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해설 제7강-나는 믿습니다(05)

안녕하세요.
오늘 사도신경 공부 제7강이 되겠습니다. 지난번 6강에서 결론적으로 이야기한 그 내용은 참됨에 대한 인식, 이것이 기독교의 신앙과 세 가지 차원에서 연결된다고 하는 대목이었습니다. 그게 왜 필요한지, 지금 판넨베르그가 왜 이런 것을 이야기하는지 아마 알고 계실 거예요. 지금우리는 사도신경의 세 항목이 각각 나는 믿습니다는 그러한 핵심 문장하고 연관되어 있다고 하는 그 관점에서 믿는다고 하는 관점이 뭔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거는 뭐 각각 입장에 따라서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판넨베르그의 견해에 따라서 보고 있는 중이예요. 판넨베르그에 따르면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아무런 근거없이 그저 자기 자신의 실존적인 신앙의 체험, 여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믿고 있는 대상이 참되다고 하는 사실에 대한 인정, 인식을 같이 받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참됨에 대한 인식이라고 하는 것, 독일어로 피어바할텐이라고 그 단어를 제가 말씀드렸어요. 그런데 참되다고 인식하는 것, 인정하는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단순하게 기독교 신앙에서 그냥 그런 것만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3가지 차원으로 구분된다고 하는 겁니다. 3가지 차원으로 구분되기도 하고 3가지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거는 지난번에 했으니까 제가 길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냥 항목으로만 다음과 같이 3가지입니다.

첫째는 현존 세계안에 있는 가시적인 근거,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세계, 하나님의 창조 세계, 그리고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역사적인 사건들입니다. 그거는 가시적인 근거구요.

두 번째는 불가시적인 현실입니다. 하나님이 불가시적이고 고양된 예수님도 불가시적이고 생명의 깊이에서 신비의 방식으로 활동하는 성령도 불가시적이니까요. 그러한 불가시적 현시적 차원에서도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이 이것이 타당성을 확보해야 된다는 것이죠.

세 번째는 의지한다는 것에 대한 확신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거는 종말론적으로 우리가 얻게 될 죄의 용서, 존재의 부활, 그리고 영생이라고 했습니다.

예. 이러한 세가지 지평은 정말 중요한 제목이구요. 반복해서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합니다만 이것을 여러분들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것들은 그저 우리가 뛰어난 신학자가 자기의 논리를 변증하기 위해서 제공하는 하나의 이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기독교 신앙의 확실한 토대에서 놓칠 수 없는 부분들입니다. 제가 이 시간에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다음 판넨베르크가 어떻게 이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책으로 19쪽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 관계 가운데서, 세 가지는  참되다고 하는 인식이 기독교 신앙과 연결되어야할 세 가지 지평을 이야기 합니다. 바로 제가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러한 세가지 관계속에서 신뢰라고 하는 것은 진리, 즉 의지할만한 것에 대한 확신을 전제하지 않고는 존속할 수 없다. 신뢰는 그 기초적 근거에, 기초에서 진리성이 없으면 존속할 수 없다. 또한 그것은 근거가 분명하고 의지될만한 불가시적 진리, 불가시적 현실성(운지트바레 지레튼가이)에 대한 확신 없이는 존속할 수 없으며, 신뢰하는 자가 의지하고 있는 근거의 확실성이 성취된다고 하는 기대 없이는 존속할 수 없다. 요 파라그래프는 바로 앞에 이야기하는 세 가지 차원들이 기본적으로 진리론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참되냐? 그 참될 때만, 진리일때만 우리는 거기서 신뢰가 가능하다고 하는거죠.

이러한 진리의 조건들과 신뢰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사도신경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가리킨다 하겠다. 믿는 자가 고백하는 하나님의 위격*과 예수의 위격은 사도신경의 진술에서 훨씬 밀접하게, 훨씬 분명하게 드러난다. 위격이라고 하는 것은 영어로 person, 독일어로 거의 똑같습니다. 페르존, 라틴어로 페르조나라고 하는 건데요. 어떤 퍼스날리티와 연관된 단어이구요. 그거를 왜 하나님의 인격, 예수님의 인격이라고 하지 않고 위격이라고 했느냐 하면 인격이라고 하면 이건 그냥 낱말 뜻으로만 따라가면 인격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하나님을 인간과 비슷한 어떤 존재로 오해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우리가 하나님을 인격적 존재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인격적인 소통이 가능하다. 인격적인 하나님, 인격적 관계,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설교를 많이 듣고 성경도 그런 관점에서 많이 읽습니다.

탕자의 비유 같은 데서 나와 있듯이 하나님이 실제로 말썽을 부렸던 아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와 같은 그러한 표상으로 비유되거든요. 이게 하나님이 누구냐 하는 것에 대해 일부를 그런 방식으로 말했을 뿐이지 하나님이 실질적으로 우리 인간과 비슷한 존재는 결코 아닙니다. 인간과 같은 비슷한 존재가 아니다 하는 말은 양면성이 있는 거예요.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속성이 부분적이라 하더라도 나타나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런 말들 표현이 조금 어려워서 제가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이게 오해될 수 있기 때문에요. 하나님의 형상이,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형상으로 우리를 지으셨는데 그 형상이 뭐냐 하는 거죠. 그게 우리 겉모습으로 드러나나 것은 분명히 아닌거예요. 그러니까 자치하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신인동형동성론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nthropomorphismus(영어: anthropomorphism), 그런 식으로요. 우리 인간을 더 극대화한 어떤 존재로 생각하는데 그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그분은 창조자이고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여기는 어떤 영속성이 존재론적으로는 가능하지 않다고 봐야죠. 사실은 그러한 관계들을 소상하게 밝혀내기가 힘들구요. 거기에는 학자들의 입장에 따라서 많은 다른 이견들이 나오고 있어요. 이건 뭐 죄론, 속죄론하고도 연관되는 이야기인데 만약에 우리의 타락이 전적인 타락이냐 아니냐? 그런 것에 따라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속성이 남아 있느냐 아니냐는 것도 달라지거든요. 만약에 전적인 타락이라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하나님의 속성이 남아있을 수 없죠. 그러니까 그것은 타락하기 이전의 하나님의 형상이 어떤 거냐 그것도 우리는 지금 이미 타락이후로 전적으로 부패되어 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완적인 타락이 아니라 부분적인 타락이라고 한다면 우리에게는 약간 파손된 방식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있다고 말할 수 있죠. 그것을 양심이라든지, 그러한 방식으로 이렇게 저렇게 조금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격이라고 할 때 제가 뒤에 각주를 좀 달았습니다. 제가 그 뒤에 각주를 좀 달았습니다. 역주, 색인 있지요? 제가 번역을 하면서 여러개 정확한 숫자가 몇개나 되나?책을 가지고 계신 분들은 228쪽에 보면 역자주 색인이 있을 겁니다. 거기에 몇 개나 되나요? 80개정도의 색인을 달았습니다. 게슈타트, 개방된 세계, 교회를 믿는다, 교회의 보편성... 가나다순으로 그렇게 달았어요. 이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패러그라프 끝나는 부분에 위격이라고 하는 단어에 대한 각주로 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위격(die Person Gottes)라고 할 때 여기서의 위격(Person)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격적으로 서술하기 위한 단어다. 따라서 여기서 단순하게 하나님의 존재나 하나님의 인격이라고 해도 그렇게 틀린 해석은 아니다. 예수의 위격이나 성령의 위격이라는 표현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만약 위격이라는 단어가 이 문장을 이해하는데 방해된다면 그 말을 빼고 단순히 ‘하나님’이라고 생각해도 잘못은 없다.
네. 하나님의 위격, 하나님의 바로 그 계심, 하나님의 하나님 됨, 예수의 그 사건, 바로 예수 그 자신 이러한 사실들이 사도신경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신앙이 정향하고 있는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전능자로서, 세계 창조자로서 표상되고 동일시된다. 이에 반해서 성령은 사도신경에서 그렇게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지는 않다. 오히려 니케아 공의회 신조에 훨씬 명백하게 서술되어 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성령은 예언자들에 의해 언급된,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활동가, 활동자로 일컬어진다. 사도신경에서는 ‘성령을 믿사오며’ 한 문장으로 끝나고 마는데 니케아신조에서는 훨씬 더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사도신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독생자 하나님으로 그려지며. 그렇죠. 그의 지상적인 길을 뛰어넘어 부활, 승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심, 그리고 심판자로 다시 오심이라는 일련의 서술을 통해서 그 특색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이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가 밀접하게 사도신조안에서 설명되어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런 상세한 규정은 예수의 위격을 임시방편으로 기억하고 그 자체로는 별 무게가 없을 수도 있는 일종의 참고사항만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시겠죠? 사도신조에 나와 있는 예수에 대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대목들이 그저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참고사항이 아니라 그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해석이고 인식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하늘에 오르사’ 이러한 문제들이 그냥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죠. 고양된거예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 하나님 우편,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이거는 예수에 대한 근원적인 진술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결국 사도신경은 우리가 믿고 암송한다고 하는 것은 예수에게서 일어난 그러한 신적인 사건,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공동의 신조, 공동으로 같이 고백해야할 신조라서 길게 설명되지는 않지만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 놓칠 수 없는 예수에 대한 근본적 진술을 담고 있는 겁니다. 거기는 해석되어야할 그러한 많은 내용들을 담고 있는 거죠. 그게 다 숨겨져 있습니다. 감춰져 있죠. 그러한 것들이 또 오늘 이 시간까지 계속 열려져 있어야 할 내용이기도 합니다. 계속해서요.

오히려 그런 서술에서 사도신경의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셨으며 심판자로 다시 오신다는 믿음이 의지하고 있는 그러한 대상, 위격으로 고백된다.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고 하는 예수의 신적인 차원에 대한 진술은 바로 역사에서, 역사적으로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고 오실 바로 그분이다로 고백된다고 한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 그렇지 뭐. 그게 어떻다는 것이냐라고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네. 우리가 지금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 그 흐름에서 본다면 이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진리론적인 차원에서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는 거죠. 사도신경의 형성에 관계되었던 로마기독교인들과 그 당시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역사적 예수가 참되다고 하는 그러한 사실이 그러한 자체로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명되었다. 그렇게 인식되었다. 그렇게 고백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어떻다고 하는 것이냐 이러한 질문에 대답을 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 오늘도 여전히 창조주 하나님과 생명의 영인 성령의 구도안에서 변증되고 해명되어야 한다고 하는 그러한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진리론적 접근들을 우리가 놓치면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가장 기본적인 우리 신앙의 명제는 그저 믿고 있는 나 거기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론적인 구도안에서 훨씬 더 심화되어야 할, 그리고 해명되어야 될 그러한 주제라고 하는 것이죠. 그 창조주 하나님 하나님과 생명의 영인 성령, 이거는 제가 삼위일체론적인 문제라고 간단하게 말씀드렸습니다만 이거는 사실은 이 세계 전체를 해명하는 기독교적인 신적 경험이라고 하죠. 삼위일체라고 하는 게 그렇게 초기 기독교의 사변적인 논리 이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기독교 일수 있는 기독교 독특성과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변별될 수 있는 가장 탁월한, 아주 근원적인 그러한 교리, 그러한 가르침, 그러한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보십시오. 아까 말한 세 가지 지평하고도 연관되는 것이구요. 그거는 사도신조를 우리가 왜 참된 신앙고백이냐, 참된 신앙이냐 그러한 부분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만 아니라 오늘 이 시간 2천년이라고 하는 시간적 공간적 차이를 두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세 가지 차원에서의 진리론적인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하는 사실이 이러한 삼위일체 관계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 가지예요. 그걸 일일이 또 다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창조자 하나님, 세계 전체인거죠. 물리학, 생물학, 심리학도 들어가겠구요. 세계전체, 그리고 예수 역사적 사건들, 결국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삶의 심층적인 차원에서 역사하시는 영 말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들에게 와 닿습니까? 아니면 조금 추상적으로 받아들여지시나요? 생명의 심층에서 활동하시는 성령, 그것과 연관된 다른 것들이 머리에 들어오시나요. 생물학계나 물리학이 이 세계를 설명하고 있는데 결국 그들도 자기들이 하고 있는 그러한 실증적 과학의 방식으로 모든 것을 해명해내지는 못하고 있는 형편이거든요. 조금 있으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거라고 하는 확신도 가지고 있지 못하거든요. 그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어쩌면 미궁으로 빠지게 되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될 겁니다. 그들도 뭐라고 애기할 수 없는 어떤 근원적인 것에 휘둘리는 거죠. 거기에 빠져드는 거죠. 그들이 하고 있는 학문이 성실하지 않다거나 불확실하다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것들을 계속 쌓아가고 그것을 위해서 세계를 해명해가도 여전히 되지 않는 근원적인 문제가 어떤 것들이 있는겁니다. 그걸 인제 생명의 심층에서 활동하고 있는 성령이라고 우리는 그렇게 이야기하는거죠. 네. 이러한 두루두루 전반적인 것들이 삼위일체론적인 차원에서 서명할 수 있습니다. 설명해야되구요. 네 설명이 되었죠? 그다음 패러그래프 보겠습니다.

이러한 설명은 신앙의 대상을 분명히 함으로써, 또한 동시에 신앙(信仰)하는 자가 무슨 근거에서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을 신뢰하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함으로써 타당성을 갖게 된다. 신앙하는 자가 그 어떤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여기서 신뢰하고 있는 그 확신은 그가 신뢰하고 있는 것을 아는 데에 근거하고 있다. 앎의 문제. 물론 이러한 앎은 확실히 완전하지 못하며 임시적인 상태로 남아 있으며, 또한 회의(懷疑)에서 벗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앎은 여전히 불가시적인 현실성에 대한 가시적인 표식의 기초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뢰한다고 하는 것, 신뢰하는 대상을 아는데에 근거하고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창조한 세상을 알아야 되죠. 그 분의 창조행위를 알아야 되죠. 뭐로부터의 창조인가를 알아야 되겠죠. 네 등등 앎의 문제가 중요한데 그러나 우리에게 더 근원적인 문제는 그 앎이라고 하는 것이 잠정적이라고 하는 것이죠. 판넨베르크의 말을 빌자면 회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하는거죠. 이건 피조물로서 우리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이기도 하고 또 세계가 아직 완료, 종말론적으로 완료되지 않았다고 하는 겁니다. 이 관계를 판넨베르크는 이렇게 묘사한거예요. “이 앎은 여전히 불가시적인 현실성에 대한 가시적인 표식의 기초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네. 보이지 않지만, 불가시적이지만 그러나 현실적인 Unsichtbarkeit, 이러한 불가시적 현실성에 대한 가시적인 표시에 기초. 요건 조금 직역이라서 전달되기가 원활하지는 않기는 하군요. 이런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자면 진화론 같은 것들인거죠. 이것이 일정한 틀안에서 진리잖아요. 우리가 이것을 통해서 생명의 진화현상을 이해할 수 있잖아요. 저는 진화론이 당연히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문제하고는 상관없고 과학의 진정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방식으로 이 세계를 해명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가 그러한 일정한 차원에서 진화의 방식으로 여태까지 흘러나왔다면, 그것을 학자들이 밝혀왔다고 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걸 인정해야죠. 신학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창조를 진리로 믿는 우리는 당연히 인정해야 됩니다. 이러한 진화론은 불가시적인 현실성에 대한 거를 가시적인 흔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화론을 통해서 그 불가시적인 현실성이라는 것을 완벽하게 잡아내지는 못한다고 하는거죠.

네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은 잠정적이고 의심스럽기도 하다. 우리의 지식, 학문 이런 것들은 늘 이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신학도 예외는 아니죠. 그렇지만 어떤 신뢰도 이러한 표식에 기초한, 잠정적인 판단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판단은, 잠정적(暫定的)인 판단은 “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의 확실성과 신뢰성에 대한 판단을 뜻한다. 그리고 내가 온전히 신뢰하는 것과의 관계 가운데서 나는 내가 의지하고 있는 그가 (혹은 그것이) 전체로서의 내 현존(現存)을 보증할 수 있고, 또한 그렇게 준비되었다는 점을 예상한다. 신뢰라고 하는 관계속에서 우리는 그 대상이 나를, 내 지금 이 현존재를 책임지신다하는 것을 예상한다. 시편기자들이 그런 것들을 말하고 있죠. 인간 삶의 불확실성에 직면해서, 그리고 삶에 의미가 있는지 아닌지 명료하지 않다고 하는 사실에 직면해서, 또한 신뢰에 대한 전적인 의존성에 직면해서, 이 세 가지 직면해서라고 하는 고러한 형식의 문장이 세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전치사구인가요? 삶의 불확실성에 직면해서, 그 의미의 불명료성에 직면해서, 그래도 결국 그러한 불확실성과 불명료성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분ㅡ 어떤 분, 어떤 사건 거기에 신뢰에 대한, 전적으로 신뢰해야 한다는 그 사실, 거기에 직면해서  인간은 그러한 불확실성의 여러 형태 가운데서 우왕좌왕하거나 자포자기(自暴自棄)하지 않으려고 모든 불확실성과 회의에도 불구하고 늘 그런 종류의 신뢰를 의지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신뢰하는 자가 의지하고 있는 것에 대한 신뢰성이 충분한 근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여전히 불가결한 요소이다. 무슨 말인지 전달되었죠? 유아들은 어머니의 가슴에 안겨서 전적인 신뢰를 경험하구요. 특별히 종교인이 아니더라고 하더라도 나름대로 그러한 대상들, 신뢰할 만한 대상들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런 것이 없이는 인간이 살 수 없습니다. 그것이 돈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명예심일쑤도 있고 아니면 자기의 취미생활일수도 있고요. 그런 대상이 인간이 만들어놓은 이데올로기나 피조물, 인간이 생산해 내는 그런 것들이라면 그걸 성서가 우상이라고 하는거구요. 우상도 사람이 신뢰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고 하는 아주 근원적인 사태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의지하고 있는 것, 신뢰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거죠. 그러한 점에서는 계속 우상과 참된 하나님 신앙 사이에서 논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상도 여전히 그게 옳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거거든요. 가나안의 바알종교도 풍요의 신, 다산의 신, 그런 것들을 통해서도 거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존재의 확실성을 나름대로 느낀다고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 말에서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가짜다, 거짓이다. 결국 우리의 삶을 안전하게 확보해주지 못한다. 그것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의 약속이다. 어느 것이 더 확실할까요?

지금 판넨베르그는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이러한 말속에 그 믿고 있는 대상에 신뢰할 만한 그런 근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건 판넨베르그 자기 자신의 개인적이 생각이 아니 사도신경에서 이미 그것을 전제하고 있다고 한 것이죠.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만물의 창조자이기 때문에 그를 신뢰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정복했으며 죽음을 뛰어넘어 형성된 공동체를 스스로 보증하고 있기 때문에 그를 신뢰한다. 사도신조에는 요 두가지 항목이 가장 중요하게 나왔어요. 성령은 조금 아까 말씀드린데로 한 마디로 끝내고 말았구요. 니케아신조에서 더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초기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그냥 무작정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창조능력에서 믿었고 예수 그리스도도 죽음을 극복한 분으로서 믿었는데요. 거기에는 자기들이 그 대상을 옳다 진리다 그러한 확신을 할 만한 근거가 있다고 본거죠. 여기까지는 무슨 말인지 잘 전달되었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아버지에 대한 저들의 전적인 신뢰가 진리이론적인 토대를 확실하게 확보한 가운데서 형성되었다. 그러한 신앙고백, 그러한 신앙의 알짱의 문서화가 사도신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21쪽 새로운 패러그래프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도신경과 기독교적 전승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몇 가지 고유한 난제들을 만나게 된다. 왜냐하면 거기서 문제가 되는 추정의 ‘사실들’이, 특히 두 번째 항목인 예수, 또한 하나님의 현실성과 세계의 창조에 관하여, 그리고 니케아 공의회에서 언급된 대로 모든 생명의 근원인 영에 관한 사실들이 오늘날 더 이상 의문의 여지없이 확고부동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도신조와 니케아신조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자기들이 신뢰하고 있는 그 분에 대한 확실한 근거들을 갖고 믿었는데, 근데 그 2000년 전의 그들의 그 근거들이 오늘에는 더 이상 확고부동한 기준으로 제시될 수 없다고 하는 거죠. 창조, 예수의 부활, 그리고 창조 및 예언에 등장하는 영의 활동에 근거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대신에. 이런 것들은 사조신조와 초기 기독교인들이 붙들고 있었던 신앙의 알짜배기들입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그런 것을 하지 않고 대신에 사실(事實)의 사실성(事實性)을 믿어야 했을지 모른다. ‘사실의 사실성’이라고 하는 이 독일어 표현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아주 실증적인 사실들을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사도신조에 나와 있는 신학적인 진술들보다는 그것은 고대인들의 그러한 세계인식으로 미루어 두고 오늘은 명백하고 실증적인 사실들만을 따르는 게 더 바른 기독교인들의 자리가 아니냐? 그렇게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다”를 지적합니다. “일단 그 사실들은 우리가 그것에 근거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근거가 될 수 있었다. 사도신경이 많은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을 정도로 불가해 하거나 혹은 독단적인 형식화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된다고 하는 것은.” 현재 기독교신앙이 그렇게 인식되고 있잖아요? 예를 들자면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갔다’ 이게 말이 되냐 하는 거죠?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다.’ 이게 도대체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씨가 먹히는 소리가 되겠냐고 하는 “그렇게 받아들여지고 인식된다고 하는 것은 신앙고백에서 검용(?)된 구원행위가 인간경험과 관계없거나 아니면 현재 현성과 대립적인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따라서 오히려 신앙의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하겠다.” 그런 것을 믿으라고 하면 오히려 신앙의 걸림돌이 되니까 그것을 하지 말고 사실의 사실성들에 집중해야 된다 하는 말이죠. 판넨베르크의 말이 아니라 현대 지성인들이 그렇게 기독교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판넨베르크의 분석입니다.

그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지는 한마디 집어야 되겠군요. 판넨베르크 신학의 특징 중의 하나가 실존주의 신학의 극복에 있습니다. 조금 더 크게 보면 칼 바르트의 말씀실증주의의 극복이기는 하지만, ‘칼 바르트의 말씀실증주의’. 그것도 설명을 하지만 또 우리가 옆가지를 치게 되겠군요. 이 칼 바르트는 19세기에 있었던 자유주의 신학의 특징들을 극복했다고 하는 점에서 대단히 큰 공헌을 한 사람입니다. 19세기 소위 말해서 유럽의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하는 그 흐름은 계몽주의(啓蒙主義)의 영향을 받고요.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나 인간중심적인 신학적 근거들을 확보해 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의 절대의존 감정을 기독교 신앙의 토대로 삼거나 또는 윤리를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외쳤습니다. ‘예수에게 어떤 사건이 일어났느냐’ 라든지 ‘하나님의 우주론적 구원사건에 대한 그런 이해의 깊이를 넓히는 것’ 보다는 ‘지금 여기서 내가 예수를 어떻게 영접했는가! 그리고서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 그 실존적인 신앙경험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 혹은 인간을 계몽하고 교육하고 그리고 윤리적인 인간 삶을 영위해야 된다. 그런 것들을 기독교 신앙의 토대로 놓아야 된다.’ 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칸트라든지 슐라이에르마허 라든지 니체같은 사람들이 주장들이 바로 그겁니다. 바르트는 “그러한 것들은 다 주변적인 것이다. 그거보다도 그런 방식으로 인간을 이해할 수도 없으려니와 그런 방식으로 가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 바탕에서 많이 떨어진 거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 말씀에 바로 서는 거다. 인간이 누구냐를 말하기 전에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서 뭐라고 이야기했느냐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여라.” 그러한 쪽으로 신학의 방향을 인간론으로부터 신론(말씀론)으로 바꾸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론=말씀론, 하나님은 말씀이니까요.

말씀신학의 강점은 인간의 낙관론으로부터 그것을 해체하고 인간에게 있는 불가능성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오히려 하나님으로 부터의 가능성, 이런 것들을 열어 갔습니다. 그런 것들이 1차, 2차 세계대전과 연관하면서 기독교신학에서 설득력을 얻게 되는데요. 그러한 좋은 점, 좋은 점이라기보다도 바른 길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말씀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거니까요. 다만 이제 바르트에게는 그것이 너무 강조되어서 말씀이 모든 것을 재단하는 기준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말씀 실증주의에 근거하면 자연과학과의 대화는 무의미한 거예요. 그리고 타종교하고는 대화, 대화라고 할까요. 타종교 하고는 그거는 아예 상대거리가 되질 않습니다. 물론 바르트 자체가 그렇게 독선적인 분은 아니었고요. 그 분이 타종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가는 그렇게 많이, 아예 근본적으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건 관심 밖이니까요. 하나님이 성서를 통해 어떻게 말씀하고 있느냐에 대해 집중할 뿐이지요. 결국 성서가 말하는 기독론 안으로 딱 집중되어 갖고 보편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관심을 많이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극한적으로 인관의 낙관, 계몽, 교육 이런 식의, 추(錘)가 한 쪽으로 흘러가듯이 그쪽으로 떨어졌던 자유주의 신학으로, 진자운동이지요. 또 한쪽의 극단으로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르트가 극단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그러한 신학적인 경향으로 본다면 그렇게 볼 수 있지요.

판넨베르크가 이런 말씀의 신학으로부터 역사의 신학으로 패러다임을 바꾸었다고 하는 그러한 큰 틀에서 본다면 바르트의 극복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이 판넨베르크가 더 위험스럽게 생각한 대상은 불트만의 실존주의신학 이예요. 바르트와 불트만이 또 어떤 관계에 있느냐 그런 것들은 현대신학에서 중요한 주제가 된 건데요. 오늘 이 시간에는 거기까지는 나가지 않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이 맥락에서 본다면, 그러니까 현대 지성인들이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고, 다시 우리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하는 그러한 관점 보다는 지금 여기서 어떻게 예수와 하나님을 받아들이느냐! 그를 어떻게 메시아로 믿느냐고 하는 고 실존적 경험 이런 데에 초점을 맞추어야 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거죠. 그것이 더 지성적이고 합리적이고 타당하다고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읽어 보겠습니다. 중간에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하느라고 문맥의 흐름을 놓쳤네요. 다시 보겠습니다. “따라서 오히려 신앙의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하겠다. 현대성과 어긋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오히려 해치는 길이 아니냐!” 현대 지성인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거죠. “왜냐하면 대립적으로 보이는 요소들이 고유한 신앙의 표현이거나 아니면 중심적 토대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요? 예수, 부활, 승천, 재림 이런 것들이 기독교 신앙의 주변 종속적인 요소들이 아니라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이거를 강조하다가는 기독교 신앙을 믿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고백의 진술을 원래 있던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는 것, 그리고 신앙의 인격적인 행위로 되돌아  가는 것, 예수에 대한 신뢰와 그의 사랑, 설교에 대한 신뢰로 그리고 예수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선포한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돌아가는 것이 시급하다.”

지금 이 번역이 천천히 따라가지 않으면 이야기가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혼란스럽겠어요. 그러니까 이 문장에는, 우리가 지금 이 문장이 포함된 패러그라프에는 사도신경에 진술되어 있는 고대인들의 하나님에 대한 표상들, 그 진술들, 삼위일체론적 신앙고백들 이런 것들이 때로 오해될 수도 있고, 이런 것들 말고 현대에는 이런 것과 대립되는 새로운 어떤 관점들이 나오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약간 좀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긴 있지만 우리가 그 19세기, 20세기의 신학사조에 대한 전 이해가 없으면 좀 따라가기 힘듭니다. 저도 이걸 그냥 지나갈까 하다가 지나가면 공부가 안되니까요. 19세기, 20세기의 신학사조를 어느 정도로 여러분들에게 설명을 해야 우리가 이 사도신경에 대한 판넨베르크의 책을 읽는데, 이것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까 하는 그 선(線)을 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도 이야기 하면서 조금 흔들리지요. 그건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이 판넨베르크가 결국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는 여러분들에게 전달되었지요. “현대인들이, 현대 기독교인들이 걸림돌처럼 생각하고 있는 원래의 기독교 신앙의 근본, 바로 이 사도신조가 말하려고 하는 그 핵심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고 하는 거죠.

고 문장을 다시 읽겠습니다. “따라서 신앙고백의 진술을 원래 있던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는 것” 이해하시겠지요. 원래 있던 자리에서 벗어나게 하던 일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많아요. 그 말은 그 사도신조의 내용을 모른다는 뜻이지요. 모르니까, 중심이 없으니까 때에 따라서 막 흔들리게 되는 거죠. 그 내용이 뭔가는 앞으로 차츰 더 많이 나오게 될 겁니다.

제 자리를 찾게 하는 것, 벗어나지 않게 하는 것, 그리고 신앙이 인격적인 행위로 되돌아가는 것, 신앙이 인격적인 행위로 되돌아가는 것이 뭘까요? 이것은 하나의 정보로서 아는 게 아니라 영적인 차원에서 일치가 되는 것, 뭐 그렇게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인격적이라고 하는 말이 사실은 ‘영적이다’라고 하는 것과도 통하거든요. 사도신조의 내용들을 그냥 흘려지나가지 말고 ‘그것이 나타내려고 하는 영적인 차원을 잡아라.’ 이 예기지요. 그것과 예수에 대한 신뢰와 그 사랑의 설교에 대한 신뢰로, 그리고 예수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선포한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돌아가는 것이 시급하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의 경우에 죽은 자의 부활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란 일종의 빈 말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했다고 하는 거죠. “또한 예수에게서 현재화된, 그리고 그의 부활에서 밝히 드러난, 그리고 하늘과 땅을 창조했으며 그의 심판을 모든 세계에 임하게 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은 채 단순히 예수를 신뢰하는 행위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하나님 사랑은 그저 일반적인 그런 사랑으로가 아니라 초기 기독교인의 경우에는 그의 부활을 전제한다는 것이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제하는 것이죠. 또 그를 믿음으로 우리에게 임하게 될 부활을 전제하는 것이구요. 그런 것이 없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공허한, 관념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기독론적인 토대에서 해명되어야 한다는 거죠. 마찬가지로 또 예수에게서 나타난 그러한 하나님의 능력, 그런 것들을 의지하지 않고. 그 부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부활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능력, 창조의 능력을 전제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이 두개가 서로 변증법적으로 맞물려 있다고 하는 거죠.

“이렇게 부활이 없는 모든 행위들은 초대교회에서 언어도단이라 여겨졌을 것이다.” 그렇죠. 부활이 뭐냐에 대한 해명 없이는, 그러한 상태에서는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진술들은 토대를 잃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또 말할 수 있습니다. 창조, 하나님의 창조, 그러니까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은 그저 우연하게 벌어진, 그리고 어떤 마술적인 힘에 의한 그런 것이 아니라 시초에 세계를 창조한 바로 그 하나님의 사건이라고 하는 거죠. 이 두개, 창조의 하나님이 바로 부활의 하나님, 창조의 영이 바로 부활의 영입니다. 그 창조의 하나님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온전히 계시되는 분으로 초기 기독교에서 변증되고 그렇게 이해되고 신뢰되었습니다. 만약 오늘날, 잘 들으세요. 요 부분이 중요합니다. 요 패러그래프에서 결론이군요. “만약 오늘날 예수의 사랑에 대해서 무미건조하게 논의하는 것을 기독교 신앙의 현대적 표현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문제들은 사람들에게 어떻게든지 이해될 수는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고 많이 가능하잖아요. 그런 식으로 기독교 신앙을 그렇게 표현한다면 현대인들은 받을 수 있는 것이죠. 아, 사랑하자고 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예수님이 그렇게 자기를 십자가에 버리기까지 우리를 사랑했다고 하는, 그래서 우리도 일종의 극한의 휴머니즘이라고 할 수 있겠죠. 우리도 사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아주 실존주의적인 신앙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현대인들은 거부하지 않는다고 하는 겁니다. 이게 문제라고 하는 것을 판넨베르그는 이야기하려고 하는거예요.

“왜냐하면 단순히 사랑만을 말하게 되면 예수에게서 나타난 신적인 존엄에 대한 초대교회의 거대담론들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더라도 기독교가 항상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랑, 예수에게 나타나는 사랑만을 단순하게 그리고 소박하게 좋은 뜻이든 어떤 뜻이든 그렇게 예기해서 그렇게 우리도 사랑을 받았으니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자, 오늘 그렇게 현대 요구하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잖아요. 민중신학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연초에 민중신학과 기독교 사상을 중심으로 해서 좀 다툼이 있었거든요. 설교 비평할 때도 부분적으로 나타났던 것들인데요. 바로 그 맥락이 여기에 담겨 있는 겁니다. 제가 판넨베르그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저의 생각이 여러 사람의 영향을 받았고 또 그 영향을 받은 가운데서 제 나름대로의 사유의 세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이렇다 저렇다 딱 끊어서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저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모르거든요. 제 글쓰기의 방식, 저 나름의 고유한 세계의 글쓰기를 하고 있는데 그것이 누구에게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결정적으로 단언할 수 있겠습니까 요러한 판넨베르그의 영향을 부분적으로 흐릿하게 받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랑만을 전하자. 일종의 복지 휴머니즘., 이런 것들을 현대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들릴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만 이야기한다면 이렇게 말한다면 더 이상 초대교인들이 추구했던 예수에게서 나타났던 신적존엄에 대한 거시담론을 말하지 않아도 괜찮게 됐다. 그 이야기입니다. 제가 원서, 고 부분을 좀 찾아 보려고 했는데 갑자기 찾으려니까 안보이네요. 어디 있나요? 네.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시겠죠?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사랑을 그냥 전한 것 아니예요. 예수의 사랑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고요. 예수에게 나타난 신적 존엄에 대한 거시담론이 있다고 하는거죠. 그게 바로 우편에 앉아계시고 승천하시고 바로 그러한 진술이 담겨있는 내용들입니다. 초기 기독교들은 그러한 방식으로 신의 존엄이 예수에게 나타났다. 혹은 일치되었다고 하는 그 어떤 세계 속으로 구도정진의 자세로 몰입하고 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인제 그것들이 현대인들에게는 거침돌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노파심으로 그것을 제거하고 그냥 예수의 사랑만을 사람들에게 전하면 일부분에서 박수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 허물어질 수 있다. 그것을 판넨베르그가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기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