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1강 강의 받아쓰기(08년 1월 7일, 포항 YMCA)

한국 기독교회의 특징은 평생 동안 한 교회에 묶여 있습니다. 좋은 뜻으로 한 사람에게 양육을 받는다 할 수 있겠고 혹은 독점됩니다. 평생 동안 한 교회에 다니게 되면 그 목사님 또는 후임자 그 교회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인터넷으로 인해서 한국교회 신자들도 다른 교회 목사들하고 접촉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마틴 루터 종교개혁이 성공, 보편적인 설득력을 갖고 확산될수 있었던 이유가 그중에 하나가 금속활자였다는 것을 아시겠죠? 도구가 필요한데요. 인터넷이 그런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동영상 준비하면서 시간 까먹은 것 변명하느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제가 책 두 권을 가지고 왔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형성'이라고 합니다. 추천하고 싶은 책인데요. 대한 기독교서회에서 나왔고 에띠에네 크로크메라는 프랑스 사람이 쓴 겁니다. 초기 기독교, 원시 기독교로라도 하고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처음부터 교회가 등장했을까? 지난 번 동영상 때도 이야기했는데요.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인터넷 강의 수강생들에게요. 예수님이 과연 교회 설립을 원하셨을까? 명령하셨을까? 그것이 교회와 예수님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예수님은 전혀 교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셨는데 역사 안에서 이렇게 등장한 것은 아닌가 그런 것을 생각해보자. 이런 것에 대해서 여러가지 문헌들이 있으니까 전문적으로 속 깊이 알고 싶은 분은 공부하시면 되구요. 저는 깊이 말씀드릴려는 것은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공부하게 될텐테 초기에 있었던 문서입니다. 초기 기독교를 알고자 할때 어떤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문서안으로 들어가기 힘듭니다. 성서는 텍스트입니다. 쓴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닙니다. 그것을 썼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골방에서 기도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쓴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았던 삶의 정황이 있습니다. 역사적 정황이 있거든요. 텍스트를 이해하려면 그 쓴 사람의 정황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처음 교회를 시작할 때 어떤 모습이었는가. 예수님이 원하지 않는데 교회가 생겼다고 한다면 부가적으로 생긴 거든요. 역사가 신비이기거든요. 의도한다고 역사 안에 종교문화적 현상으로 분명히 자리잡게 되었는데 그것이 과연 예수와 어떻게 연관되느냐 그런 것 조금깊이 생각해야지만 역사적 과정에서 나온 거룩한 문서 편지들을 이해할 수 있는거죠..

이 갈라디아서가 아주 짧은 문서입니다마는 우리가 보통 어떤 사람의 저작을 볼 때도 제가 전공한 신학을 말하자면 바르트를 말할 때 초기 바르트, 중기 바르트라고 말합니다. 다른 철학 사상가들도 생각이 조금 변하는 것처럼 시대에 따라 색갈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바울의 초기 작품이고 교회가 아직 완성되지 못했을 때 상당히 잠정적인 오랜 기간을 통해서 서서히 서서히 교회가 역사 안에 자리 잡게 되거든요. 굉장히 초기에 속합니다. 상당히 열광주의적인 시기죠. 조직도 신학은 물론 교리도 없는 거 이었어요. 그리고 조금 더 정확히 말씀드린다면 그들이 아직 유대교로부터 독립할 의지도 없었을 때였다고 생각됩니다. 처음부터 교회가 공동체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굉장히 복잡했습니다. 제가 너무 처음부터 복잡한 이야기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책을 이야기하려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텍스트, 텍스트는 텍스트 자체. 어떻게 말해야 될까요? 텍스트가 나오게 된 배경이 있습니다. 그게 있습니다. 한국교회 신자들의 성경읽기, 성경공부 여기서 문제는 가장 큰 게 이거라고 봅니다. 큐티를 여러분들이 많이 하시는데요. 적용중심입니다. 성서를 읽고 떠오르는 대로 그것을 내 삶에 적용하느냐 적용중심의 성서읽기, 설교도 다 그런 상태로 진행되거든요. 그거는 근본 출발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반 성도들이 성서 한 구절 읽고 묵상하고 어떻게 살아야 되겠다 그것 자체를 뭐라고 아니구요. 그것을 성서공부와 성서읽기의 모든 것인 양 생각하는 것에는 큰 오류가 있습니다. 그런 방식의 성서읽기와 설교를 가르켜 저는 성서도구주의라 명명했습니다. 성서를 도구화하는 것이죠. 이런 인문학에서 쓰는 용어로 쓰자면 도구화, 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성서 텍스트에 있는 세계에 대한 관심은 아주 축소되고 그것을 내가 어떻게 삶에 어떻게 적용하느냐 여기에 극대화 되어 있는거죠. 이렇게 되면 성서는 이얼령 비얼령 되는 식으로 이용되고 도구화 될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성서를 읽으면 좋지 않느냐 라고 말하면 더 할 말이 없겠습니다만.

저는 성서는 우리가 도구화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 구원 통치가 훨씬 존재론적으로 드러나는 사건이다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성서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통치에, 세계에 들어가는 것보다 그것은 던져놓고 아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 어떻게 적용하느냐 적용중심의 큐티방식의 성서도구주의적 성경공부, 이런 것이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기독교 신앙의 본질로 들어가게 하기보다는, 하나의 변죽을 울리고 그런데 머물도록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것들이 제가 4,5년 동안 설교비평 작업을 해왔는데요. 두 번 책을 내었습니다. 1월에 세번째 책을 낼 예정입니다. 설교비평을 하면서 가장 큰문제가 바로 그것이더라구요. 목사님들이 성서를 이야기하지 않는거예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여러분들이 제 말에 동의하지 않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왜 맨날 이사야서 요한복음 이야기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문자를 이야기, 성경 구절을 이야기 하는 것이지, 물론 그것도 성경 그것 자체도 이야기하지 않고 교회 봉사를 어떻게 할 것인지 전도를 어떻게 할 것인지 그런것에만 설교의 초점이 모아져 있습니다. 성경 자체를 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더 중요한 것은 성서를 해석해야 하는데, 해석한다는 것은 성서 텍스트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책들이 초기 기독교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아는 것이 성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책들입니다.

한 가지 더 질문을 하고 들어가야 되겠군요. 우리가 사도 바울의 편지를 계속 공부하게 될텐데,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직접 만나봤을까요? 아니죠. 예수님 살아계실 때에 바울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바울이 예수님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이야기를 했을까요. 물론 부활의 주님을 보았다고 하는데, 과연 그가 경험한 예수 부활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순서에 따르면 십자가 장사지내고 부활되고, 부활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아시나요? 뭐가 부활인가요?  다시 사는 것이 부활인가요? 문자적으로 말하면 이런 상태로 다시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이런 방식으로는 삶의 만족이 될 수 없고 성서도 다시 사는 것이 부활이라 하지 않습니다. 뭘까요? 변화하는 것입니다. 다른 생명방식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삽니다. 먹어야 되고 배설하고 애기낳고 살아가고 미워하는 이런 방식으로 여기에 살아갑니다. 우리 몸에 있는 지금의 소립자가 다 흩어져서 민들레 소립자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지렁이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생물학적으로 이야기한다면 불교의 윤회설이 더 타당합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순환하는 것이죠.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나중에 우리가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구요. 부활은 우리가 현재 이런 방식으로 살고 있는데 다른 방식의 생명과 전혀 다른 방식의 생명입니다. 예를 들면 태아들이 어머니 뱃속에서는 숨을 쉬지 않죠.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면 다른 생명의 형식을 갖게 것처럼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질적인 변화된 삶, 생명이다 그렇게 잠정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체적으로, 실증적으로 무엇인가 모르죠. 약속이고 희망이고 예수에게 선취적으로 당겨져서 일어난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죠.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사십일 만에 승천하셨다고 우리가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는 것이 사십일 만에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낮아 계셨다고 하는데 사실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에게 우편이 있고 좌편이 있을까요? 이것은 시편 기자들의 생각을 따온 해석 입니다. 해석입니다. 예수님의 사건은 모두 추후의 해석입니다 처음에 있었던 실증적으로 일어났던 사건이 아니라. 오해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사건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초기 기독교의 많은 연구들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구약과 등등 여러 가지 주변의 그런 것을 통해 해석된 거죠.

십자가만 해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십자가가 구원의 길이라고 우리가 믿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믿고 있어요. 그러나 실제 십자가에서 예수가 죽었을 때 아무도 알지 못하고 믿지 않습니다.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어요. 그게 나중에 그것을 추종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해석된 겁니다. 그냥 해석 된 것은 아니고 구약등을 통한거고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에 의해서 해석된 겁니다. 이렇게 우리가 근본적으로 질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십자가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셨을까? 다른 방식은 없었을까? 초등학교 어린아이 질문 같습니다만 그러나 이것은 유효한 질문입니다.

이런 점에서는 우리가 유대교와 메시아론적인 경쟁관계에 있습니다. 유대인들도 우리와 똑같이 구약 성경을 경전으로 삼고 있는데 그들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은 믿음이 없다 이런 방식으로 설명하면 우리들 끼리는 통하지만 보편적인 설득력을 가지지 못합니다. 예수가 왜 메시아인지에 대한 어떤 논쟁이죠. 어떤 담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초기 기독교에 굉장히 예민했구요. 바울도 거기 매달렸구요. 그건 지금도 여전히 똑같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변증해야할 그러한 위치에 있죠.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 승천하셨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분들이 사도신경을 늘 그렇게 매주 암송하지만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으실걸요? 승천하셨다 하늘일까요? 아니잖아요? 우주공간 어디로 가신 것은 아니잖아요. 그러면 그 당시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그 말은 공허한 것일까요? 여기에 해석이 필요한 것입니다. 2천 년 전의 그 사람들은 하늘이라고 하는 표상이라고도 이야기하고요 메타포라고 할 수 있고요. 왜 그 사람들은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을까요?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기독교 교리 전반에 연관되어 있습니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아주 엄중한 문제인데 우리는 그것을 아는 것처럼 지나갑니다. 구구단을 외우듯이 기독교를 몇 마디 줏어 듣고 알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럴게 알고 살아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할머니나 할아버지처럼 소박하게 기독교 믿고 살아도 괜찮겠죠. 기독교 지성인들, 자기 사유를 통해서 자기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도 그런 방식으로 접근을 해야 되거든요.

승천하신 예수님. 왜 하늘 문이 열린다고 이야기했을까요? 여러분들은 자꾸만 그런 표현들을 그림을 보는 것처럼 설명하는데요. 고대인들은 굉장히 영적으로 성숙했습니다. 단순히 우리보다 물리학적으로 지식정보가 좀 모자랐을 뿐이지 실지로는 우리보다 근원에 대해서는 우리보다 낫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죠. 그들이 기독교인들이, 하늘이라고 말한 거는 하늘은 공간적인 어떤 의미가 아니라 은폐된 생명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2천 년 전의 사람들도 생명이 너무나 신비하기 때문에 뭘 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2천 년 전보다 생물학, 유전공학을 알고 있지만  그들보다 우리가 더 많이 생명, 세계, 역사, 시간 모든 것들이 층층이 껍질을 갖고 벗겨 들어가면 또 있듯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비이거든요. 정직한 과학자라고 하면 신비주의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합리성에 근거한 신비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마지막 신비를 그것을 풀어낼 수 없는 세계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도 예수님은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 아직은 가려져 있어 은폐되어 있어. 그곳으로 가셨다. 그게 이제 하늘로 가셨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죠. 신화적인 표현이지지요. 신화적인 표현이지만 그 신화 안에는 궁극적인 세계가 담겨 있습니다. 어린아이 같은 이야기입니다만 그러나 거기에는 뭔가가 있습니다. 잘 들어다 보십시오. 가끔 보면 안개고 상반신은 사람이고. 그런거 보면 어떻습니까? 장난한다. 생각하신다면 아마 여러분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한걸 거예요.

이렇게 말을 해야 되겠군요. 하이데거가 괴팅겐인가 어느 학교인가 거기에 처음으로 교수로 초빙 받아 갔을 때 초빙강연제목이 ‘왜 존재하는 것들은 있고 無는 도대체 왜 없을까?’ 이런 이상한 질문을 했습니다. 스피노자의 질문한 것을 다시 패러디했다고 하기도 하구요. 비슷하게 존재하고 없는 것을 깊숙이 파고드는 것인데 그런 사람들에게는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중요한 겁니다. 없는 것을 통해 있는 것을 이해해 나가는 것입니다. 희랍신화의 하나, 하반신은 말이지만 상반신은 사람입니다. 아직 없어요.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이 세계에 나올 개연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이 너무나 신비하기 때문에 그런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저는 하늘로 갔다. 저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적 표현이 그들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인제 초기 기독교 안으로 천천히 공부합시다. 저도 어느 정도 들어갈 수 있을 것인지 여러분과 같이 산책을 하는, 여행을 하는 겁니다.  2천 년 전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갈라디아서란 텍스트 하나만 있습니다. 그걸 다른 사람들이 연구한 주석이라든지, 주석은 두번째 중요하고 일단 갈라디아서 이것을 통해서 이 바울이 무엇을 생각했는지 예수를 어떻게 경험했는지? 그리고 초기기독교 상황이 무엇인지? 기독교가 어떻게 출발했는지? 그들이 어떻게 구원을 새롭게 경험했는지? 그런 것을 천천히 질문하도록 합니다. 바라기는 제가 신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그렇게 뭐 여러분에게 썩 대놓고 이야기할 것이 많지 않습니다. 가끔 제가 신학교에서 예로 드는 답사기 유홍준. 설교자 신학생들은 그런 역할을 하는 거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냥 지나가는 유적들이 유홍준 선생의 설명을 통해서 속살을 드러내는 것이거든요. 옛날 이야기들이 살아나는 것이거든요. 우리도 성서를 박물관에 있는 유물을 만들지 말고 그 세계 속에 들어가서 대화할 수 있도록 신자들을 끌어가는 준비를 신학생들이 해야 한다.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공부도 시간이 주어지는데 까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 안에 뭐가 있을까? 궁금해요. 정말 제가 공부하고 싶습니다. 하는데까지. 여러분들을 가능한 한 잘 인도해서 갈라디아서라고 하는 하나의 창문을 통해서 초기 기독교 세계로 들어가자. 그것이 갈라디아서 공부의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의안 갖고 계시죠. 잠깐 보시죠. 제가 요거를 자세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나중에 집에 가셔서 읽어보세요. 전체적인 틀을 제가 좀 필요한 부분만 강조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일단 본문을 읽어 보시지요. 같이 한번 읽어 보실까요?


1. 사람들이 세워 준 것도 아니요, 사람이 맡겨 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맡겨 주시고, 또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맡겨 주심으로써 사도가 된 나 바울은 2. 나와 함께 있는 a) 모든 믿음의 식구와 더불어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3.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져 주시려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5. 하나님께 영광이 영원무궁 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새번역)

많이 읽으시는 내용이실 겁니다. 강의안을 요기 파워포인트로 띄우겠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쓰면서 상당히 비장한 어투로, 그걸 느끼시겠죠? 자기의 사도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까지 강조를 했을까요? 그리스도안에서 사도된 제가 편지를 씁니다 이렇게 쓸 수가 있었을텐데 상당히 강조를 많이 하는 거예요. 장엄한 느낌을 받습니다. 사람이 준것이 아니요 그리스도 하나님이 주신 사도권이다. 이런 부분을 강조한다는 것은 이런 점에 사실은 콤플렉스가 있다고 하는 뜻이기도 합니다. 당연하지 않겠어요.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은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대로 초기 기독교, 기독교라 말을 붙이기 힘든 원시 공동체, 예수 추종자들 그들을 박해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느닷없이 나타나서 내가 예수를 만났다. 예수의 복음을 전한다 이렇게 자처하고 나섰으니까 얼마나 예수의 제자들이 당황, 당혹스러웠겠죠. 사도권 문제로 인해서 논쟁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 문제가 복잡해서 제가 정리는 해 놓았습니다. 나중에 여러분들이 집에서 읽어보시기 바라고요. 여기서 한 대목만 집겠습니다. 바울의 사도권과 충돌하고 있는 사람들은 주로 예루살렘 공동체 지도자들입니다. 예루살렘 모교회죠. 그거에는 주로 열두사도들과 예수님의 동생이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열두 사도가 다 중요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제자 임명했다는 사실이 있기 때문에 열두제자, 사도들이 처음부터 권위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게서 열두제자를 임명한 사것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학자들이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초기 기독교 안에서 권위를 확보하면서 새롭게 형성된 전승이다.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고요.

예루살렘에 있었던 예수 믿는 사람들, 그들을 가리켜 나사렛파라고 합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기독교라고 하는 또 하나의 종교집단을 만들 생각이 없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사도행전을 보면요. 베드로와 요한이 정기적으로 기도시간에 예루살렘 성전을 드나들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만약 자기 스승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한 장본인들이 제사장, 유대인들이라는 확신이 있었다고 한다면 왜 성전을 드나들었을까요? 놀라실지 모릅니다만 그 당시 예수님을 추종하던, 우리의 신앙 선배들이죠, 그들은 유대교와 그렇게 사이가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 안에 머물러 있으려고 했구요. 유대인들 쪽에서도 나사렛파를 쫓아내려고 하지 않았었어요. 같이 어울려서 지낸 거예요. 그러니까 유대교에 사두개파가 있고 바리새파가 있고 에세네파 등등이 있듯이 나사렛파 하나의 파로 있어요. 굉장히 어울려서 잘 지냈어요. 예루살렘 공동체입니다. 그들을 유대교적 기독교죠. 기독교적인 특색이 있지만 유대교안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과 정반대의 길을 간 사람이 바울이었죠. 바울이 예루살렘에 있었던 유대교적 기독교인 이런 사람들과 투쟁한, 반발한 그렇게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그러니 사도권 때문에 이렇게 갈등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상당히 그 부분에 대해서 예민하게 바울이 생각을 했고요. 계속해서 사도권이 사람들에서 온것이 아니다. 사람들이란 예루살렘 지도자들을 이야기하죠. 이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하고 예수님의 동생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됩니다. 요즘씩으로 바꿔 이야기하자면 노회 총회에서 내가 목사다 이렇게 나서는 것과 비슷하거든요. 하여간 그러한 충돌이 많았습니다.

바울은 이제 자기의 사도권이 그러한 사람들에게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 아버지 하나님에게서 주어진 것이다. 그것의 근거로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하는 것이죠. 그게 뭘까요. 그가, 물론 여러분들의 머릿속에 그려져 있죠. 다마스쿠스가다가 중간에 환상을 본것. 그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딱 그거라고 말하기 힘듭니다.  바울이 자기의 지나온 이야기를 할 때 박해했다고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스테반의 순교 자리에 있었다고 사도행전에 나오기는 하는데 내가 직접 그 자리에 있었다. 어디 사도바울의 편지에 나오던 가요. 혹시 기억하시나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기록해요. 그게 역사적 사실일까요? 아닐까요? 더 연구를 해야 할 분야이지만 참고로 연구를 사도행전에 대해 한 말씀 드린다면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복원한 문서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역사적 사실이 전혀 없다는 말도 아니고요. 이거는 사도바울이 죽은 다음에 한 세대쯤 흐른 뒤 예루살렘 공동체는 완전히 폭삭 망하고. 이 망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모교회 인데요. 만약에 이 예루살렘교회가 망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기독교는 전혀 모양이 달라졌을 겁니다. 그것이 망하고 복음이 그리스 지역 로마까지 가서 그레코 로마 중심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역사적으로 망했습니다. 기원 70년 로마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유대교가 재 부흥운동을 일으키면서 나사렛파의 기독교를 극단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전에는 잘 지냈는데. 그렇게 하면서 힘이 없어지거든요. 기독교 역사가 전혀 다르게 흐를 가능성이 있었던 거죠.  

그러한 예루살렘 교회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도 바울의 사도권 주장이 터무니없이 들릴 수 있었구요.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강조하고 있는데 과연 그게 뭘까요? 그거는 서로 조금씩 내용이 다릅니다. 사도행전 안에도 제가 그걸 검토하지 않고 나왔기 때문에 몇 장 몇 절인지 지적해 드리지 못합니다만 다메섹 도상에서 있었던 일을 바울이 몇번 회상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그게 조금씩 달라요. 소리와 빛 이런 것을 경험 한 것들이 어떤 것이 있었던지 없었던지 조금씩 차이가 납니다. 사도행전이 사도 바울이 죽은 다음에, 예루살렘교회가 완전히 망하고 대신 그리스 로마지역으로 가는 바울중심의 기독교가 주류가 되는 것이죠. 역전되는 것이죠. 전에는 예루살렘이 주류 였는데 역전된거죠. 그렇게 된다음에 바울을 신앙의 선배로 따르는 어떤 사람, 의사 누가가 주치의로서 활동했다고 하는데 그 사람은 이미 죽었고요. 누가라는 이름을 빌린 고대 문서는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빌려서 많이 썼습니다. 굉장히 후대에 사도바울을 기독교의 굉장히 중요한 인물로 부각시키기 위해서 좋은 뜻입니다. 실제로 그랬으니까요. 그러나 바울이 살고 실제 살고 있었을 때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어요. 지금은 큰 인물이지만 그때는 왕따당하고 빛도 못보고 죽었습니다. 전설은 내려오고 있습니다만 고난당하고 눌리고 결국은 두로아에서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환상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그거는 소아시아와 갈라디아서에 여러 교회들입니다. 그전까지는 거기서 나름대로 비빌 언덕이 있어서 조금 말씀을 전했는데 그때부터는 점점 밀리는 거죠. 지금으로 말하면 터키죠. 그지역에서 말씀을 전할 기회를 얻지 못해서 결국은 밀려난 겁니다. 마케도냐에서 온 어떤 사람이 이야기를 한거죠. 저쪽으로 가자. 눈으로 본 만큼 말씀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살아 있을때는 빛도 못보고 아무것도 없었다. 역사라고 하는 것이 신기하죠. 힘을 주던 예루살렘공동체는 폭삭 망하고 어쩔수 없이 유럽쪽으로 건너간 바울중심의 기독교가, 두개가 완전히 달라요. 어폐가 있어요 이렇게 완전히 다르다는 거죠.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과 할례를 꼭 지켜야 하는데 예루살렘교회는 그거를 지켰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종교회의가 나오죠.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4가지만 제외하고 율법으로부터 해방시키자. 유대기독교인들이 여전히 율법과 할례를 지켰다는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것에서 벗어난 바울중심의 그리스 로마는 상당히 다르게 다행스럽게 사도 바울덕분으로 오늘의 이런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한 구원의 새로운 복음, 이러한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생전에 전혀 빛을 못 보다가 나중에 자기가 뿌린 씨앗들이, 자기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게 싹이 나고 해서 유럽교회 중심이 됩니다. 그 바울이 얼마나 위대한 선교사였었고 위대한 사도였는가. 이걸 변증하는 문서가 사도행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행전에서는 우리가 이 사람이 자기 알고 있었던 이런 저런 것을 모아서 편집한 것이죠. 제가 조금 염려스럽군요. 제 말들이 편집이다 전승이다 신화다 하는 말이 나와서 혹시나 성서의 권위를 떨어뜨리는가. 그렇게 조금 힘들어하실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고 전제합니다. 그게 아닙니다. 이게 하나님의 말씀이 죽어 있는게 아니거든요. 저는 이게 사도 바울도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엄연한 거예요. 오늘 성경공부를 처음했습니다.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열정을 보일지 모르겠습니다만 모이게 된 것도 어떤 배경이 있는 것입니다. 당분간 공부하는 텍스트가 남게 된다면 백년 후에 YMCA 후배들이 백년 전에 공부하던 것들이 남아있더라 이것만 봐요 모이게 된 배경을 잘 모를 수밖에 있겠죠. 그런 것들이 선생님들같이 준비를 위해서 모였던 배경들이 있었던 것처럼 바울도 그런 것이죠. 그러한 좌절, 고민, 희망 그런 것들을 찬찬히 따라가야만 성서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권 문제는 그렇게 정리를 하구요. 바울이 이 편지를 쓰면서 핵심적으로 두가지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은혜와 평화, 그것 설명을 해야 하겠습니다. 가지고 있는 강의안 3쪽에 보면 은혜와 평화가 나옵니다. 이 단어 너무 잘 아시니까 은혜와 평화, 제가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카리스 헬라어로 은혜 낱말 뜻으로만 본다면 친절 긍휼 그러한 의미예요. 이거야 뭐 여러분들이 아시죠. 문제는 그게 실제로 우리의 삶에 실체로, 실질로, 리얼하게 다가오느냐 하는 것에 있습니다. 신앙이 하나의 정보로 끝난다면 깨우친다는 그런 단계에 들어가야 하는데.

설리반 선생의 예를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설리반 선생이 헬렌 켈러를 가르치는데 아무리 보이지 못하고 진도가 나가지 않습니다.  듣지도 못하고 수화도 안 되고 소리도 안 되었습니다. 손바닥에 ABCD를 썼습니다. 설리반선생과  헬렌 켈러의 소통의 도구는 손바닥입니다. Tree 쓰고 나무를 만지게 해줘도 이해를 못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상상이 됩니까? 이해가 안 됩니다. 어떠한 새로운 세계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알수가 없습니다. 천국에 대해서 상상을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를 천당이라고 생각한다면 거기에 가면 전혀 새로운 곳일 테니까요. 설리반 선생이 어느 날 펌프로 물을 길어 시원한 물을 쏟게 했습니다. 손등에 흘러내리는 물, 지구에 액체가 물이 있습니다. 뻔한 것이 아니라는 것 아시죠. 얼마나 신기한지요. 하여튼 그때 손바닥에 Water을 써주었습니다. 그 순간에 헬렌 켈러는 어떤 사물에 이름이 있다고 하는 것을 돈오 크게 깨우친 것이죠. 헬라말로 하자면 메타노이아, 해탈한 것입니다. 실지로 깨닫고 진도가 막나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된 것처럼 신앙도 그렇습니다. 평생동안 water 물과 언어가 하나라 하는 것 모르고 신앙생활이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이런 것을 다 몰라도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다 구원 받은 것을 믿습니다만 이런 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귀에 딱지 앉을 정도로 들어서 그냥 넘어가는데 이것이 신앙의 위기인것 같아요. 충분하게 신앙 용어, 할렐루야 아멘 좋은 용어 사용하기에 탓할 것이 못되지만 사용한다고 이미 그것을 다 소유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은혜. 카리스 한마디 하고 정리하겠습니다. 질문할 시간, 반론 듣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부분은 제가 배워야 할 될 부분, 선생님들도 많이 계시니까요. 질문할 부분 생각해 두시고요. 카리스, 은혜라고 하는 것은 실체로 깨닫고 그안에 들어갈 수 있다면 이 세계가 전혀 다르게 보일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경쟁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겠죠. 이 세계 전체가 하나님의 섭리라고 알고 있는데 더 바랄 것 없잖습니까? 목사가 은혜,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면 교회 성장시켜야 한다는 압박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태하다고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 나름대로 존재 하나님의 성령의 집이거든요. 코이노이아가 이루어진 것이거든요. 하나님의 교회는 크고 작은게 없죠. 제가 섬기고 있는 주일예배 20명 정도 모이는 교회가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크게 작게 있는 은혜를 알게 된다면 경쟁심도 없고 아무 것도 없이 사느냐? 몸을 갖고 사는한 계속해서 충돌하고 자기집착 많이 있습니다. 자기 집착이 죄라고 하는 것 아시죠? 하마르티아라고 하는것.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는 실정법 어겼다고 하는 작은 차원의 죄가 아닙니다. 자기집중, 죄는 죽을 때까지 해결되지 않고요. 죄를 인정받은 것, 칭의 라고 하는 거지, 법적인 의미입니다. 실제적으로 죄를 짓지만 아직 여전하지만 인정하는 겁니다. 전가되었다. 칼빈이 이야기한 칭의론 핵심이거든요. 정확한 입장이라 생각합니다. 자기 집중은 자기가 죽을 때까지 놓치지 않습니다. 제가 그럴 듯하게 성경공부하고 신학도 강의합니다만 저도 마찬가지 입니다. 살아가면서 시행착오는 계속 겪겠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수영을 잘하는 사람들은 물속 깊이 들어가듯이 한발 한발 물속으로 들어가듯이 시행착오를 줄이고 참된 생명의 세계로 들어간다. 성화의 과정입니다. 강의안을 한번 읽겠습니다. 영광 직전 파라그래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은혜를 관념적이고 초월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하라는 말은 아니다. 우리의 일상과 전혀 상관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일들만 생각하는 게 아니다. 은혜는 우주론적인 사건이지만(우리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전적인사건) 동시에 일상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에게서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밥을 예로 설명해보자. 만약 자기가 맛있는 밥을 만들어서 먹었다는 사실에 매달린다면(자기가 했다면) 그는 자기의 업적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인 반면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실제로 인식하고 먹는다면 그는 은혜 안에 들어간 사람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을 은혜로 안다면 좋은 밥을 먹든지 거친 밥을 먹든지 그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은혜에는 크고 작은 것, 잘나고 못난 것이 없다. 목사가 큰 교회를 섬기든, 작은 교회를 섬기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런 영적인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게 곧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은혜는 모든 삶을 하나님과의 관계로 집중하는 삶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아이들은 엄마만 옆에 있으면 모든 게 만족스럽듯이 우리도 하나님과의 관계로 들어가기만 한다면 모든 삶이 만족스러울 수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 엄밀하게 말하면, 거기에서만 (저는 이렇게 믿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을 하구요.) 우리는 진정한 만족을 경험할 수 있다.

설교조로 끝내서 미안합니다. 여러분들이 다 아시는 것인데요. 그래도 한번 더 새김질 하는 거구요. 저도 이렇게 되려고 노력하고요. 은혜가 넘치는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그러한 쪽으로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집중시켜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죠. 기독교 신앙은 형식적인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 안에 있는 용어들은 Reality of life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실체가 되는거예요. 그게 자칫하면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고, 관념성이 있습니다만, 그게 전체적으로 통시적이라고 할까 그렇게 우리의 일상과 우주와 우리의 세계 전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세계 전체를 담아내고 있는 가장 정확하게 실질적이고 영적으로, 생명 지향적이라고 하는 말이거든요. 그렇게 담아내는 삶의 내용들이니까 여러분들은 기독교 신앙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이나 다른 예술에 비해서 그것과는 다르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다 포섭해서, 다 묶어서 하나의 세계로 끌어갈 수 있는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구원계시다, 논리다. 그쪽으로 한걸음 한걸음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겠죠. 여기까지 저는 말씀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