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어둠, 창 1:4,5

조회 수 5951 추천 수 184 2004.06.30 22:53:44




빛과 어둠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빛을 낮이라,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이렇게 첫날이 밤, 낮 하루가 지났다.(창 1:4,5)



앞서 "빛이 생겨라"는 말씀을 묵상할 때 언급했듯이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 빛을 창조 사건의 단초라는 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며, 그렇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시각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 빛만이 아니라 그 반대 현상인 어둠도 역시 우리가 주목해보아야 할 우주적 현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빛은 비록 하나님의 첫 번 창조사건으로서 존재론적 근거를 갖고 있긴 하지만 그것 자체로가 아니라 반드시 어둠이 있어야만 가능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온 세상이 빛뿐이라고 한다면 굳이 빛이 있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듯이 밤이 있기 때문에 낮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북극에 가까이 가면 일년이 반은 낮만 계속되고 반은 밤만 계속된다고 합니다. 그런 곳에 사는 사람들은 아침이 되어도 날이 밝았다고 말하지 않으며, 반대로 밤이 되어도 어두워졌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개의 지역에서는 밤과 낮이 반반씩 나뉘어 있어서 그 두 현상은 반대 개념이면서 동시에 한 묶음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빛은 분명히 하나님의 피조물인데 반해서 어둠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창세기에 "어둠이 생겨라"는 말씀은 없었습니다. 단지 빛만 창조했는데 어둠이라는 현상까지 생긴 것입니다. 생성(生成)되었다기보다는 빛이라는 현상에 반사되는 그 어떤 것입니다. 또는 이 세상의 만물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어둠만은 그런 피조성에서 벗어난 보다 본질적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쨌든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직접 창조하지는 않았지만 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 한 현상이 바로 어둠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 위에 하나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창조 행위가 있기 전에 이미 어떤 것이 있었습니다. 형태를 갖추지 못한 땅과 깊음과 어둠과 물이었습니다. 이게 도대체 어떤 상태인지를 말하려면 책 몇 권으로도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접어두기로 하고, 창조 행위 이전에 이미 어둠이 존재했었다는 사실만 확인하면 될 것 같습니다. 물이 있었다는 말은 아마 그 당시 지구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에 지중해를 보고 고대인들이 창조 이전의 상태를 그렇게 여긴 게 아닌가 싶습니다. 헬라인들도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보았듯이 말입니다. 이 깊은 물 위에서 어둠이 뒤덮여 있었다는 창세기 기자의 직관은 그렇게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현재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이 세상과 사물을 명확하게 이해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물리학자나 생물학자들이 지구와 우주 현상을 아무리 세밀하게 관찰하고 거기서 어떤 원리를 파악했다고 하더라도 그 근원이 우리 손에 들어오는 게 아닙니다. 여기 꽃 한 송이가 있다고 합시다. "이게 뭐꼬?" 아무도 모릅니다. 우주의 먼지가 소용돌이치면서 태양이 생기고 지구와 수성 같은 위성이 생겼으며, 지구 안에서 아주 우연한 물리, 화학적 현상의 과정 속에서 이런 꽃 한 송이가 우리 눈 앞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 긴 과정을 추적해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렇듯 궁극적인 세계로 들어가면 갈수록 우리는 어둠에 휩싸입니다. 우주에 관한 것 이전에 "내가 누구인가?"라는 실존적 질문을 궁극적인 데까지 끌고 가 보십시오. 어떤 대답이 나올까요? 모르겠다는 대답이 정확합니다. 결국 어둠입니다. 노자와 장자도 이런 의미로 인간 인식의 한계를 여러 번 언급했습니다. 도(道)는 까마득한 어둠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거울로 보는 것 같다"고 말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과 사물의 존재론적 근원이 어둠이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주 작은 흔적만 보면서 무언가를 아는 척 합니다. 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는 개구리처럼 자기의 인식 체계 안에 들어온 것만을 두고 그것을 하늘이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만하거나 아니면 위선적인 행태를 보입니다. 자기의 앎을 절대화하는 교만에 빠지거나, 또는 성품이 고와서 교만하지는 않아도 허상을 참된 것으로 착각한다는 점에서 위선적입니다. 근본적으로 진리를 향해 마음을 열고 살아가야 할 종교인들에게도 이런 교만과 위선은 그대로 적용됩니다. 다른 이들은 제쳐두고 우리 기독교인들만 생각해보아도 이 말은 맞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모두 아는 것처럼 독선적으로 행동하는 경우는 참으로 많습니다. 구원을 우리가 독차지 한 것처럼 행동하기도 합니다.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서 약간의 의문만 품어도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동정하거나 또는 위협합니다. 신앙은 우리의 인식이 얼마나 불충분한지를 깨닫고 그 절대적인 능력에게 자기를 위탁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교회가 계속해서 자기의 체계를 절대화하고 있습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바람처럼 성령은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생명을 끌어가는 능력인데도 불구하고 그 영을 우리의 의지와 욕망이라는 틀 안에 고정시켜버립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 안에는 성령의 신비에 대한 경외가 사라졌으며, 따라서 참된 깨우침도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흔히 영성마저 인간학적 기술로 해결될 것처럼 생각하고 있으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지요.

이야기가 약간 옆으로 흘렀습니다. 다시 오늘 우리가 묵상하고 있는 어둠의 문제로 돌아갑시다. 우리는 이 어둠의 존재론을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어둠은 단지 두려움과 죽음과 부도덕성을 의미하는 징표가 아니라 오히려 이 세계의 생명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 힘이라고 말입니다. 실제로 생명을 유지시키는 빛은 어둠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으로 풀어보면 빛은 질료이고 어둠은 형상이라고 말해도 좋지 않을까요? 빛은 어둠이라는 형상을 통해서만 실체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또는 하이덱거가 말하는 존재(Sein)가 바로 이 어둠은 아닐까요? 즉 없음으로써 있음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 힘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창조 행위 중에서 빛이 첫 자리에 있다고 서술하는 구약성서만이 아니라 신약성서와 초기 기독교도 역시 한결같이 빛을 생명과 진리로 본 반면에 어둠을 죽음과 적그리스도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기독교인은 자기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인식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래서 주일은 태양의 날이기도 하고 성탄절은 낮이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12월25일이 되었습니다. 빛이 기독교의 본질 가장 정확하게 드러내 주는 메타포라는 주장은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런 빛이라는 징표를 배타적인 의미로만 생각하면 우리는 성서의 세계를 충분히 이해하는 게 못됩니다. 성서가 하나님의 세계를 언급하면서 어둠을 명시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습니다만 포괄적인 차원에서는 그것까지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말하자면 존재론적 차원에서는 성서가 어둠까지 포함된 생명의 세계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아주 평범한 사람들, 또는 어둠에 속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세리, 죄인, 창녀들이 바로 그런 이들입니다. 어느 소설의 제목처럼 "어둠의 자식들"이 예수님 주변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역시 빛의 세계보다는 아주 평범한, 오히려 어둠의 세계에 속한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당시 스스로 빛의 자녀라고 생각하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죄인들과 어울리면서 먹고 마시기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비판했다는 사실이 이에 대한 반증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어둠이 반드시 부도덕한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보아야 합니다. 이 사회의 마이너리티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두 이에 해당됩니다. 돈도 없고, 빽도 없고, 학식도 없고 ... 별로 내세울 게 없어서 열등감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빛이 아니라 어둠에 속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스스로 빛에 속했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진리의 빛이 비추입니다. 예수님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 곧 그런 빛이 아닐까요? 자신의 기득권을 지켜내는 데 모든 것을 걸어두는 사람은 그것이 종교적이었든 세속적이었든 상관없이 비움으로써 채워진다는 이 진리의 빛을 결코 알아낼 수 없습니다.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그것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문이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수고하면서 지켜낼 것이 없는 사람은 비록 지식이 부족하더라도 마음이 열려있기 때문에 참된 빛을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이런 차원도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합니다. 착한 사람들의 행위가 그렇게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착하기만 하다면 우리에게는 착하다는 개념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악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선한 사람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우리는 어둠의 세력이라고 일컬어지는 악을 무조건 도태시켜버려야 할 세력일 뿐이라고 간주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이 세상의 악과 불의를 비호한다거나 그것을 억지 논리로 정당화시키자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의식이 늘 선악이원론에 빠져 있기만 하다면 그런 구도를 뛰어넘어 전개되는 생명의 역사를 놓친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다른 시각이 필요하다는 점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이런 점에서 생명의 빛은 단지 밝고 어둡다는 외면적 현상만이 아닙니다. 단지 도덕적이냐, 아니면 부도덕하냐 하는 인간학적 가치 문제도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즉 어둠까지 포괄하는 힘이 바로 생명의 빛입니다. 우리의 짧은 생각으로는 이 세상의 모든 악과 어둠이 사라지고 선과 빛만 충만하기를 바라겠지만 역사 안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세계가 무조건 좋은 것만도 아닙니다. 아마 역사의 끝이라 할 수 있는 종말로부터만 빛이 통치하는 완전한 세계가 시작되겠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우리는 빛만이 아니라 어둠이 함께 작용하는 이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방식으로 어둠도 역시 생명의 세계를 일으키는 과정에 한 몫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어둠은 또 하나의 다른 빛의 존재방식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빛이라고 부르는 그것은 사물을 드러내 주는 방식으로 생명을 일구어내고, 우리가 어둠이라고 부르는 그것은 사물을 감추는 방식으로 생명을 일구어내는 힘이라고 말입니다. 드러냄과 감춤의 변증법적 관계를 통해서 이 세계는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진행되는 게 아닐까요?

우리는 밤이 되면 생명이 잠든다고 말합니다. 숲 속에서 밤을 세워본 일이 있는 분들은 낮 못지 않은 생명활동이 그 밤에 진행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밤에만 활동하는 야행성 짐승과 곤충은 물론이고 온갖 식물들도 밤새도록 그들마다의 독특한 방식으로 숲의 생명활동에 참여합니다. 내가 어릴 때는 밤늦게 나가 노는 일이 많았습니다. 반딧불을 자주 보았습니다. 밤하늘의 별들은 또 어떻습니까? 밤안개도 역시 생명운동입니다. 어둠은 쉼일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방식의 운동인 게 분명합니다. 결국 빛과 어둠은 지구의 생명을 지켜내는 궁극적인 에너지입니다.    

이제 시나브로 오늘의 묵상을 끝내야겠습니다. 성서에 따르면 하나님은 빛을 창조했고 사탄은 어둠을 창조했다고 말하지 않는군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선을 창조하셨지만 사탄이 악을 창조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어둠을 창조하거나 악을 창조했다는 뜻도 아닙니다. 표면적으로 볼 때 빛과 어둠, 선과 악이 이 현실을 이원론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 같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통치 안에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어둠을 밤이라 이름을 붙였듯이 말입니다. 그 통치가 은폐되어 있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그 사실을 명시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 모든 은폐의 현실들이 밝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2003년 6월25일>.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1 요셉의 아들(눅 4:22) [레벨:100]정용섭 2006-01-05 8811
20 집단살해 사건(출 32:27,28) [3] [레벨:100]정용섭 2005-12-01 7857
19 믿음의 표징(막 16:17,18) [1] [레벨:100]정용섭 2005-11-04 8359
18 자비로운 사람(눅 6:36) [1] [레벨:100]정용섭 2005-10-04 7737
17 아골 골짜기의 사연(수 8:26) [레벨:100]정용섭 2005-08-09 9538
16 바울의 복음(롬 1:16a) [3] [레벨:100]정용섭 2005-07-27 5576
15 모리아 산의 실체 -창 22:1-19- [1] [레벨:100]정용섭 2005-03-25 9200
14 칼 바르트 1 [2] [레벨:100]정용섭 2004-12-20 7112
13 진리가 무엇이냐?(요18:38) [5] [레벨:100]정용섭 2004-12-16 7675
12 물, 요 4:13,14 [1] [레벨:100]정용섭 2004-11-14 6208
» 빛과 어둠, 창 1:4,5 [레벨:100]관리자 2004-06-30 5951
10 가상칠언(架上七言) (7), 눅 23:46 [레벨:100]관리자 2004-06-30 6973
9 가상칠언(架上七言) (6), 요 19:30 [레벨:100]관리자 2004-06-30 4828
8 가상칠언(架上七言) (5), 요 19:28 [레벨:100]관리자 2004-06-30 5762
7 가상칠언(架上七言) (4), 요 19:26,27 [레벨:100]관리자 2004-06-30 5344
6 가상칠언(架上七言) (3) [레벨:100]관리자 2004-06-30 4125
5 가상칠언(架上七言) (2) [레벨:100]관리자 2004-06-30 4806
4 가상칠언(架上七言) (1) [레벨:100]관리자 2004-06-30 5191
3 빛이여, 있으라! [레벨:100]관리자 2004-06-30 5257
2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 [1] [레벨:100]관리자 2004-06-30 8781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