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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과 예수 (요 3:1-17)

사순절 조회 수 5281 추천 수 0 2020.03.08 19:31:00
설교보기 : https://youtu.be/7zHsCu75L1w 
성경본문 : 요한복음 3:1-17 

영생과 예수

요한복음 3:1-17, 사순절 둘째 주일, 202038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16

국가의 대재난을 불러온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해서 주목받는 종교 집단은 신천지입니다. 공식 명칭은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자와 사망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구와 경북 지역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도 역시 전반적으로 신천지와 직간접 연관됩니다. 이들로부터 시작해서 2차와 3차 감염이 일어났고,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신천지가 내세우는 가장 중요한 교리는 영생이라고 합니다. 영생을 강조한다는 사실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구원의 다른 단어가 바로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의 마지막 단락에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는다.’라는 내용이 나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요 3:16절에도 이에 해당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 유명한 요 3:1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런 구절에 근거하여 기독교인의 삶은 영생을 목표로 한다고 말해도 틀린 게 아닙니다. 오히려 칭찬받아야 합니다. 역설적이지만,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영생과 구원에 대한 열정이 없다는 사실은 신앙의 위기입니다. 특히 현대 지성적인 기독교인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의 하나는 전통적인 교리를 냉소적으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영생은 정신적으로 미숙한 사람에게만 필요하다면서 자신은 성숙한 사람이기에 그런 주제에 관심이 없다고 여깁니다. 대신 지금의 화려하고 분주한 세속적인 삶에 몰입하는 삶의 태도를 최선이라고 여깁니다. 스펙과 커리어를 쌓고, 가볍게나마 즐길 수 있는 여흥을 찾는 일이 그런 것들입니다. 이런 데서 인생의 의미를 찾는 이들은 일반적으로 교회에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지만, 교회에 나온다고 해도 전통적인 교리인, 즉 오늘 설교의 주제인 영생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고 신앙생활을 일종의 종교적 여흥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들보다는 신천지에 속한 이들이, 또는 구원파에 속한 이들이 기독교 신앙에 훨씬 더 진지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다만 그들이 신앙의 내용을 정확하게 모른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내용을 모르니까 자신의 종교적 열정에 무조건 매달리고, 그것이 반복되면서 영혼이 병들어갑니다.

최근에 신천지 행태에 관한 언론의 보도가 홍수를 이룹니다. 이단 전문가들이 오랫동안 신천지 문제를 다뤘지만, 일반 언론이 관심을 전혀, 또는 별로 보이지 않다가 이번 코로나 사태로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믿거나 말거나하는 수준의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일정한 교육을 받아, 정확히 말하면 세뇌당하는 건데, 정식 교인이 되면 주일 집회에 무조건 참석해야 합니다. 참석 여부를 디지털 카드로 확인합니다. 교주가 명령을 내리면 무조건 1명 이상을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에 자신이 없으면 대신 상당 액수의 헌금을 바칩니다. 제가 거기서 벌어지는 기이한 행태를 다 알지 못하고 다 안다고 해도 더 말씀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중에는 과장된 내용도 있을 겁니다. 신천지 교도들은 폐쇄적인 제도 안에서 자학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헌신과 열광적 예배 형식을 통한 자기 몰입에 떨어져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모르기에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도대체 성경이 말하는 영생은 무엇일까요?

 

영생이란?

오늘 설교 본문인 15절과 16절에 반복하여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영생은 영원한(아이오니오스) 생명(조에)입니다. 요한복음의 키워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린 이야기에서도 이와 비슷한 설명이 나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11:25-26). 이런 말을 문자적으로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거나 실제로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은 아닙니다. 신천지 교도들이 실제로 육체의 영생을 믿는다면 성경을 오해한 겁니다. 교주인 이만희 씨도 나이가 들었으니 얼마 있지 않으면 죽겠지요. 저도 죽고, 여러분도 죽습니다. 사람에게는 죽고 싶지 않다는 강렬한 욕망이 있습니다. 늙지 않겠다는 욕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욕망이 자극받으면 사람들은 거기에 빠져듭니다. 현대의 상품 광고도 기본적으로는 이런 욕망에 호소합니다.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을 해보십시오. 죽음이 없다면,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제목도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에 읽은 어느 책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마녀의 힘을 빌려서 영생불사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인생이 즐거웠겠지요. 그런 즐거움도 잠시였습니다. 나이가 들자 친구들은 다 죽고 혼자만 남았습니다. 자기와 삶을 나누던 이들, 일상을 공유했던 이들이 다 떠났습니다. 그리고 늙은 몸뚱이만 남았습니다. 이 사람은 그제야 죽음이 구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마녀를 찾아가 죽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전혀 늙지 않고 돈도 많고 즐거운 일만 많으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처럼 과학이 발전하면 그런 시대가 올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바로 앞에서 전한 마녀 이야기가 인간의 운명을 더 정확하게 짚었다고 생각합니다. 죽지 않는 운명이 오히려 마녀의 저주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왜 반복해서 영생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 영생이 육체적으로 죽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면 인간은 어떻게 구원받는다는 것일까요?

요한복음에 나오는 영생은 공관복음의 하나님 나라’(바실레이아 투 데우) 개념과 그 근본 의미가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생명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하나님을 하늘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계신 존재로 여깁니다. 사람이 죽으면 하나님이 계신 그 하늘 어딘가로 가서 천년만년 산다고 믿습니다. 현대물리학에 대한 초보적인 정보만 알아도 이런 생각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지를 압니다. 현대물리학을 거론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하늘은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게 분명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말은 하나님이 지금 여기 우리가 사는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뜻입니다. 그걸 알아보는 사람이 있고,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걸 알아보는 사람은 생명을 얻은 사람입니다. 그 생명의 세계로 더 깊이 들어가는 경험을 영생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생명이 따로 있고 영원한 생명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따로 있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따로 있는 게 아니듯이 말입니다. 생명을 강조하는 뜻으로 영생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영생을 얻었다.”라는 말을 이해하려면 생명을 소유의 차원이 아니라 존재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생명은 건강식품처럼 우리가 손에 넣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수능점수를 올리는 것처럼 생명을 우리가 계량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처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물론 우리가 노력해서 좀 더 건강하게 지낼 수는 있습니다. 서로 노력하면 덜 싸우면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고, 이번 코로나 사태 같은 재난 앞에서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은 마땅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생명을 소유해서 처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생명은 우리 인간 모두를 포함해서 세상 만물이 유기적으로 결속되어서 발생하고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바이러스만 해도 그렇습니다.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코로나바이러스만이 아니라 더 독한 바이러스도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백신만 개발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변이에 변이를 일으키는 바이러스를 인간이 당해낼 수 있을까요? 인간이 편리하게 살기 위한 에너지 소비로 인해서 지구 생태계가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이끼가 사라질 수도 있고, 바다의 플랑크톤이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벌이 지구에서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다른 세균이 인간의 생존을 위협할 순간이 올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 과학마저 자연에, 더 크게는 우주에 속한 것이기에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 생명을 소유할 수 없고, 처리할 수 없고, 계산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생명 안에서

바로 앞에서 영생은 하나님 나라와 같은 뜻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말씀에 근거해서 볼 때 영생을 얻었다.”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믿고 거기에 완전히 의존해서 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지금 존재한다는 사실에 예민해집니다. 하늘 나는 새와 들의 꽃과 땅을 기는 지렁이를 보면서 이 세상을 통치하는 더 큰 힘을 느낍니다. 우리의 일상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연봉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워합니다. 사회적인 지위보다 더 본질적인 삶의 깊이를 발견합니다. 매 순간 지금 여기서 자신이 살아있다.”라는 사실에 집중합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그런 능력이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져 있습니다. 주변 세계 안에 자신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느끼면서 삽니다. 그래서 모든 것들이 놀이의 대상이 됩니다. 소유와 소비가 지배하는 세상에 길들면서 우리 기성세대는 그런 생명 능력을 잃어갑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당신 설명이 멋있게 들리기는 하지만 현실의 삶이 고달프고, 그게 아니라도 늙고 죽는다는 사실이 두려운데 어떻게 지금 여기서 살아있다.”라는 사실에 집중하면서 생명 충만하게, 즉 영생을 얻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느냐고 반문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자기가 늙고 죽어서 없어진다는 사실에 대한 걱정이자 불안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이런 불안에 사로잡히는 게 사실은 기독교가 말하는 죄입니다. 이런 불안으로 인해서 신천지가 아주 유치한 방식으로 제공하는 영생 교리에 목을 매는 겁니다. 그들은 144,000명 안에 들어야 구원받고 영생한다고 믿지요? 그 숫자가 묵시적 메타포라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대면할 용기가 없기에 무조건 열광적으로 매달립니다. 그런 태도는 순진하기는 하지만 진리에서 소외되기에 영생과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집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영생에 집착할수록 영생에서 멀어지는 겁니다.

존재의 깊이에서 살아있다.”라는 사실에 집중하는 삶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야만 그게 가능합니다. 계곡과 계곡 사이를 잇는 출렁다리를 안심하고 건너려면 그 다리가 얼마나 튼튼한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으려고 나머지 아흔아홉을 들판에 남겨두는 목자와 같습니다. 유산을 탕진하고 거지로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해서 충고 한마디 하지 않고 잔치를 베푼 아버지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목자이자 아버지와 같다면 늙고 죽어 이 세상에서 사라질 자신의 운명을 안심하고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그게 영생 경험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태도로 인생을 살아가십니까? 여러분 옆에 목자와 아버지와 같은 분이 함께하신다고 실제로 생각하십니까? 이건 종교적인 낭만이나 훈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여러분에게 목자와 아버지로 존재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런 하나님을 눈여겨보지 못할 뿐입니다. 신앙의 눈이 없는 겁니다. 오늘 아침밥은 드셨는지요? 가난해서 아침밥을 못 드신 분은 없을 겁니다. 아침밥 한 그릇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인지 아는 사람이 있고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안다면 오늘 하루가 새롭게 빛날 겁니다. 누가 봐도 버텨내기 힘든 상황이 벌어지긴 합니다. 그건 각자, 또는 연대하여 대처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목자이자 아버지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게 영생 경험입니다.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은 자기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하나님을 목자와 아버지로 경험할 수 있도록 주어진 여건 가운데서 힘을 보냅니다.

 

예수를 믿는 자

오늘 본문 15절과 16절은 영생을 얻는 이들에게 한 가지 조건을 붙입니다. “그를 믿는 자마다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표현을 주술적인 현상에 관한 이야기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주술적으로 믿으면 신천지 교도들처럼 영생도 주술적으로 일어난다고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술에 매달리는 그런 신앙에서는 지금 여기의 삶도 주술이 됩니다. 종교 경험의 본질인 삶의 신비가 열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닫히는 미몽과 퇴행으로 떨어집니다. 생명의 능력은 줄어들고 어처구니없는 교리만 강화됩니다. 진리의 보편성에서 점점 더 멀어집니다. 이번 신천지 사태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술적인 신앙을 극복하려면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가 전한 메시지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의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이고 구원이고 영생입니다. 예수는 자기가 한 말과 완전히 일치하여 살았으니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과 그의 말을 믿는다는 사실은 똑같습니다. 그래서 성경 기자들은 사람들이 알아듣기 편하게 예수를 믿으라고 표현했습니다. 영생을, 즉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 선포의 내용과 일치해서 살았던 예수를 믿는 사람은 지금 여기서 생명을 억압하거나 파괴하는 세력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영혼의 깊이에서 참된 안식을 얻습니다. 3:16절이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는다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교회 중고등부를 거쳐서 대학부와 청년부 시절을 거치면서 찬송가를 잘 부르고 싶었습니다. 신학대학교 다닐 때는 외국인 선교사가 지도하는 2학점짜리 합창이라는 수업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잘 부르고 싶어도 잘 안 되었습니다. 음은 그런대로 흉내 내지만 발성이 시원치 않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발성 연습을 많이 합니다. 성대를 충분히 열고 힘을 빼며 아랫배에 힘을 적당히 주어야 합니다. 좋은 선생을 만나서 잘 배우면 멋진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예수는 여러 명의 성악 선생 중에 뛰어난 한 사람이 아니라 이론과 실제를 완벽하게 겸비한 유일한 성악 선생입니다. 그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우리는 영생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에서 가장 큰 목표는 영생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여기의 삶에서 자유와 안식으로 나타나는 영원한 생명에 가까이 가기 원한다면 예수를, 그의 말씀을, 그의 운명을 진실하게 믿으십시오. 여러분에게 새로운 생명의 세계가, 즉 참된 의미에서 신천지가 열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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