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칠언(架上七言) (7), 눅 23:46

조회 수 6981 추천 수 119 2004.06.30 22:53:31




가상칠언(架上七言) (7), 눅 23:46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을 "다 이루었다!"는 말씀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반하여 누가복음 기자는 오늘 말씀대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론적 사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한다면, 누가복음은 좀더 소박하게 예수님의 인간적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물론 두 구절을 자연스럽게 연결할 수도 있습니다. 다 이룬 사람은 편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 두 구절을 이렇게 까지 억지로 끼어맞출 필요는 없습니다. 요한복음과 누가복음의 신학적 입장이 다르다는 점을 우리가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오늘의 구절을 누가복음의 시각으로 따라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선 몇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인데 왜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한다는 것일까요? 아무리 하나님이라고 하더라도 어찌 할 수 없는 어떤 한계가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신학자들이 개념화 한 것처럼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변증법입니까? 우리는 이런 저런 방식으로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그 모든 것을 실증적으로 밝혀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도그마를 전제하는 방식이 아니라 비록 부분적일지 모르지만 하나의 사실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어가는 방식이 훨씬 효과적일 때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명상하려는 이 말씀도 그런 것 중의 하나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하나님을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즉 "내가 하나님이니 나를 믿어라." 또는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니 내게 와야 구원을 받는다"라고 말씀하신 게 아니라 "나는 하나님을 보았다", 또는 오늘의 말씀과 연결해서 "나는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말씀하셨다고 보아야 합니다. 물론 요한복음이나 몇몇 공관복음의 구절에서 자기 자신의 신(神)적인 정체성에 대해서 피력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것들은 대개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고백이지 당신 자신이 직접 하신 말씀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해서 곧 성서의 권위를 의심한다는 뜻을 아니라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처한 삶의 자리에서 고백된 말씀을 고려해야만 성서를 좀더 정확하게 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쨌든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하나님 개념으로서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칭했다면 그의 모든 인간적 한계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적 한계를 보인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에는 예수님의 인간적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소위 가현설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지상적 활동은 단지 그림자였을 뿐이지 하나님은 인간적 한계를 지닐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기독론 논쟁은 이 자리에서 우리의 관심이 아니기 때문에 이 정도로 접어두기로 하겠습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으로 믿고 있는 예수님 스스로 하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고백했다는 사실만은 확실히 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렀습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호칭한 증거가 있는지, 또는 랍비 전통이나 바리새인 전통에서 그런 증거가 있는지 저는 자세하게 조사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냥 추측컨대 이 호칭은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독특한 이해를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설령 아버지 개념이 이미 있었다고 하더라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흐릿했던 개념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아주 또렷하게 각인된 것으로 충분하니까 말입니다. 요즘 페미니즘적 신학에서는 아버지 호칭 대신에 어머니를 쓰자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남성중심의 세계상을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머니라는 호칭을 사용함으로써 이런 성차별적 요소를 극복해야한다는 주장이니까 말입니다. 만약 교회에서 하나님 "어머니"에게 기도 드린다고 한다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호소력이 있을지 모르지만 또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거부감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부모님"이라고 해야되나요? 호칭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수천년 동안의 종교문화적 역사과정이 깔려있는 문제를 단시일에 바꾼다는 것은 오히려 본질을 훼손시킬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일단은 하나님 "아버지"로 두고, 그 개념을 바르게 심화시켜나가는 게 지혜로울 것 같습니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는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여러 가지 명상의 주제를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중에서 신앙의 본질이라는 한 가지 주제에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참된 신앙은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과 더불어 있는 것이지 이런 불안이 완전히 배제된 그 어떤 것이 아닙니다. 불안이 없다면 그것은 광신입니다. 죽음 앞에 직면한 예수님에게도 여전히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고난을 예시하면서 부활을 예고한 장면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그 부활 사건이 흡사 공장에서 자동차 만들어내듯이 기계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큰 수술을 받기 위해 마취를 당할 때도 그 이후에 대해서 어느 정도 걱정을 하는데 하물며 죽음이라는 관문에 들어가면서 그 미래를 불안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누구나 죽음의 사실성을 정직하게 들어야보기만 하면 불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기독교인은 부활의 희망을 말하기 전에 우선 죽음의 참혹성에 맞서야 합니다. 그저 단순히 우리가 죽어서 천당간다는, 흡사 주문을 외우듯이 천당 운운한다는 것은 우리의 생명과 죽음을 희화화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죽음은 이 세상에서 추구하던 모든 것이 무화되는 순간입니다. 물론 자기가 추구하던 이념이나 예술, 정치활동이 제자나 후배들에 의해서, 또는 자기의 혈통이 자식들을 통해서 연속되기는 하지만 그런 것으로 죽음이 극복될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가능한 대로 죽음을 외면하려고 하는 반면에 기독교인은 그것을 추상화시켜버립니다. 죽은 다음에 천당에 가서 행복하게 산다는 희망으로 죽음의 실상을 간과해버립니다. 이런 분들의 마음 속에 그려져 있는 천당은 이 세상에서 원하던 것이 최대한으로 보장된 장소입니다. 약간 부정적으로 말해서 인간의 욕망을 마음껏 해결할 수 있는 곳 쯤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좀더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늘 먹을 게 많고, 배고픔이 없는 세상이란 그렇게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배고품이 없다면 먹거리도 아무 의미가 없겠지요.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도 없는 세계를 생각해보십시요. 이 세상에서 재미를 찾던 사람들은 천당이 참으로 재미 없는 곳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천당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점을 말씀드리려는 게 아니라 천당은 우리의 예상 너머에 있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죽음을 우리의 미래와 연결해서 생각하면 참으로 불안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실제적인 삶이나 우리의 상상력으로 담아낼 수 없는 세계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곳에서 행복할 수 있나요? 행복과 불행이라는 사고방식이 근본적으로 허물어지는 세계 앞에서 불안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비록 자신의 미래가 불안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자신의 영혼을 맡겼습니다. 이런 점에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풀어낼 수 없는 그 미래를 하나님에게 완전히 맡기는 삶의 태도입니다. 완전히 맡긴다고 해서 아무런 근거도 없다는 뜻을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이 신뢰할 만한 분이라는 사실을 성서와 세계 역사를 통해서 증명해내는 것이 바로 신학의 고유한 과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타당한 논리에 근거해서 우리 미래의 불확실성을 하나님의 확실성에 맡기는 삶의 태도가 곧 기독교 신앙입니다. 비록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의 실존적인 삶에서나 죽음 이후에 속하는 궁극적인 삶에서나 끊임없이 제기되는 불안이 있지만 신실한 아버지 하나님에게 우리의 미래를 온전히 맡기고 삽시다. 십자가의 불안은 결국 부활의 희망으로 인해서 구원의 길이었음이 확증되었듯이 그 날이 오면 우리는 이 모든 사실을 얼굴을 맞대고 보듯이 알게 될 것입니다(고전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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