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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능력, 부활의 능력 (사 65:17-25)

부활절 조회 수 5793 추천 수 0 2019.04.21 20:40:20
설교듣기 : https://youtu.be/6ikgURCI6t4 
설교보기 : http://afreecatv.com/nfermata 
성경본문 : 이사야 65:17-25 

창조의 능력, 부활의 능력

65:17-25, 부활 주일, 2019421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18.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19.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20.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어린이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 세에 죽는 자를 젊은이라 하겠고 백 세가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자이리라 21.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 안에 살겠고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22.그들이 건축한 데에 타인이 살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이 심은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내가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이며 23.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이 생산한 것이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들의 후손도 그들과 같을 것임이라 24.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25.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새 하늘과 새 땅

구약성경 이사야는 전체가 66장에 이르는 방대한 텍스트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65:17-25절은 거의 마지막 단락에 속한 말씀입니다. 고대 유대인만이 아니라 오늘의 독자들에게 대단한 힘이 전달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신구약성경의 모든 내용을 압축해놓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의 첫 구절인 17절은 그중에서도 압권에 해당됩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표현은 이사야 마지막 장인 사 66:22절에 다시 나옵니다. 신약성경 요한계시록 21:1절에도 그 표현이 나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말을 들으면 여러분은 어떤 것이 머리에 그려집니까? 죽어서 들어가게 될 천국을 떠올리는 분이 있을 겁니다. 럭셔리한 생활도구가 갖춰진 멋진 집과 풍성한 먹을거리 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칼 마르크스 같은 사람은 프롤레타리아가 지배하는 세상이라고 말하겠지요. 새 하늘과 새 땅은 전적으로 새로운 세상에 대한 메타포입니다.

이사야도 이와 비슷한 것을 꿈꿨습니다. 본문에서 그것은 세 가지로 제시되었습니다. 첫째, 새 하늘과 새 땅은 고통이 없는 세상입니다. 19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울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고통과 재앙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사야 시대 사람들은 바벨론 포로를 겪었습니다. 거기서 겪었던 눈물을 기억하면서 이사야는 지금 전혀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둘째, 모든 사람들이 천수를 누릴 것입니다. 20절 말씀입니다. “백 세에 죽는 자를 젊은이라 하겠고 백 세가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받은 자이리라.” 고대에는 천수를 누리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일찍 부모를 잃어 고아가 되거나 남편 잃어 미망인이 되거나 심지어는 자식을 먼저 보내는 부모들도 많았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이사야는 꿈을 꾸었습니다. 셋째, 노동으로부터 해방될 것입니다. 21절 이하에서 이사야는 땀 흘린 대가를 그대로 받는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새롭게 창조할 때 일어날 것이라고 이사야가 꿈꾸었던 세 가지 내용은 오늘 우리들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가 세상살이에서 기대하는 행복한 삶의 조건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런 세상에서 살고 싶고, 이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나름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이 대목의 결론인 25절에서 이 세 가지 삶의 조건들을 압축해서 묵시문학적인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그것은 지난 인류 역사에서 수많은 신학자와 사회개혁가와 예술가와 시인들에게 영감을 준 메시지였습니다. 이사야 11:6절 이하에도 나왔던 내용입니다. 제가 읽을 테니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이 구절에서 여러분의 영혼이 정화된다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여기에 등장하는 이리와 사자와 뱀은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 포식자입니다. 이들이 더 이상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 방식이 아니라 초식동물처럼 살게 될 것이라고 이사야의 노래는 사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사야도 당연히 압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가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그의 갈망이 강렬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하는 포식자들은 실제 동물들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약한 나라를 힘으로 억압하는 제국이나 힘이 없는 사람들을 권력으로 능욕하는 특권층을 가리킵니다. 이런 횡포는 오늘날의 국제질서나 사회 안에서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능력에 기대서 이사야는 제국과 특권층이 더 이상 자신들의 악한 힘을 행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로 인해서 인류 역사는 새로워집니다. 저도 이사야와 같은 영적인 통찰력과 믿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전 것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철저하게 신뢰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삶의 태도는 이전 것에 미련을 두거나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이 이를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이런 말씀이 오해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신앙은 기본적으로 하나님 구원 행위에 대한 기억이고, 회상입니다. 유대인들은 출애굽 사건을 반복해서 기억하고 이야기하면서 유월절 의식을 통해서 전승시켜야만 했습니다. 기독교의 성찬식도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에 대한 기억입니다. 이전 것은 기억되지 않을 것이라는 이사야의 발언은 하나님의 창조 능력에 사로잡혀서 이전의 세상 원리들을, 즉 세상의 권력과 재물에 좌우되지 않을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전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입니다. 극단적인 예를 든다면 죽음이 바로 코앞으로 닥쳐온 사람의 경우와 비슷합니다. 그에는 국회의원이 된다거나 벼락부자가 되는 것은 모두 기억할 필요가 없는 이전 것에 불과합니다.

이전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복음의 관점에서 경험한 대표적인 인물은 바울입니다. 고후 5:17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그 이전에 추구하던 것들은 지나간 것입니다. 바울에게 이전 것은 당시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던 것들입니다. 로마 시민권, 가말리엘 문하생, 바리새인, 율법을 잘 지키는 삶 등등입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 뒤에 이런 것들은 그에게 가치 있는 것으로 다가오지 못했습니다. 철이 나서 어린아이 시절의 소꿉놀이에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거와 같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이런 고백을 익히 들어서 알지만 실제로 이런 신앙의 깊이에서 살지는 못합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것이 되었다는 사실이 별로 진지하고 확실하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좋거나 나쁘나 간에 이전 것에 매달려서 세상을 삽니다. 부부싸움을 할 때도 당신 옛날에 무슨 잘못을 했잖아, 하고 공격합니다. 그 이전 것들이 한편으로는 우리를 매료시키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화제는 다 거기에 놓여 있습니다. 이전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새로운 생명, 부활

오늘은 세계의 모든 교회가 가장 중요한 교회절기로 지키는 부활절입니다. 부활 신앙, 즉 예수님이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셨다는 신앙고백은 기독교의 초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말할 때 자칫 두 가지 극단적인 태도가 나타납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산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고 부정하거나, 또는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아임에 틀림없다고 문자적으로 믿는 겁니다. 부활에 대한 가장 자세한 기록은 고전 15장입니다. 바울은 22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 바로 부활의 요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죽었다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살아난 것처럼 접근하는 것은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면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났어야만 하고, 지금도 어딘가 살아계셔야 합니다. 승천하셨다면 우주 공간에서 예수님이 지금 살아계신 곳을 찾아봐야 합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말은 제자들에게 시원적이고 궁극적인 생명으로 경험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경험이 강렬했기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이후 제각각 뿔뿔이 흩어졌다가 다시 예루살렘에 모여들어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생명 경험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을 얻으셨습니까? 여기서 예수님을 통해서라는 표현을 빼도 말이 됩니다. 여러분은 생명을 얻으셨습니까? 이 질문은 기독교인들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다 해당됩니다. 불교 방식으로 이 말을 바꾸면 여러분은 해탈 하셨나, 하는 질문이 됩니다. 생명을 얻었느냐 하는 질문이 어떤 이들에게는 무의미한 것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생명이 당연히 주어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실제로 살아있습니까? 저는 늘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나는 지금 실제로 살아있는 걸까? 그걸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앞으로 100년 후에는 살아있을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지금 살아있다는 게 확실하지 않다는 말은 여기서 하지 않겠습니다. 일단 지금 여기서 숨 쉬고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여러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살아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경험과 느낌이 이 세상에서 실제로 살아있는 것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이들은 죽지 못해서 산다고 말합니다. 실제적으로 삶이 피곤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극심한 우울증에 빠진 이들은 살아있다고는 하지만 생명 충만한 삶은 아닙니다. 생명 충만감은 영혼의 안식입니다. 현대인들은 대체로 영혼의 안식 없이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영혼의 안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어딘가 매달리거나 무엇으로부터 쫓기듯이 살아갑니다. 겉으로는 원만하게 인생을 보내는 것 같지만 자기에 대한 염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잘나가지만 안하무인의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이 생명을 얻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지옥에서의 삶을 생명이라고 말할 수 없는 거와 같습니다. 생명 충만감으로, 또는 영혼의 안식을 누리면서 살지 못하는 이유를 가리켜서 성경은 죄와 죽음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죽기 전까지는 여전히 죄와 죽음의 영향을 받습니다. 무언가를 성취함으로써 만족감을 얻으려고 하는 데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행복의 조건을 채우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무한정으로 투자합니다. 그 조건이 자신의 삶을 완성시켜주지 않는대도 불구하고,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거기에 묶여 있습니다. 그게 바로 죄와 죽음의 세력입니다.

 

새로운 생명, 자유

앞에서 인용한 오늘의 제3독서인 고전 15:22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예수를 살아있는 자로 경험한 사람에게 생명이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이게 말이 될까요? 살아있다는 말은 죄와 죽음의 반대입니다.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 바로 생명을 얻는 것이며,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의 삶을 완성시켜야 한다는 세상이 요구에 굴복당하지 않습니다. 그런 삶을 가리켜 바울은 종으로부터 아들로의 변화된 삶이라고 했습니다. 4:7절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종에게는 의무가 주어지나 아들에게는 자유가 주어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죽음에 머물러 있는 자가 아니라 다시 살아난 자로, 즉 지금 살아있는 자로 경험하고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통해서 우리가 아들의 자유를 얻었다는 뜻입니다.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는 아들로서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인생을 자기 마음먹은 대로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겉으로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 같은 사람들이 오히려 종처럼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에게 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처형당한 자가 생명을 얻었다는 사실에서 더 이상 저주스러운 운명에 떨어질까 전전긍긍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 여기서 중요합니다. 그게 부활 신앙이며, 부활 능력입니다.

그런 기독교의 가르침은 신앙적으로 위로가 될 뿐이지 실제로 고통과 시련에 떨어진 인생들에게는 아무런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불행한 조건들을 나열해보십시오. 아무리 노력해도 정규직이 되지 못하는 비정규직원, 지진이나 화재로 재산의 손해를 본 사람, 큰 병에 걸린 사람, 장애를 갖고 태어난 사람, 난민, 호스피스 환자 등등,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주변에는 저주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 널려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도 과연 부활의 능력에 사로잡혀서 종이 아니라 아들의 자유로 인생을 살아낼 수 있을까요? 대답이 쉽지 않기는 합니다.

아들의 자유는 남에게 굳이 인정받지 않아도 이미 삶의 충만을, 그리고 존재 의미를 누리는 것입니다.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남에게 계속 인정받아야 한다는 강박에 놓인다면 그는 아들의 자유를 얻지 못한 사람입니다. 극단적인 예를 드는 걸 이해해주십시오. 어제는 장애인의 날이었습니다. 가끔 휠체어에 의지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장애인 남녀가 결혼하는 소식을 듣습니다. 스타 연예인 부부와 비교하면 장애인 부부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장애인 부부가 남의 시선에서 자유롭다면 그들은 종이 아니라 아들이며, 연예인 부부가 남의 시선에 좌우된다면 그들은 종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고 믿는 사람들은, 즉 예수에게 궁극적인 생명을 발견한 사람들은 인정받아야 한다는 요구로부터 해방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말이 그렇지 실제로는 독불장군이 아닌 한 남에게 인정받는 삶에서 벗어나기는 불가능하다고, 그래서 인정받는 즐거움으로 인생을 사는 거라는 생각이 일반적일지 모르겠습니다. 이전 것에 안주하고, 거기서 만족해하는 삶에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거기에 길들여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종의 의무가 아니라 아들의 자유 안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신약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최선의 길은 예수를 살아있는 자로, 즉 부활한 자로, 생명의 근원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새 하늘과 새 하늘을 창조하실 하나님의 창조 능력에 눈을 뜨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반복해서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를 믿으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에게, 그의 가르침과 그의 운명에 더 가까이 가보십시오. 이전 것이 기억되지 않을 정도로 새로운 삶의 차원이 열릴 것입니다.


profile

[레벨:18]부스러기은혜

April 23, 2019
*.229.148.165

부활을 고작 물리적인 환생 차원의 인식범주에서  한걸음도 더 들어가지 못한채,

J의 육체적 부활을 믿어 구원에 이른다는 구원교리와 종교적인 수사에 갇혀

요란한 연례행사로 부활절을 치루고 있는 우리에게 문득 은퇴한 어느 노목사님의 저서가 떠오르는군요

'부활되어야할 부활' (강일상)에서 저자는
고린도전서 15장 13절을 이렇게 해석하셨더군요

이전까지의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으로 살아가는것
매일 죽노라.. 바울의 심경대로,
죽어있던 내가 날마다 죽고 날마다 새로운 삶을 선택하는,

곧 나의 부활이 진정한 J의 부활이다...

이말을 뒤집어본다면
나의 부활이 없으면 J의 부활도 없다는 의미겠지요?
이번주 설교 말씀이
이 저자의 주장과 맥을 같이한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또 부활절 설교 제목을 보는 순간  ' 왜 "창조의 능력"이 부활의 능력과 같이 들어가 있는 것일까?'
의구심을 가졌었지요.
불가해한 고난 앞에서 욥이 하나님의 창조능력을 인식하고서야 새로운 영적인 세계로의 눈이 비로소 뜨인것처럼
근간의 일련의 설교들 (창조주 여호와, 흑암과 두려움 가운데서, 백척간두의 실존)에서

그분의 창조능력에 휩싸이지 않고는

그 분의 구원 약속이 오늘 우리의 실존속에서 능력으로 자리할수 없다는 말씀을 통해서
창조능력의 경험 없이는

죄와 죽음로부터의 해방이나 J를 통한 생명경험, 부활, 영혼의 안식...등이 공허한 종교적 수사에 그치겠구나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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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23, 2019
*.182.156.135

부스러기 님이 제 설교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계시고,

기독교 영성 안으로 점점 더 밀려들어가는 게 보입니다.

앞으로 '아, 그거였구나.'하는 순간이 올 겁니다.

그 다음에는 더 가봐야겠네, 하는 느낌도 강력하게 들겠지요.

기독교의 모든 신앙은 창조와 부활로 수렴된다는 걸

이미 느끼고 계실 겁니다.

다른 교리도 마찬가지이지만

창조와 부활은 종교적 레토릭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와 실존과 리얼리티에

두루, 그리고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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