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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답시간(080615) 삼위일체, 기독교 윤리
최근 등장한 시그널 뮤직, 우리 음악이 잔잔히 깔린 무대 위로 강사 목사님 등장, 첫 말씀, 캠코더 꼭 켜야죠.^^*
안녕하세요. 오늘 주일 잘 지내셨습니까? 6월도 오늘이 15일이니까 딱 15일 남았군요. 강의 숫자로만 하면 딱 네 번 남았습니다. 오늘 빼구요. 19, 22, 26, 29인데요. 후반기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여전히 생각중입니다 . 몇 달 전에 한번 제가 말씀을 드렸을 거예요. 이거를 라이브로 하지 않고 녹화를 해서 띄우는 방식으로 할까? 그렇게 하면서 수강료는 하신 분들은 계속하고 골치가 아파서 안되겠어요. 수강료 받고 말고 하는 것이 간단한 것이 아니고 수강료보다 사무정리하는데 에너지가 더 많이 나가는 것 같습니다. 요거 사무보는 사람이 한사람이 꼭 있어야 될 것 같더라구요. 이게 다비아가 앞으로 더 체계를 잡으려고 한다면 사무를 보는 사람이 한 사람이 있어야 될 것 같떠라구요. 문서를 작성하고 보내는 일들이 혼자서 하려고 하니 힘이 벅차더라구요. 그런 일들이 이렇게 생각과 시간들을 많이 빼앗기니까 중요한 것들을 놓치게 되고 집중력이 좀 떨어지기도 하구요. 그렇지만 유급 사무원 둔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잖아요. 하여튼 이런 저런 생각중입니다. 어떻게 해야되겠다는 생각이 없구요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되겠다고 생각하고 어쨌든 이 동영상은 그래도 6월 지나가기 전에 어떤 방식으로 결정을 해야되는데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좋은의견이 있으면 주시구요.
오늘 저희 샘터교회 설교가 사라와 하갈 아브라함 하갈 이런 관계에 얽혀진 이야기입니다. 잠간 그 이야기부터 오늘 풀어갔으면 좋겠어요. 전체적인 제목은요. 우리가 지금 두 시간에 걸쳐 기독교 윤리를 하고 있으니 다음과 같겠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기독교의 윤리 이 제목으로 잡겠습니다. 제목은 이렇게 잡아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방향이 달라질 것 같은데요. 결국은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놓고 이야기를 할 것 같아요. 설교에 나오는 이 에피소드가 윤리하고 연관되니까 이 두관계를 설명해 볼까 생각합니다 . 하나님의 나라, 이따가 다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만 또 짤막하게 이야기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니구요. 그래도 제가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고 맥락을 아시겠죠. 이거를 제가 확실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을 다 담을 수 없지만 그러나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느정도 그 것에 대해서 알게되면 그것을 뛰어넘어 버리는 힘을 의식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나라가 그런 거거든요. 네 이건 종말까지 계속해서 하나님이 곧 하나님 나라인데 그분이 그렇게 자기를 계시하시고 열어가실텐데요. 그런점에서 상당히 막막합니다 . 답답하기도 하구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가 이런 정도다 개념을 세울 수 있다고 말하면 또 그다음이니까. 끝없이 끝없이 새로운 어떤 지평들을 열어가기 때문에 사실은 이게 승산없는 게임이예요.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신학만 그렇겠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학문이 결국은 승부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작업밖에 안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어떻게 이야기하겠어요. 부분적으로 어떤 것을 비유적으로 어떤 흔적만 흔적만 겨우 붙잡고 이야기하는 거지 실제를 붙잡기는 불가능한 거예요. 여러분들 그걸 아예 그걸 전제하고 신앙생활을 해야되구요. 신앙생활만이 아니라 이 삶자체가 그렇습니다. 그냥 예수님의 옷자락을 살작 붙잡고 18년된 혈루증을 나은 여자라 할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몸을 붙잡을 수 없습니다. 그냥 흔적만 궁극적인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흔적만 말한다고 하는 점에서 답답하기도 하구요. 또 그런 점에서는 신기하기도 한거죠. 그러니까 늘 새로와지니까요? 뒤에 이야기를 좀 더 이야기를 해야될 것을 제가 미리 당겨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 나라와 윤리의 관계인데요.
오늘 샘터교회 설교에는 세사람이 나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다섯 사람이 나온다고 봐야 되겠네요. 아브라함, 하갈, 사라와 이스마엘, 이삭, 이스라엘은 야곱을 가르키죠. 사라는 이삭, 오늘 이야기는 이삭이 젖을 떼었을 때, 이유식인가요. 이유할때 그 순간에 벌어진 에피소드를 가르킵니다. 세 살때 보통 젖을 뗀다고 하는데. 성서 본문 여러분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사라가 이스마엘과 이삭과 노는 것을 보았어요.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린다. 번역된 것 같구요. 공동번역에서는 같이 논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 앞뒤 짜맞추어 보면 이삭이 세살이라면 이스마엘은 열일곱살입니다. 그리고 사라가 자기 아들과 이스마엘이 서로 놀고 혹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고 있다. 이미 열일곱살짜리가 세살 짜리를 놀리겠습니까? 이미 열일곱살이니까 집안 사정 잘 알테구요. 열일곱살이라 사라의 몸종이었으니까 이집트 여자니까요. 자기의 위치를 알겠죠. 홍길동 위치인가요. 어머니가 정실부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이삭을 골리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그건 중요한 것은 아니구요. 사라가 오늘 본문에 따르면 이스마엘과 이삭이 서로 놀고 있는 것을 보고 기분이 나빴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때가 바로 세살 잔치를 베풀고 바로 그랬다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한참후에 지나가서 점점 점점 오랫동안 상황을 많이 보고 사라의 심정이 뒤틀린거죠. 그 장면을 빨리 지나가야 되겠군요 그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핵심이 아니니까요. (차를 마시는데 숭늉마시듯이 후루룩 소리를 내며 마셨습니다. 숭늉마시듯이. 미안합니다.)
그 본문을 잘 읽으셔야 되게요. 읽을때. 성서기자들은 생략합니다. 중요하지 않는 것은 그냥 지나각요. 이렇게 저렇게 편집을 해서 편집의 묘미 이런 것을 잘 뜯어보면서 성서기자가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게 뭔가 이게 중요한 거예요. 성서 기자가요. 제가 언제인가 말씀을 드렸죠. 복음서도 마찬가지요. 다른 것도 다 그래요.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라든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나의 멍에는 가볍고 이러한 모든 예수님의 말씀들도 사실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인가 아닌가를 구분하기도 해야 한하는데 뭐 고거는 좀 어려운 문제고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성서 기자가 중요하다고 하는겁니다. 성서 기자가 왜 예수님의 말씀을 그렇게 인식했을까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실증적 사실을 우리가 파악하기는 불가능한 거예요. 예수님이 뭔가를 말씀하셨고 그 말들이 조금씩 구전되어 쭈욱 내려온 거를 성서기자가 잡아채 가지고 예수님의 생애 안에 넣고 글을 쓴거죠 기자가 중요한 거죠. 그런점에서요 하갈과 사라 아브라함 이야기 속에서도 성서기자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는가 그쪽으로 포커스를 맞추어야 됩니다 . 그것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닌데 제가 자꾸만 옆으로 나가네요.
사라가 볼때 자기 아들과 이스마엘이 서로 놀고 하는 것이 기분 나빠서 성서에 보면 이스마엘도 자기 아들과 똑 같이 상속자가 되는 것디 불만이 있어서 결국 아브라함에 모자를 내쫓아 버리라고 하는 거잖아요. 굉장히 못됐습니다. 그냥 보면 못된거죠. 그 말을 듣고 아브라함도 물론 성서를 보면 괴로와 했다고 하지만 아내의 말에 넘어간 것인지 아브라함 스스로도 판단이 들어서 그런 것인지 모르지만 결국은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내쫓아 버리거든요. 그런데 내쫓아 버릴 때에도 이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이미 하란땅에 있을때 아버지 데라와 같이 있으면서 제법 재산을 불렸습니다 .재테크에 능한 사람 같아요. 그러니까 구약에 나와있는 많은 부자들, 정치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야욕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이 너무 이 사람들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면 곤란해요.
요셉같은 사람도 문제 많은 사람이라는 것 여러분 아시죠. 이집트에 들어가서 꿈 해몽하다가 출세, 국무총리까지 올라가게 되었는데 거기는 여러가지 많은 다른 사정들이 있었을 겁니다. 요셉이 보디발 장군의 아내 유혹을 딱 뿌리치고 좋은점, 꿈꾸고 말을 하고 있기는 있습니다만 과연 요셉이라고 하는 사람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는 냉정하게 봐야 하는거거든요. 이집트에 들어가서 7년동안 풍년들었을때 싸게 싸서 매점매석한거죠. 흉년이 들었을때 열배 스무배 장사를 한거거든요. 그 당시는 자유농이었었는데요. 이 사람들이 모두 농노가 되었다는 거 아닙니까. 이 모든 것이 요셉을 통해서 된 것이거든요. 이러한 경제정책을 통해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라가고 물론 그전에 꿈을 해몽해서 그렇게 올라갔습니다만 그러나 이러한 정책을 폄으로서 결국은 그렇게 된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이 요셉을 이상화하지 말아라. 요셉의 꿈 이런 방식으로 신자들에게 설교를 한다는 것은 성서를 견강부회라고 말할 수 있겠죠. 성서의 기자는 사람에 관해서는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사람은 거기서 거기니까 아시죠? 위인과 일반 소시민들의 차이가 그렇게 크지도 않아요. 물론 보기에 따라서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지만 또 그 사람이 능력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시운이 맞아서 영웅이 나오거든요.
아브라함이 재테크에 능했습니다. 음... 또 누구야? 솔로몬, 하여튼 솔로몬 이 사람도 문제 많은 거 몇 번 설교에 했을 테니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성서기자가 솔로몬 전승을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끝냈는지 잘 보세요. 여러분들이 아마 솔로몬이 아무리 많이 문제가 많다고 하더라도, 요 문제는 3달전 서울 오프모임에서 공부한 내용인 것 인데요. 솔로몬이 다른데도 문제가 많고 마마보이 기질이 있었고 어머니 밧세바와 나단의 술수, 계략에 의해서 왕이된 어부지리를 얻었는데요. 솔로몬이 여러가지 문제가 있더라도 아, 그 지혜를 구한 것은 그 사람 괜찮은 것 아니냐 여러분 그러시겠죠. 아 일단, 이런 애기, 자꾸만 진도는 안나가고 다른 이야기하네요. 왜 문제냐면 지혜를 구했다고 하는 것에, 그냥 간단하게 두가지만 관점만 이야기하겠습니다.
하나는요. 지혜를 구했다고 하는 것은 꿈이이야기예요. 꿈, 실제가 아니라 꿈이라는 겁니다. 이 꿈은 개꿈이라는 것, 가능성도 많구요. 꾸며낸 이야기일 가능성도 많고요. 무의식을 발로가 꿈이 잖아요. 솔로몬이 자기 왕권의 도덕성, 자기가 왕이 되었다고 하는 정당성, 그런 것을 얻지 못했습니다. 사실은요.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 꿈꾼 것으로 하나님에게서 정당성을 받았다 이렇게 민중들을 설득하는거죠. 이러한 이야기는 구약성서만이 아니라 이집트 문명이라든지 심지어는 잉카 문명에 있었던 어떤 문서에도 비슷한 이야기들이 나온다고 합니다. 왕권을 민중들에게 설득시키기 위해서 왕이 신으로부터 받은 어떤 이야기를 하는거죠. 요 구조가 비슷해요. 솔로문의 꿈에 대해서는 너무 이렇게 큰 비중을 두지 마시라는 것이죠. 정치가들의 어떤 정략적인 자기 해명일 가능성이 많다.
두 번째 이 지혜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성서적에서 볼 때 기본적으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뱀처럼 슬기로워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그거와는 다른 이야기예요. 뱀이 아담과 이브를 유혹할때 이야기를 하시죠?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들이 눈이 밝아져서 지혜로와진다. 지혜는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인간의 탐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해석이 100% 맞는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구약성서학자들이, 제가 조직신학을 한 사람이라기 때문에 성서신학에는 많이 모자란 사람인데. 구약성서학자들이 엉뚱한 해석이다라고 할지 모르지만 제 눈에는 그렇게 보입니다. 권력을 주었다거나 부자가 되었다거나 그런 것들을 하나님의 축복인것처럼 일치시켜서 성서를 보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이야기예요. 아브라함이 재테크에 용했습니다. 갈대아 우르까지 를 떠나서 하란까지 갔잖아요. 아버지 모시고 조카 롯도 있구요. 하란에서 거상, 상당히 돈을 벌었습니다. 가나안땅에 와서 더 많이 벌었잖아요 성실해서 돈을 벌을 수도 있고 부자가 되는 것은 성실해서 될 수도 있고 남을 기만, 속이는 행위도 필요하거든요. 기만과 성실성과 운, 이러한 것들이 종합적으로 맞아 떨어지면 되는거구요. 어느 하나라도 안되면 내가 보기에는 힘들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부자였었는데도 하갈가 이스마엘에게 내쫓으면서요. 약간의 음식, 길 가다 먹으ㄹ수 있는 떡 덩이 얼마하고 물 한부대 주었다고 성서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서 기자는 굳이 이렇게 까지 말할 필요도 없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어떤 것을 의도하고 말하는 거죠.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주 비장한 인간처럼 거기 비춰지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확 줄여야되겠네요.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죠.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내로서 89살 되었을때 너가 임신하리라 하였을때 피식 웃었다가 나중에 받아들였고 1년 후에 임신한 다음에 아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웃게 하시는구나. 그러한 아브라함 정도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믿음의 자손 아브라함의 아내로서 손색이 없을 정도의 여인이잖아요. 사라하면 우리들에게는 늘 좋은 의미로 다가옵니다. 이, 이렇게 훌륭한 사람들이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하는 행동을 보세요. 그러니까 이건 조금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성서기자가 왜 이렇게 표현했는지 참 특이하다. 성서기자의 눈이 날카롭기도 하고 뭔가를 우리들에게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 아브라함같이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아니고 평범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나 같은 경우라고 하더라도 한 밑천 떼어서 주고요. 먼길 갈 동안 낙타도 주고요. 한 밑천해갖고 모자가 좀 기반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줄 겁니다. 이것을 안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중간에서, 브엘세바에서 물도 다 떨어지고 죽음 직전까지 가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키시거든요.
지우고.. 저는 그런 점에서 인간의 행위, 윤리적이라고 하는 말을 붙여야 되겠군요. 오늘 샘터교회에서 2부 순서로 붓글씨 공부를 했는데도 글씨가 잘 안 써지네요. 이게 근본적으로 내가 보기에는 불가능하다. 윤리 허무주의라고 할까요? 윤리 허무주의? 윤리란 웃기는 이야기. 허무주의는 아닙니다. 철저하게 윤리적인 어떤 나이브한 도덕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예요. 신앙에 근거한 프락시스, 실천에 대한 이야기하는데요. 그런 점에서 진보적인 목사들과 같이 연계해서 활동하고 있고 지금 촛불시위 이런 데서도 부분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대의적인 문제에서 동의하고 이러한 남북문제도 그렇고 등등으로 다 전향적으로 이 역사를 개혁해 나가는데 앞장서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러나 여기서 말씀드리는 것은 어떤 궁극적인 사실 앞에서 보는 거죠. 하나님이라고 하는, 우리의 삶은 언제나 하나님을 늘 전제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윤리적 행위라고 하는 것이 가능하겠냐? 그 애기죠.
지난 번 시간에 제가 그 판넨베르크의 논문을 인용하면서 기독교 윤리의 근거가 하나님의 나라인데 다음과 같은 의미라고 했습니다. 몇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잠정성이라고 했거든요. 인간행위의 잠정성, 우리가 한 행위들이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서 볼 때 우리들의 행동이 잠정성이다. 저는 그것이 불가능한 거시 아니냐 노골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유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이건 잠정성이라는 것을 포함해서 잠정성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의미를 아시죠? 일시적이고 완전한 것은 아니죠. 잠정성이라는 것을 좀 더 설명을 할께요. 하나님 나라와 연관해서 우리 기독교인들의 세계인식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세계의 모든 것은 잠정적이라고 보는 거예요. 어느것도 여기서 제외되는 것은 없습니다. 율법도 다 잠정적이거든요. 율법이 사실은 윤리문제구요. 실정법을 포함한 불문법까지 포함해서 다 연관되는 건데요. 아, 다 잠정적이라고 보는 겁니다. 국가도 잠정적 이예요. 대한민국이 영원하겠습니까? 기독교인은 애국자가 될 수는 있지만 쇼비니즘이라고 하나요. 아주 배타적인 민족주의에 빠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그 너머에 있는거기 때문에. 심지어 교회도 잠정적인 거예요. 교회, 더 나가서 기독교 교리도, 가장 진리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의 교리도 여전히 잠정적이라는 것은 아셔야합니다. 물론 이런 것과는 차원이 다른 거죠. 율법이나 국가와는 차원이 다르지만 기독교 교리도 잠정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하나님의 인식이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고 하는 겁니다. 오늘 이 대답 두개 연관되는 건데. 교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의롭다고 인정하심, 하나님의 교회에 때한 뜻, 섭리, 하나님이 어떻게 종말에 하실 것이라는 전반적인 것에 대한 우리 인식의 논리적인 해명이거든요. 우리가 기본적으로 하나님, 종말론적으로 자기를 계시하게 될 하나님을 완전히 인식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 인식에 기초한 논리적 해명인 교리가 완전할 수 있겠어요.
이게 좀 신학적 표현이라 잘 들어오지 않는다면 조금 직접적으로 말씀을 들어볼까요? 어떤 것을 예를 들어볼까요? 삼위일체 이건 말하기가 좀 그렇기가 한데요. 그래도. 삼위일체 이거는 아주 종요한 하나님을 이해하는 신학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과연 이걸로 하나님을 완전하게 해명한거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태까지는 최선인거죠. 여태까지는 최선인거죠. 그러나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러한 개념이 하나님을 정말 명실상부하게 그대로 아주 실증적으로 해명한 거냐는 질문 앞에서는 그렇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본질이 동일하고 위격이 삼위인, 삼위로 구분되는 이러한 하나님을 하나님의 존재 신비를 우리가 이렇게 애기하고 있을뿐이지 그 하나님의 존재 신비를 우리가 손아귀에 잡을 수 없는 거죠. 그거는 이제 나중에 하나님이 온전하게 자기를 드러내신다면 그때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이니까 그때 가서 말할 수 있는 것이죠. 잠정성이라고 하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 되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 하는 일들이 근거가 없다는 말이냐? 절대 그거는 아니니까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잠정적이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역사 안에서 우리의 인식, 우리의 실천, 치열한 노력들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들에게 일어나기를 기대하면서 또 거기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역사의 과정 속에 우리가 들어있다는 점에서 우리들에게는 좀 설교조로 이야기한다면 두 가지 태도가 필요한 거죠. 하나님의 구원역사속에 우리가 분명히 두발을 딛고 있다는 그러한 확신이 필요하구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나의 인식은 늘 잠정적이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거울을 보는 것처럼 지금은 그렇다. 그러나 부분적이고 잠정적이지만 하나님과 온전한 소통이다. 확신에만 빠지다 보면 열광적이 되어버려요. 또 인식론적인 한계에만 자구만 떨어지게 되면 그러면 인제 불가지론에 빠지게 된다거나 냉소주의에 빠지게 된다거나 그렇게 되는거죠. 여기에 긴밀한 긴장을 갖고 한계를 알면서도 하나님과의 실질적인 소통과 경험들이 우리들에게 필요하다는 거죠.
이 윤리 불가능성을 저는 두 가지로 생각을 하는데요. 하나는 우리는, 우리의 행위라고 하는 것은 위선적일 때가 많다. 많은 것이 아니라 제가 보기에는 거의 대다수가 위선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선, 정말 우리가 선에 돌입해서 선을 행할 수가 없으니까요. 우리는 선을 행하면서도 여전히 자기를 의식하거든요. 예수님이 오른 손이 하는 일을 모르게 하라는 말씀은 자기가 선을 행하는지도 아닌지도 모르는 상태를 말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아주 우리는 머리를 잘 돌리잖아요. 선한 것 아닌것해서 자악 골라서 해갖고 내가 이렇게 하면 이런 정도로 인격적인 사람이지 기독교인이니까 이런 정도는 해야지 이런 것 많잖아요. 목사로 살지만 그렇더라구요. 여기서 잘 벗어나지가 않더라고요. 아마 여기서 벗어난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하나가 없다고 하는 것은 과장이지만 거의없다, 아니 하나도 없다고 하는 말이 맞을겁니다. 정말 성령과 일치가 되어서 아시시의 프란시스코라든지 테레사라든지 등등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리고 이름없이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결국은 어느 부분에서는 자기를 의식했을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 정확하게 잘 알고 애기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늘 사람들은 자기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거니까요?
어쩌면 내가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그러한 어떤 완전한 성화, 완전한 성화의 상태에 들어간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걸 제가 열어놓기는 하는데 있다고 하더라도 아주 특이한 경우구요. 그런 경우라고 한다면 완전한 엑스타시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보거든요. 거의 자학에 이를 정도로의 자아의식이 없는 사람들이 경지, 천치가 되던지 마약중독자가 되든지 그런 방식으로 영과 소통해야 되는데 과연 그게 바람직한 기독교인의 삶이냐에 대해서는 제가 확신이 없습니다. 신비주의자들 중에서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중세기에는. 자학과 금욕속에 빠지는 거거든요. 자기 육체를 학대하면서 다리를 잘라낼 정도로 하면서 영적인 세계를 경험하려고 하는 것이죠. 여성 신비주의자들중에서는 폐결핵 나온 침, 가래죠. 그런 것을 취함으로서 자기를 없애는 신비의 경험도 했다고 그래요. 아주 그렇게 극단에 자기 자신을, 몰아죠. 몰아 맞나요? 그렇 하지 않으면 인간은 평상적으로 생각하는 한 늘 머리를 굴린다. 우리의 행위라고 하는 것이 아무리 옳바르다고 하더라도 위선에 빠질때가 많이 있는거죠. 이 말은 기본적으로 곧 우리가 이타적일 수 없다. 이타적인 삶, 완전한 이타, 그런점에서 저는 우리의 행위라고 하는 것이 한계가 있는 거지. 완전하게 윤리적으로 살기 힘들다.
두번째는 아까 제가 인식의 문제를 해서 연관되는 건데요. 기본적으로 우리는 인식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가 선한의지로 행위를 했을 때 어떤 결과를 맺을 지 우리가 모르는 거예요. 좋은 의지로 우리가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 사람에게 나쁘게 작용할 수 있거든요. 이런 점에서, 제가 이것을 충분하게 생각한 것은 아닌데 이런 점에서 우리가, 우리의 윤리적인 행위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 잠정적이다. 앞시간에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어쨌든 우리가 행위를 하면서 살아야 되는데 행위라고 하는 것은 윤리적인 가치론적 판단이니까요. 이게 행위가, 가치론적 판단 이게 윤리거든요. 이게 행위를 하면서 살아야 되는데 밥먹는다거나 사람을 만난다거나 모든 것이 행위 잖아요. 관계 행위인데요. 우리가 가능한데로 같이 있는 한 행위를 해야 하는데요. 그러니까 이건 우리가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거죠? 여태까지 윤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주 괜찮는 것, 이것을 해야 하는데 과연 이것이 가능한가 하는 점에서는 내가 보기에는 좀 힘들다는 것을 말씀드렸구요. 고래도 우리가 해야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위선이라도 필요할 때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저는 지금, 제 말씀이 전달하기가 쉽지가 않는데, 자칫하면 아 윤리적인 행위가 필요 없다고 전달될까봐 의식하면서 말하다 보니까 잘.. 조심스럽습니다. 그건 아니면서도 절대적인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행위라고 하는 것이 과연 윤리적인 말을 붙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저는 이런 점에서는 무위이무불위라고 하는 노자가 한 이야기거죠. 무위이무불위. 아하 개발 새발 그렸네요. 그런데 무위, 노자가 한 이야기, 어떤 의도적으로 하지 않음으로서 불위, 하지 않는 것은 없다. 나는 그 사람의 그 이야기를 듣고 야 성령론적인 윤리하고 딱 맞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노자와 장자가 사실은 윤리가 필요없다고 하는 말을 하려고 했겠습니까? 사람으로서는 그건 아닌 이야기죠. 그러나 윤리적이라고 하면서 하는 모든 사람들의 행위를 보니, 그러니까 아까 제가 말씀드린 위선에 가까운 거거든요. 우스운 거거든요. 그렇게 하면서 자기가 자선을 베풀었다. 어떻게 했다 사람들을 틀로 가두려고 하는거죠. 삼강오륜이라든지 삼강오륜, 이거는 바로 율법예요. 토라, 십계명하고 같은거예요. 이런 것들은 오랫동안 인간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인간의 행위를 가장 가치 있게 끌어가기 위한 최소한의 규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건 일종의 인류문명의 열매들이죠. 그래서 문명이 있는 사회에서 이러한 것들이 많이 발전하게 된 거예요. 그것이 법이죠. 옛날에는 법전이라고 그랬죠. 함무라비 법전이나 로마법, 구약성서의 십계명등이 다 문명사회가 만들어 놓은 하나의 법 규범, Norm그러니까 위(爲)죠. 어떠한 것을 해야 한다는 거죠. 동서양을 따라서 내용은 좀 달라지겠습니다만 어쨌든 그러한 틀이 있어야 인간다와지고 그 사회가 유지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노자와 장가가 보기에는 그러한 틀 자체가 우습다는 것이죠. 그게 정말 인간을 살리냐 그렇지 않다는 쪽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어떤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노자와 장자가 이야기하는 대로 살면 그건 또 불가능한 이야기예요. 이건 어떤 지평에 있어서 진리예요.
바울의 이야기도 그런점에서는 연관이 됩니다. 이신칭의라고 그러잖아요. 믿음이예요.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것인데요. 율법을 행함으로 의로움을 받는다고 하는 율법신앙으로부터 믿음으로, 이거는 행위는 아니죠. 물론 여기에 행위가 열매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거는 서로 대립되는 개념에서 그거는 빼놓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거는 나중에 필요한거죠. 행위가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 무위이무불위 개념하고 통하는 거죠. 그러니까 공자나 이런 사람들, 공자의 가르침은 구약 율법하고 통하고 노자, 장자는 오히려 바울. 복음의 가르침하고 통합니다. 여기는 어떤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틀, 규범으로가 아니라 온전한 자유, 이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성령의 감동, 성령의 충만, 여러분 성령을 생각할 때 자유를 꼭 생각하세요. 성령은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영이니까 그런 관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결국 기독교의 윤리는 무엇을 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그런 차원이라기보다도 우리가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선택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선택해야 하기는 하는데요. 우리는 궁극적인 어떤 사태앞에서 우리의 행위의 잠정성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행위의 근거를 놓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를 놓는 거죠.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 네 이게 말이 되나요? 전달이 되었나요. 말을 하면서 다른 생각을 하느라고 제가 하는 말을 똑바로 했는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네. 기독교의 윤리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고 하는 것을 전제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우리의 윤리적 근거를 놓아야 됩니다. 아 그게 정확한 표현은 아닌데 어떤 것을 말할려고 하기는 하는데요. 잘 정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틀린 말은 아니예요. 제가 너무 도식적으로 제가 말씀을 드려갖고 다르게 여러분에게 와 닿을 수 있는 설명이 없을까 그것을 지금 머리속에 생각하는 중입니다 차 한잔 다시 마시겠습니다. 딸그락 딱, 아 좀 덥네요. 좀 벗고. 차를 마셨더니 좀 덥네요.
음.. 정리를 해야 되겠군요. 지금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윤리의 근거다 인제 이걸 이야기하는 중인데 제가 강의, 오늘 말씀드리기 위해서 조금 요약을 했거든요. 하다가 언뜻 이런 생각이 나서 예를 하나 들려고 합니다. 우리 행위의 잠정성, 우리가 아무리 좋은 일을 하더라도 결과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우리가 좋은 일을 하더라도 자기 의를 드러내려고 한다는 이 근본적인 한계, 이런데서 도대체 기독교의 윤리라는 것이 가능하느냐 그런 것을 전제하구요. 그런 토대에서 결국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게 오는 것에 대한 기다림이 아니냐?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와야만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지 이것이 없이 우리가 이 세상을 일종의 개량, 개량함으로서 참된 선을 생산해 낼 수 있겠느냐 하는 그런 질문입니다. 우리 스스로 계량해내는 방식으로는 제가 보기에는 불가능하고요. 하나님 나라가 인제 우리에게 오기를 기다려야 하는데요.
무슨 예를 들자는 거냐 하면요. 춘향전이예요. 사랑을 나눴던 남자가 서울로 과거보러 떠났고 여기서 남원에 남아 있던 춘향이가 사또의 수청을 들라고 하는 명을 거절하고 감옥에 갇혀있고 그러한 등등의 일이 있다가 모든 문제들이 일시에 해결되었 잖아요. 암행어서 출두요 하는 것으로 다 해결되었다 말입니다. 저는 이런 것하고 비슷한 것 같아요. 예수님이 오신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고 하는 것은 춘향이가 살아가던 모든 질곡과 한계들 일시에 해결되는 되는 것이 사랑했던 남자가 암행어사로 출현했던 것처럼 우리들의 그러한 삶도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개입하는 것으로만이 해결될 수 있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다 그렇게 알고 계시죠. 이게 종말이라고 하고요. 예수님의 재림이라고 하고요. 또 다른 단어가 여러분 생각나는 거 있어요? 심판, 이런 단어들을 여러분들이 너무 낯설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기독교 신앙은 늘 낯설게 생각하기는 해야 하는데 제가 낯설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너무 먼 이야기로 생각하지 말라고 하는 말입니다 . 당장 내일 아침이라고 세상은 종말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밤에라도 예수님이 재림하실 수 있는거예요. 내일 부터라도 이 세상의 마지막 심판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것들을 어린아이들의 동화식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재림, 종말, 심판 이러한 것들이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것이냐는 것에 대해서 실질적으로 생각을 하고요. 그렇게 해야되죠. 이런 것들을 공부하기 위해서 우리는 신학적인 공부가 필요하구요. 이러한 문제들이 그냥 저절로 우리의 머리 속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이 세상을 정확히 뚫어볼때 연관해서 생각은 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이런 애기는 할 수 없는데. 제가 또 다른 시간에 조금 시간에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그냥 요부분은 조금 접어두구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들에게 오는때 카이로스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떤 성숙한 의미 있는 시간. 또 다른 단어 생각이 나는 분이 있어요? 카이로스, 종말 없군요. 맞추는 분 있으면 제가 특별선물 하려고 했는데요. 없군요. 다행입니다. 파루시아. 예수님의 임재, 이런 단어이거든요. 카이로서, 엑크스탈로지 이런 것들이 다 연관되는 것들인데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들에게 오는 때를 우리가 기다리며 사는 것인데 요 부분을 어떻게 리얼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막연한 건 우리들은 이거를 아스트락트하게 생각하는 것인데 아스트락트가 아니라 리얼하게 좀 생각해 보자. 그게 정말 리얼하게 손에 잡히냐? 손에 잡히는 거는 아니지만 정말 내 운명 내 삶 전체를 끌어가는 영적인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느냐는 것이죠.
하나님의 나라가. 조금 설명을 해야되겠어요. 이런 것들은 이렇게 짧은 시간에 한두번 설명해서 되는 것도 아니구요. 저도 다 모르기 때문에 그냥 단편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삼위일체론적으로요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 삼위일체론적 관점에서 어떻게 해명하느냐 하는 것이죠. 아버지가 계시죠. 아버지는 이 세상을 종말론적으로 완성하시는 분이예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때가 바로 이때죠. 종말, 세계의 완성, 언제일까요? 어떻게 완성될까요? 세계의 완성이 정말 뭘까요? 생명의 완성이 뭘까요. 하나님이 어떻게 그런 것을 이루실까요? 우리가 생명속에서 있습니다. 흡사 물고기가 바다를 헤엄치듯이 우리가 생명이라고 하는 바다속에 들어가 있는거예요. 하여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들어와서 이렇게 헤엄치고 있는데 아직은 여기가 완성되지 않았잖아요. 죽을 수 밖에 없고 먹어야 되고, 그리고 그립고 사람이 그립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등등 이것을 완성이라고 할 수 없는데 하나님은 아버지는 창조자시니까 종말론적이다고 하면 늘 이건 궁극적이다. 혹은 성취다. 혹은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다. 그런쪽으로 여러분이 이 개념을 풍부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완성하는 사건이다.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들이 이러한 차원을 실제적으로 경험하시려면 지금 우리의 삶이 얼마나 불완전한가도 보고 이 완성을 하나님이 어떻게 이루실건가에 대한 설레이는 기다림, 그거를 아셔야 하는 것이죠. 그냥 이게 좋다는 것이 아니구요.
두번째 아들이죠. 아들은 요 옆에 나와 있는 단어네요. 그분은 재림하실 것이며 심판하신다. 아 이문제도 재림 그만 두고 심판, 여러분들이 옥황상제 생각하세요? 아니면 유황불이 펄펄 끓는 지옥불을 생각하세요? 제발 그런 것은 내려놓으세요. 심판이 무엇입니까? 이거는 진리가 드러나는 거예요. 진리, 생명의 알맹이, 가짜 생명이 아니라 진짜 생명이 드러나는 것, 그게 심판이죠. 우리가 심판을 받았다. 지옥에 갔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진리와 생명의 세계로부터 거부되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지옥불 이런 것 생각하지 마시고요. 고대인들이 그런 방식으로 말했을 뿐입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는 영이 잖아요. 성령은 우리가 뭘 깨닫게 하는 거죠. 인식하게 하는거죠. 진리를 알게하는 거죠. 성령은 종말론적 리얼리티, 종말론적 리얼리티를 알게 합니다. 정확한지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뜻은 틀리지는 않을 거예요. 성령이 그렇게 하시는 거거든요. 그때가 되면 우리는, 바울의 말을 다시 빌립니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서 실체를 봅니다 . 실체, 섭스탄스의 차원에서 실체가 아니라 리얼리티의 차원의 그거예요. 잠정적이지 않는, 목마르지 않는, 자기 안과 밖이 혼란스럽지 않는, 정말 일체가 되는 어떤 생명과 직면하게 되는거죠. 그게 뭔지는 아무도 그걸 정확하게 설영할 수 없습니다. 그건 부분적으로 비유라든지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을 하셨고 2천년동안 신학이 해명해 오고 있습니다. 네 이러한 하나님인데요. 하나님 나라는 아시죠. 바로 하나님 이예요. 하나님의 나라가 따로 있고 하나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라로 존재하고 나라는 통치고 통치는 힘이예요. 생명의 힘들이예요. 하나님은 저기 하늘에 따로 있고 그가 이렇게 여기를 통치해서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고 이 통치가 하나님예요.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곧 하나님이 일체가 되는거죠. 세계가 곧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고요. 크로노스, 카이로스의 그거는 뭐 실존적인 경험이니까 가능하죠. 문제는 이제 카이로스가 뭐냐 그러한 것들을 해명을 해야죠. 최우상씨가 댓글을 달은 그 이야기예요. 일반 연대기적인 시간 속에서 의미가 있는 하나님의 시간을 경험하는 거라고 하는데 뭐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 한 가지를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려야 하겠는데요. 하나니 혹은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들에게 와야 우리가 알게 됩니다. 그건 아까 애기한 것과 비슷하기도 하구요. 그 나라는, 그분은 우리는 지금 기다리는 거죠. 기다리는데. 그 나라 그 하나님이 누군지 어떤지를 우리는 그분이 와봐야, 와야 이미 와야 그를 알게 되는 거예요. 이상하네요. 내가 아까 생각할때는 이게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되어서 꼭 이야기를 해야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말하다보니 너무 시시한 이야기같기도 하구요. 그런데 아는 것 하구요. 실질적으로 그 세계에 들어가는 것 하고는 다르거든요. 네 되었습니다. 대충 시간이 되었구요.
그렇다면 결론을 내려야 되겠네요. 우리의 윤리의 근거, 우리는 어차피 행동을 하면서 살아야 되는데요. 삼위일체론적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들에게 오고 있다고 하는 사실, 그러한 희망속에서 오늘을 살면서 되는 거예요. 이런 세 차원, 삼위일체, 셋이면서 하나예요. 이 세 개가 어떻게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것인가에 대한 그러한 희망, 진리와 생명이 드러나는 그러한 심판, 아주 궁극적 실체를 우리가 알게, 인식하게 된다고 하는 그러한 기다림, 종말론적인 희망, 이런 것을 안고 오늘 우리 주변에서 사람들과 만나고 때로 투쟁하고 기다리고 사는거죠. 여러분의 행위에 절대적인 가치를 두지 말고 그렇다고 패배주의에 빠질것도 없고 이러한 희망을 갖고 하나님이 이루시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희망을 안고 그 기다림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세상에서 살 것인가 그러한 끊임없는 자기 성찰이 우리들에게 필요하겠죠. 예. 촛불정국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가 마땅히 감당해야 될 일은 감당하고 또 우리들은 새로운 차원에서 영성이 필요하니까 그 부분들도 놓치지 말고 일주일 동안 잘 사시고요. 목요일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수고했습니다. 마치겠습니다.
최근 등장한 시그널 뮤직, 우리 음악이 잔잔히 깔린 무대 위로 강사 목사님 등장, 첫 말씀, 캠코더 꼭 켜야죠.^^*
안녕하세요. 오늘 주일 잘 지내셨습니까? 6월도 오늘이 15일이니까 딱 15일 남았군요. 강의 숫자로만 하면 딱 네 번 남았습니다. 오늘 빼구요. 19, 22, 26, 29인데요. 후반기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여전히 생각중입니다 . 몇 달 전에 한번 제가 말씀을 드렸을 거예요. 이거를 라이브로 하지 않고 녹화를 해서 띄우는 방식으로 할까? 그렇게 하면서 수강료는 하신 분들은 계속하고 골치가 아파서 안되겠어요. 수강료 받고 말고 하는 것이 간단한 것이 아니고 수강료보다 사무정리하는데 에너지가 더 많이 나가는 것 같습니다. 요거 사무보는 사람이 한사람이 꼭 있어야 될 것 같더라구요. 이게 다비아가 앞으로 더 체계를 잡으려고 한다면 사무를 보는 사람이 한 사람이 있어야 될 것 같떠라구요. 문서를 작성하고 보내는 일들이 혼자서 하려고 하니 힘이 벅차더라구요. 그런 일들이 이렇게 생각과 시간들을 많이 빼앗기니까 중요한 것들을 놓치게 되고 집중력이 좀 떨어지기도 하구요. 그렇지만 유급 사무원 둔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잖아요. 하여튼 이런 저런 생각중입니다. 어떻게 해야되겠다는 생각이 없구요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되겠다고 생각하고 어쨌든 이 동영상은 그래도 6월 지나가기 전에 어떤 방식으로 결정을 해야되는데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좋은의견이 있으면 주시구요.
오늘 저희 샘터교회 설교가 사라와 하갈 아브라함 하갈 이런 관계에 얽혀진 이야기입니다. 잠간 그 이야기부터 오늘 풀어갔으면 좋겠어요. 전체적인 제목은요. 우리가 지금 두 시간에 걸쳐 기독교 윤리를 하고 있으니 다음과 같겠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기독교의 윤리 이 제목으로 잡겠습니다. 제목은 이렇게 잡아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방향이 달라질 것 같은데요. 결국은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놓고 이야기를 할 것 같아요. 설교에 나오는 이 에피소드가 윤리하고 연관되니까 이 두관계를 설명해 볼까 생각합니다 . 하나님의 나라, 이따가 다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만 또 짤막하게 이야기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니구요. 그래도 제가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고 맥락을 아시겠죠. 이거를 제가 확실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을 다 담을 수 없지만 그러나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느정도 그 것에 대해서 알게되면 그것을 뛰어넘어 버리는 힘을 의식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나라가 그런 거거든요. 네 이건 종말까지 계속해서 하나님이 곧 하나님 나라인데 그분이 그렇게 자기를 계시하시고 열어가실텐데요. 그런점에서 상당히 막막합니다 . 답답하기도 하구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가 이런 정도다 개념을 세울 수 있다고 말하면 또 그다음이니까. 끝없이 끝없이 새로운 어떤 지평들을 열어가기 때문에 사실은 이게 승산없는 게임이예요.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신학만 그렇겠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학문이 결국은 승부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작업밖에 안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어떻게 이야기하겠어요. 부분적으로 어떤 것을 비유적으로 어떤 흔적만 흔적만 겨우 붙잡고 이야기하는 거지 실제를 붙잡기는 불가능한 거예요. 여러분들 그걸 아예 그걸 전제하고 신앙생활을 해야되구요. 신앙생활만이 아니라 이 삶자체가 그렇습니다. 그냥 예수님의 옷자락을 살작 붙잡고 18년된 혈루증을 나은 여자라 할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몸을 붙잡을 수 없습니다. 그냥 흔적만 궁극적인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흔적만 말한다고 하는 점에서 답답하기도 하구요. 또 그런 점에서는 신기하기도 한거죠. 그러니까 늘 새로와지니까요? 뒤에 이야기를 좀 더 이야기를 해야될 것을 제가 미리 당겨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 나라와 윤리의 관계인데요.
오늘 샘터교회 설교에는 세사람이 나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다섯 사람이 나온다고 봐야 되겠네요. 아브라함, 하갈, 사라와 이스마엘, 이삭, 이스라엘은 야곱을 가르키죠. 사라는 이삭, 오늘 이야기는 이삭이 젖을 떼었을 때, 이유식인가요. 이유할때 그 순간에 벌어진 에피소드를 가르킵니다. 세 살때 보통 젖을 뗀다고 하는데. 성서 본문 여러분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사라가 이스마엘과 이삭과 노는 것을 보았어요.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린다. 번역된 것 같구요. 공동번역에서는 같이 논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 앞뒤 짜맞추어 보면 이삭이 세살이라면 이스마엘은 열일곱살입니다. 그리고 사라가 자기 아들과 이스마엘이 서로 놀고 혹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고 있다. 이미 열일곱살짜리가 세살 짜리를 놀리겠습니까? 이미 열일곱살이니까 집안 사정 잘 알테구요. 열일곱살이라 사라의 몸종이었으니까 이집트 여자니까요. 자기의 위치를 알겠죠. 홍길동 위치인가요. 어머니가 정실부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이삭을 골리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그건 중요한 것은 아니구요. 사라가 오늘 본문에 따르면 이스마엘과 이삭이 서로 놀고 있는 것을 보고 기분이 나빴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때가 바로 세살 잔치를 베풀고 바로 그랬다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한참후에 지나가서 점점 점점 오랫동안 상황을 많이 보고 사라의 심정이 뒤틀린거죠. 그 장면을 빨리 지나가야 되겠군요 그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핵심이 아니니까요. (차를 마시는데 숭늉마시듯이 후루룩 소리를 내며 마셨습니다. 숭늉마시듯이. 미안합니다.)
그 본문을 잘 읽으셔야 되게요. 읽을때. 성서기자들은 생략합니다. 중요하지 않는 것은 그냥 지나각요. 이렇게 저렇게 편집을 해서 편집의 묘미 이런 것을 잘 뜯어보면서 성서기자가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게 뭔가 이게 중요한 거예요. 성서 기자가요. 제가 언제인가 말씀을 드렸죠. 복음서도 마찬가지요. 다른 것도 다 그래요.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라든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나의 멍에는 가볍고 이러한 모든 예수님의 말씀들도 사실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인가 아닌가를 구분하기도 해야 한하는데 뭐 고거는 좀 어려운 문제고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성서 기자가 중요하다고 하는겁니다. 성서 기자가 왜 예수님의 말씀을 그렇게 인식했을까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실증적 사실을 우리가 파악하기는 불가능한 거예요. 예수님이 뭔가를 말씀하셨고 그 말들이 조금씩 구전되어 쭈욱 내려온 거를 성서기자가 잡아채 가지고 예수님의 생애 안에 넣고 글을 쓴거죠 기자가 중요한 거죠. 그런점에서요 하갈과 사라 아브라함 이야기 속에서도 성서기자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는가 그쪽으로 포커스를 맞추어야 됩니다 . 그것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닌데 제가 자꾸만 옆으로 나가네요.
사라가 볼때 자기 아들과 이스마엘이 서로 놀고 하는 것이 기분 나빠서 성서에 보면 이스마엘도 자기 아들과 똑 같이 상속자가 되는 것디 불만이 있어서 결국 아브라함에 모자를 내쫓아 버리라고 하는 거잖아요. 굉장히 못됐습니다. 그냥 보면 못된거죠. 그 말을 듣고 아브라함도 물론 성서를 보면 괴로와 했다고 하지만 아내의 말에 넘어간 것인지 아브라함 스스로도 판단이 들어서 그런 것인지 모르지만 결국은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내쫓아 버리거든요. 그런데 내쫓아 버릴 때에도 이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이미 하란땅에 있을때 아버지 데라와 같이 있으면서 제법 재산을 불렸습니다 .재테크에 능한 사람 같아요. 그러니까 구약에 나와있는 많은 부자들, 정치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야욕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이 너무 이 사람들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면 곤란해요.
요셉같은 사람도 문제 많은 사람이라는 것 여러분 아시죠. 이집트에 들어가서 꿈 해몽하다가 출세, 국무총리까지 올라가게 되었는데 거기는 여러가지 많은 다른 사정들이 있었을 겁니다. 요셉이 보디발 장군의 아내 유혹을 딱 뿌리치고 좋은점, 꿈꾸고 말을 하고 있기는 있습니다만 과연 요셉이라고 하는 사람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는 냉정하게 봐야 하는거거든요. 이집트에 들어가서 7년동안 풍년들었을때 싸게 싸서 매점매석한거죠. 흉년이 들었을때 열배 스무배 장사를 한거거든요. 그 당시는 자유농이었었는데요. 이 사람들이 모두 농노가 되었다는 거 아닙니까. 이 모든 것이 요셉을 통해서 된 것이거든요. 이러한 경제정책을 통해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라가고 물론 그전에 꿈을 해몽해서 그렇게 올라갔습니다만 그러나 이러한 정책을 폄으로서 결국은 그렇게 된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이 요셉을 이상화하지 말아라. 요셉의 꿈 이런 방식으로 신자들에게 설교를 한다는 것은 성서를 견강부회라고 말할 수 있겠죠. 성서의 기자는 사람에 관해서는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사람은 거기서 거기니까 아시죠? 위인과 일반 소시민들의 차이가 그렇게 크지도 않아요. 물론 보기에 따라서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지만 또 그 사람이 능력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시운이 맞아서 영웅이 나오거든요.
아브라함이 재테크에 능했습니다. 음... 또 누구야? 솔로몬, 하여튼 솔로몬 이 사람도 문제 많은 거 몇 번 설교에 했을 테니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성서기자가 솔로몬 전승을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끝냈는지 잘 보세요. 여러분들이 아마 솔로몬이 아무리 많이 문제가 많다고 하더라도, 요 문제는 3달전 서울 오프모임에서 공부한 내용인 것 인데요. 솔로몬이 다른데도 문제가 많고 마마보이 기질이 있었고 어머니 밧세바와 나단의 술수, 계략에 의해서 왕이된 어부지리를 얻었는데요. 솔로몬이 여러가지 문제가 있더라도 아, 그 지혜를 구한 것은 그 사람 괜찮은 것 아니냐 여러분 그러시겠죠. 아 일단, 이런 애기, 자꾸만 진도는 안나가고 다른 이야기하네요. 왜 문제냐면 지혜를 구했다고 하는 것에, 그냥 간단하게 두가지만 관점만 이야기하겠습니다.
하나는요. 지혜를 구했다고 하는 것은 꿈이이야기예요. 꿈, 실제가 아니라 꿈이라는 겁니다. 이 꿈은 개꿈이라는 것, 가능성도 많구요. 꾸며낸 이야기일 가능성도 많고요. 무의식을 발로가 꿈이 잖아요. 솔로몬이 자기 왕권의 도덕성, 자기가 왕이 되었다고 하는 정당성, 그런 것을 얻지 못했습니다. 사실은요.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 꿈꾼 것으로 하나님에게서 정당성을 받았다 이렇게 민중들을 설득하는거죠. 이러한 이야기는 구약성서만이 아니라 이집트 문명이라든지 심지어는 잉카 문명에 있었던 어떤 문서에도 비슷한 이야기들이 나온다고 합니다. 왕권을 민중들에게 설득시키기 위해서 왕이 신으로부터 받은 어떤 이야기를 하는거죠. 요 구조가 비슷해요. 솔로문의 꿈에 대해서는 너무 이렇게 큰 비중을 두지 마시라는 것이죠. 정치가들의 어떤 정략적인 자기 해명일 가능성이 많다.
두 번째 이 지혜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성서적에서 볼 때 기본적으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뱀처럼 슬기로워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그거와는 다른 이야기예요. 뱀이 아담과 이브를 유혹할때 이야기를 하시죠?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들이 눈이 밝아져서 지혜로와진다. 지혜는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인간의 탐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해석이 100% 맞는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구약성서학자들이, 제가 조직신학을 한 사람이라기 때문에 성서신학에는 많이 모자란 사람인데. 구약성서학자들이 엉뚱한 해석이다라고 할지 모르지만 제 눈에는 그렇게 보입니다. 권력을 주었다거나 부자가 되었다거나 그런 것들을 하나님의 축복인것처럼 일치시켜서 성서를 보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이야기예요. 아브라함이 재테크에 용했습니다. 갈대아 우르까지 를 떠나서 하란까지 갔잖아요. 아버지 모시고 조카 롯도 있구요. 하란에서 거상, 상당히 돈을 벌었습니다. 가나안땅에 와서 더 많이 벌었잖아요 성실해서 돈을 벌을 수도 있고 부자가 되는 것은 성실해서 될 수도 있고 남을 기만, 속이는 행위도 필요하거든요. 기만과 성실성과 운, 이러한 것들이 종합적으로 맞아 떨어지면 되는거구요. 어느 하나라도 안되면 내가 보기에는 힘들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부자였었는데도 하갈가 이스마엘에게 내쫓으면서요. 약간의 음식, 길 가다 먹으ㄹ수 있는 떡 덩이 얼마하고 물 한부대 주었다고 성서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서 기자는 굳이 이렇게 까지 말할 필요도 없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어떤 것을 의도하고 말하는 거죠.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주 비장한 인간처럼 거기 비춰지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확 줄여야되겠네요.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죠.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내로서 89살 되었을때 너가 임신하리라 하였을때 피식 웃었다가 나중에 받아들였고 1년 후에 임신한 다음에 아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웃게 하시는구나. 그러한 아브라함 정도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믿음의 자손 아브라함의 아내로서 손색이 없을 정도의 여인이잖아요. 사라하면 우리들에게는 늘 좋은 의미로 다가옵니다. 이, 이렇게 훌륭한 사람들이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하는 행동을 보세요. 그러니까 이건 조금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성서기자가 왜 이렇게 표현했는지 참 특이하다. 성서기자의 눈이 날카롭기도 하고 뭔가를 우리들에게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 아브라함같이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아니고 평범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나 같은 경우라고 하더라도 한 밑천 떼어서 주고요. 먼길 갈 동안 낙타도 주고요. 한 밑천해갖고 모자가 좀 기반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줄 겁니다. 이것을 안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중간에서, 브엘세바에서 물도 다 떨어지고 죽음 직전까지 가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키시거든요.
지우고.. 저는 그런 점에서 인간의 행위, 윤리적이라고 하는 말을 붙여야 되겠군요. 오늘 샘터교회에서 2부 순서로 붓글씨 공부를 했는데도 글씨가 잘 안 써지네요. 이게 근본적으로 내가 보기에는 불가능하다. 윤리 허무주의라고 할까요? 윤리 허무주의? 윤리란 웃기는 이야기. 허무주의는 아닙니다. 철저하게 윤리적인 어떤 나이브한 도덕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예요. 신앙에 근거한 프락시스, 실천에 대한 이야기하는데요. 그런 점에서 진보적인 목사들과 같이 연계해서 활동하고 있고 지금 촛불시위 이런 데서도 부분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대의적인 문제에서 동의하고 이러한 남북문제도 그렇고 등등으로 다 전향적으로 이 역사를 개혁해 나가는데 앞장서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러나 여기서 말씀드리는 것은 어떤 궁극적인 사실 앞에서 보는 거죠. 하나님이라고 하는, 우리의 삶은 언제나 하나님을 늘 전제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윤리적 행위라고 하는 것이 가능하겠냐? 그 애기죠.
지난 번 시간에 제가 그 판넨베르크의 논문을 인용하면서 기독교 윤리의 근거가 하나님의 나라인데 다음과 같은 의미라고 했습니다. 몇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잠정성이라고 했거든요. 인간행위의 잠정성, 우리가 한 행위들이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서 볼 때 우리들의 행동이 잠정성이다. 저는 그것이 불가능한 거시 아니냐 노골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유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이건 잠정성이라는 것을 포함해서 잠정성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의미를 아시죠? 일시적이고 완전한 것은 아니죠. 잠정성이라는 것을 좀 더 설명을 할께요. 하나님 나라와 연관해서 우리 기독교인들의 세계인식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세계의 모든 것은 잠정적이라고 보는 거예요. 어느것도 여기서 제외되는 것은 없습니다. 율법도 다 잠정적이거든요. 율법이 사실은 윤리문제구요. 실정법을 포함한 불문법까지 포함해서 다 연관되는 건데요. 아, 다 잠정적이라고 보는 겁니다. 국가도 잠정적 이예요. 대한민국이 영원하겠습니까? 기독교인은 애국자가 될 수는 있지만 쇼비니즘이라고 하나요. 아주 배타적인 민족주의에 빠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그 너머에 있는거기 때문에. 심지어 교회도 잠정적인 거예요. 교회, 더 나가서 기독교 교리도, 가장 진리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의 교리도 여전히 잠정적이라는 것은 아셔야합니다. 물론 이런 것과는 차원이 다른 거죠. 율법이나 국가와는 차원이 다르지만 기독교 교리도 잠정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하나님의 인식이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고 하는 겁니다. 오늘 이 대답 두개 연관되는 건데. 교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의롭다고 인정하심, 하나님의 교회에 때한 뜻, 섭리, 하나님이 어떻게 종말에 하실 것이라는 전반적인 것에 대한 우리 인식의 논리적인 해명이거든요. 우리가 기본적으로 하나님, 종말론적으로 자기를 계시하게 될 하나님을 완전히 인식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 인식에 기초한 논리적 해명인 교리가 완전할 수 있겠어요.
이게 좀 신학적 표현이라 잘 들어오지 않는다면 조금 직접적으로 말씀을 들어볼까요? 어떤 것을 예를 들어볼까요? 삼위일체 이건 말하기가 좀 그렇기가 한데요. 그래도. 삼위일체 이거는 아주 종요한 하나님을 이해하는 신학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과연 이걸로 하나님을 완전하게 해명한거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태까지는 최선인거죠. 여태까지는 최선인거죠. 그러나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러한 개념이 하나님을 정말 명실상부하게 그대로 아주 실증적으로 해명한 거냐는 질문 앞에서는 그렇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본질이 동일하고 위격이 삼위인, 삼위로 구분되는 이러한 하나님을 하나님의 존재 신비를 우리가 이렇게 애기하고 있을뿐이지 그 하나님의 존재 신비를 우리가 손아귀에 잡을 수 없는 거죠. 그거는 이제 나중에 하나님이 온전하게 자기를 드러내신다면 그때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이니까 그때 가서 말할 수 있는 것이죠. 잠정성이라고 하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 되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 하는 일들이 근거가 없다는 말이냐? 절대 그거는 아니니까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잠정적이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역사 안에서 우리의 인식, 우리의 실천, 치열한 노력들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들에게 일어나기를 기대하면서 또 거기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역사의 과정 속에 우리가 들어있다는 점에서 우리들에게는 좀 설교조로 이야기한다면 두 가지 태도가 필요한 거죠. 하나님의 구원역사속에 우리가 분명히 두발을 딛고 있다는 그러한 확신이 필요하구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나의 인식은 늘 잠정적이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거울을 보는 것처럼 지금은 그렇다. 그러나 부분적이고 잠정적이지만 하나님과 온전한 소통이다. 확신에만 빠지다 보면 열광적이 되어버려요. 또 인식론적인 한계에만 자구만 떨어지게 되면 그러면 인제 불가지론에 빠지게 된다거나 냉소주의에 빠지게 된다거나 그렇게 되는거죠. 여기에 긴밀한 긴장을 갖고 한계를 알면서도 하나님과의 실질적인 소통과 경험들이 우리들에게 필요하다는 거죠.
이 윤리 불가능성을 저는 두 가지로 생각을 하는데요. 하나는 우리는, 우리의 행위라고 하는 것은 위선적일 때가 많다. 많은 것이 아니라 제가 보기에는 거의 대다수가 위선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선, 정말 우리가 선에 돌입해서 선을 행할 수가 없으니까요. 우리는 선을 행하면서도 여전히 자기를 의식하거든요. 예수님이 오른 손이 하는 일을 모르게 하라는 말씀은 자기가 선을 행하는지도 아닌지도 모르는 상태를 말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아주 우리는 머리를 잘 돌리잖아요. 선한 것 아닌것해서 자악 골라서 해갖고 내가 이렇게 하면 이런 정도로 인격적인 사람이지 기독교인이니까 이런 정도는 해야지 이런 것 많잖아요. 목사로 살지만 그렇더라구요. 여기서 잘 벗어나지가 않더라고요. 아마 여기서 벗어난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하나가 없다고 하는 것은 과장이지만 거의없다, 아니 하나도 없다고 하는 말이 맞을겁니다. 정말 성령과 일치가 되어서 아시시의 프란시스코라든지 테레사라든지 등등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리고 이름없이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결국은 어느 부분에서는 자기를 의식했을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 정확하게 잘 알고 애기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늘 사람들은 자기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거니까요?
어쩌면 내가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그러한 어떤 완전한 성화, 완전한 성화의 상태에 들어간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걸 제가 열어놓기는 하는데 있다고 하더라도 아주 특이한 경우구요. 그런 경우라고 한다면 완전한 엑스타시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보거든요. 거의 자학에 이를 정도로의 자아의식이 없는 사람들이 경지, 천치가 되던지 마약중독자가 되든지 그런 방식으로 영과 소통해야 되는데 과연 그게 바람직한 기독교인의 삶이냐에 대해서는 제가 확신이 없습니다. 신비주의자들 중에서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중세기에는. 자학과 금욕속에 빠지는 거거든요. 자기 육체를 학대하면서 다리를 잘라낼 정도로 하면서 영적인 세계를 경험하려고 하는 것이죠. 여성 신비주의자들중에서는 폐결핵 나온 침, 가래죠. 그런 것을 취함으로서 자기를 없애는 신비의 경험도 했다고 그래요. 아주 그렇게 극단에 자기 자신을, 몰아죠. 몰아 맞나요? 그렇 하지 않으면 인간은 평상적으로 생각하는 한 늘 머리를 굴린다. 우리의 행위라고 하는 것이 아무리 옳바르다고 하더라도 위선에 빠질때가 많이 있는거죠. 이 말은 기본적으로 곧 우리가 이타적일 수 없다. 이타적인 삶, 완전한 이타, 그런점에서 저는 우리의 행위라고 하는 것이 한계가 있는 거지. 완전하게 윤리적으로 살기 힘들다.
두번째는 아까 제가 인식의 문제를 해서 연관되는 건데요. 기본적으로 우리는 인식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가 선한의지로 행위를 했을 때 어떤 결과를 맺을 지 우리가 모르는 거예요. 좋은 의지로 우리가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 사람에게 나쁘게 작용할 수 있거든요. 이런 점에서, 제가 이것을 충분하게 생각한 것은 아닌데 이런 점에서 우리가, 우리의 윤리적인 행위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 잠정적이다. 앞시간에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어쨌든 우리가 행위를 하면서 살아야 되는데 행위라고 하는 것은 윤리적인 가치론적 판단이니까요. 이게 행위가, 가치론적 판단 이게 윤리거든요. 이게 행위를 하면서 살아야 되는데 밥먹는다거나 사람을 만난다거나 모든 것이 행위 잖아요. 관계 행위인데요. 우리가 가능한데로 같이 있는 한 행위를 해야 하는데요. 그러니까 이건 우리가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거죠? 여태까지 윤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주 괜찮는 것, 이것을 해야 하는데 과연 이것이 가능한가 하는 점에서는 내가 보기에는 좀 힘들다는 것을 말씀드렸구요. 고래도 우리가 해야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위선이라도 필요할 때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저는 지금, 제 말씀이 전달하기가 쉽지가 않는데, 자칫하면 아 윤리적인 행위가 필요 없다고 전달될까봐 의식하면서 말하다 보니까 잘.. 조심스럽습니다. 그건 아니면서도 절대적인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행위라고 하는 것이 과연 윤리적인 말을 붙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저는 이런 점에서는 무위이무불위라고 하는 노자가 한 이야기거죠. 무위이무불위. 아하 개발 새발 그렸네요. 그런데 무위, 노자가 한 이야기, 어떤 의도적으로 하지 않음으로서 불위, 하지 않는 것은 없다. 나는 그 사람의 그 이야기를 듣고 야 성령론적인 윤리하고 딱 맞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노자와 장자가 사실은 윤리가 필요없다고 하는 말을 하려고 했겠습니까? 사람으로서는 그건 아닌 이야기죠. 그러나 윤리적이라고 하면서 하는 모든 사람들의 행위를 보니, 그러니까 아까 제가 말씀드린 위선에 가까운 거거든요. 우스운 거거든요. 그렇게 하면서 자기가 자선을 베풀었다. 어떻게 했다 사람들을 틀로 가두려고 하는거죠. 삼강오륜이라든지 삼강오륜, 이거는 바로 율법예요. 토라, 십계명하고 같은거예요. 이런 것들은 오랫동안 인간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인간의 행위를 가장 가치 있게 끌어가기 위한 최소한의 규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건 일종의 인류문명의 열매들이죠. 그래서 문명이 있는 사회에서 이러한 것들이 많이 발전하게 된 거예요. 그것이 법이죠. 옛날에는 법전이라고 그랬죠. 함무라비 법전이나 로마법, 구약성서의 십계명등이 다 문명사회가 만들어 놓은 하나의 법 규범, Norm그러니까 위(爲)죠. 어떠한 것을 해야 한다는 거죠. 동서양을 따라서 내용은 좀 달라지겠습니다만 어쨌든 그러한 틀이 있어야 인간다와지고 그 사회가 유지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노자와 장가가 보기에는 그러한 틀 자체가 우습다는 것이죠. 그게 정말 인간을 살리냐 그렇지 않다는 쪽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어떤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노자와 장자가 이야기하는 대로 살면 그건 또 불가능한 이야기예요. 이건 어떤 지평에 있어서 진리예요.
바울의 이야기도 그런점에서는 연관이 됩니다. 이신칭의라고 그러잖아요. 믿음이예요.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것인데요. 율법을 행함으로 의로움을 받는다고 하는 율법신앙으로부터 믿음으로, 이거는 행위는 아니죠. 물론 여기에 행위가 열매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거는 서로 대립되는 개념에서 그거는 빼놓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거는 나중에 필요한거죠. 행위가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 무위이무불위 개념하고 통하는 거죠. 그러니까 공자나 이런 사람들, 공자의 가르침은 구약 율법하고 통하고 노자, 장자는 오히려 바울. 복음의 가르침하고 통합니다. 여기는 어떤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틀, 규범으로가 아니라 온전한 자유, 이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성령의 감동, 성령의 충만, 여러분 성령을 생각할 때 자유를 꼭 생각하세요. 성령은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영이니까 그런 관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결국 기독교의 윤리는 무엇을 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그런 차원이라기보다도 우리가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선택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선택해야 하기는 하는데요. 우리는 궁극적인 어떤 사태앞에서 우리의 행위의 잠정성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행위의 근거를 놓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를 놓는 거죠.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 네 이게 말이 되나요? 전달이 되었나요. 말을 하면서 다른 생각을 하느라고 제가 하는 말을 똑바로 했는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네. 기독교의 윤리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고 하는 것을 전제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우리의 윤리적 근거를 놓아야 됩니다. 아 그게 정확한 표현은 아닌데 어떤 것을 말할려고 하기는 하는데요. 잘 정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틀린 말은 아니예요. 제가 너무 도식적으로 제가 말씀을 드려갖고 다르게 여러분에게 와 닿을 수 있는 설명이 없을까 그것을 지금 머리속에 생각하는 중입니다 차 한잔 다시 마시겠습니다. 딸그락 딱, 아 좀 덥네요. 좀 벗고. 차를 마셨더니 좀 덥네요.
음.. 정리를 해야 되겠군요. 지금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윤리의 근거다 인제 이걸 이야기하는 중인데 제가 강의, 오늘 말씀드리기 위해서 조금 요약을 했거든요. 하다가 언뜻 이런 생각이 나서 예를 하나 들려고 합니다. 우리 행위의 잠정성, 우리가 아무리 좋은 일을 하더라도 결과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우리가 좋은 일을 하더라도 자기 의를 드러내려고 한다는 이 근본적인 한계, 이런데서 도대체 기독교의 윤리라는 것이 가능하느냐 그런 것을 전제하구요. 그런 토대에서 결국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게 오는 것에 대한 기다림이 아니냐?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와야만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지 이것이 없이 우리가 이 세상을 일종의 개량, 개량함으로서 참된 선을 생산해 낼 수 있겠느냐 하는 그런 질문입니다. 우리 스스로 계량해내는 방식으로는 제가 보기에는 불가능하고요. 하나님 나라가 인제 우리에게 오기를 기다려야 하는데요.
무슨 예를 들자는 거냐 하면요. 춘향전이예요. 사랑을 나눴던 남자가 서울로 과거보러 떠났고 여기서 남원에 남아 있던 춘향이가 사또의 수청을 들라고 하는 명을 거절하고 감옥에 갇혀있고 그러한 등등의 일이 있다가 모든 문제들이 일시에 해결되었 잖아요. 암행어서 출두요 하는 것으로 다 해결되었다 말입니다. 저는 이런 것하고 비슷한 것 같아요. 예수님이 오신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고 하는 것은 춘향이가 살아가던 모든 질곡과 한계들 일시에 해결되는 되는 것이 사랑했던 남자가 암행어사로 출현했던 것처럼 우리들의 그러한 삶도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개입하는 것으로만이 해결될 수 있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다 그렇게 알고 계시죠. 이게 종말이라고 하고요. 예수님의 재림이라고 하고요. 또 다른 단어가 여러분 생각나는 거 있어요? 심판, 이런 단어들을 여러분들이 너무 낯설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기독교 신앙은 늘 낯설게 생각하기는 해야 하는데 제가 낯설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너무 먼 이야기로 생각하지 말라고 하는 말입니다 . 당장 내일 아침이라고 세상은 종말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밤에라도 예수님이 재림하실 수 있는거예요. 내일 부터라도 이 세상의 마지막 심판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것들을 어린아이들의 동화식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재림, 종말, 심판 이러한 것들이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것이냐는 것에 대해서 실질적으로 생각을 하고요. 그렇게 해야되죠. 이런 것들을 공부하기 위해서 우리는 신학적인 공부가 필요하구요. 이러한 문제들이 그냥 저절로 우리의 머리 속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이 세상을 정확히 뚫어볼때 연관해서 생각은 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이런 애기는 할 수 없는데. 제가 또 다른 시간에 조금 시간에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그냥 요부분은 조금 접어두구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들에게 오는때 카이로스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떤 성숙한 의미 있는 시간. 또 다른 단어 생각이 나는 분이 있어요? 카이로스, 종말 없군요. 맞추는 분 있으면 제가 특별선물 하려고 했는데요. 없군요. 다행입니다. 파루시아. 예수님의 임재, 이런 단어이거든요. 카이로서, 엑크스탈로지 이런 것들이 다 연관되는 것들인데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들에게 오는 때를 우리가 기다리며 사는 것인데 요 부분을 어떻게 리얼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막연한 건 우리들은 이거를 아스트락트하게 생각하는 것인데 아스트락트가 아니라 리얼하게 좀 생각해 보자. 그게 정말 리얼하게 손에 잡히냐? 손에 잡히는 거는 아니지만 정말 내 운명 내 삶 전체를 끌어가는 영적인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느냐는 것이죠.
하나님의 나라가. 조금 설명을 해야되겠어요. 이런 것들은 이렇게 짧은 시간에 한두번 설명해서 되는 것도 아니구요. 저도 다 모르기 때문에 그냥 단편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삼위일체론적으로요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 삼위일체론적 관점에서 어떻게 해명하느냐 하는 것이죠. 아버지가 계시죠. 아버지는 이 세상을 종말론적으로 완성하시는 분이예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때가 바로 이때죠. 종말, 세계의 완성, 언제일까요? 어떻게 완성될까요? 세계의 완성이 정말 뭘까요? 생명의 완성이 뭘까요. 하나님이 어떻게 그런 것을 이루실까요? 우리가 생명속에서 있습니다. 흡사 물고기가 바다를 헤엄치듯이 우리가 생명이라고 하는 바다속에 들어가 있는거예요. 하여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들어와서 이렇게 헤엄치고 있는데 아직은 여기가 완성되지 않았잖아요. 죽을 수 밖에 없고 먹어야 되고, 그리고 그립고 사람이 그립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등등 이것을 완성이라고 할 수 없는데 하나님은 아버지는 창조자시니까 종말론적이다고 하면 늘 이건 궁극적이다. 혹은 성취다. 혹은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다. 그런쪽으로 여러분이 이 개념을 풍부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완성하는 사건이다.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들이 이러한 차원을 실제적으로 경험하시려면 지금 우리의 삶이 얼마나 불완전한가도 보고 이 완성을 하나님이 어떻게 이루실건가에 대한 설레이는 기다림, 그거를 아셔야 하는 것이죠. 그냥 이게 좋다는 것이 아니구요.
두번째 아들이죠. 아들은 요 옆에 나와 있는 단어네요. 그분은 재림하실 것이며 심판하신다. 아 이문제도 재림 그만 두고 심판, 여러분들이 옥황상제 생각하세요? 아니면 유황불이 펄펄 끓는 지옥불을 생각하세요? 제발 그런 것은 내려놓으세요. 심판이 무엇입니까? 이거는 진리가 드러나는 거예요. 진리, 생명의 알맹이, 가짜 생명이 아니라 진짜 생명이 드러나는 것, 그게 심판이죠. 우리가 심판을 받았다. 지옥에 갔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진리와 생명의 세계로부터 거부되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지옥불 이런 것 생각하지 마시고요. 고대인들이 그런 방식으로 말했을 뿐입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는 영이 잖아요. 성령은 우리가 뭘 깨닫게 하는 거죠. 인식하게 하는거죠. 진리를 알게하는 거죠. 성령은 종말론적 리얼리티, 종말론적 리얼리티를 알게 합니다. 정확한지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뜻은 틀리지는 않을 거예요. 성령이 그렇게 하시는 거거든요. 그때가 되면 우리는, 바울의 말을 다시 빌립니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서 실체를 봅니다 . 실체, 섭스탄스의 차원에서 실체가 아니라 리얼리티의 차원의 그거예요. 잠정적이지 않는, 목마르지 않는, 자기 안과 밖이 혼란스럽지 않는, 정말 일체가 되는 어떤 생명과 직면하게 되는거죠. 그게 뭔지는 아무도 그걸 정확하게 설영할 수 없습니다. 그건 부분적으로 비유라든지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을 하셨고 2천년동안 신학이 해명해 오고 있습니다. 네 이러한 하나님인데요. 하나님 나라는 아시죠. 바로 하나님 이예요. 하나님의 나라가 따로 있고 하나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라로 존재하고 나라는 통치고 통치는 힘이예요. 생명의 힘들이예요. 하나님은 저기 하늘에 따로 있고 그가 이렇게 여기를 통치해서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고 이 통치가 하나님예요.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곧 하나님이 일체가 되는거죠. 세계가 곧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고요. 크로노스, 카이로스의 그거는 뭐 실존적인 경험이니까 가능하죠. 문제는 이제 카이로스가 뭐냐 그러한 것들을 해명을 해야죠. 최우상씨가 댓글을 달은 그 이야기예요. 일반 연대기적인 시간 속에서 의미가 있는 하나님의 시간을 경험하는 거라고 하는데 뭐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 한 가지를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려야 하겠는데요. 하나니 혹은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들에게 와야 우리가 알게 됩니다. 그건 아까 애기한 것과 비슷하기도 하구요. 그 나라는, 그분은 우리는 지금 기다리는 거죠. 기다리는데. 그 나라 그 하나님이 누군지 어떤지를 우리는 그분이 와봐야, 와야 이미 와야 그를 알게 되는 거예요. 이상하네요. 내가 아까 생각할때는 이게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되어서 꼭 이야기를 해야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말하다보니 너무 시시한 이야기같기도 하구요. 그런데 아는 것 하구요. 실질적으로 그 세계에 들어가는 것 하고는 다르거든요. 네 되었습니다. 대충 시간이 되었구요.
그렇다면 결론을 내려야 되겠네요. 우리의 윤리의 근거, 우리는 어차피 행동을 하면서 살아야 되는데요. 삼위일체론적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들에게 오고 있다고 하는 사실, 그러한 희망속에서 오늘을 살면서 되는 거예요. 이런 세 차원, 삼위일체, 셋이면서 하나예요. 이 세 개가 어떻게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것인가에 대한 그러한 희망, 진리와 생명이 드러나는 그러한 심판, 아주 궁극적 실체를 우리가 알게, 인식하게 된다고 하는 그러한 기다림, 종말론적인 희망, 이런 것을 안고 오늘 우리 주변에서 사람들과 만나고 때로 투쟁하고 기다리고 사는거죠. 여러분의 행위에 절대적인 가치를 두지 말고 그렇다고 패배주의에 빠질것도 없고 이러한 희망을 갖고 하나님이 이루시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희망을 안고 그 기다림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세상에서 살 것인가 그러한 끊임없는 자기 성찰이 우리들에게 필요하겠죠. 예. 촛불정국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가 마땅히 감당해야 될 일은 감당하고 또 우리들은 새로운 차원에서 영성이 필요하니까 그 부분들도 놓치지 말고 일주일 동안 잘 사시고요. 목요일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수고했습니다. 마치겠습니다.
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오늘도 개구리 소리가 들리네요.
이런 세계가 좋군요.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그렇게 말씀하셨다면서요.
보기에 좋았다.
기독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큰 긍정에서 시작하는 것 같네요.
그런 삶이 인도와 한국의 모든 이들에게 일어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