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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받은 예수 그리스도 (히 2:10-18)

성탄절 조회 수 13771 추천 수 0 2013.12.29 22: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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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히브리서 2:10-18 

 

시험받은 예수 그리스도

히 2:10-18, 성탄절후 첫 주일, 2013년 12월29일

 

 

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13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성탄절후 첫 주일인 오늘 설교 제목은 “시험받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히 2:18절에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따온 제목입니다. 그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여기서 ‘그’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셨다는 사실은 신약성경 곳곳에 나옵니다. 대표적으로는 예수님이 공생애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마귀에게서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마 4:1-11절이 이를 자세하게 보도합니다. 사십일 동안 밥을 먹지 않고 기도만 하고 계시던 예수님 앞에 나타난 마귀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사십일을 굶었으니 예수님의 눈에 돌덩이가 실제로 떡처럼 보였을지 모릅니다. 또한 사도신경은 예수님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로마 법정에서 받은 재판과 십자가 사형 판결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시험과 고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기독교인은 없습니다. 그는 우리를 대신해서 고난을 당하시고, 급기야 죽임을 당하시고,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대답을 알고 있습니다. 옳은 대답입니다. 그러나 그런 대답을 알고 있다고 해서 그 대답의 실체로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 교리는 수학 공식과 같습니다. 수학공부에서 직각 삼각형의 피타고라스 정리(a
2+b2=c2)를 외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정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게 중요한 것처럼 기독교 신앙에서도 예수의 시험과 우리의 구원에 대한 교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게 중요합니다. 사죄, 구원에 대한 생각이 하나도 없으면서 이런 교리의 세계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기독교 교리의 근본에 대해서 별로 생각을 하지 않거나 막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시험과 고난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교리적으로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아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려면 우선 다음의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지닌 분이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질문을 드립니다. 예수님이 왜 시험과 고난을 통해서 인간을 구원해야만 했을까요? 그분이 하나님과 동일한 능력을 소유한 분이시니, 그냥 말씀 한 마디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우리의 모든 죄를 단칼에 없앨 수도 있었을 겁니다. 세상의 모든 불행도 말 한마디로 사라지게 할 수 있었습니다. 장애인도 없고, 전쟁도 없고, 배고픔도 없고, 시기와 질투도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초능력이 그분에게 있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으며, 사람들이 그를 믿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게 하신 걸까요? 쉬운 길을 내버려두고 곤란한 길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여러분들도 평소에 이런 질문을 하셨을 겁니다. 또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이런 도전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셨나요? 믿기만 하면 해결돼, 또는 성령을 받아야만 돼, 하는 대답을 하셨나요? 틀린 대답은 아닙니다. 믿음이 필요하고, 성령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선은 예수의 고난과 우리의 구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아야 합니다. 알지 못한 채 믿을 수 없고, 알지 못한 채 성령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알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을 읽고 배웁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만이 아니라 히브리서 기자도 우리와 똑같은 상황에서 살았습니다. 예수님 이전이나 이후나 세상은 변한 게 없었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무질서하고 불안하고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예수님의 구원 능력을 실질적으로 경험하기 어려웠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지금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똑같은 문제로 고민한 겁니다. 이런 사실을 히 2:8절은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이렇게 만물을 그에게 복종시키셨다는 것은 그의 지배 아래 있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보기에는 아직도 만물이 다 그에게 복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아직도 ‘만물이 복종하고 있지 않다.’는 이 진술은 인간 실존을 정확하게 가리킵니다. 우리는 만물과의 싸움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돈을 벌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고, 암에 걸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어린 자식들이 왕따 당할 염려도 하는 등, 구원받은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걱정과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에 시달립니다.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요? 히 2:15절에 따르면 그것은 죽음입니다.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한다.’고 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를 노예로 만든다는 이 진술은 정확한 통찰입니다. 그걸 실제로 인식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을 뿐이지 거기서 벗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잊어버린다고 해도 무의식적으로 거기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중국의 만리장성 같은 초대형 건축물을 만든 사람들은 그걸 통해서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려고 한 것입니다. 오늘날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에만 매달리는 행태도 역시 그 밑바탕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초연하게 대하는, 소위 도사 연하는 이들도 있긴 합니다. 그런 도사들은 일단 드물고, 그런 경지에 들어섰다고 하더라도 죽음의 두려움을 완전히 벗어났다고 보증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예외 없이 죽는 순간까지 그런 운명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신앙이 아무리 깊어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그 힘이 왜 그리 막강할까요? 왜 죽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까요?


그 이유를 히브리서 기자는 14b절에서 죽음의 세력을 마귀가 쥐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라고 했습니다. 죽음의 세력이 존재론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죽음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천하장사라고 해도 죽음의 세력 앞에서는 무기력합니다. 건강식품을 취하고, 의료의 도움을 많이 받고, 마음을 편하게 가져도 죽음의 세력에 맞설 수 없습니다. 그런 운명을 가리켜 히브리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여 평생 노예처럼 살아가는 것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죽음의 세력,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그것에 따른 노예 상태라는 말을 별로 실감하지 못합니다. 인정하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잠을 자는 시간 외에는 대부분 살아있는 것만을, 화려한 것만을 대하기 때문입니다. 티브이에 나오는 연예인들의 화려한 삶, 성공 신화, 웰빙을 부추기는 상품들에 둘러싸인 채 거기에 민감하게 반응할 뿐입니다. 설령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도 그건 단지 드라마일 뿐이지 실존적인 경험은 되지 못합니다. 죽음의 문제 앞에서 현대인들은 아래의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합니다. 하나는 죽음을 해결할 수 있다는 착각으로 끝없이 자신의 삶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수명을 늘리고, 복지를 향상시키고, 마음 수련을 합니다. 다른 하나는 인생의 허무주의에 깊이 빠지는 겁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죽음의 세력이 마귀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음 문제도 다르게 대합니다. 우리가 마귀와 직접 싸우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싸우십니다. 본문 14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귀를 멸하셨다고 했고, 15절은 죽음의 두려움으로 종노릇하는 자들을 해방시키셨다고 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죽음을 스스로 극복하거나 거기에 완전히 종속당하는 게 아니라 마귀를 멸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합니다.


이제 우리의 질문은 예수님이 실제로 마귀를 멸하셨느냐, 그렇다면 어떻게 마귀를 멸하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4절에서 ‘죽음을 통하여’라고 했습니다. 이게 듣기에 따라서 말이 되지 않습니다. 마귀를 멸했다는 건 마귀를 굴복시켰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죽으면 안 됩니다. 오히려 자기를 십자가에 처형시키려고 했던 이들을 죽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통해서 죽음의 세력인 마귀를 멸했다는 게 말이 될까요? 말장난은 아닐까요? 설교 앞부분에서 말한 대로, 왜 그런 방식으로 인간을 구원해야만 했을까요? 속 시원하게 말씀 한마디로 다 해결하면 좋지 않았을까요?


이 질문에 딱 떨어지는 대답을 우리는 모릅니다. 의학이 이렇게 발전했는데도 선천적인 장애인들이 태어나는 이유를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신학, 철학, 과학이 발달하면 이 모든 비밀이 다 밝혀질까요? 조금 가까이 갈지는 몰라도 완전하게 밝혀질 수는 없습니다. 만약 다 밝혀진다면 바로 그게 성서가 말하는 종말이며, 예수 재림으로 이뤄질 새로운 세상입니다. 그 이전까지 우리는 부분적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그 부분적인 대답이 성경에 나오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을 읽고 설교합니다.


여기서부터 설교를 좀더 세심하게 들으셔야 합니다. 왜 예수님의 죽음이 오히려 구원의 길이냐, 즉 우리를 살리는 길이냐에 대한 설명입니다. 죽음의 세력이 마귀에 있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 마귀를 대적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마귀가 하나님과 대등하게 맞서 있다는 건 아닙니다. 마귀는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죽음도 큰 틀에서 하나님 통치 안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죽어야 했던 이유는 그가 우리와 같은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14절이 그걸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예수님은 초능력을 행사하지 않고 우리와 똑같은 육체적인 한계를 그대로 짊어지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두려움을 안고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하고 외칠 정도로 죽음에 대한 큰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시험과 고난과 죽음에 맞서야만 했습니다. 절망의 끝자락입니다. 거기서 인류 구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던 결과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본문 17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사람과 똑같은 육체적 운명에서 살아가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야만 참된 구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고유한 역할을 가리켜 히브리서 기자는 ‘대제사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은 모든 유대인들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사죄 제사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유대인들과 똑같은 위치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사람과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심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늘 영광을 버리고 낮은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래야만 대제사장으로 참된 구원의 역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맡으신 대제사장의 역할을 좀더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은 천군천사를 데려다가 악을 싹쓸이 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를 돕는 방식으로 구원하십니다. 18절이 그걸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시험을 받으시어 시험받는 사람들을 도우십니다. 죽음을 통해서 죽어야 할 사람들을 도우십니다. 당시 사람들은 천사들이 돕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천사들이야말로 초능력적인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초능력과 전혀 상관없이 우리와 똑같이 시험받고 고난당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돕습니다. 이게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핵심입니다. 불교의 석가는 천수를 다 살면서 인생의 깊은 의미를 깨닫고 중생들에게 각자의 내면적인 구원의 세계를 찾아 용맹 정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훌륭하신 선생님이십니다. 공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가르친 게 아니라 그냥 낮아진 겁니다. 사람들을 계몽시키고 의식화시킨 게 아니라 그들과 똑같은 운명을 받아들이신 겁니다. 그래야만 육체적인 한계 안에서 시험받으면서 살아가는 우리를 실제로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독교의 가르침이 실제로 우리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는다고 해도 다음과 같은 대답을 이미 생각한 분들이 있을 겁니다. 예수님의 시험과 고난 이후로 아무도 홀로 시험받거나 고난당할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바로 그 자리에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이후로 우리는 아무도 홀로 죽지 않습니다. 그 죽음의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리고 세상에서 무엇을 더 요구하겠습니까. 보십시오. 죽는 순간에 임종을 지키려고 그 자리에 온 가족들도 슬퍼하기는 하겠으나 실제로는 죽을 사람과 함께 할 수는 없습니다. 임종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으나 없으나 사실은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제가 죽을 때 주변에 아무도 없어도 괜찮습니다. 이 세상의 삶이 끝나는 죽음은 결국 살아있는 가족과 함께 하는 게 아니라 혼자 통과해야 할 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그 순간의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2천 년 전 세상에 오신 날이 성탄절입니다. 며칠 전에 성탄절을 보냈지만 아직도 성탄절 절기입니다. 단 하루, 아니면 몇 주간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가 성탄절 절기로 채워져야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하늘 영광을 떠나 어둠의 현실인 이 땅으로 오시어 시험과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우리로 죽음의 두려움에서 해방시키신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으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성탄절후 첫째 주일인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성탄절의 본질인 성육신 신앙에 근거해서 다시 한 번 더 간절한 마음으로 호소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시험받고 고난을 당하셨으니 여러분 인생에서 시험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이 두려울 때도 있겠지만 거기에 절망하지는 마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죽음의 자리까지 내려가셨으니 죽음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자리, 그 순간에 하나님이 비밀한 방식으로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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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굶주린 늑대 

December 30, 2013
*.18.118.229

현대인들은 고등 종교와 철학, 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일대기 등을 접하고나면
'죽음'이란 것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을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희미해진다고 할까요? 죽음이 먼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것을 조금씩 자각(?)하게 됩니다.

다른 경우지만 현실에 지쳐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실제로 죽음을 선택하는 이들도 있고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이 차라리 죽고 싶다라는 생각이나 말을 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내세기복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죽음을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거나 두려워하지는 않는 것 같고요!


'기독교가 뭐꼬?'를 읽다가 한참 멍하게 있은 적이 있습니다.
  (제 10강 죽음에 대해서  )

목사님께서 죽음을 너무 적나라하게 표현하셨더군요!
'모든 것과의 단절'

그동안 죽음에 관하여 두렵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그 글을 읽고나서는 죽음을 다르게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죽음 역시 구원처럼 은폐된 신비인데 그것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공포를 극복하려면 두려움을 직시해야 하는데
아직 죽음이 두려울 정도로 그 실체에 접근해 보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라는 말도 있으니 
좀 더 진지하게 삶을 직시하면 죽음을 알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죽음 다음에 있는 부활의 신비를 희미하게라도 알 수 있을까요?

왜 예수님이 받은 시험과 고난이 죽음으로 귀결이 되었는지 
그 죽음 앞에 왜 예수님이 두려워하셨는지 
죽기전까지 꾸준히 묵상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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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30, 2013
*.94.91.64

우리가 죽을 때까지 질문과 대답 찾기는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영혼이 경직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구요. 
혼자의 생각에 머물지 않으려면,
특히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서 도움을 얻으려면
기독교 정통에 속한 책을 읽는 게 최선이에요. 
잡다한 여러가지 짧은 글을 많이 읽은 것보다 
무게 있는 하나의 책을 집중해서 읽는 게 훨씬 좋아요. 
가는 데까지 길을 가봅시다. 
언젠가는 무언가 확 나타나는 게 있을 테니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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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방성수

December 30, 2013
*.108.187.144

 목사님, 1년 동안 다비아를 통해서 목사님의 설교를 잘 읽었습니다. 항상 새롭게 다가오는 목사님의 설교를 다가오는 2014년에도 기대 해 봅니다.
목사님 말씀처럼 시험과 고난과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아야 되는데 오십 중반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도 죽음이 두려운 것은 제 영성이 아직도 많이 부족한가 봅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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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30, 2013
*.94.91.64

내년에도 제 설교를 기대하신다니, 
저도 설교사역에 좀더 충실해보겠습니다. 
죽음이 두려운 거야 모두 똑같지요, 뭐.
그게 영성에 달렸다는 말씀도 옳습니다.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로 주어지는 것인데,
십자가와 부활의 주에게 가까이 간다면
화재현장에서 소방수의 품에 안긴 아이처럼
두려우나 동시에 안심할 수 있겠지요.
내년에도 영적인 소방수이신 예수님과
그분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우리함께 깊이 알아가봅시다.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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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모래알

December 31, 2013
*.56.59.65

정목사님!  
한 해를 마무리 하는 시간에 듣는
두려워도 절망하지 말라는 말씀에 큰 힘을 얻습니다.

내년 365일 중 언젠가 한번쯤은 뵐 수 있는 날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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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31, 2013
*.94.91.64

내년에 고국 방문 계획이 있으신가 보군요. 
아니면 미국 한번 가볼까 하는 제 마음을 읽으셨는지요. ㅎㅎ
빙하기 당시 우리 조상 유인원들이 감당해야 했을 두려움과 절망이 
오늘은 다른 방식으로 우리 삶을 파괴하고 있네요. 
내년에는 모래알 님의 사진찍기가 더 풍성해지기를 바랍니다. 
주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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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meditatiocrucis

December 31, 2013
*.104.3.61

목사님, 샬롬~~
벌써 한 해가 넘어가려 하네요.
갑자기 이런 노랫말이 생각납니다.
"가는 세월 그 누구가 잡을 수가 있나요~~"
만약 가는 세월 잡을 수만 있다면 잡고 싶어 하는 것도,
필시 예수님이 받은 공생애 초기의 시험(유혹)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겠지요.
예수님은 그러한 물질적, 종교적, 세속적 권력의 유혹앞에 타협하고 굴복한 것이 아니라,
맞짱뜬 결과가 바로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이르는 고난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만큼 죽음에 이르기 까지의 엄첨난 두려움과 불안을 예수님은 어떻게 극복하셨을까요?
히브리서 12장 2절은 예수님이 당신 앞에 있는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모욕과 수치도 아랑 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해 동안 
개인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거짓과 위선과 불의와 모순 앞에
얼마나 제대로 맞짱뜨고 살았는지 생각하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톨스토이의 작품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란 책을 최근 읽으면서, 나름 큰 깨달음을 얻었는데요...
내년에는 좀 더 죽음앞에서 도피하지 않고
죽음을 좀 더 정직하게 직면하면서 살아야 겠다 싶습니다.
세속적 승리주의가
교회 안에서도 너무나 당연한 듯 받아들여지는 상황 속에서,
목사님의 설교문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각오를 새롭게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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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31, 2013
*.94.91.64

예, 목사님, 힘을 내봅시다. 
이 시대의 모순과 대결한다는 게 이론적으로 해결되는 거는 아니지만,
그리고 결심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지만
기독교 영성의 근원에 대한 신앙공부를 통해서
그 사태가 점점 분명하게 보이고,
극복할 수 있는 힘도 강해지겠지요.
교회를 통해서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멀어질 가능성은 많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그런 일은 반복되었어요.
그런 어둠의 시절에도 성령은 우리 옆에서 활동하시니
우리가 깨어 있기만 한다면 그분의 도움을 받겠지요.
좋은 새해를 맞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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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 은혜

December 31, 2013
*.36.149.44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근심 염려 두려움은 죽음의 권세를 가진 마귀에 붙들려 살기때문이다

그걸 내 힘으로 극복할수 없고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하신다는 그 약속에 내 삶을 의탁하여 살면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목사님 설교를 이렇게 해석을 했는데 제가
바로 받아들였는지요?

이 교리에 동의하고 믿고 있지만
믿기전과 크게 다를바 없이
여전히 근심과 두려움에서
자유함을 누리지 못함은
머리로만 그 교리를 믿고 있기때문인지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하려고 죽으셨는데
믿고 있음에도 여전히 종노릇하며
살것인가 자유한 자로 살것인가
여부는 그 구원의 비밀을 깨달아 가는
인식의 정도에 비례하는것인가요?

자유케 하려고 죽으셔놓고
그래서 구원을 완성해 놓으시고선
그 비밀의 깨달음이라는 지고지난한 신앙노정의 길에 얼마나 자기를 투신하느냐 여하에 따라
평생을 가난한 신자로 사느냐
부요한 신자로 사느냐,
자유함을 누리고 사느냐
여전히 종노릇하며 사느냐
나뉘게 하실까요?

영혼의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고
평생을 곤고함과 핍절함속에
여전히 죽음의 권세에 종노릇하며
하는 신자에게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무슨 의미가 있나요?

한 해의 마지막 설교로 주신 말씀이
오히려 더 큰 의문과 도전을 갖게 해주시는군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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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31, 2013
*.94.91.64

ㅎㅎ 부스러기 님의 고민이 백일하에 드러나는군요.
고민이 깊다면 은혜로 깊어지겠지요.
대글 머리에 설교를 요약하셨는데,
정답을 잘 말씀하셨습니다.
그게 실질적으로 와 닿지 않는다는 거지요?
신앙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게 쉽지 않지요?
공연히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처럼 들리지요?
어쩌면 부스러기 님이 어떤 신앙적 선입견을 갖고
제 설교를 듣는 건지 모르겠군요.
여기 리코더를 배우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연습이 필요하겠지요.
한단계 올라가면 다음 단계로 또 가야겠지요.
거기서 비약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중간에 포기할 거고,
꾸준히 가는 사람이 있겠지요.
10단계에 가는 사람도 있고,
1단계에 머무는 사람도 있어요.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어요.
그 단계가 무한하기 때문에 차이가 없을 수 있는 거에요.
영성이 깊은 사람과 부족한 사람 사이도 그와 같습니다.
가능한 대로 10단계, 그 이상으로 가면 좋은 거고
그렇지 못하다고 해서 하나님 안에서 큰 문제는 아니에요.
그런 깊은 영성이 필요없는 사람들도 있을 거구요.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는 것과 같아요.
설교를 듣고 더 큰 의문과 도전을 갖게 되었다는 건
좋은 설교와 좋은 청중 사이에 일어나는 영적인 현상입니다.
새해에 거룩한 고민이 더 많아지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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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여름비

December 31, 2013
*.182.17.150

뒤돌아보면 늘 함께 하셨던 임미누엘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목사님, 2013 년 한 해동안 감사한 일이 많습니다.
샘터교회와 다비아를 만나 일이 쇼킹하면서도 가장
기쁜 일입니다.
새해에도 건강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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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31, 2013
*.94.91.64

여름비 님 모녀를 교회에서 만난 게
저에게도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릅니다.
임마누엘의 신비와 그 능력 안으로 들어가봅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건강하시고, 책도 많이 파시고,
모든 가족들에게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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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July 25, 2014
*.220.104.49

인생의 수 많은 문제를   부활 하신 예수님께서 해결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죽지않아서 죽음을 모르는 우리는 여전히 죽음의 종으로 살고 있습니다.  죽다가 살아나서 좋아하는 것보다 죽고나서 주님이 나를 기다리신다는것에 기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죽다가 살아나서 좋아하면 뭐 하겠습니까. 또 걱정을 은근히 하는 게 인생인데. 

유한하다는 것은 아름답다는 것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입니다. 난초와 만냥금이 꽃이 피는 걸 보면서 그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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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25, 2014
*.94.91.64

진인택 님이 생각이 옳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 자체가 뭐 대수겠습니까.

불교인들도 그런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걸 구원으로 여기는데,

기독교의 내세관이 천박한 욕망의 실현으로 떨어진다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주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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