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여, 있으라!

조회 수 5259 추천 수 89 2004.06.30 22:51:41




빛이여, 있으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 1:2,3)



창조의 단초

창세기에 기록된 창조 순서는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우선 순서대로 적어보겠습니다. 1) 빛, 2) 하늘, 3) 땅과 바다와 식물, 4) 태양과 달과 별, 5) 물고기와 새, 6) 짐승과 인간. 그리고 마지막 칠일 째는 쉬셨다고 합니다. 소위 엘로힘 문서로 분류되는 이 이야기는 주로 인간 창조에 중심 무게를 두는 야웨 문서와 달리 지구와 우주의 생성 과정을 비교적 상세하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창조의 앞머리에 "빛"이 등장합니다. "빛이여, 있어라." 말씀하시니 빛이 생겼다고 성서 기자는 증언합니다.

구약성서가 기록될 당시의 사람들은 빛의 물리적 성질을 거의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초등학생들도 빛이 일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을 돈다는 사실은 대개 압니다. 그 속도는 자그마치 초속 30만 킬로미터입니다. 시속 1천 킬로미터로 나르는 국제선 비행기가 이 거리를 비행하려면 12일이나 걸립니다. 보통 우주의 거리를 계산할 때는 너무나 크니까 광년이라는 단위를 쓰는데, 1광년은 30만 킬로미터 곱하기 3천6백(초) 곱하기 24(시간) 곱하기 365(일)를 해야합니다. 대략 9조4천6백억 킬로미터입니다.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별은 2광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빠른 비행기를 만들어낸다고 하더라도 다른 별을 탐색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지금 인간이 쏘아 올린 무인 우주 탐사선은 기껏해야 태양계 안에서 움직일 뿐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태양계를 스스로 벗어나는 일은 영원히 불가능하고, 대신 밖에서 우리 안으로 들어와야 하고,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 뿐이겠지요. 어떤 분들은 앞으로 기술문명이 훨씬 발달하게 되면 태양계를 벗어나 명실상부하게 우주를 여행할 수 있게 될 것으로 믿겠습니다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초속에 거의 버금가는 비행물체를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핵을 통해서 무한한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광속을 낼만한 질량의 물질이 지구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거의 블랙홀 정도의 질량을 갖는 물질이 있어야만 광속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태양과 별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우주 상식이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태양과 별을 다르게 본다는 것입니다. 저는 한 학기 강의가 시작될 때 학생들의 호기심을 집중시키기 위해서 간혹 "태양과 일반별의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합니다. 평소에 이런 것에 대해서 관심이 없이 살았기 때문인지 대개의 학생들은 쉽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아니면 너무나 뻔한 질문을 무엇 때문에 하는가, 하고 속으로 괴이쩍게 생각하는지도 모르지요. 어쨌든지 대답을 재촉하면 학생들에게서 나오는 답들은 대개 이렇습니다. 태양은 크고 별들은 작다. 태양은 직접 빛을 내지만 별들은 빛을 반사한다. 태양은 가깝지만 별들은 멀리 있다. 학생들의 머리 속에는 태양과 별들이 전혀 다른 것으로 각인되어 있는 것 같은데, 이게 큰 착각입니다. 태양이나 별은 완전히 똑같습니다. 태양도 밤하늘에서 은빛 모래를 뿌려놓은 듯이 보이는 많은 별들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아마 학생들은 별들이 수성이나 금성처럼 태양에 붙어 있는 떠돌이별쯤으로 보이는가 봅니다. 태양과 별이 똑같긴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한 가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별들은 떠돌이별이 없지만 태양은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태양의 빛만 생명의 근원이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떠돌이별이 없이 단지 불을 토하는 별만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그곳에서는 생명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약간 말이 옆으로 흘렀습니다만, 태양의 빛은 이 우주 가운데서 거의 유일하게 생명의 에너지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만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입자인가, 파동인가?

태양 빛은 무엇일까요? 물리학적으로도 그것이 입자인지 파동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참 이상하지요? 그렇게 잘난 물리학이 이것 하나 풀어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입자는 말 그대로 독립적인 물질로 작용하는 것이지만 파동은 다른 물질에 기대어 어떤 운동으로만 작용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예컨대 물은 수소와 산소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입자의 무리이지만 파도는 파동입니다. 바람도 역시 공기라는 입자를 통한 파동입니다. 그런데 파도와 바람은 유리판으로 막아놓으면 사라지지만 빛은 그것을 초월하는 성격이 있다는 점에 근본적으로 다른 현상입니다. 비닐 하우스 안에서는 바람이 없고 단지 빛만 운동합니다. 그런데 빛은 어떤 방식으로 태양에서 지구까지 올 수 있을까요? 대충 8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는 그 긴 거리를 어떤 방식으로 달려옵니까? 파동이라면 그 사이를 연결시켜줄 만한 어떤 물질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태양과 지구 사이에는 그런 물질이 없습니다. 바람은 공기를 이용해서, 파도는 물을 이용하지만 빛은 그렇게 이용할만한 물질이 없습니다. 별로 깊이 알지도 못하는 이런 물리적 문제는 접어두고, 성서가 창조의 순서에서 빛을 앞머리에 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영적인 시각을 열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생명의 근원

고대인들도 역시 빛을 생명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바로 창조의 순서에 빛이 제일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 이유에 대한 대답일 것입니다. 아마 창세기 기자를 포함해서 고대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삶과 죽음에 이르는 자연 현상에 대해서 깊이 숙고했겠지요. 소위 호모 사피엔스인 인간의 조상들로부터 시작된 인간의 사유는 근본적으로 생명에 집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생명체가 죽는다는 엄연한 현실 앞에서 생명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음을 의미하는 밤이 왔다가 다시 태양이 떠오르게 되고 생명 현상이 시작됩니다. 태양의 빛이 짧아지는 겨울철이 왔다가 다시 낮이 길어지는 봄이 옵니다. 거의 모든 생명 현상이 빛을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고대인들이 눈을 떴겠지요. 이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의 탄생일이 동지가 지난 12월 25일로 결정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근대 생물학은 탄소동화작용이라는 식물의 생명 메커니즘을 밝혀냈습니다. 탄소와 물과 태양 빛이 물리 화학 작용을 일으켜 모든 생명의 기초인 식물의 생명을 이끌어갑니다. 요즘 유전공학의 발전으로 인해서 빛이 없어도 식물의 생명이 가능해졌는지, 또한 콩나물 재배는 어둠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빛 없는 생명현상이 가능한 것 같긴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빛 없이 생명을 생각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유전자 식품이나 콩나물 재배 같은 것들도 역시 탄소동화작용에 의해서 만들어진 생명의 씨앗들을 약간 변형시킨 것에 불과한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렇듯 빛으로 얻어진 식물의 생명 알맹이들이 동물의 생명까지도 유지시켜주고 있습니다. 토끼나 소는 풀을 먹어야 하고, 바다의 새우들도 플랑크톤을 먹어야 합니다. 육식동물도 역시 모든 생명 현상의 가장 밑바닥을 유지시켜주는 식물에 의해서만 존속될 수 있습니다. 결국 모든 생명의 밑바닥에는 빛이 자리를 잡고 있는 셈입니다.

물론 구약성서 기자가 이런 생물학적인 정보를 갖고 있지는 못했겠지만, 창조의 단초를 "빛"에서 보았다는 점에서 그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생명 현상에 천착한 것으로 보아야만 합니다. 즉 성서는 생명에 접근해보려는 이들의 경험이라는 말이 됩니다. 성서가 진술하고 있는 하나님은 바로 생명의 근원입니다. 비록 구약성서가 유대민족의 역사를 그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결국은 생명을 불러내고 유지시켜나가는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언서나 성문서의 내용들은 한결같이 인간과 온 세계의 살아있는 것들이 어떻게 생명을 확보할 수 있는가에 대한 해명과 조언과 깨달음입니다.  

이런 관점은 신약성서의 복음에 훨씬 명시적으로 증언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요한은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요 1:5)고 고백합니다. 생명과 진리와 빛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의 사건으로 수렴됩니다. 창조의 빛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합니다. 자연적 빛이 영적인 빛으로 변화되었다는 뜻이 아닐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서 이제 자연의 빛과 영적인 빛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진리의 빛

다른 한편으로 빛의 성질은 어떤 사물을 드러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는 어떤 사물이 있다고 하더라도 숨어있을 뿐이지만 빛으로 인해서 자기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진리는 빛입니다. 진리에 사는 사람은 자기의 원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일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빛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빛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은 자기의 본 모습을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무식하면 무식한 대로, 못 생겼으면 못 생긴 대로 자기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전혀 부끄러움이 되지 않는 이유는 자연적인 자기의 모습보다는 부활하신 예수에게 기대어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을 향해서 이런 질문을 해야할 것입니다. 창세기로부터 시작해서 복음서를 거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빛이라는 메타포가 지향하고 있는 생명의 세계에 우리가 들어가 있을까요? 쉽게 말해서, 우리의 삶에 평화와 기쁨이 빛처럼 가득 차 있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대개의 기독교인은 그런 생명을 경험하기 때문에 지금도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약중독이나 술취함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즐거움으로 착각하고 있듯이 우리 기도교인들도 거짓 평화와 거짓 기쁨에 도취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 현상은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거의 습관적으로 반복되어 왔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도 역시 자신의 욕망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하기도 합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결코 우리의 영혼을 환하게 밝혀주는 빛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 빛은 우리 자신에게서 흘러나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에서 우리에게 반사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我))라는 범주를 절대화하는 한 우리는 결코 빛의 생명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라파엘의 천사상    

끝으로, 언젠가 다른 글에서도 한번 언급한 적이 있는 이야기이지만 라파엘의 <천사상>을 설명하는 것으로 오늘의 명상을 마치겠습니다. 이 그림에는 두 천사의 모습이 나옵니다. 보는 사람의 시각에서 왼편에 있는 천사는 탁자에 팔꿈치를 올려놓은 채 손바닥으로 자기 턱을 받치고 있으며, 오른 편의 천사는 팔을 탁자에 올려놓은 채 자기 턱을 받치고 있습니다. 두 천사 모든 위를 쳐다봅니다. 전체 화면은 흰색, 누런 색, 부분적으로 붉은 색이 잘 조화되어 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단조로운 색채인 것 같지만 전체적으로 밝은 빛에 휩싸여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두 천사는 골똘하게 위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초점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막연한 것 같기도 합니다. 이 두 천사는 누구일까요? 하늘에서 쫓겨난 이들이 다시 하늘을 그리워하는 걸까요? 하늘이 허망하다는 암시인가요? 그러나 이들의 표정과 눈빛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언가 새로운 세계에 대한 그리움과 희망이 서려있습니다. 이 세상의 생명 형식과는 전혀 다른, 흡사 빛이 입자인지 파동인지 우리가 모르듯, 숨어있는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향한 강한 열망이 느껴집니다. 우리에게 이런 빛과 하늘의 생명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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