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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의 하나님 (출 12:1-14)

창조절 조회 수 13353 추천 수 0 2011.09.05 00: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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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출애굽기 12:1-14 

심판의 하나님

출애굽기 12:1-14, 창조절 첫째 주일, 2011년 9월4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가장 중요한 종교의식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행위입니다. 그러나 제사는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일정한 장소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없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종교의식은 유월절 의식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구나 유월절을 맞을 때마다 장소에 상관없이 이 의식을 행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이 의식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의식을 행하면서 빵을 자신의 몸이고, 포도주를 자신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한걸음 더 나가서 유월절에 잡는 어린양이 영적인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라고 보았습니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를 이어주는 대목이 바로 이 유월절 의식입니다.

 

     유목생활과 출애굽

     유월절 의식의 역사적 배경은 출애굽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4백년 가까이 소수민족으로 살았습니다. 이들의 꿈은 애굽을 나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 후손에게 약속으로 주신 땅입니다. 일단 애굽에서 빠져나오는 게 관건인데, 이것도 만만한 게 아닙니다. 모세는 애굽의 바로와 담판을 짓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순순히 내보내라고 요구했습니다. 바로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척 하다가 무시합니다. 하나님은 바로의 애굽에 9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물이 피가 된다거나, 개구리 떼나 메뚜기 떼가 몰려오고, 또는 흑암이 덮이기도 했습니다. 바로는 모세의 요구를 끝내 거절합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재앙을 준비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대로 애굽의 모든 장자와 가축의 맏배가 죽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마지막 재앙이 내린 후에야 바로는 모세의 요구를 받아들입니다.

     마지막 재앙이 내리기 직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행해야 할 의식이 바로 유월절 의식입니다. 오늘 제1독서인 출 12:1-14절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유월절(逾越節)은 ‘지나갔다.’(pass over)는 뜻입니다. 죽음의 천사가 애굽 집만 치고 이스라엘 집은 피해갔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한 해의 첫 달인 니산 월 열흘에 어린 양을 잡아야 합니다. 양을 죽이지는 않고 선택하기만 하는 겁니다. 식구가 적어서 한 마리를 다 먹을 수 없으면 이웃과 같이 잡아도 됩니다. 4일 뒤인 열 나흗날 저녁때 양을 죽입니다. 피를 집 문설주와 인방에 바릅니다. 피를 바른 이유는 죽음의 재앙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양고기를 구워서 무교병과 쓴 나물과 겸해서 먹습니다. 먹을 때는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하게 서둘러야 합니다. 출애굽기 기자는 이 유월절 의식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출 12:14)

     이 유월절 의식은 이스라엘의 두 가지 전승이 결합된 것입니다. 하나는 유목민 전승입니다. 이스라엘은 원래 양을 주업으로 하는 유목민이었습니다. 유목민은 풀과 물을 찾아 떠돌아다닙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그렇게 살았고, 애굽에 가서도 고센 땅에서 그런 방식으로 살았고, 출애굽 후 광야 40년 역시 유목생활이었습니다.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농경생활을 시작했지만 이들의 삶과 신앙의 뿌리는 유목민의 경험입니다. 그게 바로 유월절 의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유목민들의 삶은 양에게 절대적으로 의존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양을 자신들의 운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양으로부터 젖을 얻고, 고기를 얻고, 털과 가죽을 얻습니다. 지금도 몽고나 근동의 유목민들은 그렇게 삽니다. 이들은 특별한 절기나 귀한 손님이 왔을 때 양을 잡습니다. 양을 잡을 때 특별한 의식을 거행합니다. 가능한대로 양의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식으로 양을 잡고, 살점 하나,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정도로 처리합니다. 그들의 양 도살 행위는 거룩한 종교의식과 다를 게 없습니다. 유월절 의식은 바로 이런 유목민의 전통에서 나온 겁니다. 다른 하나는 정치적인 사건으로, 앞에서 언급한 출애굽입니다. 출애굽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는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한 사건이 출애굽입니다. 민족적인 정체성과 종교적인 정체성을 가능하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유월절 의식에서 유목민 전승의 의미는 줄어들고 출애굽 전승의 의미가 강화되었습니다. 구약이 기록될 때는 순전히 출애굽 전승만 남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 이상 유목민으로만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은 한민족이 추석이나 설날에 함께 모여 떡과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듯이 매년 니산 월 14일 저녁이 되면 양과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그것을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앞으로도 이스라엘 민족이 인류 역사에 살아남는 한 이 의식은 계속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이스라엘이 유월절 의식을 여호와의 명령으로 받아들인 이유는 거기서 구원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재앙이 이스라엘을 피해갔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억압하던 애굽이 초토화되었다는 경험입니다. 애굽의 모든 처음 난 것이 다 죽었습니다. 조금 의아스럽게 생각되나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그렇게 잔인하게 행동할 수 있나 하는 질문은 여기서 무의미합니다. 고대인들에게 떼죽음은 공포 그 자체입니다. 가축들도 전염병으로 죽고 사람들도 그렇게 죽기도 했습니다. 과학이 엄청나게 발전한 지금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는데, 고대 시대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일어났던 떼죽음의 공포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건을 출애굽과 연결해서 해석한 것입니다. 역사에 대한 해석이 바로 구약성경입니다. 이스라엘은 역사경험과 그 해석을 통해서 하나님이 ‘애굽의 모든 신을 심판하리라.’는 신앙고백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애굽의 모든 신은 애굽의 우상을 말하기도 하고, 신격화된 바로와 애굽의 모든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를 가리킵니다.

     이런 신앙고백은 쉬운 게 아닙니다. 주제 파악을 못하는 사람이군, 하는 조롱을 받기 맞춤합니다. 당시 애굽과 이스라엘을 비교해보십시오. 바로로 대표되는 애굽은 당대 최고의 군사력과 경제력과 문명을 자랑하던 제국입니다.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는 애굽 문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애굽은 정말 강한 나라였습니다. 나일강 유역의 비옥한 토지는 문명의 물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신학적으로 중추 역할을 했던 이들 중에 애굽의 알렉산드리아 학파 출신이 많습니다. 그들은 출애굽 후 광야생활에서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애굽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정도로 애굽은 매력적인 나라였다는 뜻입니다. 이에 반해서 이스라엘은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나라입니다. 나라라고도 부를 수도 없습니다. 애굽에 빌붙어 사는 소수민족에 불과했습니다. 바로의 말 한 마디에 그들은 대형 토목공사 현장에 값싼 노동자로 끌려오거나 치안이 불안해지면 추방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객관적인 상황만 놓고 본다면 여호와께서 애굽의 모든 신을 심판한다는 말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요즘 미국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큰소리치는, 일부일지 모르겠으나, 북한 사람들의 말과 비슷합니다.

     이스라엘은 왜 말도 되지 않는 말을 한 것일까요?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큰 소리를 칠 수 있었을까요? 기도의 응답을 받은 것일까요? 계시를 받은 것일까요? 자신들의 신세가 너무 어려우니까 값싼 위로나 받으려고 그런 말을 내뱉은 것일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출애굽기를 잘못 읽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애굽의 모든 신을 심판한다는 말은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특히 이스라엘 신학자들의 고유한 역사관에서 나온 겁니다. 그들은 다른 제국들의 역사학자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역사의 진행을 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군사력과 경제력과 문명이 세상을 끌어가는 힘이라고 보았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는 유일한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사람의 예상대로 세상을 통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우연한 진행으로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아무리 강력한 제국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영원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제국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를 기록한 구약의 신학자들은 그 사실을 명확하게 뚫어보았기 때문에 아주 어려운 처지에 빠져 있으면서도 여호와께서 애굽의 신을 심판하시고, 그리고 자신들을 죽음의 공포로부터 지키신다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자기신성화

     하나님이 왜 애굽의 신을 심판하신다는 걸까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이고 애굽은 이방이기 때문이라고 보면 정확한 게 아닙니다. 구약성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할 때도 많았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로 제한해서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자기를 절대화하는 권력과 문명을 심판하십니다. 자기를 절대화하는, 즉 자기를 신성화하는 권력과 문명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이미 신(神)입니다. 자기가 만든 것들을 신적인 능력으로 경험합니다. 애굽의 바로는 당시에 신이었습니다. 그는 불사의 존재여야만 했습니다. 죽은 바로가 피라미드 지하 무덤의 세계에서 영원히 살아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미라로 처리한 바로의 시체를 넣었습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살아있는 사람도 함께 매장했습니다. 순장(殉葬) 풍습은 고대 중국에서도 있었습니다. 자기를 절대화하는 집단이나 개인은 다른 이들을 억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폭력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교양 있게 나타나기도 하는데, 그 중심에는 자기 이외의 대상을 타자로 보는 시선이 자리합니다.

     오늘 ‘애굽의 모든 신’은 무엇일까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타종교를 생각합니다. 인터콥이라는 단체는 땅밟기 등등, 온갖 이벤트를 통해서 타종교에 대한 적대감을 부각시킵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애굽의 모든 신은 모든 문명 가운데 자리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이미 암시되었지만 자기를 절대화하는, 자기를 신성화하는 문명이 바로 그것입니다. 현대인의 삶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정치, 경제의 권력이 그걸 자랑합니다. 경쟁 만능주의가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청소년들은 삶과 세상과 역사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당장 남보다 더 좋은 조건의 취업만이 궁극적인 관심이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친구나 이웃이 모두 경쟁해야 할 타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게 하나님이 심판하실 애굽의 신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은 둘째 치고 교회가 바로 심판의 대상이 아닐지 염려스럽습니다. 교회가 얼마나 교만한지 모릅니다. 지금 일부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기독교 당을 만들겠다고 나섭니다. 친미, 반공주의를 실천할 당을 만들겠다는 겁니다. 30% 이상 되는 미자립교회과 동일한 공동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은 채 수천억 원이 드는 교회당을 건축하는 부자 교회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하나님이 심판하실 ‘애굽의 모든 신들’입니다. 속성이 똑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자기를 절대화하는 애굽의 모든 신들을 고유한 능력으로 심판하는 분이십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던 예수님의 십자가를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보았습니다.(고전 1:23, 24) 거기서 참된 심판과 구원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자기를 신성화하는 길로 나가는지, 아니면 십자가가 말하는 자기 부정의 길로 나가는지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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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그새

September 07, 2011
*.230.133.110

참 오랜만에 다비아에 들렀습니다. 목사님 목소리도 들을 겸 9/5자 mms://wm-001.cafe24.com/dbia/2011/dawp_0004.mp3 '설교듣기'를 클릭했더니, WMP에서 '파일을 재생할 수 없습니다. Windows Media Player에서 해당 파일 형식을 지원하지 않거나 파일을 압축하는 데 사용된 코덱을 지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로 나오고, KMPlayer에서 URL 열기로 해봤더니, 'FileName : //wm-001.cafe24.com/dbia/2011/dawp_0004.mp3
Data : File does not exist!' 파일이 없다고 나옵니다. 뭔가가 잘못되었나 봅니다.
조회수 460이나 되는데, 설교듣기는 잘 안하시거나, 오류가 있어도 그냥 넘어가시나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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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2]자유의꿈

September 07, 2011
*.31.139.28

파일명이 잘못되어 있네요. 수정해 놓았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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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07, 2011
*.185.31.7

그럼 내가 잘못 올렸나보네요.

이상하네요.

올린 즉시 확인했을 때는 됐는데...

어쨌든 그새 님 덕분에 오류를 잡았습니다.

자유 님도 수고하셨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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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삐쭉이

September 07, 2011
*.182.131.202

보이는 세상에서는 이세상의 법위에 하나님의 법이 통치하고 있음을 보는것이 과연 어렵습니다. 교회에서 조차도 이두개의 법을 구분하고 있지 않습니다. 정말 아슬아슬합니다. 오히려 세상의 방식으로 우뚝서고자하는것 같아요. 예수그리스도의 방식이 이세상이 통하는지 솔직히 지금 저자신도 확신할수없습니다. 성서기자의 확신을 성서를 보는 독자가 경험할수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지는 것이 생명을 얻는 것이 죽는것이 사는것이라는 지시를 그리스도인인 저자신도 반신반의하고 있으니까요.

보이는 세상에서 보이지않는 하나님을 볼수있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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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07, 2011
*.185.31.7

삐쭉이 님,

지금 경험하는 혼란은

영혼이 아직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영혼이 병들면 혼란도 없고

고민도 없고 아픔도 없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방식으로 작동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대개 알고 있을 겁니다.

문제는 다른 길을 모르기 때문에 거기에 안주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 불이 되어 

우리의 영혼 전체를 태우도록 기도하고,

그쪽으로 정진하는 게 최선이겠지요.

주님의 평화가 삐쭉이 님에게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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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푸른별

September 09, 2011
*.237.77.176

항상 다비안을 통해 위로와 힘을 얻습니다.

살아갈수록 뭐가뭔지 구분이 되지 않고, 뭘좀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것이 점점더 부끄러워집니다. 사회생활이나 신앙세계도 매한가지입니다. 뭘 붑잡아야 할지, 뭘 놓아야 할지... 차라리 이참에 모든 것을 놓고, 그저 구름처럼, 바람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책임을 망각할 수 없는 형편인지라.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교회에 가도, 답답함 뿐이고, 세상의 뿌리깊은 악과 싸우려고 해도 악의 실체만 더 뚜렷하고 크게 보일뿐, 기진맥진해 있는 자신을 보며 한숨만 짓습니다.

목사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십자가의 길이라 하셨는가요. 저는 차라리 자신을 긍정하고 자신의 욕망을 솔직히 드러내도록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과 믿음과 사랑이란 언표로 자신의 욕망을 포장하여 자기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현혹하고, 현실(정치사회적)에 대해 무관심하게 하여 권력을 오용하는 권력통치자들에게 휘둘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부정하라는 말씀이  역설적으로 들립니다. 

저는 더욱더 현실적으로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합니다. 이러한 리얼리티에 대한 관심은 그리스도 예수보다 역사적 예수의 관심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목사님 건강하십시오. 이 시대에 님이 참 소중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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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09, 2011
*.185.31.7

푸른별 님,

자신을 부정하고 십자가를 진다는 말에 약간의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자학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세상과의 충돌을 피하는 것과도 다른 이야기입니다.

자기 정체성의 확립을 거부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부정과 십자가를 진다는 말이

오늘 한국교회에서 크게 왜곡되었습니다.

본회퍼를 아시나요?

그는 값싼 은혜에 대해서 비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실제로 그의 삶을 뒤따르는 것이라고 했어요.

이런 신앙에서 그는 시대의 사이비 메시아였던 히틀러를 대항했습니다.

푸른별 님이 앞부분에서 설명한 '뭘 모르겠다.'는 이야기는 중요한 겁니다.

일단 그런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사실은 죽을 때까지 그걸 완전히 벗어나기는 힘들지만

어떤 세계가 천천히 드러나는 단계가 올 겁니다.

그 과정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은

다시 옛날 습관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길을 잘 가보세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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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푸른별

September 10, 2011
*.237.77.176

자기부정과 십자가?

참 어렵습니다. 십자가를 자기고난으로 봐도 되는지요.

저는 최근 작업장에서 일하다가 손이 잘리고 팔이 잘려나간 산재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일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생존수단인 그 고마운 기계로 부터 엄청난 상처를 받고, 다니던 회사에서 쫒겨나 몇푼 안되는 보상금을 받고 , 일용직이 되어 그곳에 다시 일하지 않으면 처자식이 살아갈 길이 없는 사람들, 그들은 자신의 절망을 울음으로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몬느 베이유가 " 우리를 불행으로 끌어들이는 자신의 고난에 대항하기 보다는 차라리  고난을 은총의 도구로 이용하라'는 말을 어떻게 그들과 나눌 수 있을까요. 차라리 니이체 처럼 당신이 당하는 고난을 뚫고 당당히 자신의 천형같은 운명에 적극 맞서라는 주문을 하고 싶습니다. 물론, 성서는 예수님처럼 그 십자가(고난)를 통해 희망을 발견하고 그 어두운 현실에서도 자신과 자신의 삶을 부정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죠.

본회퍼를 얘기하셨나요. 전 그분의 생각과 삶을 본받으려고 했지만,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습니다. 전, 본회퍼나 간디나, 베이유가 될 수 없고 흉내내기도 벅찹니다.  아직 많지는 않치만, 이 나이가 되도록 그런분을 흉내내려고 한 것이 부끄러워 어찌할바를 모르겠습니다. 전, 그저  저 자신일 뿐입니다.

목사님의 자기부정과 십자가에 대해 다른 이견이 없습니다. 다만, 저의 실존적 고민일뿐입니다.

살아갈 수록 어떤 틀에 매여(하나님, 미션 등) 살고  싶지 않고, 좀 자유롭게 살고 싶은 생각이 요즘 저의 삶을 지배합니다.  "들의 백합을 보라.  하늘을 나는 새들을 보라."  이번 추석은 어릴때 자주 걸었던 고향녁을 걸으며 그 시절을 떠올려 볼 생각입니다. 그때 나는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고 싶었는지를...  

 

 목사님, 팔월 한가위 가족들과 좋은 시간 많이 가지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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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11, 2011
*.185.31.7

예, 푸른별 님,

복음은 우리의 삶을 속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해방이고 자유이고,

투쟁이고 참여입니다.

다시 본회퍼 이야기에요.

<순종과 항거>라는 책이 있어요.

그리스도에게 순종할 때만

세상의 악에 항거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영성의 대가들처럼  따라서 살지 못하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일단 방향을 잡고 천천히 가면 됩니다.

즐거운 추석을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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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한상복

September 10, 2011
*.106.184.57

자기비움의 영성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때로는 자기비움이 희생이라는 자기신성화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자크 엘룰이 그랬던가요?

그리스도인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만족하지 못하고

신성화된 기독교를 원한다는...

오직 신성한 것만이 사람을 안심시키며 경외감을 주기 때문이겠지요.

물론 교수님께서 말한 신성화와 엘룰이 말한 신성화는 차이가 있지만,

종교적이든 정치적이든 권력지향적이라는 면에서 같은 맥락이라고 봅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신성화된 이 정부에, 교회에, 그리고 나 자신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를...

감히 두려움도 모르고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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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11, 2011
*.185.31.7

한상복 목사님,

반가워요.

자기비움과 자기신성화는 설명이 더 필요하군요.

자기비움은 단순히 비움이 아니라 오히려 채움이지요.

사람은 억지로 비우지 못하거든요.

채움과 비움의 변증법적 긴장이라고 하는 게 좋겠네요.

젊은 목회자들이 목회하기 힘든 세월이지만

힘을 내고 잘 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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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September 18, 2011
*.220.104.49

우월감, 신격화, 힘, 능력,복,기원.. 

울산은 바닷가쪽으로 공단을 확장하다보니 섬들이 육지가 되는 곳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공장이 들어서서 그곳을 가보면 그 섬에 살던 사람들이 빌던 덩치큰 고목이 철망으로 둘러 싸여 보존이 되어있습니다. 심지어는 주민의 반대로 도로 가운데에도 삼신할매에게 빌던 나무가 서 있습니다. 섬과 도로가운데 나무주변에 살던 사람들은 더 이상 빌지도 않습니다.

나무 밑에 놓았던 물한 그릇대신 헌금내고, 고목이 십자가로 바뀌었습니다. 삼신할매가 예수로 바뀌어서 힘을 달라고 찬양하고 빌고 있습니다.

 힘을 달라고 비는 모습은 별반 달라 진것이 없어 보입니다.  제가 가장 지금도 힘들게 잊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힘의 존재와 분배입니다. 쉽게 얻을 수도 있고  집중될 수 도 있고 왜곡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정말 고통과 맞 바꿔야만 얻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힘이 힘을 누르는 현실이 입니다. 힘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그 은혜를 경쟁과 신이 되려는 계단으로 쓰고 있습니다.

힘은 덩치와 직결되는 예가 흔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 운동장에 새워진 벽을 향해 축구공을 힘껏 차보면 튀어나옵니다. 그러나 선생님들께는 미안한 말씀이지만 교실건물 벽에 대고 차면 반발력이 세워진 벽에서 튀어나오는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맛을 알 수 있습니다.

 공자님께서도 지방분권, 봉건제도를 말씀하신 이유도 힘의 집중의 폐해를 예견한 것은 아닐까요?

어쨌든 머리는 보통사람과 크기가 비슷한데 목 밑으로가 비대해서 씩씩대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이 납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큰 교회당이 있다해도 맨 앞, 맨 위에 누군가가 올라가는 자리눈 의자 놓이는 면적보다 크지 않다는 사실.

힘과 비난을 세탁한 큰 이데올로기가 커질수록...     너, 우상의 격식을 갖추고 하나님의 손길에서 멀어져  따끈한 쇠의자에 앉게 된다.- (너, 특정인이 아닙니다. 나 입니다.)  

힘보다는 , 가벼움을

신(神)보다는 , 푸른가지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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