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공부, 2016113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34: 엘리후의 두 번째 연설

 

욥기의 신학적 주제는 신정론(神正論)이다. 영어 theodecy(Theodizee)는 헬라어 테오스()와 디케(정의)의 합성어다. 이 세상의 악과 하나님의 통치가 병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신학적으로 변증하는 논리다. 비록 세상에 악과 재앙이 벌어지지만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부정되지 않는다. 구약 창조 이야기는 악과 재앙의 책임을 인간의 죄로 규정한다. 그런 전통에 유대인들의 지혜 신앙이 들어 있다. 욥의 친구들도 그런 전통에서 말하고, 엘리후는 재앙을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이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큰 틀에서는 친구들과 같은 자리에 선다. 욥 혼자 그것을 거부한다. 당랑거철(螳螂拒轍)의 형국이다.

34장에서 엘리후는 욥이 시련을 더 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6나는 욥이 끝까지 시험 받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 대답이 악인과 같음이라.’ 욥은 아직 주제 파악을 못하고 있어서 시련을 더 받아서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욥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지만 엘리후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건 명백하다. 누가 옳은가? 재앙은 우리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려는 하나님의 시험인가, 아닌가? 일반적으로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작은 어려움이야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삶이 무너지는 재앙을 시험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전쟁이나 자연재해로 죽거나 장애를 입는 것이 한 예다. 결정적인 답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죽어가는 그 자리에 하나님이 함께 한다고 했고, 초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고 보았다.

 

1-9절에서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비난한다. 자기의 의를 고집하는 욥의 태도가 바로 그것이다. 욥이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모독한 건 아니다. 친구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은 것뿐이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을 기준으로 상대를 비판한다. 예수도 신성모독자라는 말을 들었다(14:64).

10-20절에서 욥의 주장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정의롭다는 사실을 피력한다. 10절에는 하나님(엘로힘)과 전능자(사따이)라는 두 단어가 나온다.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않는 분이고, 전능자는 불의를 행하지 않는 분이다. 가장 결정적인 정의는 인간 모두가 죽고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15)이다. 하나님은 고관을 외보로 대하지 않고 부자의 낯을 세워주지 않는다(19). 그들도 역시 순식간에 죽는 존재자들에 해당된다(20). 옳은 이야기다.

21-27절에서는 하나님의 판단은 빠르고 정확하다는 사실이(23,24) 언급된다. 아무리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이나 나라라고 해도 결국에는 무너진다는 점에서 엘리후의 주장은 옳다. 그러나 이런 논리로 이유 없이 재앙을 만난 욥을 비난할 수는 없다.

28-33절은 난해 구절로서 칠십일역 성경에는 생략되었다. 예컨대 33절의 속전은 전반적인 맥락에 어울리지 않는다.

34-37절에서 엘리후는 전체를 요약해서 말한다. 자기의 주장이 대다수의 지혜로운 사람들에게서 지지를 받는다고 했다. 자기의 말로 인해서 이제 욥이 무식하며 지혜롭지 못한 인물로 판명되었다. 욥의 친구들은 그럴 능력이 없었다. 그래도 욥이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시험이 더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엘리후는 욥을 악인으로 규정한다. 37절의 우리와 어울려 손뼉 치며...’는 욥이 자기들과 뜻을 같이 했다는 게 아니라 자기들 앞에서 욥이 하나님을 열정적으로(손뼉치며...) 거역한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