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2011년 11월9일, 저녁 8시, 시편 147편

하나님의 말씀과 자연

 

시편의 마지막 5편은 각각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난다. 그 의미는 ‘여호와를 찬양하라’이다. 결국 시편의 전체 주제는 여호와를 찬양해야 할 당위와 이유에 대한 해명인 셈이다. 찬양은 곧 송영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영적 태도이다. 하나님으로부터만 생명이 시작되고 유지되고 완성된다는 사실을 알 때 할렐루야가 가능하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이런 영적 태도를 취한다고 생각한다.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말씀 공부를 한다. 문제는 생명의 현실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서 그 격이 달라진다. 무당을 찾는 것과 같은 태도로 예배를 드린다면 그건 송영이 아니라 자기연민이다.

1-6절: 하나님의 위로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147편은 바벨론 포로 귀환(기원전 537년) 이후를 역사적 배경으로 한다.(2절 참조) 극한의 어려운 포로 시절을 넘어섰지만 여전히 위로가 필요한 시절이다. 하나님은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상처를 싸매신다고 한다.(3절) 바벨론 제국이 위대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위대하시고 능력이 많으시고 지혜가 무궁하시다.(5절) 하나님은 겸손한 자들을 붙드시고 악인을 무너뜨리신다.(6절) 이는 하나님의 통치 방식을 가리킨다.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이다. 이런 시편기자의 진술이 옳은가? 두 가지로 봐야 한다. 첫째, 짧은 시간에서는 하나님의 정의가 없는 것 같지만 긴 시간에서는 분명하게 나타난다. 둘째, 짧은 시간에서도 하나님은 비밀한 방식으로 정의를 세우신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참된 위로를 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전제 조건은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영적 태도이다.

7-11절: 감사의 노래

시인은 두 번째 단락에서 찬양의 성격을 감사로 규정한다. 감사의 이유는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을 돌보신다는 데에 있다. 땅을 위하여 비를 준비하고, 산에 풀이 자라게 하신다.(8절) 들짐승과 까마귀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9절) 이런 진술을 뻔한 이야기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시편기자는 이 세상을 운영하는 손길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보고 있다. 그 분이 하나님이다. 이런 점에서 창조론은 진화론과 대립관계가 아니다. 진화가 생명의 한 원리라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통치 방식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자연신학의 가능성이 있다.

감사해야 할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잘난 부분을 기뻐하지 않고 경외하는 자를 기뻐하신다는 데에 있다. 경외하는 삶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12-20절: 말씀의 능력

시편기자는 앞 대목에서 자연신학의 가능성을 말한 뒤에 이제 세 번째 대목에서 말씀신학과의 관계를 말한다. 성서는 단순히 자연의 위대함, 신비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창조하고 운행하시는 분에게 주목한다. 그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고 다스리는 분이시다. “그의 명령을 땅에 보내시니 그의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15절) 세상과 언어의 관계를 의미한다. 하이덱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다. 이런 언어존재론적인 착상은 성서 기자들의 진술에 맥이 닿는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예수는 이 창조 사건에 함께 했던 ‘로고스’이다. 그리스도교 영성은 말씀과 세상(자연)의 깊이에서 주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