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월 27일 주일 질답시간

주현절에 대해

고대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경험을 초기 기독교인들의 독특한 신앙경험을 그대로 따라간다는 것, 쉽지 않다. 도대체 그들은 예수님의 현현을 어떻게 경험했을까 하는 것. 우리가 교회에서 사람을 만나듯이 그렇게 경험했을까? 아니면 어떤 것일까? 이런 문제들은 예수님의 부활과도 연관이 되겠다. 기독교 신앙 전체와 연결되는 문제다. 하나님의 현현. 구약성서에도 보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난 것 처럼 표현 묘사되고 있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직접 들은 것처럼 말이다. 아브라함, 예레미야, 그러한 예언자들과 족장들 중간에 있는 많은 지도자, 사사들도 하나님의 말씀, 목소리를 직접들은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목소리는 아니다. 그러면 뭔가? 없는 소리? 환청이라고 하나? 그런 경험은 아니다. 그들은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경험했다. 하나님의 소리가 나타나거나 천사들도 현현하는 것이다. 도대체 구약성서에 나와 있는 그 천사의 경험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런 문제들을 차근차근 따라가는 것 그게 성서읽기이기도 하고 신학공부이기도 하고. 단순히 이것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전반적으로 잘 따라가는 것. 주현절 주님 나타나신 것을 기리는 주일이다.

(소리가 요란했었다. 어떤 분이 발표자로 바꾸어드렸는데 소리만 났다. 특별한 경우에 발언하고 싶을때 이어폰을 끼고 듣는 방식으로 해달라. 환경이 달라 문제가 되는 것이다. 시간이 되었다.)

주현절 3째 주일, 예수님이 현현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셨다. 과연 예수님이 나타나셨다는 것이 무엇이냐? 한 두가지 질문을 드렸다. 단순히 예수님이 어떻게 나타나셨다 기독교 신앙과 연관. 현현. 엑테파니. 나타난 것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 나타난다고 하는 것이 비가 온다거나 아니면 책상을 만들었다가 사물과는 다른 이야기다. 예수님의 부활 생명체가 제자들에게 나타났다는 현현은 다른 것이다. 예수님 부활의 현현이 모든 사람들에게 되지 않고 믿는 사람들에게만 일어났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 현현이 객관적인 사물이 천당갔다 다시 돌아왔다. 간증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거짓말이다. 의도적으로 거짓말 하는 사람도 있겠고 자기암시로 사람들은 그렇다. 자기최면이 가능하다. 나는 누구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된다. 실제는 사랑을 받지 못하면서.. 그 맥락에서 우리가 그것을 조심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이 자기 최면이 아니다. 그런쪽으로 빠지기 쉽다. 일련정종, 속칭 남묘호랑교도 그런 식이다. 똑같은 주문을 한시간 두시간 계속한다. 그러면 그 방면으로 이루어질 것처럼 생각된다. 결과가 어떨까? 자기 가족이나 아팠던 사람이 낳는다거나 사업이 잘된다거나 것들이 일련정종 주문에 의해 가능할까?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것이 상당한 경우에는 가능하다.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따라 움직이게 되고 확률이다. 어떤 사업이 망했다가도 다시 일어나는 확률이 가능하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가능하다. 그런 사람, 점쟁이 찾고 무당 찾아가는 사람, 절에 가서 탑돌이 사월초파일 탑돌이하면서 소원성취기도하고 아기 낳지 못하는 여자들이 삼신탑에 가서 기도하는 일들을 한다. 그게 자기들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확률로 보면 상당히 많다. 심리적으로 그쪽으로 가기도 한다. 사람들은 좋은 것을 기억하려고 한다. 우리 방식으로 말하자면 기도해서 자기들의 소원을 빌어서 이루어지면 깊이 각인되서 기도하고 원해서 됐다. 안되면 밑져야 본전이다 그런 생각이 든다. 일반 종교 현상들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기독교도 그런 방식으로 나갈 가능성은 많이 있다. 반복되는 자기암시를 하는 것이다. 나는 할 수 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이 노래를 자꾸 반복해서 부르면 그렇게 느껴진다. 그게 어떤 면에서 심리치료다. 또 이것을 그렇게 나쁘다고만 할 수 없다. 우리의 심리를 잘 어루만져 고치는 것이다. 종교에서 그런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근본은 그것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의 근본에 두 발을 딱 딛고 있으면서 주변적인 것에 좀 위로를 받는 것이 괜찮지만 그 중심이 없이 주변적인 것, 변죽을 울리는 것에 신앙의 토대를 놓다보면 계속 흔들린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내가 뭘 원해서 되는 위로받을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불안한 것을 안고 있으면서도 어떤 하나님의 행위에 내 운명을 거는 것, 던지는 것이다. 그게 옳다고 하는 사실을 믿고 이해하고 나의 운명-이땅에서 사는 모든 것의 과정, 이게 우리는 어떤 것이 나에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분간하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자기의 기준에 따라 원하기만 하는 것이다. 소원성취를 목표로 해서 종교생활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주 나쁜 것이다라는 것이 아니라 종속변수가 아닌 정말 중요한 것에 중심을 놓아야 한다는 말이다. 기독교 신앙은 그런 자기 운명안에서 벌어지는 것을 하나님에게 맡기고 사는 것이다.

운명을-살아 죽을때까지 겪어야 할, 여기서 무엇이 옳고 그른 것 선하고 유익하고 분간하지 못하고 무작정 구하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군것질을 달라고 하듯이. 만약 하나님께서 군것질 달라고 할 때 주시듯이 하는 것은 철없는 아이를 키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방식으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많다. 계속해서 목록을 만든다. 계속해서 기도제목을 만든다든지 요구하는 방식의 신앙생활을 한다. 기독교 신앙뿐만 아니라 앞서 말씀드린 일련교등 수준낮은 종교부터 시작해서 고급화된 종교까지 상당히 많은 부분이 그런쪽 으로 나간다. 우리가 잘 모르면서 구하면서 살아간다. 저도 교회를 개척해서 10여년 있었다. 큰 교회 담임 부목사 전도사로 지내오면서 중학교 1학년때부터 교회를 다녔다. 많은 사람들을 경험했다. 대개다 신앙의 중심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이 없었던 것 같다. 하나님께 구원 받는 문제는 큰 상관 없겠다. 구원은 우리가 믿음 생활 잘하냐 안하냐에 상관없는 하나님의 배타적 행위다. 구원의 차원은 아니다. 이 땅에서 살면서 우리가 가능한 한 바람직한 신앙생활해야 하고 또 우리 후손들에게 기독교의 바른 것을 물려주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성찰해 보자. 그런 뜻으로 우리의 신앙에 대한 문제를 지금 본질적인 차원에서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완전한 신앙 소유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만큼 우리가 진도를 나가고 그렇게 살아가면 될 것 같다.

우리가 무엇이 나에게 좋은 지 나쁜지도 모르고 무작정 구하고 응답되었다고 그러한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 한편으로 보면 많은 신자들을 보면 그럴 수 있겠다. 세상 살이가 힘들고 하루 하루 살아가는데 버티기 그렇게 힘든데 그렇게 신앙생활하는 것이 좋지 않는가 하면서도 언제까지 그래야 하는가? 군것질 투정 얻어 내려는 신앙생활 언제까지 할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안타깝다. 아예 그런 신앙방식 끊고 아픔이 있더라도 끊고 중심부로 치고 들어가는 것. 아픔이 있더라도 나은게 아닌가? 그런 것들, 앞서 이야기한대로 기도제목 적고 심지어는 됐냐 안됐냐 OX 까지 치면서 굉장히 치밀하게 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 것에 대해 과연 그런가? 아쉬움이 많이 있다.

주현절 문제. 부활. 기독교 신앙이 중심부에 있어야 하는데 옆으로 나가있다. 그럴때 마다 자꾸 중심부 안으로 끌어 들여오는 것. 길을 가다가 비틀비틀하다가 그럴때 옆에서 조심하게 해주고 중심으로 끌어들여 주는 것, 이 작업이 목사의 일이 아닌가 싶다? 일종의 그것이 레슨이라고 할 수 있겠다. 피아노 바이올린. 학생들은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하긴 하는데 계속 음악적으로 밀고 나가는 힘이 약하다. 어떤때는 잘 나가다 어떤때는 휘청할때 좋은 선생은 이 학생으로 하여금 음악의 중심으로 들어오도록 하는 것이다. 신앙적인 레슨 천천히 정말 음악의 중심에 들어가는 음악가들 처럼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것이 단시일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악기를 하나 배우려고 하더라도 몇십년 이상 해야 하지 않는가? 이상한 것이 곡 하나를 레슨 받아서 완벽하게 연주하면 그런 정도로 하면 바흐의 곡을 레슨 받아서 연주하면 그 다음에 이 사람은 다른 것을 잘 할 것 같죠? 다른 곡 대하면 또 초짜처럼 군다. 또 레슨받아 한다. 그것이 반복된다. 꾸준하게 반복되는 레슨을 받게 되면 괜찮은 학생들은 금방 음악적인 깊이에 들어가고 그렇지 않으면 늦다. 신앙생활도 사실은 그런 레슨이 아닌가? 말씀 드리다 보니 생각이 나서 드리는 것이다.

레슨을 하려면 일단 선생이 뭔가를 좀 알아야 한다. 음악이 뭔가 알아야 레슨한다. 그런데 모르는 선생이라면 레슨 할 것이 없다. 기껏해봐야 기술적인 것만 한다. 요 프레이즈에서는 강하게 해라. 당겨라. 슬프게하고 다이나믹해라. 이런 정도로 레슨하는 것. 사실은 그런 것도 필요하긴 하는데. (질문 받은 것을 대답하지 않고 자꾸만 다른 이야기하는 것 같다. 질문에 대한 몇가지 있는데 그것은 하도록 하겠다. 기왕 말이 나와서 정리를 하고 넘어가려고 한다. 말하다 보니 거기 딱 매치가 되어서 그렇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을 갖지 않고 들어왔다.) 레슨하는 것과 신앙적으로 이끌어나가는 것 말하다가 보니 생각이 난다. 어제 서울오프에서도 그런 이야기 비슷한 것이 나왔다. 말이라고 하는 게 내가 준비한 것만 아니라 많은 선택지가 있다. 그중에서 내가 하다보면 그 말의 흐름이 있다. 맥락이 있다. 만나기도 하고 갈라지고 하고. 거기서 내가 어떤 선을 타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느냐? 이거다. 말을 한다는 것은 설교도 글쓰기도 그렇다. 딱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가면서 뭘 만나고 사건 생각을 만나고 반응하게 되고 반응할 수 있는 말의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깊이 글의 깊이가 달라지고 창조적인가 아닌가 판가름 난다. 말을 하다보니 목사가 기독교 신앙을 이끌어가는것과 음악가 학생들에게 레슨을 주는 것이 흡사하구나 떠올라서 하는 말이다. 그 레슨을 잘 하려면 선생이 먼서 음악을 잘 알아야 한다. 음악은 기술이 아니다.

어제 한 이야기를 다시 이야기해야 하겠다.

기독교인들은 우리의 삶을 예술로 대하는 것이다. 예술가다. 테크놀러지가 아니라 사이언티스트다. 오늘 여기 동영상이라 다시 말씀드리는 것이다. 어제 강의 오셨던 분들 클라라나 몇분 계시는 것 같은데 기억하실 것이다. 옳은 것 같다. 테크닉으로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로 사는 것이다. 영적인, 영의 세계의 과학자. 기술자는 뭐고 과학자는 뭐냐? 기술자는 이미 주어진 것을 반복해서 획득하는 것이다. 이미 주어진 것을 잘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 과학자는 미개척적인 분야로 들어가는 것, 창조적인 것이다. 두 개가 다 연계가 되어있다. 기술적인 것이 있어야 과학적인 것도 할 수 있다. 크게 엄격히 보면 보면 다르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을 기술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여기서 내가 뭐를 해서 확대가 아닌, 내 삶을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것. 새로운 세계를 영적인 세계로 생각하면 옳다. 여러분들은 이것을 잘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까 기독교에서 말하는 것은 영이라고 하는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부분에서는 그런 성격이 있겠지만 영은 창조적인 것을 이야기하고 심층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영혼도 우리의 영혼, 영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막연? 뭐라고 할까? 이렇게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 생명의 가장 심층적인 곳에서 활동하는 삶. 그것을 우리는 영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영적으로 본다고 하는 것은 표면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삶을 어떻게 우리가 잘 활용하는 것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심층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말이 사실 심층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어떤 분들에게는 너무 추상적으로 들릴 것이다. 아 그거 손에, 머리에 와 닿지 않는다. 당장 확실한 것을 말해라 생각하실 수 있다. 어떻게 더 설명하기 힘들다. 심층적이 아니라고 한다면 혹은 미래적인 것이다라고 말해도 좋겠다. 왜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는가하면 이세상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시간과 공간으로 구성된 세상이 우리가 그 어떤 방식으로도 더 가 닿을 수 없는 깊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닿을 수 없는 미래를 갖고 있다. 깊이와 미래는 같은 것인데 단어의 차이. 똑 같은 것이다. 종말론적 종말. 어떤 미래가 우리에게 기다리고 있는가 생각해 보라. 미래도 까마득한 미래 분명하다. 우리는 이미 미래에 와 닿지 못한 상태에서 지금 이런 식으로 잠정적으로 살고 있다. 그러면서 이것이 모든 것이라고 생각 하는 것은 착각이다. 그 까마득한 미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하나님. 우리를 향해서 오고 있는 미래. 이 표현이 와닿을 지 모르겠다. 그쪽으로 우리의 삶의 지평을 여는 것이다. 그러니까 창조적일 수밖에 없다.

해아래 새것이 없다는 전도서에 있는 말은 다른말이다. 성서의 가르침의 기본바탕에 의하면 이 세상에 똑같은 것은 없다. 모든 것이 새롭다.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볼 때 모든 것은 새롭다. 어제는 지나갔으니 오늘은 새로운 날이다. 오늘도 가요. 내일도 새로운 날이다. 365일 1년 사시사철 돌고 돈다. 기독교 신앙은 돌고 도는 것이 없다. 헬라철학이 말하는 세계에 대한 이해다. 우리에게는 돌고 도는 것이 없다. 모든 것이 새롭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다. 봄이 온다. 작년의 봄이다. 이건 똑같은 봄이 아니다. 작년의 봄과 오늘봄이 다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다르다. 생물학적 새로운 세포가 나오고 만들어지고 없어지고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다. 생각도 그렇고 모든 면에서 그렇다. 다만 우리가 똑같은 것이 반복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실제는 안 그런데. 왜그렇게 느낄 수 밖에 없는가 하면 우리의 인식의 한계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긴 시간을 보지 못한다. 모든 세계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상이 아직까지 계속 잘 갑니까? 네. 영상이 가요? 오늘은 상황이 괜찮은 것 같군요.)

레슨을 어떻게 잘 하냐? 선생이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을 모르니까 잔소리를 하는 것이다. 좋은 뜻으로도 이야기한다. 선생의 마음은 간절해야 한다. 이 학생들로 하여금 빨리 예술가가 되도록 도와줘야 하는데 생동적인 음악을 하도록 도와주어야 하는데 능력은 안돼. 선생에 따라서는 정말 능력이 되지 않는데 능력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시겠는가? 들어보면 무슨 말하는지 알 것이다. 들어보면 안다. 피아노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악기 레슨하는 사람 레슨하는 것을 옆에서 보면 아는지 모르는지 드러난다. 기독교 신앙도 똑같다. 설교 비판을 수 년 동안 하면서 어떻게 그런 것을 잘보냐? 그렇게 말을 하는 사람이 많다. 그렇게 어렵지 않다. 방금 말씀드린 대로 레슨 준비도 안 된 사람이, 실력이 없는 사람이, 음악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 레슨 하는 것을 눈에 그대로 보이는 것을 그대로 비평을 쓰고 있는 것이다. 중심이 음악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이면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 매달린다. 학생에게 요건 낮게 해. 마음을 안정시켜. 왜 집중하지 않아. 집중해 요런 정도로 이야기한다. 음악가가 아니기에 전문적인 용어로 말할 자신이 없다. 음악을 정말 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냥 가만히 두고 보면서 조금씩만 학생이 음악안에 들어가 있는지 알고 지도할 것이다. 목사도 영적인 마에스터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지 참된 레슨을 주고 신자들도 거기서 바른 것을 얻어 듣고 그러면서 모두가 다 각자가 나름대로 영적인 노래를 부르며 사는 그런 공동체가 되어야 되지 않겠는가?

주현절을 설명하면서 많이 왔다. 연결되는 것이다. 현현했다. 과연 그게 무얼까? 정답을 드릴 수 없다. 많은 생각이 포괄적 뭔가 알아가는 것이지. 수학공식 풀듯이 뚝닥 되는 영적인 인식, 이해는 굉장히 점진적이다. 연습하다보면 자기 발걸음을 띨 수 있다. 주현절이라는 것이 그냥 지나가버려도 되는 것이 아니라 맥락적을 연계되어있다. 빛을 이해해야 한다. 이사야서를 본문으로. 신자들에게는 황당하게 들리 수 있다. 이 빛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을까? 그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이 신앙공부다. 왜 초기 기독교인들은 동지가 며칠 지난 다음에 태양이 길어진다고 하는 12월25일을 예수님이 오신 성탄절로 정했을까? 다 의미가 있다. 도대체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어떤 것을 통해서 생명의 빛을 보았을까하는 것이다. 거기서 핵심적인 것은 부활일텐데. 생명 죽은자가운데서 사흘만에 살아나신 생명. 어떻게 그런 것을 경험했을까? 다른 사람들은 경험하지 못했을까? 객관적인 사실. 객관적인 것은 엄밀하다기보다 단순하다는 뜻이다. 객관적이라는 것이 의미없다고는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일반 세상을 접근할 때는 필요하나 그것이 진리의 준거가 기준이 될 수 없다.

나무가 한그루 서있다. 객관적 사실이다. 그게 뭐 어쨌다는 것인가. 그 나무가 있고 내가 어떻게 나무를 이해하는가? 그리고 그 주변의 여러가지 상황들을 연관해서 어떤 사건이 벌어진다. 그 사건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예술가다. 시인에게는 그 나무가 특별하다. 아주 특별한 사건이 될 수 있다. 자칫하면 주관성속에 빠질 수가 있는데 주관성이 아니라 객관적 사건으로 경험하게 된다. 언어도 사건이다. 언어사건 독일어 한마디해도 되겠는가. 모르트게센. 말의 사건. 해석학에서 말의 사건은 굉장히 중요하다. 너무 학문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할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 천만이다. 말씀으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언어사건 창조론의 문제다. 요한복음에서도 로고스 이상. 그것이 태초에 있었다. 언어 말 이게 사건이라고 하는 것.. 놀랍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님의 부활이 단순하게 객관적인 건조한 드라이한 그러한 차원이 아니었다. 누구나 죽었다 살았다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것들은 정말 가치없는 일이다. 사람들은 거기에 호기심을 느낀다. 죽었다 살았다.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또 죽을텐데. 기독교 신앙은 호기심차원이 아니라 어떤 영적 사건과의 조우 만남이다. 부활이 누구나 다 알아 들을 수 있는 객관적 아주 단순한 그러한 사건이 아니라 기독교인 공동체에만 일어난 특별한, 우주론적인-우주론적이란 말은 전체역사와 연관된다. 보편적인 전체 역사와 연관된다. 오늘 자꾸 말이 신학 부활론 적으로 나가는데 이 한마디만 하고 정리하겠다.

보편적 우주론적이란 말은 전체역사와 연관 된다. 동시에 이 사건은 역사가 끝나야 모든 문제의 실체가 드러난다. 말이 왔다갔다 하는 것처럼 느끼는가? 혹시 말의 모순 느끼는가? 이것은 순환논리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이건 예수의 부활, 예수사건은 우주론적, 전체역사 역사 마지막에 가서야 실체가 드러난다는 이 말은 기독교 신앙을 역사와 연관하여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사유방식중 하나다. 도대체 그 신학적 사유가 우리의 신앙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 신학적 사유가 직접적으로 우리 교회 생활에 직접적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것이 아니다. 연관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빼놓을 수 없는 토대. 신학적 사유다. 내 머리에서 나오는 잔재주가 아니라 하나님 큰 통치앞에서 놀람으로서 바르트 개념으로 말하면 '놀라는 것'이다. 이를 정말 생각한다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놀라움 가운데서 그것을 최대한 우리의 세계 경험으로 가능한 합리적으로 해명해보려는 방식, 훈련을 신학적 사유라고 한다.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당장 이것이 우리를 뜨겁게 하는 것 아니지만 흔한 말로 비유하자면 고기잡는 방식이다. 고기를 주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과 당장 가까와지는 것이 아니지만 그 기초가 된다. 우리 평신도들이 모두가 다 신학자가 될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지만 그게 어떤거냐 하는 훈련은 꼭 필요하다. 우리 모두가 다 위대한 작곡가가 될 수는 없지만 작곡해 놓은 그 곡을 듣고서 그 음악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런 음악경험을 하기 위해서는 작곡가 만큼의 높은 수준의 능력은 없어도 기초는 알아야 한다. 그런 것과 같은 것이다. 참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할 것이 많다. 주현절, 이 한마디만 갖고도 조금 거칠게 말씀드렸지만 연관되는 것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모든 것의 연관성을 꼼꼼히 생각하고 거기에 관계된 책도 읽으면서 우리의 영성이 더 심화되고 풍요로와질 것이다. 이런 방식이 아니면 기독교 신앙은 성숙하기 힘들다.

질문을 주신 분들이 세분인데 동영상메뉴 진주님. 클라라님 두번째로 쪽지로 주셨는데 지금 문자로 주신 분. 독일의 신앙 형태. 시간이 되면 설명해 달라고 하셨다..

진주님의 게시판 통해서 주신 질문:

동정녀 이야기의 본질은 예수님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신 완전한 인성을 갖추신 분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대목이 기술되어진 역사의 자리를 아는 것이 그래서 중요함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궁금한 것은 본질과는 거리가 좀 있는 것인데요.^^ 저는 마태복음 1장에서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하여' 이 대목이 참 헷갈립니다. 요셉이 가만히 파혼하면 마리아가 혼자서 돌에 맞아야 하는거 아닌가요. 그럴때 요셉의 의로움은 뭘 말하나요? 그 당시의 유대의 관습에 대해서 알면 이 대목이 이해가 되겠는데....

네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다. 성서를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입장이 아니라 성서를 받아볼 독자들의 입장이다. 당시 독자들이 그 텍스트를 읽었을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당시에 동거하지 않는 상태, 정혼한 상태에서-정혼은 유대인의 고유한 결혼 풍습인데 법적으로는 결혼한 부부가 되었는데 다만 동거하지 않는 상태다. 그런 정혼한 상태에서 만약 임신하게 되었다면 멍석말이를 해야 한다. 돌에 맞아 죽어야 되는 것이다. 남편되는 사람이 고발식으로 하면 죽게된다. 그렇게 하는 일도 많았던 것 같다. 요셉은 아내될 사람이 그런 일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 그냥 조용히 파혼하고자 했다. 그렇게 뒷처리하면 마리아집안에서 나머지는 해결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각각 갈라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남을 배려하는 좋은 태도이기 때문에 그 당시에 이러한 텍스트를 읽는 사람들은 요셉을 의로운 사람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런 정도로 대답하자. 그 당시는 율법이 모든 삶을 규정하는 절대적 규범이었다. 우리와의 오늘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가부장적이었다.

클라라님이 쪽지로 주신 질문:

예전적 예배와 로마 카톨릭 교회 미사의 차이점이 뭐냐 하는 것과 아울러 샘터교회에서 행하는 예전적 예배가 종교개혁이전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 아니냐? 종교개혁적 전통과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니냐? 본인은 예전적 예배가 좋다고 하면서 그래도 종교개혁의 전통과는 다른게 아니냐? 로마카톨릭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냐 궁금하다 질문하셨다. 아울러서 중보기도 성경적인 기도가 무엇이냐? (지금 40분이군요) 시간대는 대로 대답해 드리겠다. 문자로 질문하시기 바란다.

먼저 결론적으로 지금 샘터교회에서 드리는 이 예전적 예배는 종교개혁전통과 다른게아니라 바로 종교개혁 전통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예배 본질을 되살리자는 것이다. 지금 질문하는 이유는 일반적으로 드려지는 예배, 특히나 수년전부터 한국교회의 하나의 트랜드로 부각된 열린 예배, 사실 열린 예배는 예배라고 할 수 없다. 제가 보기에는 열린 음악회와 비슷한 성격이다. 모인 사람들끼리의 영적인 친교를 최고의 가치로 놓는 사람들의 모임. 그 모임 안에 들어온 사람들끼리는 예배, 과연 그것이 하나님께는 진정한 예배, 제사가 되겠느냐? 지금 우리 기독교가 드리는 예배는 구약의 제사가 아니라 이거는 하나의 부활한 주일, 날을 기념하는 축제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옳다. 축제를 벌일때는 거기 모인 사람들의 즐거움, 영적 만족감만 누리면 충분하다.

주일날 우리가 예배드리는 전통이 언제인지는 예배학, 예배 역사속에서 찾아봐야 한다. 그러나 정확한 연대는 찾을 수 없다. 초기기독교는 유대교와 똑 같은 형식으로 안에 머물러 있었다. 주일을 지키지 않았다. 안식일을 지켰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로마에 들어가면서 로마의 중심종교가 되면서 이루어지게된 하나의 토착화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우리가 다 이런 것 다 살펴서 꼼꼼히 이야기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기도 할 것 같다. 주일날 드리는 예배가 단순히 우리끼리의 종교적 축제라는 성격만 두기에는 좀 그렇다. 그건 예배라는 말을 붙이지 말아야 한다. 그건 기도회라든지 찬양 모임이라고 하는 것이 솔직하다. 열린 찬양모임이다 그런 정도라면 되겠다. 주일 공동예배는 우리끼리 모이는 축제라기보다 하나님에게 참다운 의미에서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독사(Doxa)라고 하는 것이다. 고대인들은 어떻게 영광을 생각을 했을까? 뭘까? 이 단어가 나온 배경이 무엇일까?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 주일공동예배는 우리끼리 모이는 영적인 우리만의 코이노이아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영적인 관심을 돌리는 그런 아주 고유한 신앙적인 자세와 행위라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제사적인 개념 의미가 다분히 포함된다. 열린 예배주장 하는 사람들도 자기들만의 축제라고 하지 않는다.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은 할 것이다. 과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가 어떠해야 되느냐 하는게 문제인데 제가 어느 기회에 제사와 연관해서 말씀 드린바가 있다.

제사 지낼때는 격식이 있다. 지나고 보니 경건하더라. 외형적인 경건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경건도 들어가는 것이다. 제사드릴때는 죽음에 대한, 자기들이 축소된다. 과일 놓는 방식 색깔에 따라서, 술 왼쪽에 몇번 치고하는 그런 전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방식이 거기 참여한 사람들은 최소한 축소되고 그 방식을 통해서 어떤 것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그 어떤 것은 제사에서 조상이다. 우리 예배에서도 예배 참여한 사람들은 번제물처럼 없어져야 한다. 사람이 자꾸만 드러나는 것은 바른 예배라고 할 수 없다. 우리가 어쩔 수 없이 형식이 있어야 하지만 참여하는 사람이 있는데 차이를 아시겠는가. 그런 식으로 참여하면서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어떤 것, 어떤 힘, 어떤 세계. 하나님 성령이라고 하는 그 분이 확 들어나는 것 그런 것 있지 않는가? 그 차이 이해하시겠는가? 가장 최선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2천년 기독교회가 시행착오를 반복을 통해 얻은 결과가 예전이다. 거기서 목사의 역할은 제사와 연관해서 본다면 제사를 끌어가는 사람이 있지 않는가? 집전하는 사람 역할이다. 어릴쩍 술 따를때 작은 아버님인가 용섭아 이렇게 해라. 놓아라. 놓고 절해야지 하면 절하고 그런 정도로 했다. 그 제사를 집전하는 사람이 앞에 나서서 자기가 막 드러나고 그런 것이 아니다. 옆에 서 있었다. 집전하는 사람이나 참여하는 사람 한쪽으로 향해야 한다. 우리로 봐서는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

우리는 정반대의 예배를 드리고 있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대형프로젝터 말이다. 이거는 언제부터 교회당에 들어오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만 예배를 망치는 길이 아닌가 싶다. 그냥 편리하게 찬송가만 볼 때는 어두워서 안 보이니까 크게 보이게 해준다거나 가사 크게 보이게해 준다던가 모르는 찬송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사용한다면 실용성이 있고 나쁘지 않다. 그러나 대형프로젝터의 화면에 설교하는 목사의 얼굴을 잔뜩 클로즈업시키는 것은 반신학적 반신앙적 태도다. 목사의 얼굴을 왜 그렇게 크게 비추나. (말을 하다보니 화면에도 제 얼굴이 나가네요. 예배가 아니니 강의에서 얼굴이 나가는 것 필요하다. 전달해야 하는 것, 강의라고 해서 필요하다. 작잖아요? 무슨 뜻인지? 사진이 작잖아요. 아.. 네.. ) 다른 것 두번째 치고 주일 공동예배때 설교하는 사람의 얼굴을 프로젝터에 빔으로 쏘는 것. 절대적으로 반대다. 청중들이 설교는 안 듣고 목사 얼굴만 자꾸 본다. 하나님의 영광, 설교를 한다면 목사 자기는 줄어들어야 한다. 이게 좀 어려운 문제다. 설교를 하면서 자기는 축소되고 하나님 의 말씀이 확대되는 그런 설교가 뭘까? 눈치 채지 못하는가? 저건 목사가 지 이야기하는 거지. 잘난척 하는거지? 신자들에게 뭐 하라고 선동하는 거지 하나님 말씀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그거 느끼지 못하겠는가? 조금만 분별력이 있어도 보일 것이다. 목사도 그런 유혹을 받게 된다. 자기가 심리적으로 무엇을 가해서 신자들에게 뭔가를 얻어 내어야 하겠다 자꾸 온다. 신자들에게 억제를 해야 한다. 통제를 해야 한다. 신자들이 자꾸만 그런쪽으로만 반응하기에 목사도 그런쪽으로 나가게 된다. 서로 맞물리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상당히 목사에게 고도의 영성이 필요하다. 그렇다는 사람이 아니다. 오해말라. 그런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이 강단에 올라가 이말 저말 이것 저것 쏟아내다 보면 신자들의 영혼에 상처가된다. 사람들의 말은 비수가 된다. 소화되지도 않고 준비되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 말 쏟아내느냐?

CTS 기독교 방송.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스카이. 심야에 스타 스포츠보다가 끝나서 기독교 방송. 새로운 방송이 떴다. 안뜨다가. 잠간 보았다. 어떤 철야예배 목사님이 나와서 설교하는데 도대체가 아무것도 이야기만 하시면서 마이크를 들고 서있지도 못하면서 계속 왔다갔다 하면서 흔들고 불안한 모습이었다. 심리치료가 꼭 필요한 분이다. 그 밑에서 선남선녀들이 점잖은 분들이 계속 그것을 듣고 있다. 불안하지 않나? 밑에 앉아 들으면서도? 그러니까 예배에서도 설교할때 자기는 줄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드러나게 해야 하는데 요 경계선, 여기에서 참 힘들다. 목사로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할 수도 모르니까 인격적이고 생각이 좋고 괜찮은 분들이라도 준비가 되지 않으면 레슨할 수 없다. 비슷한 문제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쩔 수 없다. 목사만 탓할 수 없다. 신부들도 똑같다. 신부들은 일단 그 시스템이 어느 정도 까지는 막아준다. 진도만 나가면 된다. 개신교는 전혀 그러한 방패막이가 없다. 절제할 수 있는 그 틀이 없다. 목사가 어떠냐 따라 신자들의 영혼에 상처쪽으로 발산되는때가 많다.

예전예배가 그렇다. 목사의 역할을 줄이는 것이다. 공동의 격식을 통해서 하나님께 참된 영광이 되는 신자들이 그러한 영의 활동에 휩싸이는 것이다. 시내산에 구름이 휩싸이듯이 예배하면서 공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은혜받아야지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자체가 참예하는 것이다. 신학교 다닐때 예배학 시간 선생이 로마카톨릭의 미사와 비교하면서 이것은 드라마처럼 되어있다. 형식적이고 드라마 연극, 죽은 예배야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생각을 바꾸었다. 오히려 그게 더 살아있는 예배일 가능성이 많다. 예배는 드라마에 가까와야 한다. 작위적으로 꾸몄다는 것이 아니라 상징과 절제미학. 인간의 개인적 주관적 감정적 센티멘탈한 것이 대폭 축소되고 최대한대로 전체 안에 틀로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제사 지내듯이 그게 오히려 한 개인이 실수를 저지르는 것을 막는데 바람직하다. 그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제사적 그런 식으로나가야한다.

우리의 예배는 왜 이렇게 되었냐? 예전이 없냐? 이렇게 되었냐? 우리 예배는 지금 이런 것 설명하려면 미국교회사, 유럽 교회사, 교회사적인 연구도 많이 필요하다. 교리사등등 어떻게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흘러 들어왔느냐? 아전 인수격으로 해석한다. 복음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에 와서 꽃을 피웠다. 전형적인 아전인수다. 우리에게 자신없다는 뜻이 아니라 사실대로 보고 자기 중심적으로 역사를 해석하면 곤란하다. 세계 전체 교회의 흐름을 볼때 미국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온 하나의 흐름은 주류가 아니라 소종파에 가깝다. 그때는 주로 청교도 후예들이었다. 청교도가 유럽의 중심이 아니었다. 하나의 문제의식을 갖고 극단으로 갔다. 구원이 교리, 철학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회개하고 직접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한다. 역사나 creed가 중요하지 않다. 과연 그게 건강한 것인가? 몰두하는 것이 필요하긴 하다. 그러나 이것에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을 담아내려고 하면 주관적이 된다. 혼자 잘믿고 회개하고 용서받고 확신하면 된다. 역사나 신조보다 자기확신이 중요하다. 아주 위험하다. 부흥회 나와서 은혜받고 부흥사되고.. 뜨거움이라는 것 그것만 갖고 사람이 건강하게 살 수 없다.

미국을 통해 들어온 신앙이 큰 기독교의 강줄기에서 옆으로 흐르는 지류에 불과하다. 조금 극단적으로 이야기해서 그렇다. 그런 쪽의 예배들은 확신이 중요하니까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침례교같은 경우에는 사도신경 고백하지 않는다. 엄청난 오류다. 그런거 없어도 예배드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퀘이커교도들처럼. (시간이 없다. 마쳐야 겠다. 오늘만 날이 아니다. 오늘도 내일도 날이 아니고 앞으로 6개월 남아있다. 그래도 하던 이야기 마쳐야 하겠다.) 그런 확신 이런 것들은 순식간에 불신으로 바뀔 수 있다. 여러분 스스로 인정하시지 않는가? 자기 확신이 얼마나 토대가 부실한 것인지. 퀘이커 교도들은 빙둘러 앉아서 자기 원하는대로, 성령이 인도하시는대로 예배하라고한다. 성령이 그렇게 무질서 하신 영일까? 사도바울은 방언하는 자들에게 '그러지 마라. 왜 그렇게 시끄럽게 떠드냐? 정 방언해야 하겠다면 꼭 통역해라. 통역없으면 하지마라' 그렇게 이야기했다. '막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다 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렇게 옹호할 수 있지만 성서해석을 좀더 해봐야 한다. 고린도 교회가 너무 신비주의적이어서 그 현상을 부정할 수 없어서 안고 가는 것이지 좋다는 말이 아니다. 일종의 카리스마의 원리다. 거기까지. 어쨌든 미국쪽의 예배, 흑인들의 예배는 달리 나타나고 있다. 굉장히 즉흥적, 주관적, 감정적, 개인적 신앙에 몰두하는 형태다. 어쩌다 그런 예배가 필요하기는 하다. 그러나 주일 공동예배까지 그렇게 한다면 문제가 있지 않는가? 그런거다.

독일교회? 오늘은 못하겠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