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적 성서읽기
아래와 같이 2005년 전반기 성서공부가 준비되었습니다.
일시: 3월8일(화)-6월28일(화), 매주 화요일 저녁 8시-9:30
장소: 대구성서아카데미
내용: 사도행전 9장부터
준비: 필기도구외 없음
대상: 제한 없음
회비: 없음
도대체 인문학적 성서읽기가 무엇일까요?
별 게 아닐 수도 있고, 약간 별 거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성서성부는 일반적으로 두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성서에서 순전히 성서에 관한 정보를 얻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삶의 교훈이나 지침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귀납법적이라거나 독자 중심이라는 말로
치장되기는 하지만 대개는 위의 두 목적에 의해서 움직였습니다.
성서의 내용을 달달 외우듯이 공부하거나
아니면 거기서 도덕적인 교훈을 찾으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게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여전히 성서가 도구적으로 사용될 뿐이라는 한계가 있습니다.
인문학적 성서읽기는 우리의 필요에 따라서 성서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성서 안으로 들어가는 방식입니다.
일종의 계시론적 성서읽기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내가 이것은 얼마나 완변하게 처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성서에 존재론적으로 담지된 계시의 능력에 의존하는 성서읽기라 할 수 있는
이 인문학적 성서읽기는 이런 점에서 당장 효과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성서의 세계로 들어가는 훈련을 배우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흡사 우리가 휄덜린이나 괴테의 시를 우리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 시의 존재론적 능력이 드러나게 해야하는 것처럼
우리는 성서의 그런 계시 능력에 철저하게 의존해보려고 합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궁금한 일이 있으면 아래 대글로 물어주세요.
정용섭.
좋은 질문을 해 주셨군요.
대개의 사람들은 궁금하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는데 말입니다.
'존재론적 능력'이라는 말을 약간 따라잡기만 하더라도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은 훨씬 심화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개념을 설명하기가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강의 시간도 아니니까 가능한대로 간단하게 요점만 전달해보겠습니다.
여기 사과가 하나 있다고 합시다.
우리는 그 사과라는 사물을 보고 맛있겠다거나, 예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이 주체가 되어서 그것을 판단하고 처리합니다.
대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이런 식입니다.
그러나 조금 생각을 바꿔보세요.
그 사과가 자체적으로 어떤 세계를 갖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 세계는 아무도 처리할 수 없는 그 사과만의 고유하고 배타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곧 사과의 존재론적 세계이며, 능력이며, 힘입니다.
시인들은 그것을 포착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혹은 화가들도 그렇습니다.
그 사과는 단지 맛있다거나 예쁘다는 고정된 사물이 아니라
훨씬 깊고 넓은 세계를 갖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 사과는 온 우주와 같은 깊이와 무게를 갖고 있을지 모르지요.
그것을 근거로 해서, 혹은 그것에 의존해서 생각하는 게 곧 존재론적인 사유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존재론적인 사유가 힘든 것은
우리가 거의 어떤 선입관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과의 존재론적 능력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사과만이 아니라 이 세계의 모든 사물은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지구과 그 안의 생명들이 그런 유기적 관계 안에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설명이 됐는지 모르겠군요.
아, 성서의 존재론적 능력이라는 말을 한 마디 더 해야겠군요.
우리가 우리의 신앙이나 생활에 필요한 요소들을 성서 안에서 찾아내는 것과는 다른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성서는 우리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훨씬 근원적인 생명의 세계와 존재론적으로 닿아 있습니다.
그걸 우리가 찾기 위해서는 어떤 선입견, 고정관념을 버리고
바람처럼 활동하시는 성령에게 의존해야지요.
이를 위해서 인문학적 소양, 신학, 그리고 영성이 동시에 필요합니다.
저도 아직 충분한 준비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노력할 뿐이지요.
그럼, 이만.
외람되이 목사님의 명쾌한 말씀에 댓글을 달게 되었습니다.
아래에 달리는 두서 없는 이야기는
저의 사유의 지평이 막힌 까닭으로 이해해 주시고,
막힌 길을 열어 주시는 말씀을 고대합니다.
목사님!
'자기'나 '자아'의 경험이나 관념에서 비껴 있는
'존재'에 대한 인식이 가능한가요?
여기 김춘수시인의 '꽃'이란 작품을 살펴봅니다.
김춘수시인의 '꽃'이란 작품속에서
'꽃'은 시인과의 관계 이전의 '꽃'과, 관계속의 '꽃'으로
시인을 향해서 전혀 별개의 존재로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에게 있어서 관계 밖에 있는 '꽃'의 존재나,
관계 안에 있는 '꽃'의 존재 둘 다
경험적이고 관념적인 인식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존재론적 사유'라는 것도
경험이나 관념의 연장선에 묶여 있는 바 되지 않을까요?
목사님!
제가 여쭙고 싶은 것은
이런 '존재론적 사유'가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어떤 선입관'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평강의 주일 되십시오.
이미 허정수 씨가 이런 부분에서 어느 정도의 내공이 있다는 뜻이군요.
그곳에 있는 꽃을 꽃이라고 부른 다음에
그 꽃이 나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는 시이던가요?
시인이니까 언어존재론적인 사유를 할 수밖에 없겠지요.
하이데거도 역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으니까
서로 통하는 이야기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꽃”이라는 언어는
단지 우리가 막연하게, 혹은 습관적으로 내놓는 언어라기보다는
꽃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기 이전의 그 꽃이 자기를 나타내는 순간을
알아챈 시인이 붙이는 언어입니다.
그 전에는 꽃이라는 언어는 숨어 있기 마련이죠.
그렇습니다.
시인은 사물의 숨어있는 세계를 밖으로 끌어내는 마술사입니다.
성서 기자들도 역시 이런 점에서는 시인들입니다.
이런 시인들, 이런 예언자들, 이런 성서 기자들이 없으면
하나님은 은폐되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의 도구적인 언어로는 결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학에서는 <계시>라는 말을 합니다.
우리가 범주화하거나 계량화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자기를 나타내는 사건이 곧 계시입니다.
그 계시를 인식하고 언어로 표상화할 줄 아는 사람들이
곧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좀 말이 신학적으로 흘렀군요.
허정수 씨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존재’라는 게 우리의 경험과 일종의 선입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가?
이 질문에는 약간의 오류가, 혹은 관점의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지금 우리가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즉 우리의 인식론적 능력을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어떤 사물과 현상과 사태를 우리가 인식하려면 당연히
어떤 공부, 경험, 전이해가 필요합니다.
이건 바로 우리의 인식론의 관한 것이지요.
그래서 교육이 필요합니다.
과학자들이 하는 행위가 바로 이런 경험의 이론화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인식행위가 포착해낼 수 없는 어떤 근원적인 세계,
혹은 근원적인 힘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그것을 하이데거는 ‘존재’라고 했고,
노장은 ‘도’라고 했으며,
기독교는 ‘계시’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인식론적 능력으로는 도저히 포착해낼 수 없는 세계입니다.
다른 글에서 한번 예로 들었지만
물고기들은 물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물고기들은 ‘물안의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들에게도 물고기의 물과 같은 그 무엇에 들어 있습니다.
그게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거죠.
약간 그 흔적만 경험할 뿐입니다.
가장 확실하다고 하는 물리학을 생각해보세요.
그게 대단히 확실한 인식론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세계는 아주 부분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코끼리의 털 하나도 되지 못합니다.
그것마저 불확실합니다.
이 말에 동의하지 않으실지 모르겠네요.
나도 잘 모릅니다.
유전공학이 앞으로 인간의 생명의 신비를 밝힐지 모르지만
아무리 발달한다고 하더라도 유전공학은 여전히 부분적인 것밖에는 밝히지 못할 겁니다.
그건 그렇다 하고,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우리의 인식론적 노력은 무의미하다는 것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경험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이 세상의 현상을 분석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 이 세계를 모두 파악할 것으로 내다본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대신 우리는 계시가 자기를 드러낼 때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준비를 하기 위해서
공부하고 생각하고 경험을 쌓아야 합니다.
우리가 존재의 근거를 밝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존재가 우리에게 다가올 때 외면하지 않기 위해서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재림신앙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재림이란 우리의 인식론적 체계와 선입관을 너머에서, 초월해서
어떤 궁극적인 생명의 사건이 임하게 된다는 교리입니다.
말이 길어지네요.
뭘 잘 모르는 사람은 이렇게 말이 많은 법입니다.
성서라는 언어는 여전히 감추어져 있습니다.
달을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이라 할 성서는
이 세상이 끝날 때 밝혀지게 될 어떤 세계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는 우리의 경험 안에서 재단될 수 없습니다.
성서 자체가 자기를 드러내는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하다보면 내가 좀 신비적이거나 비의석이지 않나 하는
오해를 받을 수 있겠네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문학적 토대가 성서읽기에서 중요하다고 보는 사람이니까
저는 여전히 보편적인 인식론 안에서 살아갑니다.
허정수 씨가 마지막으로 한 질문인
존재론적 사유가 선입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이것은 보기에 따라서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습니다.
존재의 드러남을 인식하기 위해서 우리의 인식론적 토대가 중요하다는 뜻이라면
옳은 말이고,
우리의 경험과 인식능력으로 궁극적인 진리라 할 존재를 파악할 수 있다는 뜻이라면
내가 동의하기 힘듭니다.
좋은 말벗이 되어주어서 고맙습니다.
이만.
어리석고 부족한 저의 우문과 주장에도 친절하게 답해 주시니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또 댓글을 답니다.
댓글을 붙이는 저의 지금 심정이 즐거운가 봅니다.
목사님께서 답글로 설명하신 내용을 '존재의 드러냄'에 중심을 두시고 하신 말씀으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는지요?
그런데도 곁길로 빠지는 저의 궁금증은 이것입니다.
'인식행위가 포착해 낼 수 없는 세계', 불가지의 영역을 저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가지의 영역이 '있다'(존재)고 사유하는 동시에,
포착해 낼 수 없는 세계는
경험적이고 관념적인 대상인식의 범주에 '갇히게 되고만다'는 것입니다.
한편,
'달을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이라 할 성서'라고 한 목사님의 말씀에 공감하면서도,
성서가 달을 지시할 뿐만아니라, 성서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형상을 담고있고,
그 분을 드러내 보이는 존재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목사님께서 언급하신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한 하이데거에 근거해서 말입니다.
저는 가끔 유희적 사고놀이를 해 보곤합니다.
인식한 세계든, 인식하지 못한 세계든, 인식할 수 없는 세계든,
내가 없다면 세상이 없지 않은가?
왜냐하면 대상을 경험하고 사유하는 주체가 없기 때문에...
그렇지만,
내가 없다고 해서 실존적 자기 주체인 세상이 없다고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나의 존재는 무엇인가?
저도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물리학이나 유전공학등의 명증한 과학적 인식론의 한계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과학적 인식으로 포착할 수 없는 세계,
이 계시의 사건속으로, 그 빛속으로,
'인문학적 성서읽기'를 통해 상당한 성취를 기대합니다.
목사님의 사유의 바다속으로 함께 할 수 있기를...
그리고 하나님의 평강이 목사님 가정에 항상 거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코기토 에르고 숨"이라는 데카스트의 경구에 의하면
역시 사유하는 주체는 모든 회의를 종식시킬 수 있는 궁극적 근거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사유하게 되었다는 사실만큼 큰 사건은 없습니다.
(지금 저는 약간 하이데거의 주장에 기대서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호모사피엔스'가 사유하게 되었을까요?
진화 과정에 뇌의 용적이 늘어나서 사유의 능력이 생겼을까요?
사유라는 건 어떤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개는 어떤 대상을 사유하는 게 아니라 단지 감각적으로 느낄 뿐입니다.
그들은 나무와 동물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대상을 경험하는 방식이 사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세상을 분간하고 분석하고 더 나아가서 그것을 존재하게 합니다.
이 자리에서 내가 인간론을 강의하는 건 아닙니다.
인간의 사유가 독특하다는 사실에 대한 반론도 가능합니다.
그런 논의는 또 복잡하니까 접어두기로 하구요,
인간이 아무리 동물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동물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유의 능력을 갖고 있다는 건 분명합니다.
이 사유는 자연까지 지배할 정도가 되었으니까 대단하긴 합니다.
어떻게 인간은 사유하게 되었을까요?
신생아들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대상을 사유하는 게 아니라 감각적으로 느낄 뿐이죠.
어느 순간부터 그 아이는 이 세상을 구분합니다.
토끼 인형과 토끼를 구분하지요.
여기서 핵심적인 질문은 그 사유가 인간의 능력인지
아니면 존재의 능력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물론 존재의 능력입니다.
인간에게 사유의 능력이 없다는 게 아니라
궁극적인 사유가 일어나려면 존재가 자기를 들어낼 때만 가능하다는 거죠.
(내가 지금 하이데거를 잘 설명하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좀 말을 줄여서,
인간이 무엇을 사유할 수 있는 없습니다.
그 무엇이 자기를 들어낼 때만 우리는 그것을 인식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게 말장난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시인들의 창작활동을 보면 이게 분명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어떤 세계를 언어로 표상하는 게 아니라
어떤 세계가, 혹은 언어의 세계가 그 시인을 통해서 나타나는 거죠.
그래서 시인들은 자기들이 시를 쓴다고 말하지 않고
언어가 시를 쓴다고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목사님들은 자기들이 성서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게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런 설명은 단지 정보일 뿐입니다.
성서는 계시를 은폐의 방식으로 지시하고 있습니다.
흡사 미야자키의 에니매이션에 신화와 현실이 교차되고 있듯이 말입니다.
신화는 은폐이며, 현실은 노출입니다.
우리에게는 지나치게 현실의 노출만을 확실한 것으로 인식하는 방식이 굳어져버렸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스스로 우리를 찾아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도덕적인 성취나 어떤 사명감이나 심리적인 위로나 종교 체제의 강화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좀더 신학적으로 생각해야하고,
좀더 신비주의자들의 영적 직관과 통찰을 배워야 합니다.
진리와 계시가 자기를 노출하는 그 순간을 포착할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하다는 말씀이지요.
자꾸 말이 다른 데로 흘러갔는지 모르겠군요.
이만.
그 기다림의 전율
빛속으로 동화되고 몰입된 삶,
거기 하나가 되는 자유!
물리적 공간의 극단적 대비를 통해서,
언어가 내포한 의미를 비튼 수사적 표현을 통해서,
'진리'를 설명해 보려는 시도로,
혹자는 '진리의 바다'를 '바늘 끝'에 비유하기도 하더군요...
한편으로, 우리의 사유는 기묘하고 집요하여,
사유의 자기동인을 통해서 '진리'와 만나려고 끝없이 시도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유의 지평의 확장이 진리와 존재와 계시와의 만남을 결코 담보하지 못할 뿐만아니라 만남의 외연을 확장해 주지도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 그 육신의 다시 삶의 고백은
우리에게 사변적 사유의 한계를 깨닫게 하는 사건이며,
우리 사유의 천착이나 학문적 깊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의 드러남과
교우할 수 없다는 고백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우리 영혼의 정화상태에서 행해지는, 현재형의 육신의 활동을 통해서만
진리와 교우하고 동화될 것임을 암시한다고 봅니다.
또한 영성을 동반한 물리적 운동속에서
존재가 자기스스로 언듯언듯 드러날 것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은폐된 하나님의 계시는
타인의 시선이나 자기 주장, 철학적 깊이, 인류의 보편성과 과학적증명 등에
전혀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빛처럼, 바람처럼 '여기'에 동행하고 계시다고 느낄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저의 태도는
종종 혼돈 그 자체가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 은총이 저희와 함께하소서...
무슨 일을 하시는 분인가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다가 보니까
이건 보통 고수가 아니네요.
존재와 인식과 계시, 빛, 그 와중에 자신의 의식에 와 박히는 '혼돈'이라...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을 비는 기도라...
내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하나도 없겠습니다.
혼자서 어떤 길을 갈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길을 쭉 가 보세요.
흡사 미로찾기처럼 가다가 막히면 돌아나오고,
다시 길을 가다가다 막히면 또 돌아나오고,
그러다 보면 바른 길을 어느 정도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최종의 길은 없으니까
길 비슷한 쪽으로 가까이 가면 충분하겠지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주관하시는 그 분의 명명하고 형형한 눈동자를...
그런데요 "존재론적 능력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라고 한 문장의 뜻이
무엇을 말씀하는 지 의미접근이 않됩니다.
이 '인문학적 성서읽기'의 목적인 것 같기도 한 데,
저로서는 목사님의 명쾌한 설명이 좀 더 있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