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칠언(架上七言) (2)

조회 수 4777 추천 수 114 2004.06.30 22:52:16




가상칠언(架上七言) (2), 눅 23:34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이 구절이 어떤 사본에는 빠져 있다는 걸 보면 이 구절의 역사성이 그렇게 확실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놓쳐버렸던 예수의 말씀을 기억한 어떤 사람이 이 구절을 교회 공동체에 전했고, 그것이 전승되어 오는 과정에서 어떤 사본에는 기록되고 다른 사본에는 빠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는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을 개연성을 본 어떤 사람에 의해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부분적으로 받아들여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지 않으신 구절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제자들이 아무리 예수님과 함께 생활했다고 하더라도 매 순간마다 모든 말씀을 문자로 기록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약간씩 변형된 구절도 있고, 전혀 새로운 구절도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어떤 신학자는 복음서는 예수의 부활 공동체에 의해서 전혀 새롭게 구성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만, 그렇게 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비록 부활 사건에 의해서 예수님의 공생애 사건이 새로운 지평에서 해석되긴 했지만, 없는 일을 억지로 만들어 넣는 일은 없었으니까 말입니다. 다만 복음서를 기록하고 전승하던 초기 교회가 자신들도 미처 이해하지 못한 사건들이 있긴 하겠지만 어떤 의도를 갖고 각색하는 단계까지 나가지는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런 문제는 성서의 역사비평에 속하는 것이니까 접어두기로 하고, 우리는 오늘의 이 구절이 비록 어떤 사본에 빠졌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말씀으로서 충분한 권위를 갖고 있다는 전제에서 묵상해보려고 합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장면을 예상 외로 간단히 서술합니다.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33절). 만약 성서 기자들이 소설가라고 한다면 이런 방식으로 쓰지는 않았을 겁니다. 자세하게, 그리고 감상적으로, 많은 해석을 곁들여서 묘사했겠지요. 그러나 다른 복음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누가복음 기자도 그냥 한 마디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라는 표현으로 끝입니다. 진리는 억지로 꾸미지 않는 법입니다. 있는 그대로 사실을 전달할 뿐입니다. 이런 간단명료한 묘사 이면에는 예수의 십자가형이 로마법에 의한 것이라는 실체적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의 법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았다고 말입니다.

로마법은 현대 유럽 국가들이 갖고 있는 법의 모태입니다. 그 어떤 고대 문명보다 훨씬 세련되고 교양있는 법입니다. 어떤 분들은 로마를 매우 파괴적인 국가로 생각하겠지만 그 생각은 부분적으로만 맞습니다. 로마법에는 그 넓은 식민지를 하나의 체제로 꾸려나갈 수 있는 관용 정신도 들어 있습니다. 거의 모든 식민지의 종교와 문화를 인정해줍니다. 다만 로마 체제에 대한 저항이 있을 경우에 일벌백계식으로 처리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로마법이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만 할까요?

예수를 재판한 사람은 로마의 총독 빌라도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심문하고 재판하는 과정은 복음서에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결국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합니다. 여기서 빌라도의 사법권은 정당했을까요? 아니면 부당했을까요? 현대의 재판 문제도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든 마당에 우리가 2천년 전 빌라도의 재판이 얼마나 공정했는지, 아닌지를 판단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다만 총독이라는 위치가, 더구나 유대 지역의 총독이라는 위치가 로마의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곳에 총독으로 부임한 빌라도의 인물됨이나 정치력은 로마의 고위 관료들 중에서도 보통 이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재판이 그렇게 허술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로마법에 따라서 정당하게 십자가형을 선고했겠지요.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이 내려졌다는 말은 로마가 예수님을 반국가사범으로 판단했다는 뜻입니다. 물론 빌라도가 이렇게 판단하게 된 배경에는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에 의한 무고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겠지요. 재판과정의 몇 가지 움직임을 보면 이게 확실합니다. 빌라도는 예수 문제를 가능한 대로 훈방이나, 아니면 곤장형으로 처리하고자 했지만 피를 보고 싶어하는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에 의한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십자가형으로 선고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런 외압이 작용했다고 하더라도 로마의 총독이 로마법을 어기면서까지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로마법에 충실한 빌라도는 어느 정도 외압을 느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그 법에 의지해서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법은 정의를 일으켜 세우는 힘인데 왜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내몰았을까요? 둘 중에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불의하던지 (로마)법이 불의하던지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정의로운지, 법이 정의로운지 논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마 오늘 빌라도를 다시 불러내서 물어본다고 하더라도 자기는 법에 따라 선고했기 때문에 잘못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이 문제는 빌라도라는 한 개인의 판단력이나 도덕성이 아니라 법의 본질과 연관됩니다. 법은 무엇입니까?

법은 문명의 산물입니다. 문명이 없는 곳에는 법도 없습니다. 없다기 보다는 그 문명 크기 만큼의 법이 있을 따름입니다. 법이 없어도 사회가 유지되는 시대에는, 즉 인간의 인간다운 삶이 저절로 유지되는 시대에는 법의 필요성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 말은 곧 인간의 삶이 자연스럽게 유지되지 않기 때문에 법이라는 강제 규정이 출현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법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그 사회는 문제가 많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역사에는 이미 법이 현실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법이 없는 사회로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없을수록 좋지만 없앨 수 없는 것을 우리는 필요악이라고 하는데, 바로 법이 필요악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삶에 깊숙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법이 필요악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삶을 재단해 버리는 절대적인 자리에 올라서고 있다는 데에서 우리는 법의 오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법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 법은 절대규범이 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장애인들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투쟁할 때도 이 나라의 법에 의해서 제재를 받습니다. 대기업들은 법으로 정해진 장애인 고용을 실천하지 않습니다. 벌금을 내는 게 장애인을 고용함으로써 당하게 되는 불이익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비인간적으로 몰아세우는 행위도 역시 법의 이름으로 자행됩니다. 유신헌법 하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던 이들을 검사와 판사들은 법의 이름으로 구속하고, 때로는 사형에 처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법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항변합니다. 며칠 전 대통령과 검사들과의 대화에서도 검사들의 생각이 여전히 이런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한 사람들이, 즉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법을 대표하는 빌라도가 자신들의 행위를 모른다고 말씀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법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 못박아 죽였는데,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사실 인간은 모르면서 아는 척합니다. 스크라테스가 그런 말을 했나요? 너 자신을 알라. 나 자신도 모르면서 우리는 남을 판단하고, 더 나아가서 그 사람의 삶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지금 미국의 부시를 중심으로 한 전쟁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이라크의 후세인을 몰아내기 위해서 모든 힘을 쏟고 있습니다. 다행히 대다수의 유엔 안보리 국가들과 전쟁을 막기 위한 인간방패 회원들에 의해서 전쟁이 어느 정도 억제되고, 지연되고 있긴 합니다만 아마 "칼을 뽑았으면 호박이라도 자른다"는 우리의 속담처럼 어떤 일인가를 저지를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렇게 고도의 문명으로 치장된 21세기에도 여전히 어떤 사람의 생명을 파괴하는 일들이 자행된다는 것을 보면 자기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인간의 모습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인 것 같습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노력한 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은 아니었는지 말입니다. 개인적인 삶도 그렇고 교회생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옳다고 생각하고 밀어부치듯이 일을 했는데, 그것이 우리 자신도 모르는 중에 불의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해서 이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결국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하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 용서하심이 없는 한, 즉 그런 사랑이 없는 한, 우리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는 일을 우리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정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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