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시간이 되었습니다.

지난 세 시간에 걸쳐서 우리는 초기 기독교의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우리가 예상하는 것과는 다르게 그당시 초기 기독교 아직 기독교라 말붙일 수 없는 아주 원초적 공동체 그 시대에는 유대교와 예상하기 힘들 정도로 가까왔다. 우리는 지금 생각할 때 기독교와 유대교가 상당히 다르다고 보고 있고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과 바리새인과의 관계가 많이 그랬다. 성서를 통해서 보더라도 유대교가 처음부터 다르다고 느꼈고 지금도 유대교가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근원적인 사실에서 볼때 기독교와 유대교는 처음부터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생각과 다르다. 그 문제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기독교가 뭐꼬? 하는 introduction에서 많이 할애할 수 없다. 그냥 기독교라고 하는 우리의 정체성 이런 것들이 유대교와 처음부터 다른 것이 아니었고 그 모판으로 해서 시작했다는 사실을 한번 짚으려고 말씀을 드린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조금더 본격적으로 기독교가 뭐냐하는 문제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야 하겠다. 그 출발점은 뭐니해도 예수님이다. 예수님이 누구냐 하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도 한번 짚은대로 예수님이 기독교회를 만들라고 하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럴 의향이 전혀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럴 의향이 없었다는 그럴 가능성이 훨씬 높다. 예수님은 온전히 하나님의 나라에 집중하셨다. 하나님의 나라. 여러분이 앞으로 많이.. 글씨 쓰는 마우스를 하나 얻었는데 안 끼겠습니다. 다운안되려나 모르겠습니다. 껴 볼게요. 조금 움직일때마다 큰 소리. 크게 들리셨나요? 하나님의 나라. 아직도 익숙하지 않다. 바실래아하고요, 투 데오.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전적으로 매달리셨다. 참 그렇다. 강의하면서도 계속 느끼고 저도 느끼고 강의를 들으시는 여러분들도 느끼겠습니다만 강의 용어 하나하나에 대한 전이해가 충분하게 뒷받침되지 않으면 강의의 많은 부분들을 놓치게 된다. 그런 단어, 개념이 나올때마다 그런 것들을 다 설명하면서 나가면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어떤 때는 제가 잠시 멈춰서 그걸 설명할 때도 있고 어떤때는 그냥 지나갈 때도 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이해하는 정도만큼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의 관계. 이것만해도 한 학기동안 공부해야 될 내용들을 그 안에 담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 그게 과연 무엇인가? 예수님이 첫 번 회당에 와서 말씀을 전하실 때 한 그 내용들도 그렇고 아예 회당에 들어가시기 전에 처음 공생애 시작하면서 던지신 말씀도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 마음을 바꾸어라. 회개하라 마음을 바꾸어라. 메타노이아인데 이것은 도덕적인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중심을 다른데다 옮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쪽으로 옮기는 것이다. 도덕적인 변화 이런 것들은 세례요한의 하나님의 나라 이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그것을 뛰어넘는 전폭적인 하나님의 통치와 은총을 선포하셨다. 공생애 첫마디를 그렇게 하셨다. 공생애 계속해서 그 기준에 따라 사셨다. 과연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해를 어디서 가져오셨을까?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 이런 문제들을 우리가 찬찬히 잘 이해해가야만 성서를 바르게 알 수 있다. 성서가 다 그런 것 바탕 놓고 하는 것이다. 그럴뿐만 아니라 여기 설교하시는 목사님들도 계실텐데 이러한 개념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설교에서 우리가 방향을 놓치지 않고 잘 잡아 나갈 수 있다. 제가 설교 비평할 때 윤리적 도덕적 설교는 주일 공동예배에 행하는 케리그마 설교에서는 맞지 않다고 그런 애기를 좀했다. 그 이야기는 바로 설교가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해야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얼마나 도덕적으로 살아서 이 땅에 그러한 정의로운 세계를 이루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주 배타적이고 하나님의 전적인 통치를 가리킨다. 그런 힘 앞에서 우리는 뭘 어떻게 하느냐? 우리는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을 설계, 프로그램에 거기에 대개 마음을 두고 사는데.. 거기로부터 다른데다 마음을 둬라. 하나님나라에 마음을 두어라.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엄청나고 절대적인 거냐에 대한 이해. 이런 것들이 일단 우리에게 중요하다.

며칠 동안 제주도에서 파도를 실컷 보았다. 지구의 3/4정도가 바다인가? 물이 어떻게 유래되었을까? 어떤 물리학 DVD를 잠간 보니까 지구가 불덩어리였을때 이 불덩어리에서 나온 연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 수 천년동안 비가 되어 내려왔다.그것이 바다가 되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복잡한 물리학적 사연들이 개입되어 있다. 어쨌든 그런거다. 그런 바다 앞에서 우리가 물 한바가지 더 떠낸다 붇는다는 것이 바다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는 생각을 언뜻했다. 우리가 믿음이 없어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가능성이 많다고 말했다. 이 말도 사실은 자칫하면 오해받을 수가 있지만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끌어 내냐 포기하는가 그럴 말할 것이 못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믿음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전적으로 바람처럼 우리의 기대에 부응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뛰어 넘어서 하시는 전적인 힘이다. 어떤 것과 연관 시켜서 설명을 할까. 제가 왜 이런 이야기들을 조금 책임감없이... 왜 책임감이 없냐는 표현이냐 하면 여러분들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을 거의 절대적인 명제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게 완전히 틀린 말이 아닌데 그것과 다른 이야기를 하다보면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아 신학적으로 위험성이 있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신학적 위험성을 늘 감수하고 살아야 한다. 백척간두 진일보해야 한다. 하나님과 만남과 경험 이런 것들은 백척간두(百尺竿頭), 백자 꼭대기 절벽에 딱 선 것 같은 어떤 그러한 영적인 상태 경험한다. 거기서 머물러 있지 않고, 떨어지면 죽는데 한걸음 더 나가야 한다. 그래야 모든 것을 이룬다. (百尺竿頭 進一步 十方世界現全身)고사에 있는 이야기다. 저는 그게 우리 기독교에서 하나님 이해에서도 맞지 않느냐는 이야기다. 신학적으로 상당히 위험성있다 하더라도 근본으로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면 한번 끝까지 나가보는 것도 필요한 것 같다. 믿음 절대주의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믿음이 없어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개연성이 있다는 말이 좀 위험하기도 하지만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의 믿음보다도 하나님의 구원통치가 더 절대적이기 때문에 그런 거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다. 예수님 전하신 그거다. 이게 다 연관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가 누구냐 잘 아는 것하고 하나님 나라가 어떠한 절대점, 그리고 이미 들어와 있으며 여전히 종말론 적이라고 하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 하나님 나라의 그 속성, 그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연관된다. 예수를 믿는 것 따로 있고 하나님 나라를 깊이 이해하는 것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연결된다고 하는 것이다. 전에 말씀드렸듯이 기독교 신앙 안에 들어 있는 많은 가르침들이 서로 긴밀하게 조금은 약간 멀리 있는 것 같지만 어떤 루트를 통해서라도 다 연결되어 있는, 거미가 쳐놓은 촘촘한 그 그물처럼 다 연결되어 있어서 그것을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서 작은 가르침들이 큰 가르침하고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하고 별개의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안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절대적인가 이야기하다가 바다이야기도 좀 했다.

그걸 좀 더 가깝게 여러분들이 느끼게 하기 위해 한마디 더하겠다. 우리 지구가 현재 지금 생명이 가득차 있지만 혜성 한번 날라 부닥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죠? 우리가 쌓아온 모든 문명들 한 모든 것들이 그런 것들이 깡그리 무너진다. 혜성이 와서 충돌할 가능성이 없는 것이 아니다. 1%라도 있지 않는가? 그걸 우리가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나라 통치 그런 것들은 그게 혜성보다 우주론적인 더 큰 힘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조작해서 방향을 바꾸기에는 힘들이다. 그러면 당신이 하는 말대로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지 않느냐? 그냥 넋놓고 가만 있어도 되느냐? 그냥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지기를 입 벌리고 있어야 되느냐? 그런 반론이 가능하다. 사실은 하나님의 나라 그 통치 앞에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궁극적인 면에서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 그럼 전도(傳道)는 뭐냐? 할 일이 없다는 것을 전하는 것이 전도다. 하나님앞에서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전하는 것이 전도다. 하나님앞에서 우리가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할 일이 없다. 할 수 없다. 손을 놔라. 무위에 가깝다.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 아무 것도 의도하지 않음으로서 할 것이 없는 상태. 노자의 이야기와 비슷하다. 원칙적으로는 하나님 앞에 우리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 점에서 칭의론이 맞다. 다만 우리가 그렇다고 하나님의 은총이 절대적, 하나님의 행위가 엄청나다고 하는것. 그래서우리는 가만히 그 분이 어떻게 하시는 것을 기다리고 거기에 주목하는 것이다는 것을 전하는 게 전부다. 그게 선교다. 물론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과 하나님 앞에 무력하다 인정하는 것을 전하는 것과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 거기까지는 다 이야기 말자.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우리가 1장에서는 예수와 초기 기독교와 유대교의 관계를 이야기했다. 거기에는 유사성도 있고 차이점도 있었다. 어쨌든 처음에는 무관하지 않았지만 시나브로 초기 기독교가 거기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된 종교가 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우리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오늘은 그런 걸 전제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한다. 한달간 이야기하려고 한다. 오늘 예수, 역사적 예수. 아. 참.. 이 분이 누굴까요? 역사안에 있었던 예수. 어떤 역사를 이야기할까? Historical 이라 할까? 역사적 예수라고 할때 Historical 예수라 해야 할까? 영어는 History 하나. 독어는 세 개. 하나는 말 그대로 히스토리, 독일로 쓰자면 대문자로 써야한다. 또하나의 역사는 게쉬히테. 히스토리, 게쉬히테. 우리 영역으로는 히스트로. 히스토리는 라틴, 게쉬히테는 독일, 신학에서는 게쉬히티타이트. 실증적인 역사, 이거는 신학적으로 해석된 역사, 요거는 게쉬히티타이트는 실존성에만 접근하는 역사. 이거는 신학적으로 역사적이다. 정말 실증적이었다. 이렇게 해석하자. 역사적이다. 역사적이다말의 반대는 초월적이다. 역사가 있다. 역사가 뭐냐? 역사라 한다면... 역사 안에 들어있는 것. 역사 內在라고 한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다. 앗시리아. 바빌론, 우리나라에서도 쭈욱 내려온 역사.. 우리안의 구체적인 실증적인 역사. 역사 안에 있다면 바깥에 있는 것. 역사 超越.역사내재와 역사 초월, 경계. 우리가 얼마나 정확히 결정할 수 있을까? 삼투압처럼 나갔다 들어왔다 할거다. 우리는 이 안에만 갇혀 있다. 우리는 이 시간, 지구안에서만 산다. 시간은 우리는 무슨일을 있어도 떠나지 못한다. 하나님은 역사를 넘어서도 계시고 내재하신다. 초월과 내재이다. 여기서 실존성은 뭐냐? 이런 애기가 필요할까? 진도는 나가지 않고 신학적 개념안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괜찮으신가? 역사적 실존이라고 한다면 지금 내가 어떻게 경험하느냐가 중요하다. 객관적 역사가 있든 없던 그게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가 지금 고뇌하고 슬프고 외롭고 여기에 집중하면 실존적 역사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역사란 말을 조금 설명했다.

유럽철학은 역사가 뭐냐를 밝히는 것이다. 다 완성한 사람이 헤겔이다. 역사철학가. 마르크스도 헤겔의 제자라고 한다. 좌파, 역사이야기를 이야기한다. 역사가 발전한다. 헤겔에 의하면 결국은 변증법으로 발전해 가게 한다. 초보적인 것을 이야기한다. 변증법적으로 역사가 정반합에 의해 발전해간다. 정반합, 노무현이 나와서 안돼어서 노무현 나왔다. 테제, 안티테제, 신테제. 명제가 되어서. 역사적 발전의 성격을 이야기하는데 상당히 일리가 있다. 헤겔은 나중에 결국 절대적 정신, 압솔루트 가이스트 지배한다. 완전한 절대정신이 지배한다. 사랑,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한다. 칼 마르크스 역시 역사가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 프롤레타리아의 독재의 시대가 된다. 경제적인 관점으로 본것같다.. 헤겔은 포괄적인데 마르크스는 경제와 노동 문제로 보았다. 역사철학은 유럽철학의 핵심이다. 제가 전공한 판넨베르크도 결국은 역사를 신학의 중심주제로 들여왔다. 거기까지 말할 건 없다. 하나님의 계시가 역사로 나타난다는 이야기다. 그런 대가들, 신학, 철학, 물리학도 그렇고 그 대가의 아포리즘(경구, 명제)만 갖고 몇마디 하는것은 간단하다. 그러나 어떤 과정을 통해서 거기에 도달했는가 따라가는 것이 힘들다. 역사로서의 계시, 오텐바롬 알시 게시히테. 그런 몇마디 말이야 우리가 대충 그냥 따라할 수 있지만 어떤 과정을 통해 거기에 도달했는가? 상당히 아주 복잡한 전작업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판넨베르크의 말한 것 역사가 계시다고 이야기하지 않는가? 히틀러의 악한 역사도 계시냐? 판넨베르크의 역사는 실증적인 역사, 구체적으로 일어난 역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계시가 역사 개념으로 나타난다. 하나이고 보편적이고 몇가지가 있다. 어쨌든 역사는 신학의 포괄적인 지평이다. 움파스텐데 호르젠트 그런 이야기다. 다른 이야기가 길었다.

역사적 예수 제목하나만 놓고도 할 이야기가 얼마나 많냐 하는 것을 조금 말씀드리려고 했다. 과연 예수에 관해서 한 달정도 이야기할 것이다. 예수에 관한 가르침을 가르켜 신학적인 전문용어가 크리스톨로지(Christology)다. 이것을 2,3장에 걸쳐서 할거다. 2장은 역사적 예수, 3장은 예수에게 일어난 핵심사건인 십자가와 부활, 판넨베르크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십자가보다 부활에 접근해서 핵심. 두가지 다 중요하다. 그것을 다루는 것이다. 2,3장과 기독교를 이해하는데 핵심이다라고 볼수 있다. 한 장을 우리가 보통 2주 정도 하니까 2,3장 다해서 다해서 4주 또는 5주를 하겠다.

생각해 보라. 예수가 과연 누군가? 예수가 과연 실존했던 인물인가? 아니면 요즘 다비아의 사이트에서도 조금 거론되었던 예수퍼즐 이라고 하는 책을 쓰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신화적 존재인가? 오늘 그런 문제로 접근하지 않을 작정이다. 제가 예수 세미나 운동에 관심이 없는 이유는.. 운동 아시죠. 미국에서 벌어진 이야기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가 틀렸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신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이 하는 것은 사회과학, 고고학이지 그런 것들은 부분적으로 공부할 것이지 신학의 중심이 아니다. 성서를 사회과학적인 관점으로만 접근하게 된다면 정말 성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엑기스를 다 놓치고 변죽을 울리게 된다. 그것도 일종의 극단이다. 아주 극단은 양극단이 다 있다. 보수우익, 문자적이고 축자영감설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사람들이 성서에서 어떤 그러한 자기중심적인 신앙을 해석, 자기 합리화 하는데 빠지는 것처럼. 또 한쪽의 극단으로서는 지금 말한 예수 세미나에 속한 사람들처럼 성서가 이야기하려는 핵심에 들어가지 않고 주변에 있는 것들을 계속 매달려서 이야기하다 말아버린다. 그렇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예를 들면 시가 한편 있을 때 詩를 시로 이해해야지 시 안에서 사회과학이나 생물학적으로 시인이 시를 썼는데 동백꽃에 대한 정보가 잘못되었다 이런것을 말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시인이 생물학적처럼 동백꽃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하더라도 시인이 동백꽃과의 교감을 통하여 영적 생명의 리얼리티를 의미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뚱딴지처럼 그 시인의 동백꽃에 대한 정보가 잘못되었다든지 하는 것은 양극단이 결국 성서 훼손하는 것과 같다. 그건 재미에 불과하다. 독일어하나 가르쳐 드리겠다. 쉬빠스. 하도 독일 사람들이 많이 쓰는 것이라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 쉬빠스, 말 그대로 재미에 불과하다. 흥미거리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구나. 책을 읽더라도 그러려니하고 지나가야지 그것을 기독교 신학의 중심인 담론으로 끌어드리려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시를 산문으로 이해하는 그것도 아닌 과학보고서로 이해하는 것, 무의미한 일이다. 저의 말이 다 옳은 것 아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이니 여러분은 여러분 나름대로 생각해 보라. 역사적 예수라고 할때 예수세미나에 속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히스토리컬 지저스에 대한 관심이 많이 없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역사성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역사의 문제, 신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옳다. 그 사이가 완전히 다른거냐 그렇지는 않다. 직접 들어가 조금 더 생각해보기로 하자.

앞부분에서는 예수에 대해서 무엇을 말한다는 것.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전제해야 한다. 그렇다. 예수에 대한 정보가 그렇게 많지 않다. 시간, 자료도 그렇다. 아주 빈약한 자료들, 어떻게 보면 아주 빈약하지도 않다. 고대 2천년전의 어떤 인물에 대해서 예수보다 더 많은 정보 자료를 가진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거다. 그런 면에서 예수에 대한 정보는 많이 있기는 있지만 그러나 예수를 역사적으로 복원해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런 부분에서는 이미 알버트 시바이처 박사가 방향을 정했다. 아프리카의 성자라고도 하고, 신학박사인 알버트 시바이처박사가 역사적 예수의 연구 고전이라고 할만한 책을 썼다. 그가 19세기에 있었던 당연히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것을 나쁜 뜻으로 쓰는 것이 전혀 아니다. 그 전의 교회, 권위중심적인 그런 신학이나 교회 행태로부터 합리적이고 계몽주의적이고 이성적인 그러한 쪽으로 길을 연 사람들의 하나의 흐름을 가르켜 우리는 신학의 자유주의라 한다. 자유주의라고 하는 신학의 흐름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여전히 계몽이전의 시대 지금은 포스트 모더니즘을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모더니즘도 거치지 못하고 그 전시대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중세시대의 황제 군주가 모든 사람, 생명 약탈권 행사하던 것에서 벗어나는 그 흐름에서 자유주의 신학이 그 역할을 했다. 그러한 흐름을 알버트 시바이처 박사도 받았다. 거기 핵심은 자유주의 신학. 하도 말을 많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자유주의하면 죽일 놈들이라고 보이니까. 쓰는 훈련 해야 하겠다. 목소리 작게 전달 잘 됩니까? 큰 소리로 해야 하나요? 잘 들리나. 그래요? 잘 되었다. 제가 힘을 빼고 작은 목소리로 해도 된다니 다행이다. 자유주의... 다른 말로 또 하면 문화 개신교주의라 한다. 로마카톨릭은 좀 제외한다. 로마카톨릭은 자유주의 신학이 없었을 것이다. 교황이 장악했기 때문에 없었다. 그래도 영향을 미치긴 했다. 주로 19세기 개신교, 독일을 중심으로 한 학자들이 크게 공헌했다. 문화 개신교주의 독일어로 쿨투어 프로테스탄티무스. 그러니까 교회중심이 아니라 문화 문제, 문화라고 하면 인간, 이성, 계몽 그리고 종교성. 종교학이 그때 많이 발달했다. 이길영박사가 전공한 종교학, 슐라이허마허 종교학이다. 1800년대부터 시작한다.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하면 슐라이허마허다. 교회 중심적이고 교리중심적이던 신학과 교회의 흐름을 문화, 그러니까 기독교도 문화의 현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입장에서 보면 조금 위험해 보이기도한다. 그러나 이 당시에 많은 연구를 하였기 때문에 그 뒤로 기독교가 자체를 방어하는데 이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냥 믿음이 있으면 된다는 그 전통만 보수하고 자유주의 신학이 없었다면 20세기에 와서 기독교는 더 허물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자유주의 1세기 기간이 면역기간이 되었다. 면역이다. 아프지만 열이 나지만 면역이라는 것이 균이 들어와서 이미 그 병을 미리 좀 앓는 것처럼 면역기간이라 20세기에 와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그것이 되지 않았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말하다 말았다. 자유주의, 문화 개신교주의 신학의 가장 큰 특징이 뭐냐? 하나로 이야기한다면 성서에 대한 이해가 새로와졌다. 성서에 대한 역사 비평이다. 오늘 여러분은 평신도 신학의 가장 중요한 대목을 공부하고 있는 중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여러가지 많은 특징들이 있는데 그 중 핵심을 뽑으라고 하면 성서를 Historical Criticism 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성서가 하나님의 계시,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해서 권위 있는 그런거로 남아 있었는데 역사비평에서는 이게 그냥 일반문서와 똑같이 다루게 된 것이다. 헬라시대때 있었던 많은 시, 역사 문서들처럼 성서도 그러한 것들 중 하나로 보고 아주 지나칠 정도로 다 분석해내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역사 비평이다. 이 자유주의 신학때, 1세기에 걸쳐, 전에서 부터 조금 시작하기도 했다. 성서가 하나의 문서로 다루어 기분 나쁠 수 있다. 성서를 어떻게 일반문서와 같이 다루느냐? 맥락을 조금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다. 당연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고 해서 그것이 형성되는 과정에 역사적 사건이 개입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역사내재와 역사 초월을 이야기했다. 성서가 초월적인 부분만 있다고 본다. 이것은 한국 개신교 신자들에게 나타내는 현상인데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인데 신화라고 이야기 하느냐? 저도 그런것으로 욕을 먹었다. 제가 저 텍스트는 고대인들의 신화적 표상들이 들어온 것이다. 거기서 제가 신화라고 하는 것이 근거없다고 하는 뜻이 아니라 고대인들의 문학적인 기법이다. 그런 방식으로 그들을 어떤 근원적인 사실을 전하려고 했다. 지금 현대 시나 그림이나 이런 것들도 초현실주의 그런 것 있지 않는가? 초현실주의 우리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난해한 그런 것들은 독특한 이 시대에 어떤 사람들의 예술과 문학을 표현하기 위한 독특한 수사, 쟝르라고 할 수 있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성서가 쓰여 질 그 당시에는 그 신화가 아주 보편적인 그리고 당연한 그러한 글쓰기의 방식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걸 인정하자고 하는 것이다. 그걸 인정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끌어내리려는 것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라. 성서를 하나의 신화라고 했다고 해서 뭐라하는 분들이 있다. 일반 평신도도 아니고 한국을 대표하는 설교학 교수가 공개적으로 그런 논평을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하는 것은 보면 커뮤니케이션에 좀 문제가 있다. 꼭 그 분이 잘못했다기 보다도 언어를 사용하는데 전이해가 없으면 언어 대화가 힘들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 자유주의 신학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면역성이다. 일종의 자유주의의...(?) 우리를 건강하게 하는 우리 시대가 성서의 권위를 해체를 하려고 하더라도 준비가 되어있다.

제가 예수 세미나 크게 받아 들이지 않는 것은 이미 다 했던 이야기니까? 역사비평에서 이미 백년 백오십년전에 다 이야기한 것을 작은 것 가져와서 침소봉대 새로운 것을 깨달은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현대신학사를 모르는 평신도, 한국의 문제점을 의식하고 나름대로 합리성 추구하던 사람들에게는 큰 발견, 새로운 것 알게하는 것처럼 하는 것이다. 제가 보기에는 이건 선동이지 신학이 아니다. 그런 것들이 많이 있다. 알버트 시바이처박사도 19세기 역사비평을 잘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바는 신학성서에서 우리는 역사적 예수를 우리가 복원해 낼 수 없다. 결론이다. 이 말을 왜 드리느냐 하면 여러분들이 아무리 성서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역사적인 문제들을 정확하게 찾아내는데 하더라도 안된다. 우리는 하는데 까지 하고 더 중요한 perspective인 관점은 Theological perspective다. 신학적 전망, 관점, 이게 계속 서로 순환되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의 관점을 가지면서 더 근본적으로는 그걸 기초로 해서, 기초라기 보다는 성서는 역사적인데 그러나 그 성서가 안고 있는 것은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theological 한 것이다. 이야기하다보니 정확한 답을 찾았다. 준비하지 않는 것인데 말하다 보니 되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인도하심이다. 맞나요. 성서는 아주 역사적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안에서 나온 것이다. 역사 내재다. 역사안에 있는 것이다. 어떤 정확한 사람, 역사 안에 살았던 사람들 바울, 베드로 같은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쓴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 담고 있는 내용은 역사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행위했느냐에 대한 그 사건을 다룬 것이기에 신학적이다. 도대체 역사적인것과 신학적인것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런 이야기도 깊이 들어가면 여기는 신학강의실이 되겠다. 제가 그 경계선을 잘 지켜야 하겠다. 너무 그런 쪽으로 들어가지 말기도 하고 너무 그냥 일반적인 것만 이야기하지도 않고 적당한 경계선 중심을 잘잡으면서 나가보도록 하겠다. 어쨌는 그거는 되었다. 오늘 여러분은 중요한 부분 들었다. 성서는 역사적이다. 안고 있는 내용은 신학적이다. 거기까지.

우리가 몇 주에 걸쳐서 예수님의 사건을 이야기가게 될텐데 그안에는 성서가 기술하고 있는 역사적 사건 나오고 그러면서 일종의 그분의 손가락이라고 비슷한 방식으로 설명했던 손가락, 칼 바르트식으로 이야기하면 그릇이다. 성서는 그릇안에서 뭔가를 담고 있다. 예수 세미나 사람들은 그릇만 보려고 한다. 그릇이 어떻게 생겼나? 그릇이 중요한 것 아니죠? 내용을 담기위해 그릇이 필요하다. 그릇이 무엇을 담고 있나 알면 충분하다. 겁먹지 말라. 기독교가 좀 불확실하다. 세상 사람들의 비판, 어떻게 보면 그럴듯 한게 많이 있어서 기독교 신앙이 근본적으로 위기에 처한것이 아닌가 하는 분들, 혹시라도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걱정하지 말라.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반기독교라든지 그런 쪽에서 하는 이야기들이 어떤 부분들은 옳고 어떤 부분들은 잘못되었는데 거기에 대해서 일희일비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건 성서기자들과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활동했던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어떻게 진리와 직면하고 그것을 해명해내려고 치열하게 투쟁했는가 그걸 알고 우리도 그 흐름속 안에 들어가 있으면 된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최후의 심판때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다. 오늘 우리가 고민하고 논의하고 풀어나가야 할 문제들을 그저 하나님께 맡기자. 종말에 유보해 놓자. 책임회피가 아니다. 어떤 진리라고 하는 것은 안티기독교가 이야기하는 것 그런 쪽으로는 아무것도 생산적인 것이 나올 수 없다. 이쪽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지 말아야 한다. 요 문제는 요기서 지나가는게 낫겠다.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기독교의 중심안에 들어와서 그안에 하나님의 계시, 생명 이런 것들이 어떻게 드러났고 전승되고 역사로 내려왔고 또 앞으로 그렇게 나아가야 할텐데 그안에 우리가 들어가 있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걱정하지 마라. 그 애기였다. 이런 말로 도움이 될까? 거기에 내가 뭔가 할 말이 꼭 있었는데. 정리했어야 했는데 옆으로 나가는 것 같아서 화장실가서 밑 안닦은 것처럼 조금 찜찜하다. 오늘은 거기까지. 걱정하지 마시라. 여기저기 기웃기웃하지 말라. 좌고우면 우면좌고하지 마라. 기독교안에 생명이 담겨있다. 잘 못 알아서 그렇지 알기만 하면 충분하다. 그 이야기다.

첫번째 우리가 부닥치는 문제가 마리아의 문제다. 예수님이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 화면이 멈췄다. 클릭하다가. 강의안에 체크. 조금 기다려 보라. 이 처녀 마리아, 동정녀 마리아라고 보통 이야기하는데. 이 이야기. 제가 어디 다른 article에다 요 부분만 따로 길게 한번 설명했다. 참고하라. 여기서는 그렇게 질질 끌지 않겠아도 되겠다. 처녀 마리아라는 요 사실만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문제에 접근하면서 성서를 보는 눈, 기독교의 진면목에 접근하는 그 자세를 가르쳐 드리려고 하는 것이다. 공부라고 하는 것은, 잘 알다시피, 어떤 객관적인 사실과 정보를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가는 태도를 배우는 것이다. 공부하는 태도를 배우는 것이다. 선생이 있다는 것은 선생을 통해 저 방식으로 저렇게 하는구나. 그것을 배울 수 있으면 최고의 교육이고 선생과 제자, 보통 멘토라고 한다. 처녀 마리아 요 주제를 어떻게 다룰 수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오해를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아.. 예수가 처녀 마리아에게 태어났다. 얼마나 대단하냐? 그러니까 초자연적 사건이 태어날때 부터 되어 있으니까 메시야다. 아니면 봐라. 기독교는 처녀가 애기를 낳는다는 무식한 가르침에 불과하다. 그렇게 무식해도 되느냐? 양쪽 다 극단이다. 그게 아니라 이런 사실을 통해서 일종의 전승이고, 처녀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다고 하는 것, 이게 일종의 전승이다. 초기 기독교안에 형성된 것이다. 처음부터 있던 것이 아니다. 모든 교리는 다 그렇다. 이게 없던 것이 어떻게 보면 아직은 나타나지 않는 것들이 시간속에서 나타난 것이다. 물질의 세계도 그런 것처럼 기독교 세계도 그렇다. 거기서 누가 어떤 역할을 했느냐 이런 것이 다 공부하는데 필요한 것이다.

제가 시간을 못봤다. 열한시가 다되었네. 시간을 못보았다. 강의시간이 한 시간이 좀 짧다. 두시간 정도는 해야 할 것 같다. 보통 신학대학에서는 3학점 자리가 한과목이다. 1주일에 세시간인데 한번에 연달아한다.우리는 양으로 따지면 세시간 된다. 따로 따로. 한시간에 이야기하다. 다 가버렸다.

처녀 마리아는 정리하고 마치겠다. 그 처녀 전승, 처녀 잉태라고 하는, 출생했다고 하는 고게 초기 기독교의 굉장히 중요한 맥락에서 시작된 신앙적 표현이다. 이야기를 하는 중에 천사문제도 다루었을텐데 강의안을 보라. 주로 다뤘다. 평소에는 사자이기도하는 천사의 이야기가 심상치않다. 천사가 무엇인가. 나중에 강의안 올라가면 보라.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 누가복음 마태복음에는 기록되고 요한 마가복음에는 없다. 왜 그럴까? 만약 이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신앙내용이라면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이 생략할 이유가 없다. 사연이 있다. 그걸 이 대목에서 설명했다. 주로.

성탄절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제가 조사한 바로는 12월 25일은 로마카톨릭, 개신교, 1월 7일은 그리이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교회다. 성탄절은 역사가 많이 흐른 다음에 정리된 것이다. 처음에는 없다. 역사안에 있던 교회의 필요성에 의해서다. 예수님의 출생연도도 참고적으로 B.C. 그리스도 이전 Before Christ A.D Anno Dominai 영어, 라틴, 532년 수도사,천문학자. 계산 잘못했다. 최근 발표한 바에 따르면 기원전 6년이 예수님 정확한 출생년도다.

동정녀의 핵심은 이거다. 동정녀 출생의 전승의 핵심은 여자의 몸이다. 인간이다. 몸. 헬라어 사르크스라고 하고 소마라고도 한다. 헬라 사람들은 단어를 세분화했다. 육체, 물질로서 몸, 또 약간 다른 뜻으로의 몸 소마와 사르크스로 구분한다. 그게 신약성서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바울의 몸이해, 이게 중요하다. 왜냐? 몸은 부활과 연관되기 때문에 중요하다. 우리 몸이 어떻게 부활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것까지 다 공부하려면 참 할게 많다. 부활이라는 것이 단순하게 부활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건 헬라어와는 깊이 연관되어 있다. 여기서 핵심은 몸이다. 그리고 동정녀라고 하는 것은 부수적인 요소다. 동정녀 문제에 대해서는 사도신경, 판넨베르크, 제가 번역한 것인데 이 책이 정말 중요하다. 좋구요. 사도신경은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모아둔 것이다. 니케아 신조와도 거의 비슷하고. 기독교 신앙의 모든 내용들의 총망라. 판넨베르크가 독일로, 영역으로는 옛날에 번역되어 있었다. 그런 면에서 판넨베르크, 이 사람은 처음에 신학을 했을때 서른살이었다. 나는 부활의 역사성을 믿는다고 했다. 학문적인 신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저 사람은 근본주의자다 소리를 들었다. 부활의 역사성.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판넨베르크가 말하는 역사가 무엇인가를 정확히 이해못하고 하는 말이다. 게쉬히테.

이 사람의 설명에 의하면 동정녀 출생의 이야기의 핵심은 예수가 창조적인 하나님의 영으로 인해, 창조적인 하나님의 영, 성령이다. 진리의 영, 생명의 영, 종말의 영.여러분들이 이것도 성령론이다. 기독교 신앙이 다 연관되어있다. 동시에 하나 하나 깊이가 있고 다 연계되어 있으면서 다른 것과 연관되어있다. 그런 것들을 신학자, 역사 기독교 지도자들이 속사정을 소상하게 깊이 있게 잘 알아야 성서에 나와 있는 이야기들을 엉뚱하지 않게 전할 수 있다. 성령론도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오해되어 있는지 모른다. 자기가 막 주먹구구식으로 끌어 들일 것처럼. 성령론이 성령 불 받아라. 마음이 뜨거워지는것을 성령 받았다. 이거야 말로 큰 착각이다. 자기 혼자 울고 은혜 받고 자기 연민. 자주 이야기하는 것처럼 한국사람들이 멘탈리티가 자기연민에 강하고 쏠리는 현상이 많다. 투표할때도 그렇고 합리적이지 않다. 합리적이다라는 것이 무조건 절대선이라는 말은 아니다. 성령도 성령이라기보다도 하나님이다. 생명의 영, 진리, 종말, 창조영이다. 하나님 자체다. 심리작용으로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영혼을 평안하게 해 줄 수 있는데 자기 심리자체와 성령은 다르다. 이런 부분들도 우리가 따로 따로 다 연관되면서도 프뉴마, 루아흐, 프뉴마놀로지. 성령론에 대한 깊은 공부들을 통해서 성령과 진리가 어떻게 연관되는 것을 알면 진리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교회가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열려 있어서 보편적 진리논쟁과 더불어 우리가 그런쪽에서 경쟁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조심하기도 하고 그러나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성취되었다는 것을 알고 그리고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주변사람에게 변증해 나갈 수 있다. 그럴 수 없으면 우리가 독단에 빠지거나 자기 확신에 빠지거나 하는 거다.

핵심은 예수가 하나님의 영으로 인해 마리아의 몸을 통해 출생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려야만 한다는 점이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칭호, 타이틀이 더 중요하다. 인자,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 많다. 예수님의 타이틀 호칭이 지역에 따라 달랐다. 유대교적인 기독교적인 호칭이냐? 이방인적인 기독교의 호칭이냐? 이미 연구가 많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 칭호가 늘 따르던 공동체들이 있었다. 구성적윤색, 구성적인 말은 핵심적이다. 짠다.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중심이고 헬라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그들이 아는 방식으로 설명하기에는 동정녀로 설명할 수 밖에 없었다. Apologetic에서 나온 윤색이다. 그거 이상하다. 그렇게 중요한 문제들이 동정녀 마리아 탄생이 종속변수냐? 맞다. 이상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한다면 생각적으로 너무 없었고 주입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 신앙의 토대가 허물어진다. 절대 그렇지 않다. 이런 방식으로 기독교의 토대를 세운다면 기독교의 토대가 쉽게 허물어진다. 기독교가 초월적이지 않다거나 기적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성서와 기독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만약에 기적이 말하려고 하는 것이 핵심이라면 이것을 말해야 한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 이것이 기독교가 말하려고 하는 핵심이다. 이 핵심을 포기하면 안된다. 그게 말이 되냐 그것을 주장. 초기기독교가 그걸 말하고자 하던 핵심이었다. 동정녀 마리아는 핵심이 아니다. 핵심이 아닌 것 붙들고 논쟁. 이것은 소모적이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영지주의자들과는 달리 인간 마리아 몸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성령의 역사였는데 동정녀 설화를 통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다. 고맙다. 편히 주무시라. 한국에 계신분 편히 주무시고 외국의 분들은 각 시간에 따라 시간을 잘 보내시라. 월요일 저녁, 다음 목요일 .. 질문 있으면 동영상 메뉴에다 문자로 주시라.

  1. [2009/12/08] 2009년 12월 6일(대림 2주일)성서묵상 by 바우로 (11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