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표징(막 16:17,18)

조회 수 8334 추천 수 132 2005.11.04 00:27:26
  믿음의 표징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표적들이 따를 터인데, 곧 그들은 내 이름으로 귀신을 내 쫓으며, 새 방언으로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며, 독약을 마실지라도 절대로 해를 입지 않으며, 아픈 사람들에게 손을 얹으면 나을 것이다. (표준 새번역, 막 16:17,18)

예수님이 승천하기 바로 직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인 막 16:17,18절에는 오늘 현대인들에게 매우 낯선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 귀신, 방언, 뱀, 독, 병. 이 다섯 가지 중에서 비교적 오늘 일반적인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것은 안수를 통해서 병이 낫는다는 사실이 아닐까 생각한다. 목회 일정 중에서 병원 심방이 크게 차지하는 것만 보아도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신앙과 병 치유를 매우 밀접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모든 기독교 신자들이 그것을 실제로 믿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기도하거나 목사에게 안수를 받는다고 해서 반드시 병이 치료된다고 믿지는 않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런 종교적 행위에서 위로받는 이중적 신앙태도를 보인다.
오순절 계통이 신자들은 방언과 축귀 현상에 관심이 많다. 조용기 목사가 시무하고 있는 순복음 중앙교회는 이런 신앙형태가 일상화하고 있다. 주일공동예배 순서에 신유집회 성격의 프로그램이 들어가 있고, 조 목사의 설교에는 그런 예화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 교회의 구역장들은 모두 방언을 한다고 하던데, 실제로는 어떤지 모르겠다. 순복음중앙교회가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로 부흥하게 된 요인으로 신유, 축귀, 방언 현상을 꼽아도 잘못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조 목사가 독과 뱀은 별로 강조하지 않는 게 좀 이상하다. 그렇게 신유와 축귀를 자랑하고 있으면서도 독을 먹어보았다는 말이 없다는 게 이상하다. 왜 그럴까?
내가 지금 심술궂게 말하는 것 같지만 이 문제는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대단히 중요하다. 신유, 축귀, 방언은 신앙의 현실에서 결정적인 비중을 차지하는데 반해서 독과 뱀은 유명무실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질문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한다면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 취사선택할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말씀이 요구하는 세계로 용감하게 들어가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지금 그분들에게 독을 마셔보라고 억지를 부르는 게 아니라 성서 앞에서 일관성을 보여야 한다는 말을 하는 중이다.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성서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성서를 이용하는 것에 불과할지 모른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도대체 마가는 무슨 의미로 이렇게 이상한 현상을 다섯 가지나 열거하고 있을까? 나는 지금 여기서 마가의 집필 의도를 묻는 것이지 예수의 발언을 문제 삼는 건 아니다. 마가복음에는 분명히 예수의 언급으로 기술되어 있지만 그것을 예수의 친언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근거는 별로 없다. 원래 마가복음 16:9-20이 없는 중요한 사본들도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 본문이 예수와 직접 연결되지 않았을 개연성은 상당히 높다. 더구나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여기에 등장하는 다섯 가지 현상은 사도행전의 병행구를 따른 것이라고 한다. 축귀(행 16:16-18), 방언(2:1-11), 뱀(28:3-6), 신유(3:1-10)가 그것이고, 뱀과 연결되는 독은 저자 마가가 다른 구전에서 따 온 것이다.
다시 묻자. 마가 공동체는 무슨 이유로 이런 이야기를 복음서의 마지막 단락에 기록하게 된 것일까? 여기에는 훨씬 세밀한 성서 신학적 연구가 따라야 되겠지만, 우리는 상식적인 선에서 이 문제를 정리하자. 이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현상들이 믿는 사람들에게 따라오는 표징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일들은 원래 사도의 권위에 해당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마가는 사도의 권위를 배제하고 이런 현상을 일반 신자들과 연결시키고 있다. 어쨌든지 이 본문에서의 핵심은 믿는 사람들에게 따르는 표적이라는 사실이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지금 마가는 기적처럼 보이는 신기한 현상이 아니라 두 가지 주제, 즉 믿음과 표징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여기서는 우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중요하다. 어쩌면 이게 가장 큰 기적일 것이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은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런 믿음은 이 세상의 삶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살겠다는 결단이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표징이 따른다는 게 오늘 본문이 말하려는 두 번째 핵심이다. 마가는 그런 표징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 당시에 일반적으로 거론되던 그런 현상들을 인용했을 뿐이지 그 현상 자체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굳어진 체계가 아니라 살아계신 생명의 영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역사와 더불어 표징을 다양하게 보여주실 것이다. 아버지가 자녀들의 나이에 따라서 그 사랑의 표현이 다르듯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여주는 표징도 다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오늘의 기독교인들은 신유, 축귀, 방언 같은 2천 년 전의 표징에, 그것도 뱀과 독은 제쳐두고 자신들에게 필요한 그런 현상에만 매달리는 것일까?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믿음의 새로운 표징이 무엇인지 깊이 깨달 수 있는 것이야말로 살아있는 영성이다.

[레벨:0]김효준

2006.07.07 17:59:34

아, 그렇군요....
영성. . . 하나님의 눈으로, 하나님의 편에서. . .
2004년에 쓰신 글인데, 이제야 보네요.....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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