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13일, 저녁 7:30

대구 공간울림

(깜빡하고 있다가 어느 분의 지적으로

이제야 올리게 됐습니다.

별로 바쁘게 살지 않으면서도 망각의 빈도수가 느는군요.

모든 걸 망각하는 수준으로 들어가는 게

죽음일까요, 구원일까요?)


욥기 공부, 2015513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5장 엘리바스의 충고(2)

 

구약의 하나님은 한 색깔로 해명되지 않는다. 해명에 차이가 있고, 또 충돌한다. 인자하신 분이기도 하고, 또는 분노하시는 분이시다. 사랑이기도 하고, 심판이기도 하다. 우리를 찾아오는 분이기도 하고, 숨는 분이기도 하다.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뜻을 전혀 다르게 전하기도 했다. 예레미야와 하나냐(28)의 갈등이 대표적이다. 욥기에도 욥과 친구들의 하나님 이해가 다르다. 이런 충돌은 오늘날도 여전하다.

 

1: 엘리바스는 욥의 부르짖음이 잘못된 것이라고 충고하다. 거룩한 자는 천사들과 비슷한 존재자들을 가리킨다. 욥의 말에 그 어느 주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엘리바스가 볼 때 욥은 유대교의 지혜 신앙 전통을 포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욥의 분노를 지적하는 말이다. 3: 욥은 미련한 자다.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화만 내고 있으니까. 4: 이후로 엘리바스는 욥을 강하게 책망한다. 모든 사람이 욥을 외면할 것이다. 5: 재산도 다 날아간다. 엘리바스가 비인격적인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욥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태도를 취하지 못하기 때문에 욥의 약점을 추궁하는 것이다. 일견 이런 주장이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에 욥을 힘들게 했을 것이다.

6: 재난과 고생이 공연히 발생하는 게 아니라 다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이런 논리는 지금도 여전하다. 어려운 일을 당한 신자들을 위로한답시고 기도가 부족해서 그렇다.’라든지, ‘신앙생활이 게을러서 그렇다.’고 말한다. 일종의 인과응보 사상이 교회 안에도 팽배하다. 7: 고생을 수사학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8: 8절부터 16절까지 엘리바스는 하나님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라고 조언한다. 8절에 하나님이 두 번 언급되는데, 앞의 하나님은 의 번역이고, 뒤의 하나님은 엘로힘의 번역이다. 고대 근동에서 엘이라는 신명(神名)은 일반적인 것이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의탁한다는 엘리바스의 말에는 흠 잡을 데가 없다. 그러나 그게 늘 진리는 아니다.

9-15: 하나님이 누구냐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헤아릴 수 없이 큰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수없이 행하시나니...’ 구약 신앙의 핵심이다. 핵심적으로 하나님은 어려운 이를 도와주고, 교만한 자를 내려치시는 분이다.

16: 결론적으로, 처참한 운명에 빠진 욥에게도 희망이 있다고 격려한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의탁하라는 것이다. 교언영색이다.

 

17-27: 여기서 엘리바스는 엘리후에게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주장을 한다. 고난은 연단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사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18)라는 조언 앞에서 욥도 할 말을 잃지 않았는가. 22절에서 엘리바스는 욥을 격려한다. 엘리바스는 언술에 뛰어난 사람이다. 합리적이고, 따뜻하고, 따끔하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말한다. 자신의 입장을 다 설명한 뒤에 엘리바스는 27절에서 점잖게 결론을 내린다. 유대교의 지혜 전통을 깊이 생각해보면 답을 찾을 것이라는 뜻이다. 고난당한 사람에게 이런 정도로만 말을 해줘도 훌륭한 스승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간 삶을 다 해결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