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2011년 12월7일, 저녁 8시, 시편 150편

큰 할렐루야

 

 

일반적으로 시편의 마지막 편인 150편의 표제는 ‘큰 할렐루야’로 달린다. 루터 성경은 ‘Das große Halleluja'로 달았다. 이렇게 이름을 단 이유는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나는 146편부터 150편까지의 시편 중에서 150편이 ‘찬양하라’를 더 강조하기 때문인 것 같다. 매 구절마다 찬양하라는 단어가 두 번씩 나온다. 음률을 살려서 읽어야 제 맛이 난다.

 

1절- 성소에서 찬양하라는 말은 이 시편이 제의 공동체에서 불린 노래라는 뜻이다. 성소와 제의를 단순한 형식의 차원에서만 보면 곤란하다. 본질은 형식을 필요로 한다. 예배 처소에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일은 하나님 경험에서 빼놓을 수 없다. 성경만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지만 성경이라는 형식에 말씀의 본질이 담겼다는 것은 분명하다. ‘권능의 궁창’에서 찬양하라는 말은 궁창이 곧 성소라는 뜻이기도 하다. 궁창은 우주 공간을 가리킨다.

 

2절- 하나님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라. 시편 기자들에게 하나님만이 능력의 소유자이시다. 그만을 위대하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거꾸로 참된 능력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다. 그 능력이 무엇인지를 인식할 때 하나님 경험이 가능하다. 자본을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자본이 신이다. 전쟁의 승리를 위대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군사력이 신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신이라는 말은 언어도단이다. 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의 능력을 오히려 무능력에서 찾았다.

 

3,4,5절- 온갖 악기로 찬양하라고 한다. 나팔, 비파, 수금, 소고, 춤, 현악, 퉁소가 등장한다. 여기서도 찬양하라는 동사가 각각 두 번씩 나온다. 사람은 음악적인 예술을 행하는 자다. 사람만이 그게 가능하다. 소리 예술은 자연에서 왔지만 자연을 넘는다. 그게 자연이기만 하다면 동물들에게도 예술이 가능해야만 했다. 소리는 지구에서만 가능한 공기의 떨림 현상이다. 청각장애인들이 치료되어 처음으로 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 어떤 느낌이 들겠는가? 무와 유의 차이는 절대적인 것이다. 소리만이 아니라 세상 자체가 무로부터 나온 것이다. 창 1:1절의 창조하다는 단어인 bara는 질료의 변경이 아니라 무에서의 창조를 의미한다.

예배는 예술적으로 표현된다. 악기의 연주가 있고, 사람의 노래가 있고, 행위가 있다. 정교회와 가톨릭의 예배에는 좀더 다양한 의식이 있다. 그러나 지나친 시청각 자료를 사용하는 것은 오히려 과유불급이다.

 

6절- 마지막으로 시편 기자는 ‘호흡이 있는 자’를 거론한다. 일반적으로는 사람을 가리키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숨을 쉬는 모든 동물을 가리킨다. 호흡이 있다는 것은 생명이 있다는 뜻이다. 생명이 있는 자가 찬양해야 할 이유는 생명의 주인이 자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상적으로 그것을 경험하면서도 사람은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생명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는 뜻이다.

 

할렐루야는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뜻이다. 우리의 삶은 할렐루야로 녹아들어야 한다. 할렐루야는 생명의 주인을 기억하는 것이며, 주인의 뜻에 따라 생명을 서로 나누는 것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평생 붙들어야 할 신앙적 화두(話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