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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생을 믿습니다!" (요 3:14~21)

사순절 조회 수 6292 추천 수 0 2021.03.14 16:39:13
설교보기 : https://youtu.be/hxPPxk0GTrk 
성경본문 : 요한복음 3:14~21 

나는 영생을 믿습니다!”

3:14~21, 사순절 넷째 주일, 2021314

 

 

사도신경의 마지막 문장은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입니다. 몸의 부활과 영생이 무슨 뜻인지는, 개인에 따라서 생각이 다를 겁니다. 죽은 다음에 천당에서 지금과 같은 삶이 영원히 이어지리라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거기서 가족과 친구를 만나 즐겁게 지낼 것이라고 말입니다.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도 있습니다. 이런 생각들이 한편으로 소박하거나 다른 한편으로 고상해 보이지만 기독교적인 생각은 아닙니다. 저는 죽음이라는 고지가 멀지 않은 이들만이 아니라 청년들에게도 이렇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운명은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의 삶만 해도 팍팍한데 어떻게 죽음 이후를 생각하냐고 대답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오늘의 삶을 의미 충만하게 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죽음 이후에 대한 질문을 버려두면 안 됩니다. 오늘 설교는 그 질문과 직결됩니다.

 

요한복음 316

3:14~21절의 주제는 영생입니다. 15절과 16절에는 영생이 직접 언급되었습니다. 3:16절은 어린이 교회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외우기도 하고 노래로 부르기도 하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구절에서 키워드를 추리면 다음과 같이 다섯 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독생자, 믿음, 멸망, 영생. 각각의 단어가 기독교의 본질에 닿아 있습니다. 이 다섯 단어가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지를 알면 영생 개념에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라는 문장을 생각해보십시오. 두 개의 사실이 적시된 문장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독생자를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1) 하나님의 존재론적 근거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존재한다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기준으로만 대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으로, 또는 사랑의 능력으로 실감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감하려면 일단 자신이 사랑의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여기 농사꾼이 있다고 합시다. 많은 수확으로 소득을 올리는 것만을 생각하는 농사꾼은 농사 행위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흙과 날씨와 계절과 자신의 땀이 어떻게 서로 작용하는지를 세밀하게 살피는 농사꾼은 농사 행위로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농사 행위를 통해서 충만하게 사랑받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눈이 열린 사람은 농사 행위의 사랑을 받는 농사꾼처럼 세상을 전혀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표현은 기이하게 들립니다. 하나님에게 아들이, 그것도 외아들이 있다는 말은 그리스 신화나 이집트 신화에서 나옴 직한 이야기입니다. 외아들은 어떤 궁극적인 사실을 문학적으로 표현하는 전형적인 은유(메타포)입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신성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 신성은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았던 유일무이한 현상이라서 예수님을 외아들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를 다시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계 최고 도공과 제자의 관계를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도 그 도공을 흉내 낼 수 없습니다. 그 도공의 제자만이 그 도공의 예술 세계를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도공과 제자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도자기의 세계를 모르는 사람은 제자가 도공의 아들이라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 사람은 순전히 혈연관계에서만 아버지와 아들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3:16절은 이어서 믿는 자에 대해서 말합니다. 믿는 자는 요한복음을 받아볼 사람들을 비롯한 모든 기독교인을 가리킵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즉 하나님의 신성이 유일하게 나타난 인물로 믿었습니다. 여기서 그 신성이 뭐지, 하고 질문할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에 비춰서 대답한다면 영원한 생명이 바로 하나님의 신성입니다. 또는 사랑을 신성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영원한 생명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기독교인들입니다.

믿는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외아들이라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나라는 사실에 자신의 운명을 건다는 뜻입니다. 좋은 아파트를 산다거나 연봉 높은 직장을 얻었다는 사실에 운명을 거는 게 아닙니다. 아파트와 연봉도 우리의 일상에서 소중하기는 하나 생명 구원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인간의 욕심과 욕망이 끝없기에 그런 조건으로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만족할 수 없는 일에 운명을 거는 사람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불을 보듯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요 3:16절은 멸망에 대해서 말합니다. 멸망할 사람이 있고, 멸망하지 않을 사람이 있다고 말입니다.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합니다. 지나치게 독단적인 표현으로 들리긴 합니다. 18절에 노골적인 표현이 나옵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멸망이나 심판이라는 단어도 은유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당장 병이 난다거나 사업이 망하지 않습니다. 18절에서 보듯이 믿지 않는 것 자체가 바로 심판입니다. 그 이유는 믿음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절대적인 생명에서 제외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빠져보지 못한 사람이 사랑의 능력에서 제외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더 불행한 일은 이 절대 생명에서 제외된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심판을 받지 않을 사람입니까, 이미 심판을 받은 사람입니까. 확실하게 말하기 힘들겠지만, 여러분의 자녀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지 돌아보면 어느 정도 답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기독교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지, 아니면 세상에서 출세하거나 존경받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지 보십시오. 너무 뻔한 질문인가요? 사실은 자녀의 신앙 문제도 부모 마음대로 되지는 않습니다. 저처럼 전업 목사로 사는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의 힘으로 어쩔 수 없기는 하지만 일단 기독교인 부모로서 자녀들의 인생에서 무엇이 절대 생명인지는, 즉 무엇이 영생인지는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생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영생이 주어진다고 요 3:16절이 말했는데, 그 영생은 실제로 무엇일까요? 무조건 영원히 이어지는 생명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본래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지구에서 아주 짧게 살다가 모두 죽습니다. 영혼은 죽지 않고 육체만 죽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완전히 죽습니다. 육체가 죽으면 영혼도 죽는 겁니다. 우리가 죽으면 살아있던 우리의 모든 조건은 없어집니다. 더는 목사가 아니고 대통령도 아니고 유명인도 아니고, 남편이나 아내도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게 하는 우리의 뇌는 가장 빨리 그 기능을 상실합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무한한(endless) 삶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앞에서 짚은 대로 어떤 이들은 죽으면 천당에 가서 천년만년 잘 먹고 잘 마실 것을 기대합니다. 거기서 다시 가족을 만나고 교회 교우들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표상이 은유라면 괜찮지만, 사실로 생각한다면 코미디가 됩니다.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천당에서 만나면 어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죽음 이후까지 갈 필요도 없이 지금 여기에서 삶을 생각해보십시오. 언젠가 이 삶이 끝난다고 생각하니까 버텨낼 수 있지 영원히 이어진다고 생각하면 버텨내기 힘듭니다. 다른 사람은 백 살이 안 되어 죽는데 자기만 3백 년쯤 산다고 가정해보십시오. 그 사람에게는 죽음이 오히려 구원입니다. 오래 산다고 자랑할 일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영생은 시간의 연장이 아닙니다. 위르겐 몰트만은 나는 영생을 믿는다(Auferstanden in das ewige Leben)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 이 땅에서 누리는 생명을 끝없이 늘려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생명을 늘리려고 애쓰는 오늘날의 의학적, 생물학적 활동은 종교가 영원한 생명이라고 말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영원은 무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21). 한군데 더 인용하겠습니다. “우리가 영원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러한 원천에 도달하는 것은 생명의 시간적 길이가 아니라 우리가 경험한 생명의 순간적인 깊이이다.”(22). 사람에게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이 있긴 합니다. 저는 100살 넘겨 사는 사람의 인생이 부럽지 않습니다. 그런 장수가 영생과 직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급 뷔페식당에서 무한정 오래, 그리고 많이 먹는 게 먹는 즐거움의 충만과 직결되지 않는 거와 같습니다.

 

전체로서의 생명 경험

다시 물읍시다. 영생은 무엇일까요? 이 물음에 완전한 대답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누가 거기에 더 가까이 갔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이 질문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학문과 종교와 예술과 시와 문학, 그리고 법과 의술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도 우리는 아직 완전한 대답을 모릅니다. 거기에 가까이 갈 뿐입니다. 저는 제가 다가간 정도 안에서 영생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저의 설명과 비교해보기 바랍니다.

저는 영생, 즉 영원한 생명을 생명의 전체성으로 받아들입니다. 그 전체를 지금 여기서 경험하는 것이 곧 영생 경험이라고 말입니다. 전체는 처음과 마지막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사건에서부터 종말에 완성하실 사건까지 전체를 가리킵니다. 지금 우리는 생명의 한 부분에만 참여합니다. 이 부분적인 생명도 물론 생명입니다. 그러나 전체 생명은 분명히 아닙니다. 개인의 인생을 생각해보십시오. 어머니 자궁에서 우리는 씨앗 같은 생명체로 시작했습니다. 어머니 자궁 속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똑같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다르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시작과 마지막에 전체적으로 걸쳐 있습니다. 어느 순간만을 자신의 인생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개인의 인생을 인류의 차원으로 확장해 보십시오. 현생 인류가 지구에 출현한 시간은 지구 전체 나이에 비해서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인류가 앞으로 언제까지 지금의 모습으로 살아갈지도 잘 모릅니다. 지금 한순간만으로 인류가 누군지를 확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침팬지와 공동조상에게서 갈려 나왔으니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그 공동조상 너머까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만 보면 난자와 정자가 우리의 시초라는 사실을 상상하기 어렵듯이 오늘의 인류를 그 이전의 생명체와 연결해서 상상하기 어렵긴 하지만 인간이라는 종의 뿌리가 아득한 세월로 소급한다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인류와 지구 생명 역사의 전체성 안에 들어가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영생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저의 설명이 너무 현학적이라거나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할 분들이 계실 겁니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유가 없이는 성경이 말하는 그 영생의 세계를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고 대충 편하고 재미있게 살고 싶은 분들은 그렇게 살아도 됩니다. 다만 심판을 피하지 못한다는 사실만은 기억해두십시오. 절대 생명에서 소외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사실은 생명의 근원에 대한 이런 사유는 공부를 많이 하거나 시간이 넉넉한 사람에게만 가능한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린아이만 아니라면 누구나 이런 근본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평생 농사만 짓거나 막노동만 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에 시원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끔 별을 보다가, 또는 꽃을 보다가, 대나무를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듣다가, 혹은 가족과 단란하게 밥을 먹다가 불현듯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아득한 시간과 공간을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이 깊어지면 다른 일들은 그의 눈에 들어오지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습니다.

다시 요한복음이 전하는 말씀으로 돌아갑시다. 정말 신비롭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 생명 현상의 전체 역사 안으로 우리가 어떻게 들어가느냐, 하는 질문이 오늘 본문이 말하는 영생을 얻으려는 사람에게 주어진 마지막 질문입니다. 어머니 뱃속에 들어 있을 때와 죽어서 땅에 묻힐 때를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살면 될까요? 조금 더 넓혀서 인류 조상인 유인원이나 수십만 년 이후 우리 후손의 미래까지 생각하면서 살면 될까요? 이런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질문과 관심은 물론 필요하지만, 거기에만 머물면 안 됩니다. 저는 성경의 대답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창조와 부활의 실체(reality)가 된 분을 믿는 것이 대답입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의 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인 요 3:16절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10:28절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에게 예수님이 영생을 준다고 말하며, 11:26절도 예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지루할 정도로 반복하는 말씀입니다. 이런 성경 말씀이 옳은가요, 헛소리인가요?

저는 요한복음의 진술을 진리(3:21a)라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기자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온전하게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사람이라고 과감하게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14:9b). 요한을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와 운명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경험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의 능력으로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염려에 떨어지지 않고 하나님 나라만을 갈망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 연민인 죄와 자기 소멸에 대한 두려움인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 해방 경험이 부활 경험이며, 그 부활 경험이 영생 경험입니다.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어 오늘 여기서 부활 신앙으로 사는 사람은 이미 영생을 얻은 겁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자신 있게 나는 영생을 믿습니다.”라고 외쳐도 됩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남은 한 가지 숙제는 이 세상에서 영생을 믿는 사람답게 살아가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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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Nomad

March 14, 2021
*.235.32.213

설교제목이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가 '나는 영생을 믿습니다'로 수정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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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브니엘남

March 15, 2021
*.118.81.222

1. 그 신성은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던 유일무이한 현상이라서

2. 우리가 영원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러한 원천에 도달하는 것은 생명의 시간적 길이가 아니라 우리가 경험한 생명의 순간적이니(인) 깊이이다.

3. 육체가 죽으면 영혼도 죽는다. 대개 육체는 죽지만 영혼은 죽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빛이 입자와 파동으로 되어 있다고 하면 몸은 입자이고 영혼은 파동이기 때문입니다. 입자는 없어져도 파동은 없어지지 않는 것과도 같습니다. 물론 입자가 파동이고 파동이 입자이기도 하지만. 좀더 깊이 있는 설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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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15, 2021
*.181.143.51

브니엘남 님의 설명 부탁에 시원하게 대답하기는 어렵겠네요.

인간의 영과 육의 관계는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반복해서 논란을 빚었던 주제니까요. 

이를 압축하면 두 사상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하나는 영혼불멸설이고 다른 하나는 부활 사상입니다. 

영혼불멸설은 플라톤의 영향을 받았고,

부활 사상은 기독교 신앙의 초석입니다.

물론 부활 사상도 유대교의 묵시사상에 영향을 받기는 했습니다.

훗날 영혼불멸설이 기독교 정통 교리 안에서 자리를 잡기는 했으나 

부활사상, 또는 부활교리과 충돌한다는 약점을 다 해결하지는 못했습니다.

잠정으로 그렇게 인정받을 뿐이죠.

부활은 인간이 완전히 죽어야만 그 정당성이 성립됩니다.

육체만 죽고 영혼이 죽지 않는 상태에서 부활을 말한다면 

그건 영육이원론에 떨어지게 되겠지요. 

이 논란은 현대 신학에서도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저는 부활 신앙을 위축시킬 염려가 있는 영혼불멸사상은 유보하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이번 설교에서 육체와 함께 영도 죽는다고 할 때의 그 영은

우리가 세상에서 자신의 인격을 확인할 수 있는 그런 생명의 차원이 끝장난다는 뜻이었어요. 

판넨베르크의 "자연신학"에 나오는 설명에 따르면 

영은 장(field) 개념에 가깝습니다.

물론 그가 말하는 (성)영과 인간 영혼은 다르지만요.

하여튼 기독교 도그마를 깊이 알아가는 과정은 

한편으로 골치 아프고, 다른 한편으로 재미있어요.

브니엘남 님은 후자에 속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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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은빛그림자

March 15, 2021
*.223.48.215

어? 목사님, 이해가 잘 안되는데요... 부활했다는 "인식"이 아예 없다면 부활이 부활로 기능하긴 불가능할테고, 만약 부활했다는 "인식"이 있다면 세상에서 자신의 인격을 확인할 수 있는 그런 생명의 차원은 아니더라도 생존 세계에서의 나와 사후 세계에서의 나를 연속성 있는 개체로 인식 가능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게 "영"이라고 생각했는데..  목사님 말씀하신 대로 "영"은 육체와 함께 죽으면 다른 차원(?)의 영은 안죽는거에요? 어후...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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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16, 2021
*.181.143.51

인간의 영과 하나님의 영 사이에 어떤 단절과 연속성이 있는지는

여전히 열린 질문이에요.

인간의 영은 피조되었으니 창조의 영인 하나님의 영과는 질적으로 달라요.

피조물이 분명하다면 영혼과 몸으로 구성된 인간은 죽음이라는 관문을 거쳐야 해요.

그 죽음의 관문에 몸만 걸리고 영혼은 빠져나간다면, 

성경과 기독교 신학이 줄기차게 주장하는 영육일원론에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는 몸과 영의 일치로서 인간이지 한쪽만으로는 인간이 아닙니다.

영과 육은 구분은 되나 분리되지는 않아요.

죽음 이후에 지금의 나(의 정체성)가 유지되는가, 하는 게 궁금하시지요?

"몸의 부활"이 바로 그것을 가리켜요.

문제는 지금의 '나'라는 정체성이 무엇인지 우리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차원과 방식으로 '나'가 유지될 겁니다. 

하나님이 결정하실 일이니, 정말 기대되는 미래에요. 

죽고 안 죽고, 

또는 나의 무엇이 유지되고 없어지는지, 하는 생각 자체를 넘어서야 합니다.

(근데 저도 확실하게는 잘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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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은빛그림자

March 17, 2021
*.108.173.60

목사님, 저는 망했어요ㅠ.ㅠ

하나님이 결정하실 그 미래가 기대되지 않아요.

생각 자체를 넘어선다는 건 기대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잖아요.

기대하는 척 잠시 잠깐은 되는데 힘든 일 생기면 금방 본색이 드러납니다.

종종 저 자신을 보면 놀라울 정도로 믿음이 없어요.

고상하게 포장하고 싶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부활이고 뭐고

그냥 지금 좀 덜 고통스럽게 살고 싶다, 여기서 행복하게 지내고 싶다,

하나님이 로또나 되게 했주셨으면 진짜 좋겠다(매우 진지함)...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런 상태의 '나'가 사후에도 연속성을 가진다면 너무 슬플 것 같아요.

부활 후에 '나'는 '나'를 모르는 방식으로 유지되는 게 훨씬 좋겠습니다.

신학공부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고 절로 가든가 해야지...

아후... 깝깝해 죽겠습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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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17, 2021
*.181.143.51

-우리 모두는 망한 사람이랍니다. 구글 회장도 망한 사람이고, 쪽방 사람도 망한 사람이에요.

-미래에 대한 기대도 배워야합니다. 허상을 분별해내는 배움이지요.

-행복이 뭔지는 아무도 몰라요. 그게 권태를 불러올 수도 있어요.

-부활 후에는 끔찍한 오늘이 꿈처럼 느껴져서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찬송하겠지요.

-절간으로 가봤자 부처님 손바닥이니 별로 도움이 안 됩니다.

-깝깝한 심정은 하나님을 눈으로 보기 직전의 욥의 그것과 비슷해요. 

 하나님이 은빛 님을 끔찍히 사랑하시나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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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은혜

March 18, 2021
*.229.148.165

최근에 개척교회 목사 이야기를 다룬 기독교 영화
"기도하는 남자"를 보았지요
간암 말기 선고를 받고 수술비를 마련해드리지 못해,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장모에게 목사가 물었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으세요?"
"이사람아! 죽음이 뭐가 두려워? 사는게 더 두렵지"

죽을수 밖에 없는 운명임을 뻔히 알면서도
그날이 시한폭탄 초침가듯 다가오고 있음에도
죽음이후를 논하는게 한가로운 신앙으로 여겨질 정도로
오늘 내 실존이 죽음보다 더한 두려움에 허덕거리며
외마디 기도조차 나오지 않는...
바로 여기가 죽음살이요, 망한 자리요
그래서 오늘 여기서의 영생경험과 구원이 화급한 우선순위요,

살아가는 목표요, 동인이 아닐까요?


은빛님의 고해성사가 두려움과 갈등속에서도
손에 쥔 지푸라기를 놓을수 없는 고뇌하는 다비안들의 영적인 민낯이 아닐까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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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18, 2021
*.181.143.51

부스러기 님의 글이 가리키고 있듯이 

삶도 힘들고 죽음도 힘들다는 게 분명하니

우선 푯대를 분명히 정하고 그쪽을 향해서 

"영원이 깃든 현재를 포착하는 자세"로 

구도정진 하는 게 최선이겠지요.

사순절인데, 요즘 계절은 참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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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브니엘남

March 16, 2021
*.118.81.222

신령한 몸, 곧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고전 15:44)고 바울은 말합니다.

 

1. 여기서 몸은 죽은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부활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몸만 지금과 다른 영적인 몸으로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까?


2.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6)라고 말합니다. 죄와 허물로 죽어 있던(엡 2:1, 4)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난 것은 우리의 영입니다. 성령으로 살아난 우리의 영이 죽을 때 또 죽는다. 그러면 생명 주시는 영이신 주님이 살리신 우리의 영이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 것 아닙니까?


3. 그래서 저는 항상 부활을 몸의 부활로 인식하였습니다.


4. 우리나라 말에 돌아간다는 뜻은 사람은 순례자이므로 영혼이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6. 책을 더 봐야 하겠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영혼도 죽는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7. 동양철학에서도 죽으면 몸은 흙으로 가고 혼은 하늘로 돌아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8.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이해가 되는 것은 빛이 입자와 파동인데 입자가 없어지면 파동도 없어진다는 것 때문입니다.


9.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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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랜디로즈

March 16, 2021
*.161.218.62

한잔 권하고 싶습니다 레드와인이나 따뜻한 청주,  요즘 경주법주도 좋더군요~ㅎ 저는 정목사님이 말씀하신 저런 사후세계가 설득력있다 생각합니다. 돌아가신 사랑하는 지인들을 다시 이 시대방식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는건 슬프지만, 먼지가 되어서라도 다 자유롭다면 그것도 행복이겠죠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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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16, 2021
*.181.143.51

랜디로즈 님이 저에게 대글을 단 건지 브니엘남 님에게 단 건지는 모르겠으나

레드와인, 청주, 경주법주 이야기에 끌려서 답글을 답니다.

저도 젊었을 때 테니스장에서 맥주는 제법 마셨고, 

집에서는 바울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레드와인을 즐겨마셨어요.

이제 나이가 들어 위와 장에 탄력이 떨어져서 많이 마시지 못하고

대신 양주를 조금씩 마십니다. ㅎㅎ

양주의 향기와 높은 도수의 톡 쏘는 맛이 좋습니다. 

랜디로즈 님, 하나님의 첫번 창조도 선했으니

그 창조의 완성은 얼마나 선하겠어요.

듣도보도 못한, 요한계시록이 묵시적으로 그리는

그 생명의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미래를 희망하는 사람은 여기서의 삶에서 자유롭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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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16, 2021
*.181.143.51

1. 예, 다른 몸으로 부활하는거 맞습니다. 조금 다른 게 아니라 완전히 다른 몸으로!

2. 성경구절은 서로 충돌하는 게 많기에 그런 구절로 전체 교리의 중심에서 어긋나는 주장을 하면 곤란합니다.

   영육일원론이 인간 이해에서 중심 교리에요. 일단 영육일원론에 근거해서 죽음을 봐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죽음을 '잠'이라는 메타포로 설명했는지 모릅니다.

3. 예, 몸의 부활이 옳습니다. 지금의 몸과 부활의 몸은 도저히 비교불가입니다. 씨앗과 해바라기를 비교할 수 없듯이요.

4. 영혼이 본래의 곳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기독교적인 게 아니라 플라톤적인 겁니다. 돌아가는 게 아니라 종말의 완성으로 (앞으로, 혹은 미래로) 나아가는 겁니다.

6. 영혼도 죽는다는 말을 너무 불편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 이미 우리는 부활의 약속을 희망하고 살기에 거칠게 말해서 우리에게 죽음은 없습니다.

7. 예, 메타포로 '돌아간다'고 표현할 수는 있으나 4번처럼 우리는 에덴동산으로 돌아가는 게 아닙니다.

8. 입자와 파동을 몸과 영으로 비교하셨는데, 좋아보입니다. 사물의 본질은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이라는 게 신비하네요. 

9.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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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하늘연어

March 21, 2021
*.86.237.246

은빛님 사유에 전적으로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 목사님을 통해서 깨달은

방향성만큼은  여전히 따르고, 공부하면서 이 지난한 삶을

살아내려고 전력투구하는 조난위기의 선장 같은 심정입니다.  

난파에 대한 불안보다는 최후 승리에 대한 희망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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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21, 2021
*.181.143.51

하늘연어 님이 적절하게 묘사하셨듯이 

우리는 모두 조난위기에 직면한 사람들입니다. 

그 어디에도 도움의 손길이 없는 칠흑같은 바다 위에서

오직 하나, 멀리서 희미하게 비치는 등대빛만을 의지할 뿐이지요.

그 절망적인 실존에 떨어져봐야 참된 희망의 불꽃이 살아나겠지요.

십자가에 달린 그 예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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