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적 성서읽기와 사후의 문제

2008년 1월 19일 주일밤 질답시간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흡사 방송국 성우 같습니다. 다비아 인터넷 방송국. 발음도 좀 고쳐야 하고요. 녹음해 주신것 들어봤는데 역시 발음이 좀 문제가 있더라. 엉켜. 피아노 보면 잘 치는 사람들은 하나 하나 잘 들린다. 빠지는 것이 없다. 놓치는 사람들은 뭉뚱그려 간다. 잘하는 사람들은 수십가지 음이 하나도 튀지 않고 정확하게 나간다. 발음도 아나운서도 빨리하는데 어느 한 구석도 빠지지 않는다. 그런 훈련 받아보지 않아서 자유로운 강의에서는 문제가 있다. 고치는 것은 천천히 하는 수 밖에 없다. 생각은 앞에 가는데 입이 따라가지 않아 발음이 뭉친다. 방언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한시간 동안 질답을 하겠다. 질문이 있다면 문자를 써 달라. 답하겠다.

오늘은 두가지다. 하나는 인문학적 성서읽기가 무엇인가? 개인적인 쪽지를 받았다. 필요한 대답. 두번째는 중요한 것. 오늘의 테마죠. 죽음의 문제. 특별히 salgun의 어머니가 올려주신 문제다. 시작하기 전에 마음이 무거웠다. 이거를 대답할 만한 자신이 좀 없다. 그러나 전문가니까 이야기는 해야 한다는 딜레마에 빠졌다. 칼 바르트의 딜레마.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이라는 article. 설교자는 두가지 경계, 사이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야 한다는 당위와 또 하나님의 말씀을 쓸 수 없다는 불가능성이거다. 계속 그 압박감이 있다. 자기도 사실은 설교자도 그 대답을 모른다. 궁극적인 대답을 모른다. 이 땅에서는 계속 질문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언자나 설교자나 이런 사람들보다 일반신자들에게 대답해야 할 위치에 있기 때문에. 이 질문 얼마나 대답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다. 질문이 싫다는 것이 아니다. 너무 깊은 질문이다. 어쩌면 내가 계속 헤멜 수 밖에 없는 질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해야 하니 무겁다.

인문학적 성서읽기가 무엇인가?

article을 올리지 않았나? (新생쥐이야기를 하고 계심^^ 생쥐에 놀란 화면 얼어버림. 조금만 기다려 보시라. 기다리니 풀림)

인문학이라고 하는 것, 전공한 사람이 아니기에 딱 끊어서 말할 수 없다. 보통 문사철이라 한다. 문학, 역사, 철학 인간 삶의 흔적들에 대한 연구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얼마나 많은 그러한 생각해야 할 것들 그리고 당면하고 있는 것들을 계속 서로 이야기하고 그게 역사가 되고 학문이 되고 인간이 죽는다고 할 때도 그런 것들을 두고 이게 뭐냐 생각을 했을 것이다. 문학에서도 철학도 그런 것들이 한 순간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이 계속 내려와 확대되고 심화되고 그렇다.

그런 것들이 계속 쌓이고 쌓이고 쌓이는데 그러니까 성서도 그렇다는 이야기다. 성서에 인간 삶의 흔적이 아주 진하게 깊이하게 각인되어 있다. 그것을 놓치면 우리는 성서를 수박 겉핥기, 변죽만 울리는 방식으로 공부하는 것이다. 인문학, 삶, 시간이 무엇인가 하는 그런 질문, 이런 것들이 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사람들이 자꾸만 기독교 신앙은 성서는 하나님만 무조건 믿는 것이지 그 이외 anthropology 인간과 시간 역사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생각하는 사람들 큰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인간의 사유와 이해등 그런것들이 차곡 차곡 담겨있다. 이것이 순전히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만 된 것이다는 그런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우리의 의식, 대답으로 이루어지는 상호변증법인 관계다. 하나만 예를 들자면 태초에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셨다. 빛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빛이 있어라 했으니 되었지라고 생각하면 틀렸다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성서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는 아니다. 성서 기자들의 삶이 닮겨져 있다. 하나님이 태초에 빛을 창조했을까 하는 깊은 사유가 들어있는 것이다. 머리를 굴렸다고 한 것이 아니라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적 소통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가 인문학적 성서읽기는 우리 삶의 근거들을 거기에 놓고 성서를 읽자는 것이다. 그걸 빼는 성서읽기는 수박 겉핥기식에 머문다. 자기 모순과 자기 딜레마에 빠져서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이미 말씀 드렸다. 여호수아가 아간을 연좌제 적용해서 모든 가족을 죽였다고 하거나, 모세가 하루에 수천 명 죽였다고 하는 것이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서 여리고 아이성의 어린것들을 다 죽인다고 하는 것이나 그런 것들을 실증적으로 보려고 하면, 객관적 역사적 사실이라고 보면 성서기자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을 놓친다. 성서 기자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이것이 중요하다. 한 사람만이 아니라 개인, 집단일 수도 있다. 성서에는 수천년 동안 내려온 유대인들의 고유한 삶의 이해가 거기에 담겨있다. 신약성서는 초기 공동체의 삶의 이해다. 하나님과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삶은 생명, 생명은 하나님의 창조다. 이것이 다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성서기자들이 왜 신앙고백에 도달하게 되는지 찬찬히 들어가는,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생명의 영을 경험하려고 하는 그런 방식이 바로 인문학적 성경읽기다.

전통적인, 일반적인 한국교회에서 성서 읽기는 이런 인문학적인 것이 생략되고 교리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교리 중심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 교리안에 삶의 이해가 들어있는데 이것을 놓치는 것이다. 교리는 상당히 중요하다. 내가 교리를 전공했기 때문에 이것이 중요한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교리 안에 삶이 들어있고 도그마가 얼마나 기독교 신앙에서 핵심인지, 얼마나 많은 세계를 안고 있는지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설교자들이 천편일률, 침소봉대한다거나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도그마 기독교 교리에 대한 이해의 부족해서 일어난다. 도그마가 중요하긴한데 그것이 우리 삶에 대한 인문학과 연관성이 끊기게 되면 독단론이 된다. 구구단 외우듯이 외우고 말면 독단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이외에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사도행전에 나온다. 그런 것들도 외워 버리고 말면 독단이 된다. 그 말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라 사도행전 기자가 왜 그런 진술을 할 수 밖에 없었는가 사도 바울이 왜 이것을 통해서 그런 말을 했는가를 살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성서는 그 어떤 문학작품보다 심층적인 생명의 세계를 담고 있다.

이렇게 교리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있고 또 큐티식의 성서읽기가 있다. 이것도 굉장히 naive한 것이다. 아주 유약한 것이다. 일종의 성서 도구주의다. 성서의 구조, 주제를 끌어다가 자기 삶에 적용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다. 이게 한국교회에서는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는 성서의 읽기다. 이와 관련된 얼마나 많은 책들이 있는지. 읽고 은혜받는가? 두란노에서 많이 나온다. 은혜 받을 수도 있다. 어떤 분은 성서해석부분과 예화중 성서해석은 별로 보지도 않고 예화에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괜찮은 이야기들 미담, 미화,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실릴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있다. 아무리 그게 귀하고 좋다고 해도 그런 것을 위해서 성서를 읽지 않는다. 성서는 다른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성서비평에서 누누히 이야기했다. 도덕적인 설교를 하지말자.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윤리는 중요하나 성서는 그것 너머에 어떤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데.. 윤리를 이야기하더라도..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을 통해 그 방식으로 더 근원적인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다. 적용중심의 큐티식 성서읽기는 성서 텍스트 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고 지금 자기만 중요하다. 내가 어떻게 기독교인답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극단적으로 끊는 방식으로 말한다면 내가 어떻게 살것 인가 하는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것을 잘 해석해서 받아들이라. 정말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것 앞에서는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다는 말이다. 모든 개념이나 언어 진술은 어떤 연관성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 내가 하는 말을 똑 끊어서 다른데 가서 정용섭 목사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삶이 중요하지 않는다고 말하더라. 그렇게 하면 저를 씹으려고 하는 이다. 미안하다. 그런 표현을 써서. 예언자들이 어떻게 살아라 정의와 평화에 대한 말을 많이 하고 있기 때문에 내 말이 잘못 오해될 수 있다. 예언자들이 말을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더 중요하다.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큐티식 성서읽기는 “성서가 존재론적으로 확보하고 담지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론적 메시아적 통치행위에 대한 생각은 관심도 없이 축소하여 그냥 하나의 율법, 교리, 교리문답에 머물고 내가 지금 어떻게 기쁘게 사냐? 실존적, here and now 지금 어떻게 기독교인답게 사느냐를 확대하여 성서를 읽는 것?”것이다. 그런것도 바람직하겠다. 그러나 더 궁극적으로 이야기하면 우리가 여기서 어떻게 사느냐 보다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시는가 이것이 더 중요하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인가를 더 아는게 필요하다. 인문학적 용어로 말하면 존재론적 접근, 우리와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관계에 몰두하는 것이다. 수도사들이들이라든지 영성가들은 그런거에 집중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존재론적 차원이라면 결국 다른 말과 연관해서 생각해야한다. 행위와 상관되는 개념이다. 내가 어떻게 행위하느냐 어떻게 사느냐? 그거보다 더 상위개념은 하나님과의 관계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효도를 한다고 해도 잘 돌본다고 해도 그분과 나의 존재론적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똑 같다고 할 수 없지만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우리가 잘 하거나 상관없이 깊은 차원에서 관계가 맺어지는데 그것을 칭의론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하신 것. 우리의 행위가 아닌 믿음을 통해서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값싼 믿음 지상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이야기들이 돈다. 유기적이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측면에서 믿음이 굉장히 중요한데 믿음은 절대가 아니다. 믿음 지상주의속에는 기독교 신앙의 위험성이 거기에 들어있다. 믿음까지도 우리가 극복해야 한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믿음 상대주의다. 모든 기독교 신앙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느 관점 어느 맥락만 뚝 떼어서 이야기한다면 이현령 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 된다. 큐티식의 성경공부의 문제점.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니 이해해달라. 다비야도 큐티가 나가고 있는데 큐티라기보다 매일 신앙묵상으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 일반적인 큐티가 아니니까.. 텍스트를 조금 더 실질적으로 다가가 보자하는 시도다. 인문학적 성서읽기는 요 정도로 하자..

얼마 전에 대학 1학년에 다니던 딸아이가 사고로 제 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면 영혼이 정말 안식을 누리는 것인가?

이 말도 일단 옳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명제로서가 아니라 어떤 상황을 말한다. 우리의 영혼이 안식을 누린다는 것은 이 땅의 삶은 안식이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 땅의 삶이 즐겁고 안식이라면 죽음으로 안식을 얻는 것이 아니다. 이 땅에서 그 어떤 삶의 방식으로도 우리는 참된 쉼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자식이 좋은 학교에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우리가 안식을 얻는 것 아니다. 안식과 하나님의 평화는 어떤것에 의해서 상대적으로 좋아질수도 나빠질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쉼이다. 이 땅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야 우리가 영원한 안식을 누린다. 이것이 신앙고백, 신앙이다.

이것을 누가 봤나요? 경험했나요? 이런 표현들은 상대적이다. 질문하시는 분의 의도에 따라서 대답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예, 아니요를 원하는데 상대적인 개념에 대해 말하느냐 조금 조심스럽기도 하다. 그렇습니다. 믿으십시요 해도 되기도 하는데요.

질문이 안고 있는 신앙의 전체적인 문제들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영혼이 안식을 누리는가? 하는 것은 이 땅에서의 삶이 그 어떤 것으로도 안식을 누릴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가 죽으면 결국 죽게 되면 주일 문제도 끝난다. 잘들으라. 연결이 되는 문제다. 기독교 신앙은 다 연결되는 것, 죽음문제가 영혼, 죄문제, 창조문제도 와도 연결된다. 질문 첫번째것만해도 몇시간을 이야기해야 한다.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영혼이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것인가. 이 하나의 질문만 갖고도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여기에는 수백가지의 질문들이 다 연결이 되어있다. 꼬리에 꼬리를 쳐서 조금 멀리도 연결된다. 이런 연결을 잘 할 줄 하는 것이 신학이다. 어떤 주제를 꼭 집어서 그것을 신학한다? 아니다. 테마 주제 동기 이런 것들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고 어떻게 흘러가고 어떻게 접근해가고 때론 축소 때론 확대하면서 정확히 집어내는 것이 신학이다.

안식을 누린다. 안식이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 왜 안식이 없을까? 기독교의 죄론과 연관된다. 인간이 죄로 인해 하나님을 직면하지 못한다. 그렇지 않느냐?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본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보면 죽는다. 죽지 않으면 하나님을 볼 수 없다. 모세도 지나가는 등만 보았다. 굉장히 문학적인 표현이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그들에게 있어서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죄가 여전히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안식을 누릴 수 없다. 죽으면 죄가 끊어진다. 그때 우리가 자유로와지고 평안을 얻는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평안인가? 어떤 휴식이냐? 사실은 그것은 모른다.

그 영혼은 어디에 살고 있는 것인가?

첫번째도 모르는데 두번째를 알 수 없다. 영혼이 하나님 나라의 품에 간다. 옳다. 그러나 그 죽은 다음에 어디로 가느냐 하는 것도 성서에는 여러가지로 나와 있다. 구약 신약 다르고 신약안에서도 차이가 있다. 결정적인 문제에 있어서 성서마다 차이가 있느냐 그 누구도 실증적으로 연필 만지듯이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렇다. 예수님의 비유에 따르면 나사로라는 거지와 부자의 비유. 아브람의 품에 안길수도 지옥에 가서 고통을 당한다. 그러나 그 비유를 주신 것은  오독(誤讀)한채 그런 그 비유를 가지고 설교를 잘못하게 되면 신자들을 성서로부터 떨어뜨리게 만드는 것이다.

생각이 난다. 연세 중앙교회 윤석전목사님 설교가 가장 문제가 많다. 그 분이 그것을 아주 강조한다. 지옥 불, 아브라함 품 말이다. 그 이야기를 꺼내서 이야기한다. 성서를 그렇게 접근해도 되는지. 나중에 주님의 심판 앞에서 어떻게 대답할 것인지. 그 분 나름대로의 진정성이 있을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는 바람직하지 않더라. 기억이 난다. 하도 인상이 깊어서. 그 분이 설교하기를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거지 나사로. 그는 살아 있을때 예수를 잘 믿었다. 하나님을 잘 믿었다. 부자는 안했다. 이 얼마나 성서를 왜곡하느냐? 성서는 그 이야기 전혀없다. 그런 식으로 신자는 무조건 은혜만 받으면 된다는 식으로 성서를 갖다 붙이면 .. 문선명 같은 사람도 얼마든지 자기식대로 만들어 갈 수 있겠다. 그러한 거지 나사로의 비유도 우리 죽은 다음에 우리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 비유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삶속에서 그 무책임과 오늘 현실에 대한 문제다.

어쨌든 간접적으로 그런 성서 구절을 통해 본다면 우리는 죽자마자 나눠지는 것을 본다. 데살로니가서 보면 마지막때까지 다 잠자다가 천사의 나팔에 다시 살아난다. 구원받은 사람은 생명의 부활로 심판 받을 사람들은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 영혼이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가?

<-- 게시판에 뜬글: "몸은 부패하여 소멸되고 영혼은 몸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늘에 올라가 주님과 함께 거하게 된다는 기존의 개혁교회 전통은 성경적이라기보다는 헬라철학적인 영혼불멸론에 근거한 주장이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개인적종말론에 있어서 다소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이해가 나타나는데, 죽은 자의 부활이 세계역사의 마지막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죽을 때 전인의 부활이 일어난다. 그러나 현세의 몸과 부활체 사이에 물질적인 연속성을 기대하기는 힘들고 전혀 다른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영남신대 최태영 교수) -->

그 영혼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을 볼 수 있는 건지?

다 연결되는 문제다. 이것은 말할 수 없다.

죽으면 천국에서 그 영혼을 만날 수 있는 것인지?

성서 전체로만 본다면 만난다. 만나는데 우리는 항상 이 땅에서 경험하는 어떤 방식으로만 규정하려고 하니까 문제다. 우리는 지금 만난다고 하면 유학갔던 아들 만난다.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 그런 만남은 아니다. 하늘나라 가서 그런식으로 만날까? 거기가서 아들딸 식구들이 있고 그럴 수도 있겠지만 딱 끊어서 재단할 수 없다. 절대적인 세계를 우리식으로만 자꾸 형상화하게 되면 기독교 신앙의 신비를 훼손하는 것이다.

비유를 하나 말씀드리겠다. 다른데서도 이야기했다.(안식일 법과 보안법)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다. 아신다고 하더라도 다시한번 들어주라.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강하다.

어떤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죄를 지은 사람들이 추방당해 동굴로 쫓겨 들어갔다. 그 동굴에서 발에는 쇠사슬을 차고 겨우 겨우 살아남아 그 안에서 수십, 수백세대를 지났다. 그 후손들을 자기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몇몇 신화만 남았다. 그 동굴에서 축축한 분위기, 침침한 분위기, 박쥐날아가는 분위기 횃불을 켜야 볼 수 있는 그런 삶의 방식들을 당연하다 자기들의 운명이다 생각하고 살았다. 발목에는 쇠사슬을 차고 장로들은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막았다. 터부시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젊은 친구가 우연히 동굴밖으로 되었다. 동굴밖에서 전혀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되었다. 색깔을 보게 되었다. 칙칙한 동굴안보다, 나비가 날아다닌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화려한 세계가 바깥에 있었다. 이걸 모르고 살았나 싶어서 동굴안으로 돌아와 자기 동족들에게 이걸 이야기했다. 굴 밖에는 전혀 다른 세상이다.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더 큰 소리로 동굴밖이 있다. 미친사람 취급했다. 장로들이 떠들면 죽는다고 위협했다. 어느날 종교 재판을 통해 결국 이 친구는 화형당하고 만다. 그 동굴은 예전처럼 조용해졌다. 아주 유명한 이야기다. 물론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가 독사발을 마시고 죽는 아테네의 현실을 비꼬아 이야기하는 것같다.

이것을 기독교의 새하늘과 새땅과 연관 지어서 생각해보자. 동굴밖에 세계는 가봐야 안다. 동굴안에 묶여 있는한 동굴밖의 세계를 어떤 상상력으로 구체화 할 수 없다. 동굴밖으로 나가야 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학에서 중요한 관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형상화 하려고 한다. 좋은 집에 산다. 좋은 쪽으로 상상력으로 받아들일수도 있으나 부활, 하나님나라는 와봐야 아는 것이다. 이것이 참어려운 문제다. 우리의 생각, 범주, 경험하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라 어떤 방식으로 담아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비유로 말씀하셨다. 동시에 그러면서도 확실하다고 하는 것. 어떻게 담아 낼까? 이것을 하지 못하면 우리는 자칫하면 극단적으로 빠지게 된다. 독단론 또는 불가지론에 빠진다. 두가지다. 기독교 신앙의 건강한 모습이 아니다. 바르트식으로 말하면 존재 유비. analogia entis. (analysis of being) 존재론적인 방식에서 하나님과 비슷한 것을 이 세계에서는 없다. 이 세상에서는 단절되었다.

<-- 바르트에 대한 목사님의 추가설명 부분: 20세기 중반가지 훨씬 세대전 사람이라서 한물간 쉽게 이야기해서 그런 신학자다 치부해 버릴 수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칼빈과 루터 못지않는 거장이다. 그런 거장의 글들은 단숨에 극복되지 않는다. 어떤 부분에 약점이 있는 것 같은데 어느 관점에 가면 너무 큰 흐름 같아서 다 극복이 되지 않는다. 신정통주의다. 보수주의는 자유주의적인다. 성서의 문자의 역사, 받아들였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속된 표현으로 짓고 까부는 것에 불과하다. -->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유비가 없다는 바르트의 진술은 굉장히 정확하다고 본다. 그렇다. 그 틀. 이 땅에서 어떤 것으로도 비슷한 것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어떻게 하는가? 그러나 설교자 목사들이 해야 하는데 철학적 사유로만 가능하다. 존재, 시간에 대한 깊은 통찰, 생각해낼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여기서 감을 잡지 못한다. 예를 들자면 연필이 있다고 하더라도 있다는 여기에 관점을 두지 않고 없는 세계, 바깥, 없음으로서 연필이 연필이게 하는 하이데거가 존재라고 하는 것, 우리는 있는 것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하나님 나라는 없다. 그런 방식으로 생각하면 거기 가서도 잘먹고 잘살고 식구들끼리 외식 나가고.. 그런 것, 행복만 꿈꾼다면 이 땅의 것을 확장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 나라가 한계가 있다. 하나님나라를 어떻게 확실하게 신앙의 내용으로 삼을 수 있는가? 핵심이다. 오늘 그런데까지 이야기 하지 않겠다. 예수님의 부활, 바울이 신앙고백, 다 연관되어 있다. 한두마디로 힘들다. 천천히 신학적으로 생각하는 것. 이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영성을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신학이다. 이성을 주셨는데 논리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영성을 손에 잡히는 것은 아니지만 논리성과 합리성으로 해명하려고 노력하는 최대한의 노력. 이것이 신학이다. 천천히 신학의 바다안으로 호수안으로 발을 적시고 허리를 적시고 더 깊이 들어가 돌고래 처럼 유영 물놀이 할 수 있는 것이다. 큰 신학자, 영성의 대가들 성서기자들 예언가들이고 그렇다.

대답을 되었나요? 질문하신 분에게 속 시원한 대답을 드릴 수 못하는 것 같아 아쉽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우리가 죽은 다음에 딸아이를 만날 수 있다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지배하는 곳 더 아름답고 더 절대적인 곳이다. 가족을 잃으면 얼마나 슬픈가? 그날에 가서 부모를 만나고 자식을 만나는 것 보다 더 새로운 방식으로 근원적인 방식으로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 부활생명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우리가 구체적으로 모른다. 모른다고 한다고 해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거다. 절대적인 것에서 상대적으로 단언할 수 없다는 것이지 상당부분 말할 수 있다. 그런 것을 말할 수 있다. 속 시원한 대답은 아니지만. 만날까 안 만날까 염려하지 마시고 .. 그게 너무 크기 때문에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 두는 것이 바른 신앙이다.

<-- 게시판에 뜬글: 예전에 다비아에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돌아가신 친정아버지 말씀을 드렸을 때도 지금과 꼭같이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과는 다르게 이 세상을 완성하실 겁니다." 라고 하셨는데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신앙을 가진다면서도 죽지 않을려고 애를 쓰는데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이 이 땅에서 하나님앞에서 사는 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요?

종말에 이루실 하나님의 부활생명에 우리의 온 운명을 걸어두는 삶, 이것이 기독교의 삶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삶을 살때 마지막 때에 우리가 기대할 수 없었던 부활생명에 참여하게 될 것이고 오늘의 삶에서 부활 신앙을 당겨서 살 수 있다. 부활신앙을 당겨서 산다는게 뭔가. 신학적 용어로 '先取'라고 한다. 쉽게 이야기를 하자. 바꿔서 이야기하겠다. 오늘의 삶은, 현재는 이 안에 들어와 있으면 이것이 잘 안보인다. 밖에 나가야 보인다. 우리는 어떤 일에 아등바등하면서 지식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살아간다. 지나고 나면, 십년 지나면 그때 우리가 반성을 하게된다. 십년 지나도 반성못하는 사람도 많지만... 종말에 우리가 생명의 목표를 둔다면, incarnation된다면 오늘, 현재의 삶을 이미 지나간 것처럼 성찰하는 방식으로 사는 것이다. 가능한가? 가능하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깊이 빠져 있기때문에 안보이는데 종말론적인 눈은, 신앙의 눈으로 보는 것은 지나간 것을 보는 것이다.

가는 과정, 힘이 들어가지 않고 힘을 빼는 작업이 기독교 영성이다. 열심히 하겠다고 힘을 주는 것 신앙이 아니다. 모든 일에 힘을 빼자. 운동에서 힘을 빼듯이. 우리의 삶에 힘을 빼는 방식? 그게 뭘까? 삶의 의미를 말씀하셨기에 드리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마지막에 이루실 부활, 희망을 알고 믿고 자기 삶을 던지는 삶이라고 한다면 힘이 빠진다. 참 이게 풀어낼 수 없는 숙제이기도 하고 성서가 많이 이야기했지만 여전히 미궁이다.

과학의 근원이 뭐냐? 악, 고통, 슬픔, 죽음 이런 것들..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하고 그 외의 창조의 근원이 없다면 하면 결국 하나님의 책임이 아닌가? 반론이 가능하다. 기독교가 몇가지 대답을 하기는 하지만 그게 완전한 대답은 되지 못한다. 하나님 말고 또 하나의 창조적인 능력이 있는 존재를 인정한다면 이원론으로 빠지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악의 창조자가 될 수 없다. 물론 천사가 타락했다고 이야기한다. 천사를 왜 타락하도록 만들었나. 천사가 의지가 있다면 왜 하나님은 선한 의지만 갖도록 만들지 못하셨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면 결국 해결되지 않고 결국 종말에 가서 알게된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운명이라고 말할때 이게 어려운 운명이다. 가족이 죽는다. 수천만의 사람들도 그 고통이 얼마나 처참한가?

큰 틀에서 보면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지만 그러나 매순간 우리의 선택에 따라 달라진다. 닫혀져 있는 것이 아니라 열려져 있다. 결정론이냐? 개방되어 있느냐? 살아가는데 기계적으로 따라 가느냐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내가 선택하느냐? 기독교는 후자다. 선택함으로서 자기 삶을 끌어가는 것이다. 그 지나온 흔적이 내 노력이 아니라 어떤 힘이 개입한 것을 느끼게 된다. 칼빈이 예정론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었다. 예정론도 어떤 것과 상대적 개념이다. 너는 축복받도록 저주받도록 예정되었다고 하면 칼빈을 또 왜곡하는 것이다. 운명이라고 하는 것은 좋은 뜻으로 우리의 삶이 가야될 길이라면 그것이 닫혀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쪽으로 열려있다. 그 길을 우리가 선택해 갈 수 있다. 우리가 잘 갈 수 있도록 그런 점에서 기도를 드려야 하겠다. 그런정도밖에 우리가 더 이야기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