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공부, 2015610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9장 빌닷을 향한 욥의 대답(1)

 

욥기의 기본은 유대의 지혜 전통에 대한 도전이다. 지혜 전통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믿음에 대해 적절하게 보상한다는 입장이다. 8:20절에서 빌닷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욥은 그런 전통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의 실존에서 볼 때 하나님은 인간의 선악을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으신다. 노자 도덕경 5장에 나오는 천지불인(天地不仁)’과 비슷한 의미다. 해변 120미터 절벽 위에 새끼를 부화하는 새가 있다. 그 밑으로는 날카로운 바위들이 늘어서 있다. 부화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새끼들이 부모를 따라서 그 아래로 몸을 던진다.

 

<1-10> 1절 이하에서 욥은 빌닷의 지혜 전통을 (냉소적으로) 인정한다. 2절을 의역하면 다음과 같다. ‘빌닷, 자네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내가 잘 알고 있네. 아무리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의로울 수 없다는 거 아닌가. 자네 말을 인정하네.’ 3절 이하도 그 사실에 대한 해명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 무슨 변론도 소용이 없다. 5절부터 자연의 힘이 언급된다. 지진, 화산 폭발 앞에서 인간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7절에서는 해와 별까지 하나님의 능력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이 언급된다. 하늘, 바다, 불두칠성 등등, 하나님은 측량할 수 없는 큰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분이다(10).

 

<11-24> 위 단락은 지혜 전통에 대한 동의다. 이런 전통은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하다. 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실존에서 지혜 전통에 근거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다는 사실을 11절에서 언급한다. 지혜 전통에 근거한 자연신학이 인간 불행의 원인을 다 해결해주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13절에 나오는 라합’(26:12, 89:10, 51:9 참조)은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공격할 때 내부에서 도와준 기생이 아니라 바다의 괴물을 가리킨다. 라합과 그 영들을 굴복시키는 하나님이 자기의 변론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서 욥은 절망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17,18절에서 말하듯이 하나님이 자신의 삶을 파괴했다는 사실에 있다. 아무도 하나님을 소환해서 시시비비를 따질 수 없다(19). 그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자기의 목숨까지 버릴 각오가 되어 있다(21).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똑같이 멸망시키기 때문이다(22).

 

<25-31> 욥은 수렁에 빠져 있는 자기의 운명을 다시 토로한다.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고통이 없는 것처럼 태도를 바꾼다고 해도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게 분명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한다. ‘내가 정죄를 갈할 텐데 공연히 위선적으로 살지 않겠다.’(29).

 

<32-35> 급기야 욥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재판관을 원한다(33).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서 누가 옳은지를 정확하게 판단해줄 이를 기대한다. 그러나 그런 이가 없다는 사실을 욥은 안다. 절망적이다. 이제 욥의 선택은 한 가지다. 하나님의 막대기와 위엄이 자기를 떠나서(34) 할 말을 실컷 하는 것이다(35a). 문제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35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