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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바위 (시 89:1-4, 19-26)

대림절 조회 수 7410 추천 수 0 2017.12.24 21:11:17
설교듣기 : https://youtu.be/49lldNmIey8 
성경본문 : 시편 89:1-4, 19-26 

구원의 바위

89:1-4, 19-26, 대림절 넷째 주일, 20171224

 

1.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2.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 3.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내가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4.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왕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셨나이다 셀라...19.그 때에 주께서 환상 중에 주의 성도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능력 있는 용사에게는 돕는 힘을 더하며 백성 중에서 택함 받은 자를 높였으되 20.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내어 나의 거룩한 기름을 그에게 부었도다 21.내 손이 그와 함께 하여 견고하게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이 있게 하리로다 22.원수가 그에게서 강탈하지 못하며 악한 자가 그를 곤고하게 못하리로다 23.내가 그의 앞에서 그 대적들을 박멸하며 그를 미워하는 자들을 치려니와 24.나의 성실함과 인자함이 그와 함께 하리니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의 뿔이 높아지리로다 25.내가 또 그의 손을 바다 위에 놓으며 오른손을 강들 위에 놓으리니 26.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구약의 시편은 여러 가지 점에서 특별합니다. 신구약을 통 털어서 분량이 가장 큽니다. 전체가 150편입니다. 상대적으로 긴 성경인 창세기는 50장이고, 이사야는 66장이고, 마태복음은 28장입니다. 시편은 내용이 비슷한 것처럼 보여서 읽기에 지루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건 시편의 영적인 깊이를 잘 몰라서 그런 겁니다. 구약 중에서 신앙적으로 가장 깊은 성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신앙의 깊이만이 아니라 인간 삶에 대한 통찰력도 놀라울 정도로 깊습니다. 신앙과 삶은 분리되는 게 아닙니다. 삶에 대한 깊이가 없으면서 신앙이 깊어질 수는 없고, 신앙이 깊은 사람은 당연히 삶도 심층적으로 인식하면서 치열하게 살아갑니다. 이런 연관성을 우리는 시편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교회력에 따라서 주어진 시편은 89:1-4, 19-26절입니다. 여기서 마지막 구절인 26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의 신앙을 묘사한 구절입니다.

 

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는 구약성경이 하나님을 표기할 때 가장 자주 사용한 단어입니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이름을 붙일 수 없었기에 라고 호칭한 겁니다. 26절은 주를 세 가지로 묘사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구원의 바위가 그것입니다. 각각의 특징이 있지만 구원의 바위라는 표현이 가장 특징적입니다. 시편에 자주 나오는 표현입니다. 시편에는 이와 비슷한 의미로 산성이나 목자라는 표현도 나옵니다. 바위는 가장 단단한 사물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구원의 가장 단단한 토대라는 뜻입니다. ‘구원의 바위라는 표현은 그림을 보듯이 생생합니다. 여기 어떤 한 유대인이 광야에서 길을 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날이 저물었습니다. 인가는 보이지 않습니다. 노숙을 해야 합니다. 마침 사람 키보다 더 큰 바위가 보입니다. 바위 사이에 틈이 있어서 거기에 들어가 앉았습니다. 바위는 바람도 막아주고, 들짐승도 막아줍니다. 그 나그네에게 바위는 절대적인 의지가 됩니다. 이런 느낌으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구원의 바위라고 묘사했습니다.

 

구원의 필요성

구원의 바위라는 표현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인간의 실존이 구원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우선 알아야 합니다.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지면 되는 거지 구원 같은 거는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인간의 주체성과 자주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일수록 이런 주장을 강하게 합니다. 하나님에게서 구원을 바라는 사람들을 정신 박약한 이들이라고 여깁니다. 교회에서 벌어지는 퇴행적이고 유아적인 행태를 보면 그들의 주장을 터무니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외면하고 있는 겁니다. 수 킬로 앞에 놓인 계곡 사이의 다리가 끊어진 걸 모른 채 달리는 기차의 객실에 앉아 있거나 밖에서 화재가 난 걸 모른 채 건물 안 피트니스 교실에서 운동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인간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살아있는 동안에도 우리의 삶이 생명 충만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게 그 증거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겠으니까 각자 판단해보십시오.


2017년 한 해가 이제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세월의 속도는 더 빨라집니다. 작년과 금년이, 그리고 어제와 오늘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시간의 흐름이 희미해집니다. 사물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이 명백하지 않습니다. 젊을 때는 자신의 인생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매진하다보니 인간의 삶이 구름이나 바람을 잡는 것처럼 속절없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저는 설교 준비를 할 때마다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성경의 세계로 빠져들다가 지금 내가 25백 년 전 바벨론 시대나 2천 년 전 로마 시대에 살고 있는 건지, 21세기에 사는 건지 혼란스럽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렇게 삶이 불확실한 상태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작은 일상을 생각해보십시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세상이 작동되지 않습니다.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납니다. 인간관계도 쉽지 않습니다. 친구나 가족, 그리고 교우들과의 관계도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자기의 마음이 바르지 않을 때도 있고, 다른 사람의 마음이 잘못될 때도 있습니다. 그걸 과민하게 느끼는 사람은 매 순간이 힘들고, 무감각하게 느끼는 사람은 대충 맞춰서 살아갑니다. 어느 쪽이나 일상의 삶이 완성되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거꾸로 모든 인생살이와 사람관계가 다 잘 되었다고 가정해보십시오. 세상은 우리에게 그걸 약속하고, 그쪽으로 가도록 우리를 강요하고 유혹합니다. 모두가 부러워할만한 위치에 올랐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래도 만족은 불가능합니다. 남이 부러워한다는 사실에 만족할 뿐인 것으로는 영혼의 만족은 불가능합니다. 여기에 예외인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는 완전히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람이 아니거나 도사 연하는 사람입니다. 바울도 자신의 삶이 완성되지 못해서 괴롭다고 토로한 적이 있을 정도이니 다른 사람은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삶의 완성은 죽은 다음에나 가능합니다. 죽음을 영원한 안식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최선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바로 영원한 안식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들어간 것만큼 우리의 삶은 앞으로 나아갈 것이고, 따라서 생명 충만해질 겁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도 반복해서 하나님이 누구인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권면합니다. 성경에 위대한 인물에 대한 서사가 나오지만 그것이 성경의 목표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어떤 구원을 베푸셨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인자하심과 성실하심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하나님을 두 가지 성격으로 말합니다. 1절과 2절과 24절에서 그 사실이 반복되었습니다. 1절과 2절만 읽겠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게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

 

두 가지 중의 하나는 인자하심입니다. 공동번역은 사랑이라고 번역했고, 루터는 Gnade, 즉 은혜라고 번역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모든 인생살이가 잘 풀리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막연하게 앞으로 잘 되겠거니 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 은혜로 개입하신다는 경험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베푸신다는 뜻입니다. 공동번역을 따르면 사랑으로 베푸시는 것이고, 개역개정을 따르면 인자하심으로 베푸시는 겁니다. 이런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삶은 거룩해집니다. 생명 충만해집니다. 이런 경험에 근거해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인자하시다고, 은혜롭다고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삶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그래서 생명 충만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삶을 자신의 기준으로만 판단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여기 한 어린아이가 부모를 단순히 용돈 주는 대상으로 여긴다고 합시다. 용돈이 그 아이의 기준입니다. 자기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그는 부모와의 관계를 거부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기 기준으로만 삶을 평가하기 때문에 삶을 하나님의 은혜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인간이기에 세상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긴 하지만, 자기의 기준이 너무 강하다는 게 문제입니다. 자기 기준에 집착하는 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죄입니다. 여기서 기준이 반드시 나쁜 것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진보적이고 양심적이고 도덕적이고 개혁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마저 절대적인 기준이 되면 은혜를 외면하게 됩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를 조금 풀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행복한 삶의 형식을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이 정형화하고 있습니다. 행복과 삶의 의미마저 계량화하고 있습니다. 소득 2만 달러, 3만 달러를, 그리고 시급 1만원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이런 노력은 당연히 필요합니다. 불의한 세상은 정의롭게 개혁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방식만으로는 사람이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자신이 이 땅에서 존재하는 것 자체를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는 삶의 태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걷습니다. 걷는다는 것은 중력을 느끼고 중심을 잡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황홀한 경험은 없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척추에 이상이 생겨서 10년 동안 걷지 못하다가 회복되어 조금씩 걷게 되었다고 합시다. 한걸음이 그에게 온 세상을 얻는 경험입니다. 포도주 한 모금, 커피 한 모금이 제공하는 존재론적 깊이를 경험한다면 그에게 세상은 완전히 다르게 경험될 것입니다. 말 그대로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 설명이 그럴듯하게 들리긴 하지만 실제로 불행에 떨어진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시급한 사람에게는 돈벌이 외에 아무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을 저도 이해하고 동의합니다. 그런 점에서라도 모든 사람들은 경쟁력이 있건 없건, 직업을 갖고 있건 없건, 착하거나 악하거나 상관없이 최소한 인간적인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받아야합니다. 감옥에 갇힌 이들과 노숙자들에게도 숨 쉬고 먹고 마시고 독서할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를 제공하는 거와 같습니다. 그런 것과 상관없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피조물이기에 아무리 불행한 상황에서도, 죽음 직전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욥은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재난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42:6).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행복했던 조건들을 거두어가는 것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성격 두 가지 중에 다른 하나는 성실하심입니다. 우리말 공동번역은 미쁘심이라고 번역했고, 루터는 Treue라고 번역했습니다. 트로이에는 성실, 충실, 신의라는 뜻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말한 인자하심과 두 번째로 말하는 성실하심은 비슷한 뜻입니다. 인자하심은 삶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라면 성실하심은 그 인자하심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선하기에 신뢰할만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신뢰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르게 표현해서 우리가 생명을 가장 풍요롭게 느낄 수 있는 것은 영혼의 자유입니다. 영혼의 해방이라고 할 수 있고, 영혼의 안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과의 일치 경험입니다. 그런 경험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통해서 영혼의 자유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런 경험에 근거해서 그는 하나님이 인자하시고 성실하다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이집트와 앗시리아와 바벨론에 의해서 유대 민족 전체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곤 했지만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영혼의 자유와 안식과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와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성실하시니 그를 믿고 의지하라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이런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영혼의 안식을, 즉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안식, 즉 구원이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억지로라도 받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보이지 않기에 그게 안 됩니다. 어떻게 우리는 영혼의 자유와 안식이라는 사실에 집중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하나님을 구원의 바위로 경험할 수 있을까요?

 

영적 집중력

설교자가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를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지만 설교 내용에 책임을 진다는 의미로 이 대목에서 저의 경험과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영혼의 안식에 이르는 길에 관한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영혼의 안식을 경험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삶의 방식입니다. 두 가지입니다. 첫째, 저는 개인적인 삶이나 목회에서 어떤 목표를 세우지 않고 매 순간’(Augenblick)에 충실하고 집중합니다. 예를 들자면 저의 서재는 이층입니다. 하루에도 여러 번 계단을 오르내립니다. 그 순간에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계단만을 생각합니다. 그 사건이 얼마나 귀한지를 생각합니다.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이 저처럼 자유롭게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는 날이 쉽게 오지 않을 겁니다. 단순히 계단만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창문도 보고, 계단에 놓인 책과 잡동사니도 봅니다. 그리고 거기서 오르내리는 어떤 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신비롭게 생각합니다. 그 순간은 영화의 한 장면입니다.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어떤 신학적인 깨우침도 가능합니다. 설교 준비할 때는 그것만 생각합니다.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할 때도 성경 텍스트만 생각합니다. 앞으로 교회가 어떻게 달라져야 할지에 대해서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순간이 저에게는 영혼의 자유로 경험됩니다. 죽을 때까지 그런 방식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둘째, 저는 목사로서만이 아니라 기독교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일에만 집중합니다. 예수를 더 깊이 알고 믿고 싶다는 뜻입니다. 예수는 자기의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는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어떤 느낌이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더 깊이 있고 절실하게 알고 싶습니다. 설교 행위도 바로 그런 과정의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갈수록, 그를 더 깊이 알수록 저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성실하심을 더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비록 내가 알고 있었던 것과 다르다고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간 것만으로 저는 저의 인생을 만족스럽게 생각합니다. 그 외의 다른 것으로는 채워질 수 없는 영적인 만족이 거기서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25백 년 전 어간에 기록된 시편 89편을 읽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구원의 바위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토대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고대 유대인들과 동일한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거기서 우리는 한걸음 더 나아갑니다. 시편 기자가 노래한 그 구원의 바위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설교듣기: https://youtu.be/49lldNmIey8

설교보기는 예배실황 아프리카티브이를 참조하세요.  http://afreecatv.com/nfermata 이 영상은 한 달 뒤에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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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하늘연어

December 26, 2017
*.128.178.149

현실에서의 실존과 하나님 나라와의 갭을 넘어서는 것이 믿음이라고

하신 말씀(정확한 기억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을 읽고 

제 삶의 좌표를 재설정하고 있습니다. 

부디 죽은 후 제 삶의 완성은 하나님의 기뻐하심

가운데 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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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26,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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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하나님 나라 사이를 갭이라고도 할 수 있고,

교차라고도 할 수 있고, 둘러싸임이라고도 할 수 있고,

변증법적 긴장관계라로도 할 수 있겠지요.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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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은혜

December 2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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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과 자기완성이라는 율법주의에 뼛속까지 중독되어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실질적으로 경험하지 못한채 신자임을 자처하는 우리가 오늘 여기서 생명충만감을, 영혼의 자유를 누리며 사는게 가능할까요?

내게 닥치는 온갖 정황들의 판단의 척도가 여전히 쇠심줄보다 더 질긴 내 기준이라는 본성이, 가히 하나님도 법접할수 없을만큼 철옹성처럼 버티고 있건만, 그런 가운데 내 존재, 내 삶을 그분의 선물로 여기며 사는게 가능할까요?

갈2:20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연합에 이룬듯 보이던 바울이 롬 7장 후반부에선 여전히 옛본성과의 치열한 갈등을 토로하였듯, 오늘도 우린 내 옛사람과, 또 시대정신과 치열한 사투속에서, 끊이지 않는 갈등속에서,  그럴수록 자신의 무력감에 처절히 절망하는 가운데 영혼의 자유와 구원을 바랄수 밖에 없는 비참한 존재임을 통감합니다
구원의 문턱을 뒤로 하고 다가올 재림을 희구하기는 커녕, 아직도 구원의 문턱을 들락거리기만 하는것 같습니다.

 


 

그런데 순간에 집중하며 산다는 것과 매일 일상의 상투성에 함몰되어 살지 않는다는 것,

두 영역의 경계를 구분짓기가 참 모호하다 싶군요.

 

목회자들처럼 한 주간 접하는 이웃들이  교인들이거나 교계 지인들이  대다수인,

또 설교와 여러 강독준비등으로 영적인 자극과 각성이 끊이지 않는 환경속에서 사는 특별한 이들에게

순간에의 집중은 그 영혼이 그분과 매순간 잇닿아 살려는 영적인 감수성을 유지할수 있으련만, 

그렇지 않은 절대 다수의 인생들이 던져지는 이 세상이, 그 일상속에서 순간을 집중하여 산다는게 일상에의 상투적인 함몰로 떨어지지 않고 영적인 감수성의 회복으로 이어지려면 어찌 해야 하는지... 선뜻 와닿지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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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2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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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면 세계의 충돌에 관한 바울의 고백은 우리와 차원이 다르니까 일단 접어두겠습니다.

2) 세속의 삶과 신앙의 삶이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가능합니다.

    루터에 따르면 구분되어야 하고(두 왕국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광의 관점에서 통일됩니다.

    그렇다고 루터와 칼빈이 대립되는 것은 아닙니다. 일상과 신앙의 긴장을 죽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걸 이상하게 생각할 거 하나도 없습니다.

3) 문제는 세속에서 살아가지 나는 어쩔 수 없어 하고 타협이나 체념하면서 사는가,

    아니면 영혼의 자유를 위해서 투쟁하면서 사는가에 달려 있겠지요.

4) 투쟁하는 영혼을 가진 사람은 세월이 지나면서 율법의 짐이 점점 가벼워지는 걸 느낄 겁니다.

5) 관건은 밭에 묻힌 보화를 보았느냐에 달려 있겠지요.

6) 목사들도 세속정신으로 목회할 수 있고, 영혼의 자유에 근거해서 목회할 수도 있어요.

    따지고 보면 일반 신자나 목사나 처한 실존은 똑같습니다. 힘내세요.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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