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골 골짜기의 사연(수 8:26)

조회 수 9543 추천 수 140 2005.08.09 23:11:18
아골 골짜기의 사연

“그들이 그 위에 쌓아 올린 큰 돌무더기는 오늘까지 남아 있다. 그제야 야훼의 극렬한 분노가 걷혔다. 이런 사연이 있어서 그곳 이름을 오늘날에도 아골 골짜기라 부르는 것이다.”(수 8:26).

내가 어렸을 때 “전설 따라 삼천리”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었다.
가슴 찡한, 혹은 기가 막힐만한 사연을 보내준 다음,
마지막에 나오는 멘트는 늘 “그리하여 그곳 이름을 뭐뭐라 하더라.”는 식이었다.
예컨대 할미꽃에 관한 전설을 극화한 다음에
“그 이후로 사람들이 그 무덤가에 피는 꽃을 할미꽃이라 불렀더라.”는 것이다.
위에 인용한 여호수아 8장26절도 그런 멘트와 흡사하다.
아간 가족에 얽힌 처참한 이야기 끝에 ‘아골 골짜기’라는 단어가 나온다.
결국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판 ‘전설 따라 삼천리’와 비슷하다는 말이 된다.
성서 이야기를 이렇게 전설처럼 읽어도 되는 것일까?
아니면 모든 게 역사적 사실일까?
혹은 전설인가, 역사적 사실인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실존적 의미가 더 중요한 것일까?
그 어느 것도 정확한 답은 아니다.
성서는 전설만도 아니고,
그렇다고 역사적 사실만도 아니며,
또한 그것의 실존적인 의미만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런 요소들은 모두 부분적인 것들이다.
인간 삶에 얽힌 이런 모든 부분적인 요소들 안에 관통하고 있는 리얼리티가 무엇인지
우리가 그것을 포착하고, 더 나아가 그것에 의존하는 게 핵심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이런 텍스트의 역사적 지평을 우선 정확하게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사회주의 혁명의 와중에 소위 인민재판이 벌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의 역사에서
아간 가족을 그렇게 처참하게 공개적으로 죽인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왜 그런 이야기를 전승시켜왔는지를 파악해야만 한다.

이 사건은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여리고 성을 공격할 때 일어났다.
아간은 여리고 성을 침략하는 와중에 몇 가지 전리품을 따로 챙겼다가
그게 발각되어서 재판을 받고 자기 동족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었다는 사건이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여리고 성의 전리품에 눈독을 들이지 말라고 경고한 적이 있었다.
은, 금, 동, 철제품은 야훼께 드리고, 나머지는 모두 없애버리라는 것이다.
여호수아가 왜 이런 명령을 내렸는지는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가나안 문명이 번성했던 여리고 성 안에는 바알 숭배의 흔적이 많았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종교와 문화와 완전히 결별하지 않으면
이들의 신앙적 전통이 훼손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그들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은, 금, 동, 철은 남겨두라고 했을까?
아마 이스라엘 민족은 그 당시까지 철기 문명에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가나안 사람들의 고급 문명이 생산해낸 그런 원자재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너무나 귀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물건들은 적당하게 녹여서 다시 다른 물건으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바알 숭배로 사용하던 물건이었다고 하더라도
큰 위험성은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아간은 값이 나갈만한 전리품을 몇 개 빼돌렸다.
그런데 아간의 죄가 발각된 그 어간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대개의 사람들이 이 이야기의 전후 맥락을 알기 때문에
여기서 이 이야기를 자세하게 반복하지는 않겠다.
간추려서 설명한다면 아간의 죄가 발각된 저간의 사정에는
두 가지 사건이 연루되어 있다.
하나는 여리고 성을 함락시킨 여호수아 군대가 아이 성과의 전투에서 실패했다는 것이다.
만약 아이 성을 문제없이 점령할 수 있었다면
당연히 이 문제는 그냥 덮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 성과의 전투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가 나왔다.
여호수아는 그 이유를 하나님께 물었다.
이스라엘 사람 중의 하나가 야훼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는 사실을 안 여호수아는
범인을 색출하기 위해서 제비뽑기를 시작했다.
이 제비뽑기가 바로 두 번째 사건이다.
제비뽑기에서 유다 지파가 뽑히고,
유다 지파 중에서 제라 갈래가 뽑히고,
이런 방식으로 계속되다가
결국 아간이 결정되었다.
작년 어느 주일에 행한 설교에서
나는 이런 도둑질이 아간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왜냐하면 사람은 좋은 물건 앞에서 소유욕이 발동하게 되며,
남의 눈에 뜨이지만 않는다면 대가 그런 소유욕은 그대로 실천되기 때문이다.
또한 제비뽑기 방식으로 아간의 죄가 드러났다는 성서 기자의 설명은
아간만이 아니라 거의 대다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전리품을 챙겼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간이 그대로 걸려들었을 까닭이 없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 제비뽑기 과정에 개입하셔서
아간의 죄가 발각되게 한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런 생각은 순박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정당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이런 순박한 마음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순박한 마음으로 성서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순박한 마음보다는 어떤 사태를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파악하는 게 중요하고,
그 다음에 이제 순박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게 필요하다.
물론 고대인들에게는 제비뽑기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중요한 방법이기는 했다.
다시스로 도망하던 요나가 결국 제비뽑기 방식으로 걸려들었다는 걸 보면
이런 제비뽑기는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아니라
신의 뜻을 알려고 했던 근동의 여러 민족들에게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걸 알 수 있다.

다른 이야기가 길었다.
오늘 논의의 중심으로 들어가자.
가나안 정복에 나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간을 죽인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을까?
어떤 독자들은 성서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니까
그건 당연히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성서에 대한 정보가 많은 사람들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베드로를 속이려다가 급살 맞았다는
사도행전의 보도(5장)를 이 아간 이야기와 연결시켜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아간과 아나니아 부부는 하나님을, 성령을 속이려 한 대표적인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죽음을 아무도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아나비아 부부 이야기는 훗날 기회가 있을 때 다시 자세하게 다루기로 하고
오늘은 아간에게만 집중하자.
다만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건
오늘 계속해서 ‘진리’의 토대에서 질문되어야 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해야한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약을 근거로 해서
지금도 팔레스틴 원주민들을 박해하고 있는데,
이런 성서해석이 과연 정당한가라는 질문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 땅을 약속으로 주셨기 때문에
그 땅은 영원토록 이스라엘 사람들의 차지가 되어야만 할까?
이건 그냥 질문으로만 남겨 놓자.
아간의 죽음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위에서 내가 문학적 상상력으로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이
아간과 마찬가지로 전리품을 챙겼을 개연성이 높다고 했는데,
이 부분을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아간의 행위 자체가 그렇게 죽어 마땅한 것이었는가에 대해서 질문해야 한다.
어떤 설교자들은 아마 이런 본문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명령은 이렇게 목숨을 담보할 정도로 엄정하다는 것을 설교할지 모르겠다.
생각해보자.
아간이 지금 자기 동족을 죽인 것일까?
누구에게 큰 해를 끼친 것일까?
그는 다만 전리품에 욕심이 생겨 몇 가지를 감춘 것뿐이다.
물론 구약의 기본 가르침이 제사보다 순종이 낫다는 것이긴 하다.
그런 가르침이 옳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서를 그 당시의 ‘삶의 자리’에서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아간을 죽인 것은 그것이 단순히 하나님의 명령이었다기보다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역사 해석이며, 판단이며, 결단이었다.
구약성서는 특히 하나님이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직접 말씀하신 것처럼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사실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적이 없다.
궁극적으로 모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나타나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면 성서는 왜 그렇게 직접적인 진술인 것처럼 보도하고 있을까?
이런 문제는 성서개론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언급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논제로 돌아가자.
아간의 사형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결정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간만을 죽인 게 아니라
소위 연좌제를 적용시켜서 ‘삼족’을 멸하듯 모슨 식구들을 죽였다.
이래도 되는 걸까?
예수님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고,
모르고 지은 죄를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전리품 몇 개 훔쳤다고 해서
아간, 아내, 아들, 딸, 손자 손녀,
일족을 돌로 쳐 죽인다는 게 말이 될까?

이제 여호수아에게로 돌아가 보자.
왜냐하면 이런 결정은 열두 지파 회의를 거치긴 했겠지만
아무래도 그 당시 최고 지도자인 여호수아의 생각에 따랐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여호수아는 아간을 용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시켜도 좋았을 것이다.
또는 아간의 가족들만이라도 살려둘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호수아는 일족 전체를 몰살시켰다.
여호수아는 왜 이런 일을 자행했는가?
성서를 깊이 읽기 원하는 사람들은
텍스트를 여러 각도에서 조명할 줄 아는 힘을 키워야 한다.
텍스트는 단지 어떤 사실의 결과를 정리하고 있을 뿐이지
그 내면에 들어있는 실체들까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설교자들은 그 내면까지 들어가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서 텍스트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 문헌, 그들의 종교적 규범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여호수아는 아간 사건 앞에서 고독하게 기도했을 것이다.
어떻게 처리하는 게 최선인가?
용서하는가, 징계하는가?
징계한다면 어느 정도인가?
결국 그는 가장 잔인한 징계를 결정했다.
아간의 씨를 말리는 것이었다.
여호수아가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오늘 내가 설명하지 않겠다.
단, 나는 그의 결정이 옳다고 본다.
그의 결정이 옳았기 때문에 그의 결정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결정이 역사 초월적으로 옳은 건 아니다.
그 당시에만 옳았다.
오늘 다시 아간 같은 사람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그런 사람은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늘 나오기 마련인데,
그를 여호수아가 그랬던 것처럼 잔인하게 처리하는 게 옳은 건 아니다.
이런 상황은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만이 선택할 수 있으며,
그만이 책임질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역사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걸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그런 것 없이 무조건 성서에 기록되어 있으니까
그것을 그대로 적용한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말씀을 오도할 가능성이 높다.
오늘의 한국도 ‘과거사’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이 분분하다.
그대로 묻어두고 갈 수도 있고,
모든 걸 까발리되 사법처리는 하지 않을 수도 있고,
특별법을 발동해서라도 모든 걸 엄격하게 사법적으로 처리할 수도 있다.
지금 아무도 역사의 진리를 확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게 바른 길인지 정확하게 진단하기 어렵다.
이건 이 시간에 이 역사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선택할 문제이다.
그게 잘된 것인지, 아닌지는 역사가 판단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결정적인 진리를 확보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 진리에 가장 가까운 기준을 제시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정치, 경제 문제들은 늘 치열한 논쟁을 필요로 한다.

아골 골짜기에 얽힌 설화는 단지 큰 돌무더기로만 전해진다.
비록 여호수아가 지나쳤다고 하더라도
이스라엘 민족을 그런 역사적 가르침을 통해서
야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배웠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어떤 ‘아골 골짜기’ 설화를 남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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