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신비


지구 안에서 생명을 보존하고 있는 생명체는 우리의 상상력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로 많다. 조류 박사라고 하더라도 그 많은 새를 모두 알지는 못한다. 곤충 박사라고 하더라도 그 많은 곤충을 모두 알지는 못한다. 세균 박사라고 하더라도 그 많은 세균을 모두 알지는 못한다. 깊은 바다 속에 서식하는 어류는 또한 얼마나 많은가. 땅 속의 미생물은 또한 얼마나 많은가. 나비의 종류도 많고, 벌의 종류도 많고, 뱀의 종류도 많다.

도대체 왜 이 세상에는 그렇게 많은 생명체가 존재하는 걸까? 우리가 미처 알 수도 없는 그 많은 생명체가 이 땅에 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말이다. 그저 인간과 나무와 몇몇 짐승, 그리고 몇 가지 물고기만 있어도 이 세상은 충분히 아름답지 않을까? 우리는 그 이유를 잘 모른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이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다만 그들 생명체들을 고유한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만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몇몇 먹이사슬로 그 관계를 조금 읽을 수는 있다. 개구리가 파리를 잡아먹고,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고, 산돼지가 뱀을 먹고, 하는 이런 유기적 관계 말이다. 먹이사슬의 가장 밑바닥에는 채소가 있고, 가장 위에는 사자, 호랑이, 그리고 그 위에 약간 다른 방식으로 인간이 자리하고 있다. 그것으로 먹이사슬이 완전히 해명되는 게 아니다. 인간은 세균에게 잡아먹힌다. 우리의 시체를 박테리아가 처리한다는 말이다. 결국 지구의 먹이사슬에서 절대 강자도 없고, 절대 약자도 없다.

지구의 생명체들이 이런 먹이사슬로만 관계를 맺는 건 아니다. 서로 공생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런 유기적인 관계가 그 안에서 작동한다. 그게 생명체의 신비이다. 도저히 우리가 따라잡을 수 없는 신비이다.

우리는 지금 인간 중심의 세계만을 최선으로 생각하지만 마이크로의 세계는 인간과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이다. 작은 물방울이 나뭇잎을 적시기도하고 땅속뿌리를 통해서 나무의 몸통을 타고 올라가기도 한다. 그 물은 태양, 탄소와 함께 탄소동화작용을 일으킨다. 탄소동화작용은 지구의 생명을 살리는 가장 밑바닥의 화학작용이다. 만약 식물이 탄소동화작용을 하지 않는다면 지구의 생명계는 파괴되고 만다. 그렇다면 결국 지구의 생명은 물이 식물의 몸을 타고 올라가는 그 마이크로의 물리작용에 근거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중력을 거슬러 올라가는 모세관 작용은 일종의 마술과 같다. 물과 나무가 빚어내는 마술이다. 그 마술에 의해서 지구는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이 놀라운 생명 현상을 구약 기자들도 잘 알고 있었다. 야훼 하나님은 폭풍우 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셨다.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그 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옷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 한계를 정하여 문빗장을 지르고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 하였노라. 산 염소를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암사슴이 새끼 낳은 것을 네가 본 적이 있느냐 누가 들나귀를 놓아 자유롭게 하였느냐 누가 빠른 나귀의 매인 것을 풀었느냐 네가 능히 줄로 매어 들소가 이랑을 갈게 하겠느냐 그것이 어찌 골짜기에서 너를 따라 써레를 끌겠느냐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 너는 밧줄로 그 코를 꿸 수 있겠느냐?”

욥기서 기자의 고백은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알고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아는 것만큼 모르는 게 많아질 뿐이지 모르는 게 근본적으로 정복되는 게 아니다. 근원자가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지 않는 한 우리는 이 무지에서 깨어날 가능성은 없다. 그 이유는 우리가 바로 피조물이라는 사실에 있다. 던져진 존재는 이 세계를 바로 인식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런 인식론적 한계를 절감하고 있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재림을 이 세상의 완성으로 보고, 그때에 모든 인식도 완성된다고 믿는다. 그의 재림으로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생명의 세계가 시작되는 것 말고 궁극적 생명을 알 수 있는 길이 어디에도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 우리는 이 세상이 아무리 신비롭고 불가해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의 재림에 이 땅에서의 삶과 그 이후까지에 이르는 우리의 전체 운명을 걸고 사는 사람들이다.



세례


우리가 세례 받을 때 교리공부와 문답을 한다. 그런 공부를 통해서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죽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이런 정도의 교리를 모르는 기독교인은 하나도 없겠지만 그것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기는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죽는 것은 아니다.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해서는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는 하지만 이런 말을 우리가 명확하게 인식하기는 쉽지 않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가보다 하는 정도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 교회의 세례교육은 좀 더 철저하게 실시할 필요가 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최소한 6개월 동안 영세 교육을 받는다고 하는데, 우리 개신교에서는 서너 번 정도의 교육으로 끝이다. 형식적으로 6개월이라는 기간을 채우는 것으로 모든 게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개신교의 세계 교육은 준비가 소홀하다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대충 세례를 받고 성수주일과 십일조나 잘 드리는 신자가 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례는 죽음이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바울은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3절) 여기서의 죽음이 육체적인 게 아니라고 한다면 정신적인, 또는 심리적인 차원의 죽음을 말하는 것인가? 또한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는다고 한다면 세례를 받은 다음에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세례 전이나 후나 별로 달라지는 게 없다. 지금은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이 흐려져서 그렇지 초기 시대에는 실제로 죄와 아무런 상관이 없이 살았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아마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인간은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차이가 없다. 그들도 육체의 욕망에 사로잡혀서 살았고 지금 우리도 역시 그렇다. 도덕적인 면에서 그 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똑같은 모습 그대로의 인간이다. 이런 점에서 초대 교회 신자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불완전하게 살았을 것이다.

또 하나의 다른 대답으로, 세례를 받았는데도 죄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은 세례를 아무런 준비 없이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교부 시대에는 세례를 죽을 때 받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기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순수한 것을 추려내기 시작하면 어느 누구도 교회 안에 남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준비가 많았든지, 불충분했든지 그런 것에 상관없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이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면 그는 분명히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세례 이후에도 죄를 짓거나 시행착오를 많이 일으킨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바울은 로마서 6장 7절에서 이상한 말을 한다. “이미 죽은 사람은 죄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그 이전의 모든 계약과 상관이 없는 것과 같다. 죄의 근거이기도 한 율법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타당하다는 점에서 죽음은 곧 율법으로부터 해방이며, 따라서 죄로부터의 해방이다. 이 말은 곧 죽음은 모든 율법적 규범으로부터 인간이 자유로워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툭하면 자살을 한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보면 그 사람이 죽으면 모든 채무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율법은 죄를 인식하게 하고 죄를 확증하는 체제이기 때문에 이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말은 곧 죄에서 해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적인 문제를 지나치게 법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 같지만, 이런 해명은 보다 심층적인 인간과 세례 이해를 그 바탕에 두고 있다. 앞에서 바울은 “법이 없으면 죄도 없다.”고 과감하게 주장한 바 있다. 좀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식인종들이 인간의 살을 먹는 행위는 죄가 아닐지도 모른다. 티베트에서는 지금도 죽은 승려들의 시체를 토막을 내어 독수리 먹이로 준다고 하는데, 이런 행동이 그들에게는 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자기 것과 남의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행동도 역시 죄가 아니다. 법은 그 법이 인식되는 범주에서만 타당한 제도이기 때문에 죽음은 근본적으로 죄로부터 해방되는 사건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더 근본적으로 생각해야 할 부분은 기독교가 이해하는 생명은 죽음이라는 사건으로 단절되는 게 아니라 그것을  극복한다는 사실이다. 그럴 경우에만 바울의 이 말은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의 법과 종교적인 율법으로 규정되어야 할 이 땅의 삶에 한정되지 않는 절대적인 생명의 세계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이런 논리는 허구이며 순수관념에 떨어진다.

기독교 신앙은 이런 절대적인 세계와 이 세상 사이에서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다. 오늘 바울이 세례 사건을 해명하면서 전제하고 있는 이 절대세계의 논리를 이것 자체로만 생각하면 자칫 추상적이고 개인적인 관념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인이 오늘의 현실적 삶을 외면하거나 간과해도 좋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주장하는 게 아니다. 오늘 여기서의 삶이 가장 명확하게 인식되기 위해서는 이것 자체로만이 아니라 이것이 근거하고 있는 어떤 세계와의 연관성 속에서 접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쨌든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이제 율법과 상관없는 세계로 들어갔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대로 죽은 자는 죄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죽지 않았다. 우리가 죽은 게 아니라 예수가 죽었는데도 세례를 받은 우리에게 이런 죽음의 사건이 일어났다는 말은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되었다.”는 말이다. 직접 죽지는 않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죽은 것과 똑같다.



영적인 사람


도대체 우리는 어떤 사람을 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 그래서 최소한 40일 금식기도를 하고, 기도를 너무 많이 해서 목소리까지 탁성으로 변한 사람이 영적인 사람일까? 그럴 수도 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호흡이니까 그런 호흡이 일상화한 사람이야말로 영적인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여기에서도 우리는 그런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라 기도가 무엇인가에 까지 우리의 질문을 넓혀가야 한다. 전문적으로 기도하는 사람들, 너무나 능숙한 기도꾼들, 심지어 남의 사생활까지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기도 빨(?)이 센 사람들을 기도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거꾸로 굳이 따로 기도의 시간이 없다고 하더라도 늘 하나님과 영적인 소통이 끊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기도하는 사람일지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형식 안에서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을 무조건 영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가 어떤 영적인 열매를 맺는가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다.

과연 영적인 열매라는 게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도 우리가 생각할 거리는 제법 많으니까 이 질문은 잠간 뒤로 미루고, 영적인 사람에 대한 논의로 좁혀서 생각을 밀고 나가자. 누가 영적인 사람인가? 전도 많이 하는 사람, 헌금 많이 하는 사람, 교양이 풍부한 사람, 그래서 교회에 덕을 끼치는 사람이 바로 영적인 사람인가? 우리는 그걸 분간할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에 누가 영적인 사람인지 단언할 수 없다. 궁극적으로 말한다면 영적인 사람은 오직 영 자체이신 성령만이 분간할 수 있다. 사람은 매우 영특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남을 쉽게 속일 수 있다. 그래서 영적인 사람인 것처럼 행세할 수 있다는 말이다.

누가 영적인 사람인가, 하는 질문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다만 우리는 무엇이 영적인 것인가에 대해서 질문할 수 있을 뿐이다. 영적인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는 당연히 영적인 것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영적인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면 영적인 사람을, 완전하게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구별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엄밀하게 말한다면 영적인 것에 대해서 질문하기 전에 영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질문해야 한다. 영적인 것은 영에 의해서 배출되고, 영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이 두 질문, 즉 영적인 것이 무엇인가와 영이 무엇인가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한쪽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른 쪽의 설명이 필요하며, 한쪽을 설명으로 다른 쪽의 설명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문제의 핵심으로 직접 들어가지 않고 자꾸만 주변만 맴돌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영에 대해서 직접 무언가를 말할 수 있긴 하지만 내가 이렇게 주변에서 서성이듯이 언급하는 이유는 이런 과정이 곧 신학이며, 신앙적 인식이라는 사실을 전하려는 생각 때문이다. 우리는 그 어떤 궁극적인 실체를 완벽하게 이해하거나 포착할 수는 없다. 다만 그쪽으로 가깝게 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하는 게 최선이다. 그러니까 영이 무엇인지 직접 말할 수는 없고, 거기에 이르는 질문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가능하다면 합당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야말로 학문이 근본이다. 어떤 점에서 기독교 신앙도 이렇게 근본에 대해서 질문하는 태도이며 결단인지 모른다. 다시 우리의 길을 찾아서, 영이란 무엇이며, 영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기 위해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까?

일반적으로 신학은 모든 길을 성서로부터 시작한다. 그렇다면 영에 관한 질문도 성서로부터 시작하는 게 원칙이다. 만약 성서가 말하는 영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이에 관해 설명하는 많은 책이 있으니까 그걸 참조하면 된다.

하나님이 인간과 이 세계를 창조할 때 활동했던 영에 대해서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영이 어떻게 활동했는지에 대해서 마찬가지이다.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서 기자들은 영에 대해서 풍부하게 보도하고 있다. 이에 관한 설명은 내가 여기서 생략하겠다. 이 모든 성서의 보도를 아무리 정확하게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결국 영을 아직 완전하게 인식할 수 없다는 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성서의 영이 불확실하다는 게 아니라 이런 궁극적인 세계는 종말의 지평에서만 해명될 수 있다는 뜻이다.

아직 종말이 오지 않은 상태에서 그 종말에 가서야 완전히 드러나게 될 영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단 말인가? 다만 우리는 잠정적으로 무언가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아무런 근거도 없다는 건 아니다. 성서와 기독교 2천년 역사와 인류가 발전시켜온 많은 진리론적 정보들이 있다. 가능한대로 그런 공부를 충실히 할 뿐만 아니라 현재의 역사를 뚫어볼 수 있는 통찰력도 필요할 것이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영적인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위에서 언급한 그런 공부에 철저하고, 오늘의 역사에서 활동하는 성령을 이해하기 위해서 영적인 시각을 날카롭게 유지하는 사람이 바로 영적인 사람이다. 대답이 아직 시원치는 못한 것 같다. 영적인 사람이란, 인류 과거 역사에 한정되지 않고 종말의 역사에까지 열려있는 그런 생명의 영을 향해서 영적인 촉수를 움직이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이 구약의 예언자들이었으며, 신약의 사도들과 성서기자들이었고, 기독교 역사에 등장했던 많은 신학자들과 신비주의자들이었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아직 미진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어쨌든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종교적 형식을 능란하게 수행하는 사람을 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을 지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생명의 영, 진리의 영, 창조의 영, 정의와 평화의 영, 삼위일체의 영은 결코 그런 종교적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인식해야한다.

그렇다면 종교적 형식이 무의미하다는 걸까? 아니다. 종교 형식은 이 영의 활동을 담아내기 위한 최소한의 그릇이다. 이 말은 곧 영을 경험하기 위한 가장 정확하고 빠른 길의 하나는 곧 예배, 기도, 찬송, 성만찬 같은 종교 형식, 상징이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종교가 바르게 역할만 한다면 사람들에게 영을 경험하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다.



창조와 세계


이 세계를 이해하고 그 세계와 하나 되기 위해서 화두를 붙들었던 동양의 선승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신앙에서도 하나님을 이해하고 그 하나님과 하나 되기 위해서 그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신앙적, 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구약성서의 첫머리에 배치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 말은 곧 그들도 역시 자신들 앞에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 이 세계의 힘과 그 신비 앞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는 뜻이다.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 밤하늘의 총총한 별, 태풍, 지진, 화산폭발, 가뭄 등등, 그들의 인식론적 한계를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이 세계를 언급하지 않은 채 하나님을 생각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더 근본적으로 이런 세상의 비밀을 눈여겨보았기 때문에 야훼 하나님의 계시를 인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창세기의 창조설화만이 아니라 구약성서 전체에는 이런 창조의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면면히 흐르고 있는데, 기독교 신앙은 바로 이런 유대교의 창조신앙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사도신경의 첫 항목이 ‘천지를 창조한 전능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이런 사실에 대한 반증이다.

간혹 죽음 이후나 최후심판 이후의 세계를 무조건 이 세상과 상관없이 초월적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의 부활이 가리키고 있는 그런 새로운 생명의 세계는 단순히 이 땅의 삶이 연장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초월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과 이원론적으로 구분되는 세계는 아니다. 차안과 피안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함으로써 결국 이 창조의 세계를 무시하거나 더 나아가 악하게 보는 것은 결코 성서의 가르침이 아니다.

이러한 이원론적인 세계 이해가 기독교 신앙에서 두 가지 오류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초월적 열광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극단적인 실존주의이다. 초월적 열광주의는 말 그대로 세상을 초월하는 이데아의 세계만을 지향하며, 극단적 실존주의는 이 세상과 아무런 상관없이 개인의 실존에만 집착함으로써 결국 이 양자는 이 세상, 이 세상의 물(物), 이 세상의 역사를 간과되거나 해체해버린다. 특히 한국 기독교는 규범에 묶이는 청교도적인 윤리관과 영적인 부흥운동 유의 신앙에, 더구나 축자영감설을 수호하는 근본주의적 신앙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와 역사에 관한 태도가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배타적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신앙의 가장 중요한 토대로 삼는 기독교 신앙은 이와 관련해서 두 가지 신학적 관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하나는 우리의 몸과 자연의 일치이다. 하나님이 만드시고 보기에 좋았다고 선언하신 이 세상을 인간이 몸으로 즐긴다는 건 바로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향한 찬양(doxology)이다. 요르크 칭크는 모든 존재하는 것에 관해 모든 감각과 모든 능력으로 지각해야 한다는 사실을 매우 중요한 기독교 신앙의 근거로 설명한다. “저는 숲 가장자리로 걸어갑니다. 저는 나무들 사이의 빈 곳으로 가서 땅을 바라봅니다. 그때는 생명이 약동하는 이른 아침일 때도 있고 만물이 고요해지는 저녁일 때도 있습니다. 들판과 초원, 길과 꽃 그리고 집들이 제 앞에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저는 그 모든 것을 마주 대하고 있습니다. 저 홀로.”(Jorg Zink,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32).

또 하나의 다른 신학적 관점은 우리 앞에서 벌어지는 생태계 파괴이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세계의 파괴 앞에서 무엇을 생각하며, 무슨 실천을 모색해야만 하는가? 우리가 단지 영혼구원에만 몰두하는 소종파가 아니라 세계를 창조하고 보존하는 하나님을 보편사적 지평에서 믿는 종교라고 한다면 왜곡된 역사와 자연 앞에서 책임 있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이 창조 문제를 핵심 메시지로 수용하지 않는 교회는 결코 건강한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 몰트만은 오늘 창조론의 문제가 오늘날 새롭게 부각되었다고 설명한다. “오늘날 그 당시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질문이 전면에 나타났다. 요즘처럼 산업화로 인해서 자연이 파괴되고 있는 시점에서 하나님 창조자에 관한 믿음은, 그리고 세상을 창조로 믿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소위 <생태위기>는 인간 환경의 위기만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자체의 위기와 마찬가지이다. 그 위기는 총체적이고 불가역적이기 때문에 지구라는 혹성에서 벌어지는 생명의 묵시록적 위기라고 볼 수 있다. 이 위기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위기가 아니다. 그것은 죽음의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모든 예측이며, 지구에서 벌어지는 창조가 죽음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예측이다.” (J. Moltmann, Gott in der Schöpfung, Vorwort 11).

이런 점에서 볼 때 창조의 세상을 신학적으로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주변적인 작업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본질적인 작업이다. 그동안 이 창조문제는 심미적인 차원이나 더 심하게는 인간의 편리한 삶을 위한 도구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졌는데, 이제 우리는 가능한대로 이 세계를 물리학과 철학의 도움으로 정확하게 파악해야하며, 생태계의 위기를 몰고 온 이유에 대한 사회과학적인 분석도 필요하고, 더 근본적으로는 성서의 창조 이해와 신학적 개념을 충분하게 따라잡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신학적 창조론의 지평을 심화한다는 것은 곧 종말 이후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칭의와 성화


요즘 성화를 강조하는 설교와 그런 목회자들이 늘어나는 추세이다. 이는 곧 기독교 신앙이 원초적인 믿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데 머물지 않고 변화된 삶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일단 바람직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제시하는 성화가 신학적으로 정당한지,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신자들의 삶을 건강하게 끌어가는지에 관해서는 좀 더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 여기에는 서로 맞물려 있는 몇몇 신학적 혼선이 개입되어 있는 것 같다.

첫째, 요즘 성화를 강조하는 이들의 생각에는 칭의(稱義)와 성화(聖化)가 이원론적으로 구별되는 경향이 강하다. 그들은 늘 입버릇처럼 칭의로만은 충분하지 못하다거나, 혹은 칭의로 구원받기는 하지만 참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 더욱 거룩한 삶으로 성화되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런 성화의 과정이 곧 칼빈이 말하는 ‘신자의 견인’이라는 말도 덧붙인다. 이런 주장이 일견 매우 성서적일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의 근본 가르침인 것처럼 보이지만 한걸음만 속으로 들어가 보면 얼마나 부실한지 쉽게 알 수 있다.

내가 보기에 성서는 성화를 칭의와 대칭되는 개념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칭의와 성화가 서로 다른 신학적 개념인 것 같지만 실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칭의와 성화는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구원 사건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차원에 속한다. 즉 구원의 실체에 관한 인식론적 한계로 인해서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칭의와 성화라는 개념으로 그것을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을 뿐이지 그것이 존재론적으로 구별되는 사건은 아니라는 말이다. 원칙적으로 본다면 성화 역시 칭의에 포함된 사건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부의 목회자들이 칭의를 성화와 대칭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이유는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데 있는 것 같다. 종교개혁자들은 로마가톨릭교회가 인간의 믿음만이 아니라 행위까지 칭의의 조건으로 내세운 것에 반발해서 ‘오직 믿음’(sola fide)을 주장했다는 기초적인 사실만 알고 있어도 기독교인다운 윤리에 해당되는 성화를 칭의와 대칭되는 것으로 접근하지는 않을 것이다.

둘째, 성화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칭의가 성화를 통해서 보충되어야만 할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신생아가 자라는 과정을 예로 든다. 신생아가 태어나면 인간이긴 하지만 완전한 인간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 아이는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아서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만 사람 구실을 하는 것처럼 기독교의 신앙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해야 한다. 이들의 말은 일리가 있다.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인의 성숙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으며, 실제로 교회 생활에서도 성숙한 기독교인과 그렇지 못한 신자들이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열정적으로 믿기는 하지만 사회생활에서는 별로 이렇다 할 모범을 보이지 못하는 걸 보면 성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만 하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칭의의 엄밀성을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류이다. 인간은 아무리 성화되어도, 즉 순교자 정도의 신앙적 순수성과 프란체스코처럼 실제의 삶에서도 온전한 사람이 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칭의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일이 없다면 아무도 자기의 행위(윤리)로는 의로워질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칭의 이후에 성화의 과정을 거친다기보다는 칭의와 성화를 동시적인 사건으로 여긴다. 칭의를 보충하기 위해서 성화가 필요한 게 아니라 칭의가 성화이며, 성화가 곧 칭의라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의 실존은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이고, 죄인이며 동시에 의인”이라는 루터의 주장은 정당하다.

셋째, 성화를 강조하는 사람들의 가장 결정적인 오류는 성화를 우리가 노력해서 성취해야 할 어떤 것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교회 생활에서 본이 될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에서도 본이 되도록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매우 감동적으로 전하고 있다. 나는 이런 분들을 볼 때마다 한편으로는 매우 순진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뭘 모르고 있는 것 같아서 연민을 느낀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삶의 변화는 아예 입에 담을 필요도 없는 당연한 주장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인들도 역시 자비와 평화의 삶을 살려고 애를 쓰고 있으며, 일반 사람들도 그런 삶의 변화를 늘 마음에 두고 있다.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의 훈화에 불과한 이러한 사실을 칭의와 성화라는 구조를 통해서 매우 대단한 가르침인양 떠든다는 게 참으로 우스꽝스럽다.

다른 하나의 이유는 인간 삶의 변화는 이렇게 ‘변화해야 한다’는 주장으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일반 교육에서도 학생들을 책망하거나 잔소리하는 방식이 아니라 교사가 스스로 모범을 보인다거나, 더 근본적으로 삶과 역사의 본질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게 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의 변화를 모색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사람들이 신자들에게 ‘정직해라’, ‘착하게 살아라’, ‘섬기며 살아라’ 하고 외친다는 건 기독교의 복음을 율법과 윤리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예수님은 한 번도 이런 잔소리를 하신 적이 없다. 그는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거기에 철저히 의존해서 행동하셨을 뿐이다. 그런데 왜 오늘의 설교자들은 기독교 복음의 본질이 아닌 성화로 신자들을 닦달하는지 모르겠다. 선무당이 사람을 잡는다는 말이 있다는데, 공연히 고상한 것처럼 성화 운운하지 말고 최소한 ‘칭의’의 깊이에 들어갈 수 있도록 성서와 신학공부나 다시 철저하게 하는 게 어떨는지.



하나님의 은폐성


우리가 하나님을 꽃이나 새, 또는 안개처럼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확인할 수 있다면 속이 시원할 텐데 그런 방식으로는 도저히 확인할 수 없어서 답답할 때가 많다. 아주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라도 이런 답답증을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다. 물론 기도의 응답이 있었다든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쁨과 평화의 마음에 휩싸이는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경험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는 없다. 그럴 때마다 믿음이 부족한 자신을 탓하기도 하고 더욱 열심히 기도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가 간단히 해결되는 게 아니다. 아마 이 문제는 우리가 죽은 다음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야, 또는 종말이 온 다음에야 비로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왜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인식이 불가능한가? 그 답이 곧 하나님의 은폐성(Deus absconditus)이다. 하나님은 계시하는 분이지만 동시에 은폐되어 있는 분이다. 성경을 구구절절이 꿰거나, 또는 지금까지의 모든 물리학, 철학에 관한 학문에 능통하더라도 역시 하나님을 완전히 아는 자는 이 세상에 없다. 하나님을 증언하고 있는 성서도 역시 하나님을 완전하게 밝히고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인식 범주 안에 들어올 수 없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그런 하나님은 거룩한 분으로 증언되며, 이 거룩한 분을 직접 본 자는 죽는다고 까지 했다. 즉 못 볼 것을 본다는 것은 죽은 자에게만 허락되는 사건이다.

사실 하나님만이 아니라 우리 앞에 이렇듯 명백한 현상으로 드러나 있는 생명도 역시 그 궁극적 사실은 은폐되어 있다. 여기 민들레꽃이 있다고 하자. 그 꽃은 햇빛과 물과 탄소를 결합해서 자기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양분을 생산한다. 우리의 모든 먹을거리가 그런 기본적인 과정을 거치고 있는데, 그렇다면 생명의 기초 단위는 햇빛이라는 말일까? 아니면 탄소, 또는 물인가? 그 모든 것인가? 그 중에 하나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가? 생명공학자가 이 문제를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런 설명은 현상에 대한 추상적 접근에 불과하지 근본에 대한 완전한 해명은 못된다. 오늘의 첨단 과학이 생명의 기원에 상당히 접근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생명현상에 대한 아무리 많은 정보가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이 생명의 본질에 대해서는 우리가 고대인들보다 더 잘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똑같이 무식한 셈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생명을 말하려면 그것 이전에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해명해야만 한다. 하이덱거가 질문하고 있듯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있고’, 존재하지 않는 것들은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는 지금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을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감각 범주 안에서만 통용되는 주장에 불과하다. 하이덱거에 의하면 오히려 존재하지 않음으로서 무엇을 존재하는 그 어떤 것이 바로 존재(Sein)이다. 이 존재는 존재하는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구분하는 우리의 감각범주에 들어와 있지 않은 절대적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런 절대적인 것은 은폐되어 있다. 우리의 과학기술이나 명상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방식으로 노출되는,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는 여전히 은폐의 방식으로 노출되는 힘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물질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지금까지 원자를 기초로 한 어떤 물질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현대 물리학은 물질이 있는 게 아니라 빈 공간과 에너지의 결합일 뿐이라는 점을 밝혀냈다. 핵과 전자로 구성되어 있는 원자는 입자가 아니라 너무나 작아서 거의 무시해도 좋을 정도의 핵과 그것보다 더 미세한 전자가 어떤 방식으로 운동하고 있는 것이다. 원자의 핵은 원자를 대형 교회당으로 확대했을 때 그 안에 있는 찬송가 악보의 작은 보표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공간일 뿐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 핵 마저도 역시 그런 구조로 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답은 물질이 무엇인지 우리가 아직 모른다는 것, 즉 물질 자체가 은폐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 존재, 물질의 은폐와 연관된 하나님의 은폐는 그렇게 어둠으로만 남아 있는 건 아니다. 우리는 예수의 부활에서 하나님이 계시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계시마저도 역시 완전한 노출이 아니라 은폐의 방식을 취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예수의 부활에서 자기를 은폐의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게 바로 신학이며 설교다. 바로 이 예수 사건에 이 우주의 모든 비밀을 풀 수 있는 토대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조금 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예수의 부활에서 종말이 이미(schon) 선취적으로 발생했다고 믿으면서 동시에 아직은 완료되지 않은(noch nicht) 상태라고 믿는다. 계시와 은폐의 변증법으로 우리 기독교는 세상을 해석하고 구원론적 지평을 제시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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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9.08.14 23:42:14

강의를 준비하면서 적합하지 않은 제목을 빼고

필요한 것은 다시 보충했습니다.

수련회 팜프렛에 새로운 내용이 실릴 겁니다.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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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2009.08.14 23:45:47

목사님, 이렇게 올려 주시니 이해가 퍼뜩 되는군요..

수련회 참석 하기 힘들것 같지만 참석하는 마음으로 공부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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