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해 보이시는데요...에 대한 답변)
제주도 갔었는데 거기도 비가 오고 날씨가 나빴지만 주최하는 사람들이 이래서 사람들이 모이지 않을까 염려를 많이 하더라구. 거기도 사람들이 한 30명 예상했는데 50명정도 왔더군. 정영섭 목사 네임 벨류가 조금 높아졌다고 그런 이야기를 하더구먼. 설마 그렇겠나만 어쩌다가 사람들이 모였겠지. 그렇게 하고 점심을 먹자마자 춘천에서 청량리 가는 기차를 탔수. 그 경치가 참 좋잖아? 춘천에서 서울까지 오는 기차. 경춘가도인데. 거기에 무궁화열차라고 하던데 모든 역마다 다 쉬더라구. 통근 열차 어쨌든 그것 타고 청량리까지 왔다가.. 좋았지. 청량리에서 지하철 1호선 타고 시청에서 2호선 갈아타고 충정역까지 왔어. 옛날 내가 신학교 1학년 2학기까지 다니던 건물, 충정리에 있어. 거기가 아현 교회에서 구입해서 교육관 또 연구실 등으로 쓰고 있어. 거기에 모임이 있어서 이신근, 이길용, 오성식 후배 목사 네 사람들이 모여서 바르트 신앙 묵상 그것을 교정을 봤어. 다 하지 못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고 또 끝이 없어. 그거 할려고 그러니까 일단 접고 밤 늦게 막차 직전 기차를 타고 동대구 까지 기차타고 내려와서 그 근처 어디 세워둔 내 승용차를 끌고 집에 돌아 왔어. 죽 한바퀴 돌았지 대구에서 수직으로 북쪽으로 올라가서 원주 춘천, 춘천에서 횡단해서 서울까지 갔다가 한바퀴 돌았는데 그 전시간에는 제주도를 한바퀴 돌고. 전국을 한바퀴 돈것 같애 피곤하지. 몸으로는 느끼지는 못하겠는데 피곤하겠지. 그런데 다가 지난주에는 특별히 서울오프가 있어서 토요일 거기까지 갔다 오고 월요일 포항 매주 가니까 포항 갔다오고 말하다보니 너무 싸돌아 다녔구먼. 그래서 피곤한 기색이 얼굴에 좀 있을지 모르겠수.

오늘은 하루종일 다비안 편집했수. 이게 다비아 사이트에 있는 글들을 모아서 컬럼리스트 글과 설교를 몇몇 편집을 하는데 만만한 일이 아니더라구. 최소한도 새 글은 내가 하나 써야하기 때문에 신앙단상 내세에 대해서 1,2,3을 쓰지 않았어요. 성실함이라고 말하면 곤란하지. 어쨌든 다비안 2월호. 이번에 늦었어요. 지금쯤 발행되었어야 했는데 못했어요. 아직까지 편집 완전히 마치지 못했어요. 틀은 잡았는데 전체적으로 내세(4) 교정도 봐야 하고 내일 오전까지는 그것을 마치고 소량인쇄를 하는 북토리라고 하는 인쇄 넘겨야지요. 옛날에는 사무실에 있는 복사기로 직접했거든요. 복사기로 하면 아무리 많이 하더라도 90분에 100매까지 힘들어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회비를 내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최소한도로 170부를 찍어야해요. 조금 단가는 높아지지만 ‘북토리’라고 하는 소량 인쇄회사에다 맡깁니다. 내일 이걸 맡기고. 각각 할 애기가 다른데 똑 같은 일 하는 게 아니예요.

(동영상을 위한 준비)
오늘이 벌써 1월 31일 마지막 날입니다. 기다리고 있는 분들은 왜 그럴까요? 초청을 하겠습니다. 두 사람만 바깥에 나가 있는데.. 들어오신분들과 대기하는 분들이 다르게 나누어져 있는 칸이 보이시는 가요? 확인할 수 있으신가요? 지금 마저 한분 들어오셨구요. 예. 알았습니다. 제가 그런것 다 처리해야 하네요. 한분이 아직 바깥에 계신데.. 저분이 왜 그러실까요? 네 오랜만에 들어왔어요? 박재진 목사님이신데 안정적입니까? 다행입니다. 벌받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초청을 해두었으니 알아서 하시겠지요.

(단상-1월 달력을 넘기면서 )
1월31일입니다. 강의 목요일 저녁으로만 따지자면 5번째 입니다. 많이 나갔죠. 한달 마지막인데요. 다 들어오셨습니다. 달력을 제가 넘겨야 되지요. 찢을 것은 찢고 넘길 것 넘기 야 하는데.. 찢을 것 찢고 넘길 것 넘겼습니다. Th0910 안정적이지 않으신 모양이죠. 전도사.. 한달이 지나갔습니다. 한장. 그렇게 해서 12번하면 1년이 다가죠? 하나하나 날자를 잘게 보시면 그렇게 숫자가 많은것 같은데 12번하면 1년이 간다 이걸로 보면 그렇게 숫자가 많지를 않습니다. 12번이거든요. 우리가 1년이 끝날때마다 느끼지만 1년이 한 뭉텅이란 말입니다. 그것도 한꺼번에 가버린다 말이예요. 이 시간이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가 자전하는 거나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1년, 자전하면 하루고. 한바퀴 돌게 되는데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시간을 느끼고 삽니다. 우리가 계산해내는 시간들은 태양계 안에서만 가능한 이야기들이거든요. 도대체가 태양계 안에서만 이것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태양계 너머서는 시간이 달라진다 말이예요. 물리학자들이나 철학자들 상식적으로 시간이 얼마나 비밀스러운가? 천년이 하루같고 하루가 천년같다. 이렇게 뭉텅이로 지나가는 시간속에서 일이라고 미미하다 그런것을 시간이 갈수록 더 느낀다. 열심히 하는것, 남겨둔 업적같은것 별것아니라는 것이 시간이 갈수록 느낀다. 가능하면 힘이 빼고 살자 공자왈 설교쪼 이야기를 합니다만 우리자신을 향하여 하는 설교로서 하나님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것을 시간이 갈수록 절실하게 느끼고 살아야 하지 하는 것. 한달이 다가서 달력을 하나 넘기면서 느끼는 상념이 있어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다음주 목요일 특강 안내)
설날도 강의하냐고 물어보셨군요. 다음주가 설날이죠. 많은 분들이 고향에 가시고 친척들을 만나시고 가족 모임에 가시기 때문에 여기 오시지못하실 분들 많을 것 같아요. 그런 분들을 고려해서 다음주 목요일에는 정식으로 수업은 하지 않고 시간이 있으신분 들을 위해서 따로 강의실은 열겠습니다. 수업은 나가지 않으면서 다른 이야기, 특강이죠. 수업진도와는 상관없이 특별한 강의를 할 것입니다. 무엇을 할 것인것인가는 결정하지 않았다. 교회 실무에 대한 신앙생활에 실제생활에 벌어지는 일, 부활에 대한 이야기 하나님의 나라 오늘 다비안 꼭지글을 썼는데 내세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구요. 여러가지 가능성은 열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다음 주에 바쁘신 분들은 접어놓고 그 분들을 위해서 실제로 진도는 나가지 않는다는 것. 여기저기 갈때 없는 분들, 절기때마다 더 쓸쓸한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 서 다음시간에는 강의실 열어놓고 특별한 강의를 하겠다. 양쪽다 불만이 없으시죠?

(드디어 강의 시작)
우리는 지난주에 이어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좀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처녀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들이 이야기 했구요. 파워포인트는 잘 보일 거라고 봅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동정녀에 대한 문제들.. 지나가구요. 오늘은 그 지난번에 이야기하면서 동정녀 탄생에 관한 이야기, 그것이 예수님의 탄생이 기적적이었다는 것, 일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태어나셨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예수의 인성을 조금 약화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한 교부들의 강력한 도전으로 초기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정체성으로 예수님의 인간성을 강조하려고 하는 헬라 기독교인들을 향한 변증이었다. 그렇게 이야기했다. 거기서 핵심은 예수님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여자의 몸을 예수님의 인간성에 대한 강조입니다. 예수님이 신이냐 인간이냐 하는 논의는 초기 기독교부터 계속되어 왔고 이것은 계속될 것이고요 그것을 완전히 이해할 될 날은 아마 종말에나 가능할 것입니다. 어떻게 한 인격체 안에 두가지 인격이 속성이 일치될 수 있느냐 아이덴티파이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인데 그것은 신과 인간이 하나가 된다. 그거는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문제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나중에 3위일체론에 대한 공부를 좀 하게될때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로 하요.

우리가 진도 나가는 가운데서 예수님의 동정녀 출생이 예수님의 육체성, 구체적인 육체의 몸을 입고 태어났다는 사실을 강조한다는 사실에서 인간 예수라고 하는 고 부분을 한번 짚어 보려고 합니다. 인간예수인데요. 그건 뭐 옛날부터 답은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의 원칙이죠. 도그마라고 합니다. 온전한 인간이며 온전한 신, 베레호모 베레데우스. 니케야 회의와 그 뒤에 나중에 있었던 콘스탄티노플 아주 중요한 기독교 종교회의에서 이러한 명제가 도출되었습니다. 참된 인간이며 참된 하나님이시다는 것은 이런거야 우리가 교회에서 늘상 들었던 말이기 때문에 익숙하기는 합니다만은 바로 앞서 제가 앞에서 짚었다시피 실체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게 오해말아야 할 것은 반신반의는 아닙니다. 반은 인간이고 반은 신인 것이 아니라 온전한 신이며, 온전한 인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인간이며 전체적인 신이라는 것이 가능할까요. 힘들 겁니다. 그런데 초기 기독교인들은 바로 예수님을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과연 그게 무얼까요? 어떤 방식으로 그것이 가능할까요? 요거는 하나님 문제만 아니라 다른 것도 다 연결될겁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이었는데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오셨느냐? Incarnation 인간이신데 하나님에게 양자가 되었느냐? adoption인가요? 그게가 두개가 상반 되는 것인데 두개 다 기독론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위에서 내려오신 분이고 밑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똑 같은 이야기는 아닌데 예수님을 이해하는데 같은 기독교 정통 교리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참된 인간이며 참된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명제는 예수의 정체성, 성육신과 양자론 등등 주변의 많은 것들이 같이 연관되어 있는 것이지요. 보통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신적인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 많을 겁니다. 말로는 참된 하나님, 참된 사람이라고 하지만 머리속에 있는 개념이라고 할까요 마인드라고 할까요 전체적인 관점 이런 것들은 거의 신성화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신으로만 각인되어 있는 거죠. 예수님께 기도하고 우리의 메시야이고 그건 옳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똑같은 뜻입니다. 메시아는 인간을 구원할 자인데 인간이 인간을 구원할 수 없으니 신입니다. 그건 옳은 이야기인데... 메시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고 신이다는 말은 옳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인들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내려오는 기독교 정통교리로는 그러한 복음만이 아니라 온전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 말이 자꾸 돌고 쳇바퀴 도는 듯해서 미안합니다. 제가 적당하게 여러분에게 설명할 준비가 덜 되서 그런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이 애기했듯이 피곤해서 그런지 앞으로 나가지 앞으로 나가지 못해서 제자리에 머물러 있군요.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교인들은 예수님을 주로 신적인 차원에서 거의 정서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인식론적으로도 그런쪽 예수님을 인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죠. 하나님으로 신적으로생각하는 반쪽만 알게되는 것입니다.기독교가 이해하는 신개념, 신이해 반토막입니다. 기독교의 신이해는 굉장히 혁명적입니다. 유대교하고 모슬렘교하고 이게 우리가 근원적인 차이가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교쪽에서는 하나님, 유일신이고 전지전능하고 그러한 분을 어떻게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가졌던 인간예수와 동일시 할 수 있느냐 불가능한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극복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가 그 안에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어떤 경험이 있었을까? 어떤 인식의 비약이 있었을까? 그것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찾아서 천천히 안으로 들어가고... 그게 갑자기 되지는 않습니다. 그거는 신비이기 때문에. 제가 신비라고 이야기하면 막연한 것처럼 생각하는데 제가 신비에 대해서는 몇 번 말씀드렸기 때문에 또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신비라고 이 말은 여러가지 관점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그거는 제가 또 하지 않을테니 접구요. 그거는 신비인데요 막연하다거나 좀 확실하지 않다거나 하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통 동양에서도 분리문자라고 하는 말이 있잖아요. 제가 자주 쓰듯이. 말과 언어로 담아 낼 수 없는 어떤 경험이 있잖아요. 그런 경험인거죠. 예수에게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걸 경험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그 분이 선포했는데 그 분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가 신학자 한 표현을 빌리자면 ‘선포한 자가 선포된 내용과 하나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무엇을 선포하셨습니까? 하나님 나라는 선포된 것이잖아요. 선포의 대상, 선포된 내용 그것이 선포한 한 자가 하나가 되는 것 그 계기에 어떠한 것, 경험이 있었느냐 그것이 초기 기독교가 유대교를 넘어서서 새로운 하나님 인식으로 들어가게 된 결정적인 요소죠.

여러분들은 제 말을 조금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초기 기독교인들의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그렇게 생각을 했다고 하는 것이냐. 인식이 사실이 아닌데 생각이 좀 어른 스러워 진것이란 말이냐? 어린아이들이 철이 든 것 처럼 말이죠. 실제로는 세계가 같은데 아이가 나이가 좀 들어서 머리가 좀 깨어나 알게된 것이냐? 그 뜻은 아니죠. 말 차이가 좀 미묘하니다. 신학은 좀 그렇습니다. 신학은 그 미묘한 차이를 정확히 집어서 사유의 세계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의 선이 아니라 여러가지 색깔의 사건이나 흐름이나 그런것들이 많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굉장히 복잡하게. 유대교 힘이 들어오기도 초기기독교의 독특한 사상도 있고 옆의 헬라의 영향도 있고 많은 것들이 연결되면서 흡사 장마가 졌을 때 이골짜기 저 골짜기 흐름들이 들어와서 큰 물줄기를 이루듯이 말이죠 기독교가 그러한 흐름속에서 배태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아.. 없었던 것을 전혀 허황된 것, 퍼즐 예수 책들이 그런 이야기들을 자꾸 쓰는 것 같아요. 초기 기독교인들이 쓴 예수는 참된 예수가 아니라 신화고 없던 가상의 것들을 바울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이제 그렇게 교회 바깥에서요 현상적으로 말을 할 수 있겠죠. 그거는 인제 말을 하는 사람들은 말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됩니다. 그들과 그것 가지고 씨름하면 소모만 됩니다. 교회 바깥 사람들과 종교논쟁을 할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기독교는 아주 고유한 신앙경험인데 그것을 어떻게 그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할 수 있나요? 설명이야 계속해야 되지만 그게 논쟁이 되버린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논쟁은 교회안에 있는 사람들끼리 해야합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신앙논쟁이죠. 교회안에서. 그런데 신앙 바깥에서 기독교를 종교학적으로 현상학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하고 기독교의 고유한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말이 안되죠.  흡사 이런 이야기죠. 사랑하는 사람하고 사랑에 빠진 것이죠. Fall in love. 사랑에 빠진 그 사람을 두고 바깥에서 맹숭 맹숭한 사람이 너 잘못 본거다. 그 두사람사이에 논쟁을 하면 되겠습니까? 안되는 거죠. 퍼즐 예수는 내가 보기에는 아무 의미가 없는 하라 하라 내버려두고 붙들고 심각하게 논의할만한 대상이 아닙니다.

제가 이야기했는지 모르지만 기독교신앙이 고유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활이라고 하는 것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나타나지 않고 예수를 추종하는 사람들 일부에게만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객관적으로설명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러면 기독교 신앙이라 하는 것이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이야기냐 질문도 가능하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편적인 차원에서 보편적인 진리라고 하죠. 보편성 여기서 중요합니다. 보편성. 기독교 신앙이 아주 고유한데 이거는 교회 바깥에서는 그것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방금 예를 든것처럼 사랑에 빠진 사람의 상태를 보면 이상한 것이죠. 사랑을 경험해 본 사람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사랑하는 사람이 대상이 달라지면 그 것을 같구서 논쟁을 한다는 것은 우스운 것이죠. 기독교 신앙이 고유하기는 한건데 그렇다고 해서 다른 세계를 향해서 말할 건더기가 전혀 없는것인가 그게 아닌 것이다. 그건 신학적으로해야 한다.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독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이 교회밖의 모든 세계와 진리론적으로 열려있기 때문에. 강의를 하면서 그런 용어들을 몇번 쓰게 될텐데요 용어를 이해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진리론적이라고 할까요? 진리. 독단하고는 좀 다르다는 거죠. 진리가 뭐냐 하는 겁니다. 기독교가 도그마를 갖고 있기는 하는데 고유한 경험이기 때문에 음악가들의 음악, 시인들의 언어경험처럼 아주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하고 배타적인  경험인 것은 분명합니다.그러나 기독교 신앙이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세계 전체가 하나님의 계시, 그렇다고 하는 점에서 모든 세계 보편적인 거 잖습니까? 진리로 옳다 그르냐 논쟁을 이 진리론 그런 차원에서 대화할 수 있습니다. 아까 제가 예수 퍼즐 논쟁이 안된다고 했는데요 다른 방식으로 논쟁이 가능한 겁니다. 그건 고유한 신학적 영성으로 가능한거죠. 왜냐하면 초기 기독교의 경험이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경험한 부활 그런 것들을 만약에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신비적.. 그렇게 기독교 비판한 사람 프로이트, 니체, 포이에르바하 19세기 많이 비판했습니다. 그런 부분들이 없잖아 있죠. 기독교안에서도. 그냥 좀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떤 공동체든 그런 심리적인 요소들, 종교 현상적인 요소들. 기독교안에 그런 요소들이 없다. 순수 정수한 물처럼 증류수 처럼 아주 순수한 것만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런 불순한 불순하다기보다 본질적이 아닌 요소들이 있지만 그러나 그 중심에는 진리를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진리와 얼마든지 소통이 가능한 경험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진리론적인 문제, 우리 기독교가 진리론적으로 열려져 있다.

(잠깐만요. 전기 난로를 켜 두었는데. 껐습니다. 아파트에는 보일러를 켜니까 연료 낭비. 낮에는 따뜻하니까 밤에는 전기를 더 절약하는 삼파장인가 그런 난로도 있다고 하는데 현재는 전기 난로를 쓰고 있는데 껐습니다. 따뜻해서요.)

교회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신적인 존재요소로만 생각해서 정작 그렇게 나가도 예수님에 대해 하나님에 대한 이해 반쪽밖에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예수님을 일단 온전한 인간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와 다를게 하나도 없는 우리의 인간적인 요소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분으로 일단 그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으로서의 예수라는 다루었는데 이 이야기를 여러분들이 잘 알고 계시죠. 니코스 카잔차기스의 최후의 유혹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그만 두고요. 예수님이 과연 어느정도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을까요? 가깝게 되기 위해서 이런 질문을 드리는 겁니다. 어느정도 까지  인간이고 그 이상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그런 선이 있으신가요? 육체적으로는 우리와 똑 같아 들으셔야되고 화장실 가셔야 되고 조금더 극단적으로 보면 예수님이 음.. 사람들은 다 이성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까요? 그것을 느끼잖아요. 어떤 사람들은 동성에 대해 느낍니다만 일반적으로 말합니다. 이성적인 끌림이 예수님에게 있었을까요? 별로 의미가 없지만 인성을 강조하기 위해 드린 질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세요? 말할 것도 없죠. 그냥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고 부분에 대해서 강조 하고 싶은 것것은 예수님은 온전한 인간성을 가지고 있었다. 총체적인 인간, 어느 한부분에서도 인간적인 면이  허물어 지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분명한 사실입니다.

역사적 예수에서 두 대목을 다루었습니다. 하나는 동정녀 출생 사건, 인간성 문제입니다. 이게 역사적 예수를 이해하는데 차근차근하게 고대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부분은 아닙니다만 고러한 항목들을 익혀 주시기 바랍니다. 사실은 제가 말씀드릴 필요는 없는데 다 어느정도 생각하고 있는데 그런 것들을 정확하게 짚고 있는 중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서 우리가 다음으로 집어야 할 것은 출가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서른살 쯤에 출가하셨다고 하는데 서른살 인지는 몇 살인지는 정확한 것은 모르는데요. 누가복음 3:23 요걸 기준으로 했는데 옛날에 썼기 때문에 다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이재철 목사님 어느 설교 사십대 중반에 출가했다하는 말씀하시는데 복음서에 오십살 즈음 구절을 근거로해서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30세쯤에 출가하신 것을 우리가 알고 있고 그러한 정보가 조금씩 있긴 있는데요. 그전의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서는 성서기자들이 아무런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 받으셨겠죠. 목수입니다. 예수님이 서른살 즈음 되었다고 한다면 나이가 많은 것인데요. 장가를 가도 몇번 장가를 가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 서른 살 크게 틀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때까지 예수님께서 결혼하지 않으셨다는 사실. 결혼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성서에서 명시적으로 나오기는 하는가요? 우리가 그렇게 알고 있는데요. 어쨌든 예수님이 서른까지 가족들과 머물러 있었다는 것은 아버지 요셉이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가족들을 돌봐야 여자동생들은 다 시집 갔을때고 남자동생들도 거의 다 자립했을때라서 어머니를 동생들에게 맡겼을 수도 있고 집을 부양한다는 의무를 벗어서 그런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출가하기 이전의 삶이 특별하다 그런 구절들이 예수님이 동네 사람들에게 평범한 젊은이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활동을 하시니까 동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한 겁니다. 어떻게 이따 친구의 가족들 동생들 예수님 고향에서 별로 인정을 받지 못했구요. 심지어는 바알세불에 짚였다는 고향의 친척, 친인척들 동네 사람들이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좀더 엄격하게 본다면 예수님의 가족들도...

(질문이 있어서 제가 잠간 보는 겁니다. 인간성과 죄문제.. 좋은 것을 기억하셨네요. 예수님의 인간성과 죄문제. 좋은 질문을 하셨네요. 좋은 질문이라고 하는 것은 제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이야기하려면 옆으로 나가지만 잊어 버리지 않기 때문에 제가 잘 모르기때문에 스쳐 지나가면서 한마디 신 부분을 좀 접어 둔다고 한다면 온전한 인간이라는 육체적인 한계. 목마르고 힘들고. 그렇다면 죄성도 들어가지 않느냐? 그런 문제들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그런 뜻인것 같습니다. 이런 문제를 풀자면 그 문제만 갖고는 안됩니다. 다른데도 말씀드렸듯이 기독교 신앙들은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죄 칭의 창조 하나님 나라가 따로 되어 있는 것 같지만 중복되어 있습니다. 층층히.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해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인간성과 죄가 뭐냐 우리가 알아야 한다. 탐욕, 음욕, 간음, 도적질 그런 것이 죄라고 한다면 예수님이 당연히 그런 것이야 없죠.

원죄 죄론 공식처럼 박혀 있습니다. 원죄는 우리가 어떻게 용서받고 자범죄는 반복해서 용서를 받아야 되고. 근본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걸로 모든 대답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 구약성서와 신양성서가 죄문제를 이야기했는지 근원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아담때문에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가 짓는 모든 죄가 내 책임 아니라 결국 아담으로 가게 되거든요. 원래부터 원죄개념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다른 결정되어서 어느 상황속에서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문입니다. 문이 상황이 다르면 조금 다릅니다. 원죄에는 주로 어거스틴때부터 나온 것인데요. 어거스틴하고 서로 대적되는 신학도 있죠. 누구죠?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한 유명한 펠라기우스. 펠라기우스는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죄를 말하기는 하지만 원죄에 무게를 두지 않고 죄를 이야기 하지만. 이런 문제들이 포괄적이고 다층적. 맥락이 있다는 것 그 맥락속에서 그런점에서 온전한 인간 죄 할수는 있는데 고것만 갖고는 대답하기 힘들다. 이 질문에서 말하는 죄가 무엇이냐는 것은 전이해가 있은 다음에 설명이 가능할 것입니다. 하여튼)

고향에서도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어렸을때 출가하기 전에는 비범한 메시아적인 특성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봐야죠. 가족들도 바알세불 짚였다 친인척들과 예수님의 가족들을 예수님을 붙잡으러 온 적이 있었죠. 마가복음 3장. 출가하기 전에 예수님에게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고 봐야 하겠죠. 아무것도 없었다면 그것도 좀 시원한 답이 되지 않는군요. 그러면 왜 예수님이 출가하셨을까? 지금 저는 여러분들에게 신앙을 더 좋게 해 드리기 위해서 이런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두번째 문제고 기독교라고 하는 그 실체안으로 인문학적으로 좀 들어가 다 열어놓고 질문할 수 있는 부분들은 다 까놓고 질문하는 것이 일단 중요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다 정리해서 소화시키는가 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지만요. 지금 그런쪽으로 여러분들을 모시고 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러한 것에 대해서 평소에 질문하신분도 계실 것이고 교회에서의 가르침에만 머물러 계셨던 분들은 불손하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겠죠.

출가하시기 전에 본인스스로 뭐를 생각하셨을까요? 본인 스스로 메시아라는 생각이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복음서에 의하면 어렸을때 이야기기 한두군데 나오기는 하지만. 열두살때 예루살렘 방문한 이야기 조금 있기는 하지만 어렸을때 일을 누가 딱 적어두었다가 보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객관적 사실이라기보다 신앙적 고백이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서른 살 즈음해서 집안과의 관계를 끊고 나가시죠. 출가하십니다. 그때 아마 그 예수님에게 어떤 충격이 왔을지 어떠한 하나님 경험이 있었을찌 그런 것들은 성서가 잘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말하기 참 곤란합니다. 예수님 스스로 천사를 보내서 어떻게 하라고 했다 내가 사명을 받아서 어떻게 했다. 그런 이야기들이 별로 없죠. 예수님이 출가하신 다음 광야에서 사십일동안 금식하시면서 유혹을 받은 것이 나옵니다만 다른 종교 창시자들이나 이런 사람들은 옳은지 그른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종교 창시자들은 뭔가를 봐요. 예언자들도 그렇게 하는데요. 예수님의 출가사건에는 그런것 들은 없지요. 물론 요한복음에서 나중에 아버지.. 나는 들은 것을 본것 다른 계시를 받은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조금더 변증하는 쪽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공관복음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서 아시죠. 그래도 참고적으로. 공관복음서와 제4복음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은 제일 늦게 쓰여 졌고 신학적이고 가능한대로 예수님의 사건들을 객관적으로 서술할 공관이라고하는 말은 synoptic 마태마가누가복음은 예수님을 비슷한 관점에서 보았다고 한다면 요한복음은 전혀 다른 관점입니다. 헬라철학의 개념을 많이 빌려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죠.

공관복음서만 본다면 예수님이 내가 어떻게 어떻게 하나님에게서 자기 설명이 없죠. 다른 종교인들은 그것이 많이 나와요. 신화적으로 그런 것들을 많이 이야기하는데 예수님은 그게 없어요. 그냥 선포 하는 거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다. 죄가 용서 받았다. 이렇게 하십니다. 전혀 다른... 일반 종교 창시자들과 예언하고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마호멧도 아마 자기가 받았다고하는 자기 증명이 많은 것 같습니다. 내가 어디서 무엇을 했다고 하는. 이 문제는 제가 자신 있게 말할 부분들은 아닙니다. 그런 차이가 있는 것이 보이네요. 예수님이 출가하는 전과 후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언제 메시아적인 정체성을 확인하게 되었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다음은 세례요한과 예수. 예수님의 출가 문제와 세례요한하고는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습니다. 그냥 역사가적인 관점으로만 본다면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먼저 출가한 세례요한에게 많은 영적인 자극과 도전을 받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세례요한을 따라서 출가한 거라고 볼 수 있죠. 물론 복음서는 세례요한이 엘리야처럼 메시아가 오기전에 길을 예비할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상당히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과의 관계. 기초적인 상식은 여러분들이 잘 알고 계시니 설명할 필요없죠? 엘리사벳과 예수님의 어머니사이에는 친족간이었구요.

세례요한에 대해서 우리가 길게 끌지 맙시다. 그는 헤로디아 때문에 헤로디아와 헤롯하고 결혼한 재혼한 거죠. 제수씨하고 결혼하게 된 것인데 그걸 공개적으로 비판했다가 감옥에 갇혔고 그리고 (살로메) 조카죠 인제 자기 딸이 되었습니다만 춤출때 뭐든지 원하기만 하면 주겠다 세례요한의 목을 받았습니다. 헤로디아의 충고에 따라서 살로메가 그걸 원하게 되었죠. 그 당대의 최고의 영적 거인이 이러한 여인에 의해 이러한 것으로 인해 죽었다고 하는 것이 역사의 비극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네. 세례요한은 그 당시 에세네파 공동체 일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정이 있습니다. 상당히 금욕적이고 엄격하고 도덕성 강조하고. 쿰란. 왜 쿰란 공동체라고 하는가 하면 이 에세네파들이. 아 지금 내가 정확히 기억이 안나네요. 하여튼 일단 요것을 읽어보겠습니다. 제가 써 둔거요. ‘쿰란 공동체는 로마식민지하에 있었던 모든 체제와 질서를 부정하고 사회로부터 완전히 분리하여 자기네 순수 공동체를 형성하여 에세네파라고도 불리는데 이들은 도자기를 굽기도 하고 성서를 필사하면서 먹고 살았다.’ 이들이 남긴 문서들이 많이 있습니다.

유대교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공동체밖 광야에서 생활하고 2년동안 시험을 거친 다음에 회원의 자격이 주어졌다. 엄격한 수도원과 같은 단체, 공동체였습니다. 유대교안의 극단적인 금욕주의적 공동체였습니다. 바리새파 또 다른 공동체였습니다. 상당히 많은 갈래들이 유대교 안에 있었습니다. 로마카톨릭도 여러분들이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그안에 갈래가 많이 있습니다. 수도원도 많이 있구요. 그들은 하나님 뜻을 따라서 빛과 아들들을 사랑하고 어둠의 자식들을 증오해야 할 임무를 띠고 살았다. 그만큼 이 세상을 선과악의 대립으로 보았다고 하는 것이다. 선과악의 이원론적인 관점이 있네요. 헬라적, 영지주의적인 영향도 있네요. 영지주의는 당시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들에 대한 정보는 1947년 사해동굴에 두루마리 동굴의 쿰란문서들은 금욕적인 삶을 주제로 하는 요한의 삶과 비슷한 점이 많다. 게르트 타이센이라고 하는 독일 학자 ‘갈릴래아 사람들의 그림자’라는 책을 참고해서 인용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세례요한과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한 소설책도 있을 거구요 거기에는 많은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살로메, 헤로디아 관계들, 헤로디아가 요한을 사랑했다. 그러한..연.. 그랬는데.. 유혹했는데 실패해서 그게 증오로 바뀌어 세례요한을 결국은 죽인게 아니냐 그러한 흐름의 소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완전히 개연성이 완전히 없는 것이 아니지만요.

감옥이 갇혔을 때 제자들을 시켜서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냐? 기다릴까요? 메시아냐 그런 이야기죠. 일종의 메시아 운동입니다. 그 당시 메시아 운동이 크게 일어났습니다. 사이비 메시아도 많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할 그런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큰 운동 속에 예수님도 하나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는거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 예수님의 사건도. 세례요한이 그것을 물었습니다. 다른 이들을 기다려야 하나. 예수님은 바로 내가 바로 그다 라고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만약에 본인이 메시아라고 하는 확신이 있었다면 그렇다라고 이야기를 하셨을텐데 왜 그러셨을까요? 제자들에게도 내가 메시아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비슷하게 이해할 수 있는 진술들이 조금 나오기는 하지만.. 아니었어요. 왜 그랬을까? 예수님이 자기 자신이 메시아성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그랬을까? 주변 사람들이 생각하던 메시아관과 예수님 스스로 생각하던 메시아관이 달라서 그랬을까? 복잡한 문제입니다. 여러가지가 복합되어 있었겠죠? 이 문제는 예수님이 세상을 떠날때까지 계속될 문제였을 것입니다. 과연 내가 선포한 나라가 옳으냐? 하나님의 권위를 내가 갖고 하는 것이냐? 그러한 거 말이죠. 그러한 증언이라고 할까. 그런 것들이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이 그렇게 불안하지 않게 미리 답변을 좀 드려야 되겠군요. 저는 예수님이 그렇게 불확실하다 자기 메시아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런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라고 하는 것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의 과정속에서 일어난 큰 구원사건이다 그걸 말하고 싶어서 이렇게 자꾸만 빙빙돌리면서 이야기합니다. 인내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속 시원하게 딱 부러지게 이야기 하지 않잖아요. 그러나 불안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말씀드리려고 하는 전반적인 맥락은 좀 더 확신을 갖고 딱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증명서 마패를 가진 것처럼 증명서를 가진 게 아니라 꾸준한 하나님관계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행동하신 분은 하나님이신 거죠.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선택하고 그게 무조건 그렇게 된 것은 아니고 예수님이 거기에 될만한, 말표현이 정확하지 않는데.. 메시아로서의 가능한 어떤 것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말하는 것이 힘들죠. 피곤하기는 피곤한가 보네. 말이 앞으로 나가지 않고 뱅뱅 도는 것 같습니다. 일단 말은 전달되기는 하나요. 문자가 하나도 없어서. 한두 사람만 전달되었으면 되었습니다.) 거기에 큰 덩어리가 있습니다. 그거 안에 수많은 사연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사연을 여러분들에게 하나 하나 딱딱 끊어서 스케줄에 따라서 설명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할 그런게 아니기 때문에. 어떤 것 앞에 있고 뒤에 있고 앞에 있었다고 해서 무조건 앞에 있는 것이 아니고 앞과 뒤가 서로 연관되면서 예수가 우리와 똑같았던 인성을 가졌던 그 예수님이 베레데우스 참된 하나님의 사건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칼 자르듯이 딱 집어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세례요한이(벌써 시간이 다되었군요. 음..) 오실 그이가 누구입니까 것에 대해서 나는 맞다 내가 바로 네가 기다리던 누구다 라고 대답하지 않았고 제자들에게도 오히려 당신이 예루살렘에 가서 그런 어려운 일이 일어나서 안됩니다 당신은 메시아 입니다. 구원해야 합니다 하였을때 사탄은 물러가라는 말씀이 있었듯이 예수님은 최소한도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메시아하고는 전혀 다른 분이었습니다. 그당시 메시아 운동의 흐름속에 있긴 있었지만 그 흐름과는 질적으로 다른, 어떤 분이었고 어떤 사건에 휩싸인 분입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대답하죠. ‘보고 들은 것 보고 들은 것 가서 말하라. 소경이 보고 앉은뱅이 일어나고 가난한자에게 복음이 선포된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중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ㄴㅣㄷ. ‘나는 망해야 되고 그는 흥해야 된다’ 요한 복음에 나오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것 책들이 있습니다. 조금더 전문적으로 아시고 싶으시면 책을 참고하시길 바라고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면 되겠네요. 세례요한까지 입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 사이에 여러모로 통하는 점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요한의 선포와 예수의 선포, 요한의 택한 길, 예수의 것은 상당히 달랐다. 두분 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것은 옳다. 그런데 내용은 다른 거죠. 세례요한은 금욕적이고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고요.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할 정도입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왜 당신은 금식하지 않냐? 종교적인 지도자들 경건한 사람들은 당연히 금식해야 하는데 왜 안하냐 이런 말을 보니까 당신의 제자들. 예수님은 했는지 안했는지 모르고. 제자들이 하지 않으니 따졌습니다.

설교의 내용도 달랐습니다. 세례요한은 사람의 구체적인 도덕적인 죄를 이야기했지만 예수님은 덮어주고 용서해주라 요한이 심판을 이야기했다면 예수님은 용서와 사랑. 예수님도 천국이 가까왔다 회개를 이야기했지만 메타노이아 이말이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쓰는 용어가 다릅니다. 예수님에게 메타노이아, 회개, 메타노이아라고 하거든요. 헬라어. 예수님에게 회개는 하나님을 향해서 방향을 트는 존재론적 변화입니다. 존재라고 할 때 이것은 행위하고 연관되는 문제, 존재와 행위의 문제입니다. 본회퍼의 유명한 책이 있는데 자인온트아트. 존재와 행위. 그게 뭘까요? 도대체 존재론적 변화라고 한다면 우리가 어떤 노력을 통해서 달성할 수 없는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 가능한 어떤 변화를 이야기한다면 행위와 도덕적 변화는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해서 가능한 것들인거죠. 칭의라고 보통 이야기하잖아요.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한다는 것 존재론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우리가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거기서 말하는 의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죠. 어떤 노력을 통해서도 가능하지 않는 것이죠. 하나님을 그렇게 인정하는 것이거든요. 그것도 정확한 표현은 아닌데 일단 고런 정도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존재론적 변화, 하나님께 영적인 변화. 근본적인 근원적인 변화 존재론적 변화 하이데거 철학적으로 이야기하면. 그거죠. 9어떻게 해야 될까요. 아이. 그냥 나가죠.) 요한의 선포한 회개는 실제적인 삶에서 정의로와야 한다는 윤리적 변화를 담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여기서 많은 설교자들의 혼동이 있습니다. 교양있는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고. 우리가 변화해서 도덕적인 주도권을 확보하자. 이러한 것이 다 요한식의 하나님의 나라라고 한다면 예수님에게는 그건 아니예요. 그냥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죄인이든 세리든 그에게 하나님 나라가 임박해 있다고 하는 사실 그거를 알게 하자는 것이죠. 그걸 알게 하면 사람이 변화하는가 변화할 수도 있고 않을 수도 있어요. 실제로 하나님나라에 직면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떠냐? 예. 그건 변화해야 되겠죠. 그런데 그 변화가 뭐냐는 것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예수님께는 도덕적 변화보다 더 궁극적인. (도덕적인 변화는) 그건 우리가 노력하면 되요. 자극을 주면 되요. 당근과 채찍으로 사람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사법고시에 합격할 수 있어요. 그러나 우리의 마음의 변화, 존재의 근거의 변화는 이거는 안되는 거든요. 예수님께서 도덕적 변화를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신 것은 아니지만 더 근원적으로 인간을 살리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이미 사랑으로 임박했다. 그 은총이다 선물이다 그거를 아는 것이죠. 충만하게 임하는 것이죠. 내 스스로 뭔가 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상관없이 임했어요. 생명의 나라, 자유의 평화, 종말의 나라가 임하는 것 그쪽으로 마음을 돌리는 것 메타노이야, (회개인거죠). 이게 혼동되면 예수믿고 예수믿는 사람답게 살아야지 나쁜 이야기는 아니지만 별로 핵심을 잡은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문장-민중들은 요한도 죽이고 예수도 죽였다. 요한은 의로운 심판을 외치다가 먼저 죽었고 예수는 보편적 사랑을 외치다가 3년후에 죽었다. 정의를 외치듯이 사랑을 외치든지 사람들은 다 좋아하지 않습니다. 버겁고 귀찮으니까요. 지금도 계속 반복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여기까지 되었는데요.

질문- 기억하고 있다가 기회가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한두마디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질문이 있으면 동영상 강의에. 주일날 저녁. 시간이 있으시면 월요일. 다음 주 목요일은 특강. 다른 질문?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