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시간 강의 받아쓰기

두주를 보냈다. 3번째 시간이다. 주일저녁 포함해서 따지자 보면 5시간째. 첫번째와 두번째는 기본적인 문제, 강의 앞으로 할 것인가 그런 것들 조금 이야기 했다. 그러나 그 안에 1장이 포함되어 있다. 어떤 말을 하든지 독립되어 있는 것은 없다. 초기 기독교와 유대교의 관계에 대해서 거칠게 이야기를 했고 초기 기독교 공동체 삶의 자리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강의안에는 나오지 않는다. 이 강의안은 90년대 중반부에 계명대학교와 대구대학교 교양과목으로 강의한 것을 모아서 낸 것이다. 40대 초반에 윤곽잡은 것. 최근에 읽었거나 생각한 것 이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가능한 한 6개월 공부하고 전체적으로 보충하고 개정해서 책을 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강의안에는 들어가지 않는 이야기를 두시간에 조금씩 조금씩 했다.

초기기독교가 놓여있던 삶의 자리. 그 중에서도 한 부분을 여러번 반복해서 말씀 드렸다. 그것은 초기 기독교공동체가 처음부터 단일한 공동체로 시작한 것이 아니다. 상당히 여러가지 색깔을 가진 공동체가 있었다. 그것은 초기뿐만 아니라 계속되었다. 알렉산드리아파, 안디옥파, 로마파가 있었다. 사실 派라고 이야기한다면 어느 한순간도 하나의 단일한 색깔을 가진 단일파로 존재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한국의 개신교가 분파주의에 빠져있기 때문에 문제이긴 한데 이거 어떻게 제도적으로 분파의 성격이 아니라 하나로 묶고 다양성을 가지면 좋은데 그것이 힘들기도 하다. 한계가 있기도 하지만 로마카톨릭 이라도 한파라고 할 수 없다. 2천년 계속 나눠져 있다. 좀 한번더 그런 분파적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

초기 기독교로 돌아가자 많이 할때는 거기에는 뭔가 원형, 원초, 근원적인 기독교의 모형, 정말 이거는 빼도 박도 못하는 원형질 뭔가 있겠거니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여러파가 있었다. 예루살렘 공동체, 예수님의 제자, 동생들이 교권 행사하던 좋은 뜻으로든 어떤 뜻으로든 힘을 발휘하던 예루살렘 공동체와, 바울을 중심으로한 헬라 이방인 공동체가 있었다. 또 그안에 여러 가지 파가 있었고. 왜 그들이 그럴 수 밖에 없었는가? 지난주에 이야기했다.

오늘은 진도를 나가겠다. 거기만 머물수 없다. 전에 한 이야기가 부분적이었지만 전체. 그것만 안다하더라도 초기기독교의 토양, 요부분을  2주에 걸쳐하려고 했는데 못해서 오늘 다 마치겠다. 오늘은 주로 그 성격을 말할때 생존투쟁, 율법, 시내산 안식일 성결법. 구체적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지난번에는 거칠게 윤곽만 이야기했다.

1장의 핵심은 초기기독교와 유대교와의 관계가 어떠했는가? 하는 것을 바탕에 놓고 그것은 몇번에 걸쳐 이야기했다. 예상외로 긴밀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그렇다면 우리가 초기기독교-우리신앙의 뿌리를 알기 위해서는 유대교가 뭔지를 알아야 한다. 당연한 논리다. 유대교 전체를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다. 초기기독교와 연관된 부분만 survey 하는 방식으로 잡아내자.

왜 초기기독교와 유대교와 긴밀히 연관되었는가? 그렇게 오묘하고 복잡하지 않다. 간단한 대답이 있다. 예수님이 역사적 아들이기 때문이다. 역사안에서 사시고 안에서 활동, 그 안에서 이어져 내려온 것 때문이다. 역사의 단절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기독교의 시작이신 예수님. 예수님이 기독교를 시작했다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예수님이 없이는 기독교를 설명할 수 없어서 기독교의 창시자로 이야기한다. 그분이 역사의 아들, 하늘이 툭 떨어진 분이 아니라 유대교라는 배경아래서 자라시고 활동, 오늘까지 그 역사가 내려오기 때문에 유대교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초기 기독교 구성원들을 보면-예수님은 좀 접어놓고... 그러나 기독교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제자들과 그 구성원들이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 있다. 그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가서 기도도 하고 그랬다. 사도행전에 보면 우리가 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자기 선생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은 장본이라 할 수 있는 예루살렘 본거지인 성전에 들락날락거렸다. 기도 시간에 맞춰 거기에 갔다는 것은 유대교의 기도시간을 잘 지켰다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의 신앙적인 형식은 그대로 유대교를 따랐다고 보면 크게 잘못이 아니다. 기도시간 맞추어서 기도하고 성서일과등 상당부분에서 그랬다. 초기 기독교는 우리가 예상하기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시킨 그 사람들과 관계를 끊고 종교를 시작했어야 당연하다고 생각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어떤 것이 틀리냐? 깊은 연관 있느냐 어느정도? 천천히 묻고 대답을 찾는 것이 초기 기독교 공부라고 할 수 있다.

그것만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가 상당히 오랫동안 몇 백년동안 진행되어 거의 400년동안 지내오면서 유대교와 똑같은 경전을 받아들였다는것도 여기서 굉장히 중요한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생각해 보라. 그게 4세기 후반, 이기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완전히 분리 된 때인데 그때도 구약성전을 그대로 개신교의 경전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왜 그랬을까 논의가 필요하겠다. 하여튼 그런 일들이 있었다. 그런 것을 놓고 보면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공동체와는 거리가 있다. 그래도 사도 바울도 여전히 투쟁을 했으나. 생각한 것보다 과격하게 경쟁을 했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에 의하면 사도바울을 예루살렘공동체에 깊이 연관시키려고, 해석해보려는 노력이 많이 발견된다. 예루살렘교회는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힘이 없어지다가 1세기말 정도 점점 유명무실하게 된다. 반면 바울의 헬라인 교회는 강한 힘을 가지고 활성화한다. 그런 상황에서 누가는 초기 기독교 역사를 새로 썼다. 이것이 사도행전이다. 실제로는 바울과 예루살렘 공동체 지도자와는 사이가 나빴는데 그러나 이것을 좋은 면에서 보고 썼다. 그런대로 잘 지내보려고 하는 노력이 많다. 사실적인 보도라기보다는, 영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보다는 더 우호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로부터 배척받는다면 바울의 권위는 떨어지기 때문이다. 누가가 그렇게 바울의 입지를 여러가지 면에서 강화시키는, 나쁜 의미가 아닌, 역사를 그렇게 해석해 낸 것이다. 제자들이 복음서에 중요한 인물들로 부각되어 있지만 과연 예수님 공생애때도 예수님이 그 정도로 이 제자들을 특별히 대했을까? 논의가 많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유대의 배경과 토양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단순히 기독교가 유대교에서 나왔기 때문만이 아니라 현재 많은 것이 유대교와 연속적. 어떤 방식으로 연속, 어떤 관점에서 불연속, 변증법적 관계에 있는지 긴장관계다. 기독교 테제와 안티테제 유대교. 그 다음에 그게 종합을 이룬다. 그것은 어느 정도 맞는 이야기다. 역사 발전의 공식이니까.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라든지. 이것이 토요일이었으나 기독교 신앙안에 들어와 주일이 되었다. 날자는 달라도 의미는 그대로 살아있다. 유대교의 묵시 문학은 기독교 안에 들어와서 종말론로 자리잡게 되었다. 거기서 조금 더 나가게 되면 구약성서를 Christology 기독론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명되는 기독교의 가르침. 이게 가장 핵심이다.  Escatology 기독론과 종말론을 공부하는 것이 조직신앙이다. 만약 따로 따로 자꾸만 생각하면 어떤 기독교의 가르침을 통전적인 데서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독단에 빠지게 된다. 크리스토로지에 빠지게 되면 타종교와 대화를 하지 말하여야 한다. 우리 보편적인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없다. 그러나 종말론적 관점, 성령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타종교와의 대화, 혼합적인 것을 만들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보편적인 지평으로 열어내는 것이다. 요 맥락을 놓치기 때문에 자칫하면 혼합론에 빠지게 되고 자칫하면 독단론적으로 빠지게 됨. 기독교가 그렇게 우스운 종교가 아니다. 머리를 굴려서 이렇게 하면 잘하려니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2천년 역사는 우주와 세계 전체에 대한 심각한 고민, 치열한 문제의식. 거기에 자기 영혼, 온 몸을 던지는 사람들, 그러한 공동체의 역사, 그 결과로 나온 것이다. 물론 우리는 다 이런 것을 하나님의 섭리로 본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독교의 가르침을 너무 지엽적인 것으로 머물러 다른 것으로 바로 봐서 그렇다. 그리스도의 구속 죽음 부활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하나님의 아들. 크리스톨로지다. 여기에만 머물러 있으면, 한국의 개신교는 거의 거기에 머물러 있다. 바르트의 영향이기도 하다. Christi Centricrisism. 한국 교회가 바르트의 이러한 것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근본주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다.

그리스도론에 대한 바른 이해. 동시에 성령론, 종말론적으로 열려져야 하고 창조론적으로도 기독론이 어떻게 연관되는가 이런 것에 대한 고민, 문제의식, 긴장 이런 것을 풀어내려는 신학적인 노력들이 필요하다. 이런 것이 없으면 크리스톨로지는 십자군전쟁을 할 기독론으로 오용될 수 있다.

(강의하는 모습이 달라졌지 않았냐?.... 젊은 사람이 잘보네. 헤드셋 뺀 모습 봐주라...^^^예배 소개... 자유꿈님이 도와주셨다.)

유대교의 배경과 토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렸다. 초기 기독교가 유대교부터 시작했다는 단순한 구조에서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기독교의 많은 내용들이 구약의 성서와 많은 문헌 그런 것들을 보면 유대인들은 위대한 민족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 세계 어느 민족이 유대인처럼 거룩한 문서를 전승시키고 보관했을까요? 중국의 노자, 장자 많은 사람들의 문헌도 있지만 중국 고문서학자가 아니라서 비교 연구해보지 않았지만 아주 작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중국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작은 나라가 엄청난 문서를 그렇게 보존해왔다는 것만 이것 하나만 하더라도 이스라엘은 인류문명에 큰 공헌을 한거다. 그러한 구약성서가 오늘 우리 기독교 신앙에도 계속해서 영향을 미친다. 여러가지 교리에서도 그렇지만 구약성서에 근거해서 크리스톨로지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풍부한 내용을 담게된다. 부활이라는 것도 물론 구약성서에 직접적인 표현이 없으나 조금 약간 다르다. 내세에 대한 생각들이 구약에 별로 없다는 것 알고있을 것이다.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도대체 없는데 생기고 이러냐? 처음부터 기독교가 완전한 진리와 계시를 담고 있는거 아니냐? 왜 처음과 지금이 다르고 지금도 모순되어 있고 그러면서도 이 하나님의 신구약 성경전체를 하나님의 계시라고 말하느냐?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는데 왜 구약성서에는 내세에 대한 개념이 약하고 왜 그것이 신약에 들어와서 부활과 종말이라고 하는 그런 것에 근거해서 내세에 대한 생각이 더 확장되었느냐?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 것이다.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다. 이것은 역사의 신비, 당연한 논리, 역사의 힘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그렇게 계시하시니까. 점점 가면서 본질적인 것을 더 많이 우리가 안다. 옛날사람 보다 이사야, 예레미야, 미가, 나훔 예언자보다 우리가 훨씬더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갔다는 그 뜻이 아니다. 그들은 훨씬 다른 방식으로 근원에 맞다아 있었다. 우리는 전혀 다른 시대에서 정보가 많다. 하나님에 대한 정보가 많아졌다. 우리에게는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된다. 어쨌든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토대가 거기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구약성서를 계속해서 공부해야 한다. 나중에 구약 성서 공부를 하게 될 때, 5장이다. 이때 말하게 될 것이다. 생각난 김에 한마디 짚겠다. 기독교는 구약성서를 기독교에서 빼야한다는 주장에 대해 강력하게 대항해서 기독교의 경전으로 붙들었다. 평소에 생각하지 않았던 신학적 훈련을 하지 않았던 분들은 이런 이야기가 이상하게 생각될지 모른다. 뭘 그러냐? 처음부터 완벽하게 만들어서 빼도박도 못하게 만들었으면 되지 않겠는가? 처음부터 완성된 것 아니다. 너무 산만해지니 접자. 한마디만 더하면 초기 기독교도 많은 사람들이 구약성서를 빼자. 20세기, 중세기에도 있었다. 독일의 베를린 대학 교회사 가르치던 아돌프 폰 하르낙도 그랬다. 폰.. 양반 귀족. 구약 빼자. 프랑스에서는 드de라고 하나? 그것이 히틀러의 나찌즘과 연관되는 부분이다. 교회사에서 많이 생각해야 한다. 왜 유대인들을 독일에서 미워했냐? 예수님을 죽인 장본인이다. 그런것이 타당하냐 문제가 있다. 지금도 유대인과 우리의 관계. 아직도 완전히 정립되지 않다. 유대교가 우리의 모태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예수그리스도, 크리스톨로지, 메시야니즘. 이런 차이점을 어떻게 뛰어넘어야 되느냐. 그런것이 계속 숙제로 남아 있다.

30분. 내용으로 들어가 보자. 구약성서와 유대인의 삶으로 들어가보면 그들은 종교적인 형태가 있었다. 다른 민족도 마찬가지지만 유대인들이 살았던 삶의 자리로부터 유대교가 나왔다. 전제하지 않으면 구약성서와 유대교를 이해하지 못한다. 구약성서를 읽으면서 당혹한 사건 만나게된다. 잔인한 장면이 많이 나온다. 하나님이 어떻게 그렇게 전쟁을 많이 일으키시냐? 누구를 죽이시라 그러느냐? 그런 것 만나면 이상하다 생각하게 된다. 이스라엘 민족이 살아온 삶을 봐야 한다. 이들은 가나안 땅의 원주민들이 아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으로부터 이주해서 잠깐 가나안에 살다가 다시 이집트의 소수민족으로 살다가 거기서 쫓겨서 해방이 되었든 가나안땅에 다시 들어왔다. 삭월세방 계속 옮겨 다니며 사는 사람처럼 비슷하게 살았다. 그런 약소 민족이었다. 주변에는 계속해서 제국들이 많았다. 바벨론은 당연하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등 제국들에게 생존자체 위협을 계속 느끼고 있었다. 구약성서를 생존의 지평에서 보아야 한다. 버텨내는 것이다. 생존앞에서는... “실존이 본질보다 앞선다.” 실존주의자들의 말이다. existence가 essence보다 앞선다. 구약성서를 읽는데는 이게 중요하다. 윤리적이냐가 문제가 아니었다. 늘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구약성서안에 도덕적, 윤리적 문제도 있다. 근본적인 문제는 생존문제다. 가나안 침략. 생존의 유일한 길이었다. 아이성 싹쓸이. 그런 방법이 아니고서는 생존의 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 그들은 하나님을 경험했다. 그런데 잘 생각하라. 이부분에서. 그들이 경험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이 생존을 지켜주신다. 그런데 그것을 전하는 방식은 그 당시 삶의 방식이었다. 다른 사람 내쫓는 억압적인 것. 형식이 그렇다. 우리가 오늘 그 성서를 읽을 때 그 형식을 그대로 가져오면 큰일 난다. 성서가 아주 어렵다. 어떤 면에서. 그들이 경험한 영적인 깊이를 우리가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 안에 들어가서 그들과 같이 영성에 깊이 들어가서, 안고서 성서를 읽지 않으면 성서는 완전히 안티기독교가 이야기하듯이 반평화적, 반인간적이고 아주 독단적이고 폐쇄적인 제국주의적인 그런 종교, 신들로 오해될 가능성이 많다. 그걸 어떻게 구분하냐? 어떤 분이 동영상 강의에서 하신 질문? 구약성서에서 인류문화사측면에서 어떤것을 가치 있고 어떤 것을 가치없는것 구분? 쉽지 않다. 일단 이렇게 생각하자. 거기에 있는 모든 것들은 유대인들이 선택한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들의 생존을 지켜주신다고 하는 믿음안에서 구체적인 것은 자기들이 선택한 것이다. 하나님이 그러하셨다 하면 곤란한 문제다.

무엇을 먹느냐 먹지 않느냐? 먹을거리에도 대해서도 굉장히 세밀하게 지켰다. 되새기짐질하고 굽이 갈라지는 짐승만 먹을 수 있다. 그들 그 시대에 필요했던 것이다. 피를 마시지 말라. 중동의 사람들은 마셨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반대길을 갔다. 상당히 독단적, 배타적으로 자기들의 생존을 지킬 수 있었다. 생존을 지켜준다는 아브라함과의 하나님의 약속.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땅의 모래처럼 많게 하겠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 누구와 전쟁 평화? 판단해야 했다. 자기들이 판단해야 했다. 그 판단가운데 옳은 것도 있고 틀린 것도 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히틀러에게 당했다고 하지만 자기들도 당했다고 하는데 자기도 그랬다. 홀로코스트. 유대인들이 어떻게 보면 이율배반적이다. 자기들은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우리에게 주었다. 집문서처럼 이야기하는데 우리들의 땅이다. 아이성, 여리고 성. ... 그들의 선택이었다.

몇달 전에 이야기했다. 서울오프 성서의 읽기중에 한 대목 선택한 대목, 모세가 호렙산에 올라갔다가 시내산이다. 십계명을 갖고 내려오는데 그 밑에서 아론을 중심으로 해서 사람들이 금송아지 만들고 춤추고 했다. 용서받았다. 그런데 몇 명을 죽였는가? 한 나절에 5천명 이상을 죽였다. 이런 모세는 일벌백계 방식으로 자기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겠다고 자기가 판단하였다. 여호수아도 그런 일을 했다. 다윗, 솔로몬도 자기들이 그렇게 판단한다. 하나님의 뜻이다 본인들이 이야기하는데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고 여호수아도 그렇다. 성서읽기에 가서 이야기했다. 아마 이 사람들도 마지막 심판 때에 심판을 받을 것이다. 자기들이 한 것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하루에 내전에서 5천명이나 죽였는데... 하나님을 용서하셨는데 자기가 그렇게 했다. 여호수아가 아간을 죽인 이야기.. 자기가 한 것이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처럼 되어있는 구절을 몽땅 그렇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여호수아와 모세의 판단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모든 위인, 지도자들은 상당히 위험하다.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나중에 다 판단을 받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모세나 여호수아는 훌륭한 사람으로 판단 받을 가능성이 높다. 내가 하나님도 아닌데 미안하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최선이었기 때문에. 그 방식아 아니라면 이스라엘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돌아간다. 생존의 문제다. 본질도 윤리도 중요하지 않다.

Alive란 영화가 있다. 고도 높은 곳에 불시착 비행기 이야기다. 사람들이 죽어간다. 구조신호를 보냈으나 가능성이 별로다. 죽어간다. 한쪽에서는 이렇게 있으면 죽는다. 죽은 동료의 살이라도 먹어야 한다. 동료의 살을 칼로 얇게 썰어서 동체에 붙여두고 마르면 먹고 살았다. Alive했다. 그러나 동료의 살을 어떻게 먹느냐 하면서 먹지 않는 사람은 죽었다. 누가 윤리적이 아니냐 맞다 말할 수 있을까? 생존의 문제니까. 지나치게 진화론적, 사회과학적인 접근일까? 이것들이 실제적인 신앙적인 문제들과 연관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냐 하는 것은 상당히 깊은 고민을 해야 한다. 더구나 그것은 어느 누구도 단정적으로 이야기 할 수 없다. 기독교가 말하는 모든 것은 종말론적 심판이다. 우리가 행했던 모든 것을,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100%로 정확히 말할 수 없다. 누구도 반인간적인 행위, 히틀러.. 종말로 심판에 유보되어야 하느냐? 어려운 이야기다. 어찌 그런 일이 있겠는가? 원칙적인 이야기를 드린 것이다.

이스라엘은 생존이 배타적인 방법으로 유지된다고 판단. 그 판단의 옮고 그름은 하나님이 판단하실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했다. 주변의 나라들은 배타적이고 독단적으로 하지 않았다. 절충, 타협했다. 이스라엘 민족은 먹을 것, 혼인도 다른 사람과 하지 않았다. 가나안 사람과 어울려 살지 않았다. 기원 70년이후 로마에게 함락된 이후 디아스포라로 살면서도 전세계에 흩어졌어도 자기들끼리 종교적 민족적 아이덴티티를 전혀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나 민족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세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의 수전노는 유대인이었다. 보편적으로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방식으로만 생존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지금은 많은 나라들은 타협했다. 결과적으로 놓고 보면 배타적이었고 독선적, 주변으로부터 미움도 많이받고 고난을 당했지만 생존해 있다. 그러나 수많은 민족들, 유대인들보다 훨씬 막강했던 민족들도 다 섞여 버렸다. 이 문제들에 대해서는 인문학적으로 좀 더 이야기해야 할 부분이다. 구약성서와 유대인들의 신앙 문제들을 우리가 볼 때 생존이라는 관점에서 봐야 한다. 그러한 삶의 방식이 반복되면서 문서의 규범, 규칙 만들어내는 데 그것이 바로 율법이다. 타민족에 대해서는 배타적이고 그들의 삶이 농축되어있다.

그 율법에 의해서 예수님이 돌아가셨다. 예수님의 죄명은 두 개였다. 신성모독죄는 종교적, 사회소요죄 정치적이었다. 유대, 로마의 종교 정치 양쪽으로부터 심판을 받은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여전히 풀어야 할 주문된 숙제다. 기독교는 종교도 정치도 아니다. 기독교의 비종교화를 이야기했다. 외롭고 허무하고 두렵고 그래서 신을 찾는 것이 종교성, 종교적이다. 기독교는 그런 종교성이 아니다. 삶의 중심이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는 종교적인 거는 아니다. 자꾸만 뭔가를 얻으려고 하면  그것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그것이 중심은 아니다.

유대인들의 특이하게 그런 방식으로 살면서 alive 지금까지 살아남게 되었다. 거기서 얼마나 충돌이 많았겠는가? 주변세계와 끊임없이 다퉜다. 유대인의 삶의 자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이해해 주어야 하겠다. 오늘 우리들의 삶의 자리는 다르다. 생존을 위해서 본질이 약해져도 괜찮은 시대가 아니라 생존보다 본질이 더 강할 수 있다. 공격적이고 서바이벌게임, 제로섬 방식으로 나가면 정말 곤란하다. 계속해서 한국 교회 욕을 많이 먹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패러다임을 유지하고 있다면 기독교, 성서적, 구약성서적인 것도 아니다. 거기에 근본 하나님과의 관계 생존에 대한 약속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본질인데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삶의 자리에 역사에 성취해 내려고 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의 공격적인 태도를 그대로 갖고 들어와 있다. 이것은 어느모로 보나 바람직한 것이 아닌데 개신교안에 팻말 갖고 떠들지는 않더라도 정서적으로는 그런 것이 상당히 많은 것 같다. 예수믿고 죽지 않고 죽은 우리 부모는 어디갔을까요? 불안하고. 이런 모든 신앙문제들이 결국 성서가, 구약, 하나님과의 약속이 뭐냐? 기본적인 오리엔테이션이 안되어서 벌어진 것이 아닌가? 그런면에서 평신도의 신학공부는 필수적이다 생각한다. 이것이 우리가 하는 기독교가 뭐꼬? 평신도의 신학이다. 신학생들이 여러층이라 한쪽으로 포커스 맞추기가 힘들지만 그러나 내 머리속에는 그런 다른 색깔들로부터 목사, 교수, 아주머니 집사님, 대학청년들 다양하지만 그런 것 생각하지 않고 기독교를 인문학, 신학적으로 오리엔테이션 한번 해보자 그런거다. 어떤 분들에게는 너무 뻔한 이야기, 쉬운 이야기한다. 또는 어떤 분들에게는 지금까지 들었던 교리적인 공부, 교회중심적인 공부가 아니기 때문에 낯설지 모르지만 우리가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치고 들어간다는 점에서 양쪽 다 염려하지 않아도 되겠다.

많이 기독교를 아는 정보를 많이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중심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전에 설교비평하는 것 가운데서 가장 큰 문제중 하나는 설교하는 목사님들이 기독교를 잘 모르는 것이다. 너는 기독교를 잘 아냐? 그것은 두번째 문제고.. 기독교도 모르고. 모른다는 말을 좀 이해해달라. 다 모른다는 말이 아니라 중심에 초대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변죽에 머무르는 경우가 있다. 변죽에 머무르면서도 얼마든지 기독교를 이야기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서와 교회안에서 회자되는 언어가 종교적이기 때문에 종교적인 용어를 쏟아놓으면 얼마든지 기독교를 말할 수 있다. 칭의, 성화 몰라도 쓸 수 있다. 예수님 영접했다. 영접의 의미 알지도 못하면서 본인의 마음이 즐겁다거나 사랑에 빠진 것처럼 맨 날 보고 싶고. 개인의 센티멘탈리즘에 빠져있으면서 그것을 예수님 영접했다 말할 수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정말 잘못됐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변죽에 머무를 수 있다. 안거불안인것(?)과 큰 차이가 있다.

그렇게 여태까지 몇십년 동안 다녀왔지만 목사도 있고 전공분야자 인분도 있다. 자신이 기독교에 대한 정보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 정보를 많이 수집하고 있을 뿐이지만 정보가 담아내고자 하는 그 컨텐츠를 맛보지 못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의 설교가 우리의 삶이 신앙적인 용어들이 늘 상투적일 수 있다.

사실 오늘 강의를 해야 할 구체적인 내용을 다하지 못했다. 많이 남아있다. 강의안을 읽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왜냐하면 우리의 강의가 또 하나의 새로운 신앙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도 깨우침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준비한 강의를 다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시내산의 이야기, 안식일문제 도대체 그런것들이 도대체 이스라엘이 타민족과 배타적으로 살게 된. 대표적인 안식일. 도대체 안식일 뭐냐 하는거다. 성서주일, 안식교일 토요일 지켜야 한다. 그렇다. 안식일은 Sabbath는 두가지 전통, 뿌리가 있다. 창조 전승, 출애굽 전승으로 나누어진다. 십계명에는 두 가지가 나누어져 있다. 창조는 하나님의 창조. 창조 영성. 일종의 창조신앙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낭만적인 생각에 목메는 것이 아니다. 야외에 나가  참 아름다워라 찬양 부르는 것이 창조 영성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탈신성화다. 주변의 모든 민족 자연, 특히 태양을 숭배했다. 유대교는 전혀 다른 것을 이야기한다. 태양이 중요한 것을 안다. 그러나 그것을 만든 자에게 집중한 것이다. 그 과정가운데서 예언자들이 나온다. 그들의 민족속에 확장된다. 패러다임이 달라진다. 창조적 영성, 창조 그 사건이 인간을 자유하게 하고 쉬게 하는 것이다.
출애굽도 마찬가지다. 창조하시고 6일 쉰다. 정치적 압박으로부터 해방, 쉼과 자유, 창조와 해방, 이게 안식일의 핵심이다. 주일을 지킨다는 것은 바로 이거다. 창조가 너무나도 엄청나기 때문에 직관도 크고 놀랍기 때문에 해방이라는 엑소더스가 크고 귀하고 엄청나기 때문에 우리의 존재 전체가 걸려있기 때문에 근본적인 구원이기 때문에 다른 일상은 멈추어야 한다. 쉬워야 한다. 멈출 수 밖에 없다. 주일을 주일답게 지낸다는 것은 창조영성과 해방 영성, 자유, 참다운 쉼을 안고 들어가는 것이다. 안식일 주일날 파김치가 된다. 그것이 믿음이라 생각한다. 이거 안식일 지키는 것 아니다. 목사가 주일 날 제일 힘들다고 한다. 왜냐 많은 일들이 여기에 들어와 있다. 왜 종교 행위마저도 유기 되고 말았을까? 하나님일, 업적이 되고 말았다. 종교적 업적이 되었다. 복음은 뭐를 함으로서가 아니라 하지 않음으로서 위로해주고 구원받는다고 하는 새로운 구원의 힘이다. 지금 우리는 지금 종교 행위, 근본적으로 모든 것을 멈춰야 하는 그러한 종교적인 본질마저도 업적으로 들어와서 계속 우리의 영성이 소진되고 있다.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교회에서 영혼이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burn out 그래도 이게 인제 믿음이다. 구원받은 사람이 해야할 일이다. 생각하는데 착각일 가능성이 높다. 다른 사람 구원할 생각말고 자기구원에 천착해라.

안식일도 그렇고 이런 것들이 유대교에 기독교가 싹트게 된 내용이다. 성결법칙. 1장은 여기서 끝내기로 하겠다. 자세한 내용은 강의안을 읽어보시면 되겠다. 충분하지 않다. 개념을 설명한 것으로 끝날 수 없다. 몇가지 이해가 초기 기독교에 대한 이해. 전문적인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입장이 아니라 기독교의 근본만 맛을 보자 하는 입장에서 관점에서 공부하는 것이다.

질문 문자로 받겠다. 긴 질문 동영상 강의 메뉴에 올려달라. 주일 밤에는 질문을 받겠다. 할 말도 좀하고 하겠다. 다음주는 역사적 예수. 공생애, 어떤일 있었다. 근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주일밤 질문 더 받겠다. 보충할 말 하겠다.

유대인들의 자유와 우리의 자유와 상관있냐? 유대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익힘. 우리는 그를 근본으로 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자유와 평화. 조금 더 안식일, 안식년, 희년. 희년은 구약성서에 문자로 남아 있었다. 실행되지 않았다. 실행되기 힘들었다. 전년까지 빌렸던 것 다 돌려줘야 한다. 사회질서 허물어진다. 이사야가 양극화, 왜곡으로부터 이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고자 하는 상상력이다. 예언자로부터 나오는 삶의 생명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그런 말을 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바탕에 놓고 가능하면 그런 정신을 살려서. 어떤 학사가 이런 제안을 했다. 제3세계에서 차관 받고 한 거 다 탕감해주자. 안식일의 경우도 하루만은 모든 공장을 쉬게 하자. 그런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삶이 노동과 자본 돈으로부터 자유로와지는 쪽으로 나간다면 안식일을 오늘의 삶에 새롭게 해석해 내는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다. 십자가 사건에 연관되어 생각해 보면서 왜 주일을 지키는 가 더 꼼꼼히 생각해 보자.

세번 정기적으로 나간다.
목요일, 주일, 월요일 저녁.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