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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실라, 빌립보 감옥에서 (행 16:16-34)

부활절 조회 수 15824 추천 수 0 2019.06.02 21:50:43
설교듣기 : https://youtu.be/9YaRHnIDv2M 
설교보기 : http://afreecatv.com/nfermata 
성경본문 : 사도행전 16:16-34 

바울과 실라, 빌립보 감옥에서

16:16-34, 부활절 일곱째 주일, 201962

 

16.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17.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18.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19.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 갔다가 20.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21.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22.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23.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24.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25.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6.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27.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28.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29.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30.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31.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32.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33.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34.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사도행전에는 지중해 인근의 도시 이름이 종종 나옵니다. 그중의 하나가 그리스 북동쪽에 있는 빌립보입니다. 빌립보는 빌립에게 속했다.’라는 뜻입니다. 그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빌립 2세가 이 도시를 세워서 이런 이름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빌립보는 훗날 로마의 직할 식민 도시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에 유럽 최초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리스 여러 곳에 교회가 설립되었고, 나아가서 유럽 전체에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바울의 빌립보 전도 이야기가 행 16:11절 이하에 나옵니다. 거기서 공식적으로 처음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루디아라는 여자 사업가였습니다. 루디아는 부자라 그런지 바울 일행을 자기 집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게 했습니다. 훗날 루디아의 집에서 가정교회가 시작됐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여기까지는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어느 날 곤란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 이야기가 오늘 설교 본문입니다.

바울 일행은 길을 가다가 어떤 여자를 만납니다. 그 여자의 직업은 점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점치는 보살입니다. 자영업으로 하는 게 아니라 피고용인이었기에 이 여자는 점만 치고 돈은 주인이 차지했습니다. 이 여자가 바울 일행을 따라오면서 다음과 같이 고함을 질렀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16:18). 이 말만 들으면 이 점치는 여자는 바울 일행을 높이 평가하는 게 분명해 보입니다. 좋은 말도 한두 번이지 이 여자가 매일 반복해서 이런 말을 해대니까 바울 일행이 짜증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에 따르면 바울이 심히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이 여자가 귀신 들렸다고 보고 이 여자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그러자 귀신이 즉시 나왔다고 합니다. 귀신을 쫓아냈다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한편으로는 바울의 영적인 카리스마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실이라고 믿기 힘들다는 생각도 듭니다. 오늘 우리의 시각으로는 사실(fact)과 허구(fiction)가 구분되지만 2천 년 전 고대인들의 글쓰기에서는 그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 말하려는 메시지만 중요했습니다. 이런 문제는 뒤에 다시 나옵니다.

 

빌립보 감옥에서

점치는 여자를 이용해서 돈을 벌던 주인은 더는 돈벌이를 할 수 없게 되자 바울 일행을 로마 지방 정부에 고발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빌립보에 들어와서 로마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풍속을 전파한다는 누명을 씌운 겁니다. 이들의 무고가 통하여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지하 감옥입니다. 발에는 쇠사슬로 된 차꼬가 채워졌습니다. 상황이 절박합니다. 바울과 실라의 마음이 복잡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귀신 들린 여자가 아무리 귀찮게 굴어도 참거나, 바울도 로마 시민권이 있는 사람이니 불법적으로 구금당할 수 없다고 강하게 어필할 수도 있었습니다. 또는 빌립보에서 내로라하는 여성 사업가로 활동하는 루디아가 손을 써서 자신들을 풀어낼지 모른다고 기대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한밤중까지 잠들지 못한 채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지하 감옥에 들어와 있는 다른 죄수들도 이들의 기도 소리와 찬송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어느 순간 갑자기 큰 지진이 나고 감옥이 흔들리면서 옥문이 열렸고 사람들의 발에 채워졌던 차꼬가 풀렸습니다. 이제 천천히 걸어서 감옥을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죄수들이 도망한 줄로 생각한 간수가 칼을 빼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그 순간 바울은 자신들이 달아나지 않았다면서 간수를 말렸습니다. 예상외의 사태 앞에서 간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습니다. 그는 바울과 실라를 정신적인 내공이 깊은 스승으로 알아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16:30)라고 물었습니다. 간수는 로마의 지방공무원입니다. 그는 로마의 체제와 정치 이데올로기와 문명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차꼬가 풀리고 감옥 문이 열렸는데도 죄수들이 도망가지 않는 일은 자기 상식으로 있을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간수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31절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자기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심문당할 때 입었던 상처를 치료해주고, 모든 가족과 같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루디아처럼 이방인으로서 빌립보 교회의 원년 멤버가 되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해피엔딩입니다. 감옥에서 나온 바울과 실라는 루디아의 집에 가서 교우들을 위로하고 다른 곳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빌립보를 떠났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송을 불러서 지진이 일어나고 차꼬가 벗겨지며 감옥 문이 열리게 된 것이 사실인지 궁금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저는 별로 궁금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보도를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기적이냐 아니냐 하는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마술이나 주술은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을 진정한 의미에서 기적으로 보는 게 옳은 신앙입니다. 저는 빌립보 감옥에서 일어난 사건을 일상에서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옥 문을 열고 차꼬를 풀려면 굳이 하나님을 호출할 필요가 없이 열쇠만 있으면 됩니다. 열쇠를 가진 사람에게 돈만 많이 주면 열쇠를 잠시 빌릴 수 있습니다. 앞에서 짚은 것처럼 빌립보 교회에는 당시에 잘나가는 여성 기업가 루디아가 있었습니다. 그의 인맥도 넓었을 겁니다. 권력이 있는 사람을 시켜서 감옥 문을 열고 죄수들의 차꼬를 풀어놓게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미리 손을 써서 바울과 실라가 감옥으로 들어갈 때 이미 차꼬의 자물쇠를 슬쩍 열어놓고 감옥 문도 잠그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벤허>라는 영화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대의 대표적 가문에 속하는 유다 벤허는 친구의 모함으로 노예로 팔려 로마 함선에서 노 젓는 일을 했습니다. 전투가 벌어질 때 노예를 책임진 사람이 다른 노예들의 발에는 차꼬를 채웠지만, 벤허의 발에는 차꼬를 채우지 않았습니다. 함선이 침몰하면서 주인공만 살아났고 그가 함장을 구출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이와 비슷한 일을 빌립보 감옥에서 경험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기적이 일어났느냐 아니냐 하는 논쟁이 아니라 이 이야기의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기도와 찬송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혀서도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뜻하지 않게 감옥에 갇혔다면 실망할만하고, 더 나아가서 짜증이 날 수도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도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이라서 행복한 조건을 만나면 즐겁고, 불행한 일을 만나면 마음이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이 그들의 마음을 전하지 않기에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감옥에서의 바울과 실라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힘들었을 것이라 보는 게 맞습니다. 그들이 기도를 드리고 찬송가를 불렀다는 말은 자신들의 상황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무슨 기도를 드렸을까요? 현재 어려움을 당했지만, 하나님이 선하게 인도하실 것을 믿는다는 기도를 드렸을 겁니다. 무슨 찬송가를 불렀을까요? 시편에서 자주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자비로운 분이라는 사실을 노래했을 겁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거로 생각하는데, 저 역시 나이가 들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것이 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더욱 절감합니다. 저의 개인적인 인생 경험으로만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삶을 성찰하는 스승들에서 배운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 젊은 학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는 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려고 결심했습니다. 다행스럽게 그는 교수가 되었습니다. 학문적인 업적도 쌓았고, 나중에는 대학교 총장까지 되었습니다. 총장으로서 학교를 더 키워야겠다는 생각으로 노심초사합니다. 시간강사의 강사료를 절약해서 학교 발전 기금으로 사용합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성공한 인물로 인정하지만, 그의 영혼은 평화롭지 않습니다. 영혼의 평화가 없는 성공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여기 그 대학교에서 청소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복도와 화장실과 마당을 청소하면서 존재의 기쁨과 평화를 경험합니다. 진공청소기를 밀면서 먼지가 없어지는 걸 볼 때마다 희열을 느낍니다. 총장과 청소부 중에서 누구의 인생이 더 가치가 있을까요? 제가 지금 너무 극단적인 예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생각하면 그렇게 틀린 예가 아닙니다.

자신의 삶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라보고 받아들인다는 것이 멀게 느껴지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는 현재 우리의 일상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살벌하게 경험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서로 연결됩니다. 지금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만 보이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손에 잡히지 않고, 하나님을 실질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일상을 발등의 불처럼 경험합니다. 이런 악순환은 해결이 잘 안 됩니다.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해도 해방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아등바등하면서 열심히 세상을 살아도 여전히 불안하고 허무합니다. 지난 수요일 성경공부 시간에 주 없이 살 수 없네라는 제목의 찬송가 292장을 부르고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커피매니아들은 커피 없이 살지 못합니다. 커피 맛을 심층적으로 맛보았기에 그런 말을 합니다. 기독교인들도 커피매니아처럼 예수 매니아로 삽니다. 그래서 예수 없이 살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경험과 고백이 있을 때만 우리는 감옥 안에서 기도드리고 하나님을 찬송했던 바울과 실라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인생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자살하려던 간수를 뜯어말린 바울에게 간수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물었을 때 바울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에 기독교의 모든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말은 실로 엄청난 메시지입니다. 지금 바울의 이 말을 듣는 사람은 로마 공무원입니다. 그는 구원이 로마 제국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던 사람입니다. 그의 삶을 지배하던 로마 정치, 군사, 문학, 예술, 건축, 법은 당시에 온 세상을 지배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공무원 되는 걸 구원으로 여기는 것처럼 당시 젊은이들도 로마 공무원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가장 안정적인 삶이 보장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오늘의 젊은이들에게 대기업 사원이나 공무원이 아니라 예수 믿어야만 구원받는다는 말이 귀에 들릴까요? 미쳤다고 하거나, 아니면 비현실적인 소리라고 하겠지요.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는 말은 죽어서 우주 공간 어딘가에 있는 천당 간다는 뜻이 아니고, 예수의 신적인 능력으로 다른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삶의 조건에서 살아가자는 욕망도 아니고, 지옥에 떨어지는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 심리적 위로를 받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로마 제국이 이미 제공하는 것들이고, 바울이 빠져나온 유대교가 제공하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나름으로 매력이 있긴 합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세상과 생명을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본다는 의미입니다. 그 새로운 관점이란 예수의 운명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삶의 토대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간수에게 착한 사람이 되라거나 공부를 많이 하라고 말하지 않고 주 예수를 믿으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여기에 동의하십니까?

구원이라는 말이 너무 종교적으로 들리면 행복이라는 말로 바꿔도 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당연히 행복하고, 행복하지 못한 사람은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없으니까요.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한둘이 아닙니다. 장애나 불치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 그들을 간호하는 가족, 절대 빈곤에 떨어진 사람, 우연한 사고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불행합니다. 이런 어쩔 수 없는 불행한 운명은 서로 힘을 모아서 헤쳐나가야 합니다. 일반적으로는 남에게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불행의 가장 중요한 원인입니다. 사랑받으려고 애를 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은 절대적인 인정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않아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면 그는 행복할 겁니다.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관계를 맺는 대상이 너무나 많아서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궁극적인 대상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면 그 외의 대상에게서 인정받으려고 애쓸 필요는 없을 겁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에게서 인정받으려고 율법을 만들었고, 로마인들은 국가로부터의 인정받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율법이나 로마 체제로 행복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들이 인간 업적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우리의 딜레마입니다. 인간적인 업적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것만으로 행복하게 살지 못합니다. 오히려 불행하게 됩니다.

기독교 복음은 인간의 업적에 상관없이 오직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신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은혜의 관점으로 보는 삶의 태도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사실을, 즉 행복하다는 사실을 저는 옳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노력해서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게 분명한 것처럼 지금 우리의 생명도 우리의 노력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지금의 자리에 오른 것을 자랑하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세상의 논리에서만 보면 그런 주장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 주장을 붙들고 살고 싶으면 살아보십시오. 구원은 둘째 치고 행복하지도 않을 겁니다.

저의 설교에 수긍이 가기는 하지만 뭔가 깔끔하지 못하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만 다른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는 경험이 없거나 빈약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나 다니지 않는 사람의 행복 지수가 별로 다르지 않다는 말도 가능합니다. 저는 행복을 수치로 계산해서 다른 사람과 비교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인생은 각자 고유하기 때문입니다. 대학교 총장과 청소부는 각자의 인생이 있을 뿐이지 연봉이나 사회적 지위로 수치화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절정의 기쁨과 해방과 안식과 행복을 경험한 사람들이라는 게 중요합니다.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그 방향은 분명하게 인식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이라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고, 로마 간수를 향해서 대담하게 예수를 믿으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선포할 수 있었던 이유를 여러분은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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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은나라

June 05, 2019
*.201.106.34

믿음이란? 무엇인가 궁금해서 기독교 서적을 무진장 읽은거 같은데..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는 삶의 태도'가 목사님이 전하시고자 하는 믿음이군요..
내가 존재하게 된 모든것이 하나님 은혜뿐이라는걸 절대적으로 안다면..
이런 삶의 태도, 믿음은 자연스럽게 생겨날것 같아요.
이 믿음이 하나님 통치를 경험하는 것이고, 자유와 평화까지도 누린다는 것도 이제 다시 깨닫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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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06, 2019
*.182.156.135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과 세상을 볼 수 있다면

그는 이미 하나님을 참되게 믿을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이겠지요.

그런 관점이 쉽지 않겠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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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홍새로

June 07, 2019
*.151.83.22

예수님을 믿는다는것은
그전에는 너무도 익숙하여 알지 못했던
인간문명에 내재된 생존원리에 자동으로 종속 되어 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인것 같습니다.
생존을 지키려는 노력을 넘어
서열을 정하고 강요와 억압으로
지배를 하고자 하는 삶에서 방향을 돌려
그 어떤 삶이라도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전체의
한부분으로서 참여하는것 이란걸 알게되어
더이상 비교하지 않게 되어 누리는 평화일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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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07, 2019
*.182.156.135

문장을 자신이 소화할 수 없을 정도로 길게 쓰면 안 됩니다.

단어도 자기에게 소화된 걸 사용하는 게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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