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29일, 저녁 7:30, 공간울림

 

욥기 공부(3), 2015429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3장 욥의 자기 저주

 

<1-10> 욥은 3장에서 자기를 저주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진술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늘 모든 것을 긍정하고 감사하게 생각하지는 못한다. 예레미야도 욥과 비슷한 심정으로 자기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다고 한탄했다(20:14-18). 역설적으로 하나님 경험은 버림받음, 즉 백척간두(百尺竿頭)의 경험에서 깊어지는 게 아닐는지.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유기를 경험했듯이 말이다. 욥의 자기 저주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자기의 운명을 자신도 감당하기 힘들다는 호소다.

8절의 표현이 재미있다. 리워야단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거부하다가 쫓겨난 세력을 가리키는데, 성서적 전통이라기보다는 가나안 종교의 전통에 가깝다. 구약성경에도 뱀이 아담과 이브를 유혹하는 악의 세력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뱀은 하나님의 힘을 거스르지는 못한다. 리워야단을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들은 마술사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10- ‘내 모태의 문운운은 불효막심한 발언이긴 하다. 자기가 당하는 환난이 얼마나 극심한지에 대한 심정이 담겨 있다. 실제로 인생이 망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라는 사실이 그에게 이런 극단적인 발언을 하게 했을 것이다.

 

<11-19> 앞 단락이 자기가 태어난 날에 대한 저주라고 한다면, 이 단락은 출산 자체에 대한 저주다. 자기가 죽어서 나온 게 차라리 좋았다는 말이다. 성서주석학자들은 16절을 11절 다음에 나오는 것으로 설명한다. ‘존재하지 않았고,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의 운명은 무엇인가? 정신 장애를 안고 태어난 아이들의 운명은? 하이데거는 왜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고 무는 없는가?’ 하는 화두를 철학적으로 해명하려고 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대답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대답이 끝나는 건 아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창조했는지를 다른 이들이 알아듣도록 해명해야 한다. 궁극적인 대답은 종말에 주어질 것이다.

17-19절은 존재하지 않은 세계가 오히려 구원인 것처럼 말한다. 악한 자의 소요가 그치고, 피곤한 자가 쉼을 얻으며 ... 작은 자와 큰 자가 함께 지내고, 종이 주인에게서 해방된 세계로 묘사되었다. 욥기는 단순히 욥이라는 인물의 비참한 운명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개인적인 실존이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 그리고 불의하고 왜곡된 세상의 구조까지 언급한다.

 

<20-26> 욥의 고통은 실제로 생존 자체가 무너졌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죽을 수 없다는 데에서 극에 달한다. 20절에서 그는 하나님이 고난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고 마음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다고 한다. 이것처럼 큰 모순은 없다. 죽기를 바라는 고통은 빛과 생명이 없다는 뜻인데도, 본문은 빛과 생명으로 인해서 고통이 심해졌다고 말한다. 여전히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한 가닥 희망이 남아 있다는 뜻인가? 인간이 극심한 고통의 자리에 들어갔을 때만 이런 희망을 경험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욥은 여전히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23절 공동번역은 이렇다. ‘빠져 나갈 길은 앞뒤로 막히고 하느님께 영락없이 갇힌 몸하나님 안에서 갈 길을 찾을 수 없다는 뜻이다. 개역개정의 ‘... 빛을 주셨는고...’는 지나친 의역이다. 욥이 말하는 핵심은 이것이다. 지금 그는 이유 없는 고통에 떨어졌다. 현재 그에게는 죽음이 구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죽음까지 막고 있다. ‘출구 없는 방에 갇힌 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