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 강의 25강입니다. 판넨베르그 책으로 보자면 제5장의 두 번째 순서가 되겠군요. 앞에 나온 이야기, 이거는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외아들이라고 하는 용어에 대한 교리사적인 배경을 설명한 겁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혹은 또 외아들이라고 할때 그것을 예수님의 초자연적 성격, 뭐 이런 것으로 생각을 좀하잖아요. 요게 원래 그렇게 시작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거를 지금 판넨베르그가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해, 이런 것들은 기본적으로 유대교의 배경에 서 나온 것이 거거든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그 호칭은 신적 본질을 나타낸다기 보다도 예수의 지상적 활동, 혹은 현실에 대한 해석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때 결코 신적인 본질 이런쪽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들은 지난시간에 했기 때문에 여기서 또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유대교적인 배경을 놓고 주욱 나왔는데 헬라 기독교인들, 헬라 그리스도교쪽으로 가면서 이 생각이 좀 신적 본질적으로 해석이 되는거예요. 그렇게 변화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거는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변화, 그런 거라기 보다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의 사유방식의 차이에서 나온 어쩔수 없는 해석학적 결과라고 할 수 있는거예요. 어쨌든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니냐? 하나의 예수에 대한 유대교적 배경과 헬라적 배경이 다르게 이야기했다면 결국 기독교 신앙의 근거가 그 자리에 따라 변할 수도 있고 통일성이 부족한 것이 아니냐 그러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네. 가능한데요. 이거는 그렇게 정확한 질문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적 배경이라든지 헬라적 배경이라든지 결국 어떤 방식이라든지 예수의 지상적 활동에 대한 이해이고 해석이고 또 신앙고백이라고 하는 점에서 비록 다른 표현들이, 유대적 배경과 헬라적 배경에서 다른 표현들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표현이라기보돠 다른 이해가 거기에 담겨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는 우리가 조금더 가보도록 합시다. 내용을 좀 살펴 보고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타이틀로 두가지 서로 다른 이해들이 초기 기독교 안에 자리를 잡았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헬라적인 배경을 둔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 칭호에 대한 신적 본질이라는 그러한 관점에서의 핵심은, 예수님의 선재성이거든요. 그 신적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그러니까 인간예수의 역사적 한계들을 뛰어넘어서 신적인 선재성 역사를 넘어서는 선재, 이미 창조때부터 있다고 하는 그러한 생각으로 가는 거거든요. 아마 이거를 이렇게 좀 연관시켜서 생각해 볼 수 있겠어요. 유대적 배경으로 본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양자삼음이 되었다고 한다면 헬라적 배경으로 본다면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고 하는 성육신으로 이해할 수 있는거죠. 이러한 예수에 대한 그러한 정체성의 조금 다른 흐름들이 있는데 이런 것들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예수의 지상적 삶에 나타난 신적인 현실들을 눈여겨보았다고 하는 점에서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이제 선재성의 문제를 조금 다루게 될겁니다. 오늘 강의를 하기 위해서 제가 좀 읽어보았는데 좀 어렵더라구요. 오늘 다루어야 될 부분이 유독 그렇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읽어야 저도 따라갈 수 있겠더군요. 재미있다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재미있다고 느끼려면 신학적 오리엔테이션이 바탕으로 조금 주어져야 되겠는데 일반 신자들에게는 조금 버겁기는 하구요. 그뿐만 아니라 일반 목회자들, 신학생들에게도 상당히 버거울수도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나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들을때 어느 정도 음악의 세계를 알고 있어야 그 감동적인 음악이 전달되는 것과 비슷한 거예요. 책을 보겠습니다. 용기를 갖고 들어가 보겠습니다. 89쪽 다섯째 줄입니다.

선재성이라는 사상을 받아들이기에 앞서서 우리는 우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사도신경의 사유에 담긴 특별한 뉘앙스를 생각해보아야 하겠다. 그는 하나님의 외아들이라고 한다. 그러한 표현들이 우리들이 인제 자주 듣고 익숙하게 쓰는건데 그게 무슨 의미냐 그냥 아들이 아니고 독생자로 했단 말이에요. 특별한 신학적 뉘앙스가 있다고 하는거죠. 신약성서에서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를 특징짓는 이러한 표현, 어떤 표현, 외아들 독생자 이러한 표현은 오직 요한(3:16)에 나와 있는데 거기에만 사용되었다. 조금 의외라고 생각이 되시죠.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외아들이라고 하는 표현이 명확하다고 생각하고 어디서나 예수님을 이야기할 때는 그러한 표현이 있었으리라 생각하는데 한군데만 나온다고 하네요. 저도 조금 예상밖입니다. 그런가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표현은 많이 있을까요? 그런 표현들은 좀 있을 것 같은데요. 이 외아들이라고 하는 표현이 딱 한군데 있다고 하네요. 그러니까 초기 기독교안에서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생각들이 상당히 여러 각도로 전개되었다고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통일된, 하나의 일치된 그러한 인식은 없었던 거죠. 그러한 서로 다른 인식의 하나가 하나님의 외아들이라고 하는 표현인데 그것이 놀랍게도 요한복음 3장 16절 한군데만 나온다고 합니다. 이게 말하고 하는 것이 뭐냐 아는 것이 중요하죠. 이거는 다른 성서의 진술과도 연결되는 문제인데 어떤 신학적 배경을 염두에 둔다는 거예요. 고 맥락, 그걸 우리가 빨리 들어 가는게 신학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이렇게 찾는 능력을 확보하는 그러한 지름길이 될 거에요. 표현이 잘 전달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고게 뭐냐? 이게 의미하는바가 뭐냐하는것입니다. 이렇습니다.

이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라는 것이다. 예수 이외에 하나님은 어떤 다른 아들도 두지 않았으며, 곧 자기 통치의 그 어떤 위탁자나 대리자도 두지 않았다. 이런 뜻이라고 하는 거죠. 외아들이라고 하는 요한복음 2장 16절에 나와있는 이 표현은 하나님의 구원 통치를 대리할 자가 예수이외에는 없다는 그러한 신학 또는 신앙고백이라고 하는 거죠. 그걸 바탕에 두고 외아들이다 이렇게 표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고대인들의 이러한 표현들을 지금 식으로 그냥 받아들여서 하나님이 아들 하나 딱 둔 것처럼 이렇게 생각하면 좀 곤란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잖아요. 이런 것들은 혈육으로 이어진 우리가 생각하듯이 아들 하나 딸 둘 이런 방식으로 생가하지 말라는 거죠. 이거는 하나님의 구원 통치 위탁자 대리자가 예수 이외에는 없다 이러한 신앙의 표현인거죠. 재미있는 설명이죠. 그런 것을 낱말 뜻으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리고 요 외아들이라고 하는 신학적인 의미의 뉘앙스를 우리가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요것도 좋은 공부인데 여기에서 끝나지 말고 이런 신학적 용어 개념 이런 것들은 늘 배경, 어떤 것을 말하기 위한 그러한 어떤 궁극적 현실들을 이야기하기 위한, 혹은 궁극적 영성, 영의 세계를 말하기 위한 그 당시의 수사적 혹은 언어학적 표현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네.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수행하는 유일한 자로서, 이게 중요한 표현들이예요.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수행하는 유일한 자로서 예수는 세상 창조의 중재자이기도 했다.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 유일하게 하나님의 구원통치를 위탁받은 자로서 예수는 결국 그러한 신앙적 사유들이 확대되면서 그가 창조의 중재자로 고백되는 거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것이 창조되었다고하는 니케아 신조의 언급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명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아들 그것은 곧 모든 세계 창조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되었다고 하는 니케아신조의 고백과 연결되어 있는거죠. 이런 사상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세상에 펼친다는 사실에서 이해될 수 있는 문제다. 핵심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통치예요. 구원 통치예요. 하나님의 나라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하고 실행되었다고 하는 가장 중요한 진술, 여기에 초기 기독교가 집중한 것이고 여기서부터 다른 문제들이 풀리게 되는겁니다. 거기서 부터 나오는 거예요. 거기서부터 독생자 그거도 그렇구요. 동정녀 탄생도 그렇구요. 거기서 부터 이렇게 나오게 되는 하나의 신앙적 논리의 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역사적 예수와 완전히 분리된 하나님의 본질을, 이건 아주 초월적인 거죠. 즉 세계가 시작할 때 그 어떤 특별한 기능들을 감당했을 수도 있는 그런 본질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지었다고 하는 그런 것, 그런 차원의 본질, 그런 것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때,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세계 창조의 중재자다. 하나님의 구원통치를 대리하는 자로서 그는 세계창조자의 중재자다. 우리는 앞서 말한 대로 창조가 마지막으로부터 일어난다는 중요한 생각을 기억한다. 사상, 사유를 기억한다. 창조가 앞부분에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그 단락에서 나온 이야기일거예요. 이거는 종말론적인 기독교에서 핵심이기도하구요.

창조가 기독교신앙에서는 위에서 부터 차례차례로 내려 온다기 보다는 마지막으로부터 일어난다고 이해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는 그가 모든 사물의 마지막이며 모든 사물의 마지막이 예수 안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다는 한에서 그런 전제에서 창조의 중재자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이런 것도 논리적으로 확장되어가는 거죠. 예수님이 바로 모든 사물의 마지막이며 완성자이며 이미 예수, 역사적 예수안에 마지막, 그 마지막은 생명이 완성되는 그러한 건데요. 이것이 예수의 역사안에 나타나 있다고 한다고 하는 것을 전제한다고 한다면 그러면 당연히 창조의 중재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거죠. 창조가 마지막으로 일어난다고 하는 것하고 그건 당연한 논리 귀결이 아니겠습니까? 창조가 마지막으로 일어난다. 이것은 말장난이 아닙니다. 이걸 무슨 마지막으로 일어나냐? 이미 오래전에 창조되었고 그게 이렇게 내려오는 게 아니냐. 네. 연대기적으로만 세상을 보게 된다면 그게 맞는 이야기이죠.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서는 그러한 이 세상의 역사적 흐름을 그렇게 연대기적으로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체로 보는 거예요. 전체로, 하나로요. 과거가 있기 때문에 오늘 현재가 나타나는 게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의 사건으로 이해가 되는거죠. 그런데 결국 결정되는 것은 마지막 때라는 말입니다. 마지막 전체를 하나로 놓고 볼때도 역시 마지막이 중요한 거죠.

그거를 어떻게 조금 알기 쉽게 설명드릴 수 있을까요? 한 사람의 운명만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저도 어렸을 적부터 주욱 자라고 공부하고 여태까지 젊은 시절을 목회하면서 지내왔고 지금 이렇게 오십대 중반을 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하면 초등학교 어디 다니고 공부하고 어떻게 지내 와서 이게 이렇게 차례 차례 진행된다고 볼 수 있지만 그걸 우리 기독교 신앙적으로는 거꾸로 보는거죠. 내가 죽음이 임박해서 나, 나말이죠. 그때 결정되는 그가 그때 내가 과거 있었던 전체 나를, 내가 누구였는가를 결정하는 거죠. 만약에 제가 죽음에 임박해서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회의론에 빠져버리고 모든 것이 헝클어졌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 상태에 내가 현재 나를 결정하고 있는거예요. 내가 지금하고 있는 것들은 결코 그런 것에 의해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거죠. 고런 정도까지 하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종말에 일어난 생명의 완성자라고 한다면 당연히 세계창조도 예수에 의해서 일어났다고 하는 그러한 논리적 대답을 얻게 되는 겁니다. 이 마지막, 지금 제가 여러번 설명을 했는데요. 이 마지막이란 세계의 참된 본질을 결정하는 요인이다. 요건 밑줄을 그어놓고 늘 생각을 하십시오. 이것은 철학적 관점에서도 그렇고 물리학하고도 관계에서도 그렇구요. 기독교가 어떻게 그들과 보편적 진리의 차원에서 대화할 수 있느냐 그러한 가르침,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잘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이란 세계의 참된 본질을 결정하는 요인이다. 예수가 종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모든 사물은 그에게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이 마지막이 그를 향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마지막은 그에게서 연유된다. 예수는 역사의 중심이나 혹은 마지막, 그리고 그 안에서 창조의 중재자라는 사실 때문에 세계를 통치하는 하나님의 일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말은 예수 안에서 그리고 예수와 더불어 드러난 것이 만물을 포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예수를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 그리고 유일한 아들로 간주하는 분기점이기도하다. 그 다음 패러그래프요. 연결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외아들이기 때문에 그는 홀로 하나님의 계시를 수행한다. 아들과 또 아들이 계시해주는 자 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마 11:27, 요 14:6 참조). 따라서 말씀의 충만한 의미 속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도 역시 유일한, 한 아들을 통한 계시이다. 네. 제가 처음에 오늘 우리가 다루어야 될 고 부분이 조금 복잡하다 어렵다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어렵죠? 그렇죠. 그냥 어려워도 그걸 곱씹고 되새기고 또 이런 저런 각도에서 여러 번 전해듣고 하다보면 그것이 인제 이해가 되어요. 모든 면에서 다 이해되는 것이 아니지만 웬만해서는 그러한 반복적인 공부와 생각을 통해서 이해가 됩니다. 그래도 물론 한계가 있기는 있죠. 그러니까 공부라고 하는 것은 왕도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닌 거 같습니다. 이게 다른 거도 마찬가지인데 어떤 한 단계에 올라가야 그 다음단계가 눈에 보이기 시작하거든요. 비약하기가 힘들어요. 비약되는 어떤 계기가 있기는 있습니다. 자기의 생각이 껑충 뛰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비약이 아니라 준비된 거예요 자기도 모르게 인식의 층들이 깊어져서 이미 준비가 된 겁니다. 다만 어느 순간에 숨어 있었던 자기의 인식의 심화, 이런 것들이 드러나는 것뿐이죠.

지금 판넨베르그가 설명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우리들에게 전해준 이러한 신앙용어안에 있는 기독교 신앙의 내용들을 우리가 천천히 따라가고 있는거예요. 조금 어렵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려운 부탁이나마 여러분에게 전달되고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핵심적으로 이걸 요약하며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외아들이라고 하는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의 구원통치를 예수이외 다른 이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고 하는 뜻이예요. 초기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고백하게된 근거에는, 근거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구원통치가 공생애 동안에 예수의 가르침과 행위에 나타났다고 하는 그 증거를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로부터 부활시키셨다고 하는 사실에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예수의 부활이 흔들리게 된다면 그러면 기독교 신앙의 모든 논리들이 허물어지는것이 아니냐 생각할 수 있고 옳습니다. 바울도 부활이 없다면 우리들이 가장 어리석은사람들이다. 그렇게 표현을 한거거든요. 이런 점에서 부활이 핵심인데 그것도 여러분들이 그냥 죽은 사람이 환생하는 이런 정도로 생각하면 곤란하고요. 그건 뒤에 나올 겁니다. 훨씬 근원적인 생명경험이거든요. 그게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에 그걸로 인해서 예수의 운명에 하나님의 통치가 실재했다 현재했다 그렇게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것을 전재한다면 예수가 생명의 알짬인거구요. 결국은 생명의 완성자이구요. 모든 인류가 참여하게 될 최종적 그리고 보편적 생명세계가 예수에게서 담겨져서 성취되어 완성된거거든요. 그렇다면 이 미래가 예수안에 들어와 버린겁니다. 그렇다면 앞서 제가 판넨베르그의 책을 설명해 드린 것처럼 창조가 종말론부터 일어난다고 하나는 그러한 관점과 연관해서 생각할때 결국 예수가 창조의 중개자일 수밖에 없는거죠. 그런 점에서 초기의 창조, 창조의 완성은 종말이지만 미래가 오히려 사물의 창조를 일으키는 힘인데 어쨌든 초기 창조가 있지 않습니까? 그 창조까지 결국은 예수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그러한 생각으로 발전하게 되는거죠. 그게 선재성입니다. 예수가 2천년전 그 시대적 한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더 거슬러 올라가서 태초까지 선재하는 그러한 분으로 희망되는거죠.

네 이제 정말 복잡한 그리고 긴 패러그러프가 하나 남아있습니다. 한 패러그래프가 두쪽이 되네요. 두 쪽이 한 패러그래프로 된 글입니다. 이걸 우리가 어떻게 소화해내느냐. 참 고난의 행군이 남아 있군요. 자 한숨 돌리시고 자 진도를 나가봅시다. 저도 힘을 내서 가보겠습니다.

신학적 인식에 관한 기초적 연관성은 확실히 역으로, 거꾸로 진행된다. 신학적 인식에 관한 기초적 연관성, 서로 연결되잖아요. 하나님의 아들, 선재성, 하나님의 구원통치 그리고 종말에 완성될 생명, 이런 것들이 다 이렇게 저렇게 연결되잖아요. 그걸 말하는 것인데 그 연관성은 분명하게 거꾸로 진행된다고 하는 뜻이죠. 이게 무슨 뜻이죠? 나옵니다. 사실 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와 그 계시의 유일성은 예수가 독생자라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서, 즉 우리의 인식과정에서 그걸 깨달아 가는 과정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외아들이라고 하는 언급은 거꾸로 하나님이 그 안에서 계시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표현일 뿐이다. 이 연관성을 지금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외아들, 그리스도의 게시,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 어떤 것이 먼저냐 후냐 이런 건데 계시? 유일성 이런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는데 그러나 우리의 인식과정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실에 근거해서 그 예수가 하나님의 계시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하는 것이죠. 그 연관성이 어떤 것이 선이냐 후냐 그런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분명히 인간의 삶과 항상 연관되어 있는 신적인 현실성이 자기를 드러내는 길은 여러 가지다. 신적인 현실성, 신적인 현실성, 독일어는 göttlich Wirklichkeit(궤틀리쉬 뒤더트리쉬가이트) 이렇게 되어 있을 겁니다. 신적인 현실성, 신적인 현실성이 자기를 드러내는 길은 여러가지다. 인간들은 자기 실존을 실행할 때만 세계를 현존하도록 이끌어가는 현실성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다. 이거는 뭐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조금 더 천천히 가보겠어요.

그것은 이런 저런 방식으로 인간들과 관계를 가질 때 이미 전제되어 있다. 이렇게 인간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사건에서 신적 현실성은 인간에게 여러 방식으로 알려진다. 영역으로 하자면 divine reality 이렇게 되겠죠. 그 현실성은 인간에게 여러 방식으로 알려진다. 종교의 역사는 철저하게 이에 대한 흔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알림은 대개가 무언가 잠정적이며, 또한 그와 같은 현실성과 다른, 그리고 새로운 경험을 통해서 해체될 수 있다. 네 어떤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현실성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게 인제 더 새로운 경험이 오게 되면 그것은 이제 허물어지게 되는 거죠. 종교의 역사에서 우리는 이런 것들을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와 가까운 유대교와 기독교와의 관계를 설명하면 유대교에 하나님 경험들이 유대역사에서 일어났는데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경험을 통해서 대체된 역사가 2천년동안 일어나게 된거죠. 물론 유대인들로서는 용납하지 않겠지만 그러한 종교사적인 흐름들이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데서도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잠정적이라고 하는 거죠. 신적 현실성이 드러나는 그 통로가 그렇다고 하는 겁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해서 이러한 알림. 하나님의 자기알림이죠. 계시라고 할 수 있겠죠.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해서 이러한 알림은 신의 최종적인 자기 계시*일 수 없다. 자기계시. 제피스트오펜바룽인데요. 그러니까 최종적인 계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거예요. 하나님이 실제로 드러나는 그러한 것을 이야기합니다. 제피스트 자기죠. 중간중간에 나타나는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최종적인 자기계시는 아닌거죠. 잠정적인거죠. 임시조치인거죠. 최종적인 것으로 가는 하나의 통로라고 할 수 있죠.

(Selbstoffenbarung)라는 용어는 헤겔 이후로 기독교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 되었다. 기본적으로 기독교 신학에서 계시는 하나님 자체로 인식된다. 하나님이라는 주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계시 현상이 나타나는 게 아니라 계시 자체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또한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가 다른 게 아니라 일치된다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로 존재한다고. 판넨베르크의 경우에 이 계시는 보편사적 개념으로 파악된다.

이 알림이 유일하고 최종적인 진리를 요청하게 되는 곳에서도 역시 이 알림을 해체하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통해서 다시 그 성격을 상실한다. 절대적으로 사람들이 믿었던 어떤 것들도 결국은 새로운 경험,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통해서 그 성격을 놓칠 수,

절대화가 상대화가 될 수 있는거죠. 이러한 논리라고 한다면 기독교가 역시 그런가 할 수 있겠군요. 판넨베르그가 종교 상대주의, 종교다원론을 이야기하려고 하는걸까? 그런 의심이 들기도 하는군요. 지금 그걸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의 역사에 나타난 그러한 그 사실들을 설명하는 것이구요. 그 설명을 하는 이유는 성서에서도 기독교 교리에서도 그러한 하나님에 대한 경험들이 서로 여러 방식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사실을 말하려고 하는 겁니다. 어떤 것이 나오면 더 새롭고 옳은 것이 나오게 되면 앞서 있었던 그런 것들이 극복되는 그러한 흐름들이 기독교 역사에도 있는거죠. 그걸 인정해야 되는거죠.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사신(使信)은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최종적인 성격을 확보한다. 다른 것들은 잠정적인 성격에 머물렀지만 예수의 복음 선포, 즉 하나님나라 선포죠. 임박한 하나님 나라선포, 그리고 그것을 그렇게 살았던 하나님의 통치 이런 것들은 최종적인 성격을 확보한다. 왜 다른 종교들은 잠정적이 성격인데 이 예수님의 하나님의 선포만이 최종적인 성격을 확보하냐 그렇게 질문할 수 있어요. 고건 인제 더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설명합니다. (네 저 혼자만 시원한 과일 주스를 마셔서 미안합니다.) 그 사신, 복음선포가 최종적이라는 것이 보장됨으로써만이 아니라 혹은 그렇게 주장되는 것만으로서 만이 아니라 혹은 그 내용이 독특하다는 점에서도 역시 그렇다. 이 내용이 독특한 이유는 예수의 복음선포가 인간으로 하여금 유일하고 독자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의 복음선포는 신적인 자기알림이 발생하는 그 어떤 미래를 통해서도 추월당하지 않는다. 새로운 것이 오면 낡은 것이 대치된다고 이야기했잖아요. 그렇게 대치되지 않는다. 추월당하지 않는다고 하네요. 예수는 따라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 결정을 그 복음선포에 대한 인간 각자의 태도에 따라서 선취할 수 있었으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나 용서를 선포할 수 있었다. 이러한 궁극적인 ‘종말론적’ 전권을 요구함으로써 그는 결국 십자가를 지는 데 까지 이르게 된 사건을 불러일으켰으며, 제자들의 경험에 의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전권을 부여받는 자로 확증되었다. 이런 확증은 죽은 자로부터 부활함으로써, 또한 하나님에게서 파생된 그의 삶이 갖는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현실성이 나타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 ‘종말론적’ 성격으로 인한 궁극성에서 예수는 바로 앞서 표현된 의미로 하나님의 계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예수가 아버지라고 부른 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원시 기독교적 양식을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가 하나님의 미래만이 인간 구원을 결정하는 유일한 요인이라고 선포함으로써 예수의 사신이 선포된 곳에서 하나님의 미래가 이미 현재적으로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예수는 하나님의 미래를 통보함으로써, 그리고 그것에 기초해서 선포하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인간에게 하나님의 미래를 드러내는 대리자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미래에 근거해서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에 의해 최종적으로 증명되었다. 계속 부활의 중요성이 여기서도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가 행했던 모든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확증이 바로 부활이다하는 거죠. 최종적인 확증이 바로 부활인거죠. 더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최종적인 자기알림을 수행하는 자로서 예수는 우리에게 아버지의 외아들인 바로 그 ‘아들’을 의미한다. 이 하나님은 이러한 사명의 전권에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궁극적 결정을 이미 선취한 분을 말한다. 여기서 이러한 진술방식에 담겨진 예수가 하나님의 외아들이라고 하는 위탁된, 메타포적인 성격이 또렷하게 드러나게 된다. 중요한 대목이 시작되는 군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양식은 근원적으로 예수의 초자연적이고 육체적인 가문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고 말하는 양식이 아니다. 이 양식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하는 고대교회의 양식은 자신의 사명과 자신의 역사에서 표현된, 그리고 그에 의해 선포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석해주고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비유적으로 표현된 ‘아들’이라고 하는 말은 만약 우리가 구약성서의 그 유래를 생각하기만 한다면 전반적으로 이해할만하며 적절하다 하겠다. 우리는 아마 아버지라는 이름이 하나님에게 걸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고유한 경험의 지평에서 말할 때 아들이라는 이름을 직접 예수에게 적용하지 않으려고 할지 모른다.

그러니까요. 이런 말이예요. 외아들이라고 하는 외아들 하나님의 아들 이러한 표현들이 유대교의 근거에서 볼 때 초 지상적인, 초자연적인 예수의 가문,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그러한 존재를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거죠.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이름은 맞지않는것 아니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죠. 우리가 굳이 그런 이름을 붙여야만 되느냐 하는거죠. 그런 말을 할수 있는 거죠. 그러나 마치 기독교 신앙의 역사에 담겨있는 예수현상이 예수현상, 예수에게 일어난 모든 구원론적 현상들이요. 그런 것들이 그 어떤 표현도 전혀 발견하지 못한 것 같다거나, 그 현상에 대한 적절한 어떤 표현도 발견하지 못한 것이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그런 표현을 붙인 것이 아니냐? 또한 그런 이유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여기에 어울리는 표현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찾아보아야만 할 상황에 직면해 있는 것이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거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 오늘 이 시대에 적합한 표현들을 찾아봐야 하느냐 이러한 요구들은 옳지 않다고 하는거죠. 비록 외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신적인 본질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표현을 대치할 수 있는 오늘에 맞는 그러한 표현을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에게 적절한 표현이 무엇인지 찾는 작업을 항상 거듭해서 처음부터 시작해야 된다고 하는 것은 일종의 착오, 착각일지 모른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이름을 거슬러 올라가서 처음부터 다시하자 이런 것은 잘못이다. 각기 오늘의 기독교인은 본질적으로 예수 현상에 대한 해석 역사인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역사로 돌입하고 있다. 흐름이 주욱 있다. 역사가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해석의 역사가 있다. 지금도 우리는 여기에 참여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이 시간 감당해야 할 일을 잘하면 되는 거고 오늘 그리스도에 대한 해석의 역사에 들어있으면서 어떻게 우리가 감당해야 될 몫을 잘 할 수 있느냐 그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거죠.

여기서 우리는 전통에 대해서 비판적이지 않아야 할 필요는 없다.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으로서 그는 모든 비판적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그 전통에 가담하게 된다. 그리스도에 대한 해석 역사라는 그러한 전통에 가담하게 된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사실을 포기하지 않을 수도 있고, 또한 예수 공동체가 그를 ‘아들’로서 이해했다고하는 사실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러한 뜻입니다. 해석의 역사속에서 우리가 들어가서 비판적으로 고찰함으로서 우리는 해석역사에 한 몫을, 역할을 감당하는 거죠.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 칭호와 예수에 대한 아들 칭호를 비판해보자는 오늘의 문제제기에서도 역시 실질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인정된다. 물론 ‘아들’로서의 예수사건은 오늘의 인식에서 최초 기독교인들과는 다른 지평을 제시한다. 어떤 다른 지평일까요? 다시 고 문장을 보겠어요.

아들로서의 예수사건, 아들로서의 예수사건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에서 나온 것이거든요.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했다고 하는, 그런 관계를 설정했다고 하는 그 사실을 초대기독교인들이 예수를 이해하는 결정적인 근거로 보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예수 사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러한 예수 사건은 초기 기독교인들의 인식과 우리와의 차이 그런 것들을 갖고 있다고 하는 거네요. 고게 정확하게 그게 뭘까요? 그건 이런 거죠. 그들에게서의 하나님 이해 혹은 세계이해, 이런 것이 우리들하고 달랐기 때문에 그러한 아들이라고 하는 메타포가 주는 의미가 다를 수 있는거죠. 조금 더 보겠습니다. 고건 제가 지금 설명한게 딱 떨어지는 대답은 아닌 것 같아서 조금 찜찜하기는 한데 고거를 제가 더 정확하게 설명할 준비가 좀 덜 된것 같습니다. 나중에 준비가 되면 말씀드리겠어요.

원시 기독교에서 이 칭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칭호죠. 그 칭호를 역주로 달았습니다. 이미 예수 사건과 역사를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은. 역주를 보겠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외아들이라는 사도신경의 고백은 어떤 자연과학적, 혹은 사회과학적 사실이라기보다는 해석학적 진리를 드러내는 사건이다. 따라서 신학은 예수가 어떤 해석학적 지평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호칭되었는지, 그리고 지금도 역시 그런 칭호가 유효한지 설명해야 한다. 초대교회의 이러한 해석이 오늘 우리들에게 여전히 진리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당연히 오늘의 현실성 경험에 근거되어야하기 때문에 오늘의 기독교인들은 이 호칭을 순전히 예수의 초월성을 강화시키는 도그마로서만이 아니라 개방된 진리인식의 차원에서 해석할 준비를 갖추어야만 한다.

역주도 뭐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군요. 제가 여기에 딱 떨어지는 것은 각주도 아닌것 같은데 제가 왜 번역할때 달았는지 모르겠네요. 필요했기 때문에 달았겠죠.

원시 기독교에서 이 칭호**가 이미 예수 사건과 역사를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외아들이라고 하는 이 칭호는 초기기독교가 예수 현상을, 예수 사건을, 혹은 예수 운명을 해석한 결과거든요. 이러한 것들은, 해석했다고 하는 이러한 사실은 오늘 우리의 인식지평에서 볼 때 이 칭호 자체의 의미가 근본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칭호를 버릴 수는 없다고 하는 거죠. 왜냐하면 이 칭호에 예수의 정체에 대한 해석이 담겨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칭호를 버리게 되면 칭호에 이르게된 신앙적 해적 이런 것들이 다 휩쓸려 버리고 마는 거죠. 조금 다른 차원에서 아버지 아들이라고 하는 비유, 혹은 메타포가 주어졌지만 그러한 것들을 다 포기해 버린다면 그러한 메타포가 말하려고 하는 근원적인 차원도 다 놓쳐버린다고 하는거죠.

현재의 생명체가 전승의 역사에 정렬, 뒤따라서 서게 되는 건가요? 정렬된다는 것은 이미 전승된 것을 현재와 연결시킨다고 하는 의미이며, 또한 이로써 역사 자체는 현재적 경험의 차원이 된다. 하나님의 외아들이라고 하는 그 전승들이 오늘 우리들에게까지 살아있는 경험이 되는거죠. 이 경우에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더 이상 초자연적이고 신적 세계의 자명한 형태가 결코 아니라, 예수의, 인간 예수의 현실성을 해석하는 연관 가운데서만 오늘의 이해에 적절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까지 오늘 해야 하겠군요. 참 힘든 한 시간이었습니다. 딱딱한 음식을 먹은 기분이죠. 소화가 되셨나요? 저로서도 미리 한번 읽기도 하면서 또 여러분에게 설명하면서 더 새로워졌습니다.

오늘의 어떤 인식지평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있다는 건 말이 안되는 건 사실이예요. 그러나 유대교와 헬라의 사상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이었거든요. 오늘의 인식 세계에서 좀 못마땅하더라도 고대인들의 그러한 칭호에서 그들이 드러내려고 했었던 그리고 경험했던 예수에 대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해석한 어떤 그 역사, 해석하는 역사에 담겨있다고 하는 점에서 중요한 거거든요. 그런 해석의 역사가 오늘 우리에게 연결되고 있다 뭐 그런 정도로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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