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텍스트를 얼마나 정확히 이해하는가. 앞으로 기회가 되면 가능한 본문들을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성서 텍스트 톺아보기라는 주제로 글쓰기 해보려고 한다.

지금까지 두가지를 중심으로 했다. 하나는 설교비평. 하나는 설교가 무엇인가에 대한 강연. 설교비평은 설교를 직접 끌어다가 놓고 비평한거고 특강은 설교 전체에 대한 개론, 예를 들면 한국교회의 강단은 무엇이 문제인가, 성령론적 설교란 무엇인가, 설교와 해석학. 열 몇편을 써서 강의안으로 묶어서 지난 봄학기에 강의했다. 앞으로 정리해서 책으로 낼 생각이다. 다비안 책으로.

말이 나온 김에 책이야기하나하자. 기독교서회에서 설교비평집 3집 작업 중이다. 작업하려면 전체교정도 보고, 사진도 구하고. 판넨베르그 사진 어디서 구하냐. 사이트 소개해 주었다. 3권의 제목을 정하지 못했다. 어떻게 할까 생각중이다. 이것은 어떨지? 설교가 뭐꼬? 어떨지 모르겠다.

이야기가 옆으로 갔다. 크게 두가지, 설교비평, 설교가 무엇인가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 해석학, 영성. 신대원 같은데서 강의 주면 잘 가르칠 수 있겠는데 기회가 오지 않는다. 설교학 교수들의 전문영역, 월권한 것이다. 그분들에게는 정말 죄송하다. 외과의사가 성형외과 손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 입장에서는 성형외과 성형하는 것이 얼굴을 너무 형편없이 뜯어고쳐서 그러지 말아라. 인간의 얼굴을을 천연적인 그런 아름다움으로 조금씩 바꾸어라. 재미있으라고 드린 말씀이다. 설교학 교수님들이 해야할 일을 월권을 해서 두고 두고 미안한 마음이 있긴 있는데 그래도 하고싶은 말이 많기 때문에 기회가 되면 신대원 학생들에게 꼭 필요한거다. 말하자면 설교란 신학의 꽃, 거기에는 조직신학, 윤리신학 성서신학 교회사 총체적으로 다 연결된다. 그런 준비없으면 설교 불가능하다. 성서텍스트를 신학자처럼 주석만해서 설교가 되지 않는다. 창조 종말 칭의 성화 구원 교회 하나님나라 등 여러가지 조직신학적분야와 연관.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한다. 신대원졸업, 목사님들의 핵심적인 문제. 성서신학과 조직신학의 소통이 되어야 하는데 잘 안된다. 연결시키지 못한다. 내가 잘한다는 말이 아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신학생들도 조직신학을 싫어한다. 설교와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적용만 잘하면 된다. 엄청난 착각이다. 주석으로부터 신자들의 삶으로 직접 적용 해나가는것 이게 문제다. 그 사이에 성서텍스트로부터 설교를 들어야 한다. 그 사이에 연결해주는 것 어떤것이 이다. 조직신학이 감당해야할 문제다. 내가 신대원들에게 설교문제를 가르친다면 그런 것을 어떻게 하는가 애기할 것 같다.

성서본문 하나. 삭개오 이야기.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나도 젊었을 때 그렇게 설교했을 것이고 지금도 그런 분들이 많을 것이다. 부자 세리장. 키작고 열등감. 사람틈에 끼지 못하고 용감하게 뽕나무에 올라갔다가 예수님 집에 모시고. 남의 것 사기친일 4배 갚겠다 자기 재산을 반이나 떼서 가난한 사람 돕겠다. 그런 이야기. 그런 것 본문으로 해서 우리가 삭개오처럼 변화되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예수님 믿으면 변화가 온다. 베풀고 봉사해야 한다. 그렇게 학생들에게도 신자들에게도 헌금하는 것까지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성서텍스트의 남독, 오독, 왜곡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의 대상은 그 이야기에 나오는 여러사람들중에 복음서에서 핵심은 예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포커스는 예수님. 예수님과 상대하는 어떤 사람들을 이야기해야 한다면 삭개오가 아니라 거기는 바리새인들,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간 것에 대해 불평하던, 수군수군하던 사람들이었다. 문제는 그 사람들이다. 예수님과 수군대던 사람과의 알력, 충돌관계에 있던 사람들, 굳이 상대한 사람들을 불러서 설교의 주제로 삼아 설교하려면 삭개오가 아니라 바리새인, 율법주의, 자기성취, 자기집중이 얼마나 하나님나라와 관계가 먼가. 삭개오는 말만 주인공 바리새인들의 문제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나오게 되는 그들을 말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 더 중요한 것은 본문에서 잃은 자를 구원하러 왔다. 그 핵심이다. 그 삭개오 이야기에서 삭개오의 변화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만난다고 해서 재산 잘라내는 것이 아니다.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문제다.

우리는 자주 성서 본문에 대한 오해가 많이 있다. 특히 한국교회 적용중심의 설교 성경읽기 일종의 populism 은혜, 교회로 견인해 내냐 그런 것에만 모든 것의 목표가 되어 있을때 성서텍스트가 오독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성서텍스트 톺아보기 이런 쪽으로 좀 작업을 좀 해야 하겠다. 여태까지는 설교비평 구체적인 사람을 하거나 이론적, 성령론적, 해석학적으로 설교가 무엇인가를 이야기했다면 이제는 실제적으로 성서텍스트쪽으로 들어가는 일. 이렇게 성서텍스트 마저 오독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그렇다면 우리가 기독교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나?

기독교가 뭐꼬? 화두로 6개월간 할 것이다. 첫시간 못들어오신 분. 첫시간 이나 마찬가지다. 본문 들어가지 않았다. 강의하면서도 강의안에 없는 이야기를 많이 할 수 있다. 강의안은 파워포인트로 띄웠다. 책도 있고 메일로 띄우겠다. 박원관 조교. 12장까지 한 장씩 보내드리겠다. 2주에 한번. 강의안을 잘 읽으면 따라 올 수 있겠다. 강의안을 따라가지만. 강의에 집중해야 하는데. 신대에서 강의할때 거기안에 머물때만 있다. 학생들에게 이야기할 때 재미가 좀 없다. 강의, 설교하시는 분들의 경험. 생각들은 다 숨어있다. 숨어있는 것이 계기가 될때 창조적, 시 준비되어 쓰지 않는다. 시인이 아니라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뻔할 거다. 처음부터 다 쓰는 것이 아니라 쓰는 순간에 언어가 말을 거는 경우, 아무런 준비되지 않는 상태에서 아니가 다 준비된 상태에서 순간에 그 미묘한 것이 있다. 작곡가인 경우 소리가 말을 거는 경우 순간에 아주 미묘한 경우. 충실한 것이 좋다. 너무 자유롭게 강의하다보면 정말 중요한 것을 빠뜨리게 된다.

독일같은 경우 교수들이 강의할때 강의가 여러가지 종류가 있다. 가장 기본적인 게 Forleswng 레제. 읽는다. 포오.. 앞에. 독일어는 조합이다. 그래서 철학을 할 수 있다. 언어가 앞에 무엇을 부치는가에 따라 확장. 포레종. 가장 기초다. 일종의 Introduction 이다. 우리나라는 기초를 강사나 조금 비중이 수준이 낮은 사람에게 맡긴다. 세미나, 하프, 오버세미나, 토론, 작은 강의 팀. 포레종 100명 150명. 재미있는 것은 포레종 그 강의를 권위자 최고학자가 한다. 기초를 그런 노교수들이 한다. 우리 같으면 그런 노교수들은 고급세미나나 하려고 한다. 나도 주로 기초. 강사니까. 독일에는 이 경우 노교수가 많은 경우에 강의안을 놓고 읽는다. 책을 읽듯이 읽는다. 다 그런것은 아니다. 강의안을 찬찬히 찾아가는 것도 필요하다. 우리는 반반씩 하겠다. 진행되는대로 하겠다.

머릿말은.. 이것만 갖고도 한 시간을 하긴 해야 하는데. 우리가 뭐냐? 기독교가 뭐냐? 믿는다는 것이 뭐냐? 이런 것에 대해 좀 질문하자. 너무 아는 것처럼 지나가고 있는 것이 아니냐? 깨놓고 보면 모르면서 스스로 아는 것처럼 서로 속임수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런게 많이 있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좀 더 진솔하게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되보도록 하자. 그런 뜻으로 머리말을 썼다. 이게 밑에 보다 시피 2001년도 책이다. 책 제목. ‘기독교를 말한다.’ 많이 팔렸다. 2001년도에 나왔는데 계명, 대구대학교에서 기독교 교양과목으로 가르친 강의안 정리해서 나왔다. 기초적인 것을 이야기했지만 그러나 기초라도 근본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수준이 낮은 것이 아니다. 지성인을 위한 인문학적 기독교 읽기-부제. 인문학을 통로로 해서 기독교의 맛을 보자. 기독교 안으로 들어가자.

내가 자주 쓰는 표현이 있다. ‘어디로 들어가자.’ 어떤 세계가 있다. 음악에도 소리, 미술에는 어떤 세계가 있다. 세계가 무슨 세계냐? 이쁘다 아니다 기분좋다 나쁘다라고만 생각한다면 전혀 예술, 시, 문자, 살아가는 이 세계를 잘 모르는 말씀들이다. 기독교도 그렇다. 거기에는 많은 세계가 담겨있다. 한 단어 자체에만도 우리 신앙선배들의 치열한 수많은 담론이 들어가 있다. 도사가 기도원에서 기도하다 담박에 받아낸 교리 하나도 없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은 역시 다르다.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다르구나. 다 아시는 것 말씀하시는 구나. 아들이기에 직접 받아가지고 말씀하시고 그러셨을까? 복잡한 문제이긴 하나 예수님도 시대의 아들이다. 역사의 아들이다. 유대인의 전통, 역사, 당시의 삶을 벗어난 것이 아니다.  벗어난 것이 아니다. 예수님도 그 당시 사람들과 같이 세계에 매여 있다. 벨트안사용 벨트. 세계관, 안. 전치사로 붙어있는것, 샤웅, 보는 것. 세계관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을 벗어나면 그것은 귀신이다.

예수님은 니케아공회이후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개념, 참인간, 참하나님이다. 베레호모, 베레데오스. 인간이지만 하나님에 강점을 두나? 어디에 강점을 두느냐? 어디에 무게를 두느냐는 것이 아니다. 두가지 본질... 참된 인간이며 참된 하나님이다.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동일시되었던 인간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신성에 무게를 많이 둔다. 초기 기독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인성을 신성과 똑같은 무게로 주장했다. 이게 기독교 신이해의 혁명적 전환이다. 강의하면서도 나오게 될지 모르겠다. 하나님에 대한 질문일까? (기독교론에 대한 문제. 조직신학문제에서 다뤄야 할 것 같다. 기독꼬가 뭐꼬? 재미있게 배웠다면 조직신학, 평신도도 이해할 수 있는 조직신학. 사실은 신학이 어떻게 보면 어렵지만 어떻게 보면 어렵지 않다. 직면에 대해 있는 세계를 보고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면 신학이 재미있다. 철학책에 있는 것이 철학 석사학위를 꼭 따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우리는 인문학이니까 그 책 따라갈 수 있다. 조직신학. 분량이 많다. 두배정도 될 것같다.) 신비. 반신반인이 아닌 온전한 인간, 동시에 온전한 신. 도대체 이것이 무엇인가? 이정도로만 이야기하자.

한 부분 집고 넘어가자. 초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인성을 한순간도 부인하지 않았다. 우리와 다를게 없는 똑 같은 참된 인간, 우리처럼 먹고 배설, 우리가 가진 모든 희노애락, 에토스, 파토스 열정들 다 가지고 있다. 어느 한가지라도 빠지면 인간이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시대의 아들로서 제한을 가졌다. 신화적인 시대였다. 오해 말라.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세계 바라보는 형식은 2천년전 고대시대 그것이다. 물리학이 미숙할때 였으니. 태양, 화산, 해일이 뭔지. 그들이 그것을 알았을까? 얼마나 그들은 세계앞에서 두려웠을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라.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로 올라가봐야 한다.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님 설교 비평할 때 끝 부분에 시간여행이라는 한 대목을 잡았다. 오늘 성서를 읽는 사람은 지금 여기서 읽지 말라. 제발 시간여행을 하여 2000년전으로 돌아가라. 그 시대에 가서 그들의 삶, 그들의 언어로 세계관, 전문적인 용어로 그들의 지평에서 그걸 우선 이해하고 경험해야 한다. 모자르트의 음악을 연주하려면 지금의 현대의 감각만 가지고 이해하려면 우스운 것이다. 돌아가야 한다. 그가 왕조시대에서 겪었던 그 시대. 성서는 2000년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타임머신. 시간여행을 하자. 그걸 안한다. 그걸 느끼지 않는가? 내가 지금 2000년전으로 돌아갔네. 아니. 지금이 좋아. 현대적인 감각들. 열심히 전도하고 교회짓고 그런 것에 취해있다. 2천년 전에 영성을 전혀 경험하지 못한다.

지난 주부터 샘터교회에서 예전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마음만 먹었지 못했다. 20여명의 공동체. 예전예배를 드린다. 그게 역사다. 리터지. 2천년 전과 지금을 연결해 주는것. 형식주의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심벌이다. 그 예배에 참여하면서 내가 2천년전 카타콤에서 예배드리는 사람들의 경험들이 와 닿아야 한다. 2천년동안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기도했는가를 배워야 한다. 지난주 예배순서를 보면 신앙고백시간에 사도신경이 아니라 니케아 신조를 같이 써서 읽었다. 사도신경과 비슷한 내용이지만 조금씩 표현이 다르다. 우리가 325년에 있었던 니케아 공의회의 것을 통독하면서 읽었다. 역사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이다. 성서텍스트와 2천년의 영성을 보자기에 싸서 묶어놓고 펴볼생각도 않고 나의 실존적 here and now 지금 여기서 상당히 개인적, 상당히 주관적 상당히 심리학적, 상당히 센티멘탈한 감성주의적인 것인 영성이 있다. 생명을 담고 있는 그것을 안고 있는 성령의 영성과 얼마나 소통이 될는지 좀 회의적이다.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니다. 요 부분 나의 주관적인 결단과 실존적인 영성 그것과 2천년간의 기독교역사와 성서텍스트가 안고 있는 그 세계. 이건 좀 객관적인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도 내가 믿어야지 내가 믿음이 없는데 되냐? 착각이다. 아시겠는가? 강하게 끊어서 이야기한다. 여러분이 믿지 않아도 하나님이 구원 역사한다. 우리는 그걸 놓치고 내가 믿습니다. 믿습니다. 여러분이 믿지 않아도 구원받을 가능성이 높다.  하나님의 일이다. 내가 뭘 믿어도 전혀 하나님의 일과 거리가 멀수 있다. 개인의 실존적 믿음과 결단. 우습다. 별거 아니다라는 뜻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 따라가는 것이다. 종속적인 것이다. 더 근원적,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통치다. 이것을 알아가고 이것이 역사 안에 있는 것이다. 오늘 강의는 안 나가고 엉뚱한 소리. 그러나 간접적으로 다 연결되는 것이다.

오늘 2001년에 머리말을 썼는데 한 7년 되었다. 한성산 아래 하양. 이것을 조금 책을 증보해서 강의 끝난 다음 금년 말쯤에 기독교가 뭐꼬?라고 하는 제목으로 다시 내볼까 생각하고 있다. 책을 펴낼 것이다.

차례를 보자. 12장까지 있다.

1장: 초대교회의 토양
원시 기독교 공동체
유대인의 생존투쟁
율법
시내산
안식일
성결법

어렴풋이 알고 있다. 인문학적으로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시내산 하나만도 할 애기는 태산같다. 여기서 율법이 나왔다. 시내산 혹은 호렙산이라는 이곳. 이드로 라고 하는 미디안 제사장은 모세의 장인이었다. 이방신. 미디안 광야의 신의 제사장. 그의 데릴사위. 사십년동안 먹고 자고 했다면 미디안 종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시내산 호렙산 이름만 다름. 소명을 받았을때는 호렙산, 출애굽 율법을 받은 때는 시내산. 이 산은 미디안 종교의 성산, 성지다. 모세가 왜 이 미디안 성지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는가 생각하면 공부할 것이 얼마나 많는가?
안식일 유대인이 인류에게 준 이상이 많이 있는데 안식일이야말로 큰 유산이다. 혁명적인 법이다. 유대인 율법을 많이 생각하는데 예수님도 복음서에서 많이 충돌. 율법. 자유 해방시키려고 나왔는데 교조화 도그마 잘못쓰여져서 그런데 원래는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돼지고기 먹지말라. 성결법. 먹을것 안먹을 것 구분. 왜? 기름끼, 돼지고기 전염병, 위생건강, 건강에 위태로왔다. 안 먹는 것이 건강에 맞는 것.
왜 유대교.. 초기 기독교가 여기에서 시작.
중요한 것은 기독교가 뭔가 하는 거

2장: 역사적 예수
처녀 마리아 무슨 뜻인가
동정녀 탄생가능한가?
인간예수
출가
세례요한과 예수
하나님 나라
팔복
제자선택

예수의 사건중에 핵심
3장: 십자가와 부활사건
예루살렘까지
밥상공동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손 씻는 빌라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빈 무덤

4장: 세계교회의 역사
오순절
성령강림
313년
1054년
1517년
솔라 스크립투라 솔라 피데 솔라 그라티아
1948년

잘하면 신대원 3년 졸업한거나 마찬가지다.
유대교와 기독교. 십자가 부활 교회역사 동방교회 마틴루터가 신앙 슬로건으로 내놓은 것 솔라 스크립투라 솔라 피데 솔라 그라티아 이것만 알아도 개신교의 특징을 알수 있다. 1948 WCC 창설된 해다.
교회역사 끝난 다음 성서신학 시작

5장: 구약성서와 히브리즘
히브리즘과 크리스챠니티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서
전승으로서의 하나님 말씀
모세오경
빛이 있으라
너의 고향을 떠나라
엑소더스
만나와 메추라기
예언서
성문서

구약은 히브리즘. 신약은 시오니즘.

6장: 신약성서와 구원의 보편성
신약성서의 형성과정
복음서
사도의 선교역사 서신
바울과 기독교
요한계시록

7장: 기독교의 형태와 본질
실천신학이다. 교회안에 있는 실제 행태
예배 기도 헌금 성찬식 목사 장로 당회 여성안수
이런 문제들을 현실적인 것 교회안에서 벌어지는 것 관심 많을 것이다.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8장: 하나님에 대한 물음
존재에 대해서 실체론적인 하나님 이해 신앙적 인식론 하나님의 불변성비종교적 해석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
삼위일체 잘 극복할 수 있으려나..

9장: 인간에 대한 물음
인간에 대한 질문.
인간이란 무엇인가? 신앙의 인간론적 바탕 창조와 진화
호모 에렉투스 3백만년전의 인류의 조상. 침팬지와 인류. 갈라진 때. 그런 생물학적인 인간. 생물학적인 인간이해를 부정할 수 없다. 두려워할 것 하나 없다. 기독교의 인간 이해.
인간은 흙이다
영적인 존재
인간 현실로서의 죄

죄에 대한 이해. 숙명. 과연 죄가 뭔가. 한국 교회 병폐중에 하나가 죄책감에 근거한 영성에 머물러 있다. 죄인입니다. 죄가 기독교의 현실이기는 하지만 헌금, 기도생활 못했는데 어떡하나. 새벽기도 빠졌는데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심리학이다. 인간의 생명을 죽이는 것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죄가 무엇인가. 하마르티아. 애기할 것 많다.
죄는 숙명인가?
인간의 행위에 대한 가치론적 판단.

10장: 기독교의 윤리적 지평
가치 판단 존재와 행위
개인과 사회
성서는 기독교 윤리의 전범인가? 인간 본질로서의 성 금욕과 쾌락 청빈과 소유 유기론적 생명윤리

11장: 기독교와 한민족
우리가 한민족이다. 우리말, 우리의 먹을거리. 한민족과 기독교의 관계. 토착화. 선교사들이 누구였느냐에 따라 신앙의 색깔을 가짐.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미국 선교사들에게 감사하지만 조금 속상한 것은 침례교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들은 근본주의적인. 중심이 아닌 지류에 해당하던 사람들이 왔다.우리의 신앙이 지금의 모양을 가짐. 처음 출발이 ..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책임져야 한다. 한민족안에서 이게 뭐냐.

이승훈과 김대건 기독교 신앙과 서구문화 언더우드와 아펜셀러 직접선교, 간접선교 근본주의 기독교 교파
21세기를 바라보며

12장: 21세기의 한국교회, 그 전망과 희망
한국교회의 미래는 있는가?
복음, 세상 안인가, 밖인가?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는가?
남북통일은 구원이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기독교의 구원론적 지평 결론 구원의 문제니까. 어떤 관점으로 기독교를 이야기해야 하나. 구원 메시아니즘. 기독교는 여전히 메시아니즘의 종말론적 메시야 공동체. 오고있는 나라를 살아가고 그것을 전하려고 하는 공동체. 그런 말들. 전문적인 용어. 종말론적. 종말이다. escatology 종말. 얼마나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용어인데. 폐기. 주술적으로 사거. 휴거처럼 사용. 고대인들은 휴거.오늘날 전혀 다른 우주물리학 발달. 그림. 실체처럼 생각하고 있다면. 종말은 역사관이다. 막시즘은 기독교 종말론의 세속화다. 종말론. 마지막때가 뭐냐에 대한 깊은 통찰, 고민이다. 종말을 생각하자면 현재도 과거도 생각해야 한다. 종말론 메시아니즘. 종말론적 구원. 우리가 말하는 구원은 현재적 구원이 아니라 종말론적 구원. 이것이 현재 어떻게 당겨서 맛보는가? 그것이 문제. 근본적으로 종말론적이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가난한자, 우는자 복이 있다. 진짜 그런가? 가난한자가 복이 있는가? 종말론적 선언이다. 마지막때 하나님의 전권에 의해. 땅. 예수님의 삶. 십자가. 실패. 개죽음 비슷한 것이다. 자극적인 표현. 정말 무기력한 죽음이다.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죠? 십자가의 영광으로 생각하지 않는가? 시간여행. 2천년전으로 돌아가라. 아무런 의미없는. 반역죄로 죽는 것.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것 믿을 수 없다. 그것만으로 끝났다면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다. 역사안에 등장할 수 없다. 구원은 생명이다. 중요하다. 구원 메시야 생명 종말, 하나님 나라, 다 연결된다.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이 용어로도 저용어로도 쓸 수 있다. 구원은 참다운 생명인데 여기서 무슨 우리가 참다운 생명을 얻을 수 있는가? 이곳에서 건강하고 테니스하고 10년더, 돈으로 편하게. 현실을 이야기한다.구원은 종말론적이다. 생명이 완성되는 것이다.무상하지 않는 생명이 있다. 십자가로 돌아가신 분이 사흘만에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심. 십자가의 의미가 있다. 부활의 의미아래서 초기 기독교인들이 십자가를 재 해석했다. 판넨베르크. 예수의 십자가 이후에는 이 세상에 어떤 삶도 실패로 단정지을 수 없다.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신다. 정말 억울한 죽음이 많은가? 이천 냉동창고, 가난한 사람들이 다 죽음.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 뻔뻔스럽게. 특검. 삼성. 법률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회자되는 말. 자기 자식에게 교묘한 편법으로 재산 물려주며 살아간다. 이 세상에 하나님이 구원실현 일 별로 없다. 꼭 그런 일 아니다.구원은 종말론적이다. 우리는 지금 이것을 기다린다.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기독교 영성이다. 그렇게 되면 삶이 그렇게 변하는 것이다. 영성의 대가들을 보면 알수 있다.

그러면 시간이 지났다. 6개월 할거 다 끝났다. 오늘로 종강하자. 어떤가? 짝짝짝. 종강? 맛보기로 드렸다. 이런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서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생각이 있는 분이라면 밤새도록 이야기해야 한다. 사이버 강의실에서 이런 주제들을 얼마나 딱딱한 주제를.. 재미를 좀 느껴 보시라.여러분이 재미있으려면 먼저 내가 재미 있어야 한다. 나는 재미있다.그러나 입담이 좀 딸려서.. 요 부분에서는 내가 전공했기 때문에. 들을 준비가 된 사람들에게는 할 이야기가 많다.

오늘 강의의 핵심은 기독교에 대해서는 우리가 생각하고 공부할 것이 무지 무지하게 만다. 기독교가 그렇게 우스운 믿으면 될만한 그런 것이 아니라 엄청난 사태, 사건이다. 하나님 나라. 바로 그거다.
질문 문자로 받겠다. 말로 하고 싶은 사람.

쉽게 복음을 전해야 하니 어렵다고 하니 걱정이다.
복음 전하는 거야 말로 해서 되겠냐? 사영리식으로 하라. 하나님 인간 사랑. 죄. 예수님. 사실은 그런걸로 교회나올 사람없을 것이다. 복음전하는 것이 형식은 단순하지만 내용은 안으로 들어가면 심오하다. 마치 개미굴처럼. 겉으로는 개미한마리. 들어가면 갈수록 넓다. 여왕벌도 일벌도 있고. 빌딩이다.

개인의 주관이 하나님 나라의 종속. 고통의 문제가 해결되냐? 종말론적 관점에서.. 해결되냐 안되냐? 기독교적 관점에서 해결되기 어렵다. 암에 걸린 사람이 고통에서 자유로와지냐? 영성이 깊어지면 좌절, 낙심 극복된다. 그 단계까지 들어갈 수 있는가? 나도 자동차 사고나서 하반신 못쓴다. 테니스. 힘들고 상처입을 것이다. 시간가면 극복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반신 못쓴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와 소통할 수 있는 길. 영성으로 극복할 수 있다. 그걸 잘 아는것. 신앙의 성숙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예수님도 우리와 같이 로마 지배밑에 있었다. 그 상황. 그 시대의 아들로서 시대의 영향을 전폭적으로 받았다. 그러면 단지 그것뿐이냐? 뛰어난 선생일 뿐인가? 시대의 아들인 것이 분명한데 어떻게 메시야인가? 까다롭죠? 그러나 이런 문제들, 메시야성. 하나님 나라의 아들로서의 확신. 계속 숙제다.  
질문이 많다. 그건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잘 안된다. 앞서 조직신학 공부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조직신학은 세례문답 카테히즘이 아니라 사유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