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구약의 내세관과 신약의 내세관이 다른것 같은데 간단히 알려주세요

기독교 사상이죠. 기독교사상이나 개념 이런 것들이 변화 발전되었습니다. 구약의 내세관과 신약의 내세관이 대비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발전해왔느냐 그런 것들을 따라갈 수 있을 뿐이죠. 내세관도 그렇습니다.

하나님 이해가 뭐냐 맞물려 있기도 하구 인간의 영혼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내세라고 할때 오게될 세상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세상을 이해해야 하는데 히브리어로 세상을 에온이라고 하고 헬라어로는 코스모스라고 합니다. 헬라사람들은 왜 세상을 코스모스라고 부르고 히브리 사람들은 에온이라고 불렀을까요? 똑같이 세상인데 그 안에 있는 개념이 다른거죠. 어떤 뜻이라고 이해하느냐에 따라 다른 겁니다. 제가 개념이라는 말을 자주 썼고 개념이 언어의 세계다 이야기했는데 히브리인들은 시간적으로 생각하고 헬라인들은 공간, 커다란 안에 들어 있는거고 그 안에서 돌고 도는 거고 새로운 것은 없고. 불로 다 태웠다가 다시 살아나고 영혼이 순회하는 세상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코스모스라고 이야기했구요. 히브리 사람들은 공간이 아닌 시간,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안에서 돌고 도는 것이 아니라 어디로 향해서 가고 있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게 뭐 중요하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냥 그건 말뿐이지 그게 뭐 실제적으로 뭐가 중요하냐? 중요합니다. 세계관이니까요. 세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거든요. 세계가 무엇이냐에 대한 문제와도 다 연관되어 있어서 내세라는 것만 딱 끊어서 다르냐 같으냐 말하기는 쉽지 않는데요. 제가 앞서 이야기한 대로 내세라는 신앙단상에 썼으니까 보시고요 큰틀만 이야기한다면 구약에서는 내세관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신약과 같은 내세, 종말론적인 내세, 새하늘과 새땅, 새 예루살렘 그러한 상징어로 표현되고 있는 그 세계가 구약에서는 없는거죠. 죽으면 다 스올이라고 하는 어둠침침한 곳으로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 죽음은 모든 조상들이 가야할 그곳을 통과한 순간이다라고 생각한거죠. 그러니까 미래의 내세, 죽음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구약성서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희망이 없습니다. 그게 구약 성서 말기쯤 묵시사상으로 연결되면서 또 새로운 세계로 열리게 되거든요. 묵시사상이 신약의 종말론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적극적인 세계이해로 바뀌게 되죠. 그렇습니다. 거기까지만 하겠어요.

2월 24일 사순절 셋째 주일입니다. 잘 지냈셨죠. 반갑습니다.

질문: 매튜폭스는 원복에서 유신론이 하나님을 주/객관계로 이해하게 만들어 하나님과 인간 혼을 상실하게 만들기 때문에 유신론에서 만유내재신론으로 옮겨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도 기본적으로는 동의하는데 그렇다면 유신론적 종교행위들이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요? 이와 관련된 목사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만유내재신론 매튜폭스가 하는 이야기를 정확히 이해해야 하는데 옛날에 읽었습니다만 그냥 상식적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짚은 지적은 옳습니다. 기독교는 유신론, 거칠게 말한다면 무신론관계입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유신론 무신론 논쟁을 뛰어넘는 하나님이해거든요. 하나님이 곧 있다는 방식으로만 하나님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없음으로서 하나님의 계심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신론 무신론은 있다 없다 메튜폭스식으로 말한다면 주객도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란 말이죠. 나와 너와의 관계에서만 이야기할 수 밖에 없게 되는데 하나님은 너와 나의 그러한 존재방식을 뛰어넘는 점에서 유신론적 하나님이해는 한계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정통신학에서도 시대 언젠가 무신론과의 논쟁에서 유신론의 입장을 지지하기는 했습니다만 그게 기독교 정통의 신론은 아닙니다. 정통 신론은 삼위일체론이지요. 삼위일체론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신론을 지지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다만 있음과 없음과의 관계를 훨씬 뛰어넘는 그러한 하나님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잠간 이야기 한 것과도 연관된다고 보는데요. 하나님의 전능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능력도 이야기하기 때문에 보통 유신론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무소부재, 전지전능 이런 쪽으로서의 하나님을 강조하는 거거든요. 그러면 기독교의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차원에서요. 무능력, 자기가 자기를 십자가에 다는 하나님, 역설적인 거죠. 오늘 우리가 이야기해야될 부분과도 연관됩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여태까지 실증적이고 가부장적이고 유신론적인 그러한 하나님 이해는 이미 기독교 정통신학에서 극복된 것된 것입니다. 극복된 문제인에요 그렇지 않는 것처럼 생각해서 기독교를 실체론적 유신론이다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학이 이미 많이 진행되어 온 것을 잘 모르고 하는 이야기고요.

매튜폭스가 만약 이 세계 모든 것 안에 계시는 하나님, 만유내재신론. 판테이즘 panentheism, 그런 부분들이 있죠. 그러나 그런 것도 정통 기독교 신의에서는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창조하신 행위자체가 하나님의 존재방식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하나님이 다 계신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주장하죠. 그러나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거예요. 그 차이가 작지만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에 하나님이 곳곳에 임재하시지만 조금 더 매튜폭스나 이런 신비주의자 표현을 빌리자면, 민들레 꽃 한송이에도 다 들어있지만, 그러나 그게 곧 하나님은 아닌 거거든요. 물론 매튜폭스가 만유내재신론, 범신론도 이야기하겠지요. 우리가 더 이야기하려한다면 책을 갖다 놓고 대조하면서 읽어야 하니까 그게 힘든 것 같구요. 만유내재신론, 매튜폭스가 이야기하는 범신론 물론 차이가 있습니다. 고게 아마 스탠스의 차이일것입니다. 범신론은 훨씬 더 세상 자체를 신으로 이해하게 된다면 메튜폭스는 거기서 조금 더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그러나 여전히 세상을 초월해 있는 하나님의 성격을 약화시키는 것은 분명합니다. 범신론은 아니겠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의 역사내재이면서 역사 초월을 놓치지 않거든요. 이거를 떠나 있는 스스로 존재가 가능한 그러니까 이 세상이 없어도 하나님은 존재한다는 것은 기독교 전통 신론에서는 그걸 포기하지 않습니다. 매튜폭스는 그게 포기될 가능성이 많거든요. 이 세계 자체가 신이 아니다라고 하더라도, 신과 동일시될, 신의 통치가 다 들어 있으니까요. 그렇게 생각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하나님의 초월성이 약화된 그런 것이죠.

질문: 가톨릭에서 마리아에게 기도하는거와, 연옥의 존재 믿는 것이 기독교(개신교)에 이단성이 있는 건가요?

죽음이후의 일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니까 연옥을 믿는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아니고요. 성서에서도 그런 가능성에 대한 설명이 있으니까 그들이 연옥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그들을 이단이라고 할 수는 없고요. 마리아에게 바치는 기도 일반 신자들에게는 마리아가 거의 신처럼 인식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가톨릭 정통신학에서는 마리아가 신은 아닙니다. 마리아를 강조하는 것은 마리아 자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강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하는 사실, 마리아가 신이라 하는 차원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라는 사실에 포커스가 있는거죠. 그것을 강조한다는 면에서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죠. 물론 가톨릭의 신앙 중에서 성모승천 문제가 들어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은 또 다른 문제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어렴풋이 알고 있듯이 마리아를 신으로 섬기다는가 하는 것은 조금 거리가 있습니다. 카톨릭은 전혀 이단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무식하거나 독단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네. 대충 그러면 간단한 질문들은 정리가 되었다고 보고요.

이런 저런 생각을 좀했구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이 몇년도인가? 2008년인가. 갑자기 글을 쓰고 하다보니.  시간에 많이 쪼들려서 그런지. 그런것은 아니겠습니다만. 뭐에 집중하다보면 시간을 잊어 버리는 때가 많이 있어요. 독서삼매에 빠진다고 하는 것과 비슷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책을 보거나 성서를 보거나 공부 준비를 할 때만 아니라 길을 가다가도 그런 경험을 할때가 많이 있습니다. 노을이 지는 것을 볼 때 또 어떤 향기를 맡을 때든지. 또 어린아이의 목소리를 들을 때라든지. 문득 정신이 차려지는 거예요 도대체 이 장면이 뭔가 하는 것이죠. 여러분도 그런 경험을 할때가 있을겁니다. 문득 깜작 놀라는 것이죠. 정신이 퍼뜩 드는 것이거든요. 길을 간다거나. 잠을 자다가 깬다거나, 커피를 마신다거나. 대화를 한다거나 지금도 마찬가지요. 깨는, 각성이라고 할까요. 그 장면을 객관적으로 내려다 보는 것입니다. 내가 길을 가다면도. 한 장면이잖아요. 영화의 한 장면으로 생각해 보세요.  어떤 사람들이 길을 가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도 있구요. 행인들도 있구요. 바람에 날려서 먼지가 날라올 수도 있구. 종이가 날라올수도 있고 그러한 순간순간이 계속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안에 내가 들어가 있는 것이죠. 내가 영화의 한 장면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세요. 이상한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가능성이 있는 일이잖아요.
우리는 그런것을 평소에는 놓치고 사는데요. 거기에 우리가 예민하게 영적으로 깨어있는 상태, 그게 바로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듯이 어떤 근원에 닿아 있는거죠. 내 경험이 꼭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느낌이 아주 특이하기 때문에 제가 드리는 말씀이예요.

아마 시인들도 그런 경험을 할 것입니다. 어떤 순간에서 영원을 경험하는 하는 것이죠. 황지우 시인의 시(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를 빌려서 말한다면 그런거예요. 주막집에서 소주한잔 부어놓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자기, 먼 후일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는 자기를 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자기의 노년을 미리 그려 보는거예요. 지금 살지만 20년 후에 자기모습이 모든 걸 내려놓고 주막집에서 소주한잔 부어놓고 떨어지는, 소주가 줄어드는 거만 보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자기모습, 다른 사람이 볼때는 추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모든 짐으로 부터 벗어나서 그냥 어떤 순간에 들어가 있는 자신을 내다 본다고 하는 것입니다.그러한 경험, 이게 잘 전달될지 모르지만 저는 그렇게 느끼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 대통령이 되어서 취임식을 하고 있거나 길가에 자판을 벌여놓고 귤을 몇개 놓고 팔고 있다거나 그 순간은 다 똑같거든요. 대통령 취임장면만 위대하고 의미가 있고 자판에 벌려 놓고 귤을 팔고 있는 이런 것들은 초라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전혀 아니거든요. 다 모든 것들이 이 세계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장면들입니다. 그게 무지 많은거예요. 하나 하나가 우주와 같은 무게를 안고 있는 것입니다. 그거를 우리가 깨어있는 영성으로 포착해야 하는 것이죠. 그게 아마 예술가들의 영감일 수도 있구요. 시인들의 영감, 철학자들의 각성, 깨달음, 종교인들의 깨우침이기도 하구요. 무슨 말인가 하면요.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요.

문득 아까 있다가 정신차려 지면서 지금 내가 책상앞에서 컴퓨터도 치고 성경읽고 내일 저녁에 포항에 가서 공부할 것도 준비했고.. 마치지 못했어요. 반도 채 못 했는데 내일 오전에 해야하겠어요. 포항에서 공부하는 것, 두 달정도 지났군요. 처음에는 쉽게 쉽게 잘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요즘은 조금 부담스러워요. 이렇게 동영상 강의도 목, 주일해야 되고 다른 글도 써야 되고. 하다보니 내일도 해야하고. 조금 힘들어도 하다보면 재미있거든요. 이런 공부들도 시간도 좀 그렇고 하기 싫어도 의타적으로 하다보면 그 안에 들어가서 도움이 많이 됩니다. 그런점에서 대학교 공부도 그런 점에서 필요하구요. 코스워크 박사학위도 대단한 것은 아닌데 일단 거기에 들어가면 뭔가는 해야 되거든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얻는 것이 많습니다. 저도 이것 저것 무리해서 이것저것 하고 있는데 그래도 할 때는 좋아요. 재미있으니까 말입니다.

이렇게 강의 준비를 하다가 문득 갑자기 지금이 언젠가 2008년인가? 아니면 2108년인가? 아니면 더 거꾸로 돌아가서 1008년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면 2천년 거슬러 올라가서 기원후 50년대인가? 갈라디아서가 기원후 50-60년대 사이에 쓰여진 것이거든요.

바울이 말하고 있는 율법과 복음의 세계에 유대기독교와 이방인 기독교 사이에 첨예하게 논란이 되었던 토라와 할례 문제를 그가 그 문제를 적극적으로 대항하고 말이죠. 왕따 당하는형태, 조금 타협하면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인정받고 서로 좋았을텐데 그렇게 유별나게 바울이 대립을 했을까? 그런 쪽으로 들어가다보니 갑자기 2천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것 같더라구요. 바울이 살아있을때는 어떤 생각이었을까? 주변환경도 그렇고 그가 처한 소위 말해서 삶의 자리라고 하는것, 객관적인 삶의 자리도 그렇지만 바울이 혼자 경험했던 신앙의 깊이란 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까에 대해서 궁금증도 많아지고 어느정도는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만 정말 실질적인 그의 신앙 체험이라고 하는것이 무엇이었을까? 갑자기 2천년전으로 돌아간 것 같던 느낌이 들더라구요. 그리고 또 2천년 후가 올텐데. 2천년전 후에는 우리의 후손들은 오늘 우리가 살았던 이 시대를 돌아보겠죠. 다 순간 순간이 연결되어 있는데. 그걸 역사라고 보통 우리가 이야기합니다. 그게 아주 우리가 지금 살고 있거든요. 여러분도 그렇게 살고 있구요. 흔하게 하는 이야기로 리얼한 연극의 한 장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장면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게 과연 무엇일까? 이것의 진면목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죠. 얼마나 중요한 문제이겠습니까? 대개 우리는 이것을 다 놓치고 살거든요. 다른 것에 우리의 신경, 영성을 다 빼앗기기 때문이어서 그렇습니다. 다른 것이 뭔지 아시죠? 이건 일반 세속사람들은 당연할 것이구요. 교회 목사들마저 그럴때가 많이 있습니다. 다른 것에 목사로서 어떤 힘들을 다 빼앗기는 거예요. 교회를 관리해야 되고. 규모가 있는 교회들을 말합니다. 거기에 다 기계처럼 그 안에 들어가서 돌아가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결국은 참된 영성을 경험하기가 쉽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게 다 역사이거든요. 2천년전 기원후 50년대 갈아디아서를 썼던 사도 바울과 그 자리, 2천년이 휙 지나서 우리는 다시 갈라디아서를 공부하고 있구요. 읽고 있구요.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게 될텐데. 이런 역사가 이렇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과연 그 역사라고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어제 서울 오프모임중에서도 잠간 그런 이야기가 강의중에 나오기도했는데 깊이 이야기하지는 않구요. 생각할 수록 신기하기 때문에 제가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아까 모든 것이 한 장면 한장면이 다 있다고 그랬잖아요. 나중에 최후의 심판이 오게 되면 그때 모든 장면들이 replay 될 수 있을까요? 얼마나 많은 사진으로 찍어두어야 그것이 가능할까요? 어느 것도 하나님 앞에 숨길 것이 없게 되는데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삶이 평가되고 숨긴 것이 드러나게 될까요? 음..그건 그건데요. 이 역사 안에 있는 모든 장면들이 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을까? 하는 거죠. 다시 한번 여러분들, 연극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세익스피어의 희곡을 생각해도 좋습니다. 그건 세익스피어 작가가 대본을 그렇게 썼기에 그렇게 갈 수 있는거죠. 그렇다면 세익스피어가 대본을 다르게 쓰면 다르게 될 수 있는겁니다. 여러가지 가능성중에 하나로 하는거죠. 극작가의 머리속에는 수백가지 가능성이 있었을겁니다. 햄릿의 운명을 죽느냐 사느냐는 이런 방식으로가 아니라 조금더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인간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수백가지의 가능성중에서 하나가 결정되어서 역사로 내려온 거예요. 그러면 수많은 가능성들은 뭐고 거기서 역사가 된 것의 차이가 뭘까요? 도대체가. 그거를 헬라철학자의 표현을 빌자면 가능태와 현실태라고 하던가요. 모든 것들은 다 가능했던 것입니다. 내가 우리 집사람인 문혜숙이 아니라 다른 여자와 결혼할 가능성도 많았거든요. 아 이건 비밀입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우리들에게는 모든 일들은 가능성이 열려있는데 그중에 어떻게 하나가 선택되어서 우리의 운명이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뭐예요. 가능성은 있었는데 그냥 그걸로만 남고 실제 역사가 되지 않는 것과 실지 역사가 된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정말 그 차이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말장난 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왜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저의 생각만이 아니라 많은 철학자들이 그런 생각을 했을거고 성서신학자들도 그런 생각을 하는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 이런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이렇게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지금 명백하다고 생각하는 이 현실과 이 역사가 그렇게 명백한 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옛 스승들의 말에 있듯이 大夢이라고 하잖아요. 삶이란 것이. 큰 꿈이다. 꿈은 깨어봐야 그게 꿈인지 아닌지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이것을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것이 어쩌면 현실이 아닐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것 이면의 다른 것들이 더 현실일 수 있습니다. 현실로 드러난 역사 말고가능성으로 남아있었던 것들이 더 참된 것일 수가 있습니다. 숨어있는 것들이지요.

제가 하나님의 은폐성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했죠. 계시는 계시, 노출이면서 동시 은폐라고 했습니다. 숨어있는 것과 노출되는 것 차이가 그렇게 칼로 두부를 자르듯 명백하지는 않습니다. 거기는 어떤 무언가가 우여곡절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참 신기한거죠. 그전에 한번 제가 예를 들었던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왜 존재하는 것들은 세상에 있고, 역사로 드러났고, 왜 없는, 無는 왜 없는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無는 숨어있는 드러나지 않는 것이거든요. 신학자들이나 성서기자들이나, 시인, 예술가들도 다 그런 생각들을 합니다. 그림 그리는 사람들도 그러한 인식이 없으면 그림을 그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것을 해야만 창조행위가 가능한 거예요. 숨어있는 것을 의식할 수 있어야 그게 드러나야 창조지 이미 드러난 것만 말하면 그게 어떻게 창조입니까? 하나님은 드러나지 않는 것과 드러난 것과 드러나지 않는 전체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뭔가를 말씀하시는 것이거든요. 도대체 그런 것들과 기독교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건 당연하게 관계됩니다. 이런쪽으로 하나님과 우리 기독교 신앙을 차근차근히 접목시키고 실질적으로 자기의 삶에서 반성하고 reflect 하고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깊어지고, 그게 우리가 말하는 영성이라고 할 수 있죠. 보통 말하는 신비주의자들은 깊숙히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죠. 저는 일반 기독교인들이 전문가 신비주의가, 영성가, 신학자들처럼 되지는 못하더라도 그래도 그런 길을 따라가는 것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런게 바탕이 되어야만 우리의 삶이 실질적으로 성령과 동행할 수도 있구요. 하나님 나라가 말로만 아니라 능력에 있다고 하는데 삶의 능력을 거기서 받을 수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거죠. 우리의 중심이 밑으로 내려갈 수록 흔들리지 않잖아요. 중심이 위로 떠버리면 조금만 옆에서 건드려도 넘어가는 것처럼요. 우리가 영적으로 된다는 것은 삶의 중심에 가장 밑바닥에 둔다는 것입니다. 가장 밑바닥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고요. 존재바탕이고 그런거죠. 이런 어떻게 우리 일반신자들도 이런 훈련을 조금씩 해감으로서 삶의 신비를 더 들여다 보고 그 안에서 성서텍스트와 더 가까이 갈 수 있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확신을 하는데요.

인문학적 성서읽기는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방식인거죠. 역사를 지금 우리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역사의 신비를 경험하면서 또 필요한 것은 역사가 뭐냐에 대해서 쓴 사람들, 이미 그것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들의 책을 읽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들은 다 그런 경험을 한거 때문에요.. 제가 자주 예를 들듯이 바둑을 잘 두기 위해서는 동네바둑에 머물지 않고 바둑 전문가들이 쓴 책을 보거나 그들이 둔 바둑을 복기하면서 공부하는 것처럼 역사의 신비, 개인적으로 누구나 열린 마음으로 공부하면 일자무식이라도 역사의 신비는 경험할 수 있습니다. 최소한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요. 다만 인제 그게 더 체계적으로 자리를 잡고 풍성해지려면 먼저 그것을 공부한 사람들의 책을 읽어야 되는데요. 우리는 성서가 있으니까요. 사실은 성서가 가장 영적인 책입니다. 우리가 역사 안에서 살아가고 있고 역사의 신비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리가 깊이 이해하는데 오늘 오늘 저는 십자가를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2천년전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이니까요. 목요일에 공부했던 십자가, 다음목요일에는 부활을 하게 되는데 그와 연관을 지어서 지난 목요일에 하지 않는 이야기들을 보충해서 할까합니다.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도 질문할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자기가 눈만 가지면 영적인, 신학적인 눈만 가질 수 있다면 보이는 것, 질문이 당연히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질문은 어떨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게 된 책임이 누구에게 있을까요?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까요? 그 책임이 누군가요? 너무나도 쉬운 질문인가요? 여러분들은 아 그래 제사장, 바리새인, 빌라도가 공모해서 예수 죽인 것이 아니냐?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들어서 아는 이야기입니다. 성서를 들여다보고 스스로 찾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들어서 아는 지식도 필요합니다. 다만 들을 때 누구에게서 듣느냐가 중요하구요. 그리고 들은 이야기가 딱 고것으로 끝나지 말고 전체적인 것과 어떻게 연관이 되는가를 생각할 줄 알아야 됩니다. 많은 경우에 지금 들은 그것을 단답식으로 암기하고 마는겁니다. 아 예수님이 그런 식으로 돌아가셨다. 성경에 그런 구절이 있으니 당연한 것이다.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좀 봅시다. 그래요. 물론 복음서에서는 그런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계속 다투었구요. 제사장이 보낸 군인, 사병들에 의해서 예수님이 겟세마네 기도하다가 잡히셨고 그 해의 제사장에게 재판도 받구요 결국 빌라도 총독에게 사형 선고를 받아서 십자가에 처형을 당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에는 조금 다르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고’라고 되어 있습습니다. 이 사도신경에는 복음서가 보도하고 있는 제사장에 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종교지도자들이 예수 처형에 거의 밀접하게 연관되고요. 거의 그들의 책임이 많은 것 같은 뉘앙스를 받게 되는데 사도신경에는 그들의 이야기가 빠져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다음, 서신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책임이 누구냐에 대해서 아주 구체적인 언급이 별로 없습니다. 제가 그걸 확인하지 못했어요. 오늘 어떤 이야기를 할까하다가 그냥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해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서신의 어느 구석에 그런 게 있을까요 없을까요? 제가 머리에 딱 떠오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서신 어디에 예수님 십자가 처형당할때에 복음서가 말하듯이 그 책임이 제사장, 바리새인들, 사두개인이나 직간접적으로 연관되구요. 그리고 빌라도에 대한 이야기가 있나요? 사도신경에는 빌라도가 나오게 되는데 서신, 굉장히 중요한데..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본문들이 많이 있는데요. 그것에 대해서 빌라도와 책임자들에 대해서는 말이 없을까요? 사도행전같은데 보면 너희가 십자가에 못밖았다 그런 이야기가 나오지요. 구체적으로 복음서가 보도하고 내용들은 없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미 서신서를 기록할때는 예수님의 처형이 제사장과 빌라도의 책임이라고 하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난 사실이기 때문에 더 이상 재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복음서가 신약성서에 앞부분에 나오고 있습니다만 복음서가 먼저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기록된 연대로만 보면 데살로니가 전서가 가장 먼저 기록 되었구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서신하고 복음서가 한무더기로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같은 것은 훨씬 뒷 이야기이거든요. 서신서도 쭈욱 펼쳐져 있습니다. 40년대에서 100년대까지 5, 60년동안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일관성을 갖기에는 좀 힘들죠. 일관성 이야기는 지금 여기 필요없는데요. 그러니까 복음서의 내용과 서신서의 내용이 연대기적으로 순서를 맞추어 기록된 것이 아니라 들쑥날쑥 공동체의 형편에 따라서 형성된 겁니다.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은거예요.

아마 사도바울도 편지를 쓰면서 어떤 복음서는 알고 있었을 것이고 어떤 복음서는 모르고 있었겠지요. 복음서 기자들도 자기가 다 쓴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이미 거기는 정형화된 이야기들이 있고 그리고 자기가 전해 들은 이야기도 전승은 아니지만 이렇게 저렇게 전해들은 이야기도 있구요. 성서 신학에 대해서 개론적인 것을 읽으신 분들은 알고 계시겠습니다만 복음서, 로기온, 예수님의 어록집등등 초기적인 문서에서 부터 조금씩 발전해 나가거든요. 복음서의 기자들도 자기 혼자 다 쓴 게 아니라 여러 형태의 전승들과 이야기들과 그리고 나름대로 편집의 과정을 통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이 말은 복음서도 그렇고 서신도 그렇고 공동체 안에서의, 공동체의 작품입니다. 그냥 제가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작품이라는 것이 뭐합니다만 사람이 썼으니 그런 차원에서 말씀을 드리는거예요. 공동체의 신앙고백인거예요. 그런 신앙고백적인 차원에서 복음서에서는 제사장과 빌라도총독이 거론되는데 반해서 서신서는 좀 되지 않기도하고요. 이 관계를 제가 논문을 쓰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백프로 확신하고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니 양해하고 들으십시오. 성서 신학을 전공하는 학생이 있다면 석사학위 논문으로 서신과 복음서의 십자가의 의미의 차이를 쓴다고 해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관점이 다르니까요. 갈라디아서와 사도행전사이에서의 바울의 신학이라든지.. 그런 논문들은 벌써 많이 나왔습니다만 여전히 우리가 공부해야 할 거리는 많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차이가 있을까요?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처형의 장본인들이 명시적으로 거론되고 있는데 서신서에는 왜 그런 언급이 없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예수님 처형에 제사장과 빌라도가 그렇게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닐 겁니다. 어느 정도 직접적이냐 아니냐 말하기는 조금 힘든 부분인데요. 우리가 그냥 일반적으로 알고 있듯이 계속해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어떻게 당하시사 그러한 정도로 2천년동안 기독교인들의 입에서 거의 저주죠. 메시아를 고난 받게 했으니까. 그렇게 저주받을 만큼 빌라도가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책임이 있겠느냐 하는 질문이죠.

이런 점도 생각을 해야됩니다. 초기 기독교가 놀랍게도 유대기독교가 초창기뿐만 아니라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나쁜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잘 나와 있는 거구요. 사도행전도 물론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인 사건을 쓴것은 아니지만 방향같은 것은 크게 틀리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 성전에 드나 들었구요. 기도도 계속했고 요즘 갈라디아서 공부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처럼 초기 기독교 예루살렘 공동체가 유대교로부터 독립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유대교의 일부로 자기들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제사장들이 예수 처형의 장본인이라고 한다면 그게 이해가 되지 않는거잖아요. 여기에는 상당히 많은 역사적인 사실들과 숨어있는 것들이 엉켜 있을겁니다. 과연 예수님의 활동과 그리고 유대교와의 관계, 유대교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려고 했던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생각들, 또 70년에 일어났던 로마의 함락, 그것을 통해서 바리새 운동이 새롭게 일어나는 과정 가운데 유대기독교가 어떻게 반응했는가 하는 것이 복음서와 서신을 기록하는데 상당히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초기 기독교와 유대교와의 관계에서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그 관계가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만 제사장이 예수님을 모함하고 빌라도에게 고발하고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중심이 된 예루살렘공동체가 유대교와 선린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겠느냐 하는 것이 설명되는 것이 조금 힘들거든요. 지금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런 사태의 실체적인 진실을 정확하게 말씀드릴 만한 입장은 되지 못합니다. 이부분은 제 전공부분도 아니고 이거는 신약 신학, 초기 기독교사를 해야하는 전공분야군요. 전공을 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여전히 숨겨져 다 드러나지 않고 문서로 남겨있지않기 때문에 정확히 말하기는 힘들겁니다. 다만 우리는 유추해야 하고 결과를 보고 어떤 일이 있었을거다라고 예측 할 수 밖 에 없는 것이죠. 어쨌든 여기서 변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입니다. 이 십자가 처형을 중심으로 해서 기독교가 유대교나 헬라의 다른 사상들과 차별화 되는거죠.

성경,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부분인데요. 고전 1:22-24절을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것도 참 재미있을 것 같아요. 텍스트 해석인데요. 성경은 앞서 이야기한데로 자기가 볼 눈을 가진다면 많은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걸 다 따라가지 못해서 그렇지요.

[22] 유대인은 표적을 보기 원하고 그리이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치는 돌이며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인이나 그리이스 사람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입니다. 쭈욱 나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기적을 하나님의 행위로 생각합니다. 능력을 바라보는거죠. 헬라인들은 지혜, 소피아죠.이 유대인들은 어떤 기적적인 것, 종교적인 것 하나님의 큰 능력을 중요하게 생각하니까요.  헬라인들의 스토아의 고상한 깨달음도 아니고 바울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애기 하거든요. 이게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부활은 더 중요하지만 십자가는 그 길로 가는 길목에서 놓칠 수 없는 부분이거든요. 바울은 다른 종교와의 차이점이라기 보다도 고린도 교회안에서 벌어진 문제를 풀어가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특성이라는 것은 일반 종교적인 것은 아닙니다. 오늘 주일예배 설교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만 사실은 기적이 아닙니다. 호렙산 바위에서 모세가 지팡이로 치니까 샘이 솟았다. 만약 이런 본문을 두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수를 주시는 놀라운 기적을 베푸신다. 얼마나 놀라운 분이신가? 이렇게 설교한다면 제가 보기에는 성경 왜곡이라기보다는 깊이로 들어가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적은 물론 성서에 많이 나옵니다만 징표예요. 표징입니다. 하나님이 중요하지 기적이 중요한 것 아닙니다. 기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유대인들입니다. 하나님을 그런 방식으로, 능력있는 자로만 이해하는 것, 그러나 기독교는 십자가에 죽은 분을 하나님이라고 믿거든요. 정반대입니다.

헬라인들이 고상한 지식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 비평할때 자주 반복한 이야기, 교양 설교하지마라. 헬라인들이 원하는 지혜이거든요. 도덕적, 윤리, 교약적 설교는 기독교의 케리그마가 전혀 아닙니다. 물론 기독교 공동체안에도 그안에서 쓰여진 서신 안에도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가르침이 있기는 있죠. 그거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표징으로서 기적을 말하듯이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임재의 한 방식으로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있어야 할 일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통치가 중요한 거죠. 하나님의 임재가 중요한 것이죠. 기적이 아니다. 구분하기 쉽지가 않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한다는 것이죠. 이게 뭐냐 하는 거죠? 도대체가 유대인, 서른 세살 쯤 되는 유대인 한 남자의 십자가 처형이 온 인류의 구원이 되냐. 그게 과연 기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그게 설득력이 되겠느냐? 십자가는 저들에게 어리석음입니다. 아주 미련하게 죽은거예요. 무능력하게 죽은 것이죠. 어떻게 하나님이 십자가에 죽겠습니까? 헬라인들에게 거리끼는 것, 미련한 것은 그렇습니다. 얼마나 고상한 사람들이 볼 때 부끄러운 일이거든요. 정말 우스운 죽음입니다. 그런데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걸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라고 생각했고 구원의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도저히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에게는 이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말 상대가 안되요. 예수믿는 사람들은 무신론자요. 정말 무식한 사람들입니다. 고상하지 않잖아요. 아주 초라하잖아요. 거기서 부터 기독교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도대체 역사의 흐름에 정반대에 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이 엄청난 혁명적인 선포, 이게 기독교의 시작입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요?

오늘도 이런 일들 마찬가지 일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정말 실체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지 않을걸요. 그게 오히려 능력이 되어버리고 자랑거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십자가에 달리심인데 그 아주 실질적으로 삶에서 경험하는 사람들이있을까요 그거는 하나님 구원의 섭리의 놀라운 계획이고 능력이고 그렇게 말합니다. 말은 그럴듯한데 실질적으로 십자가를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사람들이 거리끼는 삶의 결과였고 미련한 삶의 결과, 그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이 세계를 구원하시는가에 대해서 눈을 떠야 되는거죠.

오늘도 끝 마무리가 설교쪼로 된 것 같습니다. 시간이 거의 다되었군요.
오늘 들으신 분들도 아 그래 그럴 듯하구나. 내가 평소 생각하던 부분이구나. 저도 다 말씀드릴 수가 없었고 말의 한계이기도 하고 아무리 말을 잘한다 하더라도 들으실 분들이 그쪽에 주파수,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안되더라구요. 오늘 이야기가 그냥 많은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십자가 사건이 그렇게 주술적으로 그냥 구원의 길로 암송하고 말것이 아니라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가야 할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적 사건이었구나. 그런 것을 조금이라도 느끼셨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게시판 질의: 십자가와 관련하여 소개하여 주실 책이 있으시면 알려주세요
- 몰트만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 판넨베르크의 설교집, 믿음의 기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