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가 뭐꼬? 7강(080221) 받아쓰기

3장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인데요.

긴말도 필요없죠.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그냥 편하게 한번 생각을 해해 보시죠. 편하게 생각하라는 거는 안이하게 생각 하라는 것이 아니라 선입견을 좀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좀 보자고 하는 것이죠. 제가 신앙생활 시작할때도 아마 그렇게 좀 누가 가르쳐 주었으면 기독교 신앙을 좀 가깝게 일치해서 자기가 경험하는 구도안에서 생각했을 텐데요 그렇게 가르쳐 주지 않고 너무 교리적으로만 가르쳐 줬어요. 그렇게 말을 하니까 그런가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셨다. 그러한 식으로만 생각했어요. 그게 틀린 이야기만 아니지만 그게 실제적으로 무언가가 하는 그안에 많은 내용들을 통해서 설명되어야 되는 겁니다. 설명하는 것을 가능한한 신학자들에게 도움을 받아야 되구요. 모든 것들이 다 신학적인 내용들이니까요.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기독교의 가르침, 도그마 이런 것들을 스스로 생각하는 그런 것들이 필요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을 할 수 있고요. 그리고 여태가지 자기가 이해한 삶의 경험을 바탕에 놓고 생각하는것이 필요합니다. 이게 되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과 자기의 삶과 평행선만 긋습니다. 그렇게 평행선만 긋게 되면 바울이 말했듯이 신앙이 말에만 머물러 있지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거든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다고 하는 건데요. 그런 능력은 기적을 행한다거나 커다랗게 놀랄만한 그러한 일들을 행한다기 보다도 신앙이 자기의 삶과 일치되는 것이거든요. 그러한 일치되는 경험들, 신앙들 그런 것들이 우리들에게 이루어지지 않게 됩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가르침과 자기의 실제적인 삶이 평행선을 그을때죠. 그게 하나가 되어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신앙이 삶과 일치되고 그것뿐만 아니라 능력이 생기기도 하구요.

능력이라는 말도 우리는 그것을 들을때마다 다른 사람들이 못할 일을 크게 행한다든지 기적을 일으킨다든지 특별한 카리스마를 생각을 많이 하는데 그런 것보다도 자기의 삶의 세계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 그게 큰 능력이거든요. 그게 사실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기독교의 가르침,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십자가 부활 이런 것들도 상당히 많은 경우에는 공중에 뜬 이야기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구구단을 외우듯이 그냥 말로는 잘하는데 실제적으로 십자가 부활 사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죠.  제가 강의 시작할 때부터요. 한달반 벌써 두달 가까이 되는 군요.  1월 첫주 목요일 할때부터 말했고 한두번 더 지적했던것 같은데 그러한 십자가 부활이 가르치고 있는 혹은 가르치고 있는 가리키고 있는 그러한 교리들, 가르침 안으로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거예요. 그러한 훈련들을 기독교 신앙 시작할 때부터 꾸준히 했어야 하는데 잘되지 않습니다. 이미 그렇게 굳어져 버렸어요. 습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잘못된 습관은 고치기 참 힘들거든요. 아예 어떨때 보면 신앙생활 오래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잘 알아 들을 때가 있습니다. 늘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그게 기독교 신앙이 잘못된 습관으로, 삶과 유리된, 그냥 신앙의 정보를 알아듣는 것에 불과한 그런데 머물러 있게 되면, 축적되고 반복되면 나중에 고치기가 상당히 힘듭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잘 생각해 보시라고 한거죠. 예수라고 하는 분, 역사적인 인물인 유대인 한 남자가 로마의 사형법인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고 하는 사건이 도대체 온 인류와 혹은 나 개인과 어떤 상관이 있는가 하는 거죠. 또 조금 다른 질문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왜 그런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만 구원했어야만 하는가 하는거죠?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요? 왜 십자가만 통해서만 구원을 했어야 했을까요? 십자가 처형이 구원의 길이라고 말하잖습니까? 그게 반드시 그래야만 되어야만 되었는가? 하는 질문이죠.

이런 질문들이 비신앙적이다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 만약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런 고정관념으로 굳어져 있다면 여러분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기독교 신앙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냥 광신자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참된 신앙의 능력을 갖기 힘듭니다. 광신이라고 하는 것 아시죠. 광신은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거는 불안하니까 광신자가 되는거예요. 그 신앙은 광신자는 신앙의 내용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없는거예요. 대신 자기가 믿고 있다는 사실에만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이죠. 참된 믿음이란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관심이 아니거든요. 어떤 글에도 썼습니다만 ‘믿고 있는 자신마저도 신뢰하지 않는겁니다’.  믿어야 될 대상만을 신뢰하는 것이지요. 그 분이 어떻게 구원을 일으키시는 가에 대한 철저한 신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광신자들은요. 표현이 좀 그렇습니다만 그러한 현상들이 우리들에게 많이 나타나니까요. 실제적으로 신앙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에 대해서는 열려 있지 않으니까요. 결국은 자기가 믿는다는 사실에 집착을 하죠. 자폐증과 같은 비슷한 정신병리학적 문제들이 거기에 나타나게 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기독교 신앙이 상식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상식을 바탕에 두고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거거든요. 최소한도 기독교인들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합리적 이고 논리적이어야 됩니다. 기독교에 대한 신비, 하나님에 대한 신비는 그다음의 문제이거든요. 그런데 그 중간 단계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현실을 분명치 뚫어볼 수 있는 직관이나 통찰력, 그런 것이 없는 상태에서는 자기가 믿고 있는 신앙을 해명할 수 있는 자신이 없으니까 결국은 불안하게 되고 광신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왜 십자가로만 구원을 받아야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질문을 끝까지 해야 합니다. 어쩌먼 목사인  저도 여전히 십자가 중심 부활중심의 설교를 하지만 그것이 케리그마예요.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케리그마입니다. 모든 설교는 어떤 주제를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십자가와 부활로, 더 궁극적으로는 부활입니다만 어쨌든 연관되니까요. 십자가 사건을 전제하고 부활사건을 해명할 수 있으니까 연관됩니다. 그렇게 설교를 합니다만 여전히 십자가에 대한 저에게도 남아 있습니다. 바로 앞서 이야기한 질문들을 제가 꾸준히 질문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유대인 남자의 십자가 죽음의 사건, 그것을 인류 구원의 길이라고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나요? 아니면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가요? 우리가 공부시간이니까 끝까지 질문해봅시다. 하나님이 정말 그렇게 생각하셨을까요? 이런 문제들은 계시론이라든지 이런쪽으로도 다 연관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독교의 교리, 가르침 이런 진리 이런 것들은 어느 한쪽의 방향으로만 말을 하다가는 방향을 놓칠 가능성이 많습니다.

옆으로 이야기가 나가더라도 이야기해주세요. 제가 다비야에 설교평 꼭지에 지난 11월초에 있었던 한국 설교학회 심포지엄에 발표된 논문, article을 실었어요. 몇몇 코멘트 다신 분들도 있구요. 저도 시간이 되는대로 조금씩 조금씩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는 유응렬교수님, 정인교 교수님 개인적으로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은 하나도 없구요. 글을 읽고 제가 나름대로  반응을 하는 것으로, 그런 방식을 통해서 다비안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 뿐입니다.  생각이 나서 지금 말씀 드리는 거예요. 유응렬 교수가, 그분은 내가 보기는 그분의 글은요. 제 애기 잘 들리죠. 제가 보기에는 두분이 있는데 정인교, 유응렬 교수님의 글이 훨씬, 한 수 높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인교 교수은 너무 도식적으로, 교과서 적으로 쓰려고 많은 노력을 했는데 뭔가 제게는 글의 흐름 같은 것들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글을 쓰기 위해서 쓴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어요. 그건 그렇고. 유응렬 교수는 전반적으로 흐름이 굉장히 깨끗했습니다. 좋았어요. 읽기도 편하고요. 그분들이 저의 설교에 대해서만 언급한 것이 아니라 한국교계 전체에 일어났던 설교비평에 대한 언급이었고요 그러나 주로 저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그거 전체에 대한 코멘트하기는 뭐하지만 저에대한 유응렬 교수가 한 부분에 대해만 짚으면요. 전반적으로 저를 칭찬한 것으로 보고요. 고맙게 생각하고요.

그분이 문제를 짚은 것은 제가 보기엔 가장 중요한 것은 한가지입니다.  제가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한다는 거죠.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신화라고 이야기하냐.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착각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신화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 오해하는 것이 신화적인 요소가 있다고 하면 그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것, 이게 착각이고 조금 성서해석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데서 벌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신화적인 방식을 통해서도 말씀하시는 거그던요.  그렇잖아요. 성서 안에 신화만 있습니까? 소설도 있구요. 엣세이도 있고, 시도 있고, 역사도 있고 역사라는 것도 실증적인 역사가 아니라 당연히 해석된 역사거든요. 신명기사가, 신명기사관, 신명기적인 입장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해석한 것이죠. 그러니까 거기에 나와 있는 역사들은 객관적인 실증적인 사실이 아니죠.  그것만 아니라 모든 역사 기술이라고 하는 것은 실증적인 것이 없습니다. 그 것을 쓴 사람, 참여한 사람들의 나름대로의 해석이 거기에 들어가게 되는거죠.

돌아오는 토요일날 서울 오프에서 제가 할 강의 내용이 다윗의 통곡인데요. 언젠가 설교한 내용입니다. 그걸 중심으로 제가 풀었습니다. 거기 재미있어요. 성서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이스라엘 역사 전체인데요. 거기에 분명히 이스라엘의 고유한 역사관이 들어있는 겁니다. 특별히 다윗왕조를 중심으로 한 역사거든요. 결국 역사 기술이라는 것은 승리자의 입장에서 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나와 있는 모든 다윗왕조를, 메시아의 가문이기도 하구요. 승리한 입장이니까 사울과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했습니다. 말이 자꾸 옆으로 길게 나가죠. 죄송합니다. 다시 본줄기로 들어와야 되는데요. 사울과 다윗도 여러분이 성경을 보면 다윗은 참 좋은 왕 사울은 못된왕, 처음에는 괜찮았다가 나중에는 불순종했다 이런 것들을 너무 사실로 보면 조금 곤란한 거예요. 거기는 역사를 보는 눈이 작용한 겁니다. 그게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거고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나름대로 해석을 해야 되는거죠. 성서자체가 역사해석입니다. 모든 것들이요. 텍스트는 해석이거든요. 그건 이미 해석된 텍스트고. 성서자체가 해석된 것이고. 그리고 오늘 읽는 우리도 그러면에서 당연하게 해석을 해야죠.  그러한 해석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에게 드러나는 거거든요. 유응렬교수가 제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또 다른 이야기를 하시겠지만 쓰신 글 내용으로만 보면, 신화가 있다고 하는, 신화적인 요소가 있다고 하는 그거를 사실적인 거로 해석하고 설교하게 되면, 그러면 고대인들의 신화적 세계관으로 우리를 끌어들이는 거기 때문에 잘못된 해석이라는 저의 판단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신화라는 말을 통해서 훼손시킨다 그런 쪽으로 말씀하신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게요. 설교학 교수님, 실천신학 이런 분들이  고런쪽으로만 생각을 많이 하셔서 신학 전체에 대한 관점이라고 할까요. 그런 것들이 조금 받쳐주지 못하는 느낌들을 많이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이해가 공통으로 되어 있어야 되는데 바로 지금 제가 예를 든 것처럼 신화라고 말한 것은 당연히 신화거든요. 그건 접어두고요. 그런 것들에 대한 전이해가 최소한도 밑바탕이 되어 있지 않으면 다시 또 그 문제 갖고 싸우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진도가 안나가고 다시 그리고 돌아오게 되는거죠.

강의쪽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십자가와 부활사건, 계속 우리는 그런 것에 대해서 질문할 수 있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굉장히 중요한, 신앙을 심화시키는데, 기독교 신앙을 심화시키고 바르게 나가게 하는데 중요한 요소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또 질문하겠습니다. 나 스스로를 향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만 인류를 구원하느냐 하는 것이죠.

마땅히 당연하게 유대인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요 유대인들은 잘못되었냐 꼭 그런 것만은 아닐겁니다.  예수님이 부활한 것을 어떻게 증명하느냐? 증명의 문제는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증명할 수 없는겁니다. 이문제, 여기에 뭔가 들어있는거죠. 십자가 부활이라는 것이 명명백백하게 인류를 구원의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길은 없어요. 다만 우리는 그거를 변증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변증하는 것들이 얼토당토한 것이 아니라 타당성이 있는 것이어야 되죠. 그렇게 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2천년동안 계속한 작업들은 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게 아직도 끝나지 않는 거죠. 지금도 신학이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난 2천년동안 많은 이야기들을 했고 신학 문서들도 많이 있거든요. 그런데 지금도 신학자들이 핏대를 올리며 자기 삶 전체를 투자하면서 뭔가를 말하려고 한다는 것은 기독교가 말하는 가르침이 아직 끝나지 않는 문제라고 하는 것이죠.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근거 없다는 이야기기 아닙니다. 계속해서 우리들에게 뭔가를 질문하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또 질문한 것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고 또 그렇게 신앙적으로소통한다고 하는 것, 그게 이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거든요. 그냥 공식처럼 굳어 있으면 그걸로 끝나버린다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우리의 구원의 길이다라고 끝나버린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도그마에 머물러 있는거죠. 그냥 우리의 삶과는 거리가 있는, 거리가 있다는 것은 우리의 오늘 처한 삶의 자리에서 실질적인 신앙적인 역동성으로 자리하지 않고 그냥 믿는다고  말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 머물러 버리게 된다고 하는 것이죠.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두주간에 걸쳐서 십자가 부활을 애기할 텐데요. 이거는 끝나지 않는 문제입니다. 계속해서 오늘 나 개인 실존에게도 그렇고, 역사 전체를 향해서도 그렇고, 오늘의 새로운 신자유주의를 향해서도 그렇고요 하여튼 전체적인 삶을 통해서 십자가 부활이 도전하고 질문하고 우리로 하여금 뭔가 생각하게 하고 자극합니다. 그거를 생각하게 자극하죠. 그래서 우리의 삶안에서 이런 문제들을 계속 신앙의 문제로 안으면서 삶을 이끌어나가는 그것이 영성이라고 할 수 있구요. 그러는데서 또 성령의 역할을 통해서 우리가 반듯한, 확실한 대답들을 발견하기도 하구요. 경험하기도 하구 그러면서 진행되는 것이죠. 살아있는 것만큼 거기에 충실하면 돕니다. 다는 못해요. 우리는 일부만 합니다. 역사가 지나가면서 후손들이 십자가 부활 사건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겠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역사적으로 지금까지 어떻게 생각했는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우리의 삶의 내용으로 삼을 것인가 그렇잖아요. 삶의 내용으로 삼을 것인가 생각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냥 주문외우 듯이 뭔가를 성취할 수 있는 도구로 사용할 수 없잖아요. 그 단어를 다시 한번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을 도구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사건을 이용해서 구원을 받아야 되겠다 만족해야 하겠다. 그 이야기,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부활 사건을 이용하고 쓰는 것이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가는 거죠. 그 세계안으로 들어간다고 했는데 그게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 말은 곧 십자가 부활사건이 우리가 처리할 수 없는 존재론적인 하나님의 통치행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 세계를 어느정도 이해하고 말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고 맥락을 여러분들이 잘 이해하셔야합니다. 우리는 자꾸 결정해 놓으면 프로그램으로 짜놓으면 이것으로 뭔가 된것과 같은 생각을 하는데요. 그건 큰 착각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스스로가 하잖아요. 그거는 전제되는 것인데. 그런 것을 우리가 용납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요. 내가 해야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다른 이야기가 많았네요. 실제적으로 십자가와 부활 사건 들어가야 되는데요.

예수님의 삶은 3년 동안의 공생애가요. 아주 단순합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길지도 않은 그러한 거리를 복음서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한번 간것, 두번 간것 정도로 삶을 마치셨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시작하셨구요. 점점 남하하셔서 결국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잡히셔서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시는 그러한 이야기입니다. 다른 성인들 종교 창시자들에 비해서는 예수님의 삶이 너무 짧았습니다. 역사적으로 굉장히 불충분하죠. 어떻게 보면 부처님은 천수를 다했습니다. 공자도 그렇구요. 마호멧 몇살까지 살았나요. 그분도 상당히 오래 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비해서. 공생애 3년 짧게 보면 1년반동안 사셨거든요. 그 짧은 시간이래서요 그분에 대한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짧은 시간, 좁은 지역에 사신 것에 비해서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다행이죠. 그 앞부분들은 제가 다 생략하겠습니다. 잘 알고 있는 이야기고요. 강의안을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에 오실때가지가 공생애다. 결국은 예루살렘에서 체포당하시고 돌아가신 이야기인데요.

제가 책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체크해둔 부분을 짚어야 하겠습니다. 뒤로 돌아갑니다.
제 목소리 잘 들리나요. 제가 옆사람에게 소근 소근하듯이 이야기하는데요. 마이크가 역시 좋군요.

예수님이 인제 그걸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잘나오지 않네요. 책하고 파워포인트와 조금 느김이 달라서 그렇습니다. 시간은 빨리 가는데 할이야기는 많구요.

예수님이 어떻게 종교 지도자들에게 미움을 샀을까? 뭐가 문제일까 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그것이 뚜렷하게 나오고 있기는 합니다. 세가지 인데요. 하나는 예수님이 반율법주의자, 율법을 잘 지키지 않는다는 것, 두번째는 성전주의자, 예루살렘 성전을 상대화하는것, 또 하나는 반 도덕주의자, 죄인들과 어울려 살았다는 것이요. 그러한 모습들이 그 당시 세련된 제사장들, 바리새인들에게 좋아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걸로 인제 예수님이 체포당하시게 되는데요. 제가 왜 이걸 못찾을까요? 잠간만요. 마태복음 16장 13절, 네 그렇군요. 아 여기 있군요. 반도덕주의자. 패러그래프가 나눠있는 줄 알았다가 나눠진 패러그래프를 찾는 바람에 못 찾았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반대하고 성전을 반대하고 도덕주의를 반대하고 사실은 반대하신 것은 아닙니다. 온전히 하나님 나라의 통치에 자신을 던지신 분이거든요.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 나라보다는 자신들이 세운 어떤 체제, 전통, 율법 이런 것들을 절대적으로 생각했던 종교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에게는 당연히 예수님이 반대하는 사람으로 낙인찍힐 가능성이 높았을겁니다. 예수님도 그러한 위기가운데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는데요. 네. 그리고 또 십자가 죽음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언질도 몇 번 하셨구요. 하여튼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죽음을, 체포당하시고 죽는다는 사실을 느끼셨을거구요. 마지막 순간에 예루살렘 가까운 곳에 이르셨을 때에 나귀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는 그런 에피소드 같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얼마나 실제적인 역사와 부합 하는가하는 것은 사실은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 대한 일들은 누가 그 자리에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니라 나중에 회상을 하고 말로 구전되다가 문자로 된 것이기 때문에요. 거기에 많은 것들이 가미되거나 빠지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전혀 터무니 없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서 다른 것은 다 접어 두고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몇가지 대목만 좀 오늘 집도록 하겠습니다.

유월절 만찬과 게세마네 기도, 체포당한 것 공판 십자가형 집행.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사마리아 지역을 거쳐서 유대지역에 올 때까지 많은 사람을 만나서 귀신을 쫓아내기도 하고 여러 가지 또 비유 같은 말씀들을 주셨고요.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접어두고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일종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 나라 운동과 연결될 만한 예수님의 운명의 마지막 부분에서의 중요한 사건들을 좀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예수님의 만찬, 겟세마네 기도 요런 것입니다.

밥상공동체라고 제가 소제목을 부쳤습니다. 유월절 이야기부터 시작되는데요. 이거 제가 할 필요는 없겠지요.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것이기에. 각주는 다 달아놓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제가 보기에 기독교에 대한 전이해가 상당히 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다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이해를 해주시고요.  유월절 만찬을 예수님 나누신 것, 그것이 우리에게 성만찬으로 이어진다고 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유월절에 대한 설명을 제가 여기에 해두었습니다. 그렇게 하시고 읽어보시면 되겠구요. 마지막 패러그래프가 되겠군요. 마지막 패러그래프 대목에서요.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삶을 끝내야 할 바로 그 순간에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함께 나눈 유월절 만찬은 기독교 공동체의 정체성을 명증하게 드러내 주는 사건이다. 말 그대로 밥상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다. 어떤 사람들은 둘레상 공동체라고 표현한다. 예수가 지향하는 하나님 나라는 늘 밥상공동체적 기초에서 이해된다는 말이다. 오늘의 교회도 이런 지향성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해방의 날인 유월절이 이제는 참된 나눔과 친교가 이루어지는 축제가 되었다. 분리와 소요로부터 해방이 되었다. 결국 우리는 예수의 최후의 만찬을 통해서 구원의 참 의미를 상징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전통이 기독교 예배의 성찬식으로 전승되었다.

가만 있어보세요. 제가 요 문장을 왜 여기에 썼는지 모르겠어요. 정치적 해방이라는 것이 여기에 들어올 부분이 아닌데요. 여기서는 제가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은 분리와 소요로부터의 해방, 같은 상에 둘러앉아서 무언가를 먹고 나눈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분리와 소요와의 해방이 아니냐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겁니다. 교회가 밥상 공동체의 성격, 정체성을 확보해야 된다는 것, 예수님의 마지막 유월절 만찬에서 드러났고 2천년동안 기독교 교회가 성만찬을 지속했다는 것에서 확실하게 드러난 요소입니다. 다만 그것이 오늘 교회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하는거야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스스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결식하시는 분들 노숙자들과 밥을 같이 나눈다 하는것도 일부가 될겁니다. 자칫하면 그런 것도 행사로 끝날수가 있거든요. 일단 내가 뭔가를 베푼다는 생각하면 일단 그것은 밥상공동체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보면 노숙자들과 결식자들에게 밥을 먹이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이 사회가 더 정의로워 지도록 투쟁하는 겁니다. 이 사회는 계속해서 양극화가 심화되구요. 정치인들이 세금을 걷어서 올바로 쓰지 못하고 있는데도 그런 것에 대해 입뻥긋하지 않고 그냥 봉사 종종하고 그런 것으로 기독교의 밥상공동체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 세계를 잘 모르는 것이고 책임에 대한, 책임을 확실하게 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다시피 남북분단 참 심각한 것인데요. 미국으로부터 전투기, 헬기라든지 이런 것들을 몇대만 사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국방비로 들어가는 것 10%로만 줄인다고 하더라도 교회가 결식자들을 위해 쓰는 돈보다 훨씬 많은 부분을 보충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아마 테레사 수녀가 그런 부분에 대해서 욕을 먹는 부분이 있기는 있습니다. 그 나라 부조리한 것들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침묵하는 정도가 아니라 합리화되는 길도 열어 줄 수 있는게 아닌가 합니다. 그거는 너무 지나친 비판인 것 같구요. 그분은 훌륭하게 자기 맡은 부분을 잘 했다고 제가 생각합니다. 이야기하는 것은  중대형 교회들이 경쟁하다시피 결식자들에게 밥을 나눠주는. 밥퍼 공동체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게 도대체 기독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까? 생각됩니다. 그런 것도 해야지요. 제가 말이 조심스러워서요. 자칫하면 나쁜 것으로 말하는 것으로 들릴까 싶습니다. 그렇게 좋은 것을 하구요.

그러나 밥상공동체가 그렇게 낭만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더 그리고 고대사회와 달리 오늘날에는 구조적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오늘날은  구조적으로 투쟁하면서 해결해야합니다. 임시직이라고 합니까? 사람들이 많이 있잖아요.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얼마전 한국 기독교 대표기업 이랜드에서 벌어진 사건에서 똑바로 보았듯이, 쉽게 처리해버리면서 그러면서 교회 상당한 헌금은 선교비로 쓴다고 하거든요. 아마 이랜드에서 비정규직 일을 처리하면서 벌어들인 돈으로 결식자들을 많이 도왔을 거예요. 그 자체를 제가 뭐라고 말을 했는데. 상당히 오늘 기독교인들은 그런점에서 뱀처럼 슬기로울 필요가 있죠. 이 세계를 똑바로 보아야 하는 것이죠. 밥상공동체라는 이 말을 여러분에게 드리는 것, 이거를 낭만적인 즐겁게 밥먹고 우리 교회에서도 하는데 예배후에 식사하고 친교 나누고 이런 정도로만 끝나지 말자. 이 밥상공동체가 더 나아가야하죠. 교회밖으로 가열차게 힘을 받고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다시피 제3세계에 있는 어린아이들이 노동으로부터 학대당하는 일 아시잖아요. 한국 교회가 다 맡아서 일을 하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가능한대로 구조적인 불평등, 구조적으로 밥상공동체가 깨지는 그러한 쪽으로도 마음을 좀 써야 되겠습니다. 아시겠죠?

예수님의 이 밥상공동체, 교회에서 행하는 성찬예식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 세계 전체가 진정한 코이노이아를 나누는 세계거든요. 같이 나눔이예요. 그러니까 큰 나라들 OECD라고 할 수 있을까요? G7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 나라들이 실제적으로 제3세계와 같이 밥상에 둘러앉아서 먹어야 한다는 사유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죠.  기독교는 바로 그것을 향하고 있는데 기독교 국가라고 하는 선진 기독교 나라들이 기독교 정신으로 살지않는 거 같죠. 미국이 그런 경향이 강한데 미국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우리도 기독교 신앙을 개인의 차원에 머물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 다음 항목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시던 날 저녁에 행하신 기도안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잔을 내게서 옮기소서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왜 저런 기도를 드리셨을까요? 죽음이 두려우셨을까요? 그럴리야 없겠지요. 물론 한편으로 생각하면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제가 오늘 초상집에 가서 설교한 내용과 연관이 되는군요. 죽음이라는 것은 모든 것으로부터의 단절이기 때문에 두려운 대상임에 분명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도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몸도 다 흙으로 돌아갈 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한 모든 것들이 사라지게 되구요.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도 다 따라서 죽게될텐데요. 그러면 우리가 세상에 왔는지 없는지 모르는 그러한 세계가 죽음은 참 두려운 대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음때문에 그렇게 잔을 옮겨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셨을겁니다. 소크라테스와 비교를 했는데요. 소크라테스는 굉장히 스토아적인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평정심을 잃지 않고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인간적인 모습이 뭐냐? 글을 쓴 분들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예수님께서 잔을 물리쳐 달라는 호소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 의미가 있지않는가 생각해봅니다. 하나는 죽음에 대한 이해가 다른거죠. 기독교적인 이해와 철학적인 이해가 달랐습니다. 헬라철학은 영과 육 이원론적인 시각에서 보기 때문에 육은 악하기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죽는다고 하는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축복입니다. 영은 영원하고 본질이고 이데아에 속한 것이기에 해방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열반으로 들어가는거죠? 기독교 적인 전통에서는 그게 아니거든요. 영과육이 하나거든요. 정말 온전히 죽는 것입니다. 자기의 정체성이 다 사라지는 거든요. 여기서 영혼 불멸설이 어떻게 연관되는 것이냐? 그거는 여기서 다 이야기하지 못하겠습니다. 그거는 또 다른 문제이구요. 어쨌든 기독교는 죽음을 심각한 문제로 잡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죽는 것을 죄의 결과로 보는 거죠. 죄는 곧 하나님과의 단절인거죠. 하나님의 단절인거죠.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이 갈 수 밖에 없는길. 죽음. 그러니까 단순하게 육은 죽지만 영은 사는 그런 이원론적인 헬라철학적인 생각인데 전체적인 죽음이기때문에 두려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것이 예수님이 기도할 수 밖에 없는 이유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두려워한 그 본질이 무엇이냐고 하는 것이죠. 예수님이 아무리 죽음이 두렵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그것 때문에 몸부림치지는 않으셨을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음이 예수님뿐만이 아니거든요. 애국자들이 그렇게 많이 죽었습니다. 반로마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이 수백명 수천명씩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죽을때 정말 힘들어서 신음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마는 아마 유대나라 만세 고함치며 자랑스럽게 죽은 사람들도 있을겁니다.

예수님이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자기가 온전히 참여 했었던 하나가 되려고 했었던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라고 생각했었던 하나님의 나라가 이렇게 끝나서 되느냐 하는 그러한 절망감이 아니었는가 하는 것이죠. 생각해 보세요. 그분은 십자가 앞에서 어떤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가 공생애 동안에 많은 사람들을 위로 하기도 하고 고치시도 하고 사람들이 많이 따르기도 하고 본인을 통해서 자신을 통해서 메시아 사건들이 일어나고요. 하나님이 온전히 함께 하셨다는 많은 경험을 하셨을겁니다. 그래서 이 길이다. 하나님에게 순종하면서 가는 이 길이 인류 구원의 길이다 라고 그 길을 오셨겠지요. 결과는 죽음이거든요. 이거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제 말이 이상하게 들리시나요. 예수님이 내가 이렇게 가면 십자가에서 죽고 인간들을 구원한다고 확신하셨을까요? 저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당시에 어느누구도 십자가에 죽는 것이 인간의 구원을 이루는 길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너무 단정적으로 이야기하면 조금 여러분들에게 거북스럽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제가 알아봐야 얼마나 알겠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확실하게 말씀을 드려야 여러분들의 생각이 좀 열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그리고 틀린말을 아닌거죠.

제가 설교비평에 있어서 때에 따라서 비아냥거린 거린 부분들이 있습니다만. 오해될 부분들이 있었을거예요. 생각해 보면. 많은 사람들이 저를 직접 만나면 글 보기보다는 사람이 다르네. 그 말을 제가 이해를 했습니다. 글에는 좀 강한 것 같아요. 사람은 좀 유하니까 다르다고 느끼는 것을 보면 제 글이 사람 마음을 좀 흔드는 게 아닌가 싶은 그런 것을 제가 인정합니다. 그러나 제가 없는 이야기를 하지는 않거든요. 지나가는 길에 변명한마디 했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이 길로 가게되면 십자가에 달려 죽을거라고 하는, 나중에는 임박했으니까 누가 보더라도 느끼니까요. 받아들이겠지만 처음부터 그 길을 간 거는 아니었습니다. 결국은 십자가로 죽는다 그러면 자기 한일이 다 실패로 돌아가느냐 이런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지요. 이러한 것은 완전히 본인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결과를 맺었습니다. 이 잔을 옮겨달라고 기도하지않을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 죽음은 완전히 실패니까요? 전달이 되나요? 이렇게만 말해갖구는 오해가 될 수 있을것 같은데. 어쨌든 고 부분을 그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마지막에 예수님은 그 생각에 머물지 않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러한 기도로 결국은 순종하신거죠. 거기에 핵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십자가를 지신 것은 아니지만 순종하신거예요. 자기에게는 확신이 없어. 십자가에 죽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확신은 없어.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가야되는거죠. 제가 기독교 신앙은 자기가 믿고 있는 자기 자신도 신뢰하지 않는거다. 하나님만 신뢰하는 거다 이것과 연관되는 거다.

제가 굳이 예수님을 인간적인 차원에서 말씀 드리는 거예요. 예수님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거는 아닌거 같아요 이건 모든 것이 끝장나는 거예요. 어디고 구원의 조짐은 보이지 않습니다. 민중들 믿을 만한 대상이 아닙니다. 5천명이상 따랐지만 순식간에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돌을 던진 사람들입니다. 민중신학의 한계입니다. 민중을 지나치게 이상화합니다. 그렇다고 엘리트주의가 이상적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포퓰리즘이나 엘리트주의가 그 모든 것들이 다 절대화되면 바른 신앙도 아니고 현실적으로도 옳지 않습니다. 예수님 생각에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믿을 수 없고 아무런 희망도 없고 막막한 상태에서 그렇게 투쟁했지만 이스라엘 종교는 변할 조짐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를 따르던 사람들 흩어집니다. 아무도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구요. 자기 가족들도 몰랐구요. 그런 상태에서 자기에게 돌아온 것은 십자가 죽음이었죠. 절망이지요. 피하고 싶지요. 다른 길이 없냐고 하나님께 묻고 싶지요.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라는 기도로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받아들였습니다. 순종이죠.
확신하지 못하는 순종, 거기에 긴장이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세요. 부활할거라고 생각하세요? 부활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런게 뭔지 아세요?  다음에 부활 더 이야기를 해야 되겠습니다만 확실하지 않지만 하나님께 순종하는거예요. 기독교 신앙은 다 모든 것을 확인해서 믿는 것은 아니예요. 광신은 아닌거예요. 타당한 근거를 갖고 있지만 그러나 실증적인 것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에 근거한 확실성을 갖고 있는 것이죠. 애매하기도 하고 역동적이기도 하고 유기적이기도 하고 좀 변증법이구요. 예수님이 바로 그렇게 사셨으니까요? 십자가 처형으로 다 끝날 것 같은 막막함. 그러나 다른 길이 눈에 보이지 않고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그러한 깨달음, 그 가운데서 예수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요거는 그냥 넘어가죠. 비폭력에서 자주 인용되는 이야기죠. 과연 기독교 윤리가 비폭력을 절대화하냐 아니냐 그것도 논의가 많이 필요합니다. 비폭력은 기본 바탕에 깔고 있지만 그러나 이 세계가 그걸 이용하는 게 많이 있거든요. 그러면 똑같이 폭력을 쓰는 것은 기독교 신앙적인 것은 아니겠지만 반폭력, 폭력을 반대하기 위한 소극적인 폭력은 가능하지 않는가? 기독교 윤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기에 접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칼을 쓰는자는 칼로 망한다는 마지막 순간에 벌어졌던, 에피소드죠. 없어도 되는 거죠. 없어도 되는건데 거기 들어왔습니다. 칼을 꽂아서 말고의 귀를 자르고 칼을 칼집에 꽂으라. 예수님을 설명하는데 지장이 없는데 이 이야기가 들어왔습니다. 그거를 보면서 각주를 달았습니다. 칼에의해 체포 당한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가 칼의 역사를 심심치 않게 자행해 왔다는 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아이러니다. 정통교회의 조금만 다른 이야기를 해도 종교재판에 처했다. 점성사들, 수사들 자유주의 과학자들, 인문주의자, 집시들에게도 마녀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박해를 가했다. 칼에 의해서 체포당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기독교가 다시 칼로 폭력을 행사한 전력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부끄럽게 생각하고 회개하고 진정한 하나님의 평화를 위해서 나가야 되겠죠.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면 설교조가 되는거죠. 삶이 그렇지 않으니까 그게 어려운 것입니다. 칼, 칼을 준비해야 되나요? 안해야 되나요?

빌라도 이야기. 시간이 5분되었군요. 빌라도 이야기하구. 또 다른 게. 가상7언. 빌라도 이야기와 빈무덤 이야기 다음주에 하겠습니다. 질문 있으면 아주 급한 것 있으면 문자로 주세요. (후루룩~~~)

질문: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살아 계실 때 신성이 제한을 받았는가? 신성과 인성의 문제.

참, 그런 것들을 자로 재듯이 설명드릴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설명하려면 먼저 신성이 뭐냐 하는 것을 정리해야 하거든요. 보통 우리는 초능력, 역사초월, 창조의 능력을 신성이라고 합니다. 전혀 변하지 않는 불변,  영원한 생명, 이런 것들을 신성이라고 하는거죠. 그런 것들만 지상의 예수님은 철저히 제약을 받으셨습니다. 제약 받으신 정도가 아니라 온전한 인간이셨습니다. 신성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신성은, 앞서 말한 신성은 유대교적인 신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제한 시키는 차원에서 신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초능력자으로가 아니라 무능력한 자로 자기의 신성을 낮추는 거예요.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바로 무능력의 표현이거든요. 목마르다고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신성이 땅으로 케노시스라고 하죠. 자기 낮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하나님 이해로 이해 하는 것이죠. 예수님이 당하셨던 모든 인간적인 한계들, 모든 것들이 신성입니다. 신성과 인성이 그렇게 칼로 딱 잘라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하나가 된거예요. 우리는 신성을 인간성을 뛰어 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굳어져 있거든요. 기독교는 그러지 않습니다. 예수의 인성, 일치된 인간적인 한계, 자기를 낮추신 케노시스 하신 하나님 하는거죠. 3위일체론적인 하나님, 굉장히 역동적인 역동적인 하나님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패러다임을 바꾸어야만 합니다. 하나님 하면 자꾸만 어떠한 큰 그런 것들을 생각하는데, 그런것을 전제하면서 창조와 종말 그런게 있으면서 우리 한계안에 들어와 계신 그러한 예수님을 생각하는 그러한 하나님 이해가 필요한 것이죠. 신성이 무엇인지는 우리가 다는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아는 한계안에서 개념화 하고 있는 중이죠. 종말에 가서는 그 모든 실체가 드러나게 될 겁니다. 지금은 그 과정중에 있어요.

그렇죠. 성부와 성자가 하나잖아요. 그게 서로 의존하는거예요. 이게 참. 지금 그런 질문들은 삼위일체론의 핵심들인데 책을 보셔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자족, 단독자로서 성부 하나님말이죠. 단독자로서 이면서 동시에 인간예수에게 철저하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적인 하나님이해에서는 하나님 스스로만 하나님이 아닌거예요. 그러니까 앞서 말씀드린 것을 늘 생각해야 됩니다. 신성과 인성을 칼로 잘라 내듯이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해 준 것 만큼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계시가 온전히 예수에게 드러났다고 우리는 믿고 있는 것이죠. 초월이면서 동시에 내재하는, 제한된, 말장난이다. 혹시 그렇게 생각하시면 더 이상 설명이 잘 안됩니다. 신학적 사유가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자꾸 신학적 사유, 언어, 사건 세계 자꾸 이야기하잖아요. 궁극적인 것들은 그 방식이 아니면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을 창조한 그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하여튼 한 학기동안 여러분들에게 가르쳐 드릴 것이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평신도지만 신학적으로 사유를 하는 것인가? 그걸 가르쳐드리는 것이 핵심이거든요. 많은 이야기를 하는데 그거 책을 읽으면 다 나옵니다. 혼자서 책을 보면 그게 잘 들어오지 않아요. 신학적 사유라고 하는 것이 그런 점에서 직접 강의를 듣는 것이 굉장히 유익합니다. 글만 읽어서는 한계가 있거든요. 그러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드리면서 신학적으로 사유하는 맥락쪽으로 끌어드리려고,  도움을 드리려고, 수영을 좀 가르쳐 드릴려고 영적인 수영을 잘 할 수 있도록 가르쳐 드리려고 하는데 일단 제가 수영을 잘해야 하는데 저도 시원찮고 해서 설명이 어떨 지 모르겠습니다.

밥상공동체에서 투쟁하는 거하고 하나님의 배타적 구원하고는 직접 관계는 없습니다.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물론 멀리 보면 연결할 수 있겠죠. 하나님의 배타적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구원자체가 배타적이라고 하는 것인데요. 우리가 어떤 이 땅의 삶의 문제들을 개량해가는, 개량하거나 복지화하면서 이루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사건이라는 그런 뜻인데요. 그렇다면 밥상공동체를 이룰 필요는 없지 않느냐? 아마 그런 뜻으로 질문하시는가 보죠? 아, 예. 하나님만이 온전히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는 것을 전제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루시는 하나님 나라에 청지기로서 참여하다는 거죠. 그런 설명으로 대답이 될려나요. 거기도 긴장이 있는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밥상공동체, 세계정의 평화로운 밥상공동체를 이룬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그렇게 참여하는 것이구요. 그런 것을 전제하면서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땅에 계실때 우리들에게 행하신 그런 일들을 우리에게 주어진 한계 내에서 최선을 다해서 실천하는 것, 윤리적인 차원에서 애기하는 거죠. 그러니까 그 차이가 있는 것이죠. 이렇게 이야기해야 하겠네요. 하나님의 배타적 구원이라고하는 것은 하나님 행위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고 밥상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우리 기독교인들, 하나님 나라 구원이 임한다고 하는 사실을 기다리는 사람들로서 마땅히 감당해야할 윤리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상위 개념은 배타적 하나님 구원이죠.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고런 정도까지 하겠습니다. 네. 오늘 수고들 하셨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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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님, slowneasy님 화일. 단네와뜨!(Hindi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