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704
LINK1 | |
---|---|
LINK2 |
1.관상기도에 관한 말씀을 듣고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런 류의 기도가 세심한 신학적 영성 토대가 되어 있지 않으면
심리적 카타르시스나 마인드콘트롤 같은 식으로 빠질 위험성을 말씀하셨는데요.
그렇다면 일반 평신도 입장에서 특별한 훈련이나 인도없이
혼자서 침묵기도 훈련을 한다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은지요?
저는 결국 하느님의 신비의 세계로 나아가려면 이러한 침묵기도로 귀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니 좀 혼란스럽습니다.
2. 목사님께서 심리상담을 기독교의 영성차원과 구분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분명하게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제가 의문을 가지는 것은, 심리학이나 심리상담 역시 보다 깊은 영성으로
들어가기 위한 필요한 작업이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마치 인문학이 성서의 세계를
이해 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심리상담이 개인의 심리적 안정 차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성찰을 촉진하는 것이라면, 이 또한
개인의 영성을 보다 깊게 열어가는 영적여정에 필요한 단계이며
도구라 여기고 있습니다.
물론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기독교의 핵심으로 안내하지 않고
포퓰리즘을 확대해 나가는 가벼운 목회상담을 경계하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만,
한편으로는 심리학이나 상담이 기독교 신앙과 대치되는 듯한 뉘앙스도 있어서요..
제가 목사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했다면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두가지 질문을 드렸는데, 요약하면
관상기도는 신학의 기초가 튼튼하지 못한 일반인이 도달하기엔 어려운 경지의 기도인가..?
하는 점과,
심리학이나 상담역시, 기독교 영성의 문을 여는데 도움을 주는 하나의 도구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시간을 두고 좀 기다려 볼까.. 하다가 또 질문을 드렸어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냥 이곳에 지면으로 해 주셨으면 합니다.
많은 분들이 기대하는 금쪽 같은 강의시간을 쓰는 게 죄송하고
아까워서요...^^
이런 류의 기도가 세심한 신학적 영성 토대가 되어 있지 않으면
심리적 카타르시스나 마인드콘트롤 같은 식으로 빠질 위험성을 말씀하셨는데요.
그렇다면 일반 평신도 입장에서 특별한 훈련이나 인도없이
혼자서 침묵기도 훈련을 한다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은지요?
저는 결국 하느님의 신비의 세계로 나아가려면 이러한 침묵기도로 귀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니 좀 혼란스럽습니다.
2. 목사님께서 심리상담을 기독교의 영성차원과 구분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분명하게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제가 의문을 가지는 것은, 심리학이나 심리상담 역시 보다 깊은 영성으로
들어가기 위한 필요한 작업이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마치 인문학이 성서의 세계를
이해 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심리상담이 개인의 심리적 안정 차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성찰을 촉진하는 것이라면, 이 또한
개인의 영성을 보다 깊게 열어가는 영적여정에 필요한 단계이며
도구라 여기고 있습니다.
물론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기독교의 핵심으로 안내하지 않고
포퓰리즘을 확대해 나가는 가벼운 목회상담을 경계하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만,
한편으로는 심리학이나 상담이 기독교 신앙과 대치되는 듯한 뉘앙스도 있어서요..
제가 목사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했다면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두가지 질문을 드렸는데, 요약하면
관상기도는 신학의 기초가 튼튼하지 못한 일반인이 도달하기엔 어려운 경지의 기도인가..?
하는 점과,
심리학이나 상담역시, 기독교 영성의 문을 여는데 도움을 주는 하나의 도구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시간을 두고 좀 기다려 볼까.. 하다가 또 질문을 드렸어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냥 이곳에 지면으로 해 주셨으면 합니다.
많은 분들이 기대하는 금쪽 같은 강의시간을 쓰는 게 죄송하고
아까워서요...^^
2008.04.30 00:42:07

웃겨님의 질문에 공감을 많이 했는데…
정목사님의 말씀에 새로운 것을 또 많이 배우게 되는군요.
특히 2번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기독교 신앙은 바람처럼 자유로운 하나님의 행위에 집중하는 것이다’는 것…
정목사님의 말씀에 새로운 것을 또 많이 배우게 되는군요.
특히 2번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기독교 신앙은 바람처럼 자유로운 하나님의 행위에 집중하는 것이다’는 것…
2008.04.30 11:14:48

정용섭목사님, 정성어린 답변에 감사를 드립니다.
답변을 받고 드는 느낌은,
우선 약간 홀가분하기도하고 또 한편으로는 서운하기도 합니다.
홀가분한 것은 관상기도에 관한 영성가(토머스 키딩,앤소니 드멜로)의 책을 읽거나 주변에서 침묵기도
효과를 전해주는 이들이 말을 들으니 그 경지가 사뭇 부러웠어요.
그래서 저도 침묵기도를 나름 시도를 했는데
( 여기서 격주로 침묵기도(contemplative prayer)모임에 나가는데 번번히 졸다가 오곤 하는 거예요.
혼자해도 졸고, 같이해도 졸고...도데체 뭐가 문제인가...제겐 너무 어려운 기도라고 여겨졌는데,)
목사님 말씀 듣고 보니 언어로 드리는 기도가 제 수준에는 적합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서운하네요..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기도 하구요.
소개해 주신 책은 구해 보겠습니다.
두번째, 심리학과 기독교 신앙의 차이에 관한 부분은 잘 알아들었습니다.
상담심리는 전문가에게, 목사는 하나님의 행위에 집중...이라는 말씀을 잘 새겨들었습니다.
융의 심리학은 단순히 마음을 연구하는 차원을 넘어 영적인 차원을 얘기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참된 자기인식은 곧 하느님 인식의 문을 열어주는 것이고요.
임영수 목사님을 예로 들으셨지만,
융이 말하는 심리적인 자기인식이라는 경로를 통해 들어가다보면 인간의 한계가 통감될 것이고
그럼 결국 하느님 인식(구원의 필요성?)으로 나아갈수 밖에 없지 않느냐.. .하는 말이었습니다.
실제로 제 경험이기도 했구요.
정목사님께서 인간에 관심하는 것을 배제한 조직신학의 길로 궁극적인 본질을 추구해 가신 것이라면,
이렇게 다른 경로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도 있을 수 있겠다는 것,
쓰다보니 좀 정신이 없네요... 말이 됬나요?
골라 잡으라고 하셨는데...,암튼 지금부터는 철저히 하느님에 촛점을 맞추시는 (--신정통주의라고 하셨나요?) 목사님의 소매 끝을 붙들고 한번 나가 보겠습니다!!
어지러운 가운데서도 목사님의 강의를 들으면서부터 제 신앙의 기초가 다시 세워지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 점에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답변을 받고 드는 느낌은,
우선 약간 홀가분하기도하고 또 한편으로는 서운하기도 합니다.
홀가분한 것은 관상기도에 관한 영성가(토머스 키딩,앤소니 드멜로)의 책을 읽거나 주변에서 침묵기도
효과를 전해주는 이들이 말을 들으니 그 경지가 사뭇 부러웠어요.
그래서 저도 침묵기도를 나름 시도를 했는데
( 여기서 격주로 침묵기도(contemplative prayer)모임에 나가는데 번번히 졸다가 오곤 하는 거예요.
혼자해도 졸고, 같이해도 졸고...도데체 뭐가 문제인가...제겐 너무 어려운 기도라고 여겨졌는데,)
목사님 말씀 듣고 보니 언어로 드리는 기도가 제 수준에는 적합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서운하네요..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기도 하구요.
소개해 주신 책은 구해 보겠습니다.
두번째, 심리학과 기독교 신앙의 차이에 관한 부분은 잘 알아들었습니다.
상담심리는 전문가에게, 목사는 하나님의 행위에 집중...이라는 말씀을 잘 새겨들었습니다.
융의 심리학은 단순히 마음을 연구하는 차원을 넘어 영적인 차원을 얘기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참된 자기인식은 곧 하느님 인식의 문을 열어주는 것이고요.
임영수 목사님을 예로 들으셨지만,
융이 말하는 심리적인 자기인식이라는 경로를 통해 들어가다보면 인간의 한계가 통감될 것이고
그럼 결국 하느님 인식(구원의 필요성?)으로 나아갈수 밖에 없지 않느냐.. .하는 말이었습니다.
실제로 제 경험이기도 했구요.
정목사님께서 인간에 관심하는 것을 배제한 조직신학의 길로 궁극적인 본질을 추구해 가신 것이라면,
이렇게 다른 경로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도 있을 수 있겠다는 것,
쓰다보니 좀 정신이 없네요... 말이 됬나요?
골라 잡으라고 하셨는데...,암튼 지금부터는 철저히 하느님에 촛점을 맞추시는 (--신정통주의라고 하셨나요?) 목사님의 소매 끝을 붙들고 한번 나가 보겠습니다!!
어지러운 가운데서도 목사님의 강의를 들으면서부터 제 신앙의 기초가 다시 세워지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 점에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좋은 질문을 주셨습니다.
찜찜한 걸 그대로 묻어두지 않고
기어코 확인하고 싶어 하는 건
참으로 좋은 삶의 자세인 것 같습니다.
대개는 그냥 아는 척 하거나,
더 심한 경우는 뭐가 문제인지,
무엇을 생각하고 질문해야 하는지를 모르거든요.
그림을 잘 그리고,
그 그림의 이야기를 잘 끌어가듯이
김헤란 씨가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하나하나 잘 짚고 있는 듯합니다.
내가 빨랑 대답하지 않고 이렇게 뜸을 드리는 이유는
원가를 생각할 시간을 버는 겁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하나는 질문한 주제가 저의 전공분야가 아니구요,
다른 하나는 어느 범위까지 설명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거에요.
그냥 되는 대로, 되는 것만큼만 말씀드릴테니,
필요한 것만 골라, 골라! 잡으세요.
1. 관상기도
이 문제는 제가 말씀드릴 게 정말 없답니다.
영성 운동을 하는 분들이 기도의 단계를 나누는데요,
최고 경지의 기도가 관상기도라는 것만 압니다.
그리고 그 윤곽만 압니다.
그런 걸 제가 집중적으로 실천해보지 않았어요.
그냥 조직신학을 공부한 사람의 입장에서 한 마디 하지요.
침묵 가운데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오직 영만이 운행하는 그 관상 기도라는 것 말입니다.
그게 어떤 영적 상태인지 알겠는데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아득함의 세계 경험이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건 깊은 경지의 묵상이지,
기도라고 하기는 좀 어려운 게 아닐는지요.
기도는 인격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인격적인 아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인격이라는 개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도 우리 인간과 똑같은 인격을 갖고 있다는 뜻은 아니랍니다.
그분은 그분의 신격(persona)을 갖고 계신 분인데,
우리의 인격과는 전적으로 다르지요.
그래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하나님의 인격이라는 말을 쓸 수는 있어요.
인격의 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대화는 어떻게 이루어지며,
어떤 상황에서 가능한가요?
자신의 생각을 인격적으로 표현할 때 대화가 이루어집니다.
물론 아빠와 딸이,
또는 사랑하는 두 남녀가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대화를 나누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선승들도 침묵으로 대화한다고 합니다.
관상기도는 이런 묵상도 뛰어넘는 거지요?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내가 좀더 공부한 다음에 말씀드릴께요.
그러나 저는 일단 이렇게 생각합니다.
기도라는 말을 붙이려면
침묵이든지 소리이든지
자기의 생각을 하나님께 아뢰고
그분의 대답에 귀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물론 그분이 직접 우리에게 대답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가 영적인 귀를 열면 어떤 방식으로도 그분은 대답하십니다.
관상기도는 명상훈련을 통해서
어떤 심층의 무의식 안으로 빠져들어 가는 게 아닐는지요.
침묵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고도의 영적 훈련이 필요합니다.
수도원에서 전문적으로 그런 훈련을 하는 사람에게 가능하겠지요.
일상생활을 하는 평신도들은
그런 기도보다는 구체적인 언어를 통해서
기도하는 게 훨씬 바람직합니다.
제가 다른 글에서도 썼지만
신앙의 위인들이 이미 기도한 내용을 배우는 게 더 중요하지요.
제가 보기에 관상기도를 하기보다는
어거스틴의 기도문을 천천히 읽는 게 더 좋을 듯합니다.
위에서 하나님의 인격에 대해서 말했는데,
참고될만한 책을 소개합니다.
H. Ott, 김광식 역, 살아계신 하나님(대한기독교서회, 현대신서 49, 1973)
2. 상담심리학에 관해서
이 문제는 위의 주제와도 직간접으로 연결될 겁니다.
김혜란 씨,
잘 들으세요.
이런 문제는 설명하기가 애매합니다.
자칫하면 상담심리를 완전히 매도하는 것처럼 들리니까요.
결론을 먼저 말씀드린다면
(상담) 심리학은 그냥 마음의 과학입니다.
인간 학문에 진화론이 있고, 양자역학이 있듯이
그것은 마음의 과학이랍니다.
아마 마음의 과학이니까
생물학이나 물리학보다는 신앙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답니다.
똑같은 문제에요.
심리학은 인간의 마음과 정신 현상에 관한 과학적 성찰이고,
생물학과 물리학은 몸과 물질에 대한 과학적 성찰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영, 또는 영혼, 또는 성령의 문제는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 전체의 문제랍니다.
그 생명에는 마음만이 아니라 몸까지 포함되는 거지요.
물론 기독교 인간론에서도 영과 육을 구분하지만
단지 구분할 뿐이지 원래는 일치로 봅니다.
통전적인 관점이지요.
제 입장에서 본다면
상담심리는 생물학과 비슷한 거에요.
둘 다 좋은 거지요.
생물학 공부를 통해서 우리는
신비로운 몸의 현상을 알 수 있답니다.
교회는 생물학을 공부하는 공동체가 아닌 것처럼
상담심리가 중심으로 자리할 수 없답니다.
양쪽 모두 참조용이지요.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구원론과 연결된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심리와 정신을 도야함으로써
어떤 구원의 현실들을 얻거나
그곳으로 가까이 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인간 내부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옵니다.
extra nos!(우리 외부)
그리고 in Christo!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안에서 생산해내는 게 결코 아닙니다.
외부에서 주어지는 거에요.
모새골의 임영수 목사님이 칼 융을 공부하셨고,
그런 영성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제가 아주 존경하는 목사님이시지만
그분의 말씀하시는 그런 심리적 영성에 대해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이야기가 너무 확장되는 것 같네요.
기독교 영성은 심리, 상담 치료에
큰 무게를 두지 않습니다.
오해는 마세요.
그게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랍니다.
정신적인 상처를 입고 사는 사람에게는
그런 치료가 필요하겠지요.
그런 게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요.
기독교 신앙은 그런 상처를 그대로 용납하는 거랍니다.
인간의 정신적인, 육체적인 상처를 고쳐서 쓰는 게 아니라
그냥 그것을 받아들이는 거지요.
심지어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그냥 받아들이는 거지요.
왜냐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사건이기 때문이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말합시다.
결론적으로,
기독교 신앙은 바람처럼 자유로운 하나님의 행위에 집중하는 거랍니다.
인간이 아니지요.
그 하나님의 행위야말로
생명의 현실인 거지요.
그걸 믿고 기다리고 사는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지요.
인간 마음의 치료요?
우리가 감기 들리면 약을 먹고 쉬어야 하듯이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 됩니다.
상담 심리학은 전문가에 맡겨두고,
목사는 하나님의 행위에 집중해야 한다는 게
저의 짧은 생각이랍니다.
짧은 생각을 길게 말했네요.
5월1일은 휴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