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답시간(080420)

네 안녕하세요. 네 반갑습니다. 사이먼앤가펑클 중에서, 그들이 부른 노래중에서 두곡을 선물로 보내드렸습니다. 요즘 제가 그걸 듣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 제가 지난번에 사랑채에 띄웠던 것을 보시고 화일을 한 묶음으로 보내 주셔서 듣고 있습니다. 나중에 DVD가 나온다고 하니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참 좋은 계절입니다. 오늘이 4월 20일이군요. 색깔이 우리 주변의 바뀌는 색깔이 우리 주변에서 바뀌는 색깔이. 오늘 예배시간에도 알리는 시간에 한 말씀드렸습니다만 마술세계속에 들어있는 것처럼 우리 주변 세계가 변하고 있다 말이죠. 정말이거든요. 마술이라고도 하고 경이로움이라고도 하고 신비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그게 참 아름답다 괜찮다 느끼는 것하고 아주 그 사태속으로 두발을 딛고 들어가는 거하고 차이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도 사실은 그렇거든요. 그게요. 어떻게 설명을 드리면 좋을까요? 단순히 자기의 주관적인 느낌에 불과한 건 아니구요. 이 세계를 정확하게 뚫어보면서 동시에 자기와 일치되는 경험이거든요. 그거를 영의 성육신, 신앙의 일체감 그런 것들이죠.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세계를 그렇게 경험하는데요. 우리는 어떤 그러한 실존주의 철학주의들과는 다른 방식이지만 어쨌든 그 현상은 비슷합니다. 요즘 참 좋은 계절인데요. 그거를 자연주의자의 그러한 넉넉함과 그러한 신비주의적 통찰에 머물지 않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 기독교 신앙의 창조론과 기독론, 부활 종말 이런 것들하고 연관되는가 그런 신앙적 혹은 신학적 맥락을 잘 찾아가면 됩니다.

네. 그런 것들을 위해서 꾸준하게 사실은 공부를 해야 되는 건데요. 한국 교회에 신학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하는 거는 뭐 다 알려진 사실이고 그것이 오히려 필요없다고 생각하고요. 그것이 없어야 오히려 믿음이 더 공고해진다고 생각하는데요. 이건 착각중에서도 정말 엄청난 착각입니다. 그분들이 생각하는 믿음은 주관적 확신이거든요. 믿고 있다고 하는 자기 자신을 믿는 거거든요. 믿고 있는 자기 자신 주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닌데 늘 종속된 수입니다. 오늘 우리가 같이 나누게 될 기도에서도 오늘 우리가 조금 더 말을 하게 될텐데요. 고기서도 나오게 될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유하고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분의 계시를 인식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중요하고 자체마저도 하나님의 통치 성령의 인도 하심속으로 이 말이 정확한지 모르겠네요. 그 안으로 들어가는 거지요.

이렇게 비유로 설명할 수 있겠순요. 수영을 할때 말입니다. 내가 막 억지로 물에 뜨려고 발버둥치면 어떻게 됩니까? 오히려 물에 가라앉게 되지요. 물에다 완전히 자기를 맡기는 상태이죠. 자기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닌데, 사유하는 나는 남아 있지만 그러나 사유마저도 영, 진리의 영에게 그분에게 온전하게 의존하는거죠. 그게 인제 말로만 해명해 내기는 힘들고 또 제가 그 영성, 영적인 실체에 대해서 상당히 경지를 이룬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좋게 딱 끊어서 설명하기 힘듭니다.  어렴풋한 것을 말씀드린거예요.

요즘 이렇게 좋은 계절에 사실 요즘만 좋은 게절은 아니죠. 늘 지구안에 던져져 있다고 하는 사실요. 내가 나 자신이 먼지처럼 작아지지만 동시에 우주처럼 확대되는 되는거든요. 작아질수록 사실은 우주론적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우리가 발을 딛는 거니까요. 고게 좀 긴장이 있고 변증법적이구요. 변증법이라는 것은 서로 부정되면서 긍정되고 부정과 긍정의 관계를 통해서 또 하나님의 새로운 차원으로 올라 간다는뜻 입니다. 자기가 부정되면서 동시에 그것이 하나님의 우주적인 생명의 깊이로 확대된다고 하는 그러한 기독교적이 영성이 있는 거죠. 요즘 이렇게 색갈이 변하는 놀라운 세계를, 최소한도 우리가 자연주의자들 만큼이라도 세계를 바라볼 수 있어야 될 텐데 그것마저도 미치지 못하죠.

기독교 신앙이 일단 상식을 넘어서 있는건데요. 상식을 넘어 선다고 하는 것은 일단 상식들 전제한다는 것입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을 이야기하는데 모더니즘을 이해한 다음에 포스트 모더니즘이죠. 그것 없이 해체주의 다원주의로 빠지게 되면 그거는 아무것도 남는 게 없어요. 오늘 그 신학단상에 제가 그 마틴 루터와 뮨처의 농민 혁명이 나온 글이 나온 것을 배경으로 두고 정세웅 목사님이 주신 댓글에 달은 글을 하나 썼는데요. 그기에도 인제 짚은 겁니다만 그 해체주의,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 볼 수 있는, 그쪽에 있는 사람들이요. 신학자들이 있구요. 목회자들이 있기도 하구요. 고상하기도 하구요 인격적이기도 하구 자연주의적인 성향도 많기도 합니다. 그들에게는 절대적인 진리는 없는 거지요.

제가 설교비평하면서도 늘 경험한거지만 완고하고 근본적인 입장에 있는 설교자들인 아주 진보적이라고 있는 쪽에 설교자들이나 양쪽 다 진리의 객관성은 없습니다. 그냥 진리는 청중들에게 나타나는 어떤 그런 것들만 진리인거죠. 진리의 상대주의인거죠. 포스트 모더니즘의 현상들이 진보쪽이나 보수쪽이나 다 마찬가지 인데요. 포스트모더니즘 자체를 부정하는 거는 아닌데 그거는 모던이라고는 이 세계를 합리적 이해하려고 하는, 이성적 합리적 세계이해, 주객도식에 근거한, 고거 까지 들어가야 될까요? 근대가 사유하는 주체하고 사유되는 대상을 잘 구별하면서 나가려고 했었고 네 거기도 한계가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만 어쨌든 그걸 바탕에 놓고 있거든요. 객관적 진리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그것을 추구하고 음악도 그렇고 그림도 마찬가지 일겁니다. 어떤 사조가 있는 거잖아요 그런 방향으로 끌어가는 힘들, 존재론적 힘들을 전제하고 있는거거요. 기독교 신앙은 훨씬 더 존재론적입니다. 청중들이 뭐라고 생각하는 거가 중요한 것이 아니죠. 진보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청중, 민중 구원을 이야기하는데요.

그런데 고 말 고쳐야 되겠군요. 진보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나 보수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나 양쪽 다 똑같이 포퓰리즘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약간 접근하는 방식이 다른데 실체는 그렇게 있거든요. 기독교 신앙은 청중들이 민중들이 뭐라고 하느냐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관심이 없다는 표현이 좀 심하기는 한데요. 그것보다는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진리의 영인 성령이, 진리의 객관성을 전제하고 시작하는거 죠. 진리의 영인 성령이 인격적으로 우리의 생각과 상관없이 바람처럼 움직인다고 요한복음에 나와, 진술하고 있구요. 처음부터 창조될 때 루하흐라든지 프뉴마, 신학시대 헬라어로 말하는 그 영, 이런 것들은 인격적인 분이라고 하는 거거든요. 삼위일체론에서도 이야기하는 것이구요. 여기서 말하는 인격적이라는 것은 인간과 똑같이 생각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와 대립된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 신, 그 하나님, 그 영은 우리의 생각과 완전히 무조건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그분의 구원 섭리를 이끌어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그걸 전제하고 우리는 그의 뜻이 뭐냐 게시론적인거죠. 하나님이 어떻게 진리의 영을 통해서 자기를 계시하는가? 자기계시예요. 하나님의 자기계시, 계시가 곧 하나님이구요. 굉장히 복잡한 건데요. 제가 짧은 시간에 이런 저런 성서신학 조직신학 그리고 이런 등등 관계들을 묶어서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전달이 잘 안될것 같은데요. 네 이러한 진리를, 객관적인 진리를 전제하고 시작합니다. 그분이 종말론적으로 이 세계를 완성하신 거구요. 섭리신앙이 우리의 밑바탕에 있으니까요? 그러한 것들이 다 상대화 되고말이죠. 민중들이 원하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기독교 근본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죠. 옳으냐 그러냐 역사학적인 차원에서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기독교 진리론과 다른 여러가지 이 세상의 철학과 사유가 가능합니다. 그건 그 차원에서도 논쟁을 해야 될 문제구요. 일단 기본적으로 우리가 기독교 신앙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은 그 2천년동안 기독교 신앙이 말하려고 하는 핵심이 무언지를 이해를 하구요. 그걸 전제하고 말을 해야 되거든요. 이거 자체에 대한 이해도 없이 그냥 일종의 그냥 사회과학쪽에 떨어진다거나 심리학에 떨어진다거나 그런 방식으로 기독교를 말한다고 하는거는 기본 토대가 잘못된 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네 다른 이야기 많이 나갔습니다. 예. 요즘 좋은 좋은 계절, 오늘만 아니라 늘 좋은 때에 하나님의 창조와 우리가 이렇게 지음받았다고 하는 실증주의적 철학자들의 말을 빌면 던졌다 피투적인 존재, 성서적 용어로 바꾸면 질그릇이라고 하는 것, 만들어졌다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 이 세계안에 던져진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총이구요. 어떻게 전체 우주 생명과 연관되는가 하는 것들을 세세하게 촘촘히 잘 알아가는 것이 신앙공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공부가 전제되지 않고 그저 신앙 생활하는 것 자체 자기 여기에 몰두하게 되면 결국 인간론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아 잠깐만요. 제가 캠코더를 켜지 않았네요.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잠간만요. 네. )

네. 메일, 제 메일로요. 가끔 인제 상담하러 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상담도 있고 다른 부탁하는 것도 여러가지 입니다. 일일이 제가 다 대답하지 못하고 가능한대로 대답하고 있습니다. 사랑채에 넣어야 될 글들도 개인적으로 저에게 질문하기도 하구요. 일일이 사실은 다 대답하기가 제가 힘듭니다. 며칠전에 받은 거는요. 어떤 남자분데요. 이런 호소입니다. 자기 아내가 다비아를 들락거리고서 부터는 교회 구역장이나 이렇게 맡은 일들에 굉장히 소홀한다. 그렇게 열심으로 신앙 생활하던 자기 아내가 교회에 대해서 거리를 두게 되었다. 건축 헌금이나 십일조나 이런 것에 대해서도 옛날에는 잘 했던 것 같은데 관심도 없다. 어떻게 하면 좋으냐 상담을 하며 조언을 달라고 하더라구요. 그런 것에 대해서 뭐라고 대답하겠어요. 어려운 문제인데요. 다비아가 공연히 쓸데없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들에게 핑계거리를 주는 이러한 해방구 도피처가 될까 염려가 되기도 합니다. 그분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다 구구절절이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현재 그 부부가 신앙생활하고 있는 것들이 어떠했는지, 만약에 잘못 된 거라고 한다면 다비아를 들락거리면서 바르게 가는 것은 필요한 것이니까요. 그런 저런 여러 가지 일들이 다비아를 통해서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참 그런 다비아를 시작한 사람으로서 참 난감할 때도 있고 네 그러한 상담을 원할 때 구체적으로 뭐라고 이야기하기 힘든 그러한 좀 곤혹스러운 그러한 것들도 있습니다. 네.

지난 목요일에 우리가 교회의 본질과 형태, 이런 문제를 다루면서 기도대해서 까지 대해서 말했습니다. 예배와 기도에 대해서 말이죠. 기도를 배우자! 저는 그런 결론을 내린 것 같습니다. 아... 인제 그러한 말씀을 드린 이유는 일반적으로 한국 교회에서 드리는 기도들이 너무 자유로운 기도에 떨어져 있구요. 그러다 보니까 자유로운 자체가 문제가 아니겠습니다만 그러한 방식으로 기도를 드리다 보니까 기도가 뭐냐에 대해서 아무런 준비 없이 드려짐으로서 설교의 근본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근본이 흔들리는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느냐 그러한 걱정에서 나온 대답입니다. 기도를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드리는 것보다 일정한 형식의 성문의 기도를 드리는 게 좋구요. 가능하면 우리보다 신앙이 앞서 있었던 신앙의 선배들의 기도문을 많이 읽고 더 나아가서는 외우는 것이 좋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시인이 되면 좋은데요. 모두가 시인이 될 수 없죠. 그러니까 기도는 마치 신앙의 시를 쓰는 것과 같습니다. 시인이 되려면 좋은 시들을 많이 읽고 외워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그러한 기도문들을 많이 읽고 배우는 거는 우리가 시를 쓰듯이 고상한 언어를 통해서 하나님께 아주 정제된 방식으로만 기도를 드려야 된다는 그런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소박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에 꾸며진 기도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진솔하고 자기 영성이 담겨 있는 기도를 자 기 일상적인 말로 드리는 기도가 좋습니다. 그러한 기도를 드리기가 쉽지 않는거예요. 우리는 어떤 정형화된 기도문에 묶여 있습니다. 고회에서 드리는 기도도 형식들도 다 정해져 있지 않습니까? 네. 우리가 좋은 기도문을 읽고 또 외우고 배운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좋은 기도를 꾸며서 드린는다는 것이 아니라 강요된 기도의 형식으로부터 벗어나서 우리의 영적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를 시인이 시를 쓰듯이... 시인은 남의 시를 읽기는 합니다만 표절은 안하잖아요. 다 고유한 그 시인의 특성들이 시에서 나타납니다. 창조성이거든요. 미술도 그렇고 다 그렇습니다. 물론 흉내를 조금 낼 수는 있기는 있겠지만 그러나 어느 정도 세계에 들어가면 흉내도 내지 않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진리의 존재론 적인 토대하고 연관되는데요. 시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게 되면 우리는 흉내를 내고 표절을 하고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기도할 때도 그렇구요. 뭐를 할때도? 설교도 마찬가지구요. 그러나 성령의 존재론적 힘에 의존하게 되면 성령은 정말 자유로운 영이기 때문에 우리가 내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이 말을 하는 그러한 상태에 들어가게 되거든요.

제가 설교시간에도 예를 든 것인데요. 베토벤이 자기가 작곡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머리속에 소리가 가득차 있는 겁니다. 그냥 소리를 따라 적기만 하면 되거든요. 그러니까 그 소리는, 베토벤의 영혼속에 울려났던 그 소리는 베토벤의 소리가 아니라 그건 소리의 존재론적 힘입니다. 제가 존재론적이라는 말을 여러번 드렸구요. 그 단어가 어떤 개념인가 하는 것은 이런 저런 데서 말씀드렸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전달이 되었을거라고 봅니다. 그것은 우리가 좌지할 수 없는 그것 스스로의 힘이라고 할 수 있구요. 사실 그런 것들만로도 충분히 담아 낼 수 없습니다. 그런 개념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장자나 노자의 글들이나 에리히 프롬의 그러한 사회종교학적인 사회심리학적인 책도 도움이 되겠구요. 하이데거의 그러한 책도 도움이 되구요. 혹은 많은 시인들의 시들이 우리들에게 그것을 이해하도록 도움을 줍니다. 그게 참 중요한 것 같더라구요.

우리가 어떤 깨달음의 세계라고 할까요. 들어가는 것이 하나를 알고서 모든 것이 확 한꺼번에 해결되지 않습니다. 아주 점진적인 것 같아요. 이런 것들이 꾸준한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닫혀졌던 세계가 조금씩 열리는 것, 수십겹으로 막혀있는 우리 앞에 있는 커튼들을 하나씩 하나씩 벗겨내는 거죠. 말하자면, 한장을 벗겨내면 조금 밝아지죠. 수백장 수천장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한꺼번에 벗겨낼수 없습니다. 한 장 벗겨내면 빛이 밝아졌는지 안밝아졌는지 알수 없어요. 얊은 것 한장만 벗겨내기 때문에요. 그러나 한 열장 스무 장이 시간이 지나면서 벗겨지게 되면 조금 밝아졌다는 것을 느끼게 되거든요. 많은 경우에는 한 장을 떨치기 조차도 힘이 듭니다. 그리고 하나를 떨치고서 뭐를 깨달아도 그래도 그게 별로 차이가 없기 때문에 내가 자꾸만 그것을 떨구어 내야 된다는 요구를 받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위태롭기 때문에 불안하기도 하기 때문에 스스로 그렇게 해야 되니까요. 이미 주어진 틀 안에서만 살아가면 아주 편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구요. 스스로 성령과의 교제, 영적인 관계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자유로운 것 같지만 또한 위험하기도 합니다.

한국교회에서도 성령에 대한 말이 많이 있어서 성령론적으로 신앙생활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거는... 네 그것까지는 나가지 말죠. 비슷한 이야기는 많이 했으니까요. 네 그냥 우리가 막무가내로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영인 그분과의 소통에서 가능한 건데요. 이런 말도 좀 추상적이기는 하네요. 그건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런 것이 무조건 우리가 기도하거나 신앙생활에 매달려서 그런 것은 압니다. 어린아이들도 그냥 주어진 방식으로만 매달려 있으면 철부지가 되고 말잖아요. 사춘기를 지나면서 스스로 생각하고 세계가 넓다 두껍다라고 하는 것을 느끼면서 세계와 자기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잖습니까? 그러면서 세계관이 넓어지는 거죠. 그러면 이제 새롭게 보이는 것이죠. 신앙생활에서도 철부지로 계속 살면서 그러면서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맘마보이처럼 살아도 사는 거죠. 자기엄마하고는 아들은 굉장히 친합니다. 자기들은 거기서 소속감을 느끼고 만족함을 느낍니다. 둘사이에는 아무것도 개입할 수 없고 즐거운 것이죠. 신앙생활도 그와 흡사한, 거의 거기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구요. 목사님들이 그런쪽으로 조장할 수도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의타적으로 신자를 만들어야 사실은 속된 표현으로 관리하기 좋거든요. 서로 독립적인 주체적 사유, 네 고거는 주체적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과의 관계, 스스로 들어갈 수 있는 그 상태를 이야기하는데요. 그렇게 되면 조금 관리하기가 좀 어려운 거죠. 성령의 세계로 들어간다고 하는, 성령 충만이라고 하는 말들이 교회안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만  과연 그게 성령의 존재론적인 힘에 의존해서 자기를 온전히 맡기는 수영할 때 물에 자기를 완전히 맡기는 것과 같은 그러한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반성이 좀 많이 필요하겠지요. 네. 기도를 배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네. 시인처럼 그런거다. 그런 등등을 제가 말씀드렸구요.

제가 지난 목요일에 그런 이야기를 충분하게 다 전하지 못해서 신학단상 우리는 기도할 수 있는가 그런 것을 참조하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건 여러분들이 한번 읽어 보시기를 바라구요. 거기서 제가 한가지만 인용하겠습니다. 절대타자라는 말을 거기서 했거든요. 우리가 기도드려야 할 대상은 절대타자, 요 말 자체는, 절대타자라고 하는 것은 현대 신학에서 칼 바르트의 말입니다. 물론. 토탈리터 알리터 totalita alita 라고 하는 라틴어. 독일어로 간즈 안더러ganz andere라고 이야기하더군요. 바르트가 이런 용어를 이야기 했지만 바르트 혼자의 독창적인 생각은 아닙니다. 이게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인간의 가능성, 낙관론적인 역사이해를 거부하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불연속적이다. 이런 접촉점이 없다. 부르너와 바르트의 논쟁에서도 많이 나오는 건데요. 19세기는 가능성의 세계였거든요. 인간을 잘, 모더니즘이죠. 19세기의, 인간을 잘 교육시키면 괜찮은 인간이 된다. 그래서 이 세계가 휴머니즘이 가득한 그러한 세계가 될 수 있다. 그런 쪽으로 많이 이야기했는데요. 가능성이 있는 거죠. 바르트는 안된다. 가능성이 없다. 오히려 하나님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그가 내세운 신학 용어가 절대타자인데요. 하나님은 타자다. 완전한 절대타자다. 이러한 개념들이 독창적이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그 바르트가 태어날때부터 그런 것을 알았겠습니까? 이미 기독교 역사안에 내재된 그러한 신학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데로 나가지 말고요 기도문제로 집중하겠습니다. 예. 우리가 하나님과의 사이에 우리가 인간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과 사이에 접촉점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를 드리는가? 하나님, 네. 그런 근본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에게 우리의 말을, 우리의 생각을 전할까? 어떻게 하나님에 어떻게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전달될까? 아 이게 어떻게 기도문제하고 연관되나 안되나 모르겠습니다. 제가 쓴 우리는 기도할 수 있는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고요. 그안에서 절대타자란 개념을 인용한 것 만 생각이 나서 조금 기도와 연관된 이 이야기의 핵심이 좀 흐려지는 것 같습니다.

하여튼 말하자면 이거죠. 이렇게 예를 들면 되겠군요. 개미가 있다 그리고 인간이 있어요. 어쩌면 개미와 인간 사이에는 이게 연결이 안 되잖아요. 개미에게 인간은 절대타자입니다. 그렇다며 개미가 인간에게 어떻게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어쨌든 다시 좀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절대타자라는 사실을 저는 동의합니다. 이게 여러가지 면에서 그런건데요. 한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아직 유한한 거거든요. 유한하고 일시적이구요. 그러나 하나님은 도표로 그린다면 이게 시작이고 오메가 마지막이라고 한다면 세계역사 처음 시작과 마지막. 우리는 이 사이의 점처럼 하나의 점처럼 있는데요. 하나님은 전체로 존재하거든요. 이걸 우리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시간을 전체로서 경험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안되는 거예요. 우리가 70년 80년 산다고 하더라도 순간순간 사는 거지. 제가 만으로 55년 살았는데 55년하고 55년 후를 동시에 저는 살지 못합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왔던 그 순간이 있었고 지금은 이 순간만 살지 10년전 20년전을 동시에 살 수 있나요. 안되거던요. 하나님은 전체가 하나이니까요. 동시에 사시는 것이죠. 말하자면, 굳이 비교해서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에게, 절대타자인 하나님과 소통 하겠는가 그런 이야기를 조금 짚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정리하구요.

음... 기도 문제는 뭐 더... 기도를 해야 되냐 말아야 되냐 이런 것 까지야 제가 그것까지 말씀드릴 필요는 없구요. 참고적으로 두 가지만 이야기해야 되겠네요. 하나는 칼 바르트의, 미안합니다. 판넨베르크의 믿음의 기쁨이라고 하는 제가 번역한 설교집에 나오는 기도에 관한 설교에서 한 부분을 인용하겠습니다. 그는 여기에 이 설교집에서요. 그 분의 설교집 두 권을 제가 하나로 묶은것이요. 두 편이 나옵니다. 하나는 시편 143편을 중심으로 기도라고 하는 설교고 다른 하나는 디모데 전서 2장 1-6절을 본문으로 한 ‘기도에 대하여’ 라고 하는 설교입니다.

그러면 먼저 짧은 설교, 시편 143편을 중심으로 한 부퍼탈 신학교 아침기도회때 한 짤막한 기도입니다. 1960년 5월 9일입니다. 다 읽지는 않구요.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세 토막으로 나누었군요. 고 주제만 그냥 작은 소주제만 세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우리가 오늘 이 시편말씀에서 우선적으로 배워야 할 점은 우리가 어떤 토대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수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놓고요. 기도는 자신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 결코 아닙니다. 네 소원을 비는 성취하는 수단이 아니다. 그 한가지구요. 기도는 나의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이 뭔가에 대한 질문이 더 본질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우리가 분명히 해야할 사항은 본문에 따르면 시편 기자의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이 대답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이죠. 예. 그걸 경험하시죠.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침묵하신다. 이거는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대답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대답을 찾을 수 있는 영성이 필요한 거죠.

세 번째, 우리는 우리의 기도에 대한 직접적인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앞에 놓인 길은 어둡습니다. 대답해 달라고 하는 우리의 요청에 대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그러한 직접적인 신탁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침묵에서 기다립니다. 하나님에게서 직접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은 환청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많은게 아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처럼 목소리를 내서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분의 응답을 어떻게 이해가는가? 어떻게 받을 수 있는가? 하나님의 영, 성령이라고 하는 것.  기도에 대한 짧은 설교였구요.

본격적인 설교부분에서 한 부분만 보겠습니다. 이 설교집 정말 좋습니다. 제가 이렇게 대구 성서 아카데미에서 막 출판한 것이지만 내용은 비싼 돈을 주고 사도 손해가 안 될 그러한 내용이죠. 이걸 전부를 제가 읽을 필요가 없구요. 마지막 부분만 보겠습니다. 아까 60년대에 한 설교와 비슷한 내용을 닮고 있습니다. 이 설교는 1973년 부활절 후 5째 주일에 한 설교입니다.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올바른 간구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자기 소원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관계가 포함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올바른 기도는 역시 중보 기도입니다. 우리의 일용할 양식과 자기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합니다. 즉 자신의 빵과 용서만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도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본문은 이것을 간구할때 만이 아니라 모든 기도에서 중요한 요소라고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단락이요. 그가, 판넨베르크가 성령론적으로 기도를 설명하는 겁니다.

이처럼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며 그 뜻을 실천하게 됩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만의 소원이라는 우리 자신만의 좁은 울타리를 뛰어넘게 됩니다. 모든 사람을 향해 훨씬 더 많은 감사와 희망을 품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 자신을 초월하게 만드는 영은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로 맺어주시는 성령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일상에 있는 사소한 것들을 감사하기 시작할 때 이미 우리마음에 들어와 계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필요를 모든 인간의 구원에 필요한 하나님의 뜻과 하나되게 하십니다. 재미있는 표현이네요. 성령은 우리 인간의 모든 필요를 모든 필요를 하나님의 뜻과 하나되게 하십니다. 우리 필요가 지향하는 목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참 놀라운 표현이죠. 왜냐하면 하나님이 가까이 계실때 우리의 모든 필요는 잠잠해 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모든 기도의 시작과 목표이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기도는 오순절에 임하는 성령을 간구하는 것에 집중됩니다. 네 이런 정도구요.

네. 지난번에 기도에 대한 질문을 한 분은 특별히 관상기도에 대해서 꼬집어서 말씀하셨어요.  제가 그거를 잠깐 인터넷에서 관상기도라는 것을 찾아보았는데요. 제가 한번 띄워보겠습니다. 제가 인용을 했어요. 음. 안 나오네요. 찾아두었는데도 안나오네요. 됐습니다. 할 수 없습니다. 네 그분이 신비주의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는 목회자입니다. 은명교회인가 어느 교회 목사님이시죠. 마이스터 에카르트의 책도 번역하셨구요. 그 분교회 홈페이지에도 실려 있는 글입니다. 관상기도를 세가지로 이야기하시더라구요. 라틴어로 콘탐 플라치오 contamplatio 마주대한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관상기도는 세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첫번째는 마음의 평정, 두번째는 고요의 기도, 소리 외치지 말고 고요하게 묵상기도죠. 세번째 단계는 황홀경으로 들어간다. 너도 없고 나도 없고. 아마 이 마지막 단계가 관상기도의 목표라고 할 수 있겠죠. 모든 것들이 자기 무아지경까지 올라가는 황홀경입니다. 바울이 말한 삼층천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기도에는 언어가 필요 없어요. 그리고 자세도 필요없겠어요. 기도문 같은 거는 더더구나 필요 없을 거구요. 언어자체가 없는 말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그냥 영과 온전하게 온전하게 일치가 된는 그러한 상태, 완전히 초월적인 황홀경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콘탐 플라치오 이러한 기도가 역사가 깊겠지요. 저는 잘 모르니까 덮어두겠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그러한 기도는 오랫동안의 신앙 훈련이 된, 기도훈련이 된 사람에 한해서 특별히 주어지는 것, 기도원이라든지 이런 수련이 가능한 곳에서만 필요한 기도지 일상적으로는 힘들다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는 논란이 좀 많이 있기는 있는데요.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는요. 이것이 제가 글을 읽어보니까 mind control 하고 좀 비슷하게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더라구요. 복잡한 것 다 고요한 것에서 황홀경에 들어가는. 이게 인간에게 나타나는 일반적인 영적 현상인 것은 분명합니다. 기독교 뿐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비슷합니다. 오히려 뉴에이지쪽, 이런 쪽으로 깊은 명상속으로 들어가면 이런 가능성이 열릴 수 있겠어요.

오늘 우리교회 대학교수 한분이 국선도 사범 자격증을 따셨어요. 건강을 위해서 국선도를 하셨어요. 수년 동안 하셔서 상당히 경지에 올라간 것 같습니다. 애기를 좀 들어보았어요. 애기를 들어보니 마음, 속에 오장육부를 운동시킴으로서 모든 신체가 완전하게 돌아가게 하는 운동이더라구요. 그런데 이게 정신적이기도 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속으로 움직이는 거거든요. 그런데 중간 중간 한 1,2분씩 완전한 자기 몰아의 경험을 한답니다. 정신을 집중시키기는 하지만 40분 50분씩 계속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정말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다.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이 황홀경이 그러한 가능성이 많다. 이게 자칫하면 마인드 콘트롤에 불과 할 수 있다.

이런 거를 막기 위해서 기도의 근본이라 할까. 그런 측면에서는 신학공부가 정말 필요하다. 제가 자꾸만 신학공부를 입버릇처럼 달고 다녀서 미안합니다. 이거는 뭐 신학대학에 가라는 것이 아니라 성서가 말하는 인간이 무엇인지 인간의 구원이 무엇인지 칭의가 무엇인지 성령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없이 자기 마음을 콘트롤해서 고요한 상황에서 황홀경에 빠진다 이거는 뭐 얼마든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문선명같은 분들도 그러한 황홀경에 많이 빠졌을걸요. 소위 도사라고 하는 분들은 대개가 그렇습니다. 모든 기독교의 영성의 경지가 다 그러냐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황홀경의 영성의 최 극치라고 그분들은 말할 수 있을텐데요. 철저하게 성서적이어야 되는 것이거든요. 성서는 수천년 동안에 초기 기독교의 몇 백년의 신앙을 담아낸 것이구요. 그것을 해석한 것이 신학이라서 이런 것을 같이 곁들여서 공부해야만 단순히 인간 마음을 평정하게 만들고 마음의 위로를 받고 하는 차원에 머물지 않고 혹은 거기에 떨어지지 않고 근본에 영적인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게 구분이 안 돼요. 뉴에이지적인 신앙, 잠재의식을 계발해 내는 것이거든요. 상당히 과학적입니다. 사이콜러지 일 수 도 있구요. 이런 것과 기독교 신앙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인데 구분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끔 TV 설교에 보면요. 며칠전에 TV설교에 보니 특별 강연해서 나오는데 온갖 종류의 교회 설교와 강연들이 많더군요. 그렇게 해서 기독교 방송이 굴러간다고 하는 것은, 찬조금 받고 하겠지요. 한국 교회건강을 위해서 좋지 않는데 다른 길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겠죠. 웃음과 기독교, 기독교 신앙과 웃음이라든가 그것만 갖고 설교를 하는거예요. 사라가 아기를 갖게 되었다고 하는 천사의 말을 듣고 웃었다. 가소로운 웃음일 수도 있고 피식하는 웃음이었을 수도 있고 그러나 나중에 정말 웃게 되었다. 웃자. 웃으면서 승리하고 웃으면서 병낫고 웃으면서 병낫자, 거기에 수백명 모인 신자들이 거기에 몰두하고 있더라구요.

기독교 신앙이 아니거든요. 아주 변죽을 울리는 건데. 그런 식으로도 기독교 신앙이 가능합니다. 인간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니까요? 이러한 관상기도가 자칫하면 아주 세심한 신학적 영성이 토대하지 않으면 잘못될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여러분 성령과 악령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이예요. 순간적으로 바뀌구요. 천사와 악마가 뭐라고 해야 될까요. 동시론적인 사건입니다. 어떤 힘이니까. 존재론적인 힘이니까요. 그게 성령의 모습을 할때도 악령의 모습을 할때도 있는데 이걸 구분하기가 불가능합니다. 나우웬의 글인가 그걸 구분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말하고 있는데요. 그렇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악령이 아니라 성령의 가르침대로 따라갈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되는가? 자기의 심리나 욕망을 축소하고 기독교 2천년 역사에 귀를 기울이셔야 되요. 다른 길이 없어요. 기독교 영성도 개인영성이 아니라 역사가 중요한 거예요. 2천년 신앙선배였던 사람들이 경험했던 신앙의 흔적들이 다 녹아 있거든요. 그들도 부분적으로 부족한 부분들이 있었지만 성령의 인도함을 통해서 바른길로 흘러왔습니다. 또 흘러왔다는 것을 전제하고 우리가 신앙의 세계안에 있는 거구요. 우리는 그거보다 개인영성, 개인경험, 그래서 간증도 많고 다 그렇습니다. 순식간에 악한 영에 떨어질 가능성도 있다. 말이 좀 산만했죠.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네 이러한 차이를 구분하기 힘들구요. 또 성령의 활동이 어떠한 거에 대한 공부가 조금 지루합니다. 이건 정말 공부기 때문에요. 그런데 한국교회에서의 문제는 성령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작용에 대해서만 이야기합니다. 나에게 어떻게 되었다. 나. 성령을 받으면 내가 어떻게 된다. 그런 이야기만 하게 되는데. 결국 자기연민에 떨어지고 마는데. 자기 연민이 강할 수록 그걸 많이 자극해 주면 줄수록 신자를은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거든요.

네. 그렇습니다. 이걸 어떻게 비교할까요? 네. 세익스피어의 작품들, 그런 세계 우리가 천천히 읽는 것하고 TV에서 벌어지는 치정이나 무슨 무슨 삼각관계 그런 것들에서 벌어지는 드라마를 보는 것하고 어느 것이 재미있어요? 통속적인 것에 떨어지는 거거든요. 우리의 삶이 승화하지 못하고 통속적인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겉으로 드러난 사람들의 반응에 불과한 것이거든요. 그러한 것들에만 머물러 있으면 삶의 성숙을 이룰 수가 없죠. 조금 힘들어도 세익스피어나 괴테나 이런 사람들의 글들을 읽고 꼭 서양 사람만 이야기하는게 아닙니다. 동양의 고전도 그렇구요. 성령에 대해서 어거스틴이 뭐라고 했는지 루터의 책도 읽고 말이죠. 현대 신학자들의, 신학자들의 책이 정말 영적인 책이 거든요. 그건 자기의 심리에 떨어지지 않고 역사를 전체를 내다보고 성서에 근거해서 성령의 활동에 하나님의 존재론적 길인 성령의 활동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기 때문에 정말 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네. 근데 고게 뭐 쉽지는 않죠. 그러나 그런쪽으로 교회가 나가게 될때 신자들이 따라오게 될텐데요. 언젠가는요.  교회 자체가 그것을 교회가 외면하고 있으니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예전이라고 하는 것이 역사이거든요. 2천년동안 기독교가 그런 방식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예배드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는 그러한 것들이 녹아 있기 때문에 오늘 날 개신교가 중구난방으로 드리는 열린 예배보다는 예전예배가 훨씬 영적입니다. 형식적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죠. 도취하죠. 심취하죠. 오빠 부대들이 음악성이 없는 가수들의 음악을 들으면서 환호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거는 포퓰리즘에 근거해서 그들이 원하니까 어떻게 그걸 막아낼 재간이 없어요.

기도문 괜찮은 것 소개해달라고 했는데 제가 미처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그게 수요일에 영남신학교에 강의 나가는데 도서관에서 빌려오려고 했는데 깜박했습니다. 어거스틴의 기도는 잘 안보이겠군요. 어거스틴의 기도문을 수요일 마다 시편 공부를 하면서 그 전에 기도시간으로 같이 읽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이라든지 여러 글에서 모아놓은 책입니다. 성한용 선생님이 엮어서 만든 대한기독교서회 출판 어거스틴의 기도 그외에도 많이 있지요.

예. 기도 이제 정리를 해야되겠구요.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관상기도가 무조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나의 감정적 발현, 감정의 발현, 심리적 카타르시스, 내 소원의 하소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받아 섬기려는 우리의 신앙적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에게 바른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분의 통치와 그분의 계시가 무엇인지 생명의 깊이가 무엇인지 그런 것들을 이해해야 되겠지요. 그런 거는 우리 신앙 전반하고 연관된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관상기도와 연관해서 그 위험도 염두에 두면서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인간 내면의 어떤 발현이 아닙니다. 인간 내면성, 인간 속에 있는 가능성들을 발현시켜서 인간답게 살게 하는 것, 그거는 다른 이 세상 학문이 하는 것입니다. 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그건 좋은 일이예요. 상담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이렇게 심리치료도 필요하구요. 심지어는 최면에 걸리게 해갖고 옛날 일을 끄집어내어 치료하는 그런 일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게 필요할지도 모르겠지요. 아니면 사회복지를 새롭게 함으로서 비인간적인 삶을 사회구조적으로 개혁해 나가는 작업들, 다 필요합니다. 세상 학문과 사회운동이 하도록 우리가 도와주거나 하도록 방향을 제시하면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 방식으로 하나님이 구원한다고 말하지 않아요. 내면을 발현시킴으로서, 뉴에이지가 그런 방식이지 않습니까?

그게 아니라 뭐라고 그래요. 답 아시죠. 외부에서 들어오는 거를 말합니다. 하나님이죠. 성령이죠. 진리의 영이죠. 하나님 나라죠.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오는 겁니다. 그건 말장난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기독교 신앙을 여러분들이 아직까지 모르는 겁니다. 기다리기만 하고 감나무 밑에서 입만 벌리고 있어도 되느냐. 그렇게 생각하면 또 오해이구요. 하여튼 저는 기초적인 관점만 말씀드리는거구요. 그러면 하나님의 종말론적 임박함, 그걸 가진 사람이 이 세상에 어떻게 살것이냐 그건 그 사람이 처한 상황속에서 그 사람이 선택해야 될 문제인거죠.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 개발논리에 따라서, 이 단어를 써야 되겠군요.

개량, 인간의 내 외면적 삶을 개량함으로서 구원을 이룬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개량은 좋은 거거든요 민중화, 복지 활동, 휴머니즘 그리고 우리의 실존족 내면의 통전성을 회복하는 것, 다 개량해 나가는 것들입니다. 심지어 더 나아가서는 유전공학을 통한 인간 불치병의 치료. 이러한 것들도 다 개량해 나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개량함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생산해 낼 수 없다, 이거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네 이거는 역사 패배주의가 결코 아닙니다. 훨씬 더 역동주의적입니다. 아시겠지요. 그게 왜 그런지요. 그리고 이거는 자기 합리화가 절대 아닙니다. 이게 성서가 많은 부분에서 여기에 연관되어 있는데요. 아까 말씀드린것을 다시 인용한다면 인간은 피조물인데요. 그렇기 때문에 던져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과 접촉점이 없다. 절대타자이기때문에 시간을 일시적으로만 순간적으로만 경험하기 때문에 시간을 전체적으로 다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다 숙명적으로 절대적인 생명을 우리의 손으로 생산해 낼 수 없습니다. 이거는 우리가 단순히 느낌으로만 한다거나 독단론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독단론에서 제가 그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물리학적인 생물학적인 철학적인 근거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신학적인 관점에서 말씀드릴 수 있구요. 거의 다 끝났네요.

기적에 대해서 지난 번 말씀드리다가 관계된 책들을 소개해달라고 하셨는데요. 추천도서에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은 무엇을 기적이라 부르는가? 추천서 보십시오. 아폰서 바이저지음. 분도 출판서, 저자 이름이 정확한가요? 요거는 추천도서에는 없을 것같습니다만 이적. 풀러가 지었고 지명섭씨가 번역한 자그만 책입니다. 기적, 여러분 신학은 여러분이 생각하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천년의 역사를 가진 가장 오래된 학문입니다. 상당히 솔직하고 정직하고 자기비판적인 학문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전통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이 작은 상식 가지고 이야기하는데 그런 것을 보면 참 경솔하다. 안티기독교나 교회안에 있는 사람중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렇습니다. 이적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제가 여기서 어떤 한 부분을 읽어드리려고 했는데 들어보십시오.

예수는 이적들을 행했는가? 보수적인 변호가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하나님은 이적을 행할 수 있다. 예수는 화육한 하나님이었다. 그는 이적을 행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적을 행했다. 그러나 많은 3단 논법처럼 이 주장은 본말은 전도한다. 이 주장은 결론이 있어야 할 선험적 가정에 의존한다. 예수가 화육한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신앙이 예수의 역사와 대면한 후에 신앙에 의해서 이루어진 결단이지 우리가 이 역사에 접근하기 전에 이루어진 가정이 아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기적을 행할 수 있었다. 행했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역사를 경험한 후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그거를 뭐라고 하나요. 뭐예요. 무슨 모순에 빠질 수 있는 거거든요. 결국 이 저자가 말하는 것은 우리의 선입관을 가능한 버리고, 가능하다 아니다 이러한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든지 라든지 안된다든지 하는 선입관을 버리고 그런 선험적 선언을 하지 말아라. 기적이 자연적으로 가능하고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는 것들에 실행, 기적은 우리가 모를 뿐이지. 아직 그게 완전히 불가능하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이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무조건 된다는 것도 말할 수 없는거죠. 우리가 복음서에 기록된 전승들, 배후에 얼마까지 소급할 수 있고 우리가 예수 자신에까지 소급할 수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 그 전승들을 연구하는 일이다. 기적, 전승이 있잖아요. 여러가지 종류입니다. 여러가지로 나누어요. 일일이 우리가 다 전승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해석이죠.

그리고 마가복음 주석, 제가 마가복음 큐티를 지금 하고 있지 않습니까? 참고 하고 있는 주석, 1권에 보면 기적에 대한 것도 나오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주일밤 편안하게 보내시구요. 한주가 잘 사십시오. 다음 목요일날 만나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