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3일 질답 시간  

(탁구공, 태양 그리고 하나님)
태양 비교 지구는 어느 정도 크기가 될까요? 태양을 탁구공 크기만하게 본다면 지구는 어느정도 크기가 될까요? 좁쌀은 너무 작구요. 쌀알 정도 된다고 합니다. 쌀이 길쭉하게 되지만 둘레를 보면 지름이 2미리, 3미리 될까요? 지구는 쌀알. 굉장히 큰 차이가 나죠. 엄청나게 크고 엄청나게 작은데.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하면 숫자상으로 보면 1억5천만키로, 태양빛으로 9분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1키로 3키로 날아가는 초속으로 그렇게 걸린다고 하는데요. 쌀 한알 정도로 비교한다면 1억 5천만키로 떨어져 있다. 이 길이가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요? 쌀도 크기를 축소하고 태양의 지름은 지구의 109배. 네 그 정도 되겠네요. 쌀 한 알이 되겠네요. 더 될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이렇게 축소시켜서 봤을때 쌀 한알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요?

제가 시작하기 전에 종이로 계산을 좀 해봤습니다. 정확한지는 모르겠는데 12미터요. 그냥 조금 넉넉잡고 10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고 보면 되겠네요. 생각해 보세요. 떨어져 있는 것이 10미터라고 한다면 제가 있는 아파트 이쪽 끝에서 저쪽끝까지 10미터 정도 되겠죠. 이정도 크기로 10미터라고 한다면 굉장히 멀지 않습니까? 태양의 지름으로 따지더라도 상당히 먼데요. 지구의 지름으로 계산해서 그러니까.. 만2천번을 지구의 지름을 해야 태양에 가게 됩니다. 계산해 보니까. 하여튼 그러네요. 네 그렇군요. 만2천번. 어쨌든. 제가 지금 왔다 갔다 하네요. 제가 계산해둔 것으로 본다면 한 10미터 정도 떨어진다고 봅니다. 굉장히 멀죠. 생각보다요. 설교하면서 예를 든 게 태양이 사방팔방으로 에너지를 발산하는데 10미터 떨어진 곳에서 지구가 받는 에너지 양이 태양 전체가 발산하는 에너지의 과연 몇프로가 되겠는가? 수천만분의 1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 에너지도 우리가 지구에 오는 고 아주 작은 부분, 그것도 우리가 다 사용하고 있지 못하다. 굉장히 멀잖아요. 요게 태양이라고 생각할때 10미터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수금지화목토천해명. 명왕성까지 간다고 한다면..명왕성은 태양계 안에 있는 행성의 자격을 잃었습니다. 물리학자들이 넣다 빼었다 하는 것 같아요. 개념이 정확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게 행성일수도 있고 아님 혜성일 수도 있구요. 자격심사를 하다가 몇 년 전에 수금지화목토천해명 그가족에서 뺐다고 그러네요. 모르지요. 나중에 또 들어올지. 지구까지도 10미터 인데 천왕성 명왕성 최소한도 100미터 떨어질걸요. 정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만. 100미터 떨어져 있는데 태양이 붙들고 있는거예요. 햇빛이 그렇게 가는데 아마 해왕성에서는 태양이 아주 작게 보일 겁니다. 우리가 다른 별을 보듯이 그것보다 크게 보이겠습니다만 작게 보이고 늘 거기는 어둘거예요. 햇빛이 거기까지 닿기가 몇달 걸리지 않겠습니까? 이 태양계라고 하는 이 평범한 별안에 있는 관계, 이것도 놀랍다. 이게 도대체 뭔지 이해하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초등학교 다니면서 선생님들에게 우주에 대한 설명을 듣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그림을 그릴때 선생님들이 너무 주먹구구식으로 그리는 것 같아요. 태양을 그리고 옆에 좀 떨어져서 지구도 크게 그리고 그래서 그린 것이 태양하고 지구하고 차이가 있더라도 별로 차이가 거리감각이 없어요. 이것을 아주 실감있게 아이들에게 가르쳐주어야 아이들이 머리속에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되거든요. 개념적인 설명이 없어서 -실증적인 것은 우리가 확인할 수 없으니까- 얼마나 큰지 작은 그런것이 없어서 태양이 있더라도 저건 남의 이야기처럼요. 그 별에 대한 설명을 듣더라도 그게 뭔지 잘모르죠.

제가 이야기를 했습니까? 가끔 신학대학에 들어가 학생들에게 가끔 가다가 그런 질문을 하거든요. 태양하고 별하고 가장 큰 차이점이 뭐냐고 물으면 의외의 대답이 많이 나옵니다. 태양은 빛을 발하고 별은 반사시킨다. 초등학생 대답 비슷하게 대답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많이 대답합니다. 그러니까 대학생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와 태양과 우주의 관계에 대해 최소한의 상식도 없다고 하는것. 대개가 정확하게 아는 대학생들이 별로 없더라구요. 이런 것들은 어렸을 때에 어떤 공부가 개념적으로 명확하게 들어가지 않고 산만하게 정보차원에서 흩어져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거는 원소를 설명할때도 그러더구요. 머리속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원소를 그릴때 선생님이 동그라미 하나 그려놓고 H2O 수소두개 산소하나. 물분자 이렇게 그려놓고 원소도 핵이 있고 전자가 몇 개냐 뭐 이렇게 대충 그리기 때문에 물분자 속에 원소가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머리속에 그게 들어 있습니다. 원소도 마찬가진데 모든 원소의 질량을 가지고 있는 핵이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죠. 이해하고 다시 들어주세요.

그렇게 비교하더라구요. 큰 고딕식 성당이 있는데 성당 안에 찬송가가 있다. 찬송가를 펼치면 콩나물 대가리 하나가 나온다. 큰 성당안에 있는 콩나물 대가리 하나가 원소의 핵이다. 그러니까 원소는 고딕식 건물에 비교된다고 하는 거죠. 원소의 질량 모든 무게를 다 갖고 있는 핵이 실제로 보기에는 아주 작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모든 데는 다 빈공간이라고 하는 겁니다. 잘 모르는 물리학을 이야기해서 미안합니다. 상식적인 건데요. 상식적인 것마저 젊은 학생들에게 정리되지 않는 것 같고 일반인들도 마찬가지죠. 착각이 있는가 아닌가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선생님들이 그림을 그릴 때 머리속에 확실한 개념이 있어야 아이들이 오해하지 않게 그리는데 선생님들이 배운대로 그리고 점찍고 그렇습니다. 우주에 대한 것도 그렇고 작은 원소나 분자에 대해서도 그렇고 그런 것을 보면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에 대해서도 제가 보기에는 숱하게 많은 정도가 잘못알고 있는 것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지 않는가 싶습니다. 어렴풋하게 알고 있는 것이 하나님을 딱딱 집어서 사실조차를 이해못하고 있는 것이죠. 태양의 크기하고 쌀 알만한 지구의 관계를 머리 속에 어느 정도 넣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는 것처럼. 거리가 엄청나게 멀다고 이 사실이 맨날 우리는 앞에 태양이 빛나고 있으니까 가깝게 느끼는 거죠. 멀고 그냥 정말 우리가 살아가는데 생존의 절대적인 조건인데도 남의 것처럼 그건 아주 먼데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지금 당장 내가 돈을 벌어서 어떻게 사는가 친구와의 관계라든지 사소한 일들에 모든 영적 에너지가 소진되고 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해하지는 마세요. 지금 당장 우리가 먹고사는 문제, 친구와의 관계 뭐 이러한 것들이 중요 하지 않다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이런것들이 더 근원적인 토대, 우주론적에 그런 것들에 대한 충분한 충분하기보다는 이 순환이군요. 작은 부분들과 큰 부분들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야만. 내가 태양의 아들, 실질적으로 태양에너지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서 일상에서도 우리가 기본 토대는 망각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에 대해서도 내가 보기에는 이렇게 오해하는게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요. 이게 중요한 것인데 어쩌면 사람들이 중요하지 않다고 자꾸만 생각하거든요. 다 도대체 먹고사는데 태양의 거리가 1억5천만키로가 떨어져 있다는 것과 태양에서 또 하나의 태양까지 가는데 2-3광년 걸린다고 하는 사실이 우리의 삶에서 뭐가 그리 중요하냐 생각할 수 있습니다. 꼭 알아야만 우리가 의미 있게 사는 것이 아니구요. 그러나 그런 우주 cosmology 우주에 대한 것 이러한 이해가 우리의 삶의 바탕이 되면 우리가 아주 작은 일에서도 연결되기 때문에 영적 dynamic 혹은 생명의 dynamic 혹은 역동성, 생명력 그런 것들을 풍부하게 가질 수 있습니다. 제가 탁구공하고 비교해서 설명하니 선명하게 다가오죠? 알고 계신 분들은 저보다 더 설명을 잘하실 분이 계실텐데 미리 이해를 해주십시오. 태양이라고 한다면 우리 지구가 10미터 떨어져 있다면 무지무지 먼거린데요. 명왕성 수백미터 떨어져 있다. 끔직한 거리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태양을 중심으로한 가족을 이루고 있을까? 이것 생각하면 아찔하기도 하고요.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당장 밥 먹여주는 것이 아니지만 명확하게 오잖아요.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런 개념을 착실하게 해나가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개념을 정확하게 한다고 하는 것 컨셉이거든요. 이게 많은 경우에 성경공부도 그렇구요. 설교도 그렇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요. 이거 틀림없습니다. 대신 뭐에 관심이 있는지 대답이 나오죠. 사람에 대한, 자기자신에 대한 관심입니다. 자기연민,  그게 아니면 이웃 동료를 향한 sympathy, solidarity 라도 좋습니다. 그게 무의미하다는것이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없어도 신앙이 가능한 것, 이게 인제 우리의 모습인거죠. 제가 앞에 말씀드린 것과 연관 시킨다면 우주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어도, 우주는 다른 차원에서 역사의 문제요. 인류의 역사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어도 없을수록 예를 들자면 오늘 주식투자해서 얼마를 벌고요. 내 아이들이 영어 몰입시대가 되었는데 어떻게 영어를 잘 가르칠 것이라든지. 경쟁력이나 이런 것들에 몰두하면서 경쟁력있다 인정하기도 하구요. 그런 것들이 우리들의 삶에 실질적으로 나타나는 효용성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여기에 파묻혀서 삽니다. 어떤 사람들은요 여기서 벗어나려고 노력합니다. 다비아에 들어오신분들은 대개다 그렇게 노력하는 줄 압니다만 그러나 그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개념 이해가 없어도 신앙생활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지금까지 설교비평을 하면서 다른 분의 설교를 들은 결과를 말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없으면 없을수록 설교의 파급력은 많구요. 신자들은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은 듣지 않습니다. 동의하시죠? 일단 듣지 않고 골치아프다고 생각합니다. 신학자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우주 이야기는 모르면 어떠냐 하는 식이냐 하는 것처럼 하나님에 대해서 몰라도, 신자들은 모를수록 더 재미있게 신앙생활합니다. 자기들끼리 뭐가 되거든요. 교회에서 학생회, 성가대 봉사도 해야 하구요. 좋은뜻으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목장을 관리도 해야 하구요. 그것을 확인해가면서 신앙생활이 얼마든 가능하고요. 기독교 신앙이 굉장히 실존적이 되었습니다.

오늘 설교 주제이기도 하기도 하네요. (차를 마시더라도 이해해 주십시오. 홍찬데요. 여러분도 한잔 드십시오.) 오늘 설교는 베드로 후서 1장에 나와 있는 말씀인데요. 사실 설교시간에는 그걸 다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배경이 많이 있어서 설교시간에는 가능하면 압축해서 꼭 필요한 부분만 이야기하구 그래도 그 안에서 기독교 영성이-어떻게 하나님의 영이 활동하셨냐 초기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그걸 받아들였냐 거기에 중심이(베드로 후서 설교에 들어가면) 비잉도니까 간단하게만 말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권능과 재림, 강림 파루시아 parusia. 헬라어로 나오는 군요. 뒤나미스, 권능에 대한 이야기가 신화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질문: 세례와 성찬식에 대한 질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만 성찬식에 참여하는데,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은 성찬식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 성서적인 견해인가요?  초기기독교이후 성찬식이 어떻게 시대마다 행하여졌는지 궁금하네요?) 샘터 교회 성찬예식에는 어린아이까지 다 참여하는 걸로 했습니다.

파루시아. 헬라어로 되어 있는 겁니다. 재미있죠? 신약성서가 왜 헬라어로 쓰여졌을까요? 성서 기자들은 다 유대인들인데. 답은 여러분들이 알고 있습니다. 신약성서를 받아볼 사람들이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라고 한다면 히브리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지만 예수님 당시에 히브리어는 죽은 언어였습니다. 아람어를 썼습니다. 그 지역이 제국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했거든요. 구약 성서에 계속나오고 있고 세계 역사에 나오고 있는 것들인데요. 팔레스타인 히브리인들이 영향을 받았구요. 히브리인들이 독립국가를 유지 한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다윗과 솔로몬 시대밖에 없었죠. 별로 떳떳한 역사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죠. 떳떳하기 보다 자기나라 말과 문화 잘 보존할 위치는 되지 못했습니다. 웬만한 히브리어는 제사장이나 전문적인 종교인들이 알아야할 학문이나 종교활동으로, 문서로 남겨진 것이지 실제용어로서는 다 죽었습니다. 헬라어, 아람어, 아람어를 이 사람들이 썼지만 바깥지역에는 헬라어로 지배된 시대였기 때문에 헬라어로 성서를 기록했습니다.

파루시아, 예수님의 강림문제를 신화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거죠. 그런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없어도 신앙생활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건강하지 못한거죠.

내가 이야기를 조금 어느쪽으로 확 끌고 가려고 생각을 했었는데 여기서 막히네요. 괜히 설교쪽으로 들어갔다가 어떤 어떤 이야기가 필요한데 머리로 생각하다 흐름을 놓쳤네요. 차나 한 잔 마셔야 하겠네요.

성경 지도를 하거나 설교를 하거나 지도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좀 정확하게 이해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까 제가 어렸을 때 자연 공부시간에 선생님들이 원소설명이나 우주 설명을 주먹구구식으로 해서 학생들에게 개념적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림으로 들어가 있어서 상황을 오해하게 했던 것처럼 많은 경우에 교회지도자 되시는 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이 있다 하나님이 창조했다 그러한 주먹구구식이죠 말하자면.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죽어있는 정보만 갖고 있다는 겁니다. 죽어있는 정보에 머무는 그러한 지식 말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방식으로만 잘 모르는 선생이 정말 모르고 있는 학생들에게 잘못 가르치면 학생들에게 오히려 배움, 앎을 이런 것을 막는 것처럼 신앙에서도 많이 그런 것 같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관심을 거기에 두고 그 쪽으로 집중하는 그러한 교회, 설교나 공부나 그런 것이 되어야 되지 않겠느냐? 그런 거였습니다.

(성찬식과 세례)
문자 주신 분 감사하구요. 말이라고 하는 것이 참 그러네요. 어떤 흐름을 놓치지 말고 쭉 가야 되는데 그게 계획했던 것들이 아니거든요. 실을 풀어가는 것처럼 따라가면서 풀어서 여러 가지 가능성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고 가고 자꾸만 그렇게 막물려 가야 하는데 어느 순간엔가 그게 끊기게 되면 다시 자리를 찾기가 조금 쉽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성찬식과 세례. 세례 받는 사람만 성찬식에 참여해야 된다는 이야기는 교회법에 나와 있습니다. 교회 전통이기도 합니다. 사도바울이 성찬예식을 함부로 준비 없이 먹고 마시지 마라. 그리스도의 몸을 범하는 것이다 그런 경고도 하셨구요. 성서가 세례 받지 않은 사람이 성찬식에 참석할 수 없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교회의 질서를 위해서 오랜 전통가운데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초기교회에서도 성찬식이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 나오는데요. 교회와서 먹고 마시는 일이 나와 있습니다.

그당시 성찬예식이 두가지 였습니다. 하나는 예찬식 아가페,  유카리스트 성찬예식입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행하는 기독교 신앙에 들어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것이죠. 아가페 애찬식은 조금 느슨한 사람들까지 같이 밥을 같이 먹는 것입니다. 두개 다 성찬예식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문제가 벌어졌냐 하면 밥을 같이 먹는 애찬식에서죠. 부자들은 넉넉하게  가져와서 좋은 음식 가져오고 자기들끼리만 먹은 것 같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와서 좀 따돌리는 것이죠. 집에서 형편없는 것을 가져왔는데 조그만것 갖다두고 부자들의 좋은 것 먹으려니 눈치 보이고 하니 왜 이러느냐 너희들끼리만 따로 먹으면 어떻게 하느냐 그런 애기를 했구요. 또 한편으로는 어떤 사람들은 교회 나오는 것을 먹는 것을 목적으로 해서 나온 것 같아요. 먹고 취하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교회 나오는 것들이 먹고 마시려고 나오냐 그러한 충고도 주었습니다. 그런 것을 기초로 해서 교회가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만 성찬예식을 하는 전통을 세웠습니다. 꼭 절대적인 것 교회에 따라서 열어 놓은 데도 있고 닫아 놓은 데도 있습니다. 교회 형편에 따라 좀 다르겠죠.

우리 신앙이 하나님에게 더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좀 이야기를 해야 하겠습니다. 아까 말하려다 끊어진 것이 사실 그것이었는데요. 제가 탁구공을 가져 나온 것이 태양을 비교하려고 한 것이었는데요. 이런것을 아는 것들이 우리 일상에 직접적이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닌거 처럼 생각하지만 그러나 실제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처럼 하나님에 대해서도 깊이 신학적으로나 성서조직으로-용어를 쓰는 것에 조심스러운 것은 (성도들이) 신학적이다 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람어-아람나라 시리아어입니다. 고 지역에서 썼던 용어들이 상당히 오랫동안 통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더 자세하게는 모르니까 인터넷을 두드려 보시죠.)

철학, 신학은 말하자면 철학이나 마찬가지죠. 어떠한 궁극적 현실에 대한 ultimate concern, ultimate reality 라고 해도 좋구요. 그런 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논리적 해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궁극적 현실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굉장히-이게 일반 신자들은 굉장히 거리가 멀게 느껴지거든요. 사실은 그렇습니다. 어떻게 이런 것을 잘 설명해는 것이 사람의 사유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지금까지 철학이 한국사회에서 따돌림을 받고 있다고 하는 인문학의 위기라고 하는데 인문학자들의 책임 입니다. 인문학자들이 인문학적으로 살지를 않았거든요. 좀 배고파도 근본적인 진리를 향해 나가야 하는데 인문학을 살려달라고 하면서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돈이라는 것이었다는 거죠. 정부 예산 많이 따자. 도움이 될지 그렇게 해서 인문학이 살까요. 안하는 것보다 낫겠지만 조금더 노골적 나눠갖고 그 프로젝트도 연관되는 사람들이 있어서. 신학도 인문학이라서 그렇습니다. 국가에서 몇천억원을 예산을 확보해두면 배분을 해야 하는데 사람이 하는 것이거든요. 누구에게 이걸 주느냐? 어느 대학에 어느 프로젝트 누구에게 주어야 하는 것을 결정해야 하거든요. 감을 잡을 겁니다. 힘있는 사람들, 서울대학이나 끝 발이 있는 쪽으로 가죠. 잘 쓰여지면 좋겠지만 결과가 나기는 하는데. 인문학자들 먹고 살 길이 없기 때문에 호구지책으로 그렇게 하는 경우도 있구요. 정말 필요하지 않은 쪽으로 나가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구요. 그 인문학의 위기 이런 것들은 시대사조 이기도 합니다만.

실용성을 이명박 정부가 나아가는 경향, 철학 시대적인 사조이기도 하지만 거기안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는 말을 하니까. 신학하는 사람도 그럴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 신학 무용론에 빠져 있다는 말을 여러번 했는데 목사나 신학자들이 자기들이 모르는 말을 하니까 골치아프거든요. 신자들이 그것 와닿지 않으니까. 제가 거기에 고민이 많이 있습니다. 인문학적 성서 읽기 바로 그러한 작업을 펼치자 하는 것인데. 여전히 제가 하는 말이 뜬 구름 잡는 식의 이야기가 될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사실은 제가 나름대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 뜬 구름 잡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걸 전달하기가 표현부족이기도 하고 여전히 공부가 받쳐주지 못한다. 그런데 나름대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철학이 세계 전체에 대한 해명하려고 하는 것처럼 신학도 결국 그쪽으로 관심을 집중 시키는 것이거든요. 얼마나 그것을 잘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겠죠.

소피의 세계란 책이 있습니다. (소피님 들어오셨나요?) 노르웨이 사람이 쓴 철학적인 내용을 담은 소설입니다. 중학교 딸에게 주는 철학이야기. 딱딱한 철학 이야기인데 재미있게 전달됩니다. 어른이 읽어도 참 좋습니다. 수년전에 읽었습니다. 딸들에게 꼭읽어라 주었는데 큰 딸은 읽지 않고 작은 딸만 읽더군요. 그 이야기 다 이야기하지 않구요 끝마무리만 얼개만 이야기 하겠습니다. 자기 딸에게 철학이야기를 들려 주는 건데 딸의 아버지는 군 출신으로 멀리 가있습니다. 편지를 쓰는 거죠. 구체적인 흐름이 다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고대 철학사도 이야기를 하면서 쭉 진행되고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 그 소설속의 이야기하고 현실의 이야기가 뒤섞여져 버리는 거예요. 아.. 고 부분이 중요한데 제가 정확하게 표현을 못하겠네요. 읽으신 분이 있으면 혹시 잘못 전달해도 이해해 주십시오. 느낌만 제가 받고서 책읽기에서 어떤 느낌을 받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아이가 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으면서 다리가 가려워요. 그게 소설안에서 나온 어떠한 이야기가 현실안으로 투입되는 그 장면이었습니다. 아..미안합니다. 오늘 이야기를 할 거면 확인하고 왔어야 하는건데. 말씀드리고자 하는 핵심은 이겁니다. 현실과 초현실, 그게 우리는 딱 구분됐다고 하는데 이게 막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연관되어 있을까요? 그것을 풀어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철학자라고 할 수 있겠죠. 하나님이 우리 삶에 개입한다고 하시잖아요. 하나님의 역사 초월적 존재이시죠. 그런분이 역사안으로 들어와 사실까요? 예수님이 2천년에 부활승천하셨다가 생명이 은폐된 세계로 가셨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다고 하는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초현실이 어떻게 현실속으로 들어올 수 있을까요? 그런 잘 생각하는 것이 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성에 대한 논리적 해명은 신학이구요. 이런 것들이 꾸준한 작업을 통해서 해야 하는데 왜 그렇지 않으면 아주 주술적적으로 나가든지  미신으로 나가든지 아주 현실에 묶여져 있듯이 합니다. 현실 초현실, 역사초월 그런 것들과 열려져 있다고 하는 고 맥락안으로 뚜렷하게 현실에 두발을 딛고 서 있으면서 그안으로 들어가는 그 일들을 우리가 잘 못합니다.  

어떤 부분은 좀 정리가 되었고 어떤 부분들은 정리되지 않는 이야기가 있을거예요. 그러나 정리되지 않는 것처럼 들린다고 하더라도 정리 안된 것이 아닙니다. 어느 순간 그게 정말 흐트러지기도 하고 왔다 갔다 하기도 하고 하는데요. 그게 인제 흔들리고 않고 꾸준하게 추동력을 갖고 있으면 뛰어난 영성가가 될 수 있겠죠. 내가 거기 못미치기 때문에 그러나 나름대로는 어떤 방향을 갖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말론적으로 산다고 하는 것, 제 이야기를 꾸준히 들어보시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듣다가 한 두주일 안듣다보면 연결이 잘 안됩니다만. 나름대로 일관성을 갖고 이야기하는데 매번마다 다 구슬을 빼듯이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하나하나 토막 나는 것 같지만 나름대로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다 설명을 하지 못하거든요. 여러분들이 잘 받으시기 바랍니다.

종말론적으로 산다는 것 미래, 당겨서 사는것 초현실 현실성으로 리얼리티, 자주 사용했고 할겁니다. 실체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더 궁극적인 어떤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런 것을 그릇에 담아서 여러분에게 줄수 없기 때문에 언어안에서 개념적으로 담아내는 것입니다. 리얼리티 이것도 철학이나 인문학에서 많이 쓰는데 결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정적 더 뛰어난 학자 더 풀어내고 심화 시키면 그게 역사입니다. 언어속에 개념을 담는 것. 신학도 마찬가지예요 삼위일체, 칭의 이런 것들, 언어 터미널로지 더 많은 것을 풀어놓을 수 있으면 위대한 학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바르트, 몰트만 오토 이런 사람들이 다 그렇습니다. 종말도 그렇고 창조도 그렇고 모든 언어들 속에 들어있는 기독교가 담아 내려고 했던 세계들, 그런 것들이 현실과 초현실의 신비적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하는 것, 그것을 끌어가는 힘이 하나님이신거죠. 현실과 현실 넘어 있는 아직 오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확실한 것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죠. 우리에게 보이는 것. 감각이라고 하는 것이 아주 미숙하다는 것 인정하시죠. 거기에만 어떤 판단의 기준을 갖고 사는 것이죠. 성서기자들은 그것을 뛰어넘는 거죠. 계시라고도 애기하기도 하고 신탁이라고 하죠. 그러한 하나님의 신비 현실과 초현실 사이에서 운행, 활동하시는 그러한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조금씩 넓혀 가야해요. 어린아이가 우주과학에 대해서 아주 유치하게 알다가 선생님의 설명을 통해서 태양과 지구 관계가 그렇구나 리얼하게 느끼게 된다면 사유가 올라갑니다. 이를 근거로 해서 세계를 새롭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 통치이고 여기에 우리가 깊숙이 들어가야만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것을 안합니다. 답답할 정도로 안합니다. 재미없고 가르치는 사람이 사람이 모르니까. 듣는 사람도 재미없는 거고. 할일 자기 재미. 자기들 재미에 머물러 있습니다. 전도 많이 하면 상을 주고 이러한 방식으로 종말론적 구원 공동체인 메시아적 구원 공동체인 교회가 작동된다면 비극이죠. 많은 사람들이 유럽교회는 점점 썰렁해져가고 우리나라는 그래도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지 않느냐? 조금 큰 착각입니다. 왜곡이기도 하구요. 철없는 아이들이 천방지축 졸부들이 돈 쓸줄 몰라서 거들먹 거리는 것과 같습니다. 비판적으로 봐서 그렇습니다. 유럽교회가 죽은 것 같지만 그들의 문화와 삶속에 기독교적인 사상이 배여 있습니다. 무조건 제가 그쪽을 추겨 세울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전인수격으로 우리들의 신앙행태를 절대화 하기 때문에 세계 제일 큰 교회가 몇개있다. 선교사에 미국다음으로 만5,6천 보냈다 이게 얼마나 우습냐 하는 거죠.

하나님에 대한 공부를 잘 하자. 기왕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만 더 말씀을 드리고자 하면요. 가끔 다비야 사이트에 기독교에 대한 무신론적인 책도 소개도 나오고 그런데 귀를 기울이는 사람도 있기도 하지요. 만들어진 신, 예수 퍼즐, 제가 말씀 드렸다시피 그거는 책을 읽고하는 것은 시간이 많거나 심심풀이로 하는 것은 좋지만 큰 의미가 없습니다. 야고보라 하는 군인 방향도 좋고 야고보가 나이도 어린데 공부를 많이 해서 그런지 책읽기도 전반적으로 바람직한 생각과 글쓰기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제대하고 공부도 좀더 하면서 다비아의 좋은 일꾼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냥 하는 소리고요. 제가 보기에는 그런 책읽을 시간이 있으면 기독교 신앙에 대한 책을 좀 읽어라.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 판넨베르크 사도신경해설, 바르트의 책 많거든요.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이라도 읽어라. 건강합니다 건강한 책읽기예요. 퍼즐 전혀 신학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종교현상에 대한 비판 당연히 그 사람들이 하도록 내버려 두고요. 우리들은 기독교 정통이 근본적으로 기독교 전통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되요. 어거스틴이라든지, 루터, 아퀴나스 신학자들 거인들 있잖습니까? 신비주의 영성가들, 이분들의 글은 대단한 겁니다. 터무니없는 기독교인들이 선택을 좀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요. 센세이션. 이런데 마음을 둔다고 하는 것은 책은 많이 팔릴 지 모르지만 말이 옆으로 나간 것 같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로 깊이로 들어가야 그런 책이 나와도 흔들리지 않구요. 흔들지 않게 위해서가 아니라 기독교 역사가 진리론적 토대위에 서있다 확신을 가져도 됩니다. 불안하게 생각할게 하나도 없어요. 진화론이라든지 자연과학적인 것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쓸데없이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 중에서 옳은 것은 인정하고 우리는 신학인 성서의 가르침속에서 궁극적인 리얼리티와 만나는 지점이죠. 종교의 본질이기도 하구요 이길영박사가 늘 그런 부분을 지적합니다만 고 맥락이 있습니다. 우리가 고유한 신앙경험이 있으면서 동시에 그것이 어떻게 바깥세계로 열려지고 보편적인 진리의 토대에 설수 있는가 이 작업을 해야 하는 거죠. 됐나요?

(이하 다비아 인터넷 방송에 대한 의견 피력하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