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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gti.kehc.org/data/person/others/foreigner/juengel.htm기독교가 뭐꼬? 17강(080508) - 하나님
(대금 소리.. )
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네 지금 제가 시디, 컴퓨터 안에 넣고 좀 틀었는데요. 양성필이라고 하는 대금 연주자의 연주였습니다. 제목은 숨2, 영어로 Breath 2 라고 되어 있네요. 숨. 숨 두번째네요. 대금 연주가 이렇게 시디로 들어도 괜찮지만 직접 들으면 훨씬 힘이 있습니다. 다이나믹하다고 하나요. 나무 대나무에 숨을 불어 넣어서 소리를 내는데 거기서 폭포수 소리도 나구요. 폭풍이 부는 소리도 나구요. 네 그렇습니다. 고것 독주 악기인데 어떻게 그렇게 소리를 다양하게 내는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이 소리의 경지라고 할 수 있겠죠. 무조건 절대적인 힘이 있어야 힘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조화인것 같습니다. 조금 작은 소리와 큰 소리가 적절하게 배합됨으로서 어떤 힘을 나타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네. 좋은 연주였습니다.
오늘 저는 점심 먹고 잠간 산책을 다녀왔습니다. 다른 일로 바쁘긴 한데 문득 아파트 밑 숲 쪽을 바라보니 한창 아카시아 꽃이 만발하더라구요. 옛날 생각도 나고 그래서 아카시아 향을 좀 가까이 맡기 위해서 갔습니다.
미들타운님이 소리가 작다고 하는데 정말 다른 분들도 작나요? 가깝게 놓아야 되나요. 다른 분들이 좋다고 한다면 네 알았습니다. 그러면 미들타운님이 볼륨을 올려보시죠.
아카시아 향기는 누구나 다 추억이 있지요. 어렸을 때 아카시아 꽃을 따러 다니던 추억들이 저보다 나이가 좀 어린 사람들도 다 있을 것입니다. 여학생, 초등학교 여학생 남학생 어울리면서 따라다니구요. 용기가 있는 아이들은 아카시아 나무가 가시가 많이 있어도 타고 올라가서 꺾어서 밑에 던져주고 장대로 따기도 하구요. 아카시아 꽃은 향기가 좋습니다. 네 말자체가 좀 우습네요. 어렸을 때 그런 추억도 있구요.
80년대 초 광주에서 군목 들어 가기 위해서 훈련 받았는데요. 군종장교 입니다. 80년 3월에 입대했군요. 3개월 동안 아카시아 향기가...
제가 강의가 깊이 들어가기 전에 초반부에는 늘 말이 헷갈려요. 집중력이 떨어진답니다. 조금 베테랑들은 처음부터 강의를 빈틈없이 끌고 가는데 저는 잘 안되요. 설교도 좀 그렇습니다. 첫부분은 안으로 들어가는데 힘이 들더라구요. 나름대로는 정확하게 말할 거리를 준비하고 설교단에 섰는데 하여튼 나 스스로 거기에에 빨려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게 아마추어라고 하는 거겠죠. 아리아같은 것을 부르는 사람들도 정말 베테랑들은 무대서기부터 청중들을 노래안으로 끌어들이는데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분위기에 익어야 하는데 저는 그런 면에서 저는 굉장히 프로기질이 없는 것 같습니다.
80년초에 3월서부터 3개월동안 교육을 받았는데 여러 가지다 받았죠. 거기에 어떻게 산속에 들어가서 총 쏘는 연습도 하구요 야간 사격도 하고 행군도 하고 그랬습니다. 지금까지도 야간 인가요 하여튼 야간되기 전인가? 낮과 밤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저녁 으스름될 때 같습니다. 피곤한 몸으로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카시아 향기가 진동을 하더라고요. 아 그런 것들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게 하는지 모릅니다. 오늘도 점심 먹고 거기에 갔다 왔는데 이상하게 꽃은 많이 피었는데요. 냄새는 별로더라고요.
가면서 바람이 부드럽게 불더군요.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면서 아 이 바람이 뭘까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바람이 뭘까 라기 보다, 아주 고대인들이, 지금 제가 바람이 뭐냐에 대해서 초보적인 물리학적인 지식이 있기 때문에 공기의 대류, 이동을 통해서 내 몸에 접촉하는 것을 아니까요. 고대인들은 이것을 뭐라고 생각했을까를 돌아보니 참 신기했을거 같은 느낌이 듭니다. 뭔가가 자기를 휩싸잖아요. 보이지도 않죠. 뭔가 자기를 흔들고 있는데 자기를 접촉하고 있는데 그게 뭔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냥 그게 그 바람이 지구의 전체 가득하다고 하는겁니다. 내 있는 자리만 아니라 저쪽 나무도 흔들리고 그런 것을 보면 하나의 바람 현상이니까 고대인들도 그대로 나하고 똑같이 느꼈겠죠. 백만전에 살던 사람도 이나 나나 바람에 대해 똑같이 경험하는 것인데요. 얼마나 신비로왔을까 하는 것입니다. 지구에 가득해 있는 그 무엇, 그러나 그 뭔지를 모르는, 손으로 잡을 수 없는, 그러나 분명히 현상하고 있는 것 말이죠. 그것을 히브리사람들은 제가 한 두번 말씀드렸습니다만 루아흐라고 불렀거든요. 생명의 영이다. 상당히 바람과 영 숨 하나라 생각했던 것 놀랍죠. 아까 시디에 나오는 숨2, 이런 것들입니다. 대나무, 바람, 소리, 그런 과정을 통해서 살아있다고 하는 경험하는 그러한 예술적 경험, 그러한 것들이 종교적 경험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한 것들이 아우러져 있는 것 같습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는 이야기를 드렸습니다만. 왜 그러냐 하면요. 세월이 가더라도 이 세계를좀더 많이 아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이 신기해서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아카시아 따먹던 느낌이 그러한 것들이 지금 그 당시도 제가 굉장히 황홀한 느낌으로 그러한 놀이속에 심취되어 있었을텐데요. 지금은 조금 다른 방식의 놀이지만 기본적으로는 똑 같은 것 같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로 세상을 직면해 있는 나의 세계 경험 이런 것들이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 이게 왜 그런가 하는 그러한 궁금증이 들기도 합니다.
오늘은 하나님에 대한 질문인데요. 이게 한편으로는 좀 막막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밤새도록 이야기하더라도 끝나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구요. 그냥 직접 질문해 볼까요? 하나님이 존재하시나요? 그렇다면 어떻게 존재하실까요? 하나님이 계실까요? 고대인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경험했을까요? 성서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말이 많이 있고요.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요. 그 하나님이 과연 누구냐 하는거죠. 제가 아까 바람을 경험했다고 하는데요. 그렇게 말씀 드렸습니다. 누구나 다 그런 경험을 하는데 그걸 아주 실질적으로 하는 사람이 있고 그냥 따로 노는 그러한 경험도 있습니다. 경험이라고 하기보다 그냥 지나가버리고 마는 것들이죠. 하나님에 대한 경험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고 실질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있을텐데요. 영성가들은 그것을 좀 더 실질적으로 경험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구요. 우리들은 사실은 실질적으로 잘 경험을 못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있다는 확신을 갖는다고 애기를 하지만 그게 정말 하나님 경험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신앙의 특성인 정서와 심리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님을 내가 영접했다고 하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과연 그가 경험한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분들도 아마 어렸을 때 중고등학교나 대학교때, 청년 시절에 그러한 집회에 많이 참석 했을꺼고 나름대로 그런 경험을 많이 했을겁니다.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말이죠. 그 영접한 주님이 누굴까요? 그 주님은 하나님일까요? 어떤 걸까요? 그냥 교회지도자들이 예수님 영접 하신겁니다. 성령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이런 말에 우리가 선동당하고 세뇌당하고 실제로는 모르면서도 아는것 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렇게 조금 부정적으로만 말씀드리는 것이 미안합니다. 그러한 예수님 영접 하나님 경험이 그렇게 특별한 사람에게만 있다는 뜻으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바람의 문제요. 제가 이런 바람을 말씀드리냐 하면 이게 하나님 경험에서 중요한 메타포이기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성령으로 난 사람은 바로 이와같다고 말씀하시거든요. 바람처럼 자유로운 존재로 움직이시는 성령의 경험이니까요. 이것은 어떤 문자안으로 들어오는 것 아니고요. 가르쳐서 아는 것 아닙니다. 딸들에게 조금있다 딸이야기 더하겠습니다만, 야 저기 바람 보라라 얼마나 놀랍냐 뭐가 있단다. 어떤 형체안에 들어오지도 않지만, 아주 자유롭지만, 그리고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공기의 이동으로 일어나는 운동이지만 이거같이 확실한 리얼리티가 어디있냐 이런 이야기를 제가 한다면 이게 알아 들을 수도 있고 못알아 들을 수도 있고 있는데요. 그냥 낱말뜻으로는 알아 들을 수 있지요. 아 아버지가 이야기하니 그런거구나. 그러나 그런 것은 바람에 대한 경험이 아닙니다. 바람과 자기와의 일치거든요. 그리고 그 일치를 통해서 그 어떤 생명의 깊이로 들어가는 거예요.
이러한 단어들이 상당히 관념적인거예요. 생명 하면 이것도 제각각으로 생각을 할 테니까 또 이게 뭐다 딱 부러러서 요거다 말하기 힘들거든요. 성령은 생명의 영이기 때문에 그러한 생명을 이해하는 것이 성령을 이해하는 그러한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게 다 포괄적으로 관계된 것들 이거든요. 바람 경험을 제가 들려드린 시디의 대금을 부르는 사람은 숨과 자기가 일치된 경험을 했을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보통 그런 것 하지 못하고 삽니다. 우리가 숨을 쉬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살죠.
단전 호흡하는 사람들은 숨, 단전, 호흡 말이죠. 고 순간 순간과 일치하는 경험, 훈련이라고 그래요. 가만히 앉아서 단전을 통해서 집중시키게 되면 오장육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모든 움직임을 원활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게 아마 가능은 하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 여러분들 조금 더 솔직하신 게 좋아요. 모르면 모른다고 생각을 하고 알면 아는거구. 아는 것이 얼마나 보편적 진리의 토대위에 있는가 질문해야 되고 말이죠. 그냥 할아버지 할머니 생각없이 편안하게 신앙생활해도 결정적으로 문제는 아닙니다. 다 우리는 우리가 올바로 인식하기 때문에 의로와진다거나 그렇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고 인정 받을 뿐이고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받기 때문에요. 그러니까 우리의 업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총이기 때문에 우리가 신앙의 깊이 세세하게 모른다고 해서 결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성적 기독교인들로 산다고 할때 그리고 교회 나름대로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할때, 그런 말로만은 충분한 설득력이 없기는 합니다만 일단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준비를 하는 사람은, 자기가 갖고 있는, 베드로 후서에 있는 말씀이거든요. 자기가 알고 있는 희망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들에 대해 설명할 준비를 해야 하거든요. 우리가 믿고 있는 기다리고 있는 종말론에 관계된 것인데요. 하나님의 통치를 이야기하는 것이니까요. 이게 다 다 연관됩니다. 그런 쪽으로 우리가 좀 솔직하게 해야지요. 솔직하게 자기 자신을 내놓고 답을 찾아가야 되구요. 답을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말을 걸때 대답을 할 수 있는 준비를 한다고 하는거니까요? 그런 것에 대해서 믿음이 중요하지 자꾸만 생각하게 하느냐 신학적인 사유가 무어가 그리 중요하냐에 대해서 불편하다고 생각할 필요가 하나가 없습니다. 신학적으로 사유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선입관 고정관념들을 내려좋고 성령과 소통할 수 있는 자세를 갖는다고 하는 거거든요. 네 그게 아주 중요합니다. 신학, 지금 바로 말씀드린 게요. 신학적 사유 훈련 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성찰이거든요. 우리의 신앙에 대한 theological Reflection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학적 성찰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들이 계속 있으면 그렇게 때가 끼거든요.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면 그게 원래 말하려고 하는 그것, 근본을 놓치게 되고 형해화 된다고 할까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리는 수가 많이 있습니다. 그걸 늘 반성을 하게 되면 저는 그런 점에서 반성하려고 하는 점에서 신학적 사유야 말로 가장 성령과 밀착할 수 있는 길이리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말을 걸때 최대한도로 알아들을 수 있는 있는 준비를 하는 작업이라고 하는 점에서 중요한 거죠.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존재하는가? 어떻게 존재하는가? 어렴풋이 들은 풍월로 생각하지 말고 아주 실질적으로 내놓고 질문하고 찾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강의안에 나와 있습니다만 제 딸 들이 어릴때 초등학교 3학년 또 중3이었을때 둘째 딸이 그렇게 질문했습니다. 아빠, 하나님 보이지도 않는데 정말 있는거야? 이런 식이었어요. 그런 아이들이 제기한 질문에 대해서 제가 대답을 할 수 있어야만 그게 살아있는 설교가 될 수 있는 거거든요. 나름대로 설명을 해보았는데 그게.. 이게.. 이쪽에 조금 이야기를 했습니다. 1999년이군요. 중3, 큰 딸이구요. 초등학교 3학년. 네. 그때 바람이야기를 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그 이야기죠. 그게 없지만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무조건 없지 않는 것이 아니냐?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 간접적으로 바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느냐 그런 이야기였어요. 그러면서 제가 조금 어려운 이야기를 했군요. 바람은 동화책처럼 있는 것처럼 공기가 움직임으로서 생기는 일종의 운동이다라고 했습니다. 바람은 운동이다. 둘째 사랑을 생각해봐라 어머니 아버지처럼 사랑을 하는데 사랑이 물건처럼 있는게 아니라 관계에서 나타나는, 관계가 중요합니다. 관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하는 것이죠. 하나님도, 하나님도 바람처럼 운동이구요. 힘이구요. 제가 딸들에게 설명하기 위해서 한번 해본 겁니다. 이게 완전한 대답은 아니구요. 하여튼 그런 쪽으로 실질적으로 생각해야될 필요가 있으니까요. 또 하나는 관계, 마티 무버같은 사람의 책에 보면 나와 너 그것을 중심으로 한 신학적인 노력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여튼 딸들에게 이런 대답을 했는데 여기서 말하려고 한 문제는 핵심적으로 존재에 대한 것입니다. (책장넘기는 소리) 하나님이 계시다 안계시다 그런 이야기를 할 때 우리가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될 부분은 있다하는 말이 뭐냐 하는거죠. 존재한다. 만약에 하나님을 사물처럼 계시다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죠. 우리가 이 존재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깊이로 생각할 수 있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생각도 (달라진다, 달라진다기 보다) 심화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존재라고 생각할까요? 아... 말이 좀 빙빙도네요. 그러면 아무래도 이 문제는 하이데거의 말을 통해서 풀어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이데거... 그가 형이상학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책속에서 한 이야기인데. 모르겠습니다. 강의 중에서 앞서 했다고 한다면 양해하시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바룸 기프테에스 자이엔데스 바름 니스트 필메어 위즈” 자이엔데스 바름 방언처럼 들리신 존재하는 것들은 왜 있고 존던 대신 니스트필메어 왜 더이상 없냐? 여러분 저는 이 말을 듣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공부가 선배들, 어른들한테, 스승들한테서 배우는 것들입니다. 제가 하이데거의 책, 많은 독파를 하지 못했습니만 모르는 것이 태반입니다. 철학자들의 전문적인 지식을 제가 얼마나 따라갈 수 있겠어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는것 같아요. 한 두 가지를 알아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이데거가 말한 이말, 이것을 통해서 제가 어떤세계로 이렇게 들어가는 경험을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경험이 있을 겁니다. 이 존재하는 것들 하고, 자인하고는 다른 거거든요. 아 그쪽으로 가지 말고. 이 존재하는 것들, 지금 이 세상에 이렇게 있는 것들은 왜 있고 없는 것들은 왜 없는가? 무. 없는 것들은 왜 없는가는 질문입니다. 제 앞에 연필이 있구요. 연필 있다고 하구요. 종이가 있습니다. 종이와 연필은 너무 비슷한가요. 나무에서 왔기 때문에. 그건 둬두고. 시계가 있습니다. 연필과 시계 중간쯤 되는 어떤것, 아직 이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왜 이것은 없을까요? 아카시아 꽃은 있는데 아카시아 꽃 하고 다람쥐하고 그 중간쯤 되는 것은 니스트 필메어 왜 더이상 없을까요? 만약에 이런 문제들을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셨으니까 그렇지 라고 대답한다면 그거는 교리 문답으로는 맞지만 이 세상의 깊이를 뚫어 보는 사람으로서는 자격미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없다고 하는 게 그렇게 당연한 것이 아니거든요. 있다고 하는 것도 그렇게 당연한 것도 아니고 말이죠. 김춘수가 꽃이라고 하는 시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 것 같아요. 그냥 사물에 불과했는데 내가 꽃이라고 부르니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 모르겠습니다. 시인의 영감을 제가 그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세상의 있고 없고 하는 문제들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들이 아니다.
이러한 문제들이 철학자들이 생각을 하고 있어요. 우리가 이러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조금 귀를 기울이면서 하나님이 누구냐에 대해서도 우리가 생각을 깊이, 심화 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통... 생각해 보세요. 도대체 이 존재하는 것들이 뭔가 하는 것 말이죠. 내가 지금 하이데거를 통해서 정말 있는 것하고 없는 것들이 당연한 것들이 아니다 말을 했구요. 연관해서 즉 있는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진다고 하는 명백한 사실 속에 우리가 놓여져 있습니다. 별도 그렇고, 별도 그럴진대 오늘 우리들의 삶은 오죽하겠습니까? 이게 다 지나가버리는 그러한 속에 있는데 정말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가요? 지금 우리가 강의하고 있는게 정말 내가 있는 건가요? 그리고 여러분들이 듣고 있는게 현실인가요? 아니면 지나간 오래전 일에 대해서 우리가 꿈을 꾸고 기억을 회상하고 있는가요? 현재 이게 확실한 건가요?얼마나 이게 확실하다고 하는 증거가 있는 건가요? 여러분들도 그런 경험이 있을런지 모릅니다. 아마 당연히 있으리라고 봅니다. 어느 순간에는 내가 지금 밥을 먹고 있는데... 내가 지금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내가 지금 대화를 하고 있는데... 이게 나의 지금 경험이 아니라 어떤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기도 하고 지난 일에 대한 회상처럼 다가오는 그러한 경험도 있습니다.
아마 이런 것들을 아마 장자가 호접몽, 제가 뒤에 썼을 텐데요.(호접몽? 뒤에?) 네 장자가 나비가 되는 꿈 여기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죠. 장자가 꿈을 깬 뒤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나? 나비가 현재 나 장자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장자가 꿈의 주인공인가? 나비가 꿈의 주인공인가? 잘 모르겠다고 하는 말이. 이게 이렇게 장난은 아니거든요. 네. 이런 이야기는 우리의 현실인식이 우리가 경험한다고 존재한다고 하는 것들이 확실하게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전도서도 인간의 행위라고 하는 것이 바람을 잡으려고 하는 것과 같이 헛되다고 진술하고 있지요. 이거는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없는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2천년전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예수님과 제자들, 초기 기독교인들들 이런 것들, 도대체 그들은 실재했던 것인가요? 물론 문서로 그런 몇가지들이 남아있기는 합니다만. 어쩌면 조금 더 멀리 나가볼까요? 지구가 시간이 다되어서 그 날이 분명히 오죠. 45억년이라고 하는 시간은 분명히 오지 않겠어요. 그전에 지구가 빙하기에 돌입해서 인간이 다 죽는다거나 생명체가 다 없어진다거나 아니면 혜성이 부딪쳐서 지구가 폭발해서 화염에 휩싸여서 다시 45억년전 불덩어리처럼 된다면 모르지만 그럴 가능성도 완전히 부정할 수 없는데요. 하여튼 그때가 분명히 오는 것은 분명합니다. 시간이니까요. 영원한 것은 아니니까요. 그렇다 그러한 시간 속에서 지금 우리들이 경험하는 이것들이 무엇인가 하는 겁니다. 저는 지금 우리의 삶이 무의미하다고 하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 확실한게 아니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늘 생각하는 것의 우리가 아는 것 정도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그걸 저는 실체론적 하나님 이해라고 했는데. 그냥 물건처럼 말이죠. 옥황상제처럼 말이죠. 하나님이 어느 우주공간안에 존재하신다고 하는 그런 생각들은... 바람직한 그런 신앙 이냐 아니가 그런 차원은 아닌데요. 그건 여전히 우리는 책임있는 대받은 못된다 그렇게 말하는 거죠.
이 실체, 아 이런 이야기를 제가 해야 되냐 말아냐 하나 강의하면서 이렇게 혼돈이 되어서 말이 헛도는 겁니다. 지금 말씀드리는 것을 초보적인 것으로 다 알고 교리일텐데요. 어떤 분들은 아니신 것 같고. 다 그걸 또 대학교 교양과정에 있는 것처럼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그러면 우리 강의가 루즈해지기 때문에 조금 제가 멈칫멈칫하게 됩니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야 되는데 그게 확실하게 잡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실체 Substance라고 하는 것이거든요. 영어 잘 썼나요. 또 하나는 뭐 프로세스 process라고 할 수 있겠죠. 실체, 어떤 것이 있다. 실체로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가장 최소단위가 원소 깨지지 않는 아톰이 있는 거죠. 이러한 방식으로 뭔가가 있다는 것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사유방식, 그러한 것이 신학안에서 오랫동안 자리를 했구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딱 그러한 것만 아닙니다. 그런 흐름들이 대세이긴 한데 여러분 기독교 신학이 그렇게 만만한게 아닙니다. 가끔 기독교 신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바울에 의해서 기독교가 헬라화되었다 한다든지 관념적이 되었다 한다든지 한다는 것은 신학을 잘 모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비록 그러한 흐름들이 교부시대에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지만 그 안에 이미 종말에 이르게 될때까지 그러한 세계 이해에 다 담겨있어서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예요.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실체론적으로 이해하는 부분이 많이 있지만 제가 편의상 설명하고 있는거지. 꼭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실체로 이해하는 것이 있구요. 그 반대되는 것이 과정 혹은 운동 이러한 관점으로 이해하는 것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교회현실에서는 실체론적인 하나님에 머물러 있습니다. 물리학에서는 실체는 인정하지 않죠. 공간이죠. 공간과 에너지죠. 그게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입니다. 공간 비어있는 거예요. 에너지, 물리학적으로 그렇습니다. 네 이러한 세계 이해가 우리들에게 이미 오래전에 오고 있는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변증해야 될가요. 이게 지금 변증도 변증이지만 우리스스로 하나님에 대한 표상을 바르게 해야 되는데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일까요? 네. 조금 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야 되겠네요.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요? 여러분들 마음에 계십니까? 아니면 우주 공간 어디 북극성 너머 쯤에 자리하고 있는가요?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하는데 그곳이 과연 어디인가요? 아주 실질적으로 그런데가 있나요? 그러면 뭘까요? 이러한 문제들은요... 우리가 세계를 이해해 가는 것만큼 그런 것들이 풀리게 됩니다. 풀린 다기보다도 확장된다고 할 수 있겠죠. 이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거죠.
융엘이라고 하는 사람이요. 에바하르트 융엘(Eberhard Jüngel)이죠. 이 사람이 곧-하나님, 알스 게하이니스데어 벨트(God as the Mystery of the World) 라는 책을 썼어요. 세상의 비밀로서의 하나님, 세상과 하나님이, 알스는 영어로 as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병열이라고 할 가요. 이렇게 그림을 그릴 수 있고요. 고 사이에 비밀이라고 하는 것이 들어있습니다. 세상의 비밀, 하나님은 세상의 비밀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아. 이 말이 와 닿는 분도 계시죠. 예. 저어.. 누구야. 은폐성에 대해 질문하신 분도 있었는데요. 비밀, 은폐, 이것이 다 연관되는 거거든요. 네. 세상이 비밀인거예요. 아직까지 열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도 여전히 비밀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 신자들의 머리속에 고정되어 있어요. 이게 그 자체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고 막연하게 아는 것처럼 전제하고 대신 믿고 있는 자기 자신의 신앙적인 태도에 몰입하고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하나님이 별로 중요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물리학자가 물리의 세계속으로 들어가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는 않고 이미 앞에 있었던 물리학적인 원리들, 그런 것들만 계속 외우면서 아 나는 훌륭한 물리학자다 라고 한다면 그건 사이비죠. 사이비든지 과학자라기보다도 선생,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과학의 원리를 설명하는 선생에 불과하죠. 과학자는 그 비밀 속으로 자꾸만 들어가게 되는 거거든요.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세계를 실체로 이해하는 시대를 건너뛰었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을 실체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는 거죠. 잘못이란 말은, 아주 잘못 되었다기 보다도 더 나가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 것들이... 그러면 성서에 있는 하나님 이해가 다 변하는거냐. 그러한 뜻은 아닙니다. 성서의 하나님이해가 그런 것을 담고 있어요.
강의안에 인용한 각주 비슷하게 달아놓은 것인데요. 한번 보겠습니다. 성서적 하나님 이해에서 가장 핵심적인 관점은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가르침이 있다. 감이 오죠. 형상하면 실체거든요. 어떤 정해져 있는 틀이거든요. 어떤 범주거든요.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죠. 네? 성서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자로 말한다고 하는 부분을 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아 그냥 하나님이 만드셨다 그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존재에 대한 문제인거예요. 그러니까 그 분은 피조된 분이 아니다. 피조 세계에 있는 그러한 여러가지 형식들, 범주들 이런 것들로 하나님을 재단하지 마라는 거죠. 이 성서의 하나님 진술은 오늘 물리학, 현대 물리학이 이해하는 세계 이해에도 얼마든지 타당한 말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그러니까 성서 해석이 중요한 거죠. 형상을 만들지말라고 가르칩니다. 십계명의 2계명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 헬라 철학에서 말하는 신화들과는 지평이 다른 것 같아요. 그리고 일반 자연신을 섬기는 일반 고대 종교들은 거의가 자연신이었으니까요. 태양을 형상화한다거나 독수리나 황소 이런 것들 말이죠. 그런것들, 가시적인 어떤 것들의 생명의 근거를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고대인들은 자연 발생적인거구요. 고대인들만 아니라 지금도 우리가 다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지금 일종의 자본주의가 자본이 힘이 된 거거든요. 그 방식으로 자기 생명을 확보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겁니다. 그건 종교예요. 자본주의가 이데올로기니까요. 그 형식이 정치가 되었던 스포츠가 되었던 연예가 되었던 어떤 것이 되었던 그런 것이 다 구원론에 해당되는 겁니다. 구원론이 생명을 구원하다고 하는 것인데 살아있다는 확신을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겁니다. TV나 인터넷 이런 것들이, 그런 것들을 통해서 현대인들이 살아 있다는 경험을 하게 된다면 황소 옛날 고대인들이 황소 만들고 형상 만들고 똑 같습니다. 이거는 인간이 벗어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인류가 사라지기까지는 그대로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몸을 갖고 살기 때문에 이걸 건사해야 되는데 이걸 위해서는 어떤 소유라든지 구조, 제도, 문화, 문명 이런 것들을 확보하려고 하는 거거든요. 이렇게 말하는 저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을 겁니다.
성서기자들은 그런 것을 거부하는 것이거든요. 곳곳에 이러한 진술들이 있습니다. 고대인들이 신에 대한 경험을 어떤 공간적 의미로 받아들여서 그곳에 성전을 짓고 신의 형상을 건립하고 했는데요. 구약성서 기자들은 그런 것들을 엄격히 금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절대화하지 못하게 했는데 여기는 정치적 계산이 많이 들어가 있는거죠. 제가 정확한 구절을 지금 기억하지 못하겠는데요. 거기 내가, 여호와 하나님이 계실 수 있겠느냐? 예언자들의 반론이 많습니다. 예. 성서의 사상은 하나님을 예루살렘 성전에 묶여있는 분으로 생각하지 않고 세상 전체를 하나님의 전으로 생각했다. 성전 중심주의와의 격렬한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복음에 나와 있는 성전을 허물라하는 이런 것들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서가 하나님은 창조주라고 이야기하구요.
그리고 모세가 출애굽 소명받을때 당신을 누구라고 하면 좋겠습니까? 질문을 했습니다. 그때 대답이 스스로 있는자 라는 대답이 나왔는데 이런 것들이 다 창조자와 다 연관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범주나 형상이나 실체 이런 것으로 도저히 끌어내릴 수 없고 스스로 있는자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존자라고 하는 말을 숱하게 들었죠. 이게 이 뜻입니다. 이 세상과 전혀 구별된다는 뜻이죠. 존재근거가 보통 이 세상은 다 외부에 있습니다. 저도 외부에 존재하거든요. 제가 물을 마셔야지 살거든요. 조금 더 올라가면 저의 어머니 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에 내가 있는거구요. 지금도 다 그렇게 유기적으로 이 세상에서 다 뭔가를 공급받아야 삽니다. 내 존재 근거가 외부에 있는거구요. 하나님만 존재근거가 내부에 있는 겁니다.
이런 분이 누구냐 하는 것이죠. 하나님을 알 수 있어요? 하나님은 안다고 하면 그건 정신착란입니다. 과대망상입니다. 과격하게 말해서. 하나님을 본 사람도 없고 자주 이야기했습니다자주 이야기 했습니다만 본 사람은 죽고요. 그거는 왜 그러냐 하면 우리와 전혀 생명의 차원을 전혀 달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한 어러한 방식으로 존재 근거가 바깥에 있어서 종이 한 장만 제 얼굴을 가려도 앞을 보지 못하는 이러한 상태에서 제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겠어요. 그리고 보았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이러한 종이 한 장 이런 정도 만이 아니라요 하나님은 창조와 종말 전체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분이 거든요. 종말 내가 모르잖아요. 창조 내가 모르잖아요. 처음 120억년 전의 우주의 시작, 우주 시작전 그것까지 포함하면 너무나도 까마득한 이야기들인데 그런 것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그리고 또 미래에 대해서는 말할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제가 어떻게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진술은 우리의 인식으로 담아낼 수 없는 분이니까 그 분앞에서는 입 좀 다물어라 그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너희들은 자꾸 하나님을 규정하고 재단하지 말고 그 분이 말을 할때 귀를 기울여라. 그걸 우리는 계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창조와 종말과 이 우주론적인 전체 세계 사건 말이죠.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제가 너무 거시, 막연한 거시적 세계를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만 그러나 늘 우리와 연관되니까요. 그 문제도요. 그러나 거기까지 가지 않고 현재 여기만 본다고 하더라도 온갖 시간의 창조와 종말까지의 무한한 세계, 무한에 가까운, 무한이다 무한이다 말로다 해명할 수 없는, 그러한 세계 시간이, 사실은 현재 여기 안에 깊이로 와있습니다. 그것을 인제 폭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무한에 가깝다고 한다면 현기증이 나잖아요. 지금 현재 그런 쪽으로 생각만 열면 지금 여기서도 현기증이 날정도로 깊이로 담겨져 있습니다.
네 그 성서기자들은 그러한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그러한 하나님을 도구적으로 사용해서요. 기복적인 쪽으로라든지 성공신화의 주인공이 되려고 하는 방식이라든지 아니면 공포스럽게 우리에게 벌을 주는 분으로의 어떤 생각이라든지 이런데만 머물러 있다고 한다든지 하는 이런 것들은 다 우리의 종교적 욕망, 혹은 종교적 망상이 빚어내는 하나의 자기투사죠. 뭐 그런 것과는 조금 다르게 고상한 것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을 그 안에 담아둘 수 없는, 그러한 일종의 율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이야기하는데로 한다면 도대체 지금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것이 뭐가 있느냐? 소위 말해서 불가지론에 빠지고 마는게 아니냐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 경계선이 있는 거예요. 작은 오솔길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인식론적으로 따라 잡을 수 없습니다. 이건 분명합니다. 바르트가 한 이야기도 하군요. 설교자의 실존적 자리를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수 없다. 그러나 말해야 한다는 당위가운데 있다.’ 말을 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몰라요. 설교자의 자리라고 하는 이 테마도 그의 책을 읽고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띠잉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통해서 학문의 스승들이니까 많이 배우는 거예요. 고기서 머물지 않고 그런 거들이 여러번 반복되고 그런 것들이 저나 여러분들이 한 개인의 사유나 인식 Personality 고유한 그 사람만의 안에서 충분하게 소화되어서 먼저 있었던 사람과는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열어 갈 수 있습니다. 창조적으로 되는거죠. 바르트의 그런 말, 오솔길을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우리가 어떠한 그 어떠한, 40일 금식기도를 수십번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구요. 다 알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되거든요.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거는 많은 문제들이 여기에 연관되어 있는데요. 아까 계시라고 했는데요. 하나님이 기본적으로 우리 기독교 신학과 신앙에 있어서는 안에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게 어떻게 계시하시냐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지요. 그러나 우리는 다른 것 다 접어두고 기본적으로 우리보다 신앙적으로 성숙했었던 신앙의 선배들의 경험을 기초로 해서 그러한 하나님 이해를 공부를 해야되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금 말을 걸때 성숙하게 거기에 응답하고 알아 들을 수 있습니다.
제가 아까 바람이야기를 했는데요. 우리 딸들이 어렸을 때는 제가 아무리 그렇게 이야기하더라도 못 알아 들었을거예요. 그러나 나중에 들으면서 알아들을걸요. 그리고 제가 더 세상의 깊이를 알게 된다면 따라오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 딸들이 저하고는 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이 있을거니까 내가 없다고 하더라도 나보다 더 성숙하게 이 세계를 경험할 수 있을거예요. 음악 공부하는 것도 그렇고 바둑 공부하는 것도 그렇고 다 그렇습니다. 하난미, 하나님 경험, 하나님 공부도 이러한 단계가 있는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게 작은 오솔길이죠. 자칫하면 우리는 광신도로 떨어지거나 교주처럼 내가 어젯밤에 뭐 들었다. 그런 식으로. 어젯밤에 기도하다 뭐 들었다하는 사람이 있으면 십중 팔구 사이비의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것은 좋은 뜻이나 어떤 뜻이나. 아주 선한 뜻으로서도 사이비는 가능한 거예요. 굉장히 마음이 순수하고 인격적이기도 한데 그러나 신학적 훈련이 없으면 다른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여러분 그거 인정하시죠. 아무리 괜찮게 훈련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네 그렇습니다. 예 그러한 사이비 일종의 주관적 열광주의에 빠질 수 있는 거구요. 또 자칫하면 또 한쪽으로는 냉소주의 쪽으로, 아까 말한 불가지론자론자처럼 알수 없는 거는 말하지마. 하나님은 종말에 가야 아는 건데 지금 뭐하려 이야기해. 아는 것만 이야기해.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 이야기해. 이런 식으로만 이야기합니다. 그것도 웃기는 거죠. 그러면 시인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시인은 불가능한 거죠. 시인이 말하는 거는 실증은 아니잖아요. 그러나 시인일 말하는 것은 리얼한 것은 분명합니다. 이 균형을 어떻게 잡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우리들에게 제약되어있다. 우리는 피조물이고 우리는 질그릇이죠. 주인의 뜻을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우리는 잘 모른다고 하는 것을 전제하면서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고 하는 계시에 근거해서 또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경험한 그러한 문서들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그리고 오늘도 하나님은 영이라고 하는 그러한 삼위일체의 한 위격으로 우리와 새로운 방식으로 대화를 하기 원하시고 또 그 방식으로 하시기 때문에 영적인 촉수만 놓치지 않기만 한다면, 그러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알아 들을 수 있구요. 어느정도 알아 듣는가 하는 거는 다른건데요. 알아들을 수 있고 그거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제가 여러분들에게 드리는 것이 제가 뭔가 좀 알고 하는 것 같애요? 아니면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까? 여러분들 각자 판단하시기를 바라구요.
저는 기본적으로 사람 개인에 대해서 별로 희망, 이렇게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이거는 나 자신을 향한 것이거든요. 인식론적 한계가 너무 뚜렷하고 그거는 그것만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정서적으로 우리에게 상처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생명의 영과 온전히 소통하기는 사실은 이게 좀 어렵습니다. 은총이 아니면 불가능한데요. 이러한 우리들의 상처를 다 딛고서 그래도 우리가 생명의 영이신 성령과 소통, 교제, 귀기울임 이것이 가능하려면 이 모든 상처들, 기독교 용어로 말하면 죄라고 할 수 있겠죠. 죄의 결과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한 것들이 씻겨져야 하는데 그거는 죽을 때까지 다 씻겨지지는 않습니다. 그걸 다 안고 가야하는 것이거든요. 그런 점에서, 그러한 상태만 있다면 가능성이 없어요. 우리들에게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순간 순간 말하면서도 계산하는 것이 우리가 아니겠어요. 완전한 순수한 언어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의 능력이라기보다 어디에 기대있어야 되는 겁니다.
우리들에게는 그게 있는거죠. 우리들에게는 기댈 언덕이 있는거예요. 말하자면요.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인데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성서와 2천년동안의 해석이 있거든요. 해석이 신학입니다. 이것이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최선이다. 첩경이다.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신학 무용론에 빠져 있으니까요. 꿩 잡는게 매라는 식으로 있으니까. 모르겠습니다. 제 말이 이게 얼마나 옳은지 그런지는 이것을 여러분들이 판단하시고 제 말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신학적 영성에 기댄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상처들, 여러가지 부분에서요.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담아내고 옷을 갈아 입는 것이죠 말하자면. 그러한 상처들이 내버려두고 그들이 더 이상 활동하지 않도록 묶어두고, 암 걸렸을때 약을 먹으면 암세포가 좀 줄어들지 다 없앨 수는 없습니다. 죽을때까지 죄의 경향성을 안고 살아갈 각오를 하세요. 그게 씻겨진다고 하는 사람들은 가짜입니다. 구원파에 가까운 사람들이거든요. 그거는 구원을 실증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 하나님을 실증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과 똑 같습니다. 네. 그러한 것들을 그냥 안고 있고 그리고 우리에게 다른 것이 들어와서 크게 활동하도록 하게 하는 태도, 필요한 거죠. 음악가들은 음악의 힘이 자기를 지배하게 하거든요. 아무것도 그게 온전하게 활동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어ㄸ허게 알 수 있을까요? 음악가와 같은 끼, 광기, 음악의 온전한 감동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신학적 사유입니다. 개인의 경건성 중요하지 않느냐? 경건훈련. 네 그걸 부정하지 않고, 그걸 다 포함한, 그 안에 있는 겁니다. 시간이 되어서 제가 마쳐야 되겠는데요.
신앙적 인식론, 이게 바로 인식의 문제가 중요하다. 존재와 인식, 생각을 해 보시겠어요.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많이 시간이 필요하고 저도 자신이 없어요. 존재와 인식, 어떤 것이 있는 것이 우선적이냐? 아니면 인식하는 것이 우선적이냐에 따라서 조금 달라지는데. 서로 소통되는 거겠죠. 우리 기독교 신앙은 존재론적이니까 존재가 먼저인거죠. 예수님의 비유로 말하자면 나무가 좋아야 되는 것이고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식은 존재가 드러나는 방식이예요. 존재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드러나지 않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될까요? 그건 어떤 범주 어디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람과 같이 자유롭게 되는 거구요. 궁극적인 실체이기 때문에요.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이죠. 그게 들어납니까? 그 자체가 아니잖아요? 그건, 인식, 인식의 문제, 행위의 문제 그걸 통해서 인제 드러나게 되는건데요. 그걸 어떻게 인식하느냐 그게 중요한거죠. 하나님이 계시하실때, 존재는 계시의 문제군요. 그러니까 계시 자체요. 우리의 존재, 응답인가요? 존재는 인식으로 드러나고 인식은 존재에게 뿌리를 둔다.
존재적인 토대가 없으면 우리는 사이비로 흐를 수 있다. 신천지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기독교적으로도. 그건 일종의 인식이거든요. 문선명도 가능합니다. 그 방식으로 인식하는거거든요. 그에게 영적인 존재론, 이런 것들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이단으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무조건 나쁜 뜻으로 이단이 아니라 그거는 어떤 부분이 잘못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죠. 네. 이러한 모든 훈련들이 신앙적 인식론, 신학적 사유에서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쪽에서 말씀 드린 겁니다.
네. 오늘 제 강의가 좀 두서가 없었습니다. 다른 때도 마찬가지 였을텐데요. 오늘은 조금더 집중이 안되었네요. 제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네 여기가지만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불변성까지 하기로 했었는데요. 다음 목요일날 보충하도록 하구요. 다음에 비종교적 해석과 정말 중요한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 불변성은 간단하게 말씀만 드릴거고 본훼퍼가 말하는 비종교와의 문제, 삼위일체, 내가 준비를 잘 해야 되겠어요. 이게 기독교 신론의 핵심이고 사실은 신론만이 아니고 기독교 신학 전체의 핵심입니다. 성령, 기독,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니까요. 다음 목요일은 꼭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다음 주일 저녁에 다시 뵙겠습니다. 질문 있으시면 그쪽으로 주십시오.
(대금 소리.. )
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네 지금 제가 시디, 컴퓨터 안에 넣고 좀 틀었는데요. 양성필이라고 하는 대금 연주자의 연주였습니다. 제목은 숨2, 영어로 Breath 2 라고 되어 있네요. 숨. 숨 두번째네요. 대금 연주가 이렇게 시디로 들어도 괜찮지만 직접 들으면 훨씬 힘이 있습니다. 다이나믹하다고 하나요. 나무 대나무에 숨을 불어 넣어서 소리를 내는데 거기서 폭포수 소리도 나구요. 폭풍이 부는 소리도 나구요. 네 그렇습니다. 고것 독주 악기인데 어떻게 그렇게 소리를 다양하게 내는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이 소리의 경지라고 할 수 있겠죠. 무조건 절대적인 힘이 있어야 힘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조화인것 같습니다. 조금 작은 소리와 큰 소리가 적절하게 배합됨으로서 어떤 힘을 나타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네. 좋은 연주였습니다.
오늘 저는 점심 먹고 잠간 산책을 다녀왔습니다. 다른 일로 바쁘긴 한데 문득 아파트 밑 숲 쪽을 바라보니 한창 아카시아 꽃이 만발하더라구요. 옛날 생각도 나고 그래서 아카시아 향을 좀 가까이 맡기 위해서 갔습니다.
미들타운님이 소리가 작다고 하는데 정말 다른 분들도 작나요? 가깝게 놓아야 되나요. 다른 분들이 좋다고 한다면 네 알았습니다. 그러면 미들타운님이 볼륨을 올려보시죠.
아카시아 향기는 누구나 다 추억이 있지요. 어렸을 때 아카시아 꽃을 따러 다니던 추억들이 저보다 나이가 좀 어린 사람들도 다 있을 것입니다. 여학생, 초등학교 여학생 남학생 어울리면서 따라다니구요. 용기가 있는 아이들은 아카시아 나무가 가시가 많이 있어도 타고 올라가서 꺾어서 밑에 던져주고 장대로 따기도 하구요. 아카시아 꽃은 향기가 좋습니다. 네 말자체가 좀 우습네요. 어렸을 때 그런 추억도 있구요.
80년대 초 광주에서 군목 들어 가기 위해서 훈련 받았는데요. 군종장교 입니다. 80년 3월에 입대했군요. 3개월 동안 아카시아 향기가...
제가 강의가 깊이 들어가기 전에 초반부에는 늘 말이 헷갈려요. 집중력이 떨어진답니다. 조금 베테랑들은 처음부터 강의를 빈틈없이 끌고 가는데 저는 잘 안되요. 설교도 좀 그렇습니다. 첫부분은 안으로 들어가는데 힘이 들더라구요. 나름대로는 정확하게 말할 거리를 준비하고 설교단에 섰는데 하여튼 나 스스로 거기에에 빨려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게 아마추어라고 하는 거겠죠. 아리아같은 것을 부르는 사람들도 정말 베테랑들은 무대서기부터 청중들을 노래안으로 끌어들이는데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분위기에 익어야 하는데 저는 그런 면에서 저는 굉장히 프로기질이 없는 것 같습니다.
80년초에 3월서부터 3개월동안 교육을 받았는데 여러 가지다 받았죠. 거기에 어떻게 산속에 들어가서 총 쏘는 연습도 하구요 야간 사격도 하고 행군도 하고 그랬습니다. 지금까지도 야간 인가요 하여튼 야간되기 전인가? 낮과 밤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저녁 으스름될 때 같습니다. 피곤한 몸으로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카시아 향기가 진동을 하더라고요. 아 그런 것들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게 하는지 모릅니다. 오늘도 점심 먹고 거기에 갔다 왔는데 이상하게 꽃은 많이 피었는데요. 냄새는 별로더라고요.
가면서 바람이 부드럽게 불더군요.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면서 아 이 바람이 뭘까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바람이 뭘까 라기 보다, 아주 고대인들이, 지금 제가 바람이 뭐냐에 대해서 초보적인 물리학적인 지식이 있기 때문에 공기의 대류, 이동을 통해서 내 몸에 접촉하는 것을 아니까요. 고대인들은 이것을 뭐라고 생각했을까를 돌아보니 참 신기했을거 같은 느낌이 듭니다. 뭔가가 자기를 휩싸잖아요. 보이지도 않죠. 뭔가 자기를 흔들고 있는데 자기를 접촉하고 있는데 그게 뭔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냥 그게 그 바람이 지구의 전체 가득하다고 하는겁니다. 내 있는 자리만 아니라 저쪽 나무도 흔들리고 그런 것을 보면 하나의 바람 현상이니까 고대인들도 그대로 나하고 똑같이 느꼈겠죠. 백만전에 살던 사람도 이나 나나 바람에 대해 똑같이 경험하는 것인데요. 얼마나 신비로왔을까 하는 것입니다. 지구에 가득해 있는 그 무엇, 그러나 그 뭔지를 모르는, 손으로 잡을 수 없는, 그러나 분명히 현상하고 있는 것 말이죠. 그것을 히브리사람들은 제가 한 두번 말씀드렸습니다만 루아흐라고 불렀거든요. 생명의 영이다. 상당히 바람과 영 숨 하나라 생각했던 것 놀랍죠. 아까 시디에 나오는 숨2, 이런 것들입니다. 대나무, 바람, 소리, 그런 과정을 통해서 살아있다고 하는 경험하는 그러한 예술적 경험, 그러한 것들이 종교적 경험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한 것들이 아우러져 있는 것 같습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는 이야기를 드렸습니다만. 왜 그러냐 하면요. 세월이 가더라도 이 세계를좀더 많이 아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이 신기해서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아카시아 따먹던 느낌이 그러한 것들이 지금 그 당시도 제가 굉장히 황홀한 느낌으로 그러한 놀이속에 심취되어 있었을텐데요. 지금은 조금 다른 방식의 놀이지만 기본적으로는 똑 같은 것 같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로 세상을 직면해 있는 나의 세계 경험 이런 것들이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 이게 왜 그런가 하는 그러한 궁금증이 들기도 합니다.
오늘은 하나님에 대한 질문인데요. 이게 한편으로는 좀 막막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밤새도록 이야기하더라도 끝나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구요. 그냥 직접 질문해 볼까요? 하나님이 존재하시나요? 그렇다면 어떻게 존재하실까요? 하나님이 계실까요? 고대인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경험했을까요? 성서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말이 많이 있고요.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요. 그 하나님이 과연 누구냐 하는거죠. 제가 아까 바람을 경험했다고 하는데요. 그렇게 말씀 드렸습니다. 누구나 다 그런 경험을 하는데 그걸 아주 실질적으로 하는 사람이 있고 그냥 따로 노는 그러한 경험도 있습니다. 경험이라고 하기보다 그냥 지나가버리고 마는 것들이죠. 하나님에 대한 경험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고 실질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있을텐데요. 영성가들은 그것을 좀 더 실질적으로 경험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구요. 우리들은 사실은 실질적으로 잘 경험을 못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있다는 확신을 갖는다고 애기를 하지만 그게 정말 하나님 경험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신앙의 특성인 정서와 심리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님을 내가 영접했다고 하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과연 그가 경험한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분들도 아마 어렸을 때 중고등학교나 대학교때, 청년 시절에 그러한 집회에 많이 참석 했을꺼고 나름대로 그런 경험을 많이 했을겁니다.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말이죠. 그 영접한 주님이 누굴까요? 그 주님은 하나님일까요? 어떤 걸까요? 그냥 교회지도자들이 예수님 영접 하신겁니다. 성령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이런 말에 우리가 선동당하고 세뇌당하고 실제로는 모르면서도 아는것 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렇게 조금 부정적으로만 말씀드리는 것이 미안합니다. 그러한 예수님 영접 하나님 경험이 그렇게 특별한 사람에게만 있다는 뜻으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바람의 문제요. 제가 이런 바람을 말씀드리냐 하면 이게 하나님 경험에서 중요한 메타포이기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성령으로 난 사람은 바로 이와같다고 말씀하시거든요. 바람처럼 자유로운 존재로 움직이시는 성령의 경험이니까요. 이것은 어떤 문자안으로 들어오는 것 아니고요. 가르쳐서 아는 것 아닙니다. 딸들에게 조금있다 딸이야기 더하겠습니다만, 야 저기 바람 보라라 얼마나 놀랍냐 뭐가 있단다. 어떤 형체안에 들어오지도 않지만, 아주 자유롭지만, 그리고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공기의 이동으로 일어나는 운동이지만 이거같이 확실한 리얼리티가 어디있냐 이런 이야기를 제가 한다면 이게 알아 들을 수도 있고 못알아 들을 수도 있고 있는데요. 그냥 낱말뜻으로는 알아 들을 수 있지요. 아 아버지가 이야기하니 그런거구나. 그러나 그런 것은 바람에 대한 경험이 아닙니다. 바람과 자기와의 일치거든요. 그리고 그 일치를 통해서 그 어떤 생명의 깊이로 들어가는 거예요.
이러한 단어들이 상당히 관념적인거예요. 생명 하면 이것도 제각각으로 생각을 할 테니까 또 이게 뭐다 딱 부러러서 요거다 말하기 힘들거든요. 성령은 생명의 영이기 때문에 그러한 생명을 이해하는 것이 성령을 이해하는 그러한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게 다 포괄적으로 관계된 것들 이거든요. 바람 경험을 제가 들려드린 시디의 대금을 부르는 사람은 숨과 자기가 일치된 경험을 했을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보통 그런 것 하지 못하고 삽니다. 우리가 숨을 쉬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살죠.
단전 호흡하는 사람들은 숨, 단전, 호흡 말이죠. 고 순간 순간과 일치하는 경험, 훈련이라고 그래요. 가만히 앉아서 단전을 통해서 집중시키게 되면 오장육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모든 움직임을 원활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게 아마 가능은 하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 여러분들 조금 더 솔직하신 게 좋아요. 모르면 모른다고 생각을 하고 알면 아는거구. 아는 것이 얼마나 보편적 진리의 토대위에 있는가 질문해야 되고 말이죠. 그냥 할아버지 할머니 생각없이 편안하게 신앙생활해도 결정적으로 문제는 아닙니다. 다 우리는 우리가 올바로 인식하기 때문에 의로와진다거나 그렇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고 인정 받을 뿐이고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받기 때문에요. 그러니까 우리의 업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총이기 때문에 우리가 신앙의 깊이 세세하게 모른다고 해서 결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성적 기독교인들로 산다고 할때 그리고 교회 나름대로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할때, 그런 말로만은 충분한 설득력이 없기는 합니다만 일단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준비를 하는 사람은, 자기가 갖고 있는, 베드로 후서에 있는 말씀이거든요. 자기가 알고 있는 희망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들에 대해 설명할 준비를 해야 하거든요. 우리가 믿고 있는 기다리고 있는 종말론에 관계된 것인데요. 하나님의 통치를 이야기하는 것이니까요. 이게 다 다 연관됩니다. 그런 쪽으로 우리가 좀 솔직하게 해야지요. 솔직하게 자기 자신을 내놓고 답을 찾아가야 되구요. 답을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말을 걸때 대답을 할 수 있는 준비를 한다고 하는거니까요? 그런 것에 대해서 믿음이 중요하지 자꾸만 생각하게 하느냐 신학적인 사유가 무어가 그리 중요하냐에 대해서 불편하다고 생각할 필요가 하나가 없습니다. 신학적으로 사유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선입관 고정관념들을 내려좋고 성령과 소통할 수 있는 자세를 갖는다고 하는 거거든요. 네 그게 아주 중요합니다. 신학, 지금 바로 말씀드린 게요. 신학적 사유 훈련 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성찰이거든요. 우리의 신앙에 대한 theological Reflection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학적 성찰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들이 계속 있으면 그렇게 때가 끼거든요.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면 그게 원래 말하려고 하는 그것, 근본을 놓치게 되고 형해화 된다고 할까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리는 수가 많이 있습니다. 그걸 늘 반성을 하게 되면 저는 그런 점에서 반성하려고 하는 점에서 신학적 사유야 말로 가장 성령과 밀착할 수 있는 길이리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말을 걸때 최대한도로 알아들을 수 있는 있는 준비를 하는 작업이라고 하는 점에서 중요한 거죠.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존재하는가? 어떻게 존재하는가? 어렴풋이 들은 풍월로 생각하지 말고 아주 실질적으로 내놓고 질문하고 찾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강의안에 나와 있습니다만 제 딸 들이 어릴때 초등학교 3학년 또 중3이었을때 둘째 딸이 그렇게 질문했습니다. 아빠, 하나님 보이지도 않는데 정말 있는거야? 이런 식이었어요. 그런 아이들이 제기한 질문에 대해서 제가 대답을 할 수 있어야만 그게 살아있는 설교가 될 수 있는 거거든요. 나름대로 설명을 해보았는데 그게.. 이게.. 이쪽에 조금 이야기를 했습니다. 1999년이군요. 중3, 큰 딸이구요. 초등학교 3학년. 네. 그때 바람이야기를 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그 이야기죠. 그게 없지만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무조건 없지 않는 것이 아니냐?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 간접적으로 바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느냐 그런 이야기였어요. 그러면서 제가 조금 어려운 이야기를 했군요. 바람은 동화책처럼 있는 것처럼 공기가 움직임으로서 생기는 일종의 운동이다라고 했습니다. 바람은 운동이다. 둘째 사랑을 생각해봐라 어머니 아버지처럼 사랑을 하는데 사랑이 물건처럼 있는게 아니라 관계에서 나타나는, 관계가 중요합니다. 관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하는 것이죠. 하나님도, 하나님도 바람처럼 운동이구요. 힘이구요. 제가 딸들에게 설명하기 위해서 한번 해본 겁니다. 이게 완전한 대답은 아니구요. 하여튼 그런 쪽으로 실질적으로 생각해야될 필요가 있으니까요. 또 하나는 관계, 마티 무버같은 사람의 책에 보면 나와 너 그것을 중심으로 한 신학적인 노력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여튼 딸들에게 이런 대답을 했는데 여기서 말하려고 한 문제는 핵심적으로 존재에 대한 것입니다. (책장넘기는 소리) 하나님이 계시다 안계시다 그런 이야기를 할 때 우리가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될 부분은 있다하는 말이 뭐냐 하는거죠. 존재한다. 만약에 하나님을 사물처럼 계시다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죠. 우리가 이 존재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깊이로 생각할 수 있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생각도 (달라진다, 달라진다기 보다) 심화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존재라고 생각할까요? 아... 말이 좀 빙빙도네요. 그러면 아무래도 이 문제는 하이데거의 말을 통해서 풀어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이데거... 그가 형이상학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책속에서 한 이야기인데. 모르겠습니다. 강의 중에서 앞서 했다고 한다면 양해하시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바룸 기프테에스 자이엔데스 바름 니스트 필메어 위즈” 자이엔데스 바름 방언처럼 들리신 존재하는 것들은 왜 있고 존던 대신 니스트필메어 왜 더이상 없냐? 여러분 저는 이 말을 듣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공부가 선배들, 어른들한테, 스승들한테서 배우는 것들입니다. 제가 하이데거의 책, 많은 독파를 하지 못했습니만 모르는 것이 태반입니다. 철학자들의 전문적인 지식을 제가 얼마나 따라갈 수 있겠어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는것 같아요. 한 두 가지를 알아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이데거가 말한 이말, 이것을 통해서 제가 어떤세계로 이렇게 들어가는 경험을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경험이 있을 겁니다. 이 존재하는 것들 하고, 자인하고는 다른 거거든요. 아 그쪽으로 가지 말고. 이 존재하는 것들, 지금 이 세상에 이렇게 있는 것들은 왜 있고 없는 것들은 왜 없는가? 무. 없는 것들은 왜 없는가는 질문입니다. 제 앞에 연필이 있구요. 연필 있다고 하구요. 종이가 있습니다. 종이와 연필은 너무 비슷한가요. 나무에서 왔기 때문에. 그건 둬두고. 시계가 있습니다. 연필과 시계 중간쯤 되는 어떤것, 아직 이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왜 이것은 없을까요? 아카시아 꽃은 있는데 아카시아 꽃 하고 다람쥐하고 그 중간쯤 되는 것은 니스트 필메어 왜 더이상 없을까요? 만약에 이런 문제들을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셨으니까 그렇지 라고 대답한다면 그거는 교리 문답으로는 맞지만 이 세상의 깊이를 뚫어 보는 사람으로서는 자격미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없다고 하는 게 그렇게 당연한 것이 아니거든요. 있다고 하는 것도 그렇게 당연한 것도 아니고 말이죠. 김춘수가 꽃이라고 하는 시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 것 같아요. 그냥 사물에 불과했는데 내가 꽃이라고 부르니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 모르겠습니다. 시인의 영감을 제가 그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세상의 있고 없고 하는 문제들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들이 아니다.
이러한 문제들이 철학자들이 생각을 하고 있어요. 우리가 이러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조금 귀를 기울이면서 하나님이 누구냐에 대해서도 우리가 생각을 깊이, 심화 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통... 생각해 보세요. 도대체 이 존재하는 것들이 뭔가 하는 것 말이죠. 내가 지금 하이데거를 통해서 정말 있는 것하고 없는 것들이 당연한 것들이 아니다 말을 했구요. 연관해서 즉 있는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진다고 하는 명백한 사실 속에 우리가 놓여져 있습니다. 별도 그렇고, 별도 그럴진대 오늘 우리들의 삶은 오죽하겠습니까? 이게 다 지나가버리는 그러한 속에 있는데 정말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가요? 지금 우리가 강의하고 있는게 정말 내가 있는 건가요? 그리고 여러분들이 듣고 있는게 현실인가요? 아니면 지나간 오래전 일에 대해서 우리가 꿈을 꾸고 기억을 회상하고 있는가요? 현재 이게 확실한 건가요?얼마나 이게 확실하다고 하는 증거가 있는 건가요? 여러분들도 그런 경험이 있을런지 모릅니다. 아마 당연히 있으리라고 봅니다. 어느 순간에는 내가 지금 밥을 먹고 있는데... 내가 지금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내가 지금 대화를 하고 있는데... 이게 나의 지금 경험이 아니라 어떤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기도 하고 지난 일에 대한 회상처럼 다가오는 그러한 경험도 있습니다.
아마 이런 것들을 아마 장자가 호접몽, 제가 뒤에 썼을 텐데요.(호접몽? 뒤에?) 네 장자가 나비가 되는 꿈 여기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죠. 장자가 꿈을 깬 뒤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나? 나비가 현재 나 장자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장자가 꿈의 주인공인가? 나비가 꿈의 주인공인가? 잘 모르겠다고 하는 말이. 이게 이렇게 장난은 아니거든요. 네. 이런 이야기는 우리의 현실인식이 우리가 경험한다고 존재한다고 하는 것들이 확실하게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전도서도 인간의 행위라고 하는 것이 바람을 잡으려고 하는 것과 같이 헛되다고 진술하고 있지요. 이거는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없는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2천년전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예수님과 제자들, 초기 기독교인들들 이런 것들, 도대체 그들은 실재했던 것인가요? 물론 문서로 그런 몇가지들이 남아있기는 합니다만. 어쩌면 조금 더 멀리 나가볼까요? 지구가 시간이 다되어서 그 날이 분명히 오죠. 45억년이라고 하는 시간은 분명히 오지 않겠어요. 그전에 지구가 빙하기에 돌입해서 인간이 다 죽는다거나 생명체가 다 없어진다거나 아니면 혜성이 부딪쳐서 지구가 폭발해서 화염에 휩싸여서 다시 45억년전 불덩어리처럼 된다면 모르지만 그럴 가능성도 완전히 부정할 수 없는데요. 하여튼 그때가 분명히 오는 것은 분명합니다. 시간이니까요. 영원한 것은 아니니까요. 그렇다 그러한 시간 속에서 지금 우리들이 경험하는 이것들이 무엇인가 하는 겁니다. 저는 지금 우리의 삶이 무의미하다고 하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 확실한게 아니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늘 생각하는 것의 우리가 아는 것 정도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그걸 저는 실체론적 하나님 이해라고 했는데. 그냥 물건처럼 말이죠. 옥황상제처럼 말이죠. 하나님이 어느 우주공간안에 존재하신다고 하는 그런 생각들은... 바람직한 그런 신앙 이냐 아니가 그런 차원은 아닌데요. 그건 여전히 우리는 책임있는 대받은 못된다 그렇게 말하는 거죠.
이 실체, 아 이런 이야기를 제가 해야 되냐 말아냐 하나 강의하면서 이렇게 혼돈이 되어서 말이 헛도는 겁니다. 지금 말씀드리는 것을 초보적인 것으로 다 알고 교리일텐데요. 어떤 분들은 아니신 것 같고. 다 그걸 또 대학교 교양과정에 있는 것처럼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그러면 우리 강의가 루즈해지기 때문에 조금 제가 멈칫멈칫하게 됩니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야 되는데 그게 확실하게 잡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실체 Substance라고 하는 것이거든요. 영어 잘 썼나요. 또 하나는 뭐 프로세스 process라고 할 수 있겠죠. 실체, 어떤 것이 있다. 실체로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가장 최소단위가 원소 깨지지 않는 아톰이 있는 거죠. 이러한 방식으로 뭔가가 있다는 것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사유방식, 그러한 것이 신학안에서 오랫동안 자리를 했구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딱 그러한 것만 아닙니다. 그런 흐름들이 대세이긴 한데 여러분 기독교 신학이 그렇게 만만한게 아닙니다. 가끔 기독교 신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바울에 의해서 기독교가 헬라화되었다 한다든지 관념적이 되었다 한다든지 한다는 것은 신학을 잘 모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비록 그러한 흐름들이 교부시대에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지만 그 안에 이미 종말에 이르게 될때까지 그러한 세계 이해에 다 담겨있어서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예요.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실체론적으로 이해하는 부분이 많이 있지만 제가 편의상 설명하고 있는거지. 꼭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실체로 이해하는 것이 있구요. 그 반대되는 것이 과정 혹은 운동 이러한 관점으로 이해하는 것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교회현실에서는 실체론적인 하나님에 머물러 있습니다. 물리학에서는 실체는 인정하지 않죠. 공간이죠. 공간과 에너지죠. 그게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입니다. 공간 비어있는 거예요. 에너지, 물리학적으로 그렇습니다. 네 이러한 세계 이해가 우리들에게 이미 오래전에 오고 있는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변증해야 될가요. 이게 지금 변증도 변증이지만 우리스스로 하나님에 대한 표상을 바르게 해야 되는데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일까요? 네. 조금 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야 되겠네요.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요? 여러분들 마음에 계십니까? 아니면 우주 공간 어디 북극성 너머 쯤에 자리하고 있는가요?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하는데 그곳이 과연 어디인가요? 아주 실질적으로 그런데가 있나요? 그러면 뭘까요? 이러한 문제들은요... 우리가 세계를 이해해 가는 것만큼 그런 것들이 풀리게 됩니다. 풀린 다기보다도 확장된다고 할 수 있겠죠. 이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거죠.
융엘이라고 하는 사람이요. 에바하르트 융엘(Eberhard Jüngel)이죠. 이 사람이 곧-하나님, 알스 게하이니스데어 벨트(God as the Mystery of the World) 라는 책을 썼어요. 세상의 비밀로서의 하나님, 세상과 하나님이, 알스는 영어로 as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병열이라고 할 가요. 이렇게 그림을 그릴 수 있고요. 고 사이에 비밀이라고 하는 것이 들어있습니다. 세상의 비밀, 하나님은 세상의 비밀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아. 이 말이 와 닿는 분도 계시죠. 예. 저어.. 누구야. 은폐성에 대해 질문하신 분도 있었는데요. 비밀, 은폐, 이것이 다 연관되는 거거든요. 네. 세상이 비밀인거예요. 아직까지 열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도 여전히 비밀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 신자들의 머리속에 고정되어 있어요. 이게 그 자체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고 막연하게 아는 것처럼 전제하고 대신 믿고 있는 자기 자신의 신앙적인 태도에 몰입하고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하나님이 별로 중요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물리학자가 물리의 세계속으로 들어가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는 않고 이미 앞에 있었던 물리학적인 원리들, 그런 것들만 계속 외우면서 아 나는 훌륭한 물리학자다 라고 한다면 그건 사이비죠. 사이비든지 과학자라기보다도 선생,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과학의 원리를 설명하는 선생에 불과하죠. 과학자는 그 비밀 속으로 자꾸만 들어가게 되는 거거든요.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세계를 실체로 이해하는 시대를 건너뛰었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을 실체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는 거죠. 잘못이란 말은, 아주 잘못 되었다기 보다도 더 나가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 것들이... 그러면 성서에 있는 하나님 이해가 다 변하는거냐. 그러한 뜻은 아닙니다. 성서의 하나님이해가 그런 것을 담고 있어요.
강의안에 인용한 각주 비슷하게 달아놓은 것인데요. 한번 보겠습니다. 성서적 하나님 이해에서 가장 핵심적인 관점은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가르침이 있다. 감이 오죠. 형상하면 실체거든요. 어떤 정해져 있는 틀이거든요. 어떤 범주거든요.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죠. 네? 성서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자로 말한다고 하는 부분을 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아 그냥 하나님이 만드셨다 그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존재에 대한 문제인거예요. 그러니까 그 분은 피조된 분이 아니다. 피조 세계에 있는 그러한 여러가지 형식들, 범주들 이런 것들로 하나님을 재단하지 마라는 거죠. 이 성서의 하나님 진술은 오늘 물리학, 현대 물리학이 이해하는 세계 이해에도 얼마든지 타당한 말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그러니까 성서 해석이 중요한 거죠. 형상을 만들지말라고 가르칩니다. 십계명의 2계명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 헬라 철학에서 말하는 신화들과는 지평이 다른 것 같아요. 그리고 일반 자연신을 섬기는 일반 고대 종교들은 거의가 자연신이었으니까요. 태양을 형상화한다거나 독수리나 황소 이런 것들 말이죠. 그런것들, 가시적인 어떤 것들의 생명의 근거를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고대인들은 자연 발생적인거구요. 고대인들만 아니라 지금도 우리가 다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지금 일종의 자본주의가 자본이 힘이 된 거거든요. 그 방식으로 자기 생명을 확보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겁니다. 그건 종교예요. 자본주의가 이데올로기니까요. 그 형식이 정치가 되었던 스포츠가 되었던 연예가 되었던 어떤 것이 되었던 그런 것이 다 구원론에 해당되는 겁니다. 구원론이 생명을 구원하다고 하는 것인데 살아있다는 확신을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겁니다. TV나 인터넷 이런 것들이, 그런 것들을 통해서 현대인들이 살아 있다는 경험을 하게 된다면 황소 옛날 고대인들이 황소 만들고 형상 만들고 똑 같습니다. 이거는 인간이 벗어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인류가 사라지기까지는 그대로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몸을 갖고 살기 때문에 이걸 건사해야 되는데 이걸 위해서는 어떤 소유라든지 구조, 제도, 문화, 문명 이런 것들을 확보하려고 하는 거거든요. 이렇게 말하는 저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을 겁니다.
성서기자들은 그런 것을 거부하는 것이거든요. 곳곳에 이러한 진술들이 있습니다. 고대인들이 신에 대한 경험을 어떤 공간적 의미로 받아들여서 그곳에 성전을 짓고 신의 형상을 건립하고 했는데요. 구약성서 기자들은 그런 것들을 엄격히 금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절대화하지 못하게 했는데 여기는 정치적 계산이 많이 들어가 있는거죠. 제가 정확한 구절을 지금 기억하지 못하겠는데요. 거기 내가, 여호와 하나님이 계실 수 있겠느냐? 예언자들의 반론이 많습니다. 예. 성서의 사상은 하나님을 예루살렘 성전에 묶여있는 분으로 생각하지 않고 세상 전체를 하나님의 전으로 생각했다. 성전 중심주의와의 격렬한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복음에 나와 있는 성전을 허물라하는 이런 것들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서가 하나님은 창조주라고 이야기하구요.
그리고 모세가 출애굽 소명받을때 당신을 누구라고 하면 좋겠습니까? 질문을 했습니다. 그때 대답이 스스로 있는자 라는 대답이 나왔는데 이런 것들이 다 창조자와 다 연관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범주나 형상이나 실체 이런 것으로 도저히 끌어내릴 수 없고 스스로 있는자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존자라고 하는 말을 숱하게 들었죠. 이게 이 뜻입니다. 이 세상과 전혀 구별된다는 뜻이죠. 존재근거가 보통 이 세상은 다 외부에 있습니다. 저도 외부에 존재하거든요. 제가 물을 마셔야지 살거든요. 조금 더 올라가면 저의 어머니 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에 내가 있는거구요. 지금도 다 그렇게 유기적으로 이 세상에서 다 뭔가를 공급받아야 삽니다. 내 존재 근거가 외부에 있는거구요. 하나님만 존재근거가 내부에 있는 겁니다.
이런 분이 누구냐 하는 것이죠. 하나님을 알 수 있어요? 하나님은 안다고 하면 그건 정신착란입니다. 과대망상입니다. 과격하게 말해서. 하나님을 본 사람도 없고 자주 이야기했습니다자주 이야기 했습니다만 본 사람은 죽고요. 그거는 왜 그러냐 하면 우리와 전혀 생명의 차원을 전혀 달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한 어러한 방식으로 존재 근거가 바깥에 있어서 종이 한 장만 제 얼굴을 가려도 앞을 보지 못하는 이러한 상태에서 제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겠어요. 그리고 보았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이러한 종이 한 장 이런 정도 만이 아니라요 하나님은 창조와 종말 전체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분이 거든요. 종말 내가 모르잖아요. 창조 내가 모르잖아요. 처음 120억년 전의 우주의 시작, 우주 시작전 그것까지 포함하면 너무나도 까마득한 이야기들인데 그런 것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그리고 또 미래에 대해서는 말할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제가 어떻게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진술은 우리의 인식으로 담아낼 수 없는 분이니까 그 분앞에서는 입 좀 다물어라 그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너희들은 자꾸 하나님을 규정하고 재단하지 말고 그 분이 말을 할때 귀를 기울여라. 그걸 우리는 계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창조와 종말과 이 우주론적인 전체 세계 사건 말이죠.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제가 너무 거시, 막연한 거시적 세계를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만 그러나 늘 우리와 연관되니까요. 그 문제도요. 그러나 거기까지 가지 않고 현재 여기만 본다고 하더라도 온갖 시간의 창조와 종말까지의 무한한 세계, 무한에 가까운, 무한이다 무한이다 말로다 해명할 수 없는, 그러한 세계 시간이, 사실은 현재 여기 안에 깊이로 와있습니다. 그것을 인제 폭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무한에 가깝다고 한다면 현기증이 나잖아요. 지금 현재 그런 쪽으로 생각만 열면 지금 여기서도 현기증이 날정도로 깊이로 담겨져 있습니다.
네 그 성서기자들은 그러한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그러한 하나님을 도구적으로 사용해서요. 기복적인 쪽으로라든지 성공신화의 주인공이 되려고 하는 방식이라든지 아니면 공포스럽게 우리에게 벌을 주는 분으로의 어떤 생각이라든지 이런데만 머물러 있다고 한다든지 하는 이런 것들은 다 우리의 종교적 욕망, 혹은 종교적 망상이 빚어내는 하나의 자기투사죠. 뭐 그런 것과는 조금 다르게 고상한 것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을 그 안에 담아둘 수 없는, 그러한 일종의 율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이야기하는데로 한다면 도대체 지금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것이 뭐가 있느냐? 소위 말해서 불가지론에 빠지고 마는게 아니냐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 경계선이 있는 거예요. 작은 오솔길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인식론적으로 따라 잡을 수 없습니다. 이건 분명합니다. 바르트가 한 이야기도 하군요. 설교자의 실존적 자리를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수 없다. 그러나 말해야 한다는 당위가운데 있다.’ 말을 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몰라요. 설교자의 자리라고 하는 이 테마도 그의 책을 읽고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띠잉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통해서 학문의 스승들이니까 많이 배우는 거예요. 고기서 머물지 않고 그런 거들이 여러번 반복되고 그런 것들이 저나 여러분들이 한 개인의 사유나 인식 Personality 고유한 그 사람만의 안에서 충분하게 소화되어서 먼저 있었던 사람과는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열어 갈 수 있습니다. 창조적으로 되는거죠. 바르트의 그런 말, 오솔길을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우리가 어떠한 그 어떠한, 40일 금식기도를 수십번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구요. 다 알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되거든요.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거는 많은 문제들이 여기에 연관되어 있는데요. 아까 계시라고 했는데요. 하나님이 기본적으로 우리 기독교 신학과 신앙에 있어서는 안에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게 어떻게 계시하시냐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지요. 그러나 우리는 다른 것 다 접어두고 기본적으로 우리보다 신앙적으로 성숙했었던 신앙의 선배들의 경험을 기초로 해서 그러한 하나님 이해를 공부를 해야되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금 말을 걸때 성숙하게 거기에 응답하고 알아 들을 수 있습니다.
제가 아까 바람이야기를 했는데요. 우리 딸들이 어렸을 때는 제가 아무리 그렇게 이야기하더라도 못 알아 들었을거예요. 그러나 나중에 들으면서 알아들을걸요. 그리고 제가 더 세상의 깊이를 알게 된다면 따라오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 딸들이 저하고는 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이 있을거니까 내가 없다고 하더라도 나보다 더 성숙하게 이 세계를 경험할 수 있을거예요. 음악 공부하는 것도 그렇고 바둑 공부하는 것도 그렇고 다 그렇습니다. 하난미, 하나님 경험, 하나님 공부도 이러한 단계가 있는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게 작은 오솔길이죠. 자칫하면 우리는 광신도로 떨어지거나 교주처럼 내가 어젯밤에 뭐 들었다. 그런 식으로. 어젯밤에 기도하다 뭐 들었다하는 사람이 있으면 십중 팔구 사이비의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것은 좋은 뜻이나 어떤 뜻이나. 아주 선한 뜻으로서도 사이비는 가능한 거예요. 굉장히 마음이 순수하고 인격적이기도 한데 그러나 신학적 훈련이 없으면 다른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여러분 그거 인정하시죠. 아무리 괜찮게 훈련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네 그렇습니다. 예 그러한 사이비 일종의 주관적 열광주의에 빠질 수 있는 거구요. 또 자칫하면 또 한쪽으로는 냉소주의 쪽으로, 아까 말한 불가지론자론자처럼 알수 없는 거는 말하지마. 하나님은 종말에 가야 아는 건데 지금 뭐하려 이야기해. 아는 것만 이야기해.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 이야기해. 이런 식으로만 이야기합니다. 그것도 웃기는 거죠. 그러면 시인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시인은 불가능한 거죠. 시인이 말하는 거는 실증은 아니잖아요. 그러나 시인일 말하는 것은 리얼한 것은 분명합니다. 이 균형을 어떻게 잡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우리들에게 제약되어있다. 우리는 피조물이고 우리는 질그릇이죠. 주인의 뜻을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우리는 잘 모른다고 하는 것을 전제하면서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고 하는 계시에 근거해서 또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경험한 그러한 문서들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그리고 오늘도 하나님은 영이라고 하는 그러한 삼위일체의 한 위격으로 우리와 새로운 방식으로 대화를 하기 원하시고 또 그 방식으로 하시기 때문에 영적인 촉수만 놓치지 않기만 한다면, 그러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알아 들을 수 있구요. 어느정도 알아 듣는가 하는 거는 다른건데요. 알아들을 수 있고 그거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제가 여러분들에게 드리는 것이 제가 뭔가 좀 알고 하는 것 같애요? 아니면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까? 여러분들 각자 판단하시기를 바라구요.
저는 기본적으로 사람 개인에 대해서 별로 희망, 이렇게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이거는 나 자신을 향한 것이거든요. 인식론적 한계가 너무 뚜렷하고 그거는 그것만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정서적으로 우리에게 상처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생명의 영과 온전히 소통하기는 사실은 이게 좀 어렵습니다. 은총이 아니면 불가능한데요. 이러한 우리들의 상처를 다 딛고서 그래도 우리가 생명의 영이신 성령과 소통, 교제, 귀기울임 이것이 가능하려면 이 모든 상처들, 기독교 용어로 말하면 죄라고 할 수 있겠죠. 죄의 결과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한 것들이 씻겨져야 하는데 그거는 죽을 때까지 다 씻겨지지는 않습니다. 그걸 다 안고 가야하는 것이거든요. 그런 점에서, 그러한 상태만 있다면 가능성이 없어요. 우리들에게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순간 순간 말하면서도 계산하는 것이 우리가 아니겠어요. 완전한 순수한 언어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의 능력이라기보다 어디에 기대있어야 되는 겁니다.
우리들에게는 그게 있는거죠. 우리들에게는 기댈 언덕이 있는거예요. 말하자면요.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인데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성서와 2천년동안의 해석이 있거든요. 해석이 신학입니다. 이것이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최선이다. 첩경이다.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신학 무용론에 빠져 있으니까요. 꿩 잡는게 매라는 식으로 있으니까. 모르겠습니다. 제 말이 이게 얼마나 옳은지 그런지는 이것을 여러분들이 판단하시고 제 말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신학적 영성에 기댄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상처들, 여러가지 부분에서요.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담아내고 옷을 갈아 입는 것이죠 말하자면. 그러한 상처들이 내버려두고 그들이 더 이상 활동하지 않도록 묶어두고, 암 걸렸을때 약을 먹으면 암세포가 좀 줄어들지 다 없앨 수는 없습니다. 죽을때까지 죄의 경향성을 안고 살아갈 각오를 하세요. 그게 씻겨진다고 하는 사람들은 가짜입니다. 구원파에 가까운 사람들이거든요. 그거는 구원을 실증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 하나님을 실증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과 똑 같습니다. 네. 그러한 것들을 그냥 안고 있고 그리고 우리에게 다른 것이 들어와서 크게 활동하도록 하게 하는 태도, 필요한 거죠. 음악가들은 음악의 힘이 자기를 지배하게 하거든요. 아무것도 그게 온전하게 활동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어ㄸ허게 알 수 있을까요? 음악가와 같은 끼, 광기, 음악의 온전한 감동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신학적 사유입니다. 개인의 경건성 중요하지 않느냐? 경건훈련. 네 그걸 부정하지 않고, 그걸 다 포함한, 그 안에 있는 겁니다. 시간이 되어서 제가 마쳐야 되겠는데요.
신앙적 인식론, 이게 바로 인식의 문제가 중요하다. 존재와 인식, 생각을 해 보시겠어요.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많이 시간이 필요하고 저도 자신이 없어요. 존재와 인식, 어떤 것이 있는 것이 우선적이냐? 아니면 인식하는 것이 우선적이냐에 따라서 조금 달라지는데. 서로 소통되는 거겠죠. 우리 기독교 신앙은 존재론적이니까 존재가 먼저인거죠. 예수님의 비유로 말하자면 나무가 좋아야 되는 것이고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식은 존재가 드러나는 방식이예요. 존재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드러나지 않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될까요? 그건 어떤 범주 어디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람과 같이 자유롭게 되는 거구요. 궁극적인 실체이기 때문에요.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이죠. 그게 들어납니까? 그 자체가 아니잖아요? 그건, 인식, 인식의 문제, 행위의 문제 그걸 통해서 인제 드러나게 되는건데요. 그걸 어떻게 인식하느냐 그게 중요한거죠. 하나님이 계시하실때, 존재는 계시의 문제군요. 그러니까 계시 자체요. 우리의 존재, 응답인가요? 존재는 인식으로 드러나고 인식은 존재에게 뿌리를 둔다.
존재적인 토대가 없으면 우리는 사이비로 흐를 수 있다. 신천지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기독교적으로도. 그건 일종의 인식이거든요. 문선명도 가능합니다. 그 방식으로 인식하는거거든요. 그에게 영적인 존재론, 이런 것들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이단으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무조건 나쁜 뜻으로 이단이 아니라 그거는 어떤 부분이 잘못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죠. 네. 이러한 모든 훈련들이 신앙적 인식론, 신학적 사유에서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쪽에서 말씀 드린 겁니다.
네. 오늘 제 강의가 좀 두서가 없었습니다. 다른 때도 마찬가지 였을텐데요. 오늘은 조금더 집중이 안되었네요. 제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네 여기가지만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불변성까지 하기로 했었는데요. 다음 목요일날 보충하도록 하구요. 다음에 비종교적 해석과 정말 중요한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 불변성은 간단하게 말씀만 드릴거고 본훼퍼가 말하는 비종교와의 문제, 삼위일체, 내가 준비를 잘 해야 되겠어요. 이게 기독교 신론의 핵심이고 사실은 신론만이 아니고 기독교 신학 전체의 핵심입니다. 성령, 기독,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니까요. 다음 목요일은 꼭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다음 주일 저녁에 다시 뵙겠습니다. 질문 있으시면 그쪽으로 주십시오.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을까요?
질그릇이 어떻게 토기장이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는지요.
이런 차원에 들어가면
자꾸 말문이 막힙니다.
이 세계가 왜 "있으며"
또한 "저렇게" 존재하는 걸까요?
이게 필연일까요,
우연일까요?
사타아 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