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서 제일되는 가치는 무었일까요?


먼저 이와같은 제목으로 글을 올려주신 ‘구름나그네’님께

감사를 전합니다. 정작 글을 올려주신 본인은 초보적인 물음이라고

겸양을 하셨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결코 초보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이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의문을 갖어야할

매우 중요하고도 시급한 문제라고 봅니다.


이질문에 대한 확실한 답을 얻지못한다면 우리는 헛된시간을

살아가다가 헛되게 죽어가기 때문입니다. 삶의 본질이면서 신앙의 본질이면서

믿음의 본질이며 그리스도인의 분명한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기때문입니다.

이글에 대하여 많은 분들께서 댓글로 참여하셨습니다 다들 의미있는 글이었습니다.


저는 이 질문을 대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마치 저에게 질문하는 것처럼 심각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이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나름 유머와 긍정적인 사고를 하고 사는 편입니다.

어찌보면 좀 경망스럽고 가볍고 유치하기까지할 정도로 삶을 즐기는 식입니다.

대책없는 저때문에 함께사는 여인이 매우 골치를 썩고 있으니까요

그런 저이지만 이질문에 쉽사리 답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당황스러웠습니다.


물론 제가 딱히 구름나그네님의 질문에 답을 주려고 애쓸필요는 없습니다.

그럴만한 실력도 자격도 일천한지라 그냥 지나가도 누가 뭐라하겠습니까?

어쩌면 이 질문은 다비아를 관리하시고 선장의 역할을 하시는 정목사님께서

또한 협력하시고 동역하시는 많은 영성의 선배님들의 몫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좀더 기다려 보았으나 더이상 언급이 없으셨습니다.

때로 침묵이 많은 말을 대신하기도 할 것이며

이 문제는 결국 스스로 신앙안에서 믿음안에서 성령께서 가르치실 것이기에

혼동을 주시지 않으려는 깊은 생각이리라 나름 생각했습니다.


빈깡통이 시끄럽다고

부족한 제가 한말씀 올립니다.

이글은 저 자신에게 제가 다시 질문을 던저보고 생각해서 올립니다.

구름나그네님이 저보다 훨씬 진지하게 삶을 성찰하시겠지만

원하시는 답은 이미 얻으셨으리라 생각하면서 혹여라도 도움이 되시기를

바라면서 함께 나누기를 희망합니다.

주재넘게 가르친다거나 그런것은 천부당 만부당 하오니

그저 해량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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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제일되는 가치는 무었일까요?”

이 질문을 저는 이렇게 바꿔서 해 보았습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이것은 어지간한 기독교인이라면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특히 장로교회에

적을 둔 신자라면 어느정도 귀에 익숙한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죠.

기독교 교리중에서 중요한 “소요리 문답 첫번째 질문” 입니다.

여기에 대한 답은 아시는데로 이렇습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지금 돌이켜 보니까 참 이보다 더 명확한 답이 또 있을까 감탄이 나옵니다.

저는 교리신봉자는 아닙니다만 기독교의 교리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것을 공부하는 시기는 어느정도 성경과 신앙의 여러경우를 경험한

이후에 하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 아직 교회와 기독교에 대하여 낮설고 이질감마저 느끼는

새신자들에게는 이해하기가 벅차기 때문이죠. 단순히 앵무새처럼 반복적으로

암송하는 수준으로는 그 깊은 맛을 경험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인류사를 통해 사람들은 이 질문을 꾸준히 해왔습니다. 나름대로 타당한 답을 제시하기도 하였으며 그렇게 살려고 부단한 노력을 경주 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속 시원하게 “이거다” 라고 아무도 답하지 못했습니다. 모든 종교와 철학사조들도 이질문을 하고 있고 앞으로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만족할 만한 답을 얻지는 못할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인식이란 재한적이고 한계성을 넘어갈 수 없기에 그렇습니다.

인간이 비록 만물의 영장이고 우주의 중심이라고는 하지만 역시 가장 나약한 존재이기도 하기에 그렇습니다. 많은 경험과 지식이 모든 피조물중에 으뜸입니다.

대단합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피조물들이 인간처럼 지혜가 있을까요?

그러나 또한 지구상에는 아주 미세한 존재도 있습니다. 그 미세한 존재.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런 존재도 역시 신비와 배일에 감춰져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그런 미생물체의 세계를 깊이 살펴볼 실력이 있었다면 너무 광오해서 뒤로 넘어질 것입니다.

이 말은 지금 자연과학이나 물리학 생물학계에서 놀랄만한 발견을 하고 있기에 그런 것입니다. 저는 그런 분야에는 완전 제로이기에 그저 보편적이고 단편적인 정보의 일부분만으로도 놀라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그리스도인들) 하나님의 은혜로 그보다 더 놀라운 세계를 경험하는 사람들입니다. 즉 하나님과 영적 소통을 할 수 있는 유일한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완전한 소통을 누렸던 아담이 하나님의 동산에서 내어 쫒기면서 단절의 형을 받았기에 지금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소통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회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안에서 우리에게 보증이 되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재를 누릴 수가 있게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믿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로서 만물을 새롭게 볼수 있는 영적 감각이 생성이 된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신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이라는 것입니다.


그 증상이 어떻게 나타날까요?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안에서 즐거워 하게 됩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바꾸신 것입니다. 이전에 죽었던 존재에서 잠자던 존재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자녀의 존재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듭남이라 중생이라 성령으로 남이라 합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경건한 유대인의 관원인  부자청년 한사람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수 있습니까? 라고 질문하였습니다. 니고데모 역시 같은 궁금증으로 한밤중에 찾아 왔습니다.

바울 역시 하나님을 열심으로 섬겼습니다.

예수믿는사람들을 말살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거룩한 사명으로 똘똘뭉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삶도 사실은 똑같습니다. 삶에서 제일 되는 가치를 추구하는 몸부림이었습니다.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인지 궁금한 삶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 현대인들역시 똑같습니다. 사회인이든 경제인이든 학자이든 종교인이든 철학자든간에 모두 이런 궁극적인 물음을 하는 삶이라 이말입니다. 끊임없이 달려갑니다. 자기확인을 위하여 힘을 냅니다.

그런 삶은 마치 시한폭탄과 같습니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입니다. 낭떠러지에 굴러가는 바위입니다. 쉼이 없습니다. 멈출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런 상태에 지금 있습니다.
우리의 주위를 둘러 보십시오. 모두다 미쳐서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는 형국아닙니까?

어떤이는 권력에 미치고

어떤이는 명예에 미치고

어떤이는 황금에 미치고

어떤이는 술에 미치고

어떤이는 도박에 미치고

어떤이는 쾌락에 미치고

어떤이는 종교에 미치고

어떤이는 자기에게 미치고

어떤이는 .......   ......

우리의 실질적인 위치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도 바울의 로마서를 살펴봅시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았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헛된 것을 생각했으며,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은 어둠으로 가득 찼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지혜롭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어리석습니다.

또 사람들은 불멸의 하나님의 영광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나 새나 짐승 또는 뱀과 같은 모양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죄악된 행동을 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가지각색의 더러운 죄를 지어

자기들끼리 부끄러운 짓을 행하여 몸을 더럽혔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었습니다.

창조주 되신 하나님보다 지음받은 피조물들을 더 예배하고 섬겼습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면 저렇게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삶도 저럴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적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어떤것입니까?

   “자기를 위하여”

사람의 제일 되는 가치관이 무엇이냐고요?

자기를 위하는 삶입니다. 자기중심이며 자기가 세상에서

왕입니다. 자기의 영광을 위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사실 이렇게 살아갑니다. 어두움에 잡혀서 볼것을 못보고

들을것을 못 듣고 알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 원인은 자기를 우상으로 생각하기에

그렇습니다. 여기에 과연 우리는 아닙니까?

예수믿는 우리는 아닙니까?

성도님 당신은 아닙니까?

집사님 당신은 아닙니까?

장로님 당신은 아닙니까?

목사님 당신은 아닙니까?

그러는 너는 아닌가?

성경이 우리에게 질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직 믿지 않는 세상의 사람들에게 던지는 게 아니라

오늘 믿노라고 주장하는 교회들(성도)에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저들은 자기를 위한 것을 삶의 제일되는 목적으로 산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놀라운 구속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너희는 무엇을 제일되는 목적으로 사느냐?

이런 질문에 우리는 대답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바로 이런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주변에 보면  
이런 사람을 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입니다. 입만 열면 ‘주여’ ‘아멘’ ‘할렐루야!’를 자동으로
뱉는 사람입니다. 조금만 힘들면 이런말 자주 합니다.

‘안믿는 저것들은 잘도 부자되고 성공하는데 난 왜 이렇게 궁상을 떨어야 하나“

아주 입버릇처럼 하고 다닙니다. 저는 그런 소릴 들을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정말 성질같아서는 한대 때려주고 싶습니다. 정말이지 내동생 같으면 아주 반쯤
밟아놀텐데...

성경은 세상을 향해 말하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고 가르치시고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이말씀은 저놈이 들어야 하는건데’

이렇게 핑계하지 맙시다. 그놈이 아니라 내가 들어야한다고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은 지금 저놈에게 말씀하시는게 아니라 나에게 하시는 구나“

사무엘처럼 “주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듣겠나이다” 이렇게 해야 합니다.

엘리처럼 가서 누웠다가 또 부르시거든 이렇게 해라 하고 친절하게 가르치기 전에

엘리가 먼저 들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럼 결론으로 갑시다.

“삶에서 제일되는 가치는 무었일까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너무 교과서적이라 실망하셨습니까? 너무 고루하다고요?
다 알고 있지만 현실이 따라주지 않는다고요?

이런문제 저런문제 혹은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 못하고 돈도 없고 배운것도 없고
인맥도 없고 자식놈 속썩이고 남편 술못끊고 아내가 믿지 않아서 병들어서...
신분이 별볼일 없어서 또 뭐가 있을까요?

“각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을 때의 상태 그대로 살아가십시오.

노예였을 때, 부름을 받았습니까? 그것 때문에 마음 상해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혹시 자유를 얻을 기회가 생기면 그 기회를 활용하십시오.

주님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노예인 사람은 주님께 속한 자유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자유인인 사람은 그리스도의 노예입니다.

여러분은 값을 치르고 산 사람들입니다. 더 이상 사람들의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위치에 그대로 머물러 계시면서

하나님께 책임을 다 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렇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는 아내가 있는 사람들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쁨에 넘친 사람은 기쁘지 않은 사람처럼, 물건을 사는 사람은

자기가 산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사십시오.

세상 물건을 쓰는 사람은 그것들에 마음이 빼앗기지 않은 사람처럼 사십시오.

그것은 이 세상의 현재 모습이 지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마음 쓰는 것 없이 살기를 바랍니다.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 하고

주님의 일에 마음을 씁니다. 그러나 결혼한 남자는 어떻게 하면 아내를 기쁘게

해 줄까 하며 세상 일에 마음을 쓰게 됩니다.

결혼한 남자의 마음은 이렇게 나뉘어집니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나 처녀는 자기의 몸이나 영혼을 주님께 거룩하게

드리기 위해 주님의 일에 마음을 쓰지만, 결혼한 여자는 어떻게 하면

남편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세상 일에 마음을 씁니다.

여러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지

여러분을 속박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이 나뉘지 않은 마음으로 자신을 주님께 드려

바르게 생활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렇게 권면하는 바울사도의 말을 깊이 생각합시다. 명령은 아닙니다. 권면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살아갈 때에 성경이 요구하는 삶에 근접할 수 있읍니다.

마무리 합니다.


“우리 중에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한 명도 없으며,

자기 자신만을 위해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산다면 그것은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고,

죽는다면 주님을 위해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만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주님이 되기 위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삶입니다.

‘제일 되는 목적’이라는 개념은 흔히 말 하는 ‘첫 번째로’ 혹은 ‘우선적으로’라는 뜻이 아니라, ‘유일한, 오직, 사람의 전 생애에 있어서’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목적이 있는데 그중에서 제일 중요하고 가장 첫 번째의 목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는 오직 유일한 한 가지 목적만 있을 뿐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인생이 살아가는 동안 한 가지 목적만 가지고 있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더구나 모든 사람이 똑같이 한 가지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다원주의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제일 되는 목적’이라는 개념이 ‘오직, 유일한, 사람의 전 생애에 있어서’라는 의미라고 규명할 수 있는 성경적인 근거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면서 사용한 말씀으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라고 권면했던 내용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우리의 많은 삶 속에서 어느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의 근본 토대임을 증명하는 구절입니다. 우리가 어떤 목적을 세운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유일한 목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사람이 사는 유일한 근본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며, 역사 이래로 많은 사람들이 꾸준히 물어왔던 인간의 존재의미에 대한 철학적 물음이며, 우리에게 왜 사는가를 묻고 있는 물음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 우주의 존재 이유를 묻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과 세상을 통치하신 목표가 무엇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부모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왜 사십니까?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할 수 없다면 사돈이 장(場)에 가니까 두엄지고 따라가는 인생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바람 부는 대로 떠다니는 부평초와 같은 허망한 인생일 뿐입니다. 어떻게 그런 삶 속에 참 기쁨과 승리(성공)가 있겠습니까? 참으로 안타까운 인생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답답하고 불쌍한 사람은 자기가 왜 사는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근본 문제입니다.


함께 나누기를 바라오며

두서없는 장황한 글이라 죄송함을 금할길 없으며 저 자신역시 이 질문을 깊이 묵상하면서

하루하루를 주안에서 살기를 소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