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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509
삶에서 제일되는 가치는 무었일까요?
먼저 이와같은 제목으로 글을 올려주신 ‘구름나그네’님께
감사를 전합니다. 정작 글을 올려주신 본인은 초보적인 물음이라고
겸양을 하셨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결코 초보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이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의문을 갖어야할
매우 중요하고도 시급한 문제라고 봅니다.
이질문에 대한 확실한 답을 얻지못한다면 우리는 헛된시간을
살아가다가 헛되게 죽어가기 때문입니다. 삶의 본질이면서 신앙의 본질이면서
믿음의 본질이며 그리스도인의 분명한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기때문입니다.
이글에 대하여 많은 분들께서 댓글로 참여하셨습니다 다들 의미있는 글이었습니다.
저는 이 질문을 대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마치 저에게 질문하는 것처럼 심각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이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나름 유머와 긍정적인 사고를 하고 사는 편입니다.
어찌보면 좀 경망스럽고 가볍고 유치하기까지할 정도로 삶을 즐기는 식입니다.
대책없는 저때문에 함께사는 여인이 매우 골치를 썩고 있으니까요
그런 저이지만 이질문에 쉽사리 답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당황스러웠습니다.
물론 제가 딱히 구름나그네님의 질문에 답을 주려고 애쓸필요는 없습니다.
그럴만한 실력도 자격도 일천한지라 그냥 지나가도 누가 뭐라하겠습니까?
어쩌면 이 질문은 다비아를 관리하시고 선장의 역할을 하시는 정목사님께서
또한 협력하시고 동역하시는 많은 영성의 선배님들의 몫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좀더 기다려 보았으나 더이상 언급이 없으셨습니다.
때로 침묵이 많은 말을 대신하기도 할 것이며
이 문제는 결국 스스로 신앙안에서 믿음안에서 성령께서 가르치실 것이기에
혼동을 주시지 않으려는 깊은 생각이리라 나름 생각했습니다.
빈깡통이 시끄럽다고
부족한 제가 한말씀 올립니다.
이글은 저 자신에게 제가 다시 질문을 던저보고 생각해서 올립니다.
구름나그네님이 저보다 훨씬 진지하게 삶을 성찰하시겠지만
원하시는 답은 이미 얻으셨으리라 생각하면서 혹여라도 도움이 되시기를
바라면서 함께 나누기를 희망합니다.
주재넘게 가르친다거나 그런것은 천부당 만부당 하오니
그저 해량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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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제일되는 가치는 무었일까요?”
이 질문을 저는 이렇게 바꿔서 해 보았습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이것은 어지간한 기독교인이라면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특히 장로교회에
적을 둔 신자라면 어느정도 귀에 익숙한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죠.
기독교 교리중에서 중요한 “소요리 문답 첫번째 질문” 입니다.
여기에 대한 답은 아시는데로 이렇습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지금 돌이켜 보니까 참 이보다 더 명확한 답이 또 있을까 감탄이 나옵니다.
저는 교리신봉자는 아닙니다만 기독교의 교리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것을 공부하는 시기는 어느정도 성경과 신앙의 여러경우를 경험한
이후에 하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 아직 교회와 기독교에 대하여 낮설고 이질감마저 느끼는
새신자들에게는 이해하기가 벅차기 때문이죠. 단순히 앵무새처럼 반복적으로
암송하는 수준으로는 그 깊은 맛을 경험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인류사를 통해 사람들은 이 질문을 꾸준히 해왔습니다. 나름대로 타당한 답을 제시하기도 하였으며 그렇게 살려고 부단한 노력을 경주 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속 시원하게 “이거다” 라고 아무도 답하지 못했습니다. 모든 종교와 철학사조들도 이질문을 하고 있고 앞으로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만족할 만한 답을 얻지는 못할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인식이란 재한적이고 한계성을 넘어갈 수 없기에 그렇습니다.
인간이 비록 만물의 영장이고 우주의 중심이라고는 하지만 역시 가장 나약한 존재이기도 하기에 그렇습니다. 많은 경험과 지식이 모든 피조물중에 으뜸입니다.
대단합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피조물들이 인간처럼 지혜가 있을까요?
그러나 또한 지구상에는 아주 미세한 존재도 있습니다. 그 미세한 존재.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런 존재도 역시 신비와 배일에 감춰져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그런 미생물체의 세계를 깊이 살펴볼 실력이 있었다면 너무 광오해서 뒤로 넘어질 것입니다.
이 말은 지금 자연과학이나 물리학 생물학계에서 놀랄만한 발견을 하고 있기에 그런 것입니다. 저는 그런 분야에는 완전 제로이기에 그저 보편적이고 단편적인 정보의 일부분만으로도 놀라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그리스도인들) 하나님의 은혜로 그보다 더 놀라운 세계를 경험하는 사람들입니다. 즉 하나님과 영적 소통을 할 수 있는 유일한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완전한 소통을 누렸던 아담이 하나님의 동산에서 내어 쫒기면서 단절의 형을 받았기에 지금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소통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회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안에서 우리에게 보증이 되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재를 누릴 수가 있게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믿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로서 만물을 새롭게 볼수 있는 영적 감각이 생성이 된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신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이라는 것입니다.
그 증상이 어떻게 나타날까요?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안에서 즐거워 하게 됩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바꾸신 것입니다. 이전에 죽었던 존재에서 잠자던 존재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자녀의 존재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듭남이라 중생이라 성령으로 남이라 합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경건한 유대인의 관원인 부자청년 한사람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수 있습니까? 라고 질문하였습니다. 니고데모 역시 같은 궁금증으로 한밤중에 찾아 왔습니다.
바울 역시 하나님을 열심으로 섬겼습니다.
예수믿는사람들을 말살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거룩한 사명으로 똘똘뭉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삶도 사실은 똑같습니다. 삶에서 제일 되는 가치를 추구하는 몸부림이었습니다.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인지 궁금한 삶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 현대인들역시 똑같습니다. 사회인이든 경제인이든 학자이든 종교인이든 철학자든간에 모두 이런 궁극적인 물음을 하는 삶이라 이말입니다. 끊임없이 달려갑니다. 자기확인을 위하여 힘을 냅니다.
그런 삶은 마치 시한폭탄과 같습니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입니다. 낭떠러지에 굴러가는 바위입니다. 쉼이 없습니다. 멈출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런 상태에 지금 있습니다.
우리의 주위를 둘러 보십시오. 모두다 미쳐서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는 형국아닙니까?
어떤이는 권력에 미치고
어떤이는 명예에 미치고
어떤이는 황금에 미치고
어떤이는 술에 미치고
어떤이는 도박에 미치고
어떤이는 쾌락에 미치고
어떤이는 종교에 미치고
어떤이는 자기에게 미치고
어떤이는 ....... ......
우리의 실질적인 위치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도 바울의 로마서를 살펴봅시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았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헛된 것을 생각했으며,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은 어둠으로 가득 찼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지혜롭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어리석습니다.
또 사람들은 불멸의 하나님의 영광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나 새나 짐승 또는 뱀과 같은 모양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죄악된 행동을 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가지각색의 더러운 죄를 지어
자기들끼리 부끄러운 짓을 행하여 몸을 더럽혔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었습니다.
창조주 되신 하나님보다 지음받은 피조물들을 더 예배하고 섬겼습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면 저렇게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삶도 저럴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적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어떤것입니까?
“자기를 위하여”
사람의 제일 되는 가치관이 무엇이냐고요?
자기를 위하는 삶입니다. 자기중심이며 자기가 세상에서
왕입니다. 자기의 영광을 위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사실 이렇게 살아갑니다. 어두움에 잡혀서 볼것을 못보고
들을것을 못 듣고 알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 원인은 자기를 우상으로 생각하기에
그렇습니다. 여기에 과연 우리는 아닙니까?
예수믿는 우리는 아닙니까?
성도님 당신은 아닙니까?
집사님 당신은 아닙니까?
장로님 당신은 아닙니까?
목사님 당신은 아닙니까?
그러는 너는 아닌가?
성경이 우리에게 질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직 믿지 않는 세상의 사람들에게 던지는 게 아니라
오늘 믿노라고 주장하는 교회들(성도)에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저들은 자기를 위한 것을 삶의 제일되는 목적으로 산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놀라운 구속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너희는 무엇을 제일되는 목적으로 사느냐?
이런 질문에 우리는 대답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바로 이런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주변에 보면
이런 사람을 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입니다. 입만 열면 ‘주여’ ‘아멘’ ‘할렐루야!’를 자동으로
뱉는 사람입니다. 조금만 힘들면 이런말 자주 합니다.
‘안믿는 저것들은 잘도 부자되고 성공하는데 난 왜 이렇게 궁상을 떨어야 하나“
아주 입버릇처럼 하고 다닙니다. 저는 그런 소릴 들을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정말 성질같아서는 한대 때려주고 싶습니다. 정말이지 내동생 같으면 아주 반쯤
밟아놀텐데...
성경은 세상을 향해 말하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고 가르치시고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이말씀은 저놈이 들어야 하는건데’
이렇게 핑계하지 맙시다. 그놈이 아니라 내가 들어야한다고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은 지금 저놈에게 말씀하시는게 아니라 나에게 하시는 구나“
사무엘처럼 “주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듣겠나이다” 이렇게 해야 합니다.
엘리처럼 가서 누웠다가 또 부르시거든 이렇게 해라 하고 친절하게 가르치기 전에
엘리가 먼저 들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럼 결론으로 갑시다.
“삶에서 제일되는 가치는 무었일까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너무 교과서적이라 실망하셨습니까? 너무 고루하다고요?
다 알고 있지만 현실이 따라주지 않는다고요?
이런문제 저런문제 혹은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 못하고 돈도 없고 배운것도 없고
인맥도 없고 자식놈 속썩이고 남편 술못끊고 아내가 믿지 않아서 병들어서...
신분이 별볼일 없어서 또 뭐가 있을까요?
“각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을 때의 상태 그대로 살아가십시오.
노예였을 때, 부름을 받았습니까? 그것 때문에 마음 상해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혹시 자유를 얻을 기회가 생기면 그 기회를 활용하십시오.
주님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노예인 사람은 주님께 속한 자유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자유인인 사람은 그리스도의 노예입니다.
여러분은 값을 치르고 산 사람들입니다. 더 이상 사람들의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위치에 그대로 머물러 계시면서
하나님께 책임을 다 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렇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는 아내가 있는 사람들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쁨에 넘친 사람은 기쁘지 않은 사람처럼, 물건을 사는 사람은
자기가 산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사십시오.
세상 물건을 쓰는 사람은 그것들에 마음이 빼앗기지 않은 사람처럼 사십시오.
그것은 이 세상의 현재 모습이 지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마음 쓰는 것 없이 살기를 바랍니다.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 하고
주님의 일에 마음을 씁니다. 그러나 결혼한 남자는 어떻게 하면 아내를 기쁘게
해 줄까 하며 세상 일에 마음을 쓰게 됩니다.
결혼한 남자의 마음은 이렇게 나뉘어집니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나 처녀는 자기의 몸이나 영혼을 주님께 거룩하게
드리기 위해 주님의 일에 마음을 쓰지만, 결혼한 여자는 어떻게 하면
남편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세상 일에 마음을 씁니다.
여러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지
여러분을 속박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이 나뉘지 않은 마음으로 자신을 주님께 드려
바르게 생활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렇게 권면하는 바울사도의 말을 깊이 생각합시다. 명령은 아닙니다. 권면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살아갈 때에 성경이 요구하는 삶에 근접할 수 있읍니다.
마무리 합니다.
“우리 중에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한 명도 없으며,
자기 자신만을 위해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산다면 그것은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고,
죽는다면 주님을 위해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만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주님이 되기 위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삶입니다.
‘제일 되는 목적’이라는 개념은 흔히 말 하는 ‘첫 번째로’ 혹은 ‘우선적으로’라는 뜻이 아니라, ‘유일한, 오직, 사람의 전 생애에 있어서’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목적이 있는데 그중에서 제일 중요하고 가장 첫 번째의 목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는 오직 유일한 한 가지 목적만 있을 뿐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인생이 살아가는 동안 한 가지 목적만 가지고 있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더구나 모든 사람이 똑같이 한 가지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다원주의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제일 되는 목적’이라는 개념이 ‘오직, 유일한, 사람의 전 생애에 있어서’라는 의미라고 규명할 수 있는 성경적인 근거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면서 사용한 말씀으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라고 권면했던 내용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우리의 많은 삶 속에서 어느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의 근본 토대임을 증명하는 구절입니다. 우리가 어떤 목적을 세운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유일한 목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사람이 사는 유일한 근본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며, 역사 이래로 많은 사람들이 꾸준히 물어왔던 인간의 존재의미에 대한 철학적 물음이며, 우리에게 왜 사는가를 묻고 있는 물음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 우주의 존재 이유를 묻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과 세상을 통치하신 목표가 무엇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부모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왜 사십니까?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할 수 없다면 사돈이 장(場)에 가니까 두엄지고 따라가는 인생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바람 부는 대로 떠다니는 부평초와 같은 허망한 인생일 뿐입니다. 어떻게 그런 삶 속에 참 기쁨과 승리(성공)가 있겠습니까? 참으로 안타까운 인생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답답하고 불쌍한 사람은 자기가 왜 사는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근본 문제입니다.
함께 나누기를 바라오며
두서없는 장황한 글이라 죄송함을 금할길 없으며 저 자신역시 이 질문을 깊이 묵상하면서
하루하루를 주안에서 살기를 소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2007.08.23 11:54:09
작은자님의 긴글 잘 읽었습니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해 볼 것이있는데 그 첫번째는 야생초 편지님의 질문이요
두번째는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 아닐까요?? 하는 문제 입니다..
님의 글에서 제가 발견할 수 있는 답은 범사에 감사하게 되고 하나님과의
소통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정도일것 같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해야 하는가? 왜 범사에 감사해야 하는가? 에 대한
좀더 깊은 질문으로 들여다 보면 그 답이 없다고 생각 합니다.
님의 글에서
어떤이는 권력에 미치고
어떤이는 명예에 미치고
어떤이는 황금에 미치고
어떤이는 술에 미치고
어떤이는 도박에 미치고
어떤이는 쾌락에 미치고
어떤이는 종교에 미치고
어떤이는 자기에게 미치고
라고 말씀 하시면서 그러한 사람들의 삶을 시한폭탄과 같은 삶이라고
말씀 하십니다만..
과연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그럴까요^^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 삶에서 삶의 가치와 행복을 누리기
때문에 그런 길을 가는 것일 뿐이지요..
제게 삶의 제일 되는 가치가 무었인지 물어보시다면..
"삶은 가치가 없다"입니다..
자기 좋은대로 살면되고 되도록 남에게 피해만 안주면 되지요.
술을먹든 종교에 미치든 내키는 대로 최대한 자기의 즐거움을
따라 살면 그만 일 것입니다..
여러분! 자시오실 주님이 가져다 주실 세계(정용섭 목사님은 이번 설교에서
멋지게 혁명 이란 단어를 사용하셨던데 잘 어울리는 표현이라 생각 합니다)에
대한 기다림과 소망이 없으십니까? 그러면 인생을 최대한 매순간 즐기시길
권면 드립니다..
여러분게는 인생이 한번 뿐이아니겠습니까? 좀더 많이 벌어 물질적
풍요도 누리시길 바랍니다. 죽고나면 남는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실..
아무 가치없는 삶에서 제일되는 가치를 찾는것은 무의미 하다 생각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의 고린도서 7장에서 권면하는 삶은 인생의 최고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삶의 지표를 주는 것이 아니라
임박한 재림을 바라보는 마라나타의 신앙을 가진 자들에게 요구하는 삶이라
생각 합니다.
이즈음에서 야생초 편지님의 질문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야생초님은 지금 보이는 삶보다 다시오실 주님께서 이루실 세상에대한 간절한
기다림으로 그분의 다시오심을 바라고 계시며 그날에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고자
하시는 소망이 있으시다면.. 제 답변이 의미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것"이 무었인가?"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 입니다.
주님께서는 신약의 교회 시대를 여시고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첫째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많은 신자들은 이 사랑을 아주 가볍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사랑의 단서에는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 하라 되어 있습니다.
이는 한마디로 해도해도 끝이 없는 도달할 수 없을만한 사랑의 실천의
요구 일것 입니다..
최선을 다해 버리고 나누는 사랑을 실천 하는 삶을 사십시요
그러고도 모자란 부분이 있으면 주님의 보혈의 공로와 은총이 우리를
부족함을 채워줄 것 입니다..
좀더 자세히 알길 원하시면 사랑의 사도인 요한 1,2,3서의 요한의 글들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의 글들은 대단히 무섭고 두렵기 때문에 잘 안읽는 편입니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해 볼 것이있는데 그 첫번째는 야생초 편지님의 질문이요
두번째는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 아닐까요?? 하는 문제 입니다..
님의 글에서 제가 발견할 수 있는 답은 범사에 감사하게 되고 하나님과의
소통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정도일것 같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해야 하는가? 왜 범사에 감사해야 하는가? 에 대한
좀더 깊은 질문으로 들여다 보면 그 답이 없다고 생각 합니다.
님의 글에서
어떤이는 권력에 미치고
어떤이는 명예에 미치고
어떤이는 황금에 미치고
어떤이는 술에 미치고
어떤이는 도박에 미치고
어떤이는 쾌락에 미치고
어떤이는 종교에 미치고
어떤이는 자기에게 미치고
라고 말씀 하시면서 그러한 사람들의 삶을 시한폭탄과 같은 삶이라고
말씀 하십니다만..
과연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그럴까요^^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 삶에서 삶의 가치와 행복을 누리기
때문에 그런 길을 가는 것일 뿐이지요..
제게 삶의 제일 되는 가치가 무었인지 물어보시다면..
"삶은 가치가 없다"입니다..
자기 좋은대로 살면되고 되도록 남에게 피해만 안주면 되지요.
술을먹든 종교에 미치든 내키는 대로 최대한 자기의 즐거움을
따라 살면 그만 일 것입니다..
여러분! 자시오실 주님이 가져다 주실 세계(정용섭 목사님은 이번 설교에서
멋지게 혁명 이란 단어를 사용하셨던데 잘 어울리는 표현이라 생각 합니다)에
대한 기다림과 소망이 없으십니까? 그러면 인생을 최대한 매순간 즐기시길
권면 드립니다..
여러분게는 인생이 한번 뿐이아니겠습니까? 좀더 많이 벌어 물질적
풍요도 누리시길 바랍니다. 죽고나면 남는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실..
아무 가치없는 삶에서 제일되는 가치를 찾는것은 무의미 하다 생각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의 고린도서 7장에서 권면하는 삶은 인생의 최고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삶의 지표를 주는 것이 아니라
임박한 재림을 바라보는 마라나타의 신앙을 가진 자들에게 요구하는 삶이라
생각 합니다.
이즈음에서 야생초 편지님의 질문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야생초님은 지금 보이는 삶보다 다시오실 주님께서 이루실 세상에대한 간절한
기다림으로 그분의 다시오심을 바라고 계시며 그날에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고자
하시는 소망이 있으시다면.. 제 답변이 의미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것"이 무었인가?"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 입니다.
주님께서는 신약의 교회 시대를 여시고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첫째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많은 신자들은 이 사랑을 아주 가볍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사랑의 단서에는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 하라 되어 있습니다.
이는 한마디로 해도해도 끝이 없는 도달할 수 없을만한 사랑의 실천의
요구 일것 입니다..
최선을 다해 버리고 나누는 사랑을 실천 하는 삶을 사십시요
그러고도 모자란 부분이 있으면 주님의 보혈의 공로와 은총이 우리를
부족함을 채워줄 것 입니다..
좀더 자세히 알길 원하시면 사랑의 사도인 요한 1,2,3서의 요한의 글들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의 글들은 대단히 무섭고 두렵기 때문에 잘 안읽는 편입니다)
2007.08.24 01:26:48
야생초편지 형님 감사합니다.
외람되오나 회원정보를 보고서 제 큰형닙보다 3년 윗분이라서
초면이지만 형님이라 불렀습니다.
제가 한참 예수님을 알고 뜨거울때 제 형님께 입에 거품을 물어가면서
전도한것이 생각납니다.
그 후로도 기회 있을때마다 저의 대화는 늘 예수님을 설명하려고
애를썼지요. 우리 형님은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가장으로서
고생무지 하시고 자수성가를 하신분입니다.
그시절에 가난하지 않은사람 거의 없을때이지만
제 형님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다고 자부합니다.
국민학교도 가정형편으로 졸업을 못하셨지만
언제나 유머와 상대를 배려하는 말씨와
분위기 메이커로서 손색이 없으십니다.
생각이 제대로 갖추셨다고 생각하고
제가 존경하는 분입니다.
그런형님앞에서 제가 겂도없이 예수를 말했습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둘째형님과는 논쟁도 불사했습니다.
큰형님은 부드러움과 여러가지 인생경험을 통하셔서
대놓고 제 말에 반문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막내동생이니 귀여웠겠지요
인정하는듯 하시면서 결과는 아직까지 아닙니다.
아직까지 저와 제 아내만이 예수를 믿고있습니다.
지금은 사정상 형들과 거의 교류가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기도하고 주님의 은혜를 바랄뿐입니다.
처음 저의 열정은 많은 시행착오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믿음과 신앙과 전도가 열정만으로 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제 경우를 보니까
아니라는걸 알았습니다.
뭐든지 때가 있다는것입니다.
그리고 저를 보니
가족들가운데 사는 형편이 젤 모자랍니다.
형들과 만나면 손벌리기 바쁩니다.
덕이 안되더군요
초기에는, 그때 늦게 신학교를 야간에 다니던 터라서
늘 돈이 궁했던 것이고
형들에게 손을 벌렸지요. 해서 하나님께 짜증도 많이
부렸습니다. “이게 뭡니까요 제가 뻔히 예수믿고 신학까지하는줄
형들도 다 압니다. 왜 멘날 돈이나 빌리려고 아쉬운소릴
하게 하십니까? 이렇게 해서 전도가 되겠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한심합니다.
물론 지금도 별볼일 없지만요.
그냥 형님이 생각나서 넋두리 합니다.
제가 야생초님의 질문에 답해드릴 실력은 없습니다.
코람데오님께서 친절하게 잘 말씀해 주셨습니다.
댓글이 너무 길어서요
조금있다가 그냥 제가 그동안 생각하던바를
정리해서 나누고 싶습니다.
다른분들께서도 좋은 생각이 있으실텐데
겸손하셔서 참여를 안하시나 봅니다
외람되오나 회원정보를 보고서 제 큰형닙보다 3년 윗분이라서
초면이지만 형님이라 불렀습니다.
제가 한참 예수님을 알고 뜨거울때 제 형님께 입에 거품을 물어가면서
전도한것이 생각납니다.
그 후로도 기회 있을때마다 저의 대화는 늘 예수님을 설명하려고
애를썼지요. 우리 형님은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가장으로서
고생무지 하시고 자수성가를 하신분입니다.
그시절에 가난하지 않은사람 거의 없을때이지만
제 형님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다고 자부합니다.
국민학교도 가정형편으로 졸업을 못하셨지만
언제나 유머와 상대를 배려하는 말씨와
분위기 메이커로서 손색이 없으십니다.
생각이 제대로 갖추셨다고 생각하고
제가 존경하는 분입니다.
그런형님앞에서 제가 겂도없이 예수를 말했습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둘째형님과는 논쟁도 불사했습니다.
큰형님은 부드러움과 여러가지 인생경험을 통하셔서
대놓고 제 말에 반문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막내동생이니 귀여웠겠지요
인정하는듯 하시면서 결과는 아직까지 아닙니다.
아직까지 저와 제 아내만이 예수를 믿고있습니다.
지금은 사정상 형들과 거의 교류가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기도하고 주님의 은혜를 바랄뿐입니다.
처음 저의 열정은 많은 시행착오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믿음과 신앙과 전도가 열정만으로 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제 경우를 보니까
아니라는걸 알았습니다.
뭐든지 때가 있다는것입니다.
그리고 저를 보니
가족들가운데 사는 형편이 젤 모자랍니다.
형들과 만나면 손벌리기 바쁩니다.
덕이 안되더군요
초기에는, 그때 늦게 신학교를 야간에 다니던 터라서
늘 돈이 궁했던 것이고
형들에게 손을 벌렸지요. 해서 하나님께 짜증도 많이
부렸습니다. “이게 뭡니까요 제가 뻔히 예수믿고 신학까지하는줄
형들도 다 압니다. 왜 멘날 돈이나 빌리려고 아쉬운소릴
하게 하십니까? 이렇게 해서 전도가 되겠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한심합니다.
물론 지금도 별볼일 없지만요.
그냥 형님이 생각나서 넋두리 합니다.
제가 야생초님의 질문에 답해드릴 실력은 없습니다.
코람데오님께서 친절하게 잘 말씀해 주셨습니다.
댓글이 너무 길어서요
조금있다가 그냥 제가 그동안 생각하던바를
정리해서 나누고 싶습니다.
다른분들께서도 좋은 생각이 있으실텐데
겸손하셔서 참여를 안하시나 봅니다
2007.08.24 02:06:45
코람데오님
감사합니다. 별 내용도 없는 긴 글을 읽으시느라 고생하셨죠 ^^
달아주신 댓글 역시 잘 읽었습니다. 코람데오님의 글에서 공감하는
부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의 고린도서 7장에서 권면하는 삶은 인생의 최고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삶의 지표를 주는 것이 아니라 임박한 재림을 바라보는
마라나타의 신앙을 가진 자들에게 요구하는 삶이라 생각 합니다. “
옳습니다.
마치 제 속을 훤히 뚫어보시는 군요 ^^
저의 기본적인 삶의 바탕은 코람데오님께서 지적하신것처럼
마라나타의 신앙입니다.
이것은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당연하게 마음중심에
올려놓고 살아야 하는것이라 생각하는데 아닌가요?
뭐 그렇다고 제가 엄청남 믿음을 소유했다거나
대단한 영성을 경험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면,
다시오실 주님을 믿는신앙인이라면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난 아직 모르겠다
교회에서
성경에서 말하는 사도들의
재림예수에 대하여 믿지 못하겠다
그렇다고 설마 지금 오시겠는가?
나 죽고나면 오실꺼야
이렇게 생각하신다면
어쩔수 없지요
그냥 인생을 즐기시면 되죠.
오늘 하루가 얼마나 중요한데요
신나게 잼나게 나를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주변 이웃들과 다투지 않고
좋게좋게 살아야지요
칭찬도 들어가면서
돈도 많이 벌어서
선교지원도 하고 구제도 하고
사회에 기부도 하고 얼마나 멋집니까?
예수와 상관없어도 얼마든지
그렇게 세상에서 멋지게 폼나게
대접받고 심플하게 살 수 있지요
세상이 우리에게 유혹하는 것이란
언제나 “보암직하고 지혜롭기도 하고
먹음직“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 살아가면서
이러한 세상풍조에 눈감고 살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러기에 바울의 말은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영적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나는 내게 주신 은혜를 힘입어 여러분 각 사람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분수에 맞게 생각하십시오.“
그러므로 자다가 깰때가 되었나니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고 술취하지 말고 세월을 아끼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 머리를 흔들겠죠^^
“그럼 뭔 재미로 사느냐?”
예수안에 사는것이
재미없고 속박으로 보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답답하게 사는가?
그렇게 보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구속당하고
속박을 당하는것이 억울하지않고
감사함으로 사는 부류가 있습니다.
우주를 품으시는 하나님의 구속이 세상보다 좁다고
생각하신다면 그렇게 보입니다.
관심갖고 읽어주신 코람데오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사업 날로날로 번창하시길 빕니다. ^^(진짜로요).
2007.08.24 02:34:14
작은자님!
초면에 형님이라 불러줘서 고맙습니다.
저도 동생없이 6남매중 막내인데, 작은자님은 형님이 많아서 좋으시겠어요.
저도 물론 어려운 가운데 학교를 다녔고
저의 누님들은 저와 한분 형님때문에 대학진학을 포기해야했고
지금도 그 사실이 제 마음을 아프게합니다.
작은자님은 여러가지 어려운 가운데 지내시는군요.
저도 늘 신앙의 문제와 깊이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고
우연히 정목사님 만나고 또 많은 신앙의 진보를 이루신 분들을
이곳에서 만나서 저의 신앙에많은 변화가 찾아왔고,나름대로 신앙의 틀을 세워가고 있지요.
그래도 이 나이에 신앙의 근본과 원리를 알아가고 과거 부실했던 신앙을 고민하며
새롭게 세워가고 있으며,그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시는 기쁨속에 살고 있지요.
그저 평범한 신자로서 살고 있지만
신앙의 삶에서 쉽게 쓰여지는 말들의 의미를 찾고 깨닫기위해 던진 질문이니까
좋은 말씀과 지도를 부탁합니다.
저 자신도 고민 해 보겠습니다.
초면에 형님이라 불러줘서 고맙습니다.
저도 동생없이 6남매중 막내인데, 작은자님은 형님이 많아서 좋으시겠어요.
저도 물론 어려운 가운데 학교를 다녔고
저의 누님들은 저와 한분 형님때문에 대학진학을 포기해야했고
지금도 그 사실이 제 마음을 아프게합니다.
작은자님은 여러가지 어려운 가운데 지내시는군요.
저도 늘 신앙의 문제와 깊이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고
우연히 정목사님 만나고 또 많은 신앙의 진보를 이루신 분들을
이곳에서 만나서 저의 신앙에많은 변화가 찾아왔고,나름대로 신앙의 틀을 세워가고 있지요.
그래도 이 나이에 신앙의 근본과 원리를 알아가고 과거 부실했던 신앙을 고민하며
새롭게 세워가고 있으며,그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시는 기쁨속에 살고 있지요.
그저 평범한 신자로서 살고 있지만
신앙의 삶에서 쉽게 쓰여지는 말들의 의미를 찾고 깨닫기위해 던진 질문이니까
좋은 말씀과 지도를 부탁합니다.
저 자신도 고민 해 보겠습니다.
2007.08.24 07:27:29
글을 작성하다 보니까
자꾸 말이 길어집니다. 서글퍼집니다요^^
간단 명료하게 짜임새있게 작성을 못하는 자신이
미워요 ㅠ_ㅠ
야생초형님 주재넘게 제 생각을 올립니다
너무 횡설수설해서 죄송하구요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혹여라도 쬐끔이라도
보탬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덕분에 저도 공부가 되었구요
제가 미처 모르는 부분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쪽지도 좋고 댓글로도 괜찮습니다
글쓰기가 보통 노동이 아니네요
이 허접한걸 작성하는데도 무려4시간 반이나
걸렸네요...흑흑...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게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작은자는 이시간에 동일한 은혜로 예수안에서
하나된 형제 자매와 및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게 돼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과 또한 각처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해 여러분에 대해 항상 내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이는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일, 곧 말과 모든 지식에 있어서
풍성하게 됐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대부분 교회안에서나 믿음의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사용하는 말중에
혹은 기도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라는소리를 곧잘 합니다.
매우 좋은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일상을 한번 따라가보면
과연 그런말을 할 만큼 자신이 있는가? 라는 반문에 부닥치게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저도 마찬가지로 누가 물어본다면 솔직히 자신 없습니다.
말로는 주님을 위하여라고 들이대기 쉽지만
정말 진지하게 자신을 살펴본다면 얼굴이 부끄러울 것입니다.
세상에 그 누가 과연 하나님을 위하여 살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결론적으로 말해서 불가능한 일입니다.
구원이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이며
택하심이며 은혜인것을 생각할 때
정말 하나님의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으로 얻어진 구원받은
우리가 무엇을 한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수가 있을까요?
우리의 모든 삶을 온전하게 하나님께 드릴 수도 없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무슨 영광이 될수가 있을까요?
원칙적으로 어림없는 소리라는 말입니다.
찬송가에 보면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만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찬송하겠네“
이렇게 한다고해서 주께서 베푸신 사랑을 은총을 얼마나
갚을 수가 있을까요? 더 나아가서 바울사도의 이런말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내가 만일 사람의 언어와 천사들의 말을 한다 할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소리 나는 꽹과리와 같을 뿐입니다.
내가 만일 예언하는 은사를 가지고 있고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만일 내가 가진 모든 것으로 남을 돕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하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으며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으며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딥니다.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언도 사라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 믿는자들이 나름대로 자신있다고 하는 믿음에 대한 내용들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시면 바울이 무슨말을 하는걸까요?
성경에 나타나는 바울사도는 예수를 만난후에
이렇게 바뀐사람입니다.
사람의 언어와 천사들의 말을 하고, 예언하는 은사를 가지고 있고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가진 모든 것으로 남을 돕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주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고백하기를 “내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라는 것입니다.
이시대에도 바울같은 사람이 있습니까?
제가 잘은 모르지만 분명 있을겄입니다. 우리가 몰라서 모르는게지요.
그랬다 하더라도 바울에게서 나오는 소리는 이런 모든것을 내가 했어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조건이 있지요. “내게 사랑이 없으면”
그것입니다. 사랑이 있어야 이모든것들이 의미가 되고 가치가 되며
하나님께 소용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속에 과연 이런
“사랑”이 있읍니까? 여러분에게 이런 사랑이 있습니까?
세상 어디에 이런 사랑이 있을까요?
우리가 노래도 부르고 암송도 하는 고린도 전서 13장은 사랑장입니다.
그런 사랑이 설마 우리속에 존재한다고 믿습니까?
저는 아니라고 믿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있는지 몰라도
저는 없습니다. 저는 눈꼽만큼도 가치가 없는 무가치한
존재입니다. 감히 하나님을 부를수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하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으며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으며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딥니다.“
이런 사랑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우리모두에게는 이런 사랑이 원래없습니다.
이런 사랑은 오직 하나님께만 존재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입니다.
요한사도의 편지에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합니다.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아닙니다.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나 예언도 사라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사라질 것입니다“
모든것은 유한하고 모든인생은 사라집니다. 우리가 자랑하는 우리가
이룩했다고 거들먹거리는 문화도 예술도 다 사라집니다.
그러나 영원한것이 있습니다.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곧 하나님이시며 영원하신분은 오직 하나님한분이기에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영원한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과 그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으로 사는존재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것이 영원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의말을 종합한다면
내게 사랑이 없으면, 내게 하나님이 없으면, 내게 예수가 없으면,
내게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월을 아끼라고 하시며
모든 좋은것은 위로부터 내려온다는 것이며
우리는 땅에서 살지만 땅엣것을 찾지말고 위엤것을 찾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미를 찾지 않는 모든것은
다 쓸데없고 부질없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이는 곧 전도서와 맥을 같이합니다.
“전도자가 말합니다. “허무하다. 허무하다. 정말 허무하다. 모든 것이 허무하다!”
사람이 해 아래에서 열심히 일해서 얻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한 세대가 가고 다른 세대가 오지만 이 땅은 영원히 남아 있으며
해는 늘 떴다가 지고는 다시 그 떴던 곳으로 급히 돌아간다.
바람은 남쪽으로 불다가 다시 북쪽으로 돌이키며 이리저리 돌다가
다시 그 불던 대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지만 바다는
가득 차는 법이 없고 강물은 흘러나왔던 그곳으로 다시 돌아간다.
모든 것에 피곤함이 가득 차 있어 사람의 말로는 다할 수 없고
눈은 아무리 보아도 만족스럽지 못하고 귀는 아무리 들어도 채워지지 않는구나.
예전 것이나 지금 것이 똑같고 예전 일이나 지금 일이 다 똑같으니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구나. 그러니 “보라. 새 것이로다”라고 할 만한
것이 있겠는가? 그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 시대 이전에도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얼핏 들으면 세상 철학에서 나오는것과 흡사합니다.
‘인생 무상’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이렇게 무상하고 덧없고 쓸데없습니다.
너무 허무주의같습니까? 아직 오십도 안된 제가 여러 어르신들앞에서 건방진소리를
합니다만 그것이 사실이잖아요. 하나님이 없는 인생이 아무리 업적을 쌓고 공로를 이룬들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모두들 속고 속이면서 사는 인생아닌가요?
세상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에서 추구하는 가치에 목적을 두는 인생이란
다 헛된것일 뿐입니다. 솔로몬왕을 통해 우리에게 삶의 비밀을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이 주는 것이 얼마나 크고 달콤한지요
예수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에게서도 세상이 주는 풍요함과 안락함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이름을 파는 사람들은 많아도 그 뒤를 따라가는자는 적습니다.
좁은문과 좁은길은 아무도 안가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찾는이가 적으니라“ 고 이미
가르쳤습니다.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모든 인간들은 예외없이 세상에 속고 삽니다.
그 패역한 세대에서 “우리”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 세대에서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얻었습니다.
오늘 이 말을 듣고 있는 여러분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서 하나님의 부름을 언제 들었습니까?
제 경험에 의하면 거의가 절망가운데 있을때 아닌가요?
힘 빠지고 지치고 아프고 상처받고 눈물 흘리면서
자기가 생각했던 모든 가치관에 의미가 상실됐을 때가 아닌가요?
C.S 루이스가 그랬던가요?
언젠가 읽었던 “고통의 문제” 라는 책입니다.
잘 기억은 없지만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고통을 허락 하신것은
“하나님의 확성기소리다“ 라는 것 같습니다.
즉 우리는 평안할 때는 세미한 소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귀가 막혀서 안들리는 것인데
만일 우리에게 지독한 어려움과 고통이 생겼을 때 비로소 귀가
열리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들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도 “고난이 내게 유익이라” 고백합니다.
이야기가 좀 다른쪽으로 흘렀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결코 뜬금없는
소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이 이렇다는걸 인식하고 깨달아야만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말할 수 있기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오직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의 본질이시죠.
따라서 우리는 아무도 하나님께 다른 것으로 영광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너무 추상적이죠.
좀더 현실과 가깝게 한번 진행해 보기로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죠.
물론 우리 믿는자들도 세상에서 일을 해야 합니다.
일이라는 것은 다른말로하면 사는것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는가로 그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좋은 직업을 추구합니다.
이왕이면 좀 대접받고 보수도 많고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교회안에서도 사회적인 위치와 직업에 대하여 예민합니다.
같은 직분자들도 결국 세상에서의 신분으로 평가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교회가 즉 성도개개인의 인격이 온전하게 예수의 마음으로
채워지지 않는한은 여전할 것입니다.
분명히 세상과 교회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의 생각이 가치관이 목적이 목표가 구별되어야 합니다.
믿는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이런식을 자주 접합니다.
교회일은 영적이고 세상일은 세속적이다라는 식의 생각입니다.
교회와 연관이 되는일은 영적이며 하나님의 일이고 그렇지 않은 세상의 일은
하나님과 상관없다는 식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는한 절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누가 하느냐이고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신자들가운데 이런말 하는사람들 있죠?
“빨리 세상일 집어 치우고 하나님일 해야지”
이 말속에 담긴 의미는 그러니까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사역자가 되는 것들을 총칭한다고
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죠.
과연 그럴까요?
저는 바울사도의 말을 인용해서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내게 주신 은혜를 힘입어 여러분 각 사람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분수에 맞게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었고
각 사람은 서로 지체가 됐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 서로 다른 은사를 갖고 있습니다.
만일 예언이면 믿음의 분량대로,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가르치는 사람이면 가르치는 일로, 권면하는 사람은 권면하는 일로,
구제하는 사람은 순수한 마음으로, 지도하는 사람은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덧붙여서 첨언한다면,
“각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을 때의 상태 그대로 살아가십시오.
노예였을 때, 부름을 받았습니까? 그것 때문에 마음 상해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혹시 자유를 얻을 기회가 생기면 그 기회를 활용하십시오.
주님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노예인 사람은 주님께 속한 자유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자유인인 사람은 그리스도의 노예입니다.
여러분은 값을 치르고 산 사람들입니다. 더 이상 사람들의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위치에 그대로 머물러 계시면서
하나님께 책임을 다 하시기 바랍니다.“
무슨일을 하든지 주 예수의 마음을 품고 하는 것입니다.
다윗도 왕이 되기전에 막네로서 거치른 들판에서 양을 길렀습니다.
맹수와 더위와 추위와 강도의 위험속에서도 하나님과 함께하였습니다.
어린 사무엘도 성전 문을 여는 일을 충실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음성을 들었던 사무엘이었지만
그는 맡겨진 자리에서 본분을 지켰습니다.
전쟁포로로 잡혀갔던 어린 소녀를 기억하십니까?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의 부인의 몸종인 이스라엘의 딸을
아십니까?
나마만장군이 엘리사 선지자의 말대로 요단강에 목욕하기를
거절하였을 때 충언하던 종들을 기억하십니까?
하만의 권세아래서도 성문을 지키던 모르두게를 아십니까?
아합의 다스리던 시대에 궁중에서 충성하던 오바댜를 아십니까?
우리가 잘 아는 요셉을 아십니까?
이들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사람들입니다.
그중에 어떤이는 이름도 없고 신분도 비천합니다. 어떤이는 욕을 먹는
자리에도 있었습니다. 어느시대건 어떤 환경이던간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지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의 신분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뭘 해서 영광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영광의 자리로 부르셨습니다.
세상에서의 우리가 처한 신분이나 위치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는 자들에게는
세상이 주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영광이요
상급이요
방패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매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린다면
그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은것이라 인정해 주십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하나님이 과연
나의 방패시며 구원이시며
상급이십니까?
아니면 아직도 세상이 나를 알아주기를 꿈꾸는
세상이 나의 방패요 상급이십니까?
자꾸 말이 길어집니다. 서글퍼집니다요^^
간단 명료하게 짜임새있게 작성을 못하는 자신이
미워요 ㅠ_ㅠ
야생초형님 주재넘게 제 생각을 올립니다
너무 횡설수설해서 죄송하구요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혹여라도 쬐끔이라도
보탬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덕분에 저도 공부가 되었구요
제가 미처 모르는 부분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쪽지도 좋고 댓글로도 괜찮습니다
글쓰기가 보통 노동이 아니네요
이 허접한걸 작성하는데도 무려4시간 반이나
걸렸네요...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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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게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작은자는 이시간에 동일한 은혜로 예수안에서
하나된 형제 자매와 및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게 돼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과 또한 각처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해 여러분에 대해 항상 내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이는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일, 곧 말과 모든 지식에 있어서
풍성하게 됐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대부분 교회안에서나 믿음의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사용하는 말중에
혹은 기도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라는소리를 곧잘 합니다.
매우 좋은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일상을 한번 따라가보면
과연 그런말을 할 만큼 자신이 있는가? 라는 반문에 부닥치게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저도 마찬가지로 누가 물어본다면 솔직히 자신 없습니다.
말로는 주님을 위하여라고 들이대기 쉽지만
정말 진지하게 자신을 살펴본다면 얼굴이 부끄러울 것입니다.
세상에 그 누가 과연 하나님을 위하여 살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결론적으로 말해서 불가능한 일입니다.
구원이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이며
택하심이며 은혜인것을 생각할 때
정말 하나님의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으로 얻어진 구원받은
우리가 무엇을 한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수가 있을까요?
우리의 모든 삶을 온전하게 하나님께 드릴 수도 없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무슨 영광이 될수가 있을까요?
원칙적으로 어림없는 소리라는 말입니다.
찬송가에 보면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만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찬송하겠네“
이렇게 한다고해서 주께서 베푸신 사랑을 은총을 얼마나
갚을 수가 있을까요? 더 나아가서 바울사도의 이런말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내가 만일 사람의 언어와 천사들의 말을 한다 할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소리 나는 꽹과리와 같을 뿐입니다.
내가 만일 예언하는 은사를 가지고 있고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만일 내가 가진 모든 것으로 남을 돕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하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으며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으며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딥니다.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언도 사라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 믿는자들이 나름대로 자신있다고 하는 믿음에 대한 내용들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시면 바울이 무슨말을 하는걸까요?
성경에 나타나는 바울사도는 예수를 만난후에
이렇게 바뀐사람입니다.
사람의 언어와 천사들의 말을 하고, 예언하는 은사를 가지고 있고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가진 모든 것으로 남을 돕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주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고백하기를 “내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라는 것입니다.
이시대에도 바울같은 사람이 있습니까?
제가 잘은 모르지만 분명 있을겄입니다. 우리가 몰라서 모르는게지요.
그랬다 하더라도 바울에게서 나오는 소리는 이런 모든것을 내가 했어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조건이 있지요. “내게 사랑이 없으면”
그것입니다. 사랑이 있어야 이모든것들이 의미가 되고 가치가 되며
하나님께 소용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속에 과연 이런
“사랑”이 있읍니까? 여러분에게 이런 사랑이 있습니까?
세상 어디에 이런 사랑이 있을까요?
우리가 노래도 부르고 암송도 하는 고린도 전서 13장은 사랑장입니다.
그런 사랑이 설마 우리속에 존재한다고 믿습니까?
저는 아니라고 믿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있는지 몰라도
저는 없습니다. 저는 눈꼽만큼도 가치가 없는 무가치한
존재입니다. 감히 하나님을 부를수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하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으며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으며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딥니다.“
이런 사랑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우리모두에게는 이런 사랑이 원래없습니다.
이런 사랑은 오직 하나님께만 존재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입니다.
요한사도의 편지에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합니다.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아닙니다.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나 예언도 사라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사라질 것입니다“
모든것은 유한하고 모든인생은 사라집니다. 우리가 자랑하는 우리가
이룩했다고 거들먹거리는 문화도 예술도 다 사라집니다.
그러나 영원한것이 있습니다.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곧 하나님이시며 영원하신분은 오직 하나님한분이기에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영원한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과 그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으로 사는존재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것이 영원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의말을 종합한다면
내게 사랑이 없으면, 내게 하나님이 없으면, 내게 예수가 없으면,
내게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월을 아끼라고 하시며
모든 좋은것은 위로부터 내려온다는 것이며
우리는 땅에서 살지만 땅엣것을 찾지말고 위엤것을 찾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미를 찾지 않는 모든것은
다 쓸데없고 부질없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이는 곧 전도서와 맥을 같이합니다.
“전도자가 말합니다. “허무하다. 허무하다. 정말 허무하다. 모든 것이 허무하다!”
사람이 해 아래에서 열심히 일해서 얻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한 세대가 가고 다른 세대가 오지만 이 땅은 영원히 남아 있으며
해는 늘 떴다가 지고는 다시 그 떴던 곳으로 급히 돌아간다.
바람은 남쪽으로 불다가 다시 북쪽으로 돌이키며 이리저리 돌다가
다시 그 불던 대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지만 바다는
가득 차는 법이 없고 강물은 흘러나왔던 그곳으로 다시 돌아간다.
모든 것에 피곤함이 가득 차 있어 사람의 말로는 다할 수 없고
눈은 아무리 보아도 만족스럽지 못하고 귀는 아무리 들어도 채워지지 않는구나.
예전 것이나 지금 것이 똑같고 예전 일이나 지금 일이 다 똑같으니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구나. 그러니 “보라. 새 것이로다”라고 할 만한
것이 있겠는가? 그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 시대 이전에도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얼핏 들으면 세상 철학에서 나오는것과 흡사합니다.
‘인생 무상’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이렇게 무상하고 덧없고 쓸데없습니다.
너무 허무주의같습니까? 아직 오십도 안된 제가 여러 어르신들앞에서 건방진소리를
합니다만 그것이 사실이잖아요. 하나님이 없는 인생이 아무리 업적을 쌓고 공로를 이룬들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모두들 속고 속이면서 사는 인생아닌가요?
세상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에서 추구하는 가치에 목적을 두는 인생이란
다 헛된것일 뿐입니다. 솔로몬왕을 통해 우리에게 삶의 비밀을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이 주는 것이 얼마나 크고 달콤한지요
예수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에게서도 세상이 주는 풍요함과 안락함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이름을 파는 사람들은 많아도 그 뒤를 따라가는자는 적습니다.
좁은문과 좁은길은 아무도 안가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찾는이가 적으니라“ 고 이미
가르쳤습니다.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모든 인간들은 예외없이 세상에 속고 삽니다.
그 패역한 세대에서 “우리”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 세대에서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얻었습니다.
오늘 이 말을 듣고 있는 여러분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서 하나님의 부름을 언제 들었습니까?
제 경험에 의하면 거의가 절망가운데 있을때 아닌가요?
힘 빠지고 지치고 아프고 상처받고 눈물 흘리면서
자기가 생각했던 모든 가치관에 의미가 상실됐을 때가 아닌가요?
C.S 루이스가 그랬던가요?
언젠가 읽었던 “고통의 문제” 라는 책입니다.
잘 기억은 없지만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고통을 허락 하신것은
“하나님의 확성기소리다“ 라는 것 같습니다.
즉 우리는 평안할 때는 세미한 소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귀가 막혀서 안들리는 것인데
만일 우리에게 지독한 어려움과 고통이 생겼을 때 비로소 귀가
열리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들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도 “고난이 내게 유익이라” 고백합니다.
이야기가 좀 다른쪽으로 흘렀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결코 뜬금없는
소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이 이렇다는걸 인식하고 깨달아야만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말할 수 있기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오직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의 본질이시죠.
따라서 우리는 아무도 하나님께 다른 것으로 영광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너무 추상적이죠.
좀더 현실과 가깝게 한번 진행해 보기로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죠.
물론 우리 믿는자들도 세상에서 일을 해야 합니다.
일이라는 것은 다른말로하면 사는것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는가로 그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좋은 직업을 추구합니다.
이왕이면 좀 대접받고 보수도 많고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교회안에서도 사회적인 위치와 직업에 대하여 예민합니다.
같은 직분자들도 결국 세상에서의 신분으로 평가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교회가 즉 성도개개인의 인격이 온전하게 예수의 마음으로
채워지지 않는한은 여전할 것입니다.
분명히 세상과 교회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의 생각이 가치관이 목적이 목표가 구별되어야 합니다.
믿는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이런식을 자주 접합니다.
교회일은 영적이고 세상일은 세속적이다라는 식의 생각입니다.
교회와 연관이 되는일은 영적이며 하나님의 일이고 그렇지 않은 세상의 일은
하나님과 상관없다는 식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는한 절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누가 하느냐이고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신자들가운데 이런말 하는사람들 있죠?
“빨리 세상일 집어 치우고 하나님일 해야지”
이 말속에 담긴 의미는 그러니까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사역자가 되는 것들을 총칭한다고
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죠.
과연 그럴까요?
저는 바울사도의 말을 인용해서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내게 주신 은혜를 힘입어 여러분 각 사람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분수에 맞게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었고
각 사람은 서로 지체가 됐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 서로 다른 은사를 갖고 있습니다.
만일 예언이면 믿음의 분량대로,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가르치는 사람이면 가르치는 일로, 권면하는 사람은 권면하는 일로,
구제하는 사람은 순수한 마음으로, 지도하는 사람은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덧붙여서 첨언한다면,
“각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을 때의 상태 그대로 살아가십시오.
노예였을 때, 부름을 받았습니까? 그것 때문에 마음 상해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혹시 자유를 얻을 기회가 생기면 그 기회를 활용하십시오.
주님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노예인 사람은 주님께 속한 자유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자유인인 사람은 그리스도의 노예입니다.
여러분은 값을 치르고 산 사람들입니다. 더 이상 사람들의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위치에 그대로 머물러 계시면서
하나님께 책임을 다 하시기 바랍니다.“
무슨일을 하든지 주 예수의 마음을 품고 하는 것입니다.
다윗도 왕이 되기전에 막네로서 거치른 들판에서 양을 길렀습니다.
맹수와 더위와 추위와 강도의 위험속에서도 하나님과 함께하였습니다.
어린 사무엘도 성전 문을 여는 일을 충실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음성을 들었던 사무엘이었지만
그는 맡겨진 자리에서 본분을 지켰습니다.
전쟁포로로 잡혀갔던 어린 소녀를 기억하십니까?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의 부인의 몸종인 이스라엘의 딸을
아십니까?
나마만장군이 엘리사 선지자의 말대로 요단강에 목욕하기를
거절하였을 때 충언하던 종들을 기억하십니까?
하만의 권세아래서도 성문을 지키던 모르두게를 아십니까?
아합의 다스리던 시대에 궁중에서 충성하던 오바댜를 아십니까?
우리가 잘 아는 요셉을 아십니까?
이들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사람들입니다.
그중에 어떤이는 이름도 없고 신분도 비천합니다. 어떤이는 욕을 먹는
자리에도 있었습니다. 어느시대건 어떤 환경이던간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지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의 신분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뭘 해서 영광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영광의 자리로 부르셨습니다.
세상에서의 우리가 처한 신분이나 위치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는 자들에게는
세상이 주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영광이요
상급이요
방패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매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린다면
그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은것이라 인정해 주십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하나님이 과연
나의 방패시며 구원이시며
상급이십니까?
아니면 아직도 세상이 나를 알아주기를 꿈꾸는
세상이 나의 방패요 상급이십니까?
2007.08.24 08:03:36
작은자님! 저의질문에 성실히 답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장문의 글을 쓰시느라 정말 수고하셨어요.
제가 이글에 토를 달 정도의 신학적인 지식이나 실력도 없고
그 글 속에서 님께서 말하고자 하는 뜻을 잘 새기도록 할께요.
우리 신앙의 모든 문제들이 정답이 있는게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가까이 가는게 아닌가 합니다.
이 글을 토대로 저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무엇인지 더욱 성찰 해 보겠습니다.
정말 수고 하셨어요. 언제 한번 뵙지요?
장문의 글을 쓰시느라 정말 수고하셨어요.
제가 이글에 토를 달 정도의 신학적인 지식이나 실력도 없고
그 글 속에서 님께서 말하고자 하는 뜻을 잘 새기도록 할께요.
우리 신앙의 모든 문제들이 정답이 있는게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가까이 가는게 아닌가 합니다.
이 글을 토대로 저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무엇인지 더욱 성찰 해 보겠습니다.
정말 수고 하셨어요. 언제 한번 뵙지요?
2007.08.25 06:44:45
야생초편지 님!
안녕하세요?
아주 어려운 질문을 하셨네요.
이곳이 사랑채가 아니었으면 그냥 지나갔을텐데....
'야초'님의 질문을 모른체 할 수가 없어 잠깐 끼어듭니다.
<성서마당> →<설교모음>으로 가셔서
"영광과 찬양의 삶(2006.12.10)"/"사람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2005.10.23)"
이란 설교를 한 번 읽어보시는 게 어떨까요?
특히 두번째 설교의 결론 부분과 거기에 달린 댓글들까지~
야생초편지 님!
위에서 두 분이 나름대로 친절한 설명을 해 주셨으니,
이번엔 정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함께 생각해 보시면
많은 도움이 되실 것 같군요.^^
세 분 모두 복되고 즐거운 주말 맞으소서!
안녕하세요?
아주 어려운 질문을 하셨네요.
이곳이 사랑채가 아니었으면 그냥 지나갔을텐데....
'야초'님의 질문을 모른체 할 수가 없어 잠깐 끼어듭니다.
<성서마당> →<설교모음>으로 가셔서
"영광과 찬양의 삶(2006.12.10)"/"사람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2005.10.23)"
이란 설교를 한 번 읽어보시는 게 어떨까요?
특히 두번째 설교의 결론 부분과 거기에 달린 댓글들까지~
야생초편지 님!
위에서 두 분이 나름대로 친절한 설명을 해 주셨으니,
이번엔 정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함께 생각해 보시면
많은 도움이 되실 것 같군요.^^
세 분 모두 복되고 즐거운 주말 맞으소서!
2007.08.25 08:53:13
작은자님의 글에서 진실함과 치열함과 성실함을 봅니다. 님의 글에 적극 동의 하며 이 주제는 우리가 전 일생에 걸쳐 묻고 추구해야할 주제인것 같습니다. 누구도 하나님을 다 안다 할수 없기에 우리는 우리의 앎과 깨달음의 범주안에서만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는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연륜이 쌓일수록 내안에 하나님이 점점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이겠지요. 끝없이 하나님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알아가는것 ,그래서 그것만큼 내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고 확장되며 자연스럽게 내안에서 예수의 모습이 흘러나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것 이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것 중에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2007.08.25 19:55:47
구도자님!
일러 주신대로 두편의 설교내용을 읽고 많이 깨달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므로 우리가 사랑의 지식과 분별력을 가지고
삶을 살아갈때 그 사랑은 더욱 풍성해지고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아가며 그 영성의 깊이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그런 삶을 통해 의의 열매(빌1:11)를 맺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것임을....
감사합니다.
일러 주신대로 두편의 설교내용을 읽고 많이 깨달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므로 우리가 사랑의 지식과 분별력을 가지고
삶을 살아갈때 그 사랑은 더욱 풍성해지고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아가며 그 영성의 깊이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그런 삶을 통해 의의 열매(빌1:11)를 맺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것임을....
감사합니다.
2007.08.26 06:53:37
구름나그네님께
죄송하며 또 감사올립니다.
별로 아는것도 깨달은것도 없는 제가
대단한 걸 아는 양 “척”을 했습니다.
다시 읽어보고 부끄러움에 삭제할까 하다가 정성껏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주신 분들을 생각해서 그냥 두기로 하였습니다.
이곳 다비아는 정용섭 목사님을 위시하여 여러분야에서 영성을 이루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저는 다만 작은 생각을 올린것에 불과하오며
오히려 댓글과 다른 회원님들의 귀한 글에서 도움을 얻고 있습니다.
또 나름 도전도 받고 있습니다.
일일히 고마움을 표하진 못하지만
이 자리를 빌어서 진심으로 감사를 전합니다.
신입 처음부터 여러모로 신경을 써주시고 배려해주신
구도자님을 비롯하여 솔나무님. 늘오늘님. 어린양님. 사오정님...
그외 제가 다 언급을 하지 않지만,
또 묵묵히 눈으로 힘을 주시는 수많은 다비안님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물론 여기 계신 다비안님들의 생각이 전적으로 저와 동일하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과 의견이 다르다고 친구하지
못할것도 없다는 생각입니다. 논의는 치열하게 하더라도
사람,사람은 모두 예수 안에서 형재요 자매라고 생각합니다.
혹시라도 저에게( 그러신 분들은 없겠지만) 서운하신 분들이
계시면 용서하시고 화 푸세요 ^^
제 생각에 동의해주신 분들께 감사하고
다른 생각으로 저를 보시는 분들도 감사합니다.
이것은 그냥 입바른 소리가 아니라 진정입니다.
제가 좀 일방통행식이라서
오해도 꽤 받습니다.
너무 이기적이고 독단적이다 라는...
이곳에서도 그런 제 모습을 많이 보셨을 겁니다.
잘 고쳐지지 않는군요^^
앞으로 또 어떤식으로 돌출될지 모르겠지만
미리 머리숙여 양해를 구합니다.
모두 복된 주일 되시길~
샬롬!
죄송하며 또 감사올립니다.
별로 아는것도 깨달은것도 없는 제가
대단한 걸 아는 양 “척”을 했습니다.
다시 읽어보고 부끄러움에 삭제할까 하다가 정성껏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주신 분들을 생각해서 그냥 두기로 하였습니다.
이곳 다비아는 정용섭 목사님을 위시하여 여러분야에서 영성을 이루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저는 다만 작은 생각을 올린것에 불과하오며
오히려 댓글과 다른 회원님들의 귀한 글에서 도움을 얻고 있습니다.
또 나름 도전도 받고 있습니다.
일일히 고마움을 표하진 못하지만
이 자리를 빌어서 진심으로 감사를 전합니다.
신입 처음부터 여러모로 신경을 써주시고 배려해주신
구도자님을 비롯하여 솔나무님. 늘오늘님. 어린양님. 사오정님...
그외 제가 다 언급을 하지 않지만,
또 묵묵히 눈으로 힘을 주시는 수많은 다비안님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물론 여기 계신 다비안님들의 생각이 전적으로 저와 동일하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과 의견이 다르다고 친구하지
못할것도 없다는 생각입니다. 논의는 치열하게 하더라도
사람,사람은 모두 예수 안에서 형재요 자매라고 생각합니다.
혹시라도 저에게( 그러신 분들은 없겠지만) 서운하신 분들이
계시면 용서하시고 화 푸세요 ^^
제 생각에 동의해주신 분들께 감사하고
다른 생각으로 저를 보시는 분들도 감사합니다.
이것은 그냥 입바른 소리가 아니라 진정입니다.
제가 좀 일방통행식이라서
오해도 꽤 받습니다.
너무 이기적이고 독단적이다 라는...
이곳에서도 그런 제 모습을 많이 보셨을 겁니다.
잘 고쳐지지 않는군요^^
앞으로 또 어떤식으로 돌출될지 모르겠지만
미리 머리숙여 양해를 구합니다.
모두 복된 주일 되시길~
샬롬!
그런데 한가지 물어볼께요.
사실 요즘 제가 고민하고 있는 주제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입니다.
우리가 상투적으로 기도할때나 또 대화중에 내 뱉는 말인데 그게 무얼 말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다 아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정말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