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강(080612) 받아쓰기- 유기론적 기독교 윤리

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6월 12일입니다. 한국에 있는 분들은 인제 하루를 마감할 시간이구요. 외국에 계시는 분들은 각각 다르겠지요. 영국은 7,8시간 차이가 날거구요. 각각 지구가 동그랗네요. 참 신기하지요. 동그란데 중력이 있으니까 각각 자기가 똑바로 서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사실은, 실질적으로는 거꾸로 서 있다고 볼 수 있지요. 지금 우리는 자기가 있는 그 자리에서 그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그 방식으로 생명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 범주가 있는 거예요. 지구라고 하는 이 중력이 작용하고 있는 범주에서 우리는 어떤 것을 경험하고 삽니다. 이 범주를 넘어서면 전혀 다른 세계일테니까요. 그게 이제 통하지 않게 되는거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들이 절대적이지 않다고 하는겁니다. 현상학이 이야기하는 것도 그런것 인것 같아요. 우리가 이렇게 인식하는 모든 것들이 어떤 통로를 통해서 들어오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데요. 예를 들면 빨간 안경을 쓰면 이 세계가 빨갛게 보이는 것처럼 우리가 인식하는 방식, 그게 그렇게 정확하지 않다고 하는겁니다. 제가 지금 지구가 둥글다고 이야기하다가 옆으로 나왔는데요. 이런 것들과 연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같이 이야기 해야 될 내용들이 기독교 윤리의 몇가지 구체적인 이야기들이거든요. Sexuality 이거하고 쾌락의 문제, 그리고 소유의 문제, 이게다 윤리의 문제이죠. 결론적으로 저는 기독교 윤리를 유기론적, 이걸 이야기 하려고 하는데요. 유기론적 기독교 윤리, 이거는 너무 뻔 한 이야기 같죠. 네 그렇습니다. 답은 너무 교과서 식으로 이야기해서 미안합니다. 미안하다기 보다 좀 더 많은 것들이 필요한데 그걸 오늘우리들이 개론적인 시간에는 다루기 힘들어서 어쩔 수 없는것 같습니다.

우리가 지난시간에 기독교 윤리의 어떤 토대와 근거들을 쭈욱 이야기했습니다. 지난 번에는 마지막 부분을 이야기했고 주일 저녁때 조금 자세하게 이야기를 한, 기독교 윤리의 근거로서의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한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아마 강의에 들어오지 않는 분들이 있기 때문에요. 하나님의 나라가, 바실레이야, 하나님의 나라가 기독교 윤리학의 근거다. 윤리학의 근거다.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주로 판넨베르크의 책 “신학과 하나님 나라” 그 강연집의 한 article 인 ‘하나님 나라와 윤리학’인가요. 고 제목에서 보충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혹시 지난 강의를 들은 분 중에서 혹은 듣지 않는 분들이라고 하더라도 제가 적어 놓은 두 단어에서 뭔가 감이 잡히면 이미 신학의 세계에 들어온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윤리학 이란 관계를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지난번에 어떻게 이야기했을가요? 조금 생각을 해 보세요. 기억을 해 보십시오. 듣지 않았다면 그냥 생각해 보세요. 이게 어떻게 연관되는가? 하나님 나라는 윤리 문제뿐만 아니라 모든 기독교 신앙의 베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제가 설교 비평을 하면서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부분이 하나님 나라이거든요. 기독교 선교는 기본적으로 하나님 나라 지향적이어야 된다. 교회론도 다 여전히 하나님 나라의 하부구조다. 하나님의 나라는 또 종말론적인 지평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한 소상하고 심층적인, 포괄하고 함축적인 훈련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가 잘 잡히지 않은 거예요. 뜬 구름 잡는 식으로 하늘 죽어서 어디 가는 것쯤 또는 우리 심리작용 마음의 평화 이런 쪽으로 생각하든가 아주 세속적으로 여기서 출세하는 것 여호와의 증인인가 그런쪽의 주장같은데 지상낙원 그런 것들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론이 아니거든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우리들에게 모르는 방식으로 우리 삶에 개입해 있으면서 이미 우리들에게 선취되어 있으면서 아직 기다려야 될 어떤 하나님 전체적인 통치 어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학적 표현들이 여러분들에게 낯설죠. 아니면 5개월 이상 공부했다면 그런 것의 낯익다고 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느낌이, 생각이 들어오고 리얼하게 좀 잡히게 된다면 여러분들은 상당히 많은 신학적 훈련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기독교 신앙이..(제가 책을 좀 찾고 있는데요. 눈에 안보이네요. 금방 보였는데요.) 기독교 신앙이 말 자칫하면 실증적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기도해갖고 제가 강의하면서 강의내용보다도 그걸 하기 위해서 다른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런 것들이 어쩌면 사실 더 중요할 수 있어요. 그래서 강의하다가 자꾸 옆으로 나갑니다. 기독교 신앙을 자꾸만 너무 구체적인 거로만 사람들이 자꾸 생각하거든요. 실증적인 것, 구체적인 것, 확실한 것, 쉬운예로 그래서 예수 믿으면 몰상식하게 나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좀 세련된 신앙인이라고 하더라도 예수 믿으면 마음의 평화가 위로 받고 그렇게 살고 조금 더 나아가서 내 삶이 변화되는 거고 그런 것이 아니냐 그럽니다. 그런 것들은 다 중심이 아니라 종속적, 부수적인 겁니다. 아시겠어요. 그런 거는 괴테나 휄더린이나 아니면 우리 동양의 여러 위대한 시인들의 시를 읽으면서 아 내가 그걸 읽고서 위로 받았다든지 내가 말을 따뜻하게 하게 되었다든지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비슷합니다. 시를 읽고 마음이 평화로와졌다는 거야 그럴 수 있겠습니다만 시를 읽은 것은 그것 때문에 읽는 것이 아니예요. 평화로와 질수도 다르게 될 수 있습니다. 읽은 이유는 시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거든요. 그건 각양각색으로 다르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하나로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도 바로 그와 같은거예요. 성령과의 관계 소통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걸 하나의 색깔이 아니라니까요? 그걸 자꾸만 여러분들이 습관적인 신앙에서는 틀을 자꾸 요구하거든요. 형식, 기준, 그런 것이 없는 무조건 자유롭다는 것은 아니구요. 그건 더 밑으로 들어가는 작업인거죠. 영성이 심화되는 거죠. 어느 정도 들어가게 되면 요 정도되면 내 신앙의 틀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경지라고 할까요? 말 표현은 정확히 하지 않습니다만 하나님을 닮아가는, 하나님의 형상에 가까이 가는 그러한, 그거는 뭐 헬라 철학자들도 많이 이야기하는 것들인데요. 그냥 가는 길입니다. 말이 자꾸 헛도네요.

그래서 기독교 신앙이 실증적인 것만이 아니라 관념적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요.  관념적이라는 것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손을 잡듯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영은 바람과 같으니까 아주 자유롭게 우리들에게 오는 거거든요. 그건 어떤 힘이예요. 어떤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에 이야기했군요. 호리젠트, 지평이라구요. 어떤 거룩한 두려움, 모세가 호렙산에서 경험해야 했던 신발을 벗어야 되는 어떤 그것,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해서는 어떤 그분이라고 밖에 말할 수 밖에 없지 누구다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여튼 고 단계를 일단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 아버지 손잡고 군것질 하던 고 단계를 벗어나서 부모하고 성숙하게 인간 삶에 대해서 대화를 해야 그 관계가 정상적으로 이뤄지는 거잖아요.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정말 중요한데 아버지와 혈연으로서가 아니라 혈연도 기본이지만 인간관계속으로 우리가 들어가야 되잖아요. 그래야 성숙해지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다고 볼 수 있는거예요. 그런점에서 우리가 관념적이라고 하는거예요. 관념적이라고 하는 것이 불안하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려낼 수 없는것, 그걸 내가 범주안에 끌어내어 속박시킬 수 없는것, 그러한 자유한 생명의 힘이라고 그런거죠.

지난 수요일날 샘터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할 때 어거스틴의 기도를 좀 읽거든요. 기도하는 대신 어거스틴의 기도를 같이 읽고 제가 좀 설명도 하기도 합니다. 이게 참 좋아서 여러분들에게 읽어드리고자 합니다. 어거스틴, 이런 분들은 정말 교부신학으로서 정말 대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를 들자면 어떤 유에 있는 사람들, 말하자면 여성신학자들의 일부, 일부가 아니라 많은 분, 예수 세미나 쪽에 있는 부분들, 역사적 예수를 추구하는 분들은 어거스틴이라 바울같은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특히 어거스틴 이런 사람들을 싫어하죠. 싫어하는 사람들중에서 원복이라고 책을 쓴 사람, 자연신학자, 매튜 폭스인가요. 책을 제가 멀리했네요. 그런 분들이 확 어거스틴을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어거스틴이 원죄론 이야기하구요. 여성에 대해서 비하하고 그런 것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거스틴이 그런 흔적이 있기는 있습니다만 그것 때문에 그의 신학 전체를 좀 이렇게 폄하한다거나 하는 이런 자세는 건강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든 역사적인 한계속에 있기 때문에 어거스틴이 모든 것을 다 바르게 해결할 수 있겠어요. 벌써 1600-1700년전 사람인데요. 그 당시로서 하나님의 뜻을 가장 바람직하게 해명하고 우리들에게 그런 것을 전달하는 역사적인 책임을 아주 뛰어나게 독보적이고 탁월하게 감당했다면 우리는 그를 인정해야 되거든요. 그런데 모든 것을 다 헐뜯어 내리는 것은 조금 경솔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어거스틴의 교리를 찬반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만 저는 찬성하는 쪽입니다. 그가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했습니다.

주님은 항상 창조하시고 양육하며 완성하십니다.  

오 주님, 주님은  높고 선하며 전지전능하시며
지극히 자비로우시면서도 의로우시며
지극히 은밀히 존재하면서도 가장 가까이 계시며
지극히 아름다우시면서도 가장 강하시며(대비되는 것 아시겠죠)
항상 계시되 어디에 의존해 있지 않으며
스스로는 변하지 않되 모든 것을 변화시키시며
새롭게 되거나 옛것으로 돌아가지 않되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교만한 자를 노쇠하게 하시니
그들은 이것을 알지 못합니다.
주님은 항상 일하시되 안식하시고 항상 거두되 부족함이 없으며
항상 받들어 주고 채워주고 보호해 주십니다.
주님은 항상 창조하고 양육하며 완성하십니다.
주님은 부족한 것이 없으시나 찾으시며
사랑하되 욕심으로 불타지 않으며
질투하나 괴로와하지 않고
뉘우치나 슬퍼하지 않으며
노하되 안정하십니다.

마지막 세번째 연인데요. 귀에 들어오시나요?

주님은 하시는 일은 바꾸되 뜻과 계획은 바꾸시지 않으며
무엇을 찾으실 때는 아주 잃어버리신 것을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참 놀랍죠 이런 표현들이요.)
주님은 결코 궁핍하지 않음에도 무엇을 얻을 때 기뻐하시며
욕심이 없으나 이득을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께 필요이상 바쳐
주님을 우리에게 빚진자로 만들려 하나
사실 우리가 가진 것 가운데 주님것 아닌 것이 어디있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빚진 것이 하나도 없으나
마치 빚진 것처럼 우리에게 갚아주십니다. 아멘

네 아주 이렇게 영성으로도 그렇고 신학적으로도 그렇고 참 뛰어난 분이예요. 저렇게 짧은 글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 최선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보세요. 그 하나님이 그려지죠. 그게 손에 잡히는 게 아니잖아요. 그거는 이 시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겁니다. 은밀하게 보이시나 가까이 계십니다. 표현을 보세요. 은밀하다. 은폐라는 표현이예요. 우리가 모르게 계시지만 항상 호흡하시며 가까이 계시다고하는 그러한 하나님 경험인거죠. 네 지금요. 우리들도 다른 길이 없습니다. 신앙적으로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의 글을 계속해서 읽고 때에 따라서는 뭐 이런 강의도 그런 계기가 되겠습니다만 교회 생활도 그렇게 되겠습니다만 여러분들보다 영적으로 신학적으로 뛰어나는 사람과 접촉하는 것이 우리가 바둑을 잘 두고 싶더라도 고수하고 둬야 바둑의 수가 늘잖아요. 1단정도 되는 사람들이 8급짜리 하고 바둑 둬봐야 늘지 않습니다. 물론 자기 혼자 도 닦듯이 하면 좀 늘지 모르지만 그러나 수의 차이 때문에 안되는 거거든요. 그렇습니다. 제가 여기에서 무슨 말씀을 드리려는가 하면요. 하나님 나라가 딱 완료된 사건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거는 우리들이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만큼 우리들에게 들어올 거에요. 요정도로 하고요.

윤리학과 하나님 나라, 사실 이것만 갖고 한 시간 강의도 충분한데 그냥 맛보기로만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거는 지난번에 한번 이야기를 했지만 똑 같이 하지 않았고 듣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복습하는 차원에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기독교 윤리학의 근거가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윤리적 행위들의 잠정성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의 하는 것들, 다 잠정적인 겁니다. 우리의 행위라고 하는 것들이요. 지금 촛불시위라고 하잖아요. 저도 6월 10일에 한일극장 앞에서 참가하고 왔습니다마는 저는 그것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구요. 그리고 그 하는 모든 진행들이 마음에 들기 때문에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여튼 이시간 대한민국이라는 자리에 살아가면서 하나님 나라가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침입해 있을텐데 나름대로 최선으로 시간적  이슈로서 여기에 참여해야 한다고 하는 뜻으로 간거거든요. 그런데 그 쇠고기 우리가 수입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의 윤리문제가 끝이 나는 것 아니거든요. 그리고 그것을 성취, 국민의 힘으로 재협상하게 하고 물론 그런 것들을 다 이룬다고 한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그거는 뭘 이룬, 이게 끝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용감한 것, 의로운 것 이 모든 것들이 잠정적이라고 하는 것을 전제해야되요.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런 것들이 다, 그렇죠. 완전하지 못한 윤리적인 행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들의 행위에 대한 가치적인 판단이 윤리라고 했는데요. 그런 것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느냐는 질문이 나오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나라를 향한 희망에서 잠정적이나마 우리의 현재 삶들이 그 희망에 상응할 수 있도록 대처하는 삶의 태도 이런 것들을 기독교 윤리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니까 우리의 윤리적 노력 이런 것들은 어느 상태에서 끝날 수 없습니다. 복지가 극치로 이루어지는 사회, 민주화가 정말 정착되는 거의 직접 민주주의가 가능할 정도로 모든 이들이 원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정치가 운영되는 때가 온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우리는 완전한 세계의, 혹은 완전한 윤리의 성취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우리는 결코 여기에서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요. 하나님 나라가 우리들에게 와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기독교인들의 행위를 우리는 판단하면서, 성찰하면서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쓸데없는 이야기가 많았군요. 지난번에 대충 그렇게 이야기 했구요. 구체적으로 몇 가지 윤리의 주제들을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Sexuality 인데요. 가장 예민한 성윤리라고 할 수 있죠. 사실 뭐 대체적으로 여러분들은 어느 정도 방향을 잡고 있기 때문에 디테일하게 그런 문제들을 다룰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이런 문제들을 다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냥 신학적 상식으로 어떤 관점들만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아까 제가 지구 이야기하려고 하다가 다시 나갔어요. 다시 그 안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이 안에서 살 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그 세계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성이라고 하는 것도 그 현상이예요. 지구 바깥으로 나가면 그 현상들은 없는겁니다. UFO가요. 미확인 물체라고 하잖아요. UFO가 가능할까요? 가능하지 않을까요? 뭐 불가능한 것은 세상에 없으니까.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이 세상에 불가능한 것은 기본적으로 없습니다. 없음에서 있음으로서가 가능하니까요. 이런 것 갖고 여러분들이 너무 예민하게 아 그거는 비신앙적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아주 실제적으로 UFO가 우리들에게 등장할 수도 있겠죠. 그건 그렇다고 하고. 만약 그냥 그러한 외계인이 지구에 왔을 때 인간의 세계를 어떻게 볼까요? 참 신기하게 보겠죠. 여러가지면에서 그렇습니다. 침팬지하고 인간하고 거의 차이가 없다고 그러죠. 유전자에서도 그렇고요. 외계인들이 지구에 왔을 때는 인간과 침팬지를 구분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고 학자들이 이야기하더군요. 그게 우리 입장에서는 실감나지 않죠. 침팬지, 고릴라인가 침팬지인가? 침팬지가 제일 가깝죠. 그 친구들이야 우리하고 전혀 다르다 우리입장에서는 그렇죠. 외계인의 시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하나요. 그거는 UFO가, 외계인들이 와봐야 증명이 될텐데 그러나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이 와서 인간을 봤을 때 인간의 성생활을 봤을 때 어떻게 생각할까요? 어쩌면 외계, 다른 세계는 남녀가 만나서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성생활, 그런 방식이 아닌 방식으로 후손을 번식할 가능성이 많겠죠. 그들이 볼 때는 좀 이상할겁니다. 왜 저 호모사피엔스라고 하는 인간종이 저런 방식으로 저렇게 후손을 번식을 하는가? 저런 것에서 즐거움을 느낄까?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우리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거기에 본능적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모르는거예요. 그냥 들어가 있으니까요.

세계에 던져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삶에 대한 실제로 우리가 보지를 못합니다. 동영상 강의 앞부분에서 던진 말씀인것 같은데요. 물고기는 물을 의식하지 못하는데요. 물고기와 물이 하나가 되어 버렸어요. 그러니까 어항바깥에 있는 우리들에게는 구분이 되는데 물고기는 안된다는 것처럼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것이 우리는 이런 모습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실체가 아닌 것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바깥에 나가 봐야 보이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죽어봐야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될텐데 성문제도 그런 것같습니다. 곰곰하게 생각해보면 좀 신기하잖아요.

이 지구에 생명체들이 이렇게 암수 식물도 그렇죠. 동물은 좀더 적극적인 방식이지만, 암수, 암수가 자기 몸안에 다 있는 저급한 생명체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발전해가는 것을 보면 암, 수 전반적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꼭 이래야만 될까요? 꼭 그렇지는 않다고 봅니다. 아마 유전공학이라든지 이러한 복사, 배아복사라든가요. 그런 것들이 발달하게 된다면 성생활에 관계없이 자기 후손을 번식하게 될거고 그렇게 되면 사람들의 성기능이 점점 떨어지게 될겁니다. 이런 성기능이 발달한 것은 후손번식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요? 제가 너무 진화론적으로만 보는지 모르겠습니만요. 제가 지금 진화론이다 창조론이다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고 그냥 눈에 보이는대로 말씀드리는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남녀 성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 않느냐? 그런데 왜 여기에 이걸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저는 이렇게 봐야 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Sex라고 하는 문제를, Sex realism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성현실주의 입장입니다. 이건 뭐 호불호, 선악의 관계 문제가 아니라 그냥 우리가 안으로 들어가 있는 거 뿐이죠.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서 좀 벗어나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예 성적 욕망이런 것들이 없을 수도 있구요. 또는 다른 방식으로 이성이 일반적인 건데요. 동성을 향한 Sexual appeal이라고 하나요. 굳이 말을 붙이자면 그런 사람들도 있거든요. 우리는 주류가 생활하는 방식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불온하다고 많이 보고 있습니다. 고 문제는 동성애에 대한 거는 좀 둬두고요. 성현실주의에 서야 되는데요. 제가 예민한 주제를 하다보니 말이 자꾸만, 혀가 꼬이네요. 잘 알지도 못하는건데. 어쨌든 그래도 설명을 잘 못해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성현실의 문제를 추상화 시켜서, 혹은 이념화시켜서 이렇게 재단하기 시작하면 거기서 문제가 벌어지게 되는 거죠.

일반적으로 기독교에서는 성에 대해서 혐오까지는 가지는 않는데, 혐오는 아니죠. 일반적으로는 기독교에서도. 옛날에는 많이 그랬어요. 지금에야 성혐오로 가르치는 교회 지도자들이 있겠어요. 그거는 아닌데 성엄숙주의는 많은 것 같아요. 엄숙주의, 성에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말한다고 하더라도 터부시하고 어떤 틀안에 딱 들어와 있어야지 그렇지 않는 것에서는 완전히 거부하는 그러한 태도죠. 그런 것을 우리는 성엄숙주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확한 표현일까요? 혹은 이거하고는 일반 세상에서는 성절대주의라고 할까요? 이 말들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냥 대충 알아들으세요. 성을 절대화해갖고 성 만능주의 성 도구주의라고 할 수 있겠군요. 성을 즐기기 위한 도구로만 생각하는 것, 엄숙주의는 그게 아니라 출산을 목적으로 하는 것을 근본바탕으로 할 텐데 청교도들은 아마 그랬을예요 청교도 신앙이 엄숙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은 출산의 목적으로 거의 그렇게 하고요. 출산이 아니라고 한다면 부부간의 성행위를 바람직하게 생각했을 거예요. 제가 요거는 자신이 없어요. 그들이 어떻게 이야기했는지 그들의 문헌을 확인하고 나오지 나왔기 때문에요. 이 두개다 제가보기에는 잘못이다. 도구적으로 쓰이는 것은 현대 세속사회에서 극한을 치닫고 있기 때문에 제가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모든 것을 성의 상품화죠. 도구화는 상품화와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제가 성서를 도구화 하지 말라 그러한 이야기들을 종종했는데 그거는 바로 성서 텍스트를 상대화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그것은 그 성서 텍스트의 존재론적 세계를 뚫고 들어가라는 이야깁니다. 그러니까 성서 텍스트가 우리를 끌고 가야지 우리는 성서텍스트를 이용하려면 안된다. 그런 능력이 없는데도 그럴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거죠.

성도 오늘날 얼마나 극단적으로 상품화 되고 도구화되고 그것만이 모든 위들의 삶을 끌어가는 동력인 것처럼 애기되고 또 그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마 여기에는 프로이트의 책임이 많이 있겠죠. 리비도라고요. 인간이 거의 성적 취향으로만 간다. 아들은 어머니를 좋아하게 되어있고. Sexual approach 라고 합니다. 프로이트의 이야기 여러분이 잘 아시는대로 대학교 교양학 시간에 다 들은 이야기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아버지를 성적인 대적으로 생각한다는 이야기죠. 과연 그런지 아닌지 말하기 힘들죠. 어쨌든 그 사람의 이야기인데 이게 일부분에서는 맞습니다.

심리학자들이 그런 실험을 많이 한다면서요. 만원 버스에, 또는 공간안에 남학생들이나 여학생만 자기들끼리만 꽉 채워 놓은것하고 남녀를 섞어서 놓는 것하고 그들이 느끼는 공간 느낌이 다르다고 합니다. 같은 성 끼리만 모여있으면 너무 힘겨워 하는 거죠. 너무 좁다고 느끼는데 성이 다르게 있으면 널널하게 생각된다고 합니다.

제 경험해서도 맞는것 같습니다. 제가 테니스 일주일에 두번정도 치러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남자 회원들도 많지만 여자회원들도 1/3정도인데요. 남성끼리만 칠때도 있고 혼성 복식을 칠 때도 있고 그래요. 실력이 제일 중요한데요. 실력이 비슷한데요. 실력이 좀 모자란다고 하더라도 혼합복식을 하는 것이 훨씬 재미있습니다. 그게 왜 그럴까요? 네 이건 그렇고. 그런쪽으로만 나가는데 과연 사람들이 늘 그렇게만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늘 사람들이 성적인 것만 몰두하고 사는 것이 아니거든요. 전혀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도 우리 삶을 끌어가는 힘도 많습니다. 예술도 그렇고 종교는 더 할 나위도 없고 말이죠. 스포츠도 그렇구요. 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것에 집중하지 못할때 이러한 종족을 번성시켜야 된다고 하는 그런 본능이 우리들을 자극하면서 리비도적인 경향을 나타내는데 우리가 온전히 그런식으로만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런 것이 전혀 없는 것처럼, 성적 취향들이 전혀 없는 것처럼 엄숙한 이러한 포즈를 취한다고 한다면 그건 인간 삶의 현실을 놓치고 있는 어리석음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번 주간에 나온 한겨레 21일에 어떤 대학교 선생이 쓴 칼럼에 간통죄를 다뤘더라구요. 최근에 어떤 여자배우가 이거 위헌 소송을 해야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누구더라 그 이름이요. 이 교수이야기는 간통죄는 폐쇄해야 된다. 여러가지 논란들은 여러분들이 아시니까 제가 이야기를 하지 않겠습니다. 이게 또 여성들을 위해서도 오히려 낫다. 그런 이야기도 하구요. 어떻습니까?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이것이 유지되고 있는데 간통죄로 아내나 남편을 고소하려고 하면 이혼을 전제 해야 된다고 하네요. 이혼을 하면서까지 상대방을 간통죄로 집어넣어야 한다고 하는게 내가 보기에는 조금 우스운 것 같아요. 자기가 신뢰했던 남편과 아내가 자기를 배신했다. 그 배신감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건 옆에 있으면 때려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겠죠. 순간적으로는요.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조금 시간이 지나면 상대방을 이해할거구요. 그런 방식으로 두 사람의 신뢰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 낫지 이렇게 모든 것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상대방을 이혼하고 옥에다 쳐넣는 방식으로 이것을 해결한다. 이게 그렇습니다. 이거는 조금 시대착오적인 제도가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누구나 경우에 따라 실수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반복적이거나 습관적인 것 그런 것이라고 한다면 같이 살 수 없겠죠. 그러나 여기는 그런 일을 당한 분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우연하게 그러한 일들 부정한, 불륜이라고 하죠. 그런 것이 내 가족에게서 발견되었다. 처음에는 정말 화가 나지만 기다려 보세요.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것들도 성윤리와 관계되는데 성현실주의주로 이런 쪽으로 좀 더 삶의 모습들을 보세요. 그러면 그거를 없다고 말하지 않고 거기에 노예가 되지도 않습니다. 그거를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면 되는거죠. 내버려 두라고 하는 것은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죠. 그안에 사는 거죠. 이러한 것들에 대한 것들은 인간이해라는 것이 보충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되지 않고 청교도적이 그러한 엄숙주의라든지 아니면 단순한 습관 도덕주의 이런데 머물러 있게 된다면 그러한 목사들은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죠. 청년들을 향해서. “너희들 책상서랍에 있는 포르노 다 때려치워 그것이 얼마나 큰 죄인줄 알아?” 그런 방식으로 윽박지르는 거죠.

내가 한번 말씀드렸지만 하도 기가 막히기 때문에 또 다시 드립니다. 사랑의 교회 오정현목사님이 처음 한국에 오셔서 교회를 맡으셔서 라이즈업 코리아 이러한 청소년들 부흥집회, 전도집회를 대대적으로 열었거든요. 그 분은 대형집회를 참 좋아하십니다. 요즘 좀 덜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삶 참 순진하시고 그런데 신학 바탕이 너무 부족하신 것 같은데. 멀리 목회를 하시려면요. 큰 교회 이름 나왔으니 한마디 하고 지나가야 되겠네요. 한국교회 요즈음 욕을 많이 얻어 먹고 있지요. 요즘만이 아니고요. 계속되고 있고요. 이럴 때 이거는 욕 얻어먹는 정도가 문제가 아니라 한국교회 구조적인 전체적인 문제가 심각합니다. 제가 다비아에 그런 것을 많이 쓰지 잖아요. 예. 제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고요. 교회가. 언데 그런 비슷한 글을 비꼈습니다만 아무리 한국교회가 엉망진창이라고 하더라도 바람난 어머니를 내팽개치지 않고 설득해서 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자식처럼 한국 교회는 우리의 영적인 어머니다는 입장이예요. 가능하면 특별한 안티기독교 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저는 정말 좋지 않게 생각합니다. 건전한 비판이 아니죠. 헐뜯기 위한 것이죠. 겉으로는 타당한 비판이라고 하는데 글이나 그런 것 보면 알죠. 이게 마음이 어떤가 말이죠.  그건 그렇고. 여러가지 구조적인 문제가 참 많습니다. 신학교가 교단에 딱 묶여있고 이사장들이 신학교수들을 쥐락펴락하고요. 말한마디 못하고 교수들이 입벙끗 못합니다. 신학교 학생들이 정원이 너무 많은데 목사들이 인플레이션이잖아요. 그러면 정원을 줄여야 되는데 못 줄이죠. 다 구조적인 문제죠. 한국교회의 빈익부 부익부의 문제, 한국교회의 본질에 속하는 것입니다. 보편성과 단일성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교회 본질로서부터 멀어지는 것이거든요. 그런 것 말고도 한두가지 겠습니까? 여기서 이 문제를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몇분만이라도 아주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뭔가 대안을 제시하셔야 하는데 아무리 눈 씻고 봐도 하나도 없네요. 그런 분들은요. 그냥 작은 교회 계신분들은 가끔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은 힘이 없으니까 아무리 말을 해봐야 대중성을 확보할 수 없거든요. 그래도 대중교회 큰 교회 목사님들은 하셔야 하는데 옥한흠목사님 같은 분들은 대중성도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분들이 뭔가 다른 것을 제시하셔야 해야 되거든요. 못하시잖아요. 안하시는 것인지. 아마 모르시는 것 같아요.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은 원칙적인 것만 이야기해요. 실질적인 내용은 없어요. 사실은. 내가 죄인이라고 하는데 뭐가 죄인인지 모르시는 것 같아요. 뭐를 죄인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이 명박대통령이 몇 번 사죄를 했잖아요. 내가 부족했다. 소통이 어떠했다 했는데 뭘 잘못했는지 본인이 잘 모르는거죠. 비슷한 일이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엉뚱한데 나가서 열을 냈군요.

네. 오정현 목사님이 청소년들을 모아놓고 뜨겁게 찬송 부르고 복음찬송 부르고 열광적인 상태로 만들어 놓은 다음에 특강을 시작하거든요. 그 내용들이 그런 것들입니다. 인터넷 사이트 포르노 책상속에 있는 것들 이야기하면서 정서적으로 예민한 심리를 굉장히 불안하게 하는거죠. 그렇게 해서 그들이 그런 것을 치우게 된다면 다행이지만 치워지나요? 그런 것을 내버려 두느냐 그러자고 하는 뜻이 아닙니다. 이거는 하라말라는 문제가 아니라 청소년들에게 선정적인 그러한 동영상, 그런데를 접하지 않을 수 있도록 어른들이 조치를 좀 해줄 수 있는 것은 필요하죠. 그런데 하더라도 결국 그 젊은이들이 접하게 될거예요. 이런 저런 방식을 통해서요. 친구들이 다 통하지 않습니까? 그거는 원천적으로 막을 수 는 없습니다. 그런 것은 죄다 이런 방식으로 애기를 하게 되면 기독교 청소년들은 계속해서 그런 불안감갖고 생활하게 될거예요. 그런 것보다는 내버려두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우리앞에 놓여있는 성의 현실들, 우리 후손들이 언제까지 이러한 남여 성관계를 통해서 후손을 번식하게될지는 모르지만 어쩌면 그런 것이 즐거움이 되지 않을때가 올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방식이 아닐거예요. 그거는 늘 기쁜 것이 아니니까요? 그거는 한 순간이니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거는 아니잖아요. 계속되지만 지루하지는 아니하는. 꼭대기 까지 올라가지만 똑 떨어지지 아니하는 어떠한 하나님의 통치이시잖아요. 우리가 여기서 경험하는 성하고는 다른 세계라고 할 수 있죠. 예수님이 말씀하셨죠. 바울이 애기했나요? 네 장가가고 시집가는 문제가 아니다. 희락과 평강과 관념적인 세계로 이야기하는거죠. 관념적이라는 말을 오해하지 마세요. 이거는 뜬 구름 잡는다는 애기가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아주 리얼한 세계를 가르킵니다.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이데아라고 애기 할 수 있겠죠. 네 거기까지 성의 문제를 이야기했군요. 여기에는 성매매 이런 것도 좀 말해야 되는데 되었습니다. 그런 것들은 여러분들이 들은 풍월이 많이 있기 때문에 성리얼리즘이다. 탐닉할 거도 없고 예민한 청소년들에게 그걸 잘 콘트롤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살아가자. 그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후손을 번식할 수 있는 통로다 생각하면 되겠죠. 그거는 기본적으로 성의 문제는 쾌락일텐데요. 금욕과 쾌락이라는 제목으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우리 기독교 전통은 일반적으로 조금 금욕적인게 좀 강하죠. 때에 따라서 금욕은 필요한데 억지로 금욕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참아도 사실은 되지 않습니다. 아까 성문제를 이야기했습니다만 그거는 참아서 될 문제는 아닌거예요. 다른 방식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죠. 쾌락이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기독교인들은 약간 거부감을 느끼죠.

저도 언제 고등학교때인가 중학교때인가 에피쿠로스 쾌락주의다. 이 애기를 듣고 우리들의  본능적인 쾌락만 추구하는것이다 나쁜것으로 머리속에 각인되어 있었는데 그게 아니더라구요. 제가 각주를 달았군요. 에피쿠로스가 애기하는 것은요. 그러니까 쾌락지향성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중심부로 심층적으로 접근하는 철학입니다.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철학은 나을 파기하면서 까지 획득해야할 탐심이 아니라, 불교적인 의미에서 해탈, 혹은 번뇌가 없는 정신적 평적, 아트락시아에 가깝다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아트락시아를 향해서 나가고 있다고 하는 그러한 에피쿠로스학파의 주장은 제가 보기에는 정당하죠. 우리는 물을 마시거나 밥을 먹을 때에도 이러한 쾌락이 있기 때문에 가능할겁니다. 배움이라는 것도 쾌락일거구요.

쾌락 이야기하니까 City Of Angel 이라는 영화가 생각나네요. 참 매력적인 영화예요. 여주인공으로 분한 맥라이언, 지금은 좀 늙었겠지요. 아주 미모가 출중했구요. 아주 지성미와 그런 것들이 겹쳐져 있는 멋진 그러한 여배우인데요. 지성미와 청순미의 겹합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남자 천사, 세스로 변한 니콜라스 케이지, 연기 잘하죠. 때론 깡패로도 나오는데 아무리 깡패로 나오더라도 깊이가 있는 깡패더군요. 눈으로 연기를 많이 하더군요. 이 이야기 한두마디로 줄이겠습니다. 이 세스에 의해서 여과의사 메기가 삶의 기쁨을 발견하게 되자. 세스가 인간이 되어서 두 사람이 같이 하나가 되려고 여행도 가고 하는데 마지막 장면이 이렇습니다. 세스와 함께 한적한 숲속의 별장에서 몸과 마음을 나누었다. 메기가 새로운 삶을 경험한거예요. 사과 맛이 어떠냐 물어볼때, 처음에 천사 세스가 메기에게 물어보면 달콤하고 새콤하게 이야기하는데 그게 아니라 그러한 교과서가 아니라 실지로 그 맛을 아냐 그런식으로 이야기하면서 서로 가까와져요. 메시는 새로운 인생의 환희의 기쁨에 충만해서 숲속길을 내려가다가 영화 포스터에 그림으로 잡혀 있는데요. 죽어요. 큰 트럭하고 부딪쳐서 죽습니다. 세스 천사는 초능력을 잊어 버리고 혼자 남게 되는데요. 그래도 혼자 남게 되는데요. 그래도 인간이 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파도소리, 커피향, 사랑하는 여인의 입술, 그런데서 누릴 수 있는 삶의 기쁨들, 커피 맛, 그리고 숨쉬는 것, 심지어는 쿰쿰한 한 거름냄새,  어린아이들의 살냄새, 황홀하잖아요. 이게 다 쾌락적인 감각적인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무시하면서 세상을 찬송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찬양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천상병의 시를 잠간 각주로 달았어요. 하늘로 돌아가리라. 저는 지금도 논다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아름다왔다고 말하리라. 이렇게 삶을 아름답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너그러워지고 자기의 한계도 인정하고 살아갈 수 있겠죠. 청빈과 소유 이것도 비슷한 문제이기 때문에 그만 두겠습니다. 자발적인 청빈도 필요하구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의 소유를 부정할 수는 없겠죠. 소유 지향적이었더는 안되지만 소유 자체가 부정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살아가면서 통장이나 지갑에 있는 것을 다 나눠주고 살아야만 그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거라고 할 수 없어요. 자기가 살아갈 준비를 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합니다. 한두마디로 말씀드리는 것은 못되는데 어쩔 수 없습니다. 여기에 머물러 있을수가 없기 때문에요.

그러나 어떤 분들은 자발적으로 청빈의 길을 가는데 아름다운거죠. 아시시의 프란시스코 처럼요. 무역업자의 큰 아들로 태어나서 그 길을 포기하고 거지 탁발 수도승으로 평생을 살았고 프란시스코 수도원을 창설한 그러한 삶은 정말 아름답죠. 마더 테레사도 그러고 성철 스님도 돌아가셨을때 남아 있는 것이 장삼 두벌하고 밥먹는 것을 바루라고요. 그거 하나였다고 합니다. 아. 행복하게 죽는 법, 잃을 것이 없으면 행복한거죠. 우리가 죽기까지 준비를, 평생은 죽음의 준비라고 할 수 있는데요. 아까운 것이 없이 살아보시죠. 자기 가족 까지도 멀어져야 되겠지요. 결국은요. 하나 하나 떼어 놓는 방식, 하던 안하던 결국은 떨어질 수 밖에 없는데 그런 준비를 하는것, 그게 어쩌면 청빈지향적 삶이 아닌가 그게 어디서 어디까지냐? 그게 제가 잣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알아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를 지켜낼 수 있는 것은 궁극적 사건이 올 때 아무것도 없다. 그는 하나님 부활하시고 종말에 다시 이 땅에 오셔서 이 세계 진리와 거짓을 심판하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밖에는 우리를 지킬자가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가능한 대로 살아있는 동안 미련을 끊도록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데 한마디 또 하고 지나가야 되겠네요.  한국 교회가 부동산에 관심이 많죠. 겉으로는 하나님 일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과도하게 밀어부치는 방식의 이러한 부동산 집착, 하나님 나라 앞에서 교회도 건물도 다 잠정적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당 짓는 것이 다 잘못된 것이냐? 그 뜻은 아닙니다. 그 기준, 어느 정도가 있는 거잖아요. 자기가 살만큼 집을 마련해서 사는 것하고 소유 지향적이어서 내가 이렇게 너무 과도하게 소유함으로서 어떤 사람들에게 크게 불이익이 가게 된다면 이거는 크게 잘못이죠. 사실은 그것을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제가 말을 너무 쉽게 하는 것 같은데 하여튼 방향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기서 해야 할 문제가 많이 있는데 강의안이 다비아에 올라갔으니까 보세요. 결론을 제가 말씀 드리려구요. 결국은 기독교 윤리는 생명윤리인데 생명 하면 여러분들이 탁 탁 생각나는 게 있어야 하는거예요. 뭐가 생각나요. 이거는 하님의 나라예요. 그리고 또 종말도 생각이 나야 되는데요. 왜 생명하는데 종말이 생각나는 겁니까? 누가 한번 대답해보세요. 학생으로 생각하고 질문을 합니다. 생명이라는 단어를 듣고 종말이라는 단어가 생각나는 것이 무엇일까요? 누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죽으니까. 그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생각했던 답은 아니네요. 완성되는 과정이니까? 고거만 해도 되겠습니다. 죽음, 완성 다 연결되니까 완성되니까 그렇습니다. 결국은 기독교 윤리는 종말론적 윤리가 되는거예요. 아 너무 멀다. 너무 거시적이다. 지금 당장 옆에 사람과 싸우냐 마냐 돈 어떻게 하느냐 그게 문제인데 왜 그렇게 하나님 나라가 거기에 들어올 수 있느냐? 인제 신학적인거이기 때문에 그런거구요. 물론 구체적으로는 사람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분명한거죠. 앞에서 성도 이야기하고 기업 윤리 다 있지만 그거는 또 그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를 해야되구요. 방향을 이야기 하는겁니다.

종말에 근거한 생명윤리인데요. 이게 유기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기적인 생명윤리, 우리 생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고 우리가 살아있다고 하는 것, 하나의 개체실존은 독립되어 있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요. 어떻게 유기적인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핵심인거죠. 유기적이라고 하는 말을 제가 조금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해야 되겠습니다.

세월이 좀 흘렀다고 합시다. 몇 십 년도 좋구요. 몇 백 년 흘렀다고 합시다. 몇 백년후에 어떤 젊은 부부가 장애인 아기를 출산했습니다. 얼마나 불행한 이야기애요. 그래서 그 부부가, 몇 백 년 후에는 과학이 발달해서 이 이유가 뭐냐 쭈욱 거슬러 올라가서 발견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가상 영화 한편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부가 그 비싼 돈을 내고 자기의 아이가 장애아로 태어난 이유가 무엇인가를 추적해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 나온 답이 뭐냐 하면 고조 할아버지가 외가인지 친가인지 어떻던, 유해식품을 상당한 동안 팔은 거에요. 만들어서 공장을 했죠. 큰 공장을 하면서 팔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일반 사람들이 먹었어요. 그게 몸에 축적되어서 점점 점점 몇세대 내려가서 주욱 연결되어서 결국은 자기의 밑의 손자 손녀에게 그러한 장애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게 말이 되는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서로 얽혀있어요. 저하고 미국에 쭈욱 연관시켜 보면 지금 인터넷이 넷트웍이라면서요. 망이라면서요. 너무 멀기 때문에 잘 모르지만 연결되어 있습니다. 진화론적으로 그건 분명한 거구요. 우리가 지금 무슨 행동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관계를 맺는가 하는 거는 바로 내 아들 딸 손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연관되는거다라는 것을 생각해야 된다는 것이죠. 기독교 기업가라 한다면 지금 당장 내가 돈 벌고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전체 인류 우리 후손의 차원에서 자기의 행동을 결정해야 된다고 하는거죠. 그게 말이 되나요? 유기론적 생명윤리라고 하는게요.

결론적으로 패러그래프를 읽고 마치겠습니다.

궁극적으로 볼 때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인간이라는 종이 과연 윤리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의문스럽다. 인간을 제외하고 이 지구상의 어떤 동물도 생태계의 메카니즘을 끊어내면서까지 자기 종족을 늘리거나 생산하고 소비하지 않는다. 호랑이가 토끼의 씨를 말리는가? 올빼미가 쥐의 씨를 말리는가? 가물치나 메기가 강물을 오염시키는가? 뱀장어가 갯벌을 개간하는가? 오직 인간만이 취미생활로 다른 생명체를 죽이고 생산을 위해서 생태계의 숨을 끊어버린다. 우리가 일상적인 삶에서 별로 실감하지 못하는, 결국 망각해버린 사실이 있다. 다람쥐, 메뚜기, 거미, 여우를 비롯해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우리와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결국은 하나다. 인간만 이 땅에서 생존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지구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는 그 어떤 것도 배타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윤리는 다른 게 아니라 모든 인간의 인간다움을 살려내는 일인 동시에 모든 생명체의 생명다움을 유기적으로 일궈내는 작업이다.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은 이 일에 신앙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이다.

네 우리가 이 수업이 두번, 큰 걸로 볼 때 두장이 남았습니다. 11장과 12장요. 기독교와 한민족이 11장이구요. 그리고 12장이 20세기 한국교회의 미래입니다. 지금까지는 한 장을 두주에 나눠서 했는데 다음에는 한 장을 한주씩 해서 19일과 26일 두번하면 다 마칠것 같습니다.

네 이번 토요일에는 특별 동영상 강의가 있습니다. 이병권박사가 미국 기독교인들의 특별한 종교적 현상이 있다고 합니다. 재미있더군요. 맛을 좀 봤는데요. 토요일 강의를 하니까 시간은 같은 대입니다. 밤 10시에서 11시대에요. 가능하면 좀 찾아주시죠. 교실에 들어와 주시죠. 이름만 다르고 다른 것은 똑 같습니다. 방이름은 ‘이병권’하고 다른 것은 똑 같습니다.

가을 소풍 어머니가 뇌수술을 받는다고 하는데 기억나는 대로 기도해주시고요. 그리고 요즈음 다비아, 그 쇠고기 촛불집회때문에 많이 시끄럽죠. 그래서 어떤 분들은 너무 그런 것이 많다 불평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쪽지를 주는 분들도 있구요. 약간 과한 점이 없잖아 있기는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게 우리 이슈이기때문에 막기도 힘들구요. 등등 빨리 이런 일들이 잘 정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편히 주무시구요. 질문이 있으시면 다비아 동영상에 올려주세요.

아 오늘 여기 동영상 강의 카메라 장치를 못했네요. 깜박했네요. 다른 것 하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