는 곧 이 세계의 종말에 완성되니까 말이다. 기독교 신학에서 종말을 가리켜 이 세상의 마지막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의미이다. 이 세상이 끝난다는 것은 모든 게 완전히 끝나는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시작된다는 뜻이다. 새예루살렘의 시작이다. 요한계시록에서 표현되고 있듯이 우리의 상상력이 가 닿을 수 없을 정도로 새로운 생명세계의 시작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무라고 생각하는 태초 이전의 세계와 종말 이후에 시작될 새로운 세계 사이인 그 과도기를 살고 있는 것이다.

물리학에서는 태초에 "빅뱅"(대폭발)이 있었다고 하는데, 창세기는 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고백한다. 빅뱅이나 태초(아르케)나 모두 한 점을 가리킨다는 것은 참으로 우연한 일치인지 당연한 논리인지 모르겠지만, 어떤 면에서 여기에 바로 물리학과 신학의 접점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어쨌든지 이 세상을 하늘과 땅이라는 구도로 본 것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마찬가지이다. 조금 더 나아가서 하늘과 땅과 지하라는 삼층 구조가 고대인들의 우주관이었다. 지금 우리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 위에 있는 하늘과 인간이 살아가는 땅과 인간 밑에 있는 지하의 세계라는 이런 구조는 이미 지나간 패러다임이다. 우주 전체를 보면 위도 없고 아래도 없고, 동서남북도 없다. 이제 우리는 창조론에 대한 이해를 좀더 새롭게 전개해야 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다. 도대체 지구로부터 수십 억 광년 떨어진 곳에 별들이 생성되고 사라지게 할 이유가 무엇인가? 이런 우주 현상을 기독교의 창조론이 어떤 식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참으로 어려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문제를 본격적으로 풀어나갈 만큼 이 세상과 우주의 비밀이 드러나 있지 않은 상태이니까 우리는 조금 더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지금 인간의 우주 탐험은 거의 초보단계이다. 무인 우주선은 금성과 화성, 목성 근처까지 갔지만 유인우주선은 겨우 달에 흔적을 남겼을 뿐이다. 앞으로 수천, 수 만년이 흘러야 태양계 밖의 우주에 발을 디딜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마저도 아예 불가능할지 모른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빛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너무나 광대한 우주를 "하늘"이라는 단 한마디로 정의해버린 고대인들에 비해서 우리는 조금 더 철이 들긴 했지만 그 세계를 여전히 모른다는 점에서는 도토리 키재기이다. 이런 상태에서 창조 문제를 억지로 풀어내는 것보다는 그 세계가 우리에게 좀더 가까이 올 때까지, 또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 세계가 완성될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게 훨씬 지혜롭다. 즉 창조론의 자리를 우주에 설정하기는 오늘 인류의 지혜가 너무 부족하니까 일단 지구 현상 안에 두는 것이 옳지 않은가 하는 말이다. 다만 앞으로 점차 열리게 될 우주 현상에 대해서 우리의 생각을 열어두는 일만은 분명히 해야한다.

이 글을 마쳐야겠다. 태초는, 더 정확히 말해서 태초 이전은 인간 자체가 태초 이후 현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인식해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종말 이후는 오늘 우리 인간의 생명 현상 이후의 세계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식 대상이 될 수 없다. 다만 태초 이후와 종말 이전의 이 세상은 태초 이전과 종말 이후를 이어주는 다리이기 때문에 이 세상을 잘 읽을 수 있다면 부분적으로나마 그 이전을 해석할 수 있고, 이 이후를 예감할 수 있을 것이다. 겨우 80년밖에 살지 못하는 인간 주제에 1백10억년이라는 그 엄청난 태초의 시간을 생각한다는 것은 오만방자한 일일지 모르지만, 다른 한편으로 태초로부터 이 시간에 이르는 그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와 생명역사를 약간이나마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영적인 존재로서의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지적 희열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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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21 17:16:32

어제 천기누설 무릎팍 도사에 출연하신 엄홍길 대장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산이 허락하지 않으면 인간은 절대 산에 오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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