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 이해를 돕기위한 기초 설명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주 만나고 꽃다발 안겨주고 잘 삐치고 유난스럽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마음으로 서로 통하며 기쁨을 나누는 사랑이 있다. 전자를 소유론적 사랑이라면 후자는 존재론적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심리학자요 프랑크푸르트 학파라 불린 에리히프롬은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으로 유명하다. 소유지향적인 사람은 소유로서 자기를 확인하고 돈이나 집이나 가진 것으로 정체성을 유지한다. 그러나 존재 지향적인 사람은 사는 것 자체에 천착한다. 모임에 와서도 그랜저 타고 왔다는 사실에 관심을 두는가 아니면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왔다는 사실 자체에 의미를 두는가 하는 차이다. 좀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여성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이벤트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자 이제 질문을 생각해보자.
첫째, 질문은 하나님의 큰 구원의 섭리에 우리의 결단은 큰 의미가 없다고 그랬다. 그러면 우리가 얼마나 무기력한가?
둘째, 인문학적 공부가 영성심화에 과연 도움이 되겠느냐? 차라리 영성훈련이나 침묵수련이 더 유익하지 않겠느냐?

이런 대화, 질문들은 이것만 달랑 떼서 다루고 대답하기 어려운 것이다. 거시담론이다. 한가지 생각해 보자. 물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에게 물이 보일까? 우리가 은혜를 받은 것이 받은 것이 확실할까? 은혜는 만들어내거나 빼앗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주어지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배타적 행위다. 도구적으로 만들어 놓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첫번째 질문을 생각해보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나님의 구원, 통치, 행위가 나의 신앙 실존과 무관하게 진행될 수 있다. 출애굽(Exodus)를 생각해보자. 애굽에서 탈출할때 모든 사람들이 몰려 나갈때 하나님을 똑같이 인식하지 않았을 것이다. 준비되지 못한 사람도 많았다. 출애굽했다가 이집트로 돌아간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예수님의 구원사건을 생각해 보자. 예수님이 치유를 하셨을때 믿음을 보고 하신 것도 있지만 그냥 불쌍히 여기셔서 고치신 것도 많다. 그냥 긍휼히 여기셔서 고쳐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결단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하나님의 구원통치가 배타적으로 일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든 안하시든 상관없이 우리의 신앙은 거기다 자기 삶을 던지는 태도가 우리의 신앙의 결단이다. 바울의 고백이다. 죽을 지경이 되니까 나까지 믿지 않게 되었다. 나의 믿음조차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내 믿음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고 생각지 않는다. 나 스스로조차 나를 신뢰할 수 없다.

칭의론을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들이 드물다. Justification, 사도 바울은 이것을 로마법과 연관해서 이야기했다. 실질적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법적으로 의롭다가 인정을 받는 것이다.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작은 믿음을 보시고 그냥 그대로 인정해 주시는 것이다.

두번째 질문, 영성에 관한 질문이다. 과연 인문학적 성경읽기가 우리의 영성에 도움이 될까? 답은 우리의 영성이 심화되는데 결정적인 해결은 주지 못할지라도 그 디딤돌은 된다.(겸손?) 바둑의 정석풀이가 예가 되겠다. 바둑의 정석은 수백년동안 내려온 최선의 방법을 모아둔 것이다. 인문학적 성경읽기는 바로 그 바둑의 정석과 같다. 점심내기 동네 바둑을 두면서도 재미를 느끼고 바둑을 둔다고 할 수 있다. 직관적으로 두는 바둑도 재미는 있다. 그러나 그들이 결코 바둑의 도, 바둑의 길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나는 아마 4급인데 하나 묻겠다. 동네 바둑과 프로바둑의 차이점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어떤 사람은 길을 아느냐 모르는가 차이라고 한다. 내가 보기엔 꼼수를 쓰느냐 안쓰느냐의 차이다. 동네 바둑은 꼼수를 쓴다. 덫과 함정을 마련해 놓고 상대가 거기에 빠져 비명횡사하기를 바란다. 알고도 둘 수 있고 모르고 둘 수도 있다. 그러나 프로기사는 바둑돌을 던지는 한이 있더라도 꼼수는 두지 않는다. 인문학적 성경읽기를 통한 신학적 접근이 프로가 되자는 것이다. 바둑의 최선의 길을 모아둔 정석을 배워 프로가 되듯이 기독교의 최선의 길을 알자는 것이다. 영성의 정상에 이르는 디딤돌을 든든히 놓자는 것이다.

무엇을 영성이라고 하는가? 자기 주관성, 자기 집중의 상태에서 신앙적인 포즈를 취하게 하에는 율법을 준수하는 삶이 그만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을 만나면 소통이 되지 않는다. 우리의 영혼과 성령(하나님의 현재적 존재방식, 생명의 영, 생명의 하나님)이 어떻게 소통하는가? 이 귤을 보라. 귤 자체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러나 귤이 귤되게 하는 비밀이 있다. 우주의 힘들이 귤안에 들어와 있다. 세상 안에 들어와 있다. 이 힘과의 조우가 어떻게 가능한가? 삼위일체가 기독교 신앙에서 매우 중요하다. 실존적인 하나님이 존재론적으로 다른 분야가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얻어지는 기쁨, 그런 경험이 무엇인가? 성령이 누구냐? 우리의 영성이 지나치게 심리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영은 프뉴마다. 심리학과 일치하지 않는다. 여기에 치중하는데 한국교회의 위험이 있다. 우리의 영적인 경험을 개인의 주관적 확신과 신념, 심리적 위로에 두지 말자. Popularism 으로 가지 말자. 심리적 자극, 부분적 자극을 주고 외로울때 따뜻함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게 아니다. 그런거라면 상담소 찾아가면 된다.

영성의 정의를 다시 생각해보자. 영성이란 우리의 경험과 성령과의 조우, 영감, 소통을 통해 얻어지는 우리가 참여하는 생명의 경험이다. Geist, Seele. 거룩한 영, Soul, Spirit  왜 이렇게 단어들이 서로 다른가? 그것은 아직까지 잘 모른다는 것이다. 현상적으로 나타나서 조금 구분은 할 수 있으나 실체는 알아가고 있는 중인 것이다. 성령으로 가게 되면 더 어렵다. 바람과 영을 하나로 묶어두고 있다. 지혜로운 사람들이다. 미래에 가게되면 전체가 새로운 모습으로 들어나게 될 것이다. ‘로하흐’란 말은 전쟁의 힘을 나타내기도 하고 따뜻한 바람등 가지각색의 모습을 가진다. 찬찬히 따라가야만 한다. 감동이 오는 것을 성령이 오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만족, 착각일 수 있다. 영성대가들의 경험은 무엇인가? 마이스터 에카르트는 합리적, 논리적이었다. 사물에 대한 깊이가 굉장히 논리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신비주의는 합리주의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신학의 깊이가 있으면 신비한 것이 눈에 보이게 된다.

한국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이런 과정을 생략하고 살아간다. 그렇다고 이들을 나무랄 수도 없다.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 유파가 부흥운동, 청교도 운동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 당시 필요했던 영적인 경험에 기초한 하나의 신앙운동이었다. 그 시대에 필요했는대 21세기까지 한국교회의 mentality 가 되었다. 개인의 경험, 감정, 주관, 심리적 영성은 성령의 다이나믹한 측면에서 볼때 아주 부분적이다. 보통 말하는 영성(로하흐)에 따라가지 못한다. 바둑과 영성은 거듭 말하지만 아주 비교가 잘된다. 메타포(길), 정석에만 머물지 말고 고수들이 놓는 바둑을 직접 따라갈때 자기도 모르게 깊어지고 수가 들어오게 된다. 천천히 배우자. 진짜 영적인 경험의 단계에 이를때까지.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의 하이데거 버전은 존재가 우리와 만나게 되면이다. 존재가 들어나는 것, 노출되는 것, 구멍이 뚫어지는 것이다. 음악의 악보에서 작가의 의도대로 음악이 흘러나온다.

우리가 영적인 분별력을 갖게 될까요? 설교비평을 하다보면 무엇이 문제인지 빤하게 보인다. 허점이 그대로 드러난다. 분별력이 분명히 생긴다. 공부와 직관적인 삶이 통합된다. 모든 세계가 하나로 된다. 그 눈을 갖게 되면 그렇게 된다.

기타 나머지 시간 수업이 너무 아쉬워 미적이던 3분이 남아서 들었던 특강이 있었습니다.
간추리면 신학이란 Theos+Logos 다. 하나님이 소유격이 되실수도, 목적격이 되실수도 있다. 하나님에 대한 이성, 로고스, 학문, 신학은 거기에 대한 설명이다. 이성적인 해석이 영성적 해석의 단초가 될 수 있다. 인식론으로만 제한 시키면 안된다. 하나님의 구원통치를 로고스로 만나는 것이다. 영성의 깊이가 있자면 신학책을 읽어야만 합니다. 메카르트, 판넨베르크 몰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