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답시간(080504)-통합예배, 생명충만

부활절 다섯째 주일이었구요. 보통 교회에서 어린이주일로 지키는 날이었습니다. 대다수의 한국 교회가 어린이 주일로 지키면서 어린이들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는 이벤트를 했겠죠. 저의 교회에서도 어린이 네 명에게 선물을 주었습니다. 예은이, 예림이 자매구요. 한결이, 건이 이렇게해서 남자아이둘, 여자아이둘, 어린이죠.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는 어린이구요. 또 태아 두 명은 선물 주지 못하구요. 어머니 뱃속에 생명이 잉태되고 있구나. 그렇게만 생각했습니다.

어린이와 우리 형편도 그렇지만 따로 할 수 없는 형편이구요. 같이 예배를 드립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모든 세대가 함께 어울려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현실적으로는 유치부나 어린이 주일학교 아이들까지 어른들까지 묶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어렵긴 하겠습니다만 그러나 원칙적으로 말한다면 아이들까지 사실은 다 예배를 드려야 하죠. 실제적으로 좀 어렵다면 어린이들은 가끔, 중고등학교 학생들 이상은 매주 어른들하고 같이 예배를 드리는 것이 당연할 겁니다.

제가 예배와 제사를 비교해서 설명한 적이 있는데 그것 한번 되돌아 보십시오. 어린아이들만 따로 집에서 제사를 드리지 않잖아요. 아이들이 구경만한다고 하더라도, 구경하지만 하지는 않죠. 실제 제사드릴때 제 어릴때 기억이 그런데요. 초등학교 다니기만 하더라도 순서가 되면 설하고 술올리고 그럽니다. 다 참여하거든요. 제사에서 어린이들만 따로 제사를 드리지 않고 다 같이 합니다. 예배도 사실 같이 가는 거거든요. 가능하면 어떻게 세대 간의 차이 그런 것 때문에 구분하지 말고 같이 예배드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그런 걸 좀 찾아가야 될 것 같습니다.

지금 오래전서부터 주일학교는 독립되어 있구요. 학생회도 웬만한 규모가 있는 교회들은 독립되어 있구요. 주일학교도 중고등학교 지도는 따로 교역자들도 있고 신학생들에게 설교도 맡기고 합니다. 그런 것들이 과연 전문적인 부분이라 그렇게 합니다만 그런 것들이 바람직한지는 자신이 없구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리라고 봅니다. 네. 다른 방법이 없기도 하구요 또는 그게 효율성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래 아이들만의 정서와 문화, 거기에 맞춤형의 예배를 드리겠다고 하는거죠.

다시 또 앞으로 돌아가는 이야기 같습니다만은 예배는 전체가 다 같이 드리구요. 그리고 특별 활동이나 교육은 주일학교는 따로 드리도록 하는 그런 방법은 찾아보면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습니다. 너무 우리가 분산되서요. 전문적인 부분이 특화되서 드러나는 부분이 있기는 있습니다만 그 방식으로 정말 중요한 것을 다 놓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열린예배 방식은 더 유난히 그렇죠? 예. 예배의 효율성이라고 제가 말씀을 드리는데요. 주일학교 중고등부 학생들, 심지어는 어떤 교회는 청년부도 대학부도 따로 예배를 드린다면서요. 저는 그거는 심각하게 생각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제사와 연관해서 생각해볼때 기독교 영성이라고 하는 점에서 이게 위기라고 봅니다. 대형교회일수록 이게 더 세분화 되어 있는데요. 그게 과연 바람직 할까요? 제가 자꾸 그 이야기에 머물러 앞으로 나가지 않고 있습니다. 그게 애기하다보니 중요해서 그렇습니다.

지금 저희 샘터교회야 이런 저런 거를 전문적으로 활동할 여건이 되지 않습니다만 앞으로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통합 예배쪽으로 계속 가야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고 어린이 같으면 1부예배, 통합예배를 드리고 중간에 따로 나가서 자기들끼리 공부를 한다는 등으로 얼마든지 방법론은 나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것들이 열린예배로 들어오면서 점점 더 청중들의 눈높이에 맞추는 맞춤형 예배로 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말이 좋아서 열린 예배지 이건 청중들의 종교적 흥미에 부응하겠다고 하는 천박한 세속주의 사업주의에 다름 아니거든요.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이미 제가 글에서도 썼구요. 특별히 온누리 교회 예배 참관기 기독교 사상에도 썼고 다비아 어디에도 올라가 있을겁니다.

그런 것를 제가 지금 길게 하지 않겠어요.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요. 사실은 모두 다 연관되기는 합니다. 제가 말씀을 지금 4개월 정도 지났는데 꾸준하게 들으신 분들은 그런 거를 느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목사가 어떠한 중심을 갖고 있는가? 어떤 관점, 흐름을 따라가고 있는가. 말이죠. 어떤 이야기를 하든지 한쪽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을 느끼시는지 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지금 예배를 드린다고 하더라도 뒤에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하고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냥 미리 맛보기로 한 말씀드린다고 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생명의 충만감을 느끼느냐 하는 것이죠. 생명의 충만감, 네 이거를 확인하고 좀 싶은거죠. 같이 허심탄회하게 내놓고요. 그게 인제 하나님 이해의 핵심, 예배의 핵심이고 말이죠. 교육도 사실은 학생들이 생명 충만감을 어떻게 느낄수 있는가 그리고 아이들이 창조적으로 거기에 들어갈 수 있는가 그걸 끌어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죠. 그거 아니면 그건 죽은 교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생명을 주입시켜서는 안되요. 가르쳐 줄 수가 없는 것 같아요. 하나님도 가르쳐 줄 수 없듯이 생명도 가르쳐 줄 수 없어요. 그 자체가 어려워서라기보다 생명 성령 이러한 힘들은 아주 고유하게 활동하시기 때문이예요. 고유하게, 배타적으로, 그러한 거는 개인 그가 독창적으로 경험하는 것이지 그걸 누가 가르쳐서는 되지 아닙니다. 언저리 까지는 대충 이야기 할 수 있는데 간접적으로는 우리가 신앙의 선배들이나 인생의 스승들을 통해서 어느정도 간접적으로 맛볼 수 있습니다만 탁 마주치는 것은 자기가 해야 되는 거거든요. 그게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란 말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거는 교육으로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다만 그런 것이 있다고 하는 쪽으로 선생들이 학생들을 끌어가는 것 이게 중요한데 과연 그렇게 하고 있는가 문제란 말이죠. 내가 뒤에 이야기할 것을 미리 한 말씀드린 것이고요.

다시 앞에 들어와서요 열린예배, 예배도 주관적으로 생명의 문제이니까  이건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한, 신앙생활 뿐아니라 인간으로 사는 한 이거는 죽을때까지, 생명이 끝날때까지 붙들고 있어야 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느슨하게 생각하면 그냥 스쳐 지나가듯이 구경꾼으로 세상을 살고 끝나고 말죠. 그렇다고 이것이 늘 심각하라 라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충만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사실은 심각하지 않습니다. 그게 없기 때문에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으로 심각하게 되는 거죠. 네 그거를 경험한 사람들은 다른 것을 너무 작아서 그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신경을 많이 쓰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묵상에 나갔나요? 아니면 오늘 나갈건가요? 거기에 보면 보면 예수님의 비유를 잠간 말씀드렸습니다. 보화를 밭을 갈던 사람이 입 딱 다물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와서 집의 재산을 팔아서 그것을 샀다는 것이죠. 그런 보배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지금 자기가 어떻게 되었는지 친구가 나에게 어떻게 섭섭하게 했는지 이런 것에 대해서는 그냥 내려놓는 것이죠. 이게 서로 순환되는 것 같습니다. 정말 그 생명의 충만감 그런 것들의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다른 것을 놓기 때문에 삶이 좋은 뜻으로 loose 해질 수 있구요. 그런 것이 없게 되면 다른 것이 심각해져갖고 무거워집니다. 모든 것들이요. 삶 자체가 무거워져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말씀도 사실 연관되는 거거든요. 그것은 세상살이의 힘든 짐이 아니라 종교적인 짐인데요. 그러한 종교마저도 짐이 되어 버리는 것이죠. 얼마나 심각합니까? 선교도 그렇고 교회 성장도 그렇구요. 신앙생활자체가 엄숙주의에 빠질 수 있어서 너무 가벼운 경솔하게, 말 표현이 정확하지 않는데요. 너무 세속주의적으로 나가서 그냥 신앙생활을 취미생활처럼 해버리고 마는, 자기 존재 전체가 담기지 않는 그러한 것은 물론 잘못인데요. 그러나 너무 무거운 것 질질 끌고 사는 것, 이게 무거운 짐인데요. 그런 사람, 종교도 그렇게 짐이 될 수 있습니다.

열린 예배라고 하는 것은 통합예배를 강조하면서 애기를 드린거예요. 통합예배, 세대간의 격차를 두지 않는 할아버지 손자나 아들딸들이나 젊은이나 늙은이나 남녀 할 것 없이 장애인이나 동성애자나 이성애자나 할 것없이 모두가 더불어서 함께 통합적인 세대 차이가 극복되고 온전히 생명의 영인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만이 지배하는 그런 예배로 어떻게 우리가 집중할 수 있나 그러한 예배형식으로 만들어 가느냐 하는거예요. 그러한 쪽으로 가지 않고,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하는 기본취지로 가지 않고, 어떻게 하면 청중들의 입맛에 맞는 예배를 드릴 것이냐에 극대화하는 것이 열린 예배라는 것이죠. 여기에는 흥미 재미만 있으면 됩니다. 제가 너무 원칙적인 거만 말씀드리는 것 같아서 미안합니다. 당신이 지금 말하는 것이 신학적으로 옳을지 모르지만 실질적으로 우리의 교회생활에서 그거는 말이 되지 않는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건 좀 제가 설명하기는 쉽지 않군요.

이렇게 예를 들어서 음악 연주회장이 있잖습니까? 연주행위, 그리고 청중들이 있고 연주자가 있습니다. 네. 두 가지가 서로 대립되는 거예요. 음악의 존재론적 힘이 지배하는 연주냐? 아니면 청중들의 반응이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연주냐 하는 겁니다. 이 두 개가 때로는 연결되기도 하고 때로는 대립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먼저한 이야기를 이해하시겠죠. 음악의 존재론적 힘이 지배하는 연주란 말입니다. 음악의 존재론적 힘이다. 이거는요. 기본적으로 소리, 음악이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그게 있다 하는 것을 전제합니다. 존재론적인 힘이 있다 하는 겁니다. 이 말은 지금 예술론 아니라 하나님 이야기하는데도 중요한데요. 좀 더 이야기를 해야 하겠습니다.

제가 문을 열어놓아야 하겠습니다. 문을 꼭꼭 닫아 두었더니 덥네요. 잠간만 기다리세요. 두두툭 차라락 차라락 착, 떨커덕. 네. 아 그러고 보니까 제가 양복을 위에까지 입었군요. 네 덥네요. 네 벗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만들어낸 게 아니라요. 그런 소리 이런 것도 우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 그렇게 있는 거다 하는 거다. 요한복음의 로고스가 태초에 세상을 창조할 수 있었던 언어로 나오는 것인데요. 그것도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충분하지 않고 툭툭 던지듯이 하면 전달이 좀 안되는데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해가 충분히 되지 않더라도 이해해 주시구요. 그러니까 그런 차이가 있다고 하는 것이죠. 청중들이 얼마나 나에게 열광하느냐에 거기에 놓고 하는 것과 소리를 따라가는 연주가 따로 있습니다. 제가 지금 강의하는 것도 마찬가지거든요. 얼마나 청중들에 대한 반응과 내 사유를 통해서 신학적인 힘들을 따라가고 있느냐 아니냐 그러한 것입니다. 이게 사실은 딱 겉으로 표시가 나는 것은 아니예요. 그러나 볼 수 있는 것이죠.

예배에서도 삼위일체 하나님, 존재론적 계시에게 초점을 두는 예배가 있고, 이거를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청중들의 은혜에 초점을 놓는 예배가 있습니다. 지금 열린 예배와 이런 방식의 것들은 다 청중들 위주의 예배입니다. 현대 설교학 교수들의 이론들도 다 청중 중심주의입니다. 그러니까 이 존재론이 너무 약한거예요. 제가 보기에는. 네 어쩔 수 없습니다. 시대가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다 살아가는 삶도 그렇구요. 요즘 한국에는 소고기 수입 때문에 야단이 났습니다만. 그것도 등등, 신자유주의를 중심으로 한 경제만능주의, 경쟁력만 제고하면 모든 것이 통용되는 그러한 시대정신으로 우리를 끌고가기 때문에 예배마저도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하나님의 계시마저도 우리가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러한 신앙의 태도가 그런 것 같습니다. 통합예배를 드려야 된다고 하는 것 제가 앞부분에서 강조하기 위해 말씀드렸습니다.

아 네. 오늘 저희 교회 설교의 제목이 간질병과 믿음이었거든요. 요게 다 연관되는거예요. 오늘 제가 생명의 충만감을 뒷부분에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중요한 것으로. 앞부분에서는 통합예배가 되어야 한다. 어린이 주일예배, 어린이들만 따로 자꾸 예배를 드리는 것 보다 눈높이에 맞추는 예배보다 통합적인 예배가 더 하나님께 바른 예배라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열린 예배 문제 이런 것들을 좀 짚었습니다. 이게 다 생명의 문제이구요.

간질병과 믿음을 자꾸만 언급하려고 하는 이유는 믿음이라고 할 때 이 문제도 다 생명과 연관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본문을 여러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간질병 걸린 부모가 예수님에게 와서 말하자 제자들은 고치지 못했고 예수님은 왜 믿음이 없느냐 말씀하시면서 마귀를 내쫒고 고치셨습니다. 제자들이 나중에 사람들이 물러간 다음에 우리가 왜 그렇게 못했습니까? 믿음이 약한 연고다. 겨자씨만 한 믿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산더러 저기에 바다에 빠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다 믿기만 하면 안 될 것이 없다. 전승은 마태마가 누가 세 공관복음서에 다 있는데요 마가복음이 제일 자세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축소시켰어요. 부분적으로 그렇습니다.

그 이야기. 여러분 그런 말씀 들을때 성경을 어떻게 받아들이시나요? 자꾸만 성경을 의심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려고 하는 핵심을 우리가 받아들여야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삶이 이원론에 빠져요. 그러니까 우리와 세상 삶이 엇박자로 나가게 됩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가 있는데 이치와는 다른. 물론 우리는 깊은 차원에서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이 시대정신의 이치를 따라가지 않는 것은 분명합니다만 일상적인 삶에서마저 거기서도 이 세상의 이치와는 다른 것을 주장하면 그건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 되거든요. 설교에 한 예를 들었었는데요. 설교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습니다만 예화를 C.S. Lewis의 글이 생각나서 설교문에 썼습니다. C. S. Lewis가 참 좋은 문학가이구요. 신학적 마인드도 탄탄하고 아주 건전하게 사시는 분입니다. 이 사람이 신학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저렇게 인문학적 사유, 그걸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성서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언젠가 다른 분의 한국의 소설가를 예를 들었죠. ‘한 말씀만 하소서’ 그 수필집도 썼구요 ‘님이여 그 숲을 떠나지 마오’ 도 썼구요. 박완서 선생, 그 분의 서울대교구  주보에 몇년간에 걸쳐서 쓴 ‘작은 성서 묵상’, 신학자 저리가라 할 정도로 말씀의 깊이로 들어가더군요.

C.S.루이스가 하나님의 창조 세상의 이치를 이야기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어떤 깡패가 어떤 선한 사람을 야구방망이로 칠때 하나님이 그 순간에 야구 방망이를 꽃으로 변화시키시겠느냐? 하는거죠.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언덕을 올라가는 것은 힘들게,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언덕을 올라가는 것은 힘들 수 밖에 없어요. 믿는다고 해서 그 언덕이 다시 내리막길로 갑자기 되버린다고 한다면 그것은 카오스가 되버리는 거죠.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다스리지 않는다는 그런 이야기를 정확히 기억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루이스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보세요. 간질병 걸린 사람은 믿음만 있으면 고칠 수 있을까요? 그런 경험하지 않잖아요? 예수님은 왜 그렇게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 말씀을 우리가 곧이 곧대로 우리가 그대로 받고 믿고 기도하는 것이 기독교인인가 신앙인가 하는 것이죠. 기도하는 자체를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구요. 네 믿음으로 이 세상의 일반적으로 굴러가는 이치를 뒤 바꾸어 보겠다고 하는 것, 이게 과연 건전한 신앙이냐? 과연 성서가 그것을 이야기하는가 하는 거죠.

저는 예수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이 세상 이치에는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별로 잘났것 없고 못날 것 없고 말이죠. 예수 믿는다고 해서 죽을 사람이 안 죽거나 아플 사람이 안 아프거나 자동차 사고 날 사람이 안 난다거나 그런 것 없습니다. 아주 간접적인 것은 있을 수 있겠죠. 하나님을 믿으니까 마음이 평화로와 지고 급하게 서둘지 않고 생각을 달리하게 되고 정신으로 건강해지면 몸도 건강해지고 사고도 날 확률이 줄어들고요. 그런 것은 있죠. 그러나 그런 것은 예수믿지 않아도 성실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똑 같이 있는 겁니다. 큰 틀로 볼때는 기독교인들이나 토속종교인들이나 세상이 똑같이 우리에게 반응하는 거예요. 우리가 믿음이 좋다고 해서 우리가 바꿀 수 없습니다. 야구 방망이가 갑자기, 강도가 들어와서 우리에게 칼을 들이 밀때 칼이 갑자기 종이로 바뀌어서 위기를 모면하는 일들은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 이런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제가 설교를 다시 하지 않겠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이치를 갑자기 초자연적으로 바꾸어서 나에게 유익이 되게 하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 그걸 믿는거죠. 예수님께서 그래서 제일 처음에 말씀하신 것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 바실레이야 거든요. 하나님 나라거든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박했다고 하는 사실을 온전히 신뢰하고 거기에 우리의 삶과 우리의 운명 모든 것을 걸고 사는 거죠.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없습니다.

잘 믿어가지고 덕 볼 생각하지 마세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야구방망이가 꽃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그렇게 믿음을 통해서 이 세상 삶을 좀 편리하게 만들겠다고 하는 것, 이기주의죠. 예수 믿고 우리가 좀 마음의 위로를 얻겠다. 예수 안 믿어도 위로 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 정신훈련, Self-Control, 뇌훈련, 예를 들자면 정신과 상담 말하자면 이런 저런 것들을 통해서 자아 Control 해서 위로받고 살수 있는거예요.

우리가 믿는 것은 일신상에 어떠한 도움도 아니고 잘되고 안되고 그런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다시 반복되는 이야기인데요. 문제는 하나님의 나라 통치가 뭐냐 읽는거죠. 지금 하고 있는 거는 우리가 알고 있다 우리도 믿고 있다. 우리가 잘되는 것 하나님이 이른 비도 내려주셔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잘되는 것 아니냐? 그리고 대중 설교자들이 예를 들어 말하듯이 유대인들을 봐라. 미국의 경제권을 다 지고 있고 대기업도 유대인들이 갖고 있고 노벨상의 30%를 다 유대인이 타는데 하나님 잘 믿어서 그런 게 아니냐? 우리도 이렇게 저렇게 잘 될수 있다. 예수 성공 불신실패, 이게 바로 기독교 신앙의 원리고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무수히 있죠. 저는 그런 소박한 좋은 뜻으로 소박하게 믿고 사는 것을 그렇게 냉소적으로 생각한다거나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이제 지도자들, 교회 지성인들, 삶과 그리고 역사 이런 것들에 진지하게 책임감을 갖고 사는 사람들, 무죄한 자의 시련, 고통 이런 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고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그런 사람들은, 그런데 머물러 있으면 곤란한 것이죠.

하나님의 통치가 무엇이냐 여기에 따라서 믿음이 어떠냐 하는 것도 달라질 것 같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분들 자꾸만 규정하려고 하지 마세요. 규정, 이게 하나님의 나라는 norm이 아닙니다. 규범이 아닌거예요. 네. 제가 도덕주의적이고 윤리적인 설교는 케리그마 아니다. 그건 복음적 설교가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겁니다.  norm이라고 생각하는거예요. 그 분들은. 기준이 되고나서 어떤것이 이미 그런 기준들이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지 않느냐 그런 근거를 대라. 네. 그런 거를 말하기 시작하면 한 학기 동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공부해야 되겠지요. 하나님의 나라. 바실레이야. 하나님 나라. 하나님 왜 거기에 나라를 붙이느냐? 하나님은 뭐고 나라는 뭐냐 그리고 계시는 뭐냐 다 통하는 문제인데요. 또 생명은 뭐냐? 이런 것들이요. 되었습니다.

Norm도 아니고 Category도 아닌거예요. 범주. cate gory도 아닙니다. 어떤 범주. 요 안에 들어오는 사람은 어떻고 그걸 요렇게 살면 어떻고. 이렇게 우리가 범주화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요. 규범으로 우리가 규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삶들은 대개 규범과 카테고리거든요. 여기에 인제 긴장이 있는거예요. 예수믿는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이 안에 삽니다.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그것도 카테고리거나 또 시민으로서 뭔가 지켜야 하는 것, norm, 헌법도 다 norm인데요. 이런 것들을 우리가 완전히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그러니까 두 질서에 사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루터의 두 왕국론입니다. 스바이 라히 레레(윗 그림참조) 두 왕국론입니다 두 질서에 살고 있습니다. 카테고리와 norm으로 운영되는 세계 질서,  학교 가야되고 수능 몇점 받아야 되고 연봉이 얼마되어야 되고 상류층, 하류층 예를 들면 계속 우리는 그러한 질서와 카테고리 안에서 사는데요. 하나님 나라는 그거는 아니거든요.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미국 중심으로 오겠습니까?

조금 제가 집중적으로 해야되는데 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머물르다 보면 진도가 나가지 않는데요 조금 신경을 써야 되겠습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가. 그러니까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명시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거든요. 포도원 주인의 비유라든지 등등, 여러가지 비유로만 말씀하신 건거예요. 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딱 끊어서 말씀하시지 않으셨는가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자체이기 때문예요. 그 하나만이라도 오늘저녁에 꼭 이해하십시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다. 고거 내 알고 있다. 쉽다. 쉬운거 아닙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나라로 이해하는 것은 패러다임의  사고의 틀을 바꾸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대개 우리 한국인 일반적으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개념을 잘 생각하지 않거든요. 잘 알지도 못하구요. 하나님은 옥황상제처럼 어디 있다고 생각하지 나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라라고 하는 것은 장소가 아니라 통치개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네. 생명의 통치, 이렇게 말하면 되는거예요. 생명의 힘, 막연한 생명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 그렇지만 기독교만이 아니라 모든 일반적인 자연의 생명을 말하는거냐? 물론 그것도 포함하면서 기독교가 고유하고 독특하게 생명의 힘을 이해하고 있거든요. 네 그거까지 하려면 기독론까지 들어가야 되니까 접어두고요. 요 말에만 제가 집중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따로 있고 하나님 나라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가 바로 하나님 나라인거예요. 나라는 바람과 같아서요. 그것을 어떻게 가져올 수 없는 것이죠. 공기와 같아서 규정하고 범주할 수 있겠습니까? 아닌거거든요. 이러한 하나님 나라 질서를 기다리고 사는 거예요. 기다리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임박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예수님이 문을 두드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거기에 우리가 문을 열면 되는 거예요. 열어야 되는 것, 그게 우리의 회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냥 하나님 나라에 살거든요.

루터가 기본적인 두왕국론으로 말한 건 옳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몸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세속의 질서, 이 나라, 지상의 나라죠. 동시에 거기에 전혀 묶이지 않는 하나님의 통치에 의존하면서 살기 때문에 이거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통치죠. 이거는 두가지 질서인거예요. 이거를 우리가 같이 살아내려 하니까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긴장해야 되겠습니까? 좋은 뜻으로 긴장이죠. 자칫하면 이걸 절대화할수 있겠구요. 세상의 군주들은 이걸 절대화합니다. 우리가 여기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그러나 그 안에 있어야죠.

그러니까 조금 진보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루터의 두 왕국론을 비판하잖아요. 저도 좀 이런 쪽에 있는데요. 비판하는 이유가 이원적으로 구분한다고 하는 것인데요. 구분한다기 보다도 이 질서를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거니까. 아까 제가 C.S. 루이스 이야기를 했듯이 야구방망이 논리가 있는거예요. 그 질서로 경찰이 나름대로 법을 집행하잖아요. 법이 있죠. 실정법이죠. 말하자면. 실정법이 세속사화를 끌어가는 하나의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죠. 이것을 인정하고 안하고 또 인정 안할 수 없는것이죠. 현실이니까요. 물론 이것이 이것도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그렇게 루터가 이야기하고 바울도 그렇게 이야기하구요. 그것이 오늘 이러한 민주 사회속에서, 민주사회라기보다도 오늘 네 그건 접어두겠습니다. 자꾸만 이야기가 옆으로 나가니까요.

하여튼 저는 이 세계가 운영되는 이게 있고 하나님의 질서가 있는데 기독교인은 어쩌면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고 볼 수 있겠구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살고 있는데요. 이 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될지 모르겠어요. 세속과 하나님, 거룩한 하나님의 도성, 세속과 교회, 교회와 세속, 국가 문화, 교회와 문화, 하나님의 질서와 세속적인 질서 이렇게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아니면 교회, 하나님의 질서가 있고 이안에 세속질서가 있는지 아니면 이 세속 질서와 교회, 하나님의 질서가 이렇게 중간쯤 연결되어 있는지, 아니면 똑같이 이게 다 하나인지 그건 학자들에 따라 다른데요. 루터에 의하면 이렇게 느슨하죠.

제가 무엇을 이야기하려다가 옆으로 나갔죠? 하나님의 통치를 어떤 규범이나 범주안에 넣을 수 없다는 이야기. 그래서 여기에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있지요.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이야기 아시죠. 도덕경에서 말하는 이 도개념. 이게 도가 하나님 나라와 상당히 투명한게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미 나는 길이요. 길이라고 말씀하셨죠. 메타포. 노자 장자가 말하는 도개념,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이것도 메타포라고 할 수 있겠죠. 연결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 나라가 늘 흐리멍텅한거냐?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어떤 이 말은 여러분들이 이런 말씀만 들으면 오해하기 쉬워요. 이게 설명하기 쉽지 않는데요.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우리의 norm과 category를 벗어난다고 하는 이 말은 우리의 인식론을 넘어서 있다는 말입니다. norm과 카테고리는 우리의 생각이거든요. 하나님은 창조자이시기 때문에 이 norm과 카테고리는 다 창조세계 안에서 벌어지는 것이거든요. 하나님은 창조된 분이 아니잖아요. 창조자이시잖아요. 무로부터 창조하신 분이잖아요. 이 norm과 category는 유의 세계, 창조세계, 유. 하나님은 무의 세계까지를 다스립니다. 이거는 그냥 설명하기 위해서 유다 무다지 이 개념이 무엇인지는 우리는 사실 잘 모릅니다. 있다고 한다는 것과 없다고 하는 것, 지금은 없지만  나중은 있는거는 있는거냐 뭐냐. 사실 우리가 명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어린아이인거예요. 아무리 뛰어난 물리학자나 철학자라 하더라도 부분적인적에 조금 흔적하나 나을 뿐입니다.

기독교의 인식론은 기본적으로 계시론에 의존적입니다. 계시론에 의존하는 겁니다. 하이데거식으로 이 계시라는 것이 존재인건요. 우리의 모든 의식 생각 이런 것들이 norm이나  Category로 나타나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벗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여기에 테두리에 가둘 수 없다. 인식론의 한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늘 뜬 구름 잡는 것처럼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그렇다고 내버려두고 가만히 있으면 되느냐? 그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할 수 있는, 그리고 마땅히 우리가 가야될 방향은 오늘 제가 강의에서 핵심적으로 말씀드리려고 하는 바로 그겁니다. 무엇인지 아시겠죠? 생명의 문제인겁니다. 생명, 하나님은 창조자시니까요? 부활이 생명의 문제니까요? 우리가 어떻게 이 땅에 살면서 생명을 경험하는가? 여기, 이것이 관건입니다. 하나님 나라, 이게 죽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아시겠지요. 하나님 나라 이거는 우리 인식론과 계시론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구요. 그것은 또한 생명의 문제이기 때문에 생명은 부활과 관계되고 또 창조와 종말 다 연관되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가 흔하게 이야기하는 칭의의 문제, 이것도 생명문제예요.

이 칭의론이 왜 생명의 문제인가 A4용지 다섯 매를 써보시겠어요? 쉽죠. 이런 거를 자기가 에세이식으로 쓸 수 있어야만 기독교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는 겁니다. 신자들이 쓸 수 있겠어요? 생명과 칭의로움의 관계에 대해서 A4용지 다섯매를 써라. 아니면 열 몇매를 써라 얼마든지 쓸 수 있습니다. 이거를 쓸려면 각각을 다 알아야 되는 거거든요. 칭의, 생명이 뭐냐? 이런 것을 알아야 하는데 낱말뜻으로만. 예수님을 믿고 영육간에 구원을 받는다. 예수님을 믿고 의롭다 인정함을 받는다. 그렇게 낱말뜻으로 계속 외우고 있는거죠. 왜 기독교 신앙이 2천년동안 인간의 의로움을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주제이기도 하구요. 어거스틴과 마틴 루터가 붙들고 있었던 핵심이기도한, 그런 계속 이어져오는 문제이기도 한데, 왜 그렇게 붙들고 천착했는가 하는 거죠? 그 세계로 들어가야 되는 거죠.

전혀 그런 노력이 없어요. 그냥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요. 그냥 그것도 종교적 욕망이요. 종교적 욕망으로 내가 의로와졌다 하구요. 즐거워서 두손으로 찬송이나 부르고. 열린 예배에 참석해서 청중들이 맛보고 즐거워하고 만끽하고. 얼마든지 다른 사이비 종교도 가능한 겁니다. 사이비 종교일수록 populism에 빠진다고 하는 것을 아시죠. 우리의 감수성을 자극하는거에요. 도대체 왜 인간은 의로움을 말할 수밖에 없느냐? 네 지난번에 말씀드렸습니다만 실질적인 의가 아니라 왜 법적인 의미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이해해야죠.

인간이 뭐냐 죄가 뭐냐 죄의 문제를 왜 기독교가 존재론적으로 생각했는가? 그리고 어떤 설교본문에서도 나옵니다만 이 마귀의 작용으로 생각을 했을까? 거기에는 어떤 생명에 대한 깊이가 있는 겁니다. 이해하시겠죠.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나오는 그러한 사탄,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와 거래하는 장면, 인간론이거든요. 그러면서도 기독교적인 예도 거기에 들어갔습니다만 네 마귀라고 하는 어떤 세상을 성서와 기독교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가. 거기에는 어떤 세계가 있는거예요. 이런 것들 속으로 한 발 한 발 천천히, 갑자기는 안되요. 우리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배움이라고 하는 것은 하루저녁에 뚝딱 한꺼번에 되는 것은 아닙니다. 천천히 그 안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기독교가 무엇이라는 것인가를 알 수 있구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실질적으로 깊어지고 그럴때 우리가 신비주의자 영성가로 나갈 수 있는겁니다. 칭의와 생명의 관계에 대해서 그런 걸 조금씩 풀어 가면 반은 쓸 수 있겠죠.

그러니까 생명,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경험하는데 현재 우리가 생명을 누리며 살고 있기 때문에 생명경험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이다. 생명너머에 뭔가 다른 게 있을까요? 도대체 우리는 생명이라는 것를 뭐로 생각하시나요? 뭐요? 생명은? 단백질로 구성되어 있고 뇌가 살아있고 호흡하고 자손을 번식할 수 있고 이러한 것들 생명현상이죠. 그건 맞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만 생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돌, 바위덩어리 그거는 생명이 아니라고 하는 100% 확신이 있습니까? 어쨌든 그것도 창조론적으로 볼때 하나님의 창조물인데. 바위덩어리 하나 그런 것도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생명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없을까요? 분명합니다. 그거는. 돌 하나마저도 돌이 소리치리라고 하는, 너희들이 침묵하면 돌이 소리치리라는 성서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사물에 까지 어떤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을 우리가 들여다 볼 수 있다면 그러면 생명의 영역이 바뀌는 거죠. 넓어 지는거죠. 그건 그렇다고 하고요. 거기까지 우리가 나가겠습니까? 당장 우리 앞에 있는 문제만 좀 생각하면요. 네 오늘 제가 드리는 말씀이 한 두번 생각하고 말게 아니라 두고 두고 생각해 보시죠. 제가 해답을 갖고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식을 갖고 드리는 겁니다. 이건 우리의 실존적인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느때 우리가 생명 충만감, 충만하다고 하는 것 있지요. 성령충만이라고 할가요. 생명 충만감을 느꼈다면 성령충만함입니다. 성령은 생명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언제 여러분들이 생명의 충만감을 느끼나요.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살아있음입니다. 살아 있음. 아까 돌맹이 이야기했지만 돌맹이는 죽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건 그냥 재미 있으라고 드린 말씀이구요. 그거는 우리의 인식이 하나님의 창조를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그 돌맹이는 죽어 있는 것 우리는 살아있는 것 이렇게 나누고 있을 뿐이지 그쪽에 열어두자고 하는 것이죠. 우리가 잘 모르니까 덮어 두고요. 우리가 살아있다고 하는 것을 생명이라고 하죠.

어느때 여러분들은 살아있다고 느끼시나요. 각자 여러 경우가 있겠지요. 아기 처음 낳아서 안아 줄때 생명 충만감을 느낄 수 있겠구요. 소설 쓰는 사람들은 작품하나 써낼때 충만감을 느낄 수 있겠고 많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루 헤아릴 수가 없겠죠. 어쩌면 알콜 중독자들은, 술이 없어서 며칠 동안 힘들어하다가 술 한잔 마셨을때 살아있다는 충만감을 느끼게 될 겁니다. 알콜 중독자들, 이런 것은 웃기는 거지. 생명 충만함을 느끼기까지야. 그런 생각이 카테고리화하는거예요. 범주화하는 겁니다. 요거는 물론 범주가 필요하죠. norm도 필요하구요. 결정적으로 생각하지 말라 그러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네 각각이 다 살아있음의 경험이 달라요.

오늘 여기 비가 왔습니다. 며칠 동안 참 덥다가 저녁에 잠간 저녁 먹으러 갔다가 오는데 비가 좀 왔어요. 시원한 바람이 불고 놀랍죠. 그런 때 느끼는 경험은 돈 주고 살 수 없는 것이죠. 아 내가 여기 공간안에 살아있구나 숨을 쉬는구나. 봄 바람 맞는구나. 요즈음 교회 아파트에 잎도 많이 나고 참 좋습니다. 지나가면서 네. 요게 인제 나무 둥치라고 요렇게 만져보기도 하고 그럽니다. 어떤 때는 뺨을 대보기도 하구요. 질감 있잖아요. 나무둥치에서 느끼는 질감이라고 하는 것, 그것 어떻게 느낀다고 하는 것 놀라운 환희죠. 자연주의적인 환희라고 할 수 있는데 참 즐겁습니다. 지금 다비아나 글쓰는 거나 교회나 이런 것 하지 않고 그냥 숲속에 들어가서 혼자서 누구 흉내 내듯이 이렇게 암자에 있으면서 살아도 행복할 것 같아요. 지구안에 있는 작은 어떤 부분에 내가 정직하고 그것하고 연결만 되어 있으면, 그걸 다 놓치고 사니까. 건성건성 살죠. 제 아 제가 설교조로 해서 죄송합니다. 건성 건성 삽니다.

우리들의 관심은 따로 있죠. 자기에 대한 관심, 자기관심, 자기연민입니다. 자기 관심, 자기 연민을 일단 놓구요. 그게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가 마음을 돌리는데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조금 정직하게 온전하게 거기에 연결되어 있으면 그건 인제 어린아이가 어머니 품안에 안겨있을때 느끼는 황홀한 생명의 경험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게 최상의 삶이죠. 현재 우리의 삶에서는. 네 그런 등등등 많은 삶의 충만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무리 여기서 이런 것들이 신비롭고 놀랍고 환희에 찬다 하더라도 지나가버립니다. 아 이런 것 제가 며칠전에 말씀드렸습니다. 잠정적입니다. 잠정성, 무상성, 늘 그렇죠. 허무하다는 뜻이 아니구요.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시간과 더불어서 갑니다. 성서의 세계가 시간이거든요.

여러분 이게 중요한 건데 이 안에서 하나님  창조한 세계 속에서 무한한 생명의 충만감을 누리며 사십시오. 가능한데로. 여러분의 남아있는 인생이 30년 인지 50년인지 모르겠는데 here and now 바로 여기 지금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우리에게 생명의 충만감을 허락하실 겁니다. 그걸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을거고 볼 눈이 있는 사람은 분명히 볼겁니다. 그러나 결국은 다 지나가거든요.

성서와 기독교 신앙은 새로운 것이 온다고 합니다. 여기에 뭐가 온다고 하는 겁니다. 새로운, 전적인 새로움이예요. 아까 제가 돌맹이 이야기했죠. 돌맹이는 우리가 생명이 아니라고 우습게 생각하는데 전적인 새로움이 오면 돌덩이도 우리에게 말을 걸지 모릅니다. 완전히 새로운 세계죠. 요정의 세계죠. 그런 세계가 여러분들이 오지 않으리라고 확신하시나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신앙이 없는겁니다. 바위덩어리가 우리 사람하고 같이 대화할 수있는 그런 세계가 하나님이 창조자 신데 왜 안 오겠어요. 이미 이러한 것들은 시인들이 다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이제 우리 기독교 인문만 폐쇄된 세계속에서 어떤 왜곡된 것을 이야기할 지 모르죠.  전적인 새로운 세계에 대해서 여러분 열어 두십시오. 이거를 규범화 하지 말고, 카테고리화 하지 말고 하나님의 통치라고 하는 것에 여러분들이 맡기셔야 됩니다. 그게 신앙인거예요.

이렇게 말하다 보니 두 가지가 중요하군요. 전적인 새로운 세계가 온다는 것, 종말론적인 세계인데요. 에온. 종말론적으로 오는 것에 대한 강렬한 기다람. 결혼 날짜를 앞둔 신랑신부처럼, 강렬한 기다림과 더불어서 오늘이 잠정적이고 무상하지만 그러기 때문에 소중한 오늘 여기에서의 삶의 희열, 이런 것들을 같이 누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런 것은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전적인 새로운 세계가 오늘 우리의 삶에 오늘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개입해 있다는 거예요. 성서가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아직 때는 안왔는데 우리들에게 개입되어 왔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맛보고 믿고 삽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이러한 삶을 가르켜서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안에 거한다. 놀랍죠. 하나님안에 있는 것이야말로 생명충만이다 하는 겁니다. 여기에는 종말론적인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을 안고 있는 거예요. 그 상상력, 그 비전 그것이 없다면 아무리 이 땅위에서 선한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온전한 기독교적인 생명 경험이 아니죠. 우리는 생명을 하나님안에서 경험한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네. 그 이후에도 할 이야기는 많이 있는데요. 해야 될 이야기도 많이 있구요. 여러분들에게 제가 들어야 될 말씀도 많이 있구요. 제가 한 이야기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전달되었는지 어느정도 좀더 들어야 되는데. 되었습니다. 정리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안에 있는 생명을 말로만 하지. 기독교 신자들은 별로 경험하지 못합니다. 물론 자기는 한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런데 그게 많은 경우에는 자기 착각일 수 있습니다. 구타하는 남편에게 얻어 맞으면서도 자기는 사랑받는다고 착각하는 여자들도 있잖아요. 그게 인간입니다. 자학을 경험 하면서도 거기에 희열을 느끼는 것 말이죠. 그거는 왜곡된 사이비 영성인거죠.

저는 주변에 있는 일반 기독교 신자들에게 이런 열려져 있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전적인 통치를 바라보는 그러한 영성을 만나 본적이 별로 없어요. 이런 거는 한국 교회, 교회적 교육이 잘못된 탓일수도 있구요. 아니면 본인이 게으른 탓도 있구요. 대개는 이렇게 비유를 들어 설명을 해야 되겠군요. 초등학교 다니는 학생이 동화책만 보면서 거기서 만족하는 거죠. 나이가 들면 중고등학교 학생이 되면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책등 이런 책들도 읽어야 되잖아요. 감수성에 머무는 그런 것만 읽으면서 읽지도 않죠. 사실은 누가 전해주는 이야기에만 매달려 있는 경우가 제가 보기에는 십중팔구가 그런 상태에 있는 것 같습니다. 미안합니다. 제가 너무 부정적으로 이야기한 것만 같네요. 제가 잘못 본 마지막으로 한 이야기는 취소하는 것이 낫겠네요. 제가 확실하게 알지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재단하는 것 같아서 미안합니다.

네. 이러한 하나님 안에서 생명은요. 이것을 경험한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인데 이런 사람들은  다른 것을 부러워 하지 않죠. 저는 개인적으로 목회자로서 목회에 성공한다는 것에 그렇게 큰 즐거움이 되지 못합니다. 내가 하나님안에 내가 얼마나 거하냐 그런거죠. 되었습니다 다른 쓸데 없는 이야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전달하려고 하는 한가지만 해도 잘 되었겠죠. 생명, 살아있다고 하는 것을 아주 실질적으로 그러면서 동시에 성서에 근거하고 신학에 바탕해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가 아니면 마약에, 혹은 그런데 중독이 되듯이 계속 반복적으로 뭔가로 자기를 자극해야 되는 그러한 것에 빠져 있는가 우리가 생명의 심연안으로 들어가고 있는가 아닌가? 기독교 신앙을 연관해서 실질적으로 한번 하시라 그 말씀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잘 지내시고 5월 7일 저녁에 만나기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