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초대교회의 토양

이제 우리는 상당히 먼 여행을 떠나야 할 그 출발선에 섰다. 2천년 전 유대교와의 관계로부터 시작해서 21세기에 들어선 한국교회에 대한 전망에 이르기까지 전과정을 통해서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작업이다. 기독교에 대한 기존의 상식이나 정보가 이런 길을 가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미리 어떤 밑그림을 그려둘 필요는 없다. 일단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소위 원시(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자리로 돌아가서 그들을 말동무 삼아 이 길을 떠나보자.

원시 기독교 공동체

오늘의 현실 기독교가 인류문화사에 분명한 현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그것의 시작도 또한 또렷해야 할텐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도행전에 보면 교회의 전 단계에 해당하는 공동체, 즉 우리가 일반적으로 초대교회라고 부르고 있는 그런 원시 공동체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긴 하다. 예수님의 사도들과 일백 이십 명에 이르는 추종자들이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수시로 모여 기도했으며, 오순절에는 그 유명한 성령강림 사건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그들 공동체가 예루살렘 거리에 나가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이 있다(사도행전 1,2장). 그러나 그들이 지금의 교회와 같은 어떤 조직체를 염두에 두고 그런 모임을 지속시킨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단순히 예수님을 기억하고 그의 약속이 실현되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모였을 뿐이다.
그들 모임의 성격은 오늘의 우리와 여러 면에서 달랐다. 우선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의 생전에 재림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아니면 최소한 그런 심증을 굳히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교회와는 성격이 다른 모임을 꾸려나갔다. 예컨대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이야기는 유명하다. 믿음이 좋은 이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그들도 자신들의 재산을 교회에 바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있듯이 목돈이 생기자 그들은 일부만 내어놓았다가 성령을 속이려 했다는 책망을 듣고 졸지에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또한 그 당시에는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다(사도행전 2:44, 45). 그러니까 그들은 가장 전형적인 공산공동체를 유지하고 있으면서 거의 극단적인 소종파운동과 비슷한 집단을 이루고 있었던 셈이다.
그들 초대공동체가 그런 소종파적 열광 안에서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이유만이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유대교와의 차별이 별로 없었다는 점에서도 오늘의 교회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그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사도행전 2:46)고 한다. 이는 곧 사도행전의 초기공동체가 여전히 유대교의 총본산인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모임을 가졌다는 뜻이다. 또한 베드로와 요한이 걷지 못하던 이가 구걸하는 걸 보고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사도행전 3장)면서 그의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자 그가 걷게 되었다는 그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 사건이 있던 장소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 중의 하나인 미문 앞이었으며, 그 당시 베드로와 요한은 오후 3시 기도시간에 따라 성전으로 들어가던 중이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에 예루살렘 거리에서 용감하게 예수를 전하던 베드로가 놀랍게도 여전히 성전출입을 했으며, 여전히 유대인들의 기도시간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예루살렘에서만이 아니다. 바울도 소아시아와 그리스 지역을 순회하면서 안식일을 택해 회당을 찾았다. 물론 그가 선교전략적인 차원에서 회당을 찾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유대계 로마인으로서 그의 종교적 습성이 여전히 회당과 안식일의 연장선 속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놓고 볼 때 초대 공동체는 상당히 오랜 기간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교회의 정체성을 형성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유대교로부터 독립하려는 의지도 별반 없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는 이런 궁금증이 생긴다. 그들이 여전히 유대교 전통 안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들이 그리스도로 믿고 있는 나사렛 예수가 유대교 지도자들의 무고로 인해 피를 쏟으며 죽어간 그 처절한 모습이 여전히 생생할 때인데도 말이다. 가장 큰 이유는 원시 기독교 공동체 구성원들이 모두 유대인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유대교와 그 가르침으로부터 순식간에, 그리고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유대교라는 틀 안에서 가능하리라고 생각하고 상당한 기간 동안 그 유대교 전통 안에 머물러 있었다. 이 시기의 기독교를 가리켜 유대교적-기독교라고 말할 수 있는데, 정확하게 어느 정도의 기간인지는 끊어 말할 수 없다. 어느 한 시점이라기보다는 상당히 점진적인 독립의 과정이 있지 않았겠는가 하는 점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 당시의 이런 정황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소위 예루살렘 종교회의다(사도행전 15장). 그 내막은 다음과 같다. 절친한 동료인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안디옥 교회로 돌아왔을 때 문제가 하나 발생한다. 유대에서 온 어떤 순례자들이 안디옥 교회 신자들에게 강요하기를 이방인 기독교인들도 역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특히 율법의 백미라 할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큰 혼란이 일어났다. 이렇게 문제를 일으킨 이들은 유대인 기독교인들로서 예수를 믿으면서도 율법에 투철했던 인물들이었다. 이들의 주장을 강력하게 거부하던 바나바와 바울은 안디옥 교회 자체 내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서 결국 예루살렘 공동체의 대표자들인 사도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 문제를 매우 진지하게 다루었다. 그들 중에서 유대교적 전통을 중시하던 이들은 이렇게 자신들의 입장을 표했다.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사도행전 15:5). 이어서 사도와 장로들이 심한 격론을 거친 다음에 베드로가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천명했다.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 …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사도행전 15:7-11). 마침내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 격인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다”(사도행전 15:19, 20). 이런 예루살렘 종교회의 결과로 인해서 이제 이방인 기독교인들은 율법의 제한을 받지 않고 순전히 예수를 믿기만 하면 충분하게 되었다. 이 사건이 말하려는 바는 물론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율법의 강제를 받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 유대계 기독교인이 여전히 율법과 할례를 지켰다는 흔적이기도하다.
예루살렘 종교회의 이후에 유대인 기독교인과 이방인 기독교인 사이에 율법문제로 인한 갈등이 완전히 해소되었느냐 하면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여전히 할례당이다, 무할례당이다, 율법주의자다, 무율법주의자다 해서 분란이 있었다. 어떤 종교적 사유의 틀이나 습관을 바꾼다는 것은 거의 혁명적인 변화가 없으면 가능하지 않은 문제다. 평생 율법에 의해 살아왔던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평생 율법 없이 살아왔던 헬라인 기독교인이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함께 믿었다고는 하지만 그 문제를 단숨에 해결했으리라는 기대는 무리다.

*유대인 남자는 태어난지 팔일만에 모두 할례(포경수술)를 받아야만 했다. 이 전통은 아브라함까지 소급된다. 창세기 17장에 보면 구십 구세 된 아브라함이 아내의 몸종인 하갈을 통해서 아들 이스마엘을 얻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후손과 땅에 대한 축복과 약속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할례명령을 내린다. 그 이후로 이 할례의식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증명해 주는 결정적 단서였기 때문에 모든 유대인들은 이 할례를 행해야만 했다. 사실은 할례가 유대인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근동지역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종교적, 위생학적 시술이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집트 룩소르의 카르나크 신전에서 발견된 벽화에 할례가 묘사되어 있는데 놀랍게도 남아만이 아니라 여아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오늘날도 이집트 여성의 97%가 할례를 받는 것으로 통계가 나와 있다. 남성들의 할례는 위생건강을 위한 조치이고, 여성들의 할례는 성욕억제 차원의 조치였다. 율법에 대해서 상당히 자유로웠던 바울도 디모데에게 할례를 시행하게 할 정도였으니까(사도행전 16장) 그 당시 분위기를 미루어 알만 하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데, 원시 기독교 공동체가 언제 유대교로부터 독립되었는지, 언제 정식으로 교회 간판을 내걸었는지 알 수 없다. 원시 기독교가 상당히 오랫동안 유대교적 구도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유대인들의 역사경험과 그들의 세계관에 의해 상당한 정도로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더 정확히 말해서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정신적 토양이기 때문에 유대인과 그들의 역사경험에 대한 논의는 그것의 긍정적 혹은 부정적 의미는 둘째 치고 현대 교회의 모체인 원시 기독교 공동체를 이해하기 위해서 건너뛸 수 없는 디딤돌이다.

유대인의 생존투쟁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벌어진 중동지역의 분쟁은 늘상 세계 평화를 위협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이스라엘 사람들의 주장이 옳은가, 아니면 PLO(팔레스틴 해방기구)의 주장이 옳은가? 누가 정당한가? 하나님으로부터 땅과 후손을 약속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유대인인가, 아니면 2천년 동안 그곳에서 삶의 뿌리를 내린 팔레스틴 원주민들인가? 어떤 면에서 보면 기원후 70년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당한 이후 세계 곳곳에서 디아스포라로 살던 유대인들이 거의 2천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성서의 약속을 근거로 내세우며 팔레스틴 원주민들을 강제로 몰아내는 행위는 억지인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제 삼자로서 우리는 그들이 왜 그렇게 호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는지 좀더 냉정하게 생각해야한다. 이는 곧 그들의 역사경험, 그들이 처했던 삶의 자리를 감안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구약성서를 보면 유대인들은 항상 영토를 중심으로 한 국제적 긴장 가운데서 살아왔다. 유대인들이 조상이라고 생각하는 아브라함만 해도 그렇다. 원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생지인 갈대아 우르가 고향인 그는 아버지와 조카를 비롯한 몇명의 식구와 함께 하란 땅을 거쳐 가나안 땅으로 이민을 왔다. 그 당시야 워낙 인종이 드믄 때라서 가나안 땅의 한 구석에서 지내는 것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야곱과 요셉 이후 애굽에서 4백년 정도 소수민족으로 살다가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왔을 때는 그곳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과의 영토분쟁이 본격화되었다. 유대인들은 사사시대를 통해 땅을 평정해나갔고 급기야 다윗 시대에 이르러 거의 전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윗과 솔로몬이 재위한 아주 짧은 시기만 제외한다면 거의 전역사를 통해서 주변의 강대한 제국들에 의해 지배를 받았다.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그리고 결국에는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다.
구약성서의 하나님이 분노하는 전쟁의 신처럼 묘사되고 있는 이유도 역시 이러한 유대인들의 역사 경험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 당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고상하고 이상적인 국제윤리나 가치가 아니라 제국 틈바구니에서의 생존이었다. 생존하지 못한다면 그 어떤 숭고한 이념도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생존을 위해서 전력투구했을 뿐이다. 사실 지금도 그런 논리가 가능하다. 전쟁터에서는 사랑과 평화의 가치가 별로 작용할 틈이 없다. 우선 살아남아야만 한다. 그것이 선이고 참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모든 행위가 허용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극한의 상황 가운데서도 민간인을 해치지 않는다거나 부상당한 적군에게도 의료조치를 제공해야 한다는 제네바 협정과 같은 최소한의 제한조치들이 있긴 하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자신들의 생존만을 최우선으로 삼기 마련이다. 유대인들은 죽느냐 사느냐라는 절체절명의 오랜 역사경험을 통해서 주변국들과 항상 전투적인 자세를 취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방인은 원수며, 마귀의 자식들이며, 진멸당해야 할 대상들이었다. 하나님이 이방인을 창조한 까닭은 지옥의 불쏘시개감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던 유대인은 이방인들에게 어느 한 순간도 긴장을 풀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배타적으로 뭉쳤다. 이들 유대인은 팔레스틴 땅에 거주하든지 아니면 어쩌다가 디아스포라가 되었든지 타민족들과 결혼*하지 않고 자기들의 유대인 피를 순수하게 유지했다. 일종의 순수 혈통주의를 지상의 가치로 여겼다. 생각해보라. 세상에 어느 민족이 2천년 동안 영토 없이 살면서 민족적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유대인의 이런 역사적 현상이 인류역사에 공헌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또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 어쨌든지 놀라운 일이다.

*율법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가나안 땅의 부족들과 어울리지 말아야 했다. 그들의 축제에 참가하지 말아야하고 그 종족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거나 남자를 신랑으로 삼지 말아야 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소수민족으로서 애굽에서의 4백년에 걸친 노예살이, 미디안 광야에서의 40년에 걸친 유랑생활로 인해서 유대인들은 생존의 위협에 직면해서 살았기 때문에 삶을 즐길만한 조건도 안 되었고 그런 심리적 상태도 아니었다. 유대 처녀들은 한창 나이에도 그저 먹고 사는 데 신경을 쏟아야 했지만, 가나안 원주민 여인네들은 조상 대대로 이어져온 가나안 농경사회의 풍요에 기초해서 화려하게 치장하고 성적 아름다움을 한껏 드러낼 수 있었다. 지금의 남한과 북한의 여인들을 비교해 보면 될 것 같다. 가나안 원주민들은 추수가 끝나면 술을 빚고 떡을 찌고, 많은 먹을거리를 장만해서 축제를 열었다. 함께 먹고 마시고 춤추고 서로 유혹했다. 파토스를 가진 인간으로서 유대 남자들이 가나안 여자들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유대 처녀들이 가나안 남자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결국 율법은 강제규정을 통해서라도 히브리 종족을 지켜내려고 이방인과 결혼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다른 민족들과 긴장관계를 풀지 않고 생존이라는 차원에서 전투적으로 살아가던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로 온 세계 사람들에게서 미움을 받게 되었다. 거의 모든 지역에서 유대인들은 별종으로 보였다. 심지어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수전노가 바로 유대인으로 그려진다. 더구나 메시야 살해자*라는 죄목 때문에 유럽에서는 반유대주의, 반셈주의가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사실 히틀러가 2차 세계대전 당시에 6백만명의 유대인을 살해한 것도 집시와 유대인과 동성애자들을 증오한 유럽인들의 이러한 정서나 편견 때문에 가능했다.

*여기서 잠시 유대인들의 메시야 살해사건을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자. 만약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서기관을 비롯한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토록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압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도 다른 방식으로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게 되었고 이에 근거해서 기독교가 역사에 등장하게 되었을까?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 그렇다면 기독교 역시 등장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유대인들의 메시야 살해는 역사의 우연에 의한 필연이 아닐까 모르겠다. 물론 이런 발상이 억지이긴 하지만, 우리가 어떤 사건의 결과만을 놓고 어느 한 민족을 죽도록 증오한다는 것은 그들이 행한 잘못 못지않은, 오히려 더 큰 범죄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 지나가는 말로 한 것일 뿐이다.

우리는 유대인과 유대교에 대해서 어떤 선입견을 갖지 말고 있는 그대로, 무엇이 비슷하며 무엇이 다른지, 어떤 점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어떤 점에서 자유로운지, 사실대로 바라보아야겠다. 한편으로는 공연히 미워하는 것도 문제지만, 반대로 유대교를 어설프게 흉내 내는 태도도 역시 바람직스럽지 않다. 우리가 그들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매개는 무엇보다도 율법이다.

율법

복음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바는 예수가 공생애 중에 가장 첨예하게 충돌한 이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으며, 그들이 예수를 정죄한 준거가 곧 율법이었다는 사실이다. 바리새인을 필두로 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베이스캠프로 삼고 있는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눈에 예수는 율법을 거스리는 자였다. 예수의 언행은 곧 그들의 위대한 영도자이며 하나님의 대언자인 모세의 권위를 파손하는 행위였고, 당연한 결과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짓거리였다. 물론 그들이 초장부터 색안경을 끼고 예수를 삐딱하게 바라보거나, 그들이 천성적으로 심보가 고약해서 예수를 견책할 방도만 찾은 것은 아니었다. 예수는 공생애 초반부에 상당히 자유롭게 회당을 드나들었는데, 이는 성전과 회당계급들이 예수에게 어떤 적의를 품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의 가르침이나 행동이 그들과 충돌했다. 안식일 논쟁, 성전정화, 율법의 반명제와 같은 과정 속에서 바리새인과 성전 지도자들은 더 이상 인내하지 못하고 예수를 처단해버리게 된다.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은 복음서에 그려진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시비걸기식 행태를 보고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율법을 매우 고약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짚고 넘어가자.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십자가로 몰고간 그 율법을 적대시하면서도, 아니면 최소한 그것의 한계를 알고 있으면서도 이미 율법적으로 신앙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성수주일이나 십일조를 비롯해서 거의 모든 신앙행태가 복음적이라기보다는 율법적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율법의 정신에 매몰되어 있다는 뜻이다. 율법의 규정을 지키지 않으면 양심의 거리낌이 되고, 그 양심의 가책을 면하기 위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 그러나 복음은 어떤 행위나 의무가 아니라 이미 받은 것에 대한, 즉 은총에 대한 감사요 찬양이다. 무엇을 행함으로써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을 하지 않아도 이미 사랑받고 있음에 대한 감격이다. 전세계 기독교가 인정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열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율법적인가 하는 것은 굳이 더 이상 예를 들지 않아도 확실하다. 물론 은총을 모르면 (율)법이라도 있는 게 나을지 모르지만.

예수와 첨예하게 대립한 유대인의 율법은 어디서 시작한 것이며 그 실질적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는 들은풍월로 율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복음은 우리를 구원한다고. 예수에 의해서 율법의 시대는 가고 복음과 은혜가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그러나 예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서 왔다고. 그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고.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다만 이런 이해들이 단순히 도식적 도그마로서만 이해될 수는 없다. 우리는 여기서 가능한대로 율법문제를 인문학적으로 접근해보자.

시내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율법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알려져 있다. 출애굽기 19장 이하에 그 사건이 상세하게 보도되어 있는데, 그 내력을 간단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애굽을 탈출한 히브리인**은 남자 장정의 걸음속도로 보름 정도면 횡단할 수 있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배회한다. 이 광야생활을 시작하면서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일종의 법전(율법)을 받게 된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렇게 이르신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출애굽기 19:5, 6).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서 모세는 정결의식을 행한 후에 시내산에 오르게 된다. 연기가 자욱하고 불길이 솟는 가운데 여호와께서 강림하셨다고 설명되어있다(18절). 이 약속의 말씀은 소위 십계명으로부터 시작한다(출애굽기 20장).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2)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찌니라. 3)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5) 네 부모를 공경하라. 6) 살인하지 말찌니라. 7) 간음하지 말찌니라. 8) 도적질하지 말찌니라. 9)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찌니라. 10)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 그 이외에 많은 규례들이 21장 이하 여러 장에 걸쳐 열거되어 있으며, 또 다른 구약성서 중의 하나인 레위기서는 거의 이런 법전으로 채워져있다.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시내산이 어딘지 지금의 지도상에 정확한 장소를 가려낼 수 없다. 이름은 다르지만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 노릇을 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호렙산과 동일한 산으로만 추정될 뿐이다. 이 산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기리 빛날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는 하나님의 정체성이 진술되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율법이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호렙산에서 모세는 가시떨기 나무에 불길이 넘치고 있었지만 나무는 타지 않는 이상한 사건을 보고 가까이 갔다가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애굽의 노예로 있는 유대민족을 구해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모세는 이렇게 묻는다. 당신이 누구냐? 당신 이름을 대라. 그때 하나님의 이름이 거명되는 게 아니라 다음과 같은 유명한 답변이 나온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애굽기 3:14). 마틴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Ich werde sein, der ich sein werde.” 직역을 한다면 “나는 내가 될 그가 될 것이다”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어떤 사물 처럼 이름으로 불려지는 존재가 아니라 시간적인 존재라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히 베르데 자인”이라는 문장의 신학적, 철학적 의미를 해석하려고 해도 그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 한권이라도 부족할 것이다. 이 문장은 현재형도, 과거형도, 완료형도 아니고 미래형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존재가 미래라는 말인가? 하나님이 완전무결한 존재라고 한다면 미래적 존재론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여기서는 그렇게 표현되어 있다. 어쨌든지 호렙산은 하나님이 누구인가에 대한 철학적 논의가 처음으로 등장한 장소로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모세는 같은 산으로서 이름만 달리하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인들의 모든 종교적, 일상적 삶을 규정해주는 법전을 완성하게 된다. 모세가 하나님을 경험하는 시내산에는 이상한 현상들이 있었다고 성서가 보도하고 있다.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컸으며, 연기가 자욱하고 불길이 솟았고 온 산이 크게 진동했다(출애굽기 19:16-18). 아마 그 당시에 화산이 폭발한 게 아닌가 생각되는데, 유대인들은 그런 현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존엄을 경험하게 되고 그런 권위 가운데서 율법을 받게 된다.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산에 대한 경외심을 가져왔다. 우리나라에도 산신령이라는 신화적 이미지가 있듯이 산은 무언가 거룩한 것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간혹 자신의 목숨을 걸어두고 에베레스트의 여러 산들을 정복한 산악인에 대한 소식을 접할 때 마다 쓸데 없는 짓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산이 주는 거룩의 체험은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앞으로도 이런 시도는 계속될 게 틀림없을 것 같다. 유대인들의 호렙산, 혹은 시내산은 율법이 전수된 거룩한 곳이며, 또한 유대인들은 그 거룩한 경험을 가진 민족으로 모든 인류에게 특별한 삶의 의미를 유산으로 물려주고 있다.

**여기서 잠시 유대인 명칭에 대한 언어적 개념을 정리하자. 유대인, 히브리인, 이스라엘인이라는 명칭은 거의 똑같이 팔레스틴을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의 땅으로 물려받은 구약성서의 한 민족을 가리키는 말인데 그 유래는 약간씩 차이가 있다. 먼저 이스라엘이란 명칭은 야곱이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멀리 하란으로 피신했다가 20년 가까운 긴 유랑생활을 끝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목의 얍복 나루터에서 천사와 사투하듯 생사를 건 기도를 하는 중에 그 천사로부터 우격다짐으로 받아낸 이름으로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이다. 족장으로서 야곱의 위치를 고려해볼 때 그 이름이 개인으로 머물지 않고 민족 전체를 지칭하게 되었다는 것을 당연하다. 한편 유대인이라는 명칭은 야곱의 넷째 아들로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에서 한 지파의 족장이 된 유다와 연관된다. 그런데 앞서의 이스라엘과 여기서의 유다라는 두 이름은 다음과 같은 남북분열의 역사와 연관된다. 솔로몬의 아들로서 왕위를 물려받은 르호보암은 나라를 온전히 보존하지 못하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남쪽의 작은 지역을 통치하는 유다 왕이 되었고, 르호보암을 반역한 여로보암 장군은 북쪽의 넓은 지역을 통치하는 이스라엘 왕이 되었다. 물론 다윗 왕조의 정통성은 유다에 있다. 끝으로 히브리인이라는 이름은 출애굽사건과 관련된다. 유대인들이 애굽의 고센 땅에서 4백 년 동안 소수민족으로 살다가 결국 모세의 영도로 영광의 엑소더스를 감행하게 되었다. 이들이 애굽을 나올 때부터 유대인만이 아니라 그 외의 다른 소수민족들이 동참했으며, 출애굽 이후 광야생활 40년 동안에도 역시 광야에 거주하던 많은 소수 인종이 그들과 합류해서 가나안 땅을 점령할 수 있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히브리라는 말이 구약성서에만 있는 게 아니라 근동지역의 고대어에 간혹 등장한다. 이 말은 주로 하층민을 가리킨다고 한다. 즉 히브리인이란 그 시대의 어느 한 민족을 지칭한다기 보다는 노예나 소작농, 혹은 이민자들 일반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율법은 단순히 십계명만이 아니라 상당히 많은 분량의 법전이 이에 포함된다. 그 내용도 순전히 종교적인 것만이 아니라 바빌로니아의 하므라비 법전처럼 유대인들의 실제생활에 연관된 것들로서 그것이 바로 구약성서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다. 노예를 사고파는 문제, 도적질, 강도, 성추행, 소가 남의 농사를 망쳤을 때의 해결책 같은 내용들도 있다. 고대 법전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율법의 정신도 다음의 문장에 요약되어 있다.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찌니라”(출애굽기 21:23-25). 유대인들은 성서에 있는 내용의 율법만이 아니라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아주 상세한 시행세칙을 많이 발전시켜나갔다. 율법을 직업적으로 연구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이들을 서기관이라고 하며 율법을 빈틈 없이 실천해 나가는 이들을 바리새인이라고 한다.

안식일

예수님 당시에 율법의 핵심은 안식일법에 있었다. 예수님을 향한 거의 모든 비난도 역시 안식일 문제에 집중되었다. 과연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이 무엇인가? 그리고 오늘 우리들에게는?
안식일 전승은 원래 두 가지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세계창조이며, 다른 하나는 출애굽이다. 하나님이 세상과 인간을 육일 간 만드시고 일곱 째 날에 쉬셨으므로 모든 인간도 그 날에 안식해야한다는 이야기가 바로 창조사건에 연관된 안식일 전승이고, 하나님이 유대인을 애굽의 바로에게서 해방시킨 것을 기억하여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이 출애굽과 연관된 안식일 전승이다. 이 두 사건을 간략하게 짚어보도록 하자.
창조사건은 구약성경 첫 머리에 기록되어 있다. 이 창조사건이 바로 하나님의 본질을 규정하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날이 바로 안식일이다(출애굽기 20:11). 생각해보라. 이 세상에 창조사건 보다 더 위대한 일이 있을까. 우리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의 이런 창조신앙을 이어받았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 … ”라는 사도신경의 첫 구절을 보더라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세계현상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참으로 신기하다. 점차 물리학이 세계에 대한 설명을 확대시켜 나가고 있지만 여전히 신비를 벗지 않은 이 세계가 어떻게 시작했을까를 생각하면 놀랍지 않은가. 더욱이 2천 년, 혹은 3천 년 전 고대인의 입장에서 세계를 바라보라. 그들의 눈에 들어온 세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태양이 떠오르고 지며, 달이 떠오르고 진다. 홍수는 무슨 일이며, 지진과 화산폭발은 도대체 무엇인가? 바다와 그 속에 있는 수많은 어족들, 숲과 사막과 광야와 산, 그곳에 살고 있는 온갖 종류의 생물들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가? 욥기서 기자는 인간의 인식이 닿을 수 없는 이런 세계의 신비를 한편의 시*로 읊고 있다.

*네가 바다의 샘에 들어갔었느냐. 깊은 물 밑으로 걸어다녀 보았느냐. 사망의 문이 네게 나타났느냐, 사망의 그늘진 문을 네가 보았느냐. 땅의 너비를 네가 측량할 수 있느냐. 네가 그 모든 것들을 다 알거든 말할지니라. 어느 것이 광명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냐. 어느 것이 흑암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냐. 너는 그의 지경으로 그를 데려갈 수 있느냐. 그의 집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느냐. … … 누가 홍수를 위하여 물길을 터주었으며 우뢰와 번개 길을 내어주었느냐. 누가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며 황무하고 황폐한 토지를 흡족하게 하여 연한 풀이 돋아나게 하였느냐. … … 네가 사자를 위하여 먹이를 사냥하겠느냐. 젊은 사자의 식욕을 채우겠느냐. 그것들이 굴에 엎드리며 숲에 앉아 숨어 기다리느니라.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릴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마련하는 이가 누구냐(욥기 38:16-41).

세계의 많은 종족들은 이 세계를 신으로 섬겼다. 잉카인들이나 이집트인들 처럼 태양을 신으로 섬긴 종족이 가장 많았고, 산을 신으로 섬기기도 했다. 바다에 딸을 제물로 바치거나 심지어는 고목나무 앞에서도 정기적으로 제물을 바치기도 했는데, 이는 절대적인 존재인 세계와 자연에 의해 인간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아무리 엄청난 능력의 자연이라고 하더라도, 태양과 달조차도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자연의 비신화화라고나 할는지, 아니면 자연의 비주술화라고 할는지. 창조주인 하나님을 자신들의 존재기반으로 생각하고 그에게만 의존적으로 살아가게 된 유대인들은 인간행위를 멈추어야 할 안식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약성서에서 창조사건에 버금갈 정도의 무게 있는 사건을 하나 고른다면 출애굽이다. 출애굽은 하나님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핵심사건이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에 대한 수식어는 거의 이러한 출애굽 사건과 연결되어 있을 정도이다. 신명기 기자는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면서 (신명기 5:12-14) 다음과 말씀을 덧붙이고 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하느니라.”(신명기 5:15). 성서기자는 애굽의 종에서 가나안의 자유인으로 불러내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바로 유대인이 선택해야할 유일한 생존의 길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종으로부터의 해방이다. 하나님의 해방사건 앞에서 유대인들은 인간적 행위를 멈추어야만 했다.
이처럼 안식일은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사건을 기억해야하는 날이기 때문에 그 이외의 모든 인간사가 정지되어야만 한다. 최소한의 먹는 행위 이외에는 모든 의도가 멈춰야한다. 출애굽기 20장8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은 이렇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안식일은 아주 특별한 날, 거룩한 날이기 때문에 모든 이들이, 심지어는 육축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어야 한다는 말이다. 일상이 중지되고 새로운 차원의 삶으로 옮겨가는 날이다. 일종의 축제다. 어느 현대 신학자는 온 세계의 공장을 ‘올 스톱’하는 날을 제정하자고, 그래서 대기오염과 수질오염으로부터 단 하루라도 벗어나보자고 주장했다.
창조행위와 해방사건에 근거한 안식일 개념에는 분명히 어떤 사회학적인 의미가 그 바탕에 자리하고 있다. 말하자면 안식일은 유대사회를 건강하게 지켜나가는 일종의 사회적 안전장치라고 할 수 있다. 간단히 생각해보자. 사회에 안식을 필요로 하는 계층은 일 년 열두 달 안식할 조건이 되지 못하는 이들이다 대표적으로는 노예가 그들이다. 반면에 노예 주인들이나 귀족들과 양반들은 굳이 안식할 필요도 없었다. 유대인들은 안식문제를 종교적 계명인 십계명에 적시해서 어떤 계층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아무리 천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일주일에 하루씩은 노동으로부터 완전히 자유 할 수 있게 했다.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아무 일도 하지 못하도록 못 박아 두었다. 얼마나 혁명적인 사고방식인가? 까마득한 옛날, 3천 년 전 이스라엘이 아닌 그 어떤 나라가 머슴들을 일주일에 하루씩 쉬게 했는가? 가능한대로 노예와 일용직 노동자들을 혹사시켜서 부를 축적해 나가는 것이 당연시되는 인간세상에서 말이다. 오직 유대사회를 제외하고는 고대의 그 어떤 사회도 기득권층의 이익에 배치되는 이런 법전을 만들지 못했다.
안식일 개념에서 한 걸음 더 발전해 나간 제도가 안식년이다. 안식년에는 채권과 채무가 일소된다. 이는 곧 사회가 작동하면서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부의 불균형을 일시에 허물어뜨리는 장치다. 심지어는 땅도 칠년 째는 휴경해야 하는데, 오늘의 생태학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놀라울 정도로 건강한 세계이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안식년이 일곱번 지난 다음 해, 즉 오십 년 째의 해를 희년*이라 한다. 이때는 안식년에 있어야 할 사건들이 더 강화된다. 모든 것이 제 자리로 돌아가는 해다.
*희년개념은 우리나라 기독교에서도 상당히 강조된 적이 있다. 남북분단 50년째인 1995년을 희년으로 설정해서 통일원년을 만들자는 운동이 오랫동안 전개되었다. 사실 하나의 민족이 50년 이상을 분단된 채로 살아간다는 건 그 어떤 정치적, 사상적 논리로도 합리화될 수 없다. 그런데 남북분단이라는 악을 깨부수자는 희년운동이 별로 큰 성과 없이 지나고 말았다. 다른 한편으로 희년사상은 세계 기독교 신학자들로 하여금 제삼세계의 채무를 탕감시켜주자는 운동으로 전개된 적도 있었으며, 지금도 줄곧 주장된다. 성서의 말씀과 사상을 전통으로 삼고 있는 잘사는 나라, 즉 서구라파와 북아메리카의 미국과 캐나다 같은 나라들이 제삼세계에 빌려준 돈을 받지 말고 아예 탕감시켜 주자는 말이다. 이건 자본주의식으로 보면 미친 짓인지 모르지만, 성서적으로 보면 당연한 발상이다. 왜냐하면 희년이 되면 모든 것이 원상대로 복귀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안식일의 근본 의미는 ‘쉼’에 있다 하겠다. 이런 쉼이 강조되여야만 하는 이유는 우리가 경험하는 인간사에는 참된 쉼이 없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생산, 소비, 경쟁으로 인해서 쉼이 있을 수 없다. 심지어는 교회도 여전히 무한의 성장 이데올로기, 자기과시와 확대 및 발전 강박에 빠져 있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킨다고 하지만 사실은 쉼이 없다. 쉼은 곧 게으름이요 퇴보로 생각하고 말 뿐이다. 한국교회의 상황을 잠시만 눈여겨보라. 안식일이 안식일인가? 주일날 너무나 많은 예배, 기도회, 각종 회의, 식사준비 등으로 인해서 웬만한 신자들과 성직자들에게는 이중 삼중으로 노동이 강화된다. 어떤 이는 “안식일이 그냥 쉬는 날인줄 아시오. 그런 생각은 믿음이 없는 것이오. 안식일은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하루를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는 날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라고 강조한다. 이런 말은 함정이다. 원래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안식일에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 그럴 형편이 되지도 못했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은 거리가 너무 멀어서 갈 수 없었고, 그냥 집에서 쉬든지 제사(예배)가 아닌 말씀을 공부하는 회당에 나가는 것이 일반이었다. 물론 주일*에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주일(안식일)이 뜻하는 큰 의미를 접어둔 채 교회에 나가는 것만이 오직 신앙적인 것처럼 가르치는 것은 성서적이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자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을 지키고 있다. 초대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님의 부활이 안식일 다음날 이루어졌다고 믿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안식일인 토요일이 아니라 일요일을 지키게 되었다. 그런데 엄밀하게 말하면 예수님이 언제 부활했는지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복음서의 기록에 의하면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일단의 여성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가 빈무덤을 발견했다는 것만을 말할 뿐 부활시간을 말하지는 않는다. 유대인의 요일 개념에 따르면 하루는 저녁 때 시작해서 다음날 저녁에 끝나니까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이며 예수님이 안식일 다음날 부활하셨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토요일 밤인지 일요일 새벽인지 확실하지 않다는 말이다. 지금도 안식교회는 성경말씀대로 산다는 이유로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여기서 토요일이 맞는가, 일요일이 맞는가 하는 논란은 별 의미가 없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상당히 오랫동안 유대교에서처럼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기도 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일요일을 지키기도 했다. 여러 전승역사를 거친 다음 기독교가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서 로마화 되면서 로마의 절기에 따라 일요일을 ‘주일’로 정하게 되었다. 어쨌든지 안식일의 근본의미가 창조사건과 해방사건을 기억하는 것이라면 어떤 요일이건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다. 다만 예수 부활과의 연장선상에서 교회전통이 일요일을 새로운 안식일(주일)로 결정했다는 것은 잘한 선택으로 보이며, 현대 교회가 그 교회전통을 유지하는 것도 좋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 기독교인에게 더욱 중요한 점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안식일에 대한 근본 의미와 그것에 대한 태도를 분명하게 가르쳐주셨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었을 때 바리새인들은 왜 하필이면 안식일에 그런 치료행위를 하는가, 왜 안식일 법을 어기는가, 하고 따져 물었다. 예수의 답변은 아주 명쾌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중에서 어떤 일이 합당한지 되물었다. 이어서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다고(마가복음 2:27)까지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한다면 안식일은 어떤 종교적 의식을 화려하고 장엄하게 치루는 것이라기보다는 생명과 관계된 일, 앞에서 지적한대로 창조와 해방의 일이 하나님에 의해서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기억과 확인, 그리고 그것에 참여하겠다는 결단의 날이 되어야 한다.

성결법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십계명의 말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율법의 근본 개념은 성결에 있다. 율법의 모든 기준, 그리고 시행세칙들은 유대인들을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온갖 것들이 다 포함된다. 여러 종류의 피부병은 부정하게 취급되었으며, 사체도 그렇고, 여성들의 달거리는 물론 부정하며 따라서 그녀들이 앉았던 자리에는 아무도 앉지 말아야 한다. 특히 레위기서의 많은 부분은 유대인들이 어떻게 부정으로부터 정결해질 수 있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제사장들은 특별히 거룩한 직무를 가진 이들이기 때문에 복장부터 시작해서 특별한 정결의식을 거쳐야 하며, 나실인으로서 하나님에게 서원함으로써 태어난 사람들은 독한 술을 마시지 않는다거나 머리카락에 칼을 대지 않는 조치도 취했다. 모든 유대인 남자는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행해야 하며, 정결의식을 치루어야 한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철두철미하게 부정과 정결이라는 이분법적 각도로 일상생활을 규정하고 영위해나갔다. 여기서는 대표적으로 먹을거리 문제만 짚어보도록 하자.
레위기서 11장에는 유대인들이 먹어도 되는 먹을거리와 먹으면 안 될 그것이 상세하게 구별되어 있다. 네 발 가진 짐승의 예를 들어보면, 발굽이 갈라져 있으면서 동시에 되새김질을 하는 것들만 식용으로 가능했다. 두 조건 중에서 하나만 충족되면 안 된다. 돼지는 굽이 갈라졌지만 되새김질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정한 동물이며, 말도 되새김질을 하지만 굽이 통이기 때문에 부정해서 먹을 수 없다. 소와 양은 굽도 갈라지고 되새김질도 하기 때문에 정한 동물이다. 이런 동물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도 사용이 가능했고 먹어도 되었다. 물고기 중에서는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만 먹을 수 있으며, 새 중에는 독수리와 솔개 같은 포식자들이 가증하다고 되어 있으며, 곤충도 역시 금기항목인데 예외적으로 메뚜기 같이 뛰어다니는 것들만은 허락되었다. 뱀처럼 땅을 기어 다니는 모든 것들은 부정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하나님은 왜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먹을거리에 대한 기준을 까다롭게 요구한 것일까? 이러한 전통은 어떤 한 두 사람의 머릿속에서 짜인 각본이 아니다. 유대인들이 그 지역에서 살아가기 위한 생존방식이 그런 율법적인 전통으로 자리하게 되었다고 보아야한다. 생존투쟁의 긴 역사가 담겨있는 진술이라는 말이다. 생각해보라. 그 당시 근동 지방의 그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 생존해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투쟁이었겠는가를. 지금도 집단 식중독 같은 일들이 흔하게 일어나는데, 그때야 오죽했겠는가. 아무 동물이나 잡아먹다가는 전염병에 걸리거나 지나친 지방질 흡수로 인해서 생체의 저항력이 떨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조치로 유대인들은 먹을거리 문제에서 유별하게 굴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들의 태도를 영적인 차원에서 해석해야 한다. 먹는 문제는 단순히 배고픔을 해결한다거나 건강을 도모한다는 차원만이 아니라 그 행위 주체자의 정신을 드러낸다는 차원에서 접근되어야 한다. 그가 무얼 먹는가* 하는 것은 그가 누구인가를 드러낸다. 정력보강을 위해 뱀탕을 먹는 사람은 그게 그의 삶이고, 값나가는 반찬이 있어야만 밥맛을 아는 사람은 그게 그의 삶이다. 감각적 맛에만 길들여진 현대인에게 유대인의 이러한 깐깐함이 우스꽝스러워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정신을 이해한다면 그런 소리를 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예수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마태복음 15:11) 말씀했으며, 또한 베드로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서 본 환상 중에 부정한 짐승들이 들어있는 보자기를 보고 유대적 전통 때문에 본능적으로 꺼림칙하게 생각하자 먹어도 된다는 하늘로부터의 소리를 들은 일도 있다(사도행전 10장). 그러나 이 말씀들은 유대인들의 형식주의나 배타적 우월성을 경계하고자 함이고자, 가려서 먹는 절제와 영적인 삶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 날 우리 어른들이 자녀들의 식사예절을 엄격하게 가르친 이유는 단순히 가부장적 유교예절의 훈련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먹는 행위에 대한 존엄성을 각인시켜주기 위한 배려였다. 식사할 때 자세를 바르게 하고 밥알 하나도 남기지 않아야 했으며, 서양 사람들과는 달리 식사 중에 말도 많이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먹는 행위에 집중하도록 했다.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 가장 소중한 먹는 행위를 요즘의 페스트후드 처럼 그냥 스쳐지나가는 행위로 생각하지 않고 거룩하게 여긴 셈이다. 인간이 밥을 먹고 살다가 늙어 죽으면 땅에 묻혀 흙이 됨으로써 다시 밥의 밥이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먹는 행위는 존재론적 거룩성을 담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유대인의 모든 삶을 규정하고 있는 성결법과 성결의식은 결국 자신들이 타민족과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점들을 강화해 나간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에 그 맥이 닿아있다. 어떤 경우에는 매우 우월한 도덕성으로, 또 다른 경우에는 독선적 배타성으로 드러나는 이 성결의식은 유대인이라면 갓난 아이 때부터 뼛속에 사무치도록 훈련을 받아서 무의식적 기초가 되었다. 따라서 초기 기독교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었다고 하더라도 역시 이런 율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율법 안에서 예수를 믿고 살아가려다보니 이방인 기독교인들 문제가 불거졌고, 시간이 흐르면서 유대교로부터 배척을 당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체제와 제도를 가진 공동체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우리는 초기 기독교 안에 유대교적 흔적이 얼마나 배어있는지 정확하게 가려낼 수는 없다. 상당한 부분에서 그들의 종교적 전통을 이어받았으며, 동시에 상당한 부분에서 전혀 다른 종교 형태와 의미를 형성해 나갔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유대교적 배경 가운데서 기독교가 출발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설명했지만, 정작 중요한 핵심을 아직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예수에 대한 이야기다. 예수가 누구인가? 그가 누구이기에 유대교로부터 죽임을 당했지만 그 유대교를 극복하고 보다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 그가 직접 시작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게 되었는가? 역사로서의 예수는 누구이며,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가 어떻게 온전한 인간이고 온전한 신일 수 있는가? 기독교의 모든 것을 풀어낼 수 있는 단초는, 그리고 기독교에 대해서 무언가를 말할 수 있는 기초는 예수 이외에 없다. 여기서 너무나 익숙한 예수에 대한 일대기를 연대기적으로 서술한다거나 아니면 세례문답식의 교리를 제시할 필요는 전혀 없다. 예수는 누구였는가에 대해서 가능한대로 종교적 선입견 없이 이야기를 풀어가도록 하자. 사실 이 예수에 대한 이야기만으로도 이 책의 뒷부분은 군더더기가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