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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느낌 몇 마디 쓰고 마무리를 지으려고 생각한 소감이 드라마 시리즈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받아쓰기가 차라리 쉬웠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글 진도가 잘 안나갑니다만 손을 대면 끝을 봐야(觸手取果)하는 법, 결말 부분이 될 이 짧은 글은 목사님 강의 전반에 절절이 차고 넘쳤던 어머니 교회에 대한 애정을 짚어보고 이제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간단한 자기 방향을 잡고 결말을 지을까 합니다. 논문이 아닌 소감이니 간혹 곁길로 새서 글의 긴장감이 확 떨어진다 하더라도 인도에서 더위 먹어 그러려니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웃겨님 말씀처럼 ‘인도의 무더위에 푹 익은 소감문’ 나갑니다.
강의에 수시로 언급되었던 한국의 내노라하는 교회와 그 지도자들에 대한 목사님의 언급은 초기에는 받아들이기 힘든 충격이었습니다. 그렇게까지 부정적으로 이들을 보아야 할 것인가 아마 한 부분을 너무 부풀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의 똬리가 상당기간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강의가 진행되어 가면서 참 하나님 나라, 하나님과 생명 세계에 눈을 떠가면서 전부로만 알고 있었던 세계가 우물안에 좌정하여 바라본 하늘이라는 것을 무릎을 치면서 깨달았습니다. 무당굿과 흡사한 부흥회, 기업계를 닮은 교회의 조직운영, 교회내에서 죄의 영성을 강조하여 이를 무기로 자행되는 영육간의 조폭수준을 뛰어넘는 폭력, 신학의 빈곤으로 인해 빚어진 정통과 이단의 구분이 모호한 닮은 꼴, 과학으로서도 객관성을 잃은 창조론의 신봉 등의 한국 교회의 문제로 인해 깊이 탄식하시는 목사님의 안타까움이 강의 곳곳에 수시로 묻어나왔습니다. 사실 저 자신도 이 모든 것들이 전에는 자신이 믿음이 연약하기 때문에,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는 이름으로 덮어두고 제쳐 두었기에 이 비판에서 전혀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삼위일체의 신앙이 실체화되지 않고 감정적인 신앙에 몰두하다보니 어느덧 현실과 신앙이 이반된 무책임한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의 모순된 모습조차도 깨닫지 못한 무지속에서 살아왔습니다.
많은 문제중에서도 설교에서 주일 강단의 말씀을 맡으신 분들이 예수천당, 불신지옥의 패턴과 3박자축복을 외치며 꿩도 먹고 알도 먹고자 하는 심사를 가진 신도들의 욕망을 부추기는 설교, 심리학과 상담학의 어설픈 적용으로 심리적 만족을 주는 그런 설교로 시간을 채우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한탄하셨습니다. 말씀 연구를 더 하고 성경 본문속으로 더 깊이 천착하여야 할 분들이 얼마의 대교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성도의 부부싸움 해결사 역할부터 장례식 염을 하는 장의사 역할까지 다 신경 써야 하므로 오는 영적인 고갈, 그걸 알면서도 호랑이 등에 탄 형국이 되어 언젠가는 부흥이 되면 나도 한번 이라고 하는 소망을 갖고 생명력을 갉아먹고 살아야 하는 목회 현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예배를 열린음악회 수준으로 만들어 놓고 예배의 가치를 하나님을 경배하는데 두기보다 성도가 은혜받는데 초점을 맞추는, 예배의 형식은 있는데 정작 그 예배를 받으실 하나님이 등한시 되어 있는 행태로 인해 심히 개탄해 마지 않으셨지요. 이런 목회 현실이 한국 교회 전반에 깊숙히 스며들어 암 말기같은 행태가 정도로 그 병이 너무나 넓고 깊어서 어디서부터 집도를 해야할 지 알 수 없는 당혹감들이 부지불식간에 강의속에서 묻어 나오고 그때마다 ‘이런 이야기하려고 한건 아닌데...’ 하면서 접곤 하였고 저 또한 그 절절한 안타까움에 눈물이 배어나왔습니다. 그 부분을 타이핑하다가 키보드위에 손을 놓고 한참을 그냥 멍하니 앉아 있곤 하였습니다. 키리에 엘레이송!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Lord, Have mercy upon us!
아마 그래서 목사님은 지도자 그룹인 바리새인들을 부단히 책망하시면서 그들을 회개시키고자 애쓰시다가 그들에게서 소망을 잃으시고 어부들과 세리, 운동권 소속 제자들을 붙들고 씨름하신 예수님처럼 이 땅의 평신도들에게서 소망을 찾고자 다비아 운동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정오 가까운 중동의 불볕 더위속 사마리아 수가를 향하여 발길을 옮기셔야만 했던 예수님처럼 밤 11시, 모두가 잠든 시간에 피곤함을 무릅쓰고 강의를 진행해오셨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저에게 느껴진 이 목사님의 마음은 어머니 대한민국교회의 황폐화된 모습을 인하여 울부짖는 울릉도된 심정으로 다가왔습니다. 동영상 강의를 통하여 알게 모르게 그런 심정, 그런 애증을 배웠습니다. 작은 시골교회 목사로서 무엇을 할 수 있나 하시면서도 비서 한 명없는 다비아모임을 그야말로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는 모습으로(죄송합니다. 표현이) 서울로, 대구로, 포항으로 다니시면서 섬겨가시는 목사님을 보면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배웠습니다.
이제 이렇게 배움의 귀한 순간을 가진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곰씹어 보며 글의 결말을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현재 한국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한국교회의 영향도 거의 받지 않습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조직이 주는 횡포로 인해 자신뿐만 아니라 형제자매들에게까지 마음에도 없는 부당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 싫어서였습니다. 모임의 입장에서 보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라고 재단하고 책망할 일이었지만 그런 요구에서 자유로운 자비량입니다. 파송교회에서 재정지원을 해주면서 보고실적을 내라는 요구도 받지 않습니다. 파송교회 목사님은 이런 제가 너무나 부럽다고 하시더군요.
그러나 이런 저도 고민은 많습니다. 다비아를 알고 나서 고민은 더 심각해졌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주일 설교 말씀을 섬기는 문제입니다. 전에는 말씀 섬기는 것이 버거우면 리더들에게 한 달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섬기게 하면서 여유를 부리기도 했었는데 케리그마의 중요성을 배우다 보니 그것도 덜컥 겁이 났습니다. 자신은 성장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서도 폼만 잡아도 그냥 작은 모임을 문제없이 이끌어 나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동영상 강의는 제가 올바른 기독교를 전파하는 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집안에서 새던 바가지 선교지에 나와서까지 새는구나! 라는 위기감이 생겨났습니다.
가장 먼저 준 변화는 성경공부와 주일말씀을 교회력에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한 주일전 구약, 서신, 복음서 성경구절을 프린트해주고 주중 리더 성경공부시간에 같이 토론을 하였습니다. 리더들에게 한 부분씩 주석, 해석, 응용의 방식으로 원고를 작성하여 10분정도 발표를 하도록 하고 같이 토론하는 시간을 가진 다음 다시 주말 즈음 각기 소그룹을 모아 서로 토론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주일말씀도 이를 기초로 준비하였습니다. 3-4쪽의 메시지를 준비하는 것이 주말마다 압박으로 다가오지만 그래도 아직 때묻지 않는 젊은이들이 같이 배워가고자 하고 질문이 늘어나는 것이 인하여 작은 기쁨이 됩니다.
힌두와 무슬림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종교공화국 인도, 만나는 이들과 생명력이 담긴 이야기를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자신을 느낍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들이 변화될 것인가에 대한 희망이 솔직히 절벽입니다. 그래도 소망이 되는 것은 만 가지를 떠나 저에게 상관없이 계신 듯 하던 예수님이 이 절박한 선교현실에서 조금씩 조금씩 가까와 지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은 절대 자신할 수 없는 아득함으로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의 삶의 토대가 예수님이신 사실은 점점 더 선명해지는 것입니다. 아직도 매순간 주님의 긍휼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허물과 실수, 결점으로 점철된 눈먼 자이지만 이 예수님으로 인해 사랑하는 자에게 모든 것을 풍성하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저는 만족할 수 있습니다. 아,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런 저에게 이렇게 세세한 관심을 기울이시다니요. 이같은 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할때 목사님께서 강의시간에 슬쩍 슬쩍 비치신 만인구원설의 의미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원과 생명의 주체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규범, 틀에 속한 것이 아니라 바람처럼 역사하시는 하나님 고유의 세계인지라 기독교 밖의 구원도 조심성있게 열어 두어야 합니다. 짱돌 날라오는 소리가 많이 들리지만 그래도 이 한심한 세상을 이토록 힘들게 구원하시려 애쓰시는 성령님의 사랑의 손길을 코끼리 꼬리의 털의 반만큼이라도 느끼는 저에게는 짱돌을 맞더라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이때서야 저는 비로소 아무런 편견과 거리낌없이 힌두와 무슬림과 스님들에게 열린 마음으로 나갈 근거를 확보하게 됩니다.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무장해제를 시킨 것입니다. 제가 제대로 가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동영상강의에서 확보된 저의 선교의 근거입니다. 그들과의 대화 가운데서 저는 십자가와 부활을 쉬임없이 경험하겠지요.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할 수 있겠지요. 이것이 저를 인도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이면 아전인수인가요?
동영상 강의를 받아쓰기를 마무리 짓고 키보드에서 손을 순간에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것 같더니 이렇게 풀어나가다 보니 어느새 저의 생각이 이토록 변해 있었군요. 사유의 흐름 방향이 이토록 변해 왔군요.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이군요. 그래서 이 모든 사실이 저로 미소를 짓게 합니다. 어제 두 달여 만에 방문한 미대사관 매점에서 저를 본 경비가 그러더군요. 자기가 그곳에 근무한지 1달이 넘었는데 웃는 한국인은 당신이 처음이 다라고요. 그는 제가 왜 웃는지 이유를 모를겁니다. 아마 언젠가 기회가 주어지면 내가 왜 웃게 되는지 이유를 설명해 주어야 하겠지요. 나로 웃게 하시는 이의 그를 향한 사랑을 차근차근 풀어서 설명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나가야 하겠지요. 준비가 되면 생명과 구원 역사의 주체이신 성령님께서 도구로 저를 서슴없이 쓰실 수 있겠지요. 일상속에서 그런 성령님의 움직임을 예민하게 포착할 수 있도록 자신을 가볍게 해 나가야 하겠지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군요. 간밤에 몬순으로 인한 비가 내렸습니다. 하루를 시작하는 이 순간 풀잎위에 구르는 이슬에 빙그레 웃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누구세요?
마지막으로 옛날 불렀던 복음성가 하나를 불러봅니다.
1 너는 왜 항상웃니 슬퍼도 눈물나도
2 너는 뭘 감사하니 아무것도 없는데도
3 너는 왜 기뻐하니 마음이 괴로와도
남들은 모를거야 왠지좋아 항상 좋아
무엇이 그리좋은지 나도 알게해다오
1 너와나 만나려고 주예수님 오셨단다
2 너와나 죄씻으려 주님피를 흘렸단다
3 너와나 데려가려 주예수님 오셨단다
참기뻐 왠지기뻐서 항상 웃고 항상 찬송
정말좋아 왠지좋아 또 기뻐서 찬송하네 (찬미예수 2000에서)
강의에 수시로 언급되었던 한국의 내노라하는 교회와 그 지도자들에 대한 목사님의 언급은 초기에는 받아들이기 힘든 충격이었습니다. 그렇게까지 부정적으로 이들을 보아야 할 것인가 아마 한 부분을 너무 부풀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의 똬리가 상당기간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강의가 진행되어 가면서 참 하나님 나라, 하나님과 생명 세계에 눈을 떠가면서 전부로만 알고 있었던 세계가 우물안에 좌정하여 바라본 하늘이라는 것을 무릎을 치면서 깨달았습니다. 무당굿과 흡사한 부흥회, 기업계를 닮은 교회의 조직운영, 교회내에서 죄의 영성을 강조하여 이를 무기로 자행되는 영육간의 조폭수준을 뛰어넘는 폭력, 신학의 빈곤으로 인해 빚어진 정통과 이단의 구분이 모호한 닮은 꼴, 과학으로서도 객관성을 잃은 창조론의 신봉 등의 한국 교회의 문제로 인해 깊이 탄식하시는 목사님의 안타까움이 강의 곳곳에 수시로 묻어나왔습니다. 사실 저 자신도 이 모든 것들이 전에는 자신이 믿음이 연약하기 때문에,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는 이름으로 덮어두고 제쳐 두었기에 이 비판에서 전혀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삼위일체의 신앙이 실체화되지 않고 감정적인 신앙에 몰두하다보니 어느덧 현실과 신앙이 이반된 무책임한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의 모순된 모습조차도 깨닫지 못한 무지속에서 살아왔습니다.
많은 문제중에서도 설교에서 주일 강단의 말씀을 맡으신 분들이 예수천당, 불신지옥의 패턴과 3박자축복을 외치며 꿩도 먹고 알도 먹고자 하는 심사를 가진 신도들의 욕망을 부추기는 설교, 심리학과 상담학의 어설픈 적용으로 심리적 만족을 주는 그런 설교로 시간을 채우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한탄하셨습니다. 말씀 연구를 더 하고 성경 본문속으로 더 깊이 천착하여야 할 분들이 얼마의 대교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성도의 부부싸움 해결사 역할부터 장례식 염을 하는 장의사 역할까지 다 신경 써야 하므로 오는 영적인 고갈, 그걸 알면서도 호랑이 등에 탄 형국이 되어 언젠가는 부흥이 되면 나도 한번 이라고 하는 소망을 갖고 생명력을 갉아먹고 살아야 하는 목회 현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예배를 열린음악회 수준으로 만들어 놓고 예배의 가치를 하나님을 경배하는데 두기보다 성도가 은혜받는데 초점을 맞추는, 예배의 형식은 있는데 정작 그 예배를 받으실 하나님이 등한시 되어 있는 행태로 인해 심히 개탄해 마지 않으셨지요. 이런 목회 현실이 한국 교회 전반에 깊숙히 스며들어 암 말기같은 행태가 정도로 그 병이 너무나 넓고 깊어서 어디서부터 집도를 해야할 지 알 수 없는 당혹감들이 부지불식간에 강의속에서 묻어 나오고 그때마다 ‘이런 이야기하려고 한건 아닌데...’ 하면서 접곤 하였고 저 또한 그 절절한 안타까움에 눈물이 배어나왔습니다. 그 부분을 타이핑하다가 키보드위에 손을 놓고 한참을 그냥 멍하니 앉아 있곤 하였습니다. 키리에 엘레이송!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Lord, Have mercy upon us!
아마 그래서 목사님은 지도자 그룹인 바리새인들을 부단히 책망하시면서 그들을 회개시키고자 애쓰시다가 그들에게서 소망을 잃으시고 어부들과 세리, 운동권 소속 제자들을 붙들고 씨름하신 예수님처럼 이 땅의 평신도들에게서 소망을 찾고자 다비아 운동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정오 가까운 중동의 불볕 더위속 사마리아 수가를 향하여 발길을 옮기셔야만 했던 예수님처럼 밤 11시, 모두가 잠든 시간에 피곤함을 무릅쓰고 강의를 진행해오셨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저에게 느껴진 이 목사님의 마음은 어머니 대한민국교회의 황폐화된 모습을 인하여 울부짖는 울릉도된 심정으로 다가왔습니다. 동영상 강의를 통하여 알게 모르게 그런 심정, 그런 애증을 배웠습니다. 작은 시골교회 목사로서 무엇을 할 수 있나 하시면서도 비서 한 명없는 다비아모임을 그야말로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는 모습으로(죄송합니다. 표현이) 서울로, 대구로, 포항으로 다니시면서 섬겨가시는 목사님을 보면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배웠습니다.
이제 이렇게 배움의 귀한 순간을 가진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곰씹어 보며 글의 결말을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현재 한국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한국교회의 영향도 거의 받지 않습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조직이 주는 횡포로 인해 자신뿐만 아니라 형제자매들에게까지 마음에도 없는 부당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 싫어서였습니다. 모임의 입장에서 보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라고 재단하고 책망할 일이었지만 그런 요구에서 자유로운 자비량입니다. 파송교회에서 재정지원을 해주면서 보고실적을 내라는 요구도 받지 않습니다. 파송교회 목사님은 이런 제가 너무나 부럽다고 하시더군요.
그러나 이런 저도 고민은 많습니다. 다비아를 알고 나서 고민은 더 심각해졌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주일 설교 말씀을 섬기는 문제입니다. 전에는 말씀 섬기는 것이 버거우면 리더들에게 한 달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섬기게 하면서 여유를 부리기도 했었는데 케리그마의 중요성을 배우다 보니 그것도 덜컥 겁이 났습니다. 자신은 성장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서도 폼만 잡아도 그냥 작은 모임을 문제없이 이끌어 나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동영상 강의는 제가 올바른 기독교를 전파하는 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집안에서 새던 바가지 선교지에 나와서까지 새는구나! 라는 위기감이 생겨났습니다.
가장 먼저 준 변화는 성경공부와 주일말씀을 교회력에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한 주일전 구약, 서신, 복음서 성경구절을 프린트해주고 주중 리더 성경공부시간에 같이 토론을 하였습니다. 리더들에게 한 부분씩 주석, 해석, 응용의 방식으로 원고를 작성하여 10분정도 발표를 하도록 하고 같이 토론하는 시간을 가진 다음 다시 주말 즈음 각기 소그룹을 모아 서로 토론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주일말씀도 이를 기초로 준비하였습니다. 3-4쪽의 메시지를 준비하는 것이 주말마다 압박으로 다가오지만 그래도 아직 때묻지 않는 젊은이들이 같이 배워가고자 하고 질문이 늘어나는 것이 인하여 작은 기쁨이 됩니다.
힌두와 무슬림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종교공화국 인도, 만나는 이들과 생명력이 담긴 이야기를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자신을 느낍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들이 변화될 것인가에 대한 희망이 솔직히 절벽입니다. 그래도 소망이 되는 것은 만 가지를 떠나 저에게 상관없이 계신 듯 하던 예수님이 이 절박한 선교현실에서 조금씩 조금씩 가까와 지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은 절대 자신할 수 없는 아득함으로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의 삶의 토대가 예수님이신 사실은 점점 더 선명해지는 것입니다. 아직도 매순간 주님의 긍휼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허물과 실수, 결점으로 점철된 눈먼 자이지만 이 예수님으로 인해 사랑하는 자에게 모든 것을 풍성하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저는 만족할 수 있습니다. 아,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런 저에게 이렇게 세세한 관심을 기울이시다니요. 이같은 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할때 목사님께서 강의시간에 슬쩍 슬쩍 비치신 만인구원설의 의미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원과 생명의 주체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규범, 틀에 속한 것이 아니라 바람처럼 역사하시는 하나님 고유의 세계인지라 기독교 밖의 구원도 조심성있게 열어 두어야 합니다. 짱돌 날라오는 소리가 많이 들리지만 그래도 이 한심한 세상을 이토록 힘들게 구원하시려 애쓰시는 성령님의 사랑의 손길을 코끼리 꼬리의 털의 반만큼이라도 느끼는 저에게는 짱돌을 맞더라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이때서야 저는 비로소 아무런 편견과 거리낌없이 힌두와 무슬림과 스님들에게 열린 마음으로 나갈 근거를 확보하게 됩니다.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무장해제를 시킨 것입니다. 제가 제대로 가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동영상강의에서 확보된 저의 선교의 근거입니다. 그들과의 대화 가운데서 저는 십자가와 부활을 쉬임없이 경험하겠지요.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할 수 있겠지요. 이것이 저를 인도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이면 아전인수인가요?
동영상 강의를 받아쓰기를 마무리 짓고 키보드에서 손을 순간에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것 같더니 이렇게 풀어나가다 보니 어느새 저의 생각이 이토록 변해 있었군요. 사유의 흐름 방향이 이토록 변해 왔군요.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이군요. 그래서 이 모든 사실이 저로 미소를 짓게 합니다. 어제 두 달여 만에 방문한 미대사관 매점에서 저를 본 경비가 그러더군요. 자기가 그곳에 근무한지 1달이 넘었는데 웃는 한국인은 당신이 처음이 다라고요. 그는 제가 왜 웃는지 이유를 모를겁니다. 아마 언젠가 기회가 주어지면 내가 왜 웃게 되는지 이유를 설명해 주어야 하겠지요. 나로 웃게 하시는 이의 그를 향한 사랑을 차근차근 풀어서 설명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나가야 하겠지요. 준비가 되면 생명과 구원 역사의 주체이신 성령님께서 도구로 저를 서슴없이 쓰실 수 있겠지요. 일상속에서 그런 성령님의 움직임을 예민하게 포착할 수 있도록 자신을 가볍게 해 나가야 하겠지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군요. 간밤에 몬순으로 인한 비가 내렸습니다. 하루를 시작하는 이 순간 풀잎위에 구르는 이슬에 빙그레 웃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누구세요?
마지막으로 옛날 불렀던 복음성가 하나를 불러봅니다.
1 너는 왜 항상웃니 슬퍼도 눈물나도
2 너는 뭘 감사하니 아무것도 없는데도
3 너는 왜 기뻐하니 마음이 괴로와도
남들은 모를거야 왠지좋아 항상 좋아
무엇이 그리좋은지 나도 알게해다오
1 너와나 만나려고 주예수님 오셨단다
2 너와나 죄씻으려 주님피를 흘렸단다
3 너와나 데려가려 주예수님 오셨단다
참기뻐 왠지기뻐서 항상 웃고 항상 찬송
정말좋아 왠지좋아 또 기뻐서 찬송하네 (찬미예수 2000에서)
2008.07.27 18:43:04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니 목사님의 긴 댓글이 달려져 있군요.
어설픈 꼭지길에 진지하게 댓글을 달아 주셔서 정말 감격입니다.
진리를 끌어가는 영이 주체라는 말씀이 눈에 화악 들어오는 군요.
오늘 주일말씀을 준비하면서(고전 3:9-15)
예수 그리스도를 터로 잡아 지어가는 집의 자재가
금은보석도 있고 나무나 풀이나 짚이 있는데
그걸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 내내 고민이었습니다.
그냥 쉽게 가자는 유혹이 내내 따라 다녔지만
이것은 아니다라는 도리질로 고민고민끝에
전자는 하나님의 긍휼에 전적하는 삶이며
후자는 자기의, 업적의로 지어가는 집이라고 풀어버렸습니다.
말씀의 영에 자기를 맡기는 삶이 무력해보이지만
그 존재속으로 자기를 던져넣는 삶만이 정녕 생명이 되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존재속으로 뛰어드는 연습이란 말씀이 그렇게 낯설게만 느껴지지 않습니다.
저도 따라 연습을 많이 하겠습니다.
연대와 자유의 의미를 좀더 곰씹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주일 저녁 보내세요.
어설픈 꼭지길에 진지하게 댓글을 달아 주셔서 정말 감격입니다.
진리를 끌어가는 영이 주체라는 말씀이 눈에 화악 들어오는 군요.
오늘 주일말씀을 준비하면서(고전 3:9-15)
예수 그리스도를 터로 잡아 지어가는 집의 자재가
금은보석도 있고 나무나 풀이나 짚이 있는데
그걸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 내내 고민이었습니다.
그냥 쉽게 가자는 유혹이 내내 따라 다녔지만
이것은 아니다라는 도리질로 고민고민끝에
전자는 하나님의 긍휼에 전적하는 삶이며
후자는 자기의, 업적의로 지어가는 집이라고 풀어버렸습니다.
말씀의 영에 자기를 맡기는 삶이 무력해보이지만
그 존재속으로 자기를 던져넣는 삶만이 정녕 생명이 되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존재속으로 뛰어드는 연습이란 말씀이 그렇게 낯설게만 느껴지지 않습니다.
저도 따라 연습을 많이 하겠습니다.
연대와 자유의 의미를 좀더 곰씹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주일 저녁 보내세요.
2008.08.04 10:44:22

신앙의 깊이와 넓이라는 것이... 그리고 보수인지 진보인지 중도인지 하는 것들이... 기본적으로 우연같은 만남들(encounter)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영원한 세계에 대한 의문이 기본 전제여야 하겠지요.
2008년 상반기를 정목사님의 음성과 사티아님의 글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이야말로 제 인생의 가장 중요한 만남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앙생활의 대부분을 보수적인 장로교인으로, 또 예수전도단식의 신비영성을 추구함으로 지내온 제가 정목사님의 강의를 끝까지 듣게 된것이 신비로군요... 여전히 제겐 사티아님의 웃음보다는 고민스러운 미간의 주름이 강의 이후의 주된 감정이지만, 언젠가 '왜 항상 웃니?' 라는 질문을 받게 될 날들을 조금은 기대해 봅니다. 지난 6개월은 정말 행복했고... 감사했습니다....
* 어제 달팽이, 아침햇살님과 식사하면서 사티아님의 정체?에 대해서 궁금해했습니다. 저희끼리 내린 결론은 대사관에 근무하는 공인이신 것 같은데... 일종의 전문인 자비량 선교사신가 봐요..... 했지요... 맞나요??? ^^;;
2008년 상반기를 정목사님의 음성과 사티아님의 글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이야말로 제 인생의 가장 중요한 만남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앙생활의 대부분을 보수적인 장로교인으로, 또 예수전도단식의 신비영성을 추구함으로 지내온 제가 정목사님의 강의를 끝까지 듣게 된것이 신비로군요... 여전히 제겐 사티아님의 웃음보다는 고민스러운 미간의 주름이 강의 이후의 주된 감정이지만, 언젠가 '왜 항상 웃니?' 라는 질문을 받게 될 날들을 조금은 기대해 봅니다. 지난 6개월은 정말 행복했고... 감사했습니다....
* 어제 달팽이, 아침햇살님과 식사하면서 사티아님의 정체?에 대해서 궁금해했습니다. 저희끼리 내린 결론은 대사관에 근무하는 공인이신 것 같은데... 일종의 전문인 자비량 선교사신가 봐요..... 했지요... 맞나요??? ^^;;
2008.08.11 23:54:17

슬로엔이지님
답변 늦어서 죄송합니다.
저의 정체성에 대한 정의를 적확하게 내려주어서 감사드립니다.
이 길을 걸어오면서 많은 것을 해왔군요.
본토친척아비집을 떠라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그 말씀 붙들고 낯설고 물선 인도에 왔지요.(당시에는 그것이 최고선이었지요)
그렇게 전문인 자비량 선교사로 15년을 흘러왔습니다.
15년이 다 차가던 올해의 전반 6개월은 슬로엔이지님의 고백처럼
행복한 시간이었지요.
지금은 인도에서 험한 일 당한 사람 도우미 역할을 하는 부서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인도 오시는 분들은 꼭 여권을 잃어버리고서가 아니라도
미리 연락하고 들르시면
이태리대사관 문화원의 오리지널 핏짜를 맛보여 드리겠습니다.
금요일엔 인도네시아 대사관 구내식당의 인도네시아 음식도 맛보여 드릴 수 있구요.
사진으로 본 지리산 자락에서 육산구성님식구들과 좋은 시간 보내시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답변 늦어서 죄송합니다.
저의 정체성에 대한 정의를 적확하게 내려주어서 감사드립니다.
이 길을 걸어오면서 많은 것을 해왔군요.
본토친척아비집을 떠라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그 말씀 붙들고 낯설고 물선 인도에 왔지요.(당시에는 그것이 최고선이었지요)
그렇게 전문인 자비량 선교사로 15년을 흘러왔습니다.
15년이 다 차가던 올해의 전반 6개월은 슬로엔이지님의 고백처럼
행복한 시간이었지요.
지금은 인도에서 험한 일 당한 사람 도우미 역할을 하는 부서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인도 오시는 분들은 꼭 여권을 잃어버리고서가 아니라도
미리 연락하고 들르시면
이태리대사관 문화원의 오리지널 핏짜를 맛보여 드리겠습니다.
금요일엔 인도네시아 대사관 구내식당의 인도네시아 음식도 맛보여 드릴 수 있구요.
사진으로 본 지리산 자락에서 육산구성님식구들과 좋은 시간 보내시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2008.10.30 15:39:13
이렇게 늦게 댓글을 달아도 되는지 이싸이트가입한지도오래되었고 눈팅만하고있다가 ....그냥조용히눈팅만하는것이 페를안끼치는것같아서 참고있다가 울컥울컥 가슴이찡해옵니다 저많이 웁니다 이싸이트의 글들을읽으며 정목사님께서 시티아님의 글에대한 댓글 중에 "키에르케골의 표현을 빌린다면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서는것이기 때문이지요 이건 정말 황홀한 경험 이에요"에서 그만 또눈물이.......ps. 여기까지 쓰는데 20분걸렸읍니다
한가지추가 엔터누를까말까망설이는데10분........
한가지추가 엔터누를까말까망설이는데10분........
2008.10.30 15:58:56

와, 드디어 눈꽃 님이 커밍아웃 하셨군요.
지금 눈꽃 님은 생명의 가장 깊은 세계를 조금 씩
실체로 맛보고 있는 중이랍니다.
다비아가 모든 점에서 정잡은 아니지만
영적 순례의 길에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겁니다.
함께 가 봅시다.
그 길을요.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지금 눈꽃 님은 생명의 가장 깊은 세계를 조금 씩
실체로 맛보고 있는 중이랍니다.
다비아가 모든 점에서 정잡은 아니지만
영적 순례의 길에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겁니다.
함께 가 봅시다.
그 길을요.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세번에 이르는 동영상 강의 청강 소감 글을 잘 읽었습니다.
역시 성령은 우리의 모든 생각, 판단, 예측을 뛰어넘는,
그래서 인격(persona)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사티아 님의 글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진리는 그것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끌어가는 영이 주체라는 뜻이에요.
그렇군요.
진리는 사람에게 소유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람이 진리에게 소유될 뿐이군요.
나는 거미줄의 한 자락만 보고 그걸 살짝 건드렸을 뿐인데,
어떤 분은 아득히 먼 저 쪽의 자락이 떨리는 걸 본다는 건
진리의 주인, 주체인 그의 활동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이야기지요.
이런 점에서 진리는 '함께'의 길이기도 하고,
'혼자'의 길이기도 한 것 같군요.
함께와 혼자의 변증법적 긴장에서
우리는 어떤 깨달음, 진리의 충격, 그분의 말걸음 같은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게 아닐는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거꾸로 가는 것 같더군요.
함께 해야 할 대목에서는 따로 하고,
혼자 가야 할 대목에서는 그냥 어울리기만 하려고 하는 거지요.
동영상 강의도 이 두 계기가 함께 일어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어요.
내가 그걸 '사건'이라고 이름을 붙인 게 좀 뭣 하지만
사티아 님을 비롯해서 몇 분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서 말한 것 뿐이에요.
눈에 직접 보이지는 않지만 사이버 공간의 어떤 대상을 놓고 강의를 한 건
곧 '함께'의 계기나 차원이라고 할 수 있고,
아무리 대상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강의하던 순간에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과 나의 대화였다는 건
바로 '혼자'의 계기였다고 할 수 있지요.
앞의 계기는 연대이고, 뒤의 계기는 자유이겠지요.
이 연대와 자유는 동시적 계기이면서 독립적인 계기가 아닐는지요.
이건 단지 관념적인 논리만이 아니라 실제 삶의 작동기제라고도 할 수 있어요.
'더불어'와 '홀로'의 삶이지요.
말이 길었네요.
사티아 님의 글에서 전달되는 게 있어 이렇게 됐네요.
요즘 나도 다시 내 앞에 놓여 있는 이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도록.
그것은 사티아 님이 위 꼭지글에서 말한 그 일상의 영성인데,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존재 속으로 뛰어드는 연습이지요.
생명의 품에 안기는 거지요.
다비안들이 모두 그런 길을 각자 잘 찾았으면 합니다.
이건 누가 억지로 가르쳐 줘서 되는 게 아닌에요.
옆에서 조금 조언을 얻을 수는 있으나
결국 혼자 길을 찾아야 하는 건데요.
왜냐하면 아무도 똑같은 길을 갈 수 없기 때문이거든요.
키에르케골의 표현을 빌린다면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서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건 정말 황홀한 경험이에요.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나는 일 말이지요.
그때 우리는 참된 자유를 알게 되겠지요.
홀로 길을 가지만 전혀 외롭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겠지요.
주의 은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