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복음(롬 1:16a)

조회 수 5561 추천 수 142 2005.07.27 23:13:23
바울의 복음

“나는 그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롬 1:16a)

도대체 바울은 ‘복음’을,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무엇으로 생각하기에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고 진술할까?
그의 진술은 많은 사람들이 이 복음을 부끄러워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바울 자신도 역시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에게 예수 사건은 미련하거나 거림직한 것이었다.
생각해보라.
하나님이 한 인간의 삶을 통해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신다는 주장이 가당키나 하나?
인류 구원이 얼마나 진지하게 무거운 과업인데
단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해결된다고 하니
사람들이 그런 가르침을 부끄러워했다는 건 이해가 간다.
유대인들의 생각이 어떤 건지는 구약을 통해서 잘 알려져 있다.
모세의 이름을 통해서 유대인들에게 전승되기 시작한 율법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에 합당한 것을 요구하는 원리였다.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들은 최선을 다 기울였다.
그들은 먹는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이웃관계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할 수 있는 선한 것은 모두 해보았다.
심지어는 아브라함처럼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까지 했고,
가나안 족들과의 피비린내 나는 투쟁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성전 종교를 화려하게 발전시켰다.
그런 모든 노력들이 민중들에게 무거운 짐으로 작용할 뿐이었다.
오죽 했으면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모두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하고 말씀하였겠는가?
예수의 가르침이나 그의 치유행위,
더 나가서 그의 십자가와
궁극적으로 그의 부활사건은
인간이 스스로 노력해서 성취하려는 모든 종교적 업적을
근본적으로 해체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예수 사건을 복음이라고 말한다.
왜 인간의 업적을 해체해야만 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왜 복음인가?
이런 문제는 오늘 내가 말하려는 부분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니까
한 마디로만 정리하자.
인간은 그런 방식으로 죽음 너머의 생명 사건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게
바로 그 대답이다.
즉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만 가능한 사건이라는 뜻이다.

오늘 정작 내가 짚어보려는 핵심은
모든 율법의 행위와 목표를 근본적으로 해체한 복음을
오늘의 교회가 오히려 해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와 그의 사건과 그의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필요한 게 없다는 이 복음을
오늘의 교회가 총체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이게 무슨 말인가?
교회는 지금 청중들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한다.
구원받기 위해서 율법을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유대교처럼
오늘의 교회가 ‘사명’이라는 명분으로 청중들을 닦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 할 의무가 얼마나 많은지,
얼마나 세부적인지 내가 여기서 일일이 거론하지 않겠다.
모이기를 힘쓰라는 말씀에 기대서 얼마나 자주 모여야 하는지,
헌금 종류는 왜 그리 많은지,
그 이외에도 교회가 요구하는 수준에 맞추어 신앙생활을 하려면
자기의 프라이버시나 사회 공적인 업무를 대폭 축소해야만 한다.
부흥하는 교회의 목회자일수록
청중들을 이런 방향으로 몰아가는 데 일가견이 있다.
그런 분들의 설교를 듣고 있는 신자들은 늘 좌불안석이다.
자기들이 무언가 잘못한 게 많은 것처럼 자책하게 된다.
경기도의 모 교회 김 아무개 목사는 매우 인격적인 분인데도 불구하고
신자들을 향해서 왜 예배의 감격이 없느냐,
왜 흐느끼는 간절함이 없느냐, 하고 채근하고 있었다.
어떤 편집증적인 문제가 없는 사람이
어떻게 예배를 드릴 때마다 십자가를 생각하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가?
정상적으로 사회생활 하는 사람이
어떻게 중국과 베트남에 선교활동을 떠날 수 있는가?
위에서 언급한대로
하나님의 마음에 들기 위한 인간의 모든 행위를 철폐하는 것이 복음이라고 한다면
오늘의 한국교회는 이 복음과 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게 분명하다.
물론 성서구절을 인용해서 세계선교의 사명을 강조할 수는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들이 필요하기는 하다.
그러나 그런 모든 행위도 기본적으로는 ‘복음’ 패러다임 안에 놓여야 한다.
이 말은 곧 교회의 전도 행위를 비롯한 모든 종교적 업적을
끊임없이 상대화해야 한다는 뜻이다.
복음을 진정으로 복음으로 생각한다면
예수 사건을 자기 삶의 토대로 받아들인 채
자기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면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이상 요구하는 게 없다.
이현주 목사님이 오랜 전에 쓰신 <아무 일 안 하고 잘 산다>는 책 제목처럼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아무 일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며,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의 일을 이루어 가신다.
역설적으로, 우리가 일을 하지 않을수록 하나님을 돕는 건지 모른다.
흡사 문명이 발전하지 않은 곳일수록 오염이 덜 되는 것처럼
우리가 설치고 다니지 않을수록
생명의 영인 성령이 훨씬 원활하게 활동하실지 모른다.

이런 점에서 ‘복음적인 목회’란 무엇일까?
교회 일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청중들을
교회의 일에서 좀 풀어주는 게 복음적 목회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건 청중들만을 위한 게 아니라
목회자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목회자가 자신의 구원을 궁극적인 깊이에서 생각한다면
더 이상 교회 업무에 인생을 쏟듯이 살아가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좀 게으른 목회자가 되는 게
지나치게 교회 일에 자기 인생을 소진하는 것보다 낫다.
위에서 언급한 김 아무개 목사님은
소위 ‘불꽃’ 같은 설교자가 되라고 다그쳤다.
나는 그런 외침을 들으면 마음 한 구석이 찡하기도 하지만
흡사 수영을 잘 하고 있는 사람에게
물장구를 열심히 쳐야 한다고 몰아치는 것 같아서 조금 우습게 보였다.
그는 그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어떻게 책임지시려나?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일마저 버거운 게 바로 인간인데
그는 수천 명의 영혼을 자기의 경험 안으로만 끌어들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심지는 그는 ‘게으름’을 죄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모든 정열을 쏟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구원받았다고 믿는 사람이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의 ‘게으름’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다시 한 번 더 말하지만,
바울은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고 했다.
하나님 앞에서 단지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김 받는다는 사실에
자신의 모든 존재를 걸어두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다시 그런 복음을 부끄러워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신앙생활하면 무언가 부족한 것처럼 느끼기 시작했다.
복음을 다시 율법으로 만들자는 말인가?
물론 그런 분들의 마음을 모를 것은 없다.
그들은 구원받기는 했지만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화되기 위해서
매 순간 최선을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성화의 삶은 분명히 종교적인 의미에 한정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칭의와 대칭되는 것도 아니고
구원받은 사람의 당연한 삶의 귀결일 뿐이다.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진술의 의미를
우리의 일상과 연결해서 생각해보자.
복음과 대칭되는 율법이 인간의 자기 성취라고 한다면
교육, 돈벌이, 출세, 명예 같은 것에 삶의 근거를 두는 건
모두 율법적인 삶이다.
이에 반해서 그런 인간의 성취를 내버려두고
자신의 ‘존재’에 천착하는 삶이 곧 복음적인 삶이다.
자신이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
살아있다는 그 사실 자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우리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뛰어넘어
스스로 자기를 계시하는 존재인 하나님과의 관계에
모든 삶의 근거를 놓는 삶은
자기를 성취하는 삶보다 오히려 어려울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를 성취하는 데서만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복음적인 삶은 율법적인 삶보다 훨씬 힘든 길이다.
그러나 비록 외면적으로 화려한 것은 없지만
자기 존재에 천착하는 사람은 내면적인 자유를 누릴 것이며
그 어디에서 의존하지 않는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일상과 마찬가지로
복음은 모든 종교적인 짐으로부터 자유로운 신앙의 세계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우리에게 명백하게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 스스로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사셨다.
물론 예수님이 종교적인 삶 자체를 일부러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청중들을 그것으로부터 해방시키신 것이다.
그런데 왜 오늘의 교회는 다시 청중을 율법으로 몰아가는가?
왜 복음을 부끄러워하는가?
그들은 아마 복음을 위해서
열정적으로 봉사하고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건 자기모순이다.
복음을 위해서 율법적으로 산다는 게 말이 되는가?
신약성서가 그런 헌신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런 문제까지 오늘 논의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것 같다.
바울의 유럽 선교를 모범으로 삼아 우리도 세계 선교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제법 많을 것이다.
신약성서 시대와 오늘 우리의 시대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
여러 각도에서 깊이 생각해야 할 뿐만 아니라
예수의 복음을 초기 기독교가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했는가 하는 점도
오늘 우리는 늘 비판적으로 성찰해야만 한다.
우리에게는 사도들의 신앙보다는 역시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어쨌든지
바울이 부끄러워하지 않겠다는 복음을 율법으로 대체하지 말았으면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우주론적으로 모든 인간의 자기성취와 만족을 해체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보편적 지평으로 확산시켰다는 사실을 훨씬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생각이 정리된 사람이라고 한다면
더 이상 하나님을 위해서 무언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이지는 않을 것이다.
내 생각에 하나님 앞에서는 일을 자꾸 저지르는 것보다는
조금 게으르게 사는 게 훨씬 바람직 할 것이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런 일을 하면서도 자기 성취감이 훨씬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오늘 내 말이 두서없이 진행되었지만 요지는 분명하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겠다는 바울의 진술은
단지 전도한다는 차원에 머무는 게 아니라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율법적 삶으로부터
은총의 삶으로 전환하겠다는 의미이다.
오늘의 교회와 신자들이 이런 말씀을 읽으면서도
실제로는 복음을 철저하게 부끄러워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으니,
딱한 일이다.

profile

[레벨:20]굶주린 늑대 

2013.04.20 10:55:54

복음적인 삶이 율법적인 삶보다 힘들지만,
복음이 율법보다 힘든 것이 아님에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가 복음적인 삶이 어려운 시대를 사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힘으로는 복음적인 삶조차 어려운 것인지 모르겠지만,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이 우리의 소망인 것 같습니다!

P.S. 첫문단의 마지막 부분에 문맥 흐름이 조금 이상한 것 같습니다.

인간은 그런 방식으로 죽음 너머의 생명 사건을 성취할 수 [ 있다는 ] 게 바로 그 대답이다. 
즉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만 가능한 사건이라는 뜻이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13.04.20 23:26:40

앗 그렇군.
'있'과 '없'의 한 자 차이로
의미가 정반대로 되었네요.
포크 님은 모든 글을 허투로 읽는 법이 없소이다.
이제 고쳐야겠소.
편안한 밤이 되기를...

[레벨:18]은나라

2017.05.17 23:57:22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만 가능한 사건이다."

외워야 할것 같습니다. 자꾸만 까먹고 교회의 가르침과 헷갈려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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