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공부, 2015923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14장 욥의 절규

 

신앙의 위인들이라고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늘 흔들림 없는 건 아니다. 오르락내리락은 피할 수 없다. 성경의 위인들, 즉 아브라함과 모세 같은 이들도 당연히 좌절을 경험할 때가 많았다. 다만 성경이 그걸 표현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신앙이 점점 깊어지기만 하면 된다. 욥기를 공부하는 것도 이런 과정이다.

 

1. 홀로(1-6)

욥은 인생의 허무를 토로한다. 1절에서는 생애가 짧다고, 2절에서는 꽃처럼 시들며 그림자 같이 지나가며 일시적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고 손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을 확실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게 확실한 게 아니다. 색은 궁극적으로 공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는 말이 틀린 게 아니다. 10년 전, 20년 전을 생각해보라. 지금의 모든 것도 지나갈 뿐이다. 욥은 3절에서 허무한 인생을 왜 재판하느냐고 하나님께 따진다. 그가 원하는 것은 자기를 홀로지낼 수 있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욥이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다(6). 이런 욥에게 친구들의 참견, 동정심, 충고 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2. 호소(7-17)

욥은 7-12절에서 인생의 허무를 다시 언급한다. 나무는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나지만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10,12). 당시 욥은 죽음 이후의 생명에 대한 생각이 없었다. 부활 신앙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 나온 묵시사상에서 출발해서 예수 부활에서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다. 욥은 하나님의 자비에 의지해서 자기를 스올로 피할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한다(13). 그곳에 머물면서 지금의 고통이 지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14). 스올은 음부, 지옥과 비슷한 개념인데, 죽은 자들이 가야 할 곳으로 이해되었다. 스올로 피하겠다는 말은 곧 죽는 게 차라리 낫다는 뜻이기도 하다.

욥에게 어려운 것은 자신이 왜 고통당해야만 하는지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는 고통을 당할 정도로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 죄가 없는 것은 아니되 그것은 젊은 시절의 혈기로 인해서 행한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그런 것을 이유로 사람에게 고통을 준다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실제로 고통이 자기의 영혼까지 파괴할 정도다. 이제가 욥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한 가지다. 스올로 자리를 피하는 것이다.

 

3. 절망(18-22)

욥은 다시 체념에 빠진다. 자연마저 영원하지 못한 것처럼 하나님은 사람의 희망을 끊는다(19). 사람의 얼굴 빛은 변한다(20). 늙고 병들고 죽는 숙명이다. 자녀들이 출세해도 죽은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21). 죽음 앞에서 영혼마저 파괴된다(22). 욥은 인생이 얼마나 불쌍한지를 적나라하게 짚었다. 지금 욥의 영혼은 혼란스럽다. 인생을 이해할 수 없다. 특히 하나님과 고통의 관계를 이해할 수 없다. 오늘 우리도 욥의 절망을 그대로 안고 산다. 호스피스에서 한 달만 지내면 인생이 얼마나 처참한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실존을 버텨내면서 부활 생명을 노래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